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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의 순간 포착 그린 화가의 속내
한국 문인화의 상징이었던 월전 장우성
문화 황정수(aubrey)
오마이뉴스 기사 등록 : 2019.07.25. 08:46
한때 화가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1912-2005)은 한국 문인화의 상징이었다. 그의 그림이 기품 있는 삶과 절제된 동양 정신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여, 많은 애호가들이 그의 그림을 좋아하였다. 많은 저명한 집안의 귀부인들뿐만 아니라 해외 공관의 대사 부인들도 그에게서 그림을 배우는 등 그의 존재는 한국 문인화의 대명사처럼 불렸다.
실제 그는 자신의 집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여 선대들에 대해 무한한 존경을 보냈다. 자신의 집안은 대대로 선비 집안이었으며, 증조부는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의병운동을 했고, 조부는 의병활동에 재정적 지원을 하였으며, 부친도 한학에 밝았다고 한다. 그는 늘 이런 집안의 배경과 자신의 문인화 정신을 연결시켜 자부심을 보이곤 했다.
장우성은 어려서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기 시작한다. 천성이 다정다감하여 자연과 함께 하기를 좋아하였는데, 특히 달밤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집안에 유독 책이 많아 법첩을 보고 글씨를 쓰기도 하고, 옛 그림을 보고 베끼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꾸중을 듣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당 김은호의 문하에 입문
13, 14세 경 어머니와 서울 외가에 왔다 발전된 서울의 모습을 보고 자극을 받아 일본어를 배우려 하자, 부친은 일본 사람 앞잡이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환쟁이가 되라며 그림 그리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마침 건너 마을에 이당 김은호의 매부가 살고 있어 부친의 부탁으로 김은호의 문하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부친 장수영(張壽永)은 서울로 떠나는 아들에게 달을 좋아하는 마음을 담아 '월전(月田)'이란 호를 지어주었다.
1930년 서울에 올라온 장우성은 종로 단성사 뒤쪽 봉익동에서 하숙을 하며, 창덕궁 앞 권농동에 있는 김은호의 화숙 '낙청헌(絡靑軒)'에 들어간다. 그때 나이 19세 때였다. 이때 낙청헌에는 백윤문, 이석호 등 선배들이 있었고, 동년배들로는 김기창이 두어 달 먼저 들어와 있었으며, 조용승, 한유동, 장운봉, 조중현, 이유태 등도 있었다.
장우성은 낙청헌에서 김은호에게 그림을 배우는 한편, 당대의 명필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6)가 운영하는 '상서회(尙書會)'에 나가 글씨를 배운다. 여기에서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1902-1981)을 처음 만나 평생지기로 지낸다. 두 사람은 10년의 나이 차이가 났으나 서로 뜻이 맞아 가까이 지냈다. 손재형은 서화골동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장우성이 훗날 서화골동에 눈을 뜨게 되는데 많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서화협회와 조선미전에서의 활동
장우성은 낙청헌에서 서화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서화협회전과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바로 입선하기 시작한다.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로부터 1944년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수상한다. 1936년에는 백윤문, 김기창, 한유동, 조중현, 이석호, 이유태 등과 함께 김은호 제자들의 모임인 '후소회(後素會)'를 만든다. 이후 장우성은 김기창과 함께 김은호 문하의 가장 영향력 있는 두 축으로 성장한다.
이 시기에 그린 작품으로 1930년에 그린 '귀목(歸牧)'이란 작품이 남아 있다. 이 작품은 1935년 제14회 조선미전에서 입선한 작품으로 한 소년이 날이 저물자 망태를 메고 소를 몰고 돌아오는 작품이다.
식민지하의 한국의 풍경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당시 조선총독부가 주창한 '향토색'을 구현한 전형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원초적인 풍습을 표현하게 함으로써 식민지의 진취적 기상보다는 소박한 풍경을 그려 미개한 민족이라는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의도라는 비판도 있다.
조선미전 후반기에 접어들고 태평양 전쟁이 일어날 즈음이 되자, 1940년 서울에 전시 최대 관변기구인 '국민총력조선연맹'이 발족한다. 그러자 조선미술가협회는 총독부 정보과와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후원을 받아 1942년 11월 '반도총후미술전람회'를 개최하기 시작하여 44년까지 3년간 지속한다. 장우성은 1943년에 '부동명성왕상'이라는 작품을 제작하여 출품하였으나, 작품을 운반하는 도중 소나기를 만나 작품이 망실되어 출품이 무산되었다. 또한 장우성은 1944년 3월에 열린 '결전미술전' 일본화부에도 작품을 출품한다.
이때에 출품된 작품들은 시국색이 강한 작품들이었다. 이러한 경력은 훗날 장우성이 친일미술인으로 낙인찍히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에 대해 장우성은 당시 한국 화단에서 성적이 좋은 화가들만 차출되었기 때문이라고 항변하였지만 '친일 미술인'이라는 주홍글씨를 지우지는 못했다.
이 시기에 그린 작품으로 남아 있는 중요한 작품은 1943년 제22회 조선미전에 출품하여 '창덕궁상'을 받은 '화실(畫室)'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자신의 화실 풍경을 그린 것인데, 작품 속 인물은 장우성과 그의 아내이다. 한복을 입고 책을 보고 있는 아내의 모습은 평소 아내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작품의 모델로 등장하는 여성처럼 보인다.
한 장소에 함께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는 눈길이 화면에 긴장감과 변화를 준다. 서양식 복장을 하고 담배 파이프를 문 화가와 한복을 입고 서양 책을 보고 있는 아내의 부조화가 당시의 현실을 반영한 듯한 느낌을 준다.
해방 후 화가, 교육자로서의 활동
장우성은 1945년 해방이 되자 새로운 물결에 자연스럽게 동참한다. 조선미술건설본부 위원이 되었으며, 1946년에는 배렴, 이응노, 김영기, 이유태, 김중현 등 당시 화단의 중추 세력들과 동양화의 혁신을 목적으로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을 조직하였다.
