옛날의 화장품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었으며, 또 어떠한 원료로 제조되었는지 살펴보자.
쌀과 보기가 주원료인 분백분
원시적인 분의 형태로서 오랫동안 사용된 백분은 분꽃의 열매를 곱게 빻은 것이나, 그전에는 칡가루․백토․황토․적토․고령토 등을 흙이나 돌가루(활석)를 가공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분(粉)의 글자가 ‘쌀(미:米)’의 ‘가루(분:分)’였음에서 알 수 있듯이 주로 쌀과 서속의 가루를 3대2로 배합하여 사용하였다. 이러한 천연의 분은 부착력이 낮은 결점을 가지고 있어 이를 보안하기 위해 납 성분이 가미되었다. 연분은 반에 식초 기운을 씌워 만들었다. 즉 밑없는 말 통에 대고지로 밑을 얽어매고 얇은 납 조각을 넣은 뒤 진흙으로 만든다. 솥뚜껑을 뒤집어 식초를 넣고 그 납통을 얹은 후 보름 이상 숯불을 땐다. 이렇게 하면 납조각이 작아지면서 곁에 하얀 가루가 돋아나는데 이 하얀 가루인 납꽃을 물이나 기름에 잘 개면 부착력이 뛰어난 분이 된다. 하지만 이처럼 납성분이 함유된 분은 부착력이 우수한 반면, 납독 즉 화장품에 의한 부작용인 화장독을 유발했다.
그 이전의 사람들은 분발 색분인 산단(山丹)이라는 것을 사용했었다고 한다. 산단은 꽃이 붉은 백합의 꽃술을 따서 말려 누에고치 집에 묻혀 여인들이 볼에 토닥거리던 것을 말하는데, 지금의 화운데이션․콤팩트․크림 메이크업 등 모두가 이 백분 에서 진화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밑화장에 사용했던 꿀 찌꺼기
읍루인들이 피부에 부드러움을 주기 위해 돼지기름을 사용했다고는 하지만 요즘의 크림과 흡사한 예는 드물다. 다만 팥 또는 녹두를 더운물에 비빈 거품으로 얼굴을 씻었으며, 꿀 찌꺼기(밀납)를 밑화장에 사용했고, 또 이를 얼굴에 골고루 펴서 영양을 흡수시킨 뒤 떼어내기도 했다. 또 복숭아꽃을 찧어 발라서 여드름을 치료하였으며, 콩․팥․면화․능수자의 꽃을 함께 섞어 바르거나 계란 노른자와 살구 씨를 으깨어 기미를 예방하기도 하였다 한다.
화장품 원료 제조에 쓰인 기름류
여러 가지 동물과 식물의 기름이 예로부터 화장품이나 그 원료로 사용되었는데 수유․동백․아주까리 기름은 그 자체가 바로 머릿기름이었으며, 참깨․살구 씨․목화씨․쌀․보리의 기름은 여러 화장품 원료의 용해 및 제조에 쓰였다. 예를 들면 연지․눈썹 먹을 기름에 개어 사용했으며 얼굴 마사지용 기름은 따로 있었다 한다. 하지만 예로부터 머릿결을 검고 윤기 나게 가꾸는데 주력했으므로, 거의가 머릿기름이었다. 이 기름들은 햇빛이나 온도 변화에 민감했기 때문에 삼국시대부터 토기 및 도자기류의 기름병이 기름의 종류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그을음으로 만든 눈썹
먹 눈썹은 그리기에 따라 얼굴이 판이하게 달라지므로 오랜 옛날부터 화장의 중심이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시어머니의 눈총이 무서운 며느리가 부엌에서 버드나무가지 재로 눈썹을 그렸다고 한다. 굴참나무․너도밤나무의 목탄도 사용했고, 심에서 나오는 유연(油煙: 기름 연기)을 받아 평자 씨 기름을 개어서도 썼다. 그리고 목화의 자색 꽃을 태운 재를 유연에 묻혀 참기름에 이기기도 하고, 보리깜부기를 솔잎 태운 유연과 함께 개어 만들기도 했다. 이것이 소위 요즘의 아이펜슬이다. 