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트도 누룩이고 베이킹 파우더도 그렇다. 그런데 이스트는 작용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고, 베이킹 파우더는 즉시 작용한다.
맛있는 빵을 만드려면 반죽에 이스트를 넣고 부풀도록 오랜 시간 따로 놓아두어야 한다.
그러나 베이킹 파우더는 반죽에다 섞어서 그것을 즉시 오븐에 넣고 구으면 그 결과를 보게 된다.
이 두 가지 모두 반죽을 부풀리는 데는 효과적이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증언을 하면서 `베이킹 파우더의 결과'를 보려고 서두르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해주신 일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며 그것이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즉시 변화를 일으키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의 증언은 이스트와 같아서 시간이 걸리고 뜸을 들여야 성숙해진다.
우리는 반죽을 계속해야 하지만 우리의 누룩이 베이킹파우더와 같이 되지 않고 이스트와 같이 될지라도 실망하지 말아야할 것이다.(B.빌즈랜드)
하나님의 나라는 누룩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내와 수고를 요구한다.
[마 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1. '주님의시선' 카페와 카페지기가 섬기는 '마산시민교회'가 더 풍성해 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합니다.
목사와 성도의 생각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1)
1. 목사가 성도를 잘 모르면-----목회를 잘 할 수 없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民意를 모르면 정권을 유지할 수 없다. 상인이 소비자를 모르면 성공할 수 없다. 이런 말들은 너무 당연한 말들이다. 주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신 일이 있으시다. "(요8:55)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 장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라고 하셔서 하나님을 잘 아시고 또 "(요10:14-15)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주님께서는 성도를 모르는 목사는 도적이요 강도들이나 삯꾼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목사가 성도들의 생각을 잘 모르면 목회를 잘 할 수 없다. 많은 목사들이 성도(교회)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을 전혀 그렇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나는 지난 30여 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내 자신이 얼마나 성도들을 잘 모르고 목회를 했던가를 이제사 어렵프시 깨닫게 되었다. 성도들을 잘 모르고 목회를 했으니 목회를 잘 할 수가 있겠는가? 결국 나는 변변치 못한 목사가 되었고 성도들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한 삯꾼이 되었다.
이 글은 이런 나의 경험들을 모아 쓴 것들이다. 어느 책이나 누구의 글을 보고 기록한 것들이 아닌 것이다. 그럼으로 모든 목사에게 해당되는 글은 아니다. 그렇지만 목회를 시작하신 목사들이나 목회를 하면서 시행착오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는 목사들이 그 시행착오의 원인을 구명하여 시정하고 성도들 잘 알아 선한 목사의 길을 가는데 다소간의 도움이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여 삯꾼의 삯군된 원인들을 기록한 것이다.
내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목회 30년'에 기록된 나의 글들은 대부분 이런 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2. 목사가 교회를 잘 알 수 없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다.
첫째, 자기의 야망으로 인해서다.
목사의 야망은 성도를 잘 모르게 하고 이로 인해 터부니 없는 요구와 성도들이 감당할 수 없는 신앙적 의무감을 지우게 되어 시험 들게 한다.
나는 목사의 선한 욕망도 욕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신 일에 대하여 눈을 가린다. 영적인 소경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목사의 야망이 욕심이 되지 안으려면 목사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과 꿈을 이룰 수 있는 인격적, 영적 자격을 갖추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둘째, 변화하는 세태 때문이다.
세상에 흩어져 살아가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 많은 영향을 받고 살아간다. 그래서 그들은 급속히 변화하는 세태를 따라 그들의 신앙도 변질이 되어 간다. 그런데 목사가 그 변화하는 세태를 잘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적응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시대를 파악하지 못하고 적응하지 못하는 목사"의 지도력은 현실적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전 근대적일 수밖에 없다.
성도들은 이런 목사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리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이라 할지라도 시대에 뒤떨어진 목사를 따라 가다가는 함께 망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을 가진다. 그런 위기감은 성도들을 교회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또한 시대에 뒤떨어진 설교에서 성도들은 은혜를 받지 못하며 자기들의 영적 궁핍을 채움 받지 못한다.
셋째, 성도들이 교회와 하나님에게 바라는 기대가 엄청나게 변하고 말았다.
사람들이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소망들이 성경에서 말씀하신 약속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주시 마고 하신 축복은 사죄와 용서, 천국과 사랑, 그리고 충성과 헌신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축복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오로지 물질과 건강과 이 세상에서의 다복한 삶과 영광이다. 나는 이런 생각들을 기복 적인 축복관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성경에서 말씀하신 축복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감사하며 순종하고 충성하는가 가 축복의 기준이다.
이런 하나님이 말씀하신 진실된 축복과 성도들이 하나님께 바라는 축복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
이제 우리 목사들은 이 두 사이에 갈팡질팡하게 되고 말았다. 아무리 연구를 해도 이 두 사이에 조화로운 점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목사들은 성도들을 위한 목사가 되어 그들이 듣기를 원하고 가지기를 바라는 무엇을 말해서 그들을 만족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종으로서 듣던지 아니 듣던지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다.