얼마 후 서울대학에 미술학부가 만들어지자 김용준과 함께 교수가 되어 1946년부터 1961년까지 재직한다. 1949년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창설되자 초대작가,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1981년까지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하며 화단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1950년 한국전이 발발하자 이듬해 종군화가로 중부전선에 종군하였다. 전쟁 후에도 그의 역할은 줄어들지 않아 1953년에 이충무공 기념사업회의 위촉으로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제작하여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국가적인 기념물로서의 영정을 많이 제작하였는데, 김유신, 권율, 정약용, 강감찬, 윤봉길, 정몽주 등 많은 영정을 제작하였다.
1957년 장우성은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서울대학교 개교 십 주년 기념으로 작품 한 점을 기증한다. 서울대학교의 학생들이 교정에서 서있는 모습을 그린 '청년도(靑年圖)'라는 작품이다. 큰 화면의 전면을 꽉 채워 인물들을 그리고 있는데, 전후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희망에 찬 젊은이들을 그리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 속의 인물은 대부분 현대적인 모습을 하고 현대적인 옷을 입고 있다. 그런데 아래쪽 한 여학생은 한복을 입고 있는데, 당시 현대화 과정에 있는 학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섯 명의 학생들이 화면 전면을 가득 채워 서 있는 모습이 과감하고, 각기 다른 표정의 인물들에서 생동감이 느껴진다. 특히 화사하면서도 부드러운 색감은 장우성의 예민하고 감성적인 품성을 느끼게 한다.
말년의 감각적인 문인화들
장우성은 1961년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사직하였는데, 그 이후에도 늘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1963년 미 국무성 초청으로 워싱턴에서 개인전을 가지고, 미국인들에게 3년여 동안 문인화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귀국하여서도 여전히 국가 기관의 일을 많이 맡았는데, 1974년에는 세종대왕기념관에 '집현전학사도'를, 1975년에는 국회의사당 벽화 '백두산천지도'를 제작하여 뛰어난 대작을 여럿 남겼다.
이 시기에 그린 대다수의 작품은 주로 '문인화'라는 화풍으로 정리된다. 장우성의 작품은 김기창의 청록산수, 허건의 남종산수화, 박노수의 감각적인 문인화 등과 함께 한국 화단에서 동양화가 중심을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그의 장미 그림, 달밤의 매화, 수선화 등 간결한 그림은 대중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었다. 그의 그림은 단정한 필치와 고운 색감, 정감 있는 소재와 넉넉한 여백의 아름다움으로 현대 문인화의 격조를 보여 주었다.
또한 장우성은 인간이나 동물의 감각적인 순간을 포착하여, 그 속에 현대 인간의 삶의 애환을 풍자하는 내용을 자주 그렸다. 특히 고양이와 원숭이, 개와 학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이는 그가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중국의 팔대산인, 신라산인, 한국의 안중식, 변상벽 등의 화가들의 그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화난 고양이를 그린 '노묘(怒猫)'라는 작품에서 "아마 이 고양이가 크게 한 번 소리치면 세상의 모든 도둑질하는 쥐들이 다 도망 갈 것이다"라고 화제를 쓴 것을 보면, 단순한 고양이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인간 세상의 일을 풍자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풍자는 점차 폭을 넓히며 원숭이만도 못한 인간의 모습을 비꼬거나, 현대 인간들의 변모된 모습을 그리기도 하였고, 뱀을 잡아 먹는 황소개구리를 그려 주객이 전도되어 가는 세태를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문명화 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소외되어 가는 인간의 삶을 구원하고픈 예술가의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남북이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보여주려 휴전선 철조망을 그려 마음을 담기도 하고, 분단된 현실 속에서 갈 길 몰라 하는 병든 새들의 뒤틀린 모습을 통하여 현실의 부조리를 일깨운다.
그 중 '오염지대'라는 작품은 인간들이 편리를 위해 추구한 근대화가 만들어낸 공해의 폐해를 비판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인간의 문명이 만들어낸 독한 폐수는 강과 바다를 더럽히고, 산천의 초목들을 말려 죽이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과 가축은 서서히 죽어간다. 이러한 모습을 죽어가는 한 마리 학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기력을 잃어 날개죽지 조차 들지 못하는 한 마리 학의 모습이 애처롭다. 인간은 이러한 상황을 뉘우치지 못하고, 결국 그 안에서 죽어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장우성은 자신의 그림을 문명화된 세상에서 인간성 회복을 위한 마지막 비상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장우성(張遇聖)
신상정보
출생 1912년 6월 22일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충주)
사망 2005년 2월 28일(92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종교 무종교 → 천주교(세례명 : 요셉)
분야 동양화
장우성(張遇聖, 1912년 6월 22일 ~ 2005년 2월 28일)은 대한민국의 현대 화가이다. 본관은 단양, 아호는 월전(月田)이다.
충청북도 충주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충청북도 단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경기도 여주에서 성장한 그는 한학을 공부한 뒤 김은호 문하에서 한국화에 입문하였다. 그림 공부를 한 지 2년 만인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으로 등단하였는데, 첫 입선작은 바닷가의 파도와 갈매기를 묘사한 〈해빈소견〉이었다. 1944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가 됨으로써 화가로서 최고의 영예도 얻었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지내면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대한민국 동양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역임했고, 은관 문화훈장(1976, 박정희 대통령 수여), 금관 문화훈장(2001, 김대중 대통령 수여)을 차례로 수여받았다. 전통 문인화의 화법을 현대적 감각으로 변용하여 대한민국 한국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왔다는 평을 듣는다.
문인화 전통에 따른 수묵담채 위주의 인물화를 그리면서도 초기부터 서구풍의 사실적인 표현을 도입하였다. 대표작 중 하나인 〈춤〉은 간결한 선의 힘을 강조하고 여백을 활용하는 화풍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인물화, 산수화, 정물화를 즐겨 그렸고, 학과 백로도 주요 소재였다. 2001년 90세의 나이로 휴대전화를 든 여인의 모습을 그린 현대적 인물화를 발표했을 만큼 말년까지 활발한 활동을 했다.
