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터리 페이지
- 강 문 석 -
새로 만든 수필집을 배송하기 위해 주소를 붙인 봉투에 넣고 탁자 위에 남은 두 권 중 한 권을 무심코 펼쳤다가 깜짝 놀랐다. 3백 페이지 뒤에 2백 페이지가 나오더니 계속해서 순서가 바뀐 것이 서너 번이나 나타난다. 가장 심한 것은 책 한 권에 무려 23번이나 쪽수에 오류가 있었다. 이 책은 80페이지가 마지막이고 머리말이나 차례는 물론 서평 같은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7백 권 중 이미 240여권을 발송한 것이 문제였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지금까지 알량한 경험이나 지식을 바탕으로 여러 분야의 책 만드는 데에다 낯간지럽게 이름을 올려 ‘더 이상 책을 만들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다짐을 해오던 터였다.
그런데 지난봄에 어쩌다가 문화재단의 창작지원금을 겁도 없이 덜컥 받았다. 비록 순간적인 유혹에 그랬더라도 당초 자신과의 약속대로 기한을 넘기면서 받은 금액을 자연스럽게 반환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지 못한 데 대한 징벌을 받은 것 같았다. 이 글을 쓰는 것도 어쩌면 그렇게 쪽수가 뒤죽박죽인 책을 잘못 보내드린 것을 사죄하기 위한 방편이 아닐 수 없겠다. 엎질러진 물이다. 실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힘이 들더라도 남은 406권이야 하나하나 체크를 한다면 더 이상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만 믿고 그냥 배송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가급적 감정을 자제하면서 출판사 대표에게 ‘희귀본 수필집’이란 메일을 보냈다. ‘현재 240여 권을 우편으로 보냈고 어젯밤에도 55권을 봉투에 넣어 작업하고 나서 남은 2권 중에서 무심코 한 권을 펼쳤더니 페이지가 뒤죽박죽이 되어 있습니다. 272쪽에서 369쪽으로, 384쪽에서 289쪽으로, 368쪽에서 273쪽으로, 288쪽에서 385쪽으로 건너 뛴 것입니다. 남은 것은 하나하나 확인할 생각이지만 이미 발송한 것은 페이지가 제대로 맞느냐고 물을 수도 없어서 난감합니다.‘ 하지만 출판사의 답변은 의외였다. 도급을 맡긴 제본사에 알아보니 그런 불량품은 10권미만이라고 하더라는 거였다.
고의적으로 저지른 짓이니 기가 찼다. 알고서 불량품을 넣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아! 대한민국 출판업계의 현실이 이 정도구나 싶었다. 배송작업에 속도가 나질 않아 쪽수에 오류가 없는 책을 골라서 하루에 50여권씩 부치면서 해결책에 대한 답신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것은 속 타는 사람의 순진무구한 생각이었다. 답답한 사람이 우물 판다고 출판사에 다시 연락을 했다. 여전히 미온적이다. 부치다 남은 책에서 쪽수가 잘못된 불량품을 찾아내라고 한다. 협소한 아파트 현관의 타임스위치는 자꾸만 조명을 암흑으로 만드는 속에서 확인 작업에 들어갔고 그 결과를 다시 메일로 알렸다.
‘새벽 3시까지 남은 책 406권을 체크하다보니 눈알이 뱅글뱅글 돕니다. 쪽수가 잘못 제본된 책을 찾은 것은 32권입니다. 전체 박스에 고루 들어있는 것으로 봐서 12월 15일까지 발송한 책 속에도 분명 들어있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이런 일이 생길 경우 통상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평생을 알량한 전기기술로 밥을 빌어먹고 살아오면서도 어찌된 일인지 책을 만들 기회가 많았다. 못 버리는 꼼꼼한 성격 탓에 오류가 나면 안 되는 것이 책이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날 그쪽에 밀어 넣었던 것인데 뒤엔 ‘저 사람이 하면 틀림이 없다’고 강제로 떠맡기면서 마치 전문가인처럼 잘못 소문이 나기도 했다.
서른 즈음엔 못골의 전문학교에서 ‘학교 60년사’를 만들면서 편집위원에다 이름을 멋대로 넣더니 교구에서 만드는 ‘레지오 50년사’에도 3개 성당을 대표하는 자리에 날 집어넣었다. 현직 때는 1937년에 발족한 사업장이 회갑을 맞아 ‘동래지점 60년사’를 펴내게 되었다. 그 일을 덜렁 맡게 되었지만 보존된 자료가 전무하다시피 하여 젊은 날부터 해온 각종 행사사진을 이용하여 ‘기념회보’나마 만들 수 있었다. 이처럼 돈이나 떡이 생기는 일이 아니다보니 전부들 몸을 사리는 바람에 날밤을 새면서 힘들긴 했지만 값진 체험이 아닐 수 없었다.
창간호이자 종간호가 된 ‘부산웅변인총연합회’ 회지를 대청동 출판사에서 신건식 선배와 만들면서 고군분투했던 기억도 있다. 선배는 나에게 “아무리 생각해도 전기기술자는 가짜일 것 같다”고 뼈있는 농담을 했다. 지금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편집 실무교재’는 가톨릭신문 위촉기자를 맡으면서 소장하게 되었다. 신문편집에 관한 것이지만 현직 일간지 기자 중에서도 실무지식이 뛰어난 강사를 초빙해서 알찬 교육이 되었기에 지금까지 그 지식을 유용하게 활용하면서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직장에서도 본사의 업무교재를 사업소의 현장 직원들 실정에 맞도록 서너 권 따로 만들기도 했다.
10년 넘게 강단에 섰던 대학에서도 옆의 교수들과 공저 또는 내 이름만 넣어 ‘전기설비 실습’등 교재를 펴냈다. 마흔 중반 무렵 육칠 년 성당의 홍보분과를 맡아 월간 소식지도 만들었다. 어찌 그리도 한 달이 빨리 돌아오든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직장을 끝내기가 바쁘게 중앙동 출판사 사무실을 찾아야하는 날이 많았다. 교구에서도 편집 실무를 주기적으로 교육했지만 수박 겉핥기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출판관련 과거의 체험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것은 적어도 그때는 쪽수와 관련하여 이렇게 황당한 일이 없었다는 걸 얘기하기 위해서다. 책을 받은 분들은 읽기에 앞서 쪽수부터 맞는지 확인해주길 바라는 마음간절하다.
첫댓글 산으로 남고싶은 산...제게 온 수필집은 참 근사합니다.잘못된 쪽수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맛깔스러운 권대근교수님의 서평도 재미있습니다. 수필집 발간을 축하하며 새해에도 건강하신 모습으로 자주 뵙길 바랍니다.
그날 총회에 몇 권 들고 간 것은 오류 확인을 끝낸 책이었습니다. 출판사나 제책사 모두 영세한 경영을 하고 있는데 좀 강하게 다잡기도 뭣하고 정말 진퇴양난입니다. 관심 가져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