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6년 가해 12월24일 토요일 [(자) 대림 제4주간 토요일]
[수도회] 저 낮은 곳 사랑의 쉼터로의 순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2사무 7,1-5.8ㄷ-12.14ㄱ.16
† 복음 루카 1,67-79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갓 태어난
아들 세례자 요한을 안고서 아버지인 즈카르야가 주님을 찬미하는
내용이지요. 하지만 그 노래가 우리의 가슴을 애틋하게 파고들지
않습니까?
오랜 기간 자식 없이 살다 말년에 얻은 아들입니다. 얼마나 귀하게
보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아기가 장차 어떤 길을 가리라는 것을
아버지 즈카르야는 너무나도 잘 알았지요. 목숨마저 버려야 하는 길이
아닙니까? 세상의 어느 부모가 자녀에게 그런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겠습니까?
하지만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주님의 계획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에 대한 신뢰 하나로 주님의 뜻을 절대적으로 따른 것이지요.
그러고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주님께서 끝내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고 올바르게 살도록 이끌어
주심에 감사하며 자기 아들에게 메시아가 오시는 길을 잘 닦도록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장면이 너무나 아름다우면서도 애절하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더욱 거룩해 보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려면 이처럼 거룩한 희생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제 오늘 밤이면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십니다. 오늘 대림 시기
마지막 날을 보내며 우리 역시 주님께 거룩한 희생을 봉헌했으면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기도와 묵상을 통해
2016년 가해 12월24일 대림 제4주간 토요일
제1독서
<다윗의 나라는 주님 앞에서 영원할 것이다.>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7,1-5.8ㄷ-12.14ㄱ.16
복음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7-79
문득 예전에 읽었던 책 한 권이 생각납니다. 하도 오래 전에 읽은
것이기 때문에 책의 제목이나 저자는 생각나지 않지만 아주 슬픈
소설책이었지요.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약간 그런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자가 울면 안
된다’는 생각이 제 마음 안에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방에 혼자 있었기 때문에 ‘꺼이꺼이’ 소리를 내면서 펑펑
울었던 것 같습니다. 운다고 해서 흉 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인가를 느낄 수가 있었지요.
사실 한국 사람들이 감정을 표현하는데 서툴다고 하지요. 그래서
‘미안합니다.’는 말도 잘 못하고, 또한 ‘감사합니다.’라는 표현에도
어색한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 과정 안에서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런 감정의 서툰 모습은 신앙
안에서도 종종 발견되는 것 같습니다. 미사할 때, 또 기도할 때의
모습을 보면 마치 아무런 생각 없이 넋을 놓고 있는 상태로 오래 있는
‘멍 때리기 대회’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서도 감정을 절제하고 있으니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되고 또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 속 시원하게 풀어야 하는데, 스스로 억제를 하다 보니 풀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주님을 정말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냥 점잖게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앞에 있으면 웃지 않겠습니까? 연애를
하면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또 눈을 꼭 감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는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런 모습을 보일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인 즈카르야가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일열명 즈카르야의 노래라고 불리는
이 노래는 성무일도의 아침기도 때 반드시 바치게 되어 있지요.
그렇다면 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요? 세례자 요한의 탄생 과정을
지켜보면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안배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가만히 있지 않았으면 합니다. 연애도 자주
또 많이 해야 서로 가까워질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을
만나려 하고 또한 함께 해야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 진정으로
하느님과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단순히 주일 미사 참석 한 번으로 모든 의무를 다했다고
할까요? 아니면 봉사활동 몇 차례로 자신처럼 열심한 사람은 세상이
없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우월감을 가져야 할까요?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느님께 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분명히 그 안에서 큰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절망과 두려움은 이겨 내는 게 아니라 밥처럼 마주 앉아 나누는
것이다. 나누는 사이로 희망이 끼어들어 이유를 탄생한다(김소연).
인천의 청라성당입니다.