나라의 대표적인 훈장을 받은 예술가임에도 사후 친일에 관한 논쟁이 있는 화가이다. 민간단체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미술 부문에 선정되었는데 그 사례로 일제강점기 말기에 어용 전시회인 반도총후미술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부동명왕(不動明王)을 준비한 점이 쟁점이 되었다.
다만 대한민국의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적용, 조사하여 공식 발표한 일제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는 빠져 있어 공식적으로 친일명단에 들어간 것은 아니며, 해방 직후 친일인물을 제외하고 설립된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대표적인 친일 문제 연구자인 임종국의 '황국신민화 시절의 미술계'(1983)에도 친일 미술가 명단에 명백히 제외되어 있어 친일 논쟁에 관한 다양한 의견이 있다. 더불어 독립운동가 성천 류달영 선생과 막역한 사이였던 월전 장우성이 친일파였을 리 만무하다는 의견도 있다. 성천 류달영의 삶과 사상을 기록한 책에도 월전과의 일화를 쓴 내용이 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당시 류달영과 영릉 참배를 함께 했던 친구로 여주가 고향인 동양화가 월전 장우성 화백이 있다. 평생지기로 보낸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난 시기도 비슷했다. 류달영은 장우성이 그린 <기(祈)>라는 그림을 보고 친구의 속뜻을 짚어 냈다. 그림에는 흰 옷을 입고 머리를 숙이고 서 있는 두 사람의 젊은 여성과 꽃다발을 한아름 안고 꿇어앉아 있는 여성이 있다. 일본이 마지막 발악을 할 때여서 그림에 민족 감정을 조금이라도 드러내면 안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성서조선 사건’으로 잘 알고 있다. 당시 일본인들은 이 그림이 일본의 전쟁 승리와 제국주의의 번영을 기원하는 것으로 생각해 공식 그림 대회인 선전(鮮展)에 입상시켰다. 하지만 류달영만은 월전 화백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세종대왕릉에 함께 참배하는 친구가 일본인의 전승을 기원하는 그림을 그렸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그림은 간소한 선과 담백한 색채에 높은 기품이 서려 있고 흰 눈 속에서 더욱 푸르른 소나무의 넋이 그림 가운데 있는 젊은 여성들에게 깃들어 있는 듯 느껴졌다. 제복이 말하는 ‘기원’은 바로 조선의 독립과 광영을 염두에 두었다고 보아야 정확한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후일 월전은 자신이 수집한 엄청난 양의 질 높은 고서화를 이천시에 기증했고 이천시는 설봉공원 내에 월전 미술관을 지었다. 그런데 일부 시민들이 선전에서 입선한 이 작품을 트집 잡아 월전을 친일파로 몰았다. 하지만 독립유공자인 유달영이 이 그림에 깃든 사연을 글로 남겨 두어 월전은 누명을 모면할 수 있게 되었다. 류달영은 친구에게 이 그림을 빌려 달라고 요청해 자신이 재직하던 개성 호수돈여학교 현관에 전시했다. 자식처럼 사랑하던 순결한 제자들에게 나라를 위한 간절한 기원을 가르쳐 주기에 이 그림만큼 적합한 장면은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분분한 의견으로 2005년 서울대학교 교내 단체가 발표한 '서울대학교 출신 친일인물 1차 12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월전 장우성은 대한민국 표준영정 제1호 충무공이순신 영정을 그린 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충무공의 영정 뿐만 아니라 유관순의 표준영정도 그렸었는데, 친일 행적과 관련하여 그가 그린 유관순의 정부표준영정을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며,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유족들은 장우성이 "일제시대 화가로 입문하기 위해 상을 받고 활동을 했을 뿐"이라고 반박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유관순의 사진을 통해 그린 장우성의 유관순 정부표준영정은 유관순 열사가 고문으로 얼굴이 부어 있는 상태의 사진을 참고하여 그린 영정이었기 때문에 이후에 여러가지 논의를 통해 제대로 된 유관순 열사의 얼굴을 찾자는 논의가 있어왔으며, 장우성이 2005년에 사망하면서 윤여환 충남대학교 회화과 교수가 유관순의 정부표준영정을 새로 제작하게 되었다. 윤여환이 제작한 유관순의 정부표준영정은 2007년에 새로 지정되었다.
월전 장우성 타계와 친일보도 – 미디어오늘
[온라인 기자칼럼] 친일행적 침묵하면서 식민통치 비판하나
기자명 이선민 기자
미디어오늘 기사 입력 : 2005.03.01. 23:13
지난 1일자 아침신문들은 한 거장의 죽음을 알렸다. 한국적 문인화를 개척했다고 평가받는 월전 장우성(1912∼2005)의 타계 소식이었다.
'신인문화 개척자', '화단의 산증인', '한국미술의 살아있는 역사' 등의 표현에서 드러나듯 한 거장의 죽음을 대하는 언론의 태도는 참으로 극진해 장우성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사람마저도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지난해 '리커란-장우성전'을 보고 그의 필력에 감탄한 적이 있지만 그의 타계 소식은 기자에게 '한 미술거장의 죽음'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타계 소식을 듣자마자 떠오른 것은 그가 85년 그린 '흉하게 부어오른' 유관순 영정이었고, 그의 '친일'전력이었다.
'한국화의 거목'이자 '친일화가'이기도 한 그의 부음이 3·1절 신문을 장식한 것을 두고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말하면 지나친 억지일까? 그의 타계일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보다 3·1절 월전의 '친일'에 침묵하면서 민족정기 운운하는 신문들을 보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에 가까우니까.
