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윤의 미술치유] 도마뱀·강아지·인간
세가지 마음의 공생과 미술의 자유
패배를 인정하는 제욱시스 Zeuxis Conceding Defeat (1683)/ flickr
출근길 고속도로 한가운데 강아지 한 마리가 갈팡질팡 차를 피하고 있다. 백미러에 비치는 안쓰러운 몸짓에 무사를 기원하지만, 크락션 조차 울리지 않는 차들의 질주가 매정하다.
‘오늘의 교통사고’ 에 집계되지 않는 길 위의 죽음, 로드킬(roadkill) 은 시린 연민을 불러온다.
같은 포유류이기 때문일까. 강아지가 느꼈을 공포가 안쓰럽고, 강아지 가족과 친구들의 슬픔이 딱하다.
신경과학자 폴 맥클린 (Paul MacLean, 1913-2007)에 따르면 나의 마음에도 강아지가 산다. 진화를 거듭한 우리의 뇌는 파충류-포유류-인간의 뇌로 이루어져 있다. ‘이성’을 가진 인간 안에는 도마뱀과 강아지도 함께 산다는 것이다. 파충류의 뇌는 ‘본능’을, 포유류의 뇌는 ‘감정’ 을 담당한다.
이 삼위일체의 뇌 (The triune brain) 이론은 마음을 쉽게 은유적으로 설명하여 심리치료 분야에 자주 등장한다. 세가지 뇌는 순차적으로 영유아에서 20대 중반까지 발달한다.
고속도로를 계속 달리다보니 새들이 하늘에 정지해 있다. 자세히 보니 투명한 방음벽에 그려진 독수리와 매의 그림이다. 하늘에는 스카이킬(skykill)이 있다.
도로 소음의 차단을 위한 이 벽에 한국에서 1년간 무려 800만마리의 새들이 부딪혀 죽는단다. 무서운 맹금류 그림을 보고 피하라는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이겠으나 새들 입장에서 인간이란 정말 병 주고 약 주는, 얄미운 유해종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새들의 눈엔 저 그림들이 잘 들어올까?
역사속에는 새들의 눈을 깜쪽같이 속인 화가들이 있다.
신라 진흥왕(540~576)시대의 솔거는 삼국사기(1145)에 등장하는 유일한 화가이다. 그는 황룡사의 벽에 소나무 그림, <노송도老松圖> 를 그렸는데 얼마나 진짜 같았던지 수시로 참새와 제비 같은 새들이 부딪혀 죽었다. 시간이 흘러 노후한 그림에 한 스님이 덧칠을 했더니 더 이상 새들이 오지 않았다.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의 제욱시스 (Zeuxis, BC 464-?)는 실물과 똑같은 정물화로 유명한 화가였다. 사실적인 그림으로 부와 명예를 움켜쥔 그는 당시 마케도니아의 왕에게 궁전의 벽을 장식한 대가로 막대한 사례를 받아 소크라테스가 ‘그 돈은 왕의 자기 개발에 쓰는게 나았을 것’이라 비꼬기도 했다.
제자 플라톤이 모방으로서의 예술을 탐탁치 않게 여겼듯 소크라테스도 제욱시스의 사실적 화풍이 그리 맘에 들지 않았을게다.
동 시대 파라오시스(Parrhasius)는 제욱시스의 라이벌 이었다. 제욱시스가 입체감으로 사실성을 부각했다면, 파라오시스는 세밀한 윤곽선으로 대상과 똑같은 그림을 그린, 특히 꽃으로 유명한 화가였다.
당시 벌어진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그림 대결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제욱시스가 먼저 포도그림을 보이니 새들이 앞다투어 쪼아먹으러 덤볐다. 의기양양한 제욱시스가 파라시오스를 돌아보니 그림이 여전히 커튼으로 덮혀있다.
어서 보자 하니 파라시오스 왈, 보고 싶으면 와서 직접 보라 한다. 제욱시스가 커튼을 젖혀보려 하는 순간, 아차. 커튼이 그림이였다.
새들의 눈을 속인 제욱시스의 눈을 속인 파라시오스의 승리였다.
