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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풍로상(長風路上) 겨울 길에서 긴 바람 凍雨霏霏灑晩天(동우비비쇄만천)-찬 비, 부슬부슬 저문 하늘에 흩뿌리니 前山雲霧接村烟(전산운무접촌연)-앞산 구름과 안개, 마을 연기와 맞닿는다 漁翁不識蓑衣濕(어옹불식사의습)-늙은 어부는 도롱이 젖는 줄도 모르고 閑傍蘆花共鷺眠(한방로화공로면)-갈대꽃 곁에서 백로와 나란히 잠들어있네 정온(鄭蘊)
겨울 한시를 오늘(11월 1일)부터 시작합니다. 한시를 지금까지 정리하는 동안 느낀 것은 사계 절중에 봄가을을 소재로 한 시는 많고 겨울 여름은 매우 적은 것을 느꼈습니다.
현대시 서양시를 정리하지 못하여(정리 할 수도 없지만) 비교 할 수는 없지만 동양인의 감정은 춘추에 서정적(抒情的)인 것 같습니다.
“이태리에는 올리브 농장에서 일하는 심부름꾼도 칸초네로 혀를 굴리고 프랑스에는 와인 배달부도 샹송을 흥얼거리며 스텝에 마주어 걷는다고 합니다” 물론 농담이겠지만....
이말은 돈만 갖이고서는 신사 숙녀가 될 수 없고 문학과 예술을 가까이 하는 국민이 멋을 아는 사람이라는 풍자입니다.
인간이 창조한 위대한 선물의 하나인 문자(文字)를 만들어 우주만물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크나큰 축복입니다.
겨울 긴밤, 코드깃을 세운 눈내리는 날에 한시를 읽으면서 사색하며 멋을 내는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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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조령(登鳥嶺)겨울 문경새재에 오르니
凌晨登雪嶺(능신등설령) 이른 새벽 눈 덮인 새재에 오르니,
春意正濛濛(춘의정몽몽) 봄이 올 뜻이 어렴풋하게 느끼는 구나
北望君臣隔(북망군신격) 북으로 임금이 계신 서울은 멀기만 하고
南來母子同(남래모자동) 남으로 고향땅은 가까워 지네
蒼茫迷宿霧(창망미숙무) 아득하여라 넓은 들은 저녁안개에 서리어 있고
迢遞倚層空(초체의층공) 높은 봉우리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 의지하네
更欲裁書札(경욕재서찰) -다시금 글을 담아 보내려 하니,
愁邊有塞翁(수변유새옹) 잘된일인지 잘못된일인지 알수 없어 근심이 되오.
유호인(兪好仁)
송참(松站)겨울 소나무 밑에 우두커니 서서
雪裡村西日欲斜(설리촌서일욕사) 눈속에 쌓인마을 해는 벌서 지려는데
蕭條墟落兩三家(소조허락양삼가) 쓸쓸한 빈터위에 두서너집 남아있네
主人好客頗知禮(주인호객파지예) 손을 맞은 주인영감 예의범절 공손하고
淨几明窓甁有花(정궤명창병유화) 문방제구 깨긋한데 화병까지 놓였구나
박종악(朴宗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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被謫北塞(피적북새)겨울에 북쪽 변방으로 귀양가며
歎息狂歌哭失聲(탄식광가곡실성)
탄식하며 미친 듯 노래하고 실성한듯 울어봐도
男兒志氣意難平(남아지기의난평)
사나이 품은 뜻 펼치려니 너무 어려워
西山日暮群鴉亂(서산일모군아난)
서산에 해지려니 까마귀 떼 어지럽고
北塞霜寒獨雁鳴(북새상한독안명)
변방 서리 찬 날씨에 기러기 울음소리만 들려오네
千里客心驚歲晩(천리객심경세만)
천리 먼 곳 나그네 한 해가 감을 아쉬워하고
一方民意畏天傾(일방민의외천경)
이 나라 백성들은 하늘의 뜻 기울어짐을 걱정하네
不如無目兼無耳(불여무목겸무이)
눈 없고 귀 없는 듯
歸臥林泉畢此生(귀와임천필차생)
시골로 돌아가 한 평생 살고 싶어라
윤선도(尹善道)
창 밖의 눈 위에 달이 다가와
紗窓近雪月(사창근설월)-고운 창의 눈 위에 달이 다가와 滅燭延淸輝(멸촉연청휘)-촛불 끄고 맑은 달빛 맞아 들이네 珍重一盃酒(진중일배주)-삼가 올리는 한 잔 술에 夜蘭人未歸(야란인미귀)-밤 깊도록 내곁에 임은 돌아가지 않네
