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축제 세종시 무형문화제 불교 낙화(落火)
함안 무진정의 낙화놀이, 안동 선유줄불놀이
겨울에는 양화, 여름에는 음화로 음양의 조화를
전 세계가 이상기후로 열대아와 가뭄으로 인한 산불이 또 다른 위기를 맞게 한다, 그런 중에서 안녕과 기원을 축원하는 정통적으로 이어오는 떨어지는 불꽃 놀이가 있다.
어릴적 가장 신났던 놀이중에는 물놀이와 불놀이가 있지만 불놀이를 하면 어른들은 오줌을 싼다고 겁을 주면서 과도한 불놀이를 경계했다.
전국적으로 불놀이중에 떨어지는 낙화놀이로 유명한 곳으로는 세종시의 ‘낙화전통문화축제’ 함안군의 ‘함안낙화놀이’,안동 하회마을 ‘선유줄불놀이’등이 있다.
세종 호수 공원 중앙 무대 섬 일원에서 펼쳐지는 낙화축제는 지난 2016년 10월 `제1회 낙화(落火) 전통문화 축제´를 개최한 이후 세종시 최대의 문화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세종시에서 열리는 불교 낙화법은 사찰에서 낙화봉지를 제작하고 의식에 맞춰 낙화를 태우며 재앙 소멸과 복을 기원하던 불교 의례로 조선시대 화약의 재료로 쓰이던 숯과 무능승도량의 수구즉득다라니와 결합해서 ‘낙화법’이 만들어졌다. 예비 의식, 본의식, 소재(消災) 의식, 축원, 회향 순으로 진행되는데 지역에서 열리는 축제 성격을 가지는 낙화놀이와는 구별된다.
매년 봄날에 펼쳐지는 함안 낙화놀이도 32회를 맞는다. 무진정 일원에서 진행되는 함안낙화놀이는 경상남도 지정 무형유산으로 16세기 조선시대 선조 때 함안군수였던 한강 정구 선생이 군민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시작한 전통 민속 행사로, 매년 사월초파일에 열린다.
조선 고종 때 함안군수를 지낸 오횡목이 쓴 ‘함안 총쇄록’에는 “함안읍성 전체에 낙화놀이가 열렸으며 이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성루에 올랐다”고 기록돼 있다.
일제강점기 때 민족 말살 정책으로 중단됐으나 1960년 함안 괴항마을 주민들이 복원하여 잠깐 부활됐으며 2000년대 함안면과 마을주민들이 ‘함안 낙화놀이 보존회’를 설립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얀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뗏목을 타고 연못 위에 낙화봉을 매달고 횃불을 이용해 낙화봉 하나 하나에 점화하면서 낙화놀이는 시작된다.
안동 하회마을 선유줄불놀이는 부용대 밑으로 흐르는 강가에 배를 띄우고 선비들이 시회(시회(詩會)를 곁들였던 불놀이로 해마다 한여름 밤의 축제로 열린다.
안동 선유줄불놀이는 5월부터 11월까지 여러차례 펼쳐지는데 부용대에서 밧줄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면서 참나무 숯의 불꽃이 강물로 낙화하는 모습에서 감성적인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생각을 담기게 한다.
하지만 사찰에서 이뤄지는 낙화법은 세종시 영평사에서 전승되는 것이 유일하다
영평사가 소장하고 있는 ‘오대진언집’에 낙화법에 대한 절차가 묵서로 기록된 것이 발견돼 낙화법이 불교의례였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낙화법을 전 현대로 구현할 수 있는 전승 능력을 갖췄고, 전승 의지 및 기량 등의 탁월한 점을 인정받아 2025년 2월 세종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세종시 불교 낙화 법 보존회의 회장인 원행 스님과의 만남을 위해 부강면에 있는 광제사를 찾았다.
따끈한 차와 함께 시작된 인터뷰는 마치 법문을 펼치듯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로 2시간이 훌쩍 넘게 진행되었다.
낙화봉지에서 타고 내리는 불꽃이 마치 내리는 눈과 흡사하다고 해서 다른 말로 유화설(流火雪)이라고도 한다
낙화를 설치할 때는 연등도 함께 달았는데 이는 등불은 모든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는 의미이며 낙화는 타면서 모든 업장이 소멸된다는 뜻을 간직하고 있다.
계절에 따라 낙화봉지를 만드는 방법도 달라지는데 겨울에는 음의 기운이 성하여 양화로 만들어 불꽃은 화려하며 역동적으로 타게 하고 여름에는 양의 기운이 성하니 음화로 만들어 흐르는 물처럼 조용히 타게 한다.
낙화법은 불교의 한 의식으로 고려 시대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나 숭유억불 정책을 펴온 조선시대에 들어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안녕을 위해 반드시 원찰이 유지되었기에 사월 초파일에는 한양의 사대문이 활짝 열리면서 심지어 통행금지도 해제시켰다
그래서 사대부나 일반 평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집집마다 등을 달고 낙화법과 함께 밤새도록 즐겼다고 한다.
광화문 앞으로 펼쳐진 육조거리를 지나 유기전에서 마포나루에 이르는 길목과 나루에 정박한 상선과 나룻배의 돛대까지 낙화 봉지와 등을 달아 환하게 밝혀진 거리에 쏟아져 나온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볶은 콩을 담은 주머니를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아마도 요즈음 서양의 핼러윈 놀이의 원조가 아닌가 싶다.
조선 후기까지도 낙화법이 유지되어 왔으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거의 소멸되다시피 하였다.
소멸된 이유로는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낙화법은 해가 지고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아야 그 화려함이 빛을 발한다.
시절이 시절인 만큼 해가 지고 난 뒤에 조선인들이 단체로 모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고 어쩔 수 없이 소멸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이러한 와중에도 개성과 평양의 상인회 주축으로 낙화법을 시도했다는 기사가 남아있어 알게 모르게 새시 풍습으로 이어져 왔다.
이렇게 간간히 이어져 내려오던 낙화법은 약 30여 년 전부터 알려지기 시작해 지금은 몇몇 지방자치 단체가 주축이 되어 발전된 낙화놀이로 축제가 열리고 있다.
무릇 축제라 함은 대중성이 있어야 한다. 요즘의 놀이문화는 주체와 객체가 확연하게 구분된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문화는 주, 객체가 따로 없이 한데 어우러지는 문화이다.
낙화법이란 본디 사찰에서 행해지는 의식이었지만 낙화법과 연계된 다양한 행사와 함께 우리의 전통문화가 명실상부한 K-전통문화로 발전시켜 한걸음 더 진전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스님의 당부는 “낙화봉지 만드는 법을 누구에겐가 제대로된 전통기법이 이어져서 세종시민뿐만 아니라 전국 어느 곳에서도 낙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모든 중생들의 업장이 소멸되기를 바란다”며 낙화의 숨겨진 의미를 깨닫게 한다.
(환경경영신문 http://ionestop.kr/ 박금옥 문화기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