이처럼 그림이란 어떤 대상을 실제처럼 재현(再現: representation), 모방하는 것이라는 굳은 믿음은 고대 그리스 이전부터 시작되어 중세 시대에 주춤했다가 르네상스 때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다.
이후 사진의 발명 등으로 한계에 부딪힌 미술은 마침내 재현의 속박에서 해방,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내면이나 아이디어, 추상적 개념 등을 자유롭게 표현하게 된다. ‘미술=재현’ 이라는 패러다임에 작별을 고하는 역사적 순간이다.
미술사의 흐름과는 별개로, 1980년대 한국 국민학교의 미술시간에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는 여전히 재현을 잘 하는 아이였다. 게시판에 걸린 그림은 아이의 어깨를 으쓱하게 했고, 삐뚤빼뚤한 얼굴을 그린 아이는 주변의 놀림을 감내해야 했다 (그림을 잘 그린 한 아이는 같은 이유로 훗날 군대에서 행정관 아들의 미술 숙제를 도맡게 된다).
아이의 난화 /Scribble
저명한 미술교육학자 빅터 로웬펠드(Viktor Lowenfeld, 1903-1960)는 모든 아이가 자연스럽게 거치는 미술 발달과정이 있다 한다. 돌이켜보면, 우리 모두는 시키지 않아도 무언가를 그렸었다. 1-2세의 아이는 이미 의미없는 낙서를 아무데나 끄적거리기 시작한다. 이때를 ‘난화기’ (Scribbling stage)라 부른다.
여러 발달 단계를 거쳐 10세 무렵의 ‘유사 사실기’(Pseudo realistic stage) 단계에 이르면 위의 경우처럼 동료간 재현 능력의 차이로 많은 아이들이 미술과 담을 쌓게 된다.
현대미술의 문을 연 피카소가 말했 듯, “모든 아이들은 예술가이다. 문제는 어떻게 어른이 되어서도 예술가로서 남느냐이다” (Every child is an artist. The problem is how to remain an artist once he grows up).
어쩌면 한 아이의 예술성이란 싹을 오히려 미술시간에 자른 건 아닐까?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 는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The child is the father of the man)" 란 말을 남겼다. 이 말은 마음 건강의 측면에선 전적으로 옳다.
마음이 건강한 아이들이 불행한 어른들에게 주는 행복에의 비결이 있다. 행복한 아이의 특징은 앞서 말한 세가지 뇌의 균형잡힌 발달과 조화로부터 비롯된다. 특히 인간의 뇌 이전 도마뱀과 강아지가 건강하게 성장하여야 한다.
우리 사회는 인간의 뇌를 주로 편애했고, 여전히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성만으로 마음의 행복을 찾긴 어렵다. 근래 많이들 감정의 이해나 표현, ‘공감’의 중요성을 얘기하기 시작한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강아지 뇌’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 외에 다른 동물의 생명에 갖는 관심은 무시해 온 다른 뇌들의 존재도 인정하는 것 같아 반갑다. 2천여년 넘게 지속되어온 ‘재현’ 의 속박에 작별을 고한 현대 미술은 20세기 초 미술과 심리가 결합된 미술치료라는 영역을 낳는다.
미술치료는 적절한 미술매체와 활동을 통해 세가지 뇌의 균형을 창의적으로 꾀한다. 미술치료 분야의 최초 기법 중 하나가 바로 난화(Scribble)이다. 유아시절 도마뱀의 뇌가 그린 생각없는 휘갈김은 다시 성인에게도 억압된 무의식을 드러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최근 방음벽의 맹금류 그림들은 거의 효과가 없는 것이 밝혀져 새들의 눈에 잘 띄는 문양으로 교체중이라 한다. 진정한 공감이란 이렇게 내가 아닌 상대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려는 노력이다.
새들과의 공감과 공존이 점차 이루어지는 것 처럼, 우리 뇌 안에 세가지 다른 마음 - 도마뱀(본능), 강아지(감정), 인간(이성) - 도 차별없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공생했으면 좋겠다.
더 이상 고속도로에 길 잃은 강아지가 없었으면 좋겠다.
글 | 임성윤 교수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