장우성의 '친일' 침묵한 언론
<한국화에 '현실' 접목 '신문인화' 개척 업적>(경향)
<문인화 대가 월전 장우성화백 타계 충무공영정 등 대작 남겨>(국민)
<일 영향 벗은 독자적 한국화 개척>(동아)
<시·서·화 능통 최후의 선비화가>(서울)
<그의 붓은 한국화 역사였다>(조선)
<시와 글씨로 조형미 살린 새 문인화풍 열어>(중앙)
<운보와 수학…'마지막 문인화가'>(한국)
<현대 문인화 이끈 '거목'>(한겨레)
각 신문의 제목을 보면 언론의 각별한 애정을 걸러내더라도 그 누구도 그가 한국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물론 언론의 찬사일색 보도에는 사자(死者)에 대한 예의도 담겨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의를 차리는 데 바빴던 걸까? 그의 부음기사에선 '사실'이 빠져 있었다. 월전의 '90년 미술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그의 친일활동인데, 언론은 지면 할애에 지나치게 인색했다. 한 사람의 공과를 엄정하게 다뤄야하는 책무를 저버린 것 같다.
"친일 시비에 휘말리며 불편한 만년을 보내기도 했다."(경향)
"…친일작가 논란이 불거지며 병세가 악화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한국)
"최근 친일작가라는 논란까지 불거져 병세가 더욱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친일시비는 장 화백에게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안겨줬다."(서울)
"일본 총독부의 요청으로 수상자를 대표해 답사한 것을 빌미로 친일파라는 오명을 받는가 하면…"(국민)
"최근 일부에서 친일시비로 유관순 영정 교체 논란이 일기도 했다."(세계)
"일제시대부터 활약한 월전은 역시 친일 시비를 피해가지 못했다. 1980년대 초 친일화가 파동 때는 반박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경기도 이천시가 추진중인 월전미술관 건립 계획 발표 직후, 또 삼일절을 앞두고 유관순 열사 영정 문제를 놓고 다시 친일 문제가 불거졌을 때는 이미 병석에 누운 상황이었다."(조선)
"월전은 광복 전 선전에서 각광받는 등 일제시대에 활동한 전력 탓에 광복 후 '친일미술가'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이에 대해 "광복이 되자 민족문화를 이루려는 거대한 각성이 일었다. 나 또한 '이제까지 바른 길을 오지 못했구나'싶어 일본 그림의 요소를 지워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말했다."(중앙)
▲ 한겨레 3월1일자 21면.
"시인 서정주와 함께 수학한 동료 화가 김기창처럼 작가적 성취와 별개로 친일경력 시비는 그를 평생 따라다닌 족쇄였다. 이당 김은호를 사사하면서 일본풍 채색화로 선전 등 일제 관전에 다수 입상했고, 해방 뒤 문인화풍으로 돌연 화풍을 바꾼 이력 때문이다. 제자들은 그를 큰 어른으로 존경했지만 재야미술계는 그를 친일 경력을 덮은 처세주의자로 비판했다."(한겨레)
대부분의 언론에게 그의 친일행각은 그의 명을 재촉한 원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또한 일부 언론은 '일부'라는 표현을 써 그의 친일을 한때 지나가는 바람처럼 가볍게 보거나 철저히 그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등 친일전력을 감싸는 듯한 입장을 보였다.
동아일보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친일'이라는 단어를 아예 한 줄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친일전력을 역사에서 깨끗이 지워버렸다. 대신 동아일보는 <일 영향 벗은 독자적 한국화 개척>이라는 제목을 부각시키며 민족문화를 일군 민족화가의 면모를 강조했다.
이밖에도 "일제 강점기 한국화의 정체성 혼란 속에서도 전통에 대한 강직한 신념과 한국화의 예술적 가치를 근대적 발상으로 재창조하여 동양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던 그의 노력은 1942년 선전 최고상에 빛나는 '창덕궁상' 수상으로 한국화 거장의 자리에 이름을 올린다"(세계) 등의 보도에서는 최소한 역사의식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지난 2001년 친일화가인 운보 김기창 화백의 부음기사와 비교해 월전의 부음기사에서는 그의 병세악화 원인으로나마 '친일'을 언급하긴 했으니 진일보한 것이라고 해야할까?)
결전미술전 출품 등 월전의 '친일행적'
월전은 41년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푸른전복'으로 총독상을 받았고, 42년과 43년에 창덕궁상을 받았다. 일부에서는 이를 '왜색화풍'과 함께 그의 친일행적의 대표 사례로 꼽지만 미술사학계에서는 그의 친일행적은 다른 곳에 있다고 말한다.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1943)과 결전미술전(決戰美術展·1944)의 작품 출품과 조선미술전람회 시상식의 답사내용(1943)이 그것이다.
최열 한국근대미술사학회 학술이사(미술평론가)는 "결전미술전은 일제가 군국주의와 황국신민화를 고취시키기 위해 연 전시회로 일제의 마지막 발악과도 같다. 일제는 이 미술전에 김인승 박은성 심형구 이국전 윤효중 김경승 등과 같이 친일활동을 활발히 한 작가들을 엄선해 참여시켰다"고 말했다. 이 같은 사실은 최근 민족문제연구소가 결전미술전 목록을 발견하면서 알려졌다. 월전은 결전미술전에 '항전'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출품한 것으로 추정된다(결전미술전목록의 인쇄상태가 나빠 작품명은 정확지 않다).
조선미술전람회 시상식의 답사는 월전의 또 다른 친일행적으로 거론된다. '매일신보'는 1943년 6월16일자 신문에서 조선미술전람회 시상식(1943.6.15.)을 다루며 "동양화의 장우성 화백은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총후 국민예술 건설에 심혼을 경주해 매진할 것을 굳게 맹세했다"며 장우성 화백의 답사내용을 보도했다.