엄마의 사랑
2008년 쓰촨 성 대지진 현장에서 아기를 안은 채 세상을 떠난 여성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의 품에 안겨 있던 아기는 전혀
다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여성은 아기의 엄마였는데, 자신의 생명이
사라지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아기를 위해 모유 수유까지 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자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아가. 살아난다면 이것만은 기억해 주렴. 엄마는 너를 사랑한단다.”
이 아기는 커서 어떨까요? 엄마의 사랑을 기억할까요? 기억하지
못할까요? 그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잘 알기 때문에, 엄마의 바람처럼
열심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엄마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믿고 따른다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닐까요? 십자가 죽음의 순간에 까지 우리들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으셨던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들에 대한 사랑으로 단
한 명도 구원의 길에서 제외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대충대충 살 수가 없습니다. 죄를 피하고 선을 행하는 삶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희생이 절대로 헛되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제 신부님들과의 모임이 있었는데, 이때 먹은 안주랍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저 낮은 곳 사랑의 쉼터로의 순례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가해 12월24일 대림 제4주간 토요일 루카 1,67-79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루카 1,78)
저 낮은 곳 사랑의 쉼터로의 순례
오늘 제 1독서에서 다윗 임금은 하느님의 궤를 모실 집을 지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먼저 다윗 왕가를 당신의 집으로
삼으시어 안정된 삶의 터를 마련해주시고 지켜주시며(2사무 7,10-11),
후손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7,12). 이는 메시아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께서 하신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노래합니다. 그는 아들 요한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선구자가 되는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립니다
(루카 1,68). 오실 구세주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으며,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리라는 것입니다(1,72-75).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1,78-79) 주님의 성탄은 단순히 우리와
거리가 먼 초월적이고 신비스런 탄생 신화를 전해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 성탄을 참 기쁨 안에서 맞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성탄이 바로 우리 인간을 위하여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의 사랑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겠지요. 죄와 어둠 중에 살아가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구원의 선물, 생명의 호흡으로 내놓는 것은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오심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집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거저
받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거룩하고’ ‘의롭게’ 섬길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습니다(1,75). 거룩함과 평화를 호흡하는 유일한 길은 현세적
가치와 육의 정신으로부터 떠나 주님을 갈망하고 사랑으로 그분을
섬기는 길 밖에는 없음을 기억해야겠지요.
또한 주님의 성탄은 오직 사랑 때문에 사랑을 위해 오시는 주님의
낮은 곳으로의 발걸음입니다. 낮은 곳이란 일시적으로 그저 나보다
더 안 돼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 장소가 아닐 것입니다. 낮은 곳은
무엇보다도 내 영혼에 주님의 사랑을 채우고, 다른 이들이 언제든
들어와 자리 잡을 수 있는 ‘사랑의 쉼터’가 되도록 자신을 비우는
움직임을 말합니다.
저 낮은 곳 사랑의 쉼터로의 순례는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랑을
품고, 생명의 혼을 지니고 낮은 곳, 후미진 곳,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변두리로 달려가는 그 발걸음에 이미 성탄의 기쁨은 퍼지겠지요.
주님의 탄생을 앞두고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찬미를 드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오시는 주님의 그 귀한 선물을 거룩하고 의로운 행실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 그것은 저 낮은 곳의 사람들과 겸손하게
나누는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나의 마음의 움직임과
실천하는 삶으로 사랑의 선택을 함으로써 말구유로 기꺼이 내려오신
주님을 닮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모두 자신을 낮추고 비워 모든 것을 주 하느님께 되돌림으로써,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어주실(1,78-79)
메시아를 탄생시키는 아름다운 사랑의 어머니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결핍의 끝판왕 아기 예수님의 성탄
2016년 가해 12월24일 대림 제4주간 토요일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 루카 1,67-79
결핍의 끝판왕 아기 예수님의 성탄
요즘 과체중 혹은 나름 ‘스케줄’로 인해 간헐적 단식을 자주 하고
있습니다. 오늘만 해도 아침 단식, 그리고 점심 대충, 저녁 건너뛰고
강의, 그리고 드디어 저녁 11시, 단골 24시 우동 집에서 뜨거운 우동
한 그릇을 마주하니, 배가 무지 고픈데다 너무 감격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배가 고프니, 세상에 3500원짜리 우동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개 눈 감추듯이 순식간에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싹 다 비웠습니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 않던 단무지 한
조각도 정말 기가 차게 맛있었고 소중했습니다.
