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성에 관한여~~~~~~~~~~~~~
1.수원성축조배경
조선시대 1794년부터 2년 반 걸려 1796년 완성되었다. 정조 때였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세도세자에
대한 측은한 마음을 품고 있던 정조는 아버지 묘를 명당의 자리로 모시는 것이 염원이었다. 마침 후보지로 수원 고을 뒷산(지금의 화산)이
물색됐고, 기존의 수원은 현재의 위치인 팔달산 아래로 옮긴다는 계획을 세웠다.
왕의 효성심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였지만, 숨은 뜻이
따로 있었다. 노쇠한 왕(영조)의 52년간 통치가 막을 내리자 새로 등극한 젊은 왕 정조는 강력한 왕권 구축을 절감하였다. 사도세자의 사건도
당파의 권력 쟁탈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왕권 확립을 위해서는 기득 세력을 누르고 신진 세력을 기용하여 신하의 세력이 한쪽으로
불거지지 않도록 해야 했고, 재정적 뒷받침과 군사력도 필요했다. 그러나 기존의 한양에서 이 모두를 새로이 얻기는 어려웠다. 자신의 뜻을 펼 새
거점이 필요했다. 시대를 앞서간 신도시 건설의 발상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왕의 의지 아래 탄생됐다.
2.수원성의 주요
건축물인 장안문 팔달문화홍문 서장대 봉화대 방화수류정 암문 등 조사
장안문은 수원성의 북문으로 서울을 향하고
있다.
돌로 높이 쌓은 육축(陸築) 중앙에 홍예문을 내고 육축위에는 2층의 누각을 세우고 앞쪽에 반원형의 옹성을 쌓았다.문의
좌우에는 높은 위치에서 적을 공격할 목적으로 성벽보다 돌출된 적대(敵臺)가 있다. 누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식 공포를 결구한 우진각
지붕의 2층 목조건물이다.반원형의 옹성은 성문과 달리 벽돌로 쌓았으며 아치의 상부에는 오성지(五星池)라는 구멍이 5개 뚫린 일종의 물탱크가
있는데 이는 적이 불을 지를 때를 대비하여 만든 것이다. 문루에는 대부분 간단하고 튼튼한 익공식 구조를 하는데 수원성의 경우는 장안문과 남문인
팔달문을 다포식으로 하여 장중하고 화려하게 꾸몄다. 문루 상층의 판문에는 괴수의 얼굴을 그려 총안을 위장하고 무섭게 보이게
했다.
팔달문은 수원성의 남문으로 형태면에서 장안문과 거의 같다.
성문의 육축(육축)은 일반 성벽과 달리 안팎을 석재로
쌓아올리는 협축방식으로 두껍고 높게 축조한다. 육축에 쓰인 돌은 일반 성돌보다 규격이 큰 무사석을 사용하고 중앙에 홍예를 낸다. 팔달문은
장안문과 함께 성문앞에 또 한겹의 성벽을 쌓아서 문을 보호하는 시설인 옹성을 육축과 달리 전으로 쌓아 적의 포에 한번에 무너지지 않도록
대비하였다. 모양이 독을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하여 '항아리 옹'자를 넣어 옹성(甕城)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옹성 벽에 반복되는 세로줄은
현안으로 짙은 그림자를 남기는 세로줄이 강하게 그어져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수원성을 북에서 남으로 관통하며 흐르는 개천이 있는데
이를 대천(大川)이라 불렀다.
개천이 성안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곳에는 각각 수문이 설치되어 있다. 이것이 북수문과 남수문이다.수문은
여러 개의 아치로 된 다리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아치의 밑부분은 마름모꼴로 비스듬히 다듬어 물길이 순조롭게 갈라질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다. 특히 북수문 주변은 연못과 누각이 어우러져 경관이 아름다워, 이를 감상할 수 있게 수문 위에 화홍문(華紅門)이라는 누각을 세운
것이 눈길을 끈다. 화홍문의 입구 좌우에는 돌로 만든 해태를 세워 방어의 뜻을 담았다.
장대는 서장대와 동장대 2개소가 있다.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위치하는 군사지휘본부로 일명 화성장대로 불리운다. 화성 축조당시에 세워진 2층의 대위에 누각이 있고 노대 옆에는 군무소가
있었다. 서장대에 오르면 성 전역을 굽어 살필 수가 있고 사방 100여리가 한눈에 보이는 높은 위치이다. 서장대는 수원시내 어디서나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어 화성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알려져 있다.
봉화는 성 주변을 정찰하여 사태를 알리는 통신 역할을 하는 시설이다. 봉돈에는
다섯 개의 커다란 연기 구멍을 두어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성 주변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평상시에는 남쪽의 첫째것만
사용했다.봉돈에는 불 붙일 재료가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다. 특히 이리나 늑대의 똥은 빗물에 젖어도 잘 탈 정도로, 봉돈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재료였다. 하지만 밤에는 불로, 낮에는 연기 신호로 성 주변의 사태를 전달하는 연락이 종종 끊기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앞에 있는 봉수대에
연기가 오르지 않거나 비, 안개 짙은 구름등이 끼는 기상 상태로 봉수 연락이 불가능할 때에는 봉수군이 직접 달려가서 보고하기도
했다.
수원성 안에 만들어진 유일한 정자이다. 조선 시대 정자 건물의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다
수원성에는 모두
다섯 곳에 암문이 설치되어있다. 복암문, 동암문, 서암문, 서남암문, 남암문이 그것이다. 이런 수원성의 암문은 다른 성들과 다르게 성벽에 따로
전돌로 벽을 쌓고, 윗부분이 둥근 아치형의 문을 내고 있다. 특히 이 서남 암문 바로곁에는 온돌방이 마련되어있는 포사라는 망루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 망루가 세워진 까닭은, 이곳이 팔달산 높은 곳이어서 적을쉽게 감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3.수원성 축조를 위해 정약용이
고용한 거중기에 대하여 조사해보자
거중기는 1792년, 정양용이 31세 때 수원성을 쌓는 사업을 지휘하면서 직접 만든 것이다.
이것은 17세기 초 중국에 와 있던 서양인 쟌 슈레크가 중국어로 번역한 『기기도설』이라는 각종 기계에 대한 해설한 책을 참고로 만든 것인데,
많은 점에서 정약용이 독창성을 발휘하고 개선한 것이다. 이 거중기를 써서 건설 경비를 4만냥이나 절약하였고, 노동자 두 사람이 약 10톤 또는
그 이상의 무거운 자재를 높은 곳으로 운반할 수 있었다고 한다.
거중기의 구조는 그림과 같이 위아래에 바퀴 여덟 개의 겹 도르래가 있고,
좌우로는 '북'과 '고패(높은 곳에 물건을 올리고 내릴 때 걸치는 작은 바퀴나 고리)' 및 '십자궐(십자형의 말뚝)'로 구성된 '거(종이나 북
등을 거는 틀)' 가 있었다. 그리고 겹도르래의 좌우 끝으로부터 끈이 북과 고패에 연결되어 십자궐을 돌리면 고패도 돌아 겹 도르래가 무거운 짐을
올리게 되어 있었다.
첫댓글 광해의 고향 수원성에 관하여 ~~~~
조상의 지혜가 곳곳에 번뜩입니다.
수원에 팔달산 / 광교산 라이딩도 아주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