이성중(李誠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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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夜獨坐(설야독좌)눈 오는 밤 홀로 앉아
破屋凉風入(파옥량풍입)-허술한 집에 싸늘한 바람 불어 들고 空庭白雪堆(공정백설퇴)-빈 뜰엔 흰 눈이 쌓였네 愁心與燈火(수심여등화)-근심스런 내 마음과 저 등불은 此夜共成灰(차야공성회)-이 밤 재가 다 되었네
김수항(金壽恒)
日暮朔風起(일모삭풍기)-해지자 매운바람 살을 어이고 天寒行路難(천한행로난)-날씨추어 길걷기 정말 어렵네 白烟生凍樹(백연생동수)-연기조차 찬숲에 얼어 서리고 山店雪中看(산점설중간)-촌술집은 눈속에 쌓여 있구나 윤계(尹堦) |
雪後(雪後)눈온후에
屋後林鴉凍不飛(옥후림아동불비)
수풀속 언(凍)까마귀 날지못하고
晩來瓊屑壓松扉(만래경설압송비)
솔사립문 찬눈에 살을어이네
應知昨夜山靈死(응지작야산영사)
알것이다 간밤에 산신령 죽어것을
多少靑峰盡白衣(다소청봉진백의)
산마다 빠짐없이 상복 입었네
신의화(申儀華)
영설(詠雪) 눈
松山蒼翠暮雲黃(송산창취모운황)-송악산 푸르름에 저녁 구름 물들더니
飛雪初來已夕陽(비설초래이석양)-눈발 흩날리자 이미 해는 저물었네.
入夜不知晴了未(입야불지청료미)-밤들면 혹시나 이 눈이 그칠려나
曉來銀海冷搖光(효래은해랭요광)-새벽엔 은 바다에 눈 빛이 차갑겠지.
이색(李穡)
모설산행(冒雪山行)눈내린 산을 강행하다
山橋日暮少人行(산교일모소인행) 산 속 다리에 날이 저물어 사람의 통행 적어지고
野店炊煙一抹橫(야점취연일말횡) 들 주점 밥 짓는 연기 한 가닥, 옆으로 퍼져간다
緩轡微吟歸得得(완비미음귀득득) 말고삐 멈추고 시를 읊조리다가 돌아오니
馬蹄隨處踏瑤瓊(마제수처답요경) 말 발굽 이르는 곳마다 얼음 구슬 밟는 듯하다 권건(權健)
설후(雪後)눈내린 후 臘雪孤村積未消(납설고촌적미소) 외딴 마을 섣달 눈이 쌓인 채 안녹으니
柴門誰肯爲相敲(시문수긍위상고) 그 누가 사립문을 즐거이 두드리랴
夜來忽有淸香動(야래홀유청향동) 밤이 되어 홀연히 맑은 향이 전해 오니
知放寒梅第幾梢(지방한매제기초) 매화꽃이 가지 끝에 피었음을 알겠노라 유방선(柳方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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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야(冬夜) 겨울 밤 空堂夜深冷(공당야심냉)-텅 빈 집 밤 되니 더욱더 썰렁하여 欲掃庭中霜(욕소정중상)-뜰에 내린 서리나 쓸어보려 하였다가 掃霜難掃月(소상난소월)-서리는 쓸겠는데 달빛 쓸어내기 어려워 留取伴明光(유취반명광)-그대로 달빛과 어우러지게 그냥 남겨두었네 황경인(黃景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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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林欲瞑已棲鴉(천림욕명이서아) 온 숲이 저물어 갈가마귀 깃드는데
燦燦明珠尙照車(찬찬명주상조거) 찬란히 반짝이며 수레를 비추는 눈
仙骨共驚如處子(선골공경여처자) 신선도 놀랄 만큼 깨끗한 순수세상
春風無計管光花(춘풍무계관광화) 봄바람도 저 꽃들은 어쩌하지 못하네
聲迷細雨鳴窓紙(성미세우명창지) 가랑비 소리인 듯 창호지를 울리고
寒引羈愁到酒家(한인기수도주가) 추위에 시름은 주막으로 발길 끌어
萬里都盧銀作界(만리도노은작계) 만리천지 은으로 만들어 놓은 세상
渾敎路口沒三叉(혼교로구몰삼차) 뿌여니 동구 앞 세 갈래 길 덮였네! 이인로(李仁老)