그러나 최열 이사는 "일제시대 친일행적도 문제지만 장우성 화백의 더 큰 문제점은 1983년 그가 보인 행태였다"고 그의 친일행위 부정을 비판했다. 1983년 초 9명의 미술평론가는 '계간미술'(봄호)에 '한국미술의 일제식민잔재를 청산하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미술계의 친일을 비판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월전은 자신에 대한 비판에 즉각적으로 반발했다. 그는 다른 화가들과 함께 같은 해 4월 일간지에 '불신과 불화를 조장하는 저의를 묻는다'라는 제목의 의견광고를 내고, 백상기념관을 빌려 규탄시위를 열었다. 월전은 성명에서 "일제 잔재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가를 일반에게 묻고 싶다"는 등의 발언을 하며 친일미술과 자신에 대한 비판을 부정했다.
최열 이사는 '과거에 대해 돌아보지 않는' 그의 태도가 그의 자서전에서도 잘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최 이사는 "월전은 1982년 펴낸 회고록 <화맥 인맥>에서 조선전람회 답사와 관련해 '고맙다. 정진하겠다'고 짤막하게 답사했다고 썼다. 그러나 <화맥 인맥>을 개정해 2003년 다시 펴낸 <화단 풍상 70년>에서는 이 대목을 아예 빼버렸다"고 말했다.
3·1절 일제 비판하면서 친일 행적 침묵
'위안부' 발언, '독도' 발언 등을 비롯해 일본 극우인사들의 몰역사적인 발언으로 한국 언론은 조용할 사이가 없다. 어느 날짜 어느 신문을 펼쳐들건 간에 일본을 규탄하는 더 나아가 일본의 식민잔재를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언론은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만세를 외쳤다는 3·1절을 전후해 일제와 일본에 대해 더욱 강하게 비판했다. 국내 인사의 친일행적 사실을 싣는 데 꺼리면서 말이다.
언론이 국내의 친일잔재 규명에 앞장설 것을 바라지 않는다. 다만 국내 '거장'의 친일행적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판하는 것은 설득력이 전혀 없다는 것만은 알았으면 한다.
무수한 위인 초상화 남긴 친일경력 시비 月田 장우성 (1912-2005 한국화ㆍ동양화)
글 : 예술의향기
글 게시일 : 2023.08.26.
"시인 서정주와 함께 수학한 동료 화가 김기창처럼 작가적 성취와 별개로 친일경력 시비는 그를 평생 따라다닌 족쇄였다. 이당 김은호를 사사하면서 일본풍 채색화로 선전 등 일제 관전에 다수 입상했고, 해방 뒤 문인화풍으로 돌연 화풍을 바꾼 이력 때문이다. 제자들은 그를 큰 어른으로 존경했지만 재야미술계는 그를 친일 경력을 덮은 처세주의자로 비판했다."(한겨레)
대부분의 언론에게 그의 친일행각은 그의 명을 재촉한 원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또한 일부 언론은 '일부'라는 표현을 써 그의 친일을 한때 지나가는 바람처럼 가볍게 보거나 철저히 그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등 친일전력을 감싸는 듯한 입장을 보였다.
동아일보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친일'이라는 단어를 아예 한 줄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친일전력을 역사에서 깨끗이 지워버렸다. 대신 동아일보는 <일 영향 벗은 독자적 한국화 개척>이라는 제목을 부각시키며 민족문화를 일군 민족화가의 면모를 강조했다.
이밖에도 "일제 강점기 한국화의 정체성 혼란 속에서도 전통에 대한 강직한 신념과 한국화의 예술적 가치를 근대적 발상으로 재창조하여 동양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던 그의 노력은 1942년 선전 최고상에 빛나는 '창덕궁상' 수상으로 한국화 거장의 자리에 이름을 올린다"(세계) 등의 보도에서는 최소한 역사의식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지난 2001년 친일화가인 운보 김기창 화백의 부음기사와 비교해 월전의 부음기사에서는 그의 병세악화 원인으로나마 '친일'을 언급하긴 했으니 진일보한 것이라고 해야할까?)
각 신문의 제목을 보면 언론의 각별한 애정을 걸러내더라도 그 누구도 그가 한국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물론 언론의 찬사일색 보도에는 사자(死者)에 대한 예의도 담겨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의를 차리는 데 바빴던 걸까? 그의 부음기사에선 '사실'이 빠져 있었다. 월전의 '90년 미술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그의 친일활동인데, 언론은 지면 할애에 지나치게 인색했다. 한 사람의 공과를 엄정하게 다뤄야하는 책무를 저버린 것 같다.
"친일 시비에 휘말리며 불편한 만년을 보내기도 했다."(경향)
"…친일작가 논란이 불거지며 병세가 악화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한국)
"최근 친일작가라는 논란까지 불거져 병세가 더욱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친일시비는 장 화백에게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안겨줬다."(서울)
"일본 총독부의 요청으로 수상자를 대표해 답사한 것을 빌미로 친일파라는 오명을 받는가 하면…"(국민)
"최근 일부에서 친일시비로 유관순 영정 교체 논란이 일기도 했다."(세계)
"일제시대부터 활약한 월전은 역시 친일 시비를 피해가지 못했다. 1980년대 초 친일화가 파동 때는 반박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경기도 이천시가 추진중인 월전미술관 건립 계획 발표 직후, 또 삼일절을 앞두고 유관순 열사 영정 문제를 놓고 다시 친일 문제가 불거졌을 때는 이미 병석에 누운 상황이었다."(조선)
"월전은 광복 전 선전에서 각광받는 등 일제시대에 활동한 전력 탓에 광복 후 '친일미술가'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이에 대해 "광복이 되자 민족문화를 이루려는 거대한 각성이 일었다. 나 또한 '이제까지 바른 길을 오지 못했구나'싶어 일본 그림의 요소를 지워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말했다."(중앙)
무수한 위인 초상화 남긴 한국 화단의 거목 장우성 화백
비에 엉망이 된 그림
장우성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기뻤던 때를 든다면 ‘선전’에서 연속적으로 네 번 특선하고 추천작가가 되었을 때라고 했다.
당시 민족적 색채가 짙었던 순수미술단체인 서화협회가 있었다. 서화협회는 고희동, 안중식, 오세창 등이 주축이 되었다. 일제는 서화협회를 흡수하기 위해 ‘선전’을 만들었다.
