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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7. 묵상글 (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 다른 복음은 없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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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7.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다른 복음은 없다!
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다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다른 복음 곧
자기가 전해준 복음과 다른 복음을 믿는 것에 대해 나무랍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당시 갈라티아 신자들 뿐 아니라
오늘 이곳의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다른 복음을 따라 살고 있다는 말인데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오로가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복음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복음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복음이고,
이웃사랑은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모든 일정을 끝내고 돌아온 그제 얘기입니다.
비행기를 탔더니 제 좌석은 가운데 좌석이었습니다.
열세 시간 삼십 분을 가야 하는데 가운데 좌석이라니!
게다가 오른쪽에 앉은 사람은 서양인으로 몸무게가 200kg이 넘는 거구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로 치면 13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저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데
이런 사람이 제 이웃이라니 그야말로 악몽이었습니다.
옛날 초등학교 때 책상을 같이 쓰는 옆 친구와 가운데 금을 긋고는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 넘어오면 싸우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제 자리를 넘어오고 침범하는 그런 이웃인 셈입니다.
실제로 저는 양쪽 남자들 가운데서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였는데
특히 그 거구의 넘치는 엉덩이 살과 허릿살이 제 좌석까지 쳐들어와
저의 살과 맞닿았고 그래서 저는 오는 내내 그의 열기로 인해 무척 더웠습니다.
그래서 이 이웃과 만난 나의 오늘은 불운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30년 전 미국에 살 때 같이 살던 형제가 생각났습니다.
그 형제도 200kg이 넘었던 형제이고 그래서 살을 빼기 위해 고생하던 형제였지요.
그 형제를 생각하며 제 옆의 친구를 생각하니 그가 가엾기 시작했습니다.
그 거구가 비즈니스석에 타지 못하고 제가 타는 좌석에서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니 저의 불운보다 그의 고통이 보이고 가엾게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해야 할 이웃은 대체로 이런 사람입니다.
가까이 있기에 찌르고 상처 주고 힘들게 하는 사람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아무리 찌르려고 해도 멀기에 찌르지 못하고,
마찬가지로 상처를 주려고 해도 주지 않고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의 기준은 거리의 가깝고 멀고가 아니고,
나와 같은 동네 사람이거나 같은 족속이거나 그런 것도 아닙니다.
거리나 관계 면에서 가깝든 멀든 내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고,
그래서 나를 괴롭게도 하지만 그도 괴로움 중에 있는 사람이
우리가 흔히 사랑해야 할 이웃입니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잘해 주며
되돌려 받을 것을 알고 꾸어주는 것은,
세리들도 죄인들도 잘하는 사랑이라고,
그러므로 죄인에게나 의인에게 똑같이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라야 당신이 가르치신 사랑이라고 주님 말씀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님의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
곧 사람들 비위를 맞추기 위해 율법의 가르침이 복음이라며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는 무리가 갈라티아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앞서 얘기했듯이 우리도 이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 다른 복음은 없고,
오늘 주님 말씀하신 ‘사랑 복음’밖에 없음을 확고히 믿고 살아가는 우리가 돼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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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7.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언제나 남의 떡이 더 커 보입니다. 이런 현상이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저의 경우,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생겼던 것 같습니다. 옆집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장난감이 제 장난감보다 더 좋아 보였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친구의 가방, 옷차림 등에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면서 가지고 싶은 것을 사주지 않는 부모님께 대한 원망도 가졌습니다.
시기심은 평등의 원칙이 깨졌다고 생각될 때 나옵니다. 그토록 갈망했지만,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는 삶을 누군가가 살고 있을 때 불평등하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불평등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삶을 보고 자기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져도 순간의 만족일 뿐 영원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 모든 감정을 통해, 불공평의 결과는 나의 욕심일 뿐 불공평 자체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욕심 가득한 마음을 내려놓을 때 삶이 다르게 보입니다. 지금 상태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되고, 또한 다른 이들을 향해 축하의 마음을 전달하는 여유도 갖게 됩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자기 안에서 치워나갈수록, 그 빈자리에 주님께서 자리하시게 됩니다. 여유와 편안함을 갖게 되고,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필요한 사랑의 마음도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고 물었고, 그는 율법에 나오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이 율법 교사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즉, 자기는 율법을 잘 지키고 있으니 당연히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예수님께서는 적극적인 사랑 실천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을 통해 하십니다.