이인로(李仁老, 1152~1220)는 고려시대 대 학자로서 시문(詩文)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능해 초서(草書) 예서(隸書)가 특출하였습니다. 시와 술을 즐기며 당대의 석학 오세재(吳世才)·임춘(林椿)·조통(趙通)·황보 항(皇甫抗)·함순(咸淳)·이담지(李湛之) 등과 교류하여 강좌7현(江左七賢)이라고 불렸습니다 자는 미수(眉叟) 호를 쌍명재(雙明齋)라 부르며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는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 난을 피한 후 다시 환속하였습니다. 저서에 유명한 파한집(破閑集)과 쌍명재집(雙明齋集)이 있습니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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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야(雪夜) 눈오는 밤 一穗寒燈讀佛經(일수한등독불경) 한 촉 찬 등불에 불경을 읽다 보니
不知夜雪滿空庭(부지야설만공정) 밤눈이 뜨락에 가득내린 줄도 몰랐네
深山衆木都無籍(심산중목도무적) 깊은 산 나무들은 아무런 기척 없고
時有檐永墮石牀(시유첨영타석상) 처마 끝 고드름만 섬돌에 떨어진다 혜즙(慧楫)
법명을 慧楫(혜즙)스님이라 하고 법호를 철선강사(鐵船講師)라 기록되어있습니다. 성씨는 김씨로서 전남 영암 출신입니다. 5살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고 14세 되던해인 순조4년(1804) 해남 두륜산 대흥사로 출가하여 성일(性一)스님 문하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됩니다. 스님은 이후 각처를 돌아다니며 20여년간 학인들을 교육하고 지관을 닦았습니다. 스님은 조선 철종 9년(1858) 대둔사 상원암에서 저술과 교육으로 일관한 67세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농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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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冬至) 동짓날 貪程夜渡津(탐정야도진)-길 재촉하여 밤에 나루를 건너니 今日一陽新(금일일양신)-오늘이 바로 동짓날이로구나 竹籬疏映雪(죽리소영설)-대나무 울타리는 성기어 눈이 비치고 梅塢別藏春(매오별장춘)-매화나무 언덕에는 따로 봄을 감추었구나. 樓閣臨長道(루각림장도)-누각은 긴 길옆에 가까이 있는데 經過問幾人(경과문기인)-지나는 사람 몇몇이나 되는지 물어본다. 白雲看漸逈(백운간점형)-흰 구름은 바라볼수록 점차 아득히 멀어 回首暗傷眞(회수암상진)-머리 돌려보니 은근히 마음만 상하는구나! 윤회(尹淮)
한해를 보내는 동짓날은 이상히 더 추워 보이고 마음이 무거운 느낌입니다. 객지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보는 정자도 매화나무도 마음을 허전하게 합니다. 윤회(尹淮, 1380~1436)는 조선조 세종때의 이름난 문신(文臣)으로 정도전이 쓴 “고려사”를 다른 자료와 대조하여 교정할 정도로 대단한 학자 하였습니다. 유교를 국교로 하여 불교를 배척하는 건의를 올렸고. 1432년에는 세종의 명으로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조선전기의 지리책)를 편찬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중국 고전인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통달하여 이름을 떨쳤습니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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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반월(詠半月) 반달을 노래함
誰斲崑山玉(수착곤산옥)-그 누가 곤륜산의 옥을 깍아서
裁成織女梳(재성직녀소)-직녀의 머리빗으로 만들었는가
牽牛離別後(견우이별후)-이별한 견우는 오지를 않아
謾擲碧空虛(만척벽공허)-기다림에 지쳐 던진 빗, 창공에 걸렸구나
황진이(黃眞伊)
황진이!