서화협회 회원들은 ‘선전’ 참가를 거부했다. 장우성도 서화협회 회원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선전’에 대한 민족 감정도 흐려졌다. 장우성은 '선전'에 작품을 출품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앞서 설명한 대로 네 번 연속 특선하고 추천 작가가 되었다.
특선은 일석, 이석, 삼석으로 구분했는데 일석은 ‘창덕궁상’, 이석은 ‘총독상’, 삼석은 ‘정무총감상’으로 불렸다. 장우성은 ‘푸른 전복(戰服)’, ‘청춘일기’, ‘화실’, ‘기(祈)’로 특선을 받았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자 일제는 ‘반도총후미술전람회(半島銃後美術展覽會)’를 개최했다. 이 전람회는 유난히 시국을 강조하는 작품을 요구했다.
산수화를 그려도 군인들이 배낭을 메고 걸어가는 모습을 넣어야 했고, 농가의 사립문에도 일장기를 꽂아 넣어야 했다. 일제는 장우성을 초대작가로 위촉하고 작품을 출품하라는 통지를 보냈다.
안타깝게도 장우성은 일제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일본 군국주의의 호국불(護國佛)이었던 ‘부동명왕상(不動明王像)’를 그렸다.
작품은 무척 커서 버스에 실리지 않아 트럭에 싣고 서울로 왔다. 그런데 운반 도중에 비가 많이 내려 그림이 엉망 되었다. 도저히 전시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래서 이러한 사정을 글로 써서 출품 불가 사유를 밝혔다.
일제강점기의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해방이 되자 서울대학교로 새롭게 출범했다. 미술대학 초대 학장으로 장발이 임명되었다. 장발의 부탁으로 장우성은 동양화과에서 학생을 가르치게 되었다.
장우성은 후에 서울대를 그만두고 홍익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미술학부장을 맡았다. 그 뒤로 국전 심사위원과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5·16 민족상 수상, 금관문화훈장 수상, 원광대학교 명예철학박사 학위 등을 받았다.
장우성이 그린 충무공 영정
장우성은 우리나라 위인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가장 힘들게 그린 작품은 현충사의 충무공 영정과 행주산성 충장사의 권율 장군 영정이었다. 충무공 영정은 충무공기념사업회의 회장이 의뢰했다.
당시 현충사에는 청전 이상범이 그린 충무공 이순신 초상화가 있었는데, 너무 오래되어 낡았으며, 크기도 작았다. 충무공이 손에 지휘봉을 쥐고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인데 퇴색해서 얼룩덜룩했다. 그래서 충무공 영정을 새롭게 장우성에게 의뢰한 것이다.
장우성은 쾌히 승낙하고 충무공에 대해 더 많이 알기 위해 「충무공전서」와 「징비록」을 읽기 시작했다. 육당 최남선을 만나 충무공 이야기도 들었다. 그리고 온양 현충사에 내려가 충무공 후손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내 오랜 시간 작업 끝에 충무공 영정이 완성되었다.
또한, 장우성은 낙성대 안국사의 강감찬 장군, 경주 남산 통일전의 김유신 장군, 중국 산동성 법화원의 장보고 장군, 포은 정몽주, 의병장 사명대사, 행주대첩의 권율 장군, 진주대첩의 김시민 장군, 문익점, 다산 정약용, 3·1 운동의 유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 등 수많은 인물의 영정을 그렸다.
장우성이 그린 대형작품으로는 세종대왕기념관의 ‘집현전 학사도’, 고려대학교 도서관 벽화 ‘군록도(群鹿圖)’, 국회의사당의 ‘백두산 천지도’가 있다. ‘백두산 천지도’에는 스토리가 담겨있다.
당시 여의도에 새 국회의사당이 준공되었다. 국회 사무총장이 장우성에게 국회의사당 벽화 제작을 의뢰했다. 국회 벽면의 크기는 길이 7m, 높이 2m였다. 장우성은 통일을 대비한 전민족적인 국회의사당의 이미지를 그려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백두산 천지 그림이었다.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 백두산을 등정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었고, 백두산 흑백사진도 구했다.
그리고 남북회담 때 평양을 다녀온 사람이 갖고 있던 백두산 천지 천연색 사진도 보았다. 그림이 워낙 커서 홍익대 강의실 한 개를 통째로 빌어 제작했다. 꼬박 다섯 달 동안 작품을 완성했다.
서울대 김원룡 교수는 “‘백두산 천지도’는 장우성의 평생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회화사에 길이 남을 기념물임이 틀림없다.
세상에 이렇게 맑고 티 없고 큰 그림이 또 있을까. 천부(天賦)의 재(才)와 노심각고(勞心刻苦)의 산물이며 작가 월전의 정진과 노력, 청순불염(淸純不染)의 인품과 예술정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세기의 걸작이 아닐 수 없다”고 찬탄했다.
장우성은 한국 화단을 위해 사재를 사회에 환원하려는 뜻을 세우고 장우성미술문화재단을 설립했고, 서울시 종로구 팔판동에 정원이 있는 월전미술관(寒碧園)을 건립했다.
‘한벽원’이란 이름은 “대나무같이 맑고 차며, 물빛처럼 투명하고 푸르다(竹色淸寒 水光澄碧)”라는 시구에서 가져왔다.
장우성은 자신의 얼이 담긴 작품들과 애장품 등 총 1532점을 고향 이천에 기부했다. 이천시는 이러한 장우성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설봉산 자락에 이천시립월전미술관을 건립했다.
선비와 같았던 화백
장우성의 장례 미사가 서울 혜화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주례로 봉헌됐다. 미사는 유족과 제자 그리고 지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추도식과 함께 거행됐다. 미사에서 유족들은 장우성의 유언에 따라 소장했던 순교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귀한 인장 한 점을 봉헌했다.
