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노천 역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
온갖 부끄러움 감출 수 있는
따스한 방이 되고 싶었다
눈이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바깥이 되고 싶었다
- 시집『좀팽이처럼』문학과지성사 / 1988 -
▲ 김 광 규 (金光圭·1941∼)
- 서울대 및 동대학원 독문과를 졸업. 독일 뮌헨에서 수학
- 1975년 계간 [문학과지성]을 통해 등단
- 1979년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이후, '아니다 그렇지 않다' '크낙산의 마음' '좀팽이처럼' '아니리' '물길'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처음 만나던 때' '시간의 부드러운 손' '하루 또 하루' '오른손이 아픈 날', 그 밖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누군가를 위하여'
- 산문집 '육성과 가성' '천천히 올라가는 계단'
- 학술 연구서 '권터 아이히 연구'
- 2016년 현재 한양대 명예교수 (독문학)
처음부터 시는 춥고 난감한 상황에서 시작한다. 때는 겨울밤이고 장소는 노천 역이다. 사방이 트여 바람이 몰아치는데 불행히 눈까지 내린다. 역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언 발을 동동거리지만 전동차는 쉽게 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추운 때, 시인은 춥다고 말하지 않았다. 점점 더 추워질 때, 시인은 아프고 힘들다고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가난한 온기가 서로 만난다면 따듯한 우리가 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추운 한 사람은 겨우 ‘추운 한 사람’이 아니라 ‘온기가 될 수 있는 한 사람’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이 시는 착한 시다.
가장 추운 곳에서 만난 추위는 고난이지만, 그것은 때때로 타인과 나를 단단하게 연결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한 사실을 이 시로부터 건네 들으면, 적어도 몇 밤의 추위는 더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 시는 참 고마운 시다.
길고 긴 밤, 동지가 지나니 성탄절이 다가온다. 이날은 아주 오래전, 아기 예수가 태어난 생일이라고 한다.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도, 문화적으로 알고만 있는 사람에게도, 달력의 성탄절은 동일하게 찾아온다. 크리스마스라고 부르든, 성탄제라고 부르든, 휴일이라고 부르든 간에 세상의 성탄절은 공평하게 지나간다.
사실 우리는 무슨 핑계라도 대고 싶은 것이다. 날을 정해놓고 사랑을 생각해야만 하는 날. 적어도 하루만큼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따뜻하게 해 주고 싶은 날. 온기가 한기를 이길 수 있다고 믿어도 되는 날. 그런 날을 억지로라도 달력에 그려놓고 싶은 것이다.
이런 곱고 거룩한 핑계 때문에 이 시는 이번 주말에 가장 어울리는 작품이 된다. 나를 사랑하는 나를 잊고, 너를 사랑하는 나를 되찾기. 이것이 바로 이 시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바로 성탄제의 주제이기도 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