그녀는 고작 6수의 시조와 10여편의 한시를 남겼지만 한국문학에 차지한 한 자리는 매우 비중이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위의 “반달”은 황진이의 섬세한 미적 표현감각이 발휘되고 있는 최고의 감정을 묘사한 시로서 매우 수준 높은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가람 이병기 선생은 이백과 두보에 비견될수 있는 뛰어어난 시라고 절찬하고 있습니다.
“반달”에서 떠난 임을 견우에 빗댄 직녀, 즉 자신의 상한 마음을 허공에 걸린 푸른 달로 표현했는데, 견우와 직녀는 아주 헤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12월 13일 한시 “동짓달 기나긴 밤” 에서는 임을 기다리는 자신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황진이는 여인들의 일상도구인 “빗”의 모양이 달의 모양과 같다는 것에 착안(着眼)한 것입니다. 자신이 곧 직녀(織女)에 비유되고 있음을 암시(暗示)하고 이별한 견우가 오지를 않아 기다리다 지쳐 화가 나서 옥으로 만든 머리빗을 푸른 하늘에 던져버린 것이 반달이 된 것입니다.
즉 임을 보낸 여인에게 몸단장이 필요없이 푸른 하늘에 던져버린 빗이 바로 반달이기 때문에 이 시의 뛰어난 재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황진이의 “반달”의 시의 제목은 누가 뭐라 해도 뛰어남이 있습니다. 황진이는 허공에 걸린 달을 통하여 자신의 허탈한 심정을 우회적( 迂廻的)으로 표현함에 있어서 견우(牽牛)와 직녀(織女)의 고사(故事)를 당겨오고 중국 곤륜산(崑崙山)의 전설(傳說)을 끌어들여 아련한 동경(憧憬)의 대상으로써 달이 가지는 전설적(傳說的) 이미지에 또 다른정취(情趣)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재주 많고 박식하고 품위 넘치는 여인이 기생이란 천한 신분으로 취급받던 조선시대에 살았다는 것에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옥황상제의 딸 직녀는 심성이 착하고 일 잘하는 아가씨였습니다. 옥황상제는 다 큰딸이 종일 일만 하고 있는 것이 안쓰러워서 건너 마을의 총각 목동인 견우(牽牛)를 소개시켜 주고 데이트를 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리!
만나자마자 이들의 눈에 불꽃이 일어나 뜨거운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을!
한번 사랑에 눈이 먼 견우와 직녀는 자연히 소를 돌보고 베 짜는 본래의 일을 등한히 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안 옥황상제는 진노하여 이들을 각각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헤어져 살 게하고, 다만 일 년에 단 하루 칠월 칠석 날만 만나라고 엄명합니다. 선남선녀가 사랑의 스파크가 일어나면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것인데도 무정하고 야속한 옥황상제는 이들을 생이별시킨 것입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옥황상제의 지엄한 명을 받고 이들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특히 꽃다운 직녀 아가씨가 사랑의 환희를 잃고 흘린 두 줄기 눈물은 바다가 되고, 이별의 아픔은 산을 만들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임, 견우(牽牛)가 은하수 저편으로 눈물 흘리며 떠나가자 직녀는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직녀가 던진 얼레빗이 하늘에 그대로 박혀 반달이 되었다고 황진이는 노래한 것입니다. 만고의 절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임을 떠나보낸 후 직녀의 아픈 가슴을 누가 이렇게 족집게처럼 집어낼 수 있겠습니가?
황진이는 단지 한시 20자로 그림처럼 그려냈습니다.
우리는 이 시 한 수만을 읽고도 황진이를 그리는 마음을 가눌 수 없는데 이웃집 총각이 황진이를 단 한 번보고 상사병이 나서 결국 죽음의 길 밖에 없었던 일과, 30년을 도를 닦은 지족선사(知足禪師)가 왜 목탁을 집어 던진 파계승이 되어야만 했던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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