선비와 같았던 화백 장우성의 장례 미사가 서울 혜화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주례로 봉헌됐다. 이날 미사는 아들 장학구(도미니코), 딸 정란(베로니카), 성란(소피아), 혜란(크리스티나) 등 유족과 제자 그리고 지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식과 함께 거행됐다.
딸 장정란(가톨릭대 교수)은
“유명한 인장 수집가이기도 했던 아버님은 정약현과 약전·약용·약종, 그들의 아버지인 정재원 등 정씨 일가의 인장 다수를 소장하고 계셨습니다. 특히, 정약종의 인장은 단 하나뿐으로 신유박해 200주년 기념 특별전을 계기로 순교자의 위상과 유품의 중요성을 더욱 절실히 아시고 교회에 봉헌하길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라고 밝혔다.
정약종은 정약용의 셋째 형이며 성인 정하상 바오로의 아버지이다. 초대 조선 천주교회장을 지냈고 가톨릭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를 집필하기도 했다. 정약종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하여 집전한 시복 미사에서 복자로 추대되었다.
이렇듯 장우성은 역사적으로 종교적으로 매우 큰 가치가 담긴 인장을 교회에 봉헌한 것이었다.
“월전은 언제 보나 그의 ‘집현전 학사도’에 나오는 단아한 조선시대의 선비와 같다. 지금의 우리나라에서 시서화를 겸비한 전통적인 작가는 월전이 유일이고 월전으로서 아마 마지막이 될 것이다.”(김원룡)
“월전 장우성은 화단의 백학이요, 텍스트적인 존재다.”(김동리)
참고자료
▲장우성. 월전 회고 80년사. 호암미술관. 1994.
▲장우성. 月田 張遇聖. 지식산업사. 1981.
▲장우성. 畵脈人脈. 중앙일보사. 1982.
▲장우성. 月田隨想. 열화당. 2011.
▲가톨릭신문 2004.9.19., 2005.3.13., 2009.5.24.
장우성(張遇聖) 화백의 대표작품
이순신 표준 영정
이순신 장군 영정, 친일 논란 이제 그만
DealSite경제TV 기사 입력 : 2023.02.17. 07:00
글 : 이성낙 논설위원, 가천대 명예총장, 전 현대미술관회 회장
원로 철학자 김형석 교수가 “아직도 친일파 운운하는 사람들”(조선일보, 2023.2.3.)이라고 지적해서가 아니라, 이젠 “친일파 운운하면 신물 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근래 친일파 논란의 중심에는 우리 모두의 성웅(聖雄)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의 영정을 제작한 화가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1913~2001) 화백이 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장우성 화백은 친일파이고, 그 친일파가 그린 성웅의 영정은 퇴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우성 화백이 친일파인 이유를 열거한 몇 가지 논거에 수긍하기보다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됩니다.
특히 젊은 장우성이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 화백의 문하생으로 입문해 ‘붓 다루기’나 그림의 ‘구도를 잡는 기본기’를 배웠을 터인데, 그런 사실을 두고 친일 화가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의 소산이 아닌가 싶습니다.
왠지 설득력이 없습니다. 국내 민중신학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고 심원(心園) 안병무(安炳茂, 1912~1986) 교수는 오래전(1959, 하이델베르크) 필자에게 “개[犬]가 만든 학문이라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워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필자는 이 충언을 소중히 가슴에 담고 있습니다. 이는 동·서양 학계의 공통된 지침이기도 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에 의하면, 장우성 화백이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총후(銃後, 전쟁터의 후방이라는 뜻) 국민예술 건설에 심혼(心魂)을 경주하여 매진할 것을 굳게 맹세”했다고 친일파라 합니다. 작가가 최우수상을 받아 감격해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답사한 게 ‘큰 흠’이 된 것입니다. 월전은 일제 강점기인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로부터 1944년에 이르기까지 연속 수상한 바 있습니다.
어떤 경연에서든 특상이나 최우수상을 받아본 사람들이 ‘감격해하는 모습’은 동양과 서양이 다르지 않으며, 옛날과 오늘이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요컨대 매우 감동해서 흥분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논쟁의 초점은 화가 장우성이 제작한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에 담긴 화풍(畫風)이 조선 시대 화법(畫法)에 반(反)하는지 또는 일본 고유의 전통에 따르거나 일본 화풍에 크게 영향을 받았는지 등으로 옮겨야 합니다. 일본 초상화와 우리나라 초상화는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본 초상화에는 제작 지침이 있습니다. 히키메가기하나(引目鉤鼻)기법이라는 지침이 그것인데, 아랫볼이 불룩하고 둥근 얼굴에 두꺼운 눈썹, 가늘게 일직선으로 그은 눈, ‘〱’자형 코, 그리고 조그마한 붉은 점을 찍은 입으로 이루어진 얼굴 묘사법입니다. 각기 다른 사람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코는 어떻게, 눈은 어떻게 그리라는 지침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생소합니다. 그만큼 일본과 우리나라의 ‘초상화 그리기’ 기법은 달라도 아주 다릅니다.
조선 초상화는 ‘있는 대로, 보이는 대로’ 그린 반면, 교토대박물관 소장 일본 도쿠가와 초상화는 안면이 백색으로 처리되어 있고, 허리에 긴칼[長刀]을 움켜쥐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일본 초상화는 피사인(被寫人)의 안면(顔面)을 흰색으로 처리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의 초상화를 비롯해 다른 무인(武人)들의 초상화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 외에 일본 초상화에서 크고 작은 일본검(日本劍)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우리와 다른 점입니다.
일본 화가가 그린 조선인의 초상화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조선통신사를 이끌고 일본을 방문한 조태억(趙泰億, 1675~1728)을 일본 화가 가노 쓰네노부(狩野常信, 1636~1713)가 화폭에 옮긴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조선 시대 초상화에서도 가끔 피사인이 바닥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대부분 의자에 앉아 있는 게 보통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초상화는 도요토미와 도쿠가와처럼 피사인이 방바닥에 앉아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일본 화가는 바닥에 앉아 있는 자세의 조태억을 그렸습니다. 또한 피사인의 입술을 눈에 띌 만큼 붉게 묘사했습니다. 일본 초상화 특유의 인위성입니다.