자기는 옳고 따라서 자기는 당연히 최고의 것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 말로써 정의를 잘한다 해도, 이웃으로서 행동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즉, 율법의 세부 조항을 열심히 잘 지킨다고 하더라도,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자기가 원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없게 됩니다.
욕심, 시기심 등의 부정적인 감정에 갇혀 사는 삶이 아닌, 하느님의 뜻인 사랑에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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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한 나라의 정승이라면 모범을 보이고 백성과 나라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정홍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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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7.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떤 율법교사와 예수님과의 두 번의 대화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기는 하나, 율법교사의 편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고 있습니다. 마치 스스로의 ‘행실’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자신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다는 것’과 ‘자신은 그분께 메여있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은 ‘무엇을 하느냐?’는 행위의 문제라기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라는 존재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그 일을 사랑으로 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곧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는”(루카 10,27) 일입니다.
<두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마르 10,29)
이 질문 뒤에도 역시 그의 옹졸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사랑의 대상에 한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사랑의 대상에는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은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마르 10,36)
예수님께서는 누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대답하기보다, 오히려 ‘모든 이웃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우리는 모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이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모두에게 ‘이웃’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단지 이웃이 아니라 ‘형제’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는 문제보다, ‘나는 이웃이 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먼저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가 나의 형제인가?’ 묻기에 앞서, ‘나는 그의 형제가 되어주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곧 내가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루카 10,37)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에서, 이제는 “주님, 저희가 자비를 입었으니, 저희도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서로 사랑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기보다 “서로에게 사랑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대화의 마지막 구절에 있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37). 그러니 아는 것에 멈추지 말고, 행동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몸으로 실행하고, 의무적으로나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를 알 때가 아니라, 실행할 때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주님!
초라해진 저의 모습을 봅니다.
초주검 당해 쓰러진 이들이 여기 저기 웅크리고 있건만,
나는 그들과는 반대방향으로 달리는 열차에 앉아 신문쪽지를 바라보며
혀만 끌끌 차면서 슬며시 길을 피해 슬금슬금 달아나고 맙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 묻기보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게 하소서!
그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사랑이 필요하기에 사랑하게 하소서!
나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기보다,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사랑을 간직한 사람, 무엇을 하더라도 사랑으로 하는 사람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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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7.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이웃이 되어 준 사람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 사람끼리 서로 돕고 의좋게 지내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이웃사촌만도 못하다(잠언27,10)고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실제로 표현되어 나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에는 “네 친구와 아버지의 친구를 저버리지 말고 불행할 때 형제의 집으로 가지 마라.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낫다”(잠언27,10).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이가 이웃입니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려는 마음이 불타오르길 희망합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한 비유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초주검이 되었는데 마침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는 지나가 버렸고 또 레위인도 지나갔는데 그도 역시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상처를 치료해 주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입니까?’하고 되물었습니다. 율법 교사가 자신 있게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10,37) 하고 대답하였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하고 이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누가 이웃이며, 이웃이 아닌지에 대해서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당한 사람을 남으로 보았고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행동이 다르게 표현된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 것이,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사실“우리가 병들고 궁핍한 사람을 만지는 것은, 곧 고통을 받는 예수님의 몸을 만지는 것입니다”(성 마더 데레사). 그리고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묻는 사람에게는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려고 마음을 먹을 때 이웃이 보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이웃입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를 묻지 말고, 내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의' 이웃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까지 미워하는 셈이며 멸시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의하면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는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오늘이길 바랍니다. 