눈썹 먹(眉黑)을 처음에는 조금 붉은 기가 있는 검푸른 흙을 사용하다가 차츰 송연먹, 즉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으로 만든 숯먹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을 반죽먹이라고도 불렀다. 달개비 꽃잎을 태운 먹을 호마유로 갠 후 유연․홍(紅)․금가루를 넣고 솔로 눈썹을 그렸다. 먹을 만들 때에는 여름과 겨울철을 피하는 것이 좋다. 더울 때는 썩기 때문에 냄새가 나고 추울 때는 말리기가 어려우며, 바람 부는 날에 말리면 부스러지기가 쉽기 때문이다. 먹은 순수한 그을음을 흠뻑 찧은 다음에 아주 가는 체로 쳐서 아교풀로 개어 반죽하여 물푸레 나무껍질 속에 담근다. 그것을 계란 노른자를 뺀 흰자와 따로 갈은 주홍과 사향을 가늘게 쳐 함께 섞어 쇠절구에 넣고 질지 않고 보송보송하게 충분히 찧으면 된다.
홍화즙을 말려서 만든 연지
연지가 고안되기는 기원전 1150년경인 중궁 은나라 주왕 때라고 하며, 우리 나라에서는 5~6세기경의 고분인 수산리 벽화와 쌍영총 벽화에 연지를 칠한 여인상이 그려져 있으므로 천4백여년 전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일본에 연지를 처음 전한 사람이 고구려 승 담징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봐도 짐작할 수 있다. 화장은 화류계 여자나 하며 야한 화장은 정숙한 여자가 할 짓이 못된다는 전통적인 관념에 지배당했던 옛 여인네들도 입술연지만은 애용하였다. 그것은 입술 색깔이 푸른 여자는 음녀라는 이유에서였다. 본래 연지는 볼이나 이마에 칠한 것이자 루즈처럼 입술에 칠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입술이 창백하면 시집을 못 간다는 관념 때문에 옛 처녀들은 은밀히 연지를 구해 입술에 칠하는 습속이 퍼지게 되었다. 특히 연지의 붉은 색을 잡귀가 꺼린다하여 소녀들의 이마와 입술, 뺨에 널리 이용되었다. 연지는 홍람화의 화즙이나 수은과 유황의 화합물로 짙은 홍색의 광택이 있는 광물인 주사로 만들었는데, 주사로 연지를 만드는 기술은 연금술의 일부로 중국에서 모방해 가기도 하였다. 꽃연지를 만드는 원료인 홍화의 잎이나 줄기는 쇠지 않을 때 나물을 무쳐 먹거나 열매로 기름을 짜서 약용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연지 꽃은 얼굴을 예쁘게 한다는 속전 때문이다. 오뉴월에 피는 홍화의 꽃을 새벽에 일찍 일어나 이슬이 마르기 전에 따 말린 다음, 물에 재었다가 베주머니에 넣어 약 짜듯이 짜서 즙을 낸다. 이 화즙을 체로 쳐서 응달에서 말려 고약처럼 굳힌다. 이것을 홍떡이라 부르며, 이 홍떡을 가루 내어 덜 붉은 노란 가루를 가려낸 다음 생나무 재나 짚을 태운 재로 홍색소를 분리시킨다. 이렇게 만들어진 생연지의 과장을 되풀이할수록 상품(上品)이 되며 두벌홍․세벌홍 등 질적인 차이가 생겨난다. 그런데 이처럼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얻어진 홍화 가루는 1만여 평의 밭에서 고작 70~80킬로그램 정도 생산가능하며 연작이 불가능하여 값이 매우 비쌌다. 그런데 개화기에는 창(娼)과 기(妓)를 구별하는 표식으로 백분만 칠하면 창이요 꽃연지까지 칠하면 기로 알았다고 한다. 지금은 염료를 유분(油分)에 용해․분산 시켜 스틱 형태로 제조한 립스틱을 많은 여성들이 애용하고 있다.