반면, 조선 시대 화가는 한결같이 피사인의 모습을 ‘있는 대로, 보이는 대로’ 그렸습니다. 1688년 숙종(肅宗) 14년 3월 7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기록되어 있기를, “한 가닥의 털, 한 올의 머리카락이라도 혹시 달리 그리면 즉 다른 사람이다[一毛一髮 少或差殊 卽便是別人者]”라는 초상화 제작 지침을 조선의 화가는 예외 없이 따랐습니다. 또한 조선 초상화에서는 일본과 달리 어떤 크고 작은 칼[刀]을 볼 수 없습니다.
월전은 1933년 20세의 젊은 나이에 70세의 조부 만낙헌(晩樂軒) 장석인(張錫寅, 1863~1938)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선에서 500여 년간 끈질기게 전해온 ‘있는 대로, 보이는 대로’의 화법으로 할아버지를 화폭에 옮겼습니다. 할아버지를 그리면서 조금도 미화한 흔적을 볼 수 없습니다. 정직하되 ‘아름답지’ 않게 그린 것이어서 더욱 빛난다고 하겠습니다. 즉, 일본풍이 아니라 조선풍을 따른 것입니다.
장우성 화백이 그린 성웅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에서 우리는 어떤 친일적인 화법의 작은 흔적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뛰어난 장수임에도 칼조차 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오래전부터 끈질기게 거론되어온 성웅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는 월전 장우성 화백이 조선 시대 초상화 기법을 충실하게 따른 작품입니다. 이른바 친일 냄새가 전혀 없고, 따라서 그 작품을 퇴출해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월전 장우성 ‘백두산 천지도’
한국일보 기사 입력 : 1997.02.04. 00:00
최진환 기자
꿋꿋한 민족정기 시 서 화로 묶어 국회 터줏대감으로/
75년 국회주문… 6.3m×2.1m 대작/
제작가 1,000만원 당시 최고가/
장기영 본사 창간발행인의 컬러사진 구해 스케치작업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2층 의원휴게실 왼쪽벽면에는 백두산 천지를 그린 대형벽화가 걸려있다.
월전 장우성(85) 화백의 「백두산 천지도」다.
가로 6.3m, 세로 2.1m인 이 초대형 그림은 20년 넘게 민의의 전당을 지켜온 터줏대감이면서 외부방문객의 기념사진촬영배경으로 활용되는 명물. 한국화단의 최고원로이며 시·서·화의 삼절로 통하는 월전은 이 천지도를 필생의 역작으로 꼽는다.
월전은 75년 새로 짓는 여의도의사당의 벽화제작을 의뢰받았다. 국회가 발주한 최초의 환경조형물인 셈이다. 의사당건물이 남북통일을 대비한 규모로 지어진다는 설명을 듣고 소재는 우리민족의 발상지인 백두산으로 잡았다. 그러나 스케치하기 위한 실물사진을 구하는 일부터 벽에 부딪혔다. 그때만해도 중국과의 국교가 열리지 않아 천지를 가본 사람은 물론 제대로 된 사진 한장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제때 다녀온 사람을 만나고 관련된 자료를 닥치는 대로 읽었으나 천지의 모습은 막막하기만 했다.
이리저리 수소문 끝에 남북적십자회담때 평양에 다녀온 장기영(77년 작고) 한국일보사 창간발행인이 컬러사진을 갖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몇차례 간청끝에 사진을 복사할 수 있었다.
그림재료를 확보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국내에는 6m가 넘는 화선지도 없었고 보존성이 좋은 채색재료도 찾기 힘들었다.
일본에 직접 건너간 장화백은 순닥으로 만든 대형종이와 광물질 석채를 구입했다. 홍익대교실을 빌려 작업에 들어간지 꼬박 5개월이 걸려 작품을 완성했다. 액자는 동산방 박주환 사장이 특별주문한 수입원목으로 만들었으나 대형유리는 구할 수 없어 끼우지 않았다. 당시 월전이 제작비로 받은 돈은 1,000만원. 그때까지 거래된 근현대미술품으로는 최고가였다.
짙푸른 천지물빛과 삐죽삐죽 솟아오른 연봉, 솜사탕같은 흰구름, 황갈색의 언덕배기 등을 묘사한 천지도는 치밀한 사실을 지향하는 북화계열의 작품.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담담하게 이끌어가는 필치에는 오랫동안 문인화를 통해 터득한 문기와 꿋꿋한 선비정신이 배어있다. 또 배달민족의 모태가 된 백두산의 위용을 찬양하는 한시까지 지어넣음으로써 「삼절화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월전은 팔순을 맞던 92년 중국을 거쳐 백두산 천지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린 지 17년만이었다. 노화백은 지난달 29일 기자의 부탁을 받고 시집 보낸 딸자식을 보러 가는 심정으로 의사당을 찾았다. 「상봉」의 기쁨과 흥분도 잠시였다. 담배연기와 먼지에 찌들어 곳곳이 얼룩지고 변색돼 가는 그림을 보고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월전은 일제 때부터 한국화의 의연한 화풍을 현대적 양식으로 발전시킨 거목이자 서세옥 박노수 안동숙 박세원 화백 등 쟁쟁한 작가를 키워낸 탁월한 교육자. 요즘도 서울 종로구 팔판동 월전미술관에 매일 출근하고 일주일에 두차례 골프를 칠 정도로 건강이 좋다. 그는 『틈틈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풍경을 화폭에 옮겨놓고 있다』며 『힘이 닿는 데까지 그려 미수전을 열고 싶다』고 말했다.
장우성, 이순신(李舜臣) 영정, 1953,
비단에 채색, 193 x 113cm, 아산 현충원
장우성, [백두산천지도],
국회의사당,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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