그런 저를 유심히 바라보시던 주인아주머니께서는 부탁도 안했는데,
알아서 추가 사리와 국물을 얹어주십니다. 오늘 심야 우동 가게는
제게 작은 천국이었습니다. 참으로 큰 행복의 원천이었습니다.
결핍이야말로 행복을 불러오는 원천임을 알게 했습니다.
이렇게 우동 한 그릇이 큰 깨달음을 주는군요. 많은 경우 우리는
그리도 불편해하고 두려워하는 결핍이 사실은 행복의 근원이 된다는
진리를 잊고 삽니다. 힘겨워도 비탈진 오르막길을 넘어서야 산정에
도달할 수 있고, 거기서 그림 같은 산세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견디고
또 견뎌야 동트는 새벽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인내하고 또 인내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오늘도 수많은 구도자들이 물질적 풍요를 뒤로 하고
척박한 결핍의 세월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더 큰 충족, 더 큰 깨달음,
더 큰 영광을 맛보기 위해 극단적 결핍의 삶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더 환한 빛을 보기 위해 더욱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바늘귀만한 천국에 입국하기 위해 더욱 작아지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또 다시 성탄입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기대를 완전
저버리고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강생하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모습으로, 가장 크신 분이 가장 작은 모습으로
육화하셨습니다. 가장 귀한 분이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결핍도 아기 예수님 탄생 때의
결핍과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물론 결핍은 우리 인간을 고통의 끝으로 몰고 갑니다. 뿐만 아니라
극단적 결핍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마냥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때로 결핍은 인간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때로
결핍은 삶을 더 열정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원이 됩니다.
부족함을 바탕으로 새로운 창조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결핍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너그러움입니다. 결핍을 즐기는
여유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성탄, 구세주께서 ‘결핍의 끝’인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탄생하신 사건, 만왕의 왕께서 ‘결핍의 끝판 왕’인 마구간
탄생은 워낙 특별한 사건이요 대단한 신비이기에, 그냥 세상의 눈,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봐서는 백번 바라봐도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완전히 자세를 낮춰야 아주 조금 성탄의 신비가 이해됩니다.
김 서린 안경을 닦듯이 우리의 시선을 정화시키고 또 정화시켜야
아주 조금 성탄의 신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더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야 구세주의 아름다운 별빛을 뚜렷이 목격할 수 있습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대림 제4주간 토요일
2016년 가해 12월24일 대림 제4주간 토요일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 루카 1,67-79
김진명 씨의 ‘고구려’를 읽었습니다.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쓰기
때문에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성탄절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1권부터 읽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국가를 이끌어가는 지도자의 덕,
지혜, 용기를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영토, 국민, 법이라는 국가의
‘틀’을 벗어나려고 합니다. 수많은 민족이 국가를 만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졌습니다. 결국 국가는 ‘사상, 문화, 철학, 종교,
언어’에 의해서 유지되고 발전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광개토 대왕, 장수왕의 시대에 엄청난 영토를 가졌습니다.
거란족, 만주족, 몽고족 등이 중국을 차지하였었지만 중국을
이끌어가는 힘은 ‘사상, 문화, 언어, 철학’이었습니다. 민족은 거대한
사상이라는 바다에 흡수되고 말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는 정신과 사상입니다. 궁궐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삶입니다.
속상한 일, 화나는 일, 원망이 생겨나면 그것과 싸우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귀의 고삐를 잡고 당기면 나귀는 내 곁에
머물게 되듯이, 원망, 분노, 미움의 고삐를 내가 계속해서 잡고 있으면
결코 자유롭게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이
있고, 그 감정의 고삐를 놓아버리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수련이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합니다.