미운 딸 시집갈 때 주던 사향
원시 종교의식에서 사용하여 최고의 화장품으로 불리는 향료는 우리 나라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대중화되어 상․하류 남녀 구별 없이 널이 애용되었다. 향은 일반 가정에서 제사 때 망령을 부르는 매개물로도 사용되었으며, 화장료는 물론 성욕촉진제로서 방사(房事)에도 꽤 오래 이용되었다. 시체를 썩지 않게 하거나 청결하게 하는 방부용으로도 쓰였으며 장신구나 가구, 분․비누의 날 비린내를 가시기 위해서도 향료의 보급이 촉진되었다. 신라시대 여인들은 중국에서 고가로 사들인 향을 주머니에 넣고 패용 하였으나 당시의 향료는 대부분이 가루나 덩어리였다. 향료를 향기 짙은 꽃잎이나 줄기를 말려 분말로 만들어 그대로 사용하거나 도자기에 기름과 함께 재어 두었다가 손끝에 찍어 사용하였다. 이밖에 향료를 동물․광물에서도 추출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사향을 최상으로 여겼다. 사향은 반추 동물인 사향노루 수컷의 복부에 있는 선(腺) 분비물로, 그 달걀 만한 크기의 향주머니 속에 평균 30~60 그램 정도의 향료가 들어 있다고 한다. 이 향주머니를 절개하면 내부에 암갈색의 가루가 들어 있는데, 이 향주머니를 잘게 썰어 유지에 녹임으로서 향지(香脂)를 만들고 이 향지가 바로 향장료의 원료가 되는 것이다. 사향을 ‘침실의 비향’이라고 부르듯이 성욕을 흥분시키는 조정효과가 뛰어나다. 그래서 미운 딸이 시집갈 때면 소박을 면하게 하기 위해 사향낭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또 ‘싸고 싼 사향도 냄새가 난다’는 말과 같이 지속성이 대단히 강하다. 예 조상들은 향을 특히 신성하게 여겨 서약할 때나 독서를 할 때도 상용하는 등 화장에만 국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창조 가능한 개성미로 전환
자신을 보호할 목적이나 종교적인 풍습․남녀 구별과 신분․계급을 나타내는 장식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던 화장품은 이제 미화수단으로서 생활 필수품처럼 대중화되었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일상생활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여성에게 있어서 화장품은 준 필수품처럼 보편화되어 있어 일상적 소비품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비싼 로열티와 막대한 광고 선전비 등에도 불구하고 재벌 기업들이 화장품 생간에 뛰어 드는 이유를 짐작케 한다. 오늘날의 화장은 예전에 비해 제품의 질뿐만 아니라 메이크업(마무리 화장) 방면에서도 변화는 뚜렷하다. 그것은 옛날에 있어서의 화장이 단지 단순한 건강미와 자연미 등을 목적으로 한 것에 비해 현대의 화장은 피부색과의 전체미에 바탕을 둔 색의 조화를 그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예전의 분은 흰색, 연지는 빨강, 눈썹은 검은 색이었던 단일 계통의 색에서 벗어나 수십 색의 상품 구성이 되었다. 특히 아이샤도우 등은 눈꺼풀에 음영(陰影)을 만들기 위한 화장이었던 것이 그러한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옷의 빛깔과의 조화를 맞추기 위해 다채로운 색깔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렇게 메이크업은 패션의 일부가 되고 분위기에 따라 색조를 변화하게 됐으며, 화장을 보다 효과적으로 살리기 위해 분이나 화운데이션도 투명함을 가지게 되었다. 화장품의 발달과 매스미디어의 발전에 의하여 옛날과 같은 화장술의 격차와 화장으로 짐작할 수 있었던 직업이나 지역차, 계층이나 연령 등을 알 수 있는 의미의 표현이 없어지고 대신 개성 표현의 요소가 많아졌기 때문에 개인의 기호․지성․교양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화장의 시대 변천에 따라 미의 개념 역시도 달라졌을 뿐 아니라 미를 향수(享受)하는 심정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런 까닭에 옛날에 희소가치로서 보았던 미인이 지금은 일반적인 형상이 되었다. 천성으로만 알았던 미가 요즘에 와서는 창조 가능한 것으로 변한 것이다. ‘아름다움을 원하는 여자는 아름다운 여자가 될 수 있다’ 즉 한국의 여인상은 눈같이 하얀 얼굴, 가늘고 긴 눈썹, 앵두 같은 입술, 샛별처럼 빛나는 눈을 가진 여인이라는 획일적인 척도로서 미를 평가하는 시대는 지났고, 개성의 개발과 개화에 미적 판단의 중점이 옮겨간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미가 개성에 있다고 할 때, 여자의 아름다움은 전적으로 여자 그 당사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한다. 