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다니의 나사로 가족의 헌신과 열매
요한복음 12:1~11
찬송가 321장(날 대속하신 예수께)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한 주간을 예루살렘에서 보내시고자 요단강 건너편 강가에서 사역하시다가 여리고를 거쳐 예루살렘 동남쪽 마을 베다니에 들렀을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시점은 유월절 명절 엿새 전이었는데, 그 유월절 명절 때에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미리 한 주간 전에 예루살렘 전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에 베다니는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는 기쁨으로 가지고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는 한 달쯤 전에 그 동네 베다니에 사는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무덤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시는 기적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 동네가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을 맞이하여 서로 대접하고자 열심을 내었는데, 이번에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신 사람은 문둥병으로 고생하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았던 시몬의 집이었습니다.
시간을 추측하건대 그 날 오후 늦게 도착한 예수님을 맞이하여 베다니 동네 사람들이 함께 저녁 식사를 준비하였는데 그 날 나사로도 예수님을 맞이하러 그 집에 찾아오고 마르다와 마리아도 그 집에 찾아와 분주하게 음식을 차려내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그 집 주방에서는 늘 음식 준비의 달인인 마르다가 총 지휘하면서 예수님을 맞아 대접하는 이 잔치를 풍성하게 준비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그 날 밤 식사 도중에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자기 오빠 나사로를 살려주신 것에 대하여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어서 마음에 결심했던 바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 동안 마리아가 애지중지 돈을 모아서 사놓았던 나드 기름을 담은 옥합 한 병을 가지고 와서 깨뜨려서 그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고 그 머리에 부어드렸습니다. 그 옥합 한 병의 가격은 당시로 삼백 데나리온 오늘날 가격으로 치면 천오백 만원, 이천 만원 상당의 비싼 향유 기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퍼졌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가룟 유다와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은 비싼 향유를 함부로 낭비한다고 불평하며 마리아를 책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곧 세상을 떠나갈 것을 아시고 그녀의 그 헌신의 마음을 기쁘게 받으시고 불만을 표현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12:7,8)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서는 주님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마태복음 26:13)
고 덧붙여 말씀해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대속적 고난에 대하여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아 알았고 예수님께서 이번 예루살렘에 올라오셔서 죄인들을 위하여 희생의 피를 흘리시고 자기들 곁을 떠나실 것을 영적으로 짐작하여 알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녀는 늘 주님의 말씀을 깊이 듣고 묵상하는 아름다운 영적 태도를 가졌던 여인이기에 충분히 그럴 것입니다. 마리아의 향유 부음은 주님의 곧 일어날 그의 죽음과 그 장례를 깨닫고 예수님의 몸에 그 향유를 미리 부어드림으로써 그의 죽음을 향기롭게 하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전혀 이러한 영적 깨달음이 없이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예수님 덕분에 높은 관직 한 자리 차지할 세상적인 욕심만 가득찼기 때문에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마리아의 이 기름부음의 헌신을 낭비라고 비난하기만 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소중함을 깊이 인식하는 자는 그에게 드리는 헌신이 조금도 아깝지 않으나, 주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은 헌신하는 자의 손길을 낭비요 허비로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깝지 아니할 때에 그 마음은 은혜 받은 심령이고,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깝고 낭비라고 생각될 때 그 마음은 은혜받지 못한 심령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는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베다니 동네에 찾아왔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유월절 명절 전에 베다니에 찾아왔다는 소문이 예루살렘에까지 퍼져서 유대인들이 성에서 나와서 가까운 그 베다니 마을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만 뵈려고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9절에 보니, 그들이 온 것은 예수님만 뵈려고 온 것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주님께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고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베다니는 매우 가깝고 마리아 가족은 예루살렘과 매우 절친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오며 가는 사람들은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집에 들러서 물 한 그릇, 국수 한 그릇, 된장찌개 한 그릇 안 얻어 먹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 집은 인심이 후하고 늘 남을 대접해주기 좋아해서 누구나 좋아했던 집안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집에 한달 여 전에 나사로가 죽어서 장례식에 다녀왔는데, 그 후 장례식 치른 뒤 나흘만에 예수님이 올라오셔서 그를 무덤에서 다시 살려내셨다는 말씀이 온 예루살렘까지 파다하게 퍼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예수님도 오시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도 얼굴을 보자고 다들 아름아름 찾아온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는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대제사장의 명령이 있었던 줄 알기 때문에 이렇게 예수님을 뵈려고 찾아오는 것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베다니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나흘만에 살려내셨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놀라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직접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자들 중에 이번 기회에 예수님도 보고 나사로도 만나 보자고 하여 예루살렘에서 내려와 그 날 밤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베다니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서 저녁 식사 자리에 앉아 계신 것과 그 곁에 나사로가 멀쩡히 살아서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나서 예수님을 이제 온전히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11절에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고 하신 말씀이 그런 맥락의 말씀입니다. 이처럼 나사로를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큰 본보기가 됩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보고서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사건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나사로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간증이 있다면, 그 말을 듣는 자들은 다 놀라서 예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꼭 나사로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 육체적으로 다시 살아난 것 말고도 우리 영혼과 마음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새 사람이 된다면 그 결과 우리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놀라워하며 예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술 주정뱅이가 예수님을 믿고 술을 끊고 달라졌다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예수님을 믿게 만드는 큰 간증거리가 될 것입니다. 싸움꾼이 변하여 온유한 자가 되고, 도박꾼이 변하여 살림꾼이 되고, 입술에서 늘 원망 불평이 끊어지지 않는 자가 변하여 늘 입술에서 감사와 찬송이 그치지 않는 감사 대장이 된다면, 우리를 보는 자들이 변하여 예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된다면, 우리를 보는 자마다 다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겠다고 나서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와 나사로, 그리고 늘 대접하기를 힘썼던 마르다 세 남매의 삶은 예수님 당시에 베다니의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도 한평생 마르다처럼 다른 이들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대접하기 힘쓰는 손길이 됩시다. 또한 마리아처럼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그를 사랑하여 우리의 옥합을 깨뜨려 향기를 품기는 자들이 됩시다. 또한 나사로처럼 주님 은혜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살아난 자가 됩시다. 그리함으로써 우리를 통하여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더해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