그저 '어떤 사실을 보는 사람'으로 머물지 않고,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이 생겨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이 자라 납니다.”“친구란 언제나 사랑해 주는 사람이고, 형제란 어려울 때 도우려고 태어난 사람이다.”(잠언17,17).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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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7.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세상일은 참 모를 때가 많습니다. 같은 부모에게서 나온 자식도 무척 다릅니다. 저의 형제들도 모두 성격과 외모가 다릅니다. 큰 형은 예술적인 감각이 좋았습니다. 필력도 좋고, 그림도 잘 그리고, 음악적 재능이 있었습니다. 작은 형은 좋은 몸을 지녔습니다. 형제 중에 키가 제일 컸습니다. 달리기도 잘 했고, 옷을 입어도 잘 어울렸습니다. 저는 큰 형과 달리 예술적인 감각이 부족했습니다. 작은 형과 달리 좋은 몸을 타고 나지 못했습니다. 부족한 제게는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성품을 주셨습니다. 공장에서 출고 되는 물건은 기능이나 성능이 다르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소비자들이 반품을 요구할 것이고, 회사는 곧 어려움에 처할 것입니다. 사람은 물건이 아니기에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어도, 같은 선생님에게서 배웠어도 성품과 기질이 다른 것입니다. 진화의 관점에서는 서로 다른 성격과 체질이 좋다고 합니다. 코로나와 같은 질병이 찾아와도 면역력이 강한 사람은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다른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실 때입니다. 같은 로마 병사지만 반응이 달랐습니다. 어떤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지려고 했습니다. 빨리 끝내려고 예수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러나 어떤 병사는 이방인이었음에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아! 저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구나!” 예수님 옆에 있던 죄인들도 반응이 달랐습니다. 한 죄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오. 그리고 나도 구해 주시오.” 그러나 또 다른 죄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으로 갈 것이다.” 오늘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면 된다.” 그러자 율법학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율법학자의 관점은 ‘나의 이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 예수님의 관점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입니다. 나의 삶은 과연 어떤 관점에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 바다에서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이슬람 제국을 무찔렀습니다. 이 전투의 대승은 묵주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이라 여기고, 이를 기억하고자 비오 5세 교황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훗날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저도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제안으로 2002년부터 빛의 신비가 묵주기도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로써 묵주기는 예수님의 전 생애를 묵상할 수 있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환희의 신비는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 시절에 대한 묵상입니다. 빛의 신비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대한 묵상입니다. 고통의 신비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묵상입니다. 영광의 신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들 또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기를 희망하는 묵상입니다.
신학교에서 지낼 때입니다. 매일 저녁 7시 15분이면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혼자 할 때도 있지만 함께 할 때도 많았습니다. 본당 신학생들과 함께 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하기도 하고, 교구 모임과 함께 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신학교에는 묵주를 들고, 기도를 하는 신학생들의 기도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그 기도는 신학생들을 지켜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예방 주사를 맞는 것처럼 묵주기도는 신학생들을 악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주었습니다. 저도 묵주기도에 대한 작은 체험이 있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묵주기도를 하려고 차를 잠시 세웠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에 큰 차가 제 앞으로 지나갔습니다. 차를 멈추지 않았으면 큰 사고가 날 뻔했습니다. 묵주기도를 시작한 것도 아니고, 막 하려고 했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제게 넘치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오늘 하루를 묵주기도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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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7.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는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참 이웃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처음 묵주기도를 접한 것이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주일학교 교리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묵주기도를 시작하는 방법과 각 단의 의미를 익히며 봉헌했을 것입니다.
모든 천주교 가정이 그렇겠지만 저역시 조부모님과 부모님이 묵주기도 하시는 모습을 보며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묵주기도가 제 삶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신학교에 입학 하면서입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묵주를 들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묵주기도를 봉헌하며 우리는 각 단의 신비를 묵상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성경 속 말씀들을 기억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묵상하게 됩니다. 특히 하느님의 자비를 묵상합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과 묵주기도가 연결된 부분입니다. 우리는 늘 하느님 자비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사실은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또한 가끔 우리는 삶 안에서 자비를 베풀 기회를 얻습니다. 이때가 바로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자비를 돌려드릴 기회입니다. 어쩌면 오늘 이런 기회가 주어질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로운 것처럼 우리도 자비롭기를 바랍니다. 특히 우리가 봉헌하는 묵주기도 안에 들어있는 자비의 길이 늘 우리를 자비로움으로 인도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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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콤달콤 여름나기
무더위에 지칠 때, 새콤달콤한 과일들은 입맛을 돋웁니다.
