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서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Night of Mission"이라는 행사를 멜번을 중심으로 가졌다.
멜번 중심으로 한 큰 교회들을 돌며 선교에 대한 자료를 보여주며 도전을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토요일, 주일에는 애틀란타에 같이 갔던 아이들도 드라마와 워십 댄스로 동참하였다.
시간이 되어 멜번 Base사람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홍콩을 경유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땐 거기까지 지하철이 깔려있었다.
공항의 많은 택시를 보자 순간 1년 전 화장실을 가고 싶어 과속을 한 택시기사가 생각나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했다.
남은 졸업학기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졸업식 전 그러니까 '97년 1월 약 3주간 또 한번의 전도여행을 가게 되었다.
뒤 늦게 결정하고 합류를 한 전도여행의 목적지는 터키였다.
계시록에 나오는 교회들도 있고 한번 가보고 싶은 나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출발예정일을 한달을 앞두고 여러가지 사정으로 취소가 되었다.
그리고 목적지가 인도네시아로 바뀌었다.
이번엔 어딜 경유해서 가지 않고 자카르타로 바로 가는 여정이었다.
원래 인도네시아를 준비했던 다른 팀과 합류를 했다.
그리고 필자가 속한 터키 팀였던 팀은 땅밟기의 사역을 목적으로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섬 지역으로
원래 팀은 교회 사역을 목적으로 자바 섬 지역으로 가는 것으로 결정됐다.
필자의 첫 해외 전도여행지이었던 인도네시아를 다시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자카르타에 도착하자마자 두 팀은 자카르타의 한 선교사님댁에서
하루를 보낸 후 각각의 지역으로 출발했다.
자카르타에서 차로 서쪽으로 이동하여 수마트라 섬으로 가는 커다란 배를 탔다.
인도네시아에 다시 왔지만 늘 새로운 곳을 밟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수마트라는 자카르타 Base에서도 정확한 정보가 없는 상황이라
현지 선교단체의 넘버2(^^)의 Staff을 가이드로 붙여주었다.
그리고 싱가포르와 위도가 가까운 곳까지 즉 수마트라 섬의 북부 지역까지 정탐해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
자카르타가 위치한 자바섬과는 달리 수마트라 섬은 그야말로 인도네시아의 원시적인 느낌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수마트라의 북부까지 차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달려야 했다.
도중 주일이 되었다.
가이드와 커뮤니케이션을 맡고 있었던 필자는 근처에 혹시 교회가 있는지 확인을 할 수 있는지 요청했다.
넘버2의 역량으로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본 가이드는 한 교회를 찾았다고 했다.
그리고 사전 연락없이 물어 물어 교회를 찾아갔다.
그 교회는 인도네시아인들의 교회가 아닌 중국계 화교들이 세운 교회였다.
밖에서는 교회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안에 들어가서는 십자가도 있고 음향시설, 식당, 주일학교를 위한 공간 그리고
자체의 신학교와 그 신학생들이 머무르는 기숙사까지 있는 큰 교회였다.
그 교회 목사님은 역시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었고 주일 교회에 나온 성도들 중 반 이상이 중국계였다.
팀의 목적을 안 목사님은 가이드에게 주일 저녁 사역을 요청했고 가이드는 팀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왔다.
북쪽으로 가는 것을 일단 잠시 보류하고 저녁 예배 사역 준비를 했다.
터키를 염두하고 드라마와 워십을 연습했던 것이 다행이었다.
저녁 예배가 끝나자 목사님은 한 주를 더 이곳에 머물며 신학생들과 같이 사역을 할 수 없냐는 부탁을 했다.
장시간의 팀 회의 끝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짐을 여관에서 교회 기숙사로 옮겼다.
경제 능력이 빠방한 화교들이라 나오는 음식은 인도네시아에서 볼 수 없는 중국 요리였다.
또 그 목사님은 교회일 뿐 아니라 사업(무역)도 하고 계셨다.
그리고 북부 지역에서 역시 이 교회처럼 사역을 하고 있는 목사님의 친구 목사님의 연락처와 위치도 알려주었다.
정탐과 땅밟기의 목적으로 수마트라에 들어왔지만 교회 사역만 했다.
북부지역의 소개받은 교회는 더 크고 성도 수도 많았다.
또 그 교회 목사님의 댁 근처의 사람들은 모두 교인들이라 마을 자체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고
화교 및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이라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이었다.
팀원들은 농담으로 여기가 수마트라가 맞으냐? 했고
가이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자 중요한 정보였다.
숙소와 음식은 물론 모두 교회에서 제공하였고
땅밟기와 자료조사를 위해 지역을 돌아볼만한 곳의 아내도 받을 수 있었고
이동 차량도 무상으로 제공되었을 뿐더러 떠날 땐 헌금까지 받았다.
그렇게 2주를 보내고 다시 배를 타고 자바 섬으로 와서 가이드와 작별하고
자카르타에서 한국인 선교사님을 만나 함께 반둥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는 댁으로 이동했다.
같이 출발했던 다른 팀이 사역하고 있는 곳이었다.
출발 당시 그 팀에 비해 필자가 속한 팀이 여러모로 경험도 없고 재정상태도 부족한 상태였는데
그 다른 팀은 중간에 팀의 재정을 맡은 한 자매가 돈 계산을 잘못해서 위태위태한 상태였다.
(여유가 있다고 잘못 판단해서 자카르타에서 그팀의 두 형제의 생일 파티를 무리하게 했다고 합니다.)
숙소와 음식비를 절약하고 생각지 못한 헌금까지 받은 필자의 팀이 그들에겐 구세주였다.
'92년의 반둥 지역과 '97년의 반둥 지역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국인 선교사님이 파송되었고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지 교회와 함께 많은 사역을 하고 계셨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