즈카르야는 ‘의심’이라는 고삐를 잡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의심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의심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말을 못하는 벙어리가 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즈카르야에게는 수련과 침묵이 필요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탄생하는 날, 즈카르야는 수련과 침묵을 끝낼 수
있었고, 이제 의심이라는 ‘고삐’를 놓아버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즈카르야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권능을 받아들인 즈카르야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는
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존하신 분의
예언자가 되어야 하고, 그분의 길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둠과 죽음의 그늘 밑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우리는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노래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성탄이 모두에게 즐겁고, 평화롭고, 희망의 소식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의 성탄은 ‘번뇌와 갈등,
욕망과 미움’의 고삐를 놓아 버리는 사람에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수련과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처럼, 마리아처럼,
즈카르야처럼 우리도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탄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
◈ [수원] 즈카르야의 하느님 찬미!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가해 12월 24일 대림 제4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1,67-79: 즈가리야의 노래
성령께서는 즈카르야를 사로잡으시어 아홉 달의 침묵을 깨고 요한이
할례 받던 날, 예언하게 하셨다. 즈카르야는 노래 첫머리에서 장차
요한이 준비할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이야기 한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68-69절)
주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멀리 떨어진 우리에게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죄인인 우리를 찾아 의롭게 만들기로 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뿌리 깊은 병인 교만을 치료하고자, 의사가 환자를
찾아가듯 우리를 찾아오셨고, 당신의 겸손을 그 본보기로 보여
주셨다. 그분은 당신의 피를 대가로 치르고 우리에게 자유를 찾아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분은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
(로마 1,3)이며, 다윗 집안에서 일어난 구원의 뿔이셨다.
그것은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71절) 그리스도는 자비요
정의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 자비를 입었고 의롭게 되었으며,
그분 안에서 믿음을 통해 사악함의 때를 씻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73절)는 어떤 일에 대한 보장이다. 반드시 당신 말씀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맹세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이들
각자에게 당신의 약속이 틀림없이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그분 자신의 말씀이다.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74절) 이 원수들은 육체의 원수들이
아니다. 그들은 영의 원수들이다. “싸움에 용맹하신”(시편 24,8)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 원수를 멸망시키고 그들의 올가미에서, 즉 모든
원수의 손에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71절) 우리를
해방시키고자 오셨다.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72절)
주님께서 오셨을 때에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구원의 은혜를
입었다. 그들은 그분의 날을 미리 보고 즐거워하였다(요한 8,56 참조)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72-75절)
라고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76절) 여기서 지극히 높으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모든 예언자의 하느님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길을 비추는
등불이었다. 유대인들은 잠시 그에게 모여들어 세례도 받고 그의
생활방식에 감탄도 했지만, 영원히 타오르는 등불을 끌려고 별짓을
다하다 결국 그를 죽음의 잠에 들게 하였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78-79절)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을 알게
하는 참 빛을 우리에게 주셨고, 오류의 어둠을 거두어 가셨으며,
하늘로 가는 길을 열어주셨다. 그분은 우리의 발을 이끌어 당신이
보여주신 진리의 길을 걷게 하셨고, 당신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평화의
거처로 들어가게 하셨다.
이제 우리는 “높은 곳에서 온 별”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복된 일이
어디 있는가? 우리를 위하여 아무런 명성도 떨치지 않으신 분,
하느님의 모습과 종의 모습을 함께 지니신 분, 그러나 어둠속에
갇혀있던 우리 세상을 위해 빛처럼 해처럼 솟아오르시는 분, 우리는
그분께 무릎 꿇고 절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도 우리의 삶으로 구원을 체험하면서 하느님께 감사하고,
또한 주님께 매 순간 영광과 찬미를 드릴 수 있도록 주님의 은혜를
청하고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께 아름다운 예물로 바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이 순간들이 모두 감사와 찬미의
순간들이 되어, 주님께 영광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의 참 모습이 아니겠는가?
- 수원 교구 상하 성 모세 성당 주임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