전자는 교회가 부흥되고 성도들에게 대접을 받겠지만 하나님께 불성실한 종이라는 책망을 받을 것 같고, 후자는 하나님께 칭찬을 받겠으나 안되는 교회 목사가 되고 말 것이다.
이런 갈등이 목사로 하여금 교회(성도)를 바로 알 수 없게 만들고, 성도들에게 우왕좌왕하는 줏대 없는 목사로 비쳐지게 된다.
넷째, 이런 문제들의 해법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 내지 못할 때가 많다.
목회를 잘 한다는 것은 바로 죄인의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결해서 죄인을 변화시키는 능력일 것이다.
나는 이런 고민을 많이 했다. 그래서 평생을 갈팡질팡하는 줏대 없고 비슬거리는 목사가 되어 버린 기분이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 목사가 짖는 죄를 짖고, 성도들에게 만족을 주는 목사가 되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떨어버릴 수가 없었다.
다섯째, 성도를 알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즉 안일한 목회를 하는 것이다.
목사는 언제나 성도들을 알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 일을 위해 자기를 개방하고 마음을 열어 듣기 싫은 말들을 잘 소화하고 교훈으로 삼으며 겸손하고 낮아져서 자신에 대한 비판의 소리들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하고 혼자 실천하는 다분히 자기만족 속에 일하는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였다.
성도를 알기 위해서는 성도의 말을 귀담아 잘 들을 줄 알아야 한다. 특히 목사에 대한 말들을 아주 귀한 말로 알아들어야 한다. 그들의 아파하며 기뻐하며 슬퍼하며 걱정하는 일들이 무엇이며 요구하는 일은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을 알기 위하여 열심히 발로 뛰어야 하고 현장감이 있는 목회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성도를 잘 몰라서 저질렀던 실수들과 잘못들, 그리고 아무리 애를 써도 변화되지 않는 죄인들의 이야기들이다.
이런 글들을 쓴 것은 오늘 우리 목사들이 현실적 교회를 바로 알자는 것이다. 모든 교회가 내가 30여 년 동안을 본 교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본 교회의 모습도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3. 목사와 성도의 갈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그러나 교회와 목사가 꼭 이런 대치 상태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이 세상에 교회가 있을 수 있겠는가? 목사와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딱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목사들이 이 방법을 깨닫고 터득해서 목회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성공한 목회자다.
바울은 주님에 대하여 이런 말씀을 하셨다. "(빌2:5-14)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나 잘 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목회의 가장 귀하신 시금석이 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잘 모른다. 안다고 해도 목회 전선에서 실천하지 않는다. 이 말씀을 목회에 접목할 줄을 모르게 때문이다.
①. 낮아 지라.
주님은 우리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버리고 사람으로 낮아 지셨다. 목사도 성도들을 위해 낮아져야 한다. 자기를 낮추되 성도 모두를 위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을 위해 낮아져야 한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낮아지신 것이다. 우리 민족이나 교회를 위해 낮아지신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낮아지신 것이 아니던가? 목사의 영광을 구하지 말라. 하나님의 종으로서 성도 각각 개개인의 수준으로 낮아지라. 생각을 낮추고 생활을 낮추며 믿음의 수준도 설교도 기도도 이상과 꿈과 하나님에 대한 열정도 성도들의 수준으로 낮추어야 한다.
②. 성도들을 높이라.
주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인인 우리들을 높여 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성도가 된 것이다. 성도들이 목사의 믿음과 같아지고, 목사의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이해하고 따르도록, 목사의 이상과 꿈을 이해하고 따르도록, 목사만큼 말씀에 순종하도록 그들을 끌러 올리라. 그리고 목사 스스로 그리스도만큼 올라가도록 하면서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만큼 되도록 이끌어 가야 한다.
힘이 모자라거든 "(약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③. 목사와 성도들의 갈등은 십자가에서 풀어야만 해결된다. 다른 길은 전혀 없다.
목사와 성도의 만남의 원인은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만나 해결해야 한다.
목사와 성도의 만남 시간은 주님을 믿을 때다. 그러므로 목사와 성도의 믿음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님에게 가야 한다.
목사와 성도의 만남의 목적은 구원이다. 그리고 그 구원은 주님께서 주신 은혜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갈등은 주님을 믿어 구원을 얻는 영광을 목적으로 하고서 만이 해결된다. 다른 길은 절대 없다.
이것이 십자가의 道다. 바울 사도는 이 일에 대하여 이런 말씀을 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글들을 보시는 목사님들에게 다소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한 때 나와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섬겼던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이 못난 목사가 신앙적인 괴로움과 갈등을 준 일이 있었다면 너그럽게 용서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정말 미안한 일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