그러나 파파야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화장품 맛이 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파파야 본연의 맛입니다.
친구 신부님을 보러 미국에 갔을 때
매일 밤 제 손에 들려있었던 것이 바로 파파야, 망고, 망고스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도 않고, 가격도 비싸서 쉽게 접할 수 없는 과일들이지요.
그래서인지 매일 이 과일들을 즐겼습니다. 그렇게 더운 여름밤을 새콤 달콤으로 지냈습니다.
여러분의 여름나기엔 무엇이 있었을까요? 그 무더운 여름을 우리는 무엇으로 버텨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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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7.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배움의 여정, 사랑과 섬김의 여정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오늘은 묵주기도 성월 10월에 맞이하는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오늘 기념일에 대한 유래를 나눕니다. 묵주기도의 기원은 1208년 프랑스 남부 카르카손 근처 프루이유에 있는 수도원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가 성 도미니코에게 나타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묵주기도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날은 바로 1571년 10월 7일, 바로 오늘은 그리스 앞바다 레판토에서 유럽의 명운이 걸린 이슬람 제국과의 해전이 벌어졌던 날입니다. 이날 오전부터 오후 늦게까지 신성동맹의 유럽 기독교 국가들과 이슬람의 오스만 제국의 해군은 치열한 격전을 벌렸고 마침내 유럽 기독교 국가 동맹의 승리로 끝납니다.
그날은 10월의 첫 번째 주일이었고,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는 비오 5세의 독려하에 하루 종일 모든 신자들이 묵주기도를 바쳤으며 결국 성모 마리아의 도움으로 승리했다 하여 시작된 오늘 승리의 성모 축일입니다. 이후 교황 비오 10세는 10월 첫째 주일이었던 축일을 10월7일로 확정시켰고, 1969년 교황 성 바오로 6세는 “승리의 성모 축일” 명칭에서 지금의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기념일로 바꿉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10월 묵주기도 성월, 묵주기도의 은총이 우리 ‘배움의 여정’, ‘사랑과 섬김의 여정’에 큰 도움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계시의 복음을 갈라인들 교회에 선포합니다. 바로 구원은 능동적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모든 인간에게 가능하다는 복음이요, 오늘 복음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을 통해 그대로 입증됩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의 불순한 질문에서 시작됩니다만 그의 질문은 옳았습니다. 예나 이제나 모든 구도자들의 궁극적 질문입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역으로 율법학자의 생각을 묻자 그는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옳게 대답합니다. 그러고 보니 율법학자는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알면서,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물은 것이요 이를 간파하신 예수님의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하였습니다.”
모든 율법과 복음의 요약입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의 정답을 지체없이 인정하시고 흔쾌히 답하십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하면 영원한 생명을 살 것이란 말씀입니다. 율법학자는 이에 승복하지 않고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도발적 질문을 던집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유명한 예화가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이 복음은 35년전 제 사제서품후 1989년 7월16일 신림동 천주교회에서 첫미사때 복음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때 “사람이 되는 길”로 강론을 했고,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자를 외면하고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린 종교인인 어떤 사제도, 어떤 레위인도 사람됨의 시험에 불합격했고 이 죽어가는 이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여 살린 사마리아인만이 사람됨의 시험에 합격했다 강조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우리 모두의 내면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종교인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참으로 우리의 부족한 사랑을 부끄럽게 하는 놀라운 충격적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초주검이 된 자에 대한 세 사람의 경우의 예화를 든 후 율법학자와 주고 받은 대화가 오늘 복음 이해의 열쇠가 됩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의 동사입니다. 뜬구름 잡는 추상적 질문은 이제 그만하고 네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 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를 사랑의 실천으로 도우며 영원한 생명을 살라는 것입니다. 저 멀리 밖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여기에서 곤경중에 있는 이웃을 도울 때 영원한 생명의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내 중심의 “누가 내 이웃이냐?”물을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 곤경중에 있는 불우한 이웃을 중심에 두라는 것