그 여자가 아름답지 않다고 할 때는 그 여자에게는 자기의 개성을 개발하고 빛내려는 의욕과 노력이 없었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여성미의 극치는 어디까지나 한국인다워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개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전체의 조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화장이란 선천적인 자신의 용모를 화장품과 미용술로서 수정 보안해서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다. 또한 화장은 아름다움을 추구해서 자신의 용모를 돋보이고, 노화를 방지하려는 인간의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화장의 역사는 인류의 정착생활과 문화가 발달됨에 따라 화장술도 함께 진보되어 왔다고 할 것이다. 화장의 역사는 수발(修髮)의 역사와 때를 같이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선사시대의 유물이나 역사시대의 기록은 고대 여인(女人)의 부지런하고 아름다웠던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인(女人)들은 한결같이 변함이 없었다. 고대에는 모권제도가 있어 사회적으로 우위를 차지한 시기도 있었으나 부권제도로 바뀌면서 지위는 낮아졌고 이조 오백년은 유교라는 굴레로 철저한 남존여비의 설음을 받기도 하였으나 언제나 여인(女人)들은 부지런하고 아름다웠다. 선사시대의 여인(女人)은 몸을 꾸미던 흔적은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 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시대 고분벽화가 가장 구체적으로 그 시대 여인(女人)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유물은 역시 많지 않았다. 여기에 비(比)하면 신라시대의 고분에서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화려하였던 모습을 상상하기에 충분하였다. 어느 고분에서나 출토되는 금제 귀걸이, 목걸이, 비취구옥 등으로 당시의 여인(女人)들이 화사하게 몸을 꾸몄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71년 발견된 백제 무령왕릉의 유물은 백제 여인(女人)의 생활에 관한 새로운 지견을 가져다주었다.
고려시대에는 여인(女人)관계 유물이 풍부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전대에 비하면 다양해지고 있다. 고려청자의 분합이나 기름병 그 중에서도 동경과 청자 화장도구들은 전대에 없었던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같은 풍속화가의 작품을 통하여 여인(女人)들의 몸가짐과 마음씨를 짐작할 수 있게 되고 장도를 지니고 다니던 역대 여인들에게서 의연한 자세와 위엄을 느끼게 한다.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 같은 여류화가를 통하여 곱고 아름다운 심정을 대할 수 있게도 된다.
어느 민족이든 성격과 생활양식에 의하여 짙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한편으로는 외부의 영향을 받아 변모 동화되기도 한다. 그러한 가운데 화장은 하나의 자연적 산물이 되어 갔다.
우리 나라 전통 피부관리․모발관리․화장문화는 개화기 이후 ‘신식화장품’의 수입과 더불어 그 의미를 차츰 상실해 왔으나, 현대에 와서 전통 화장품 원료를 현대 화장품에 응용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에 한국 여성의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부각시켜 미의 정형(定型)이 바람직하게 제시되어져야 하고 문화적․지리학적 환경에 맞는 한국 여성의 얼굴 유형에 맞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화장술과 향장료의 보급이 시급하매 이 분야에 대한 관련 학계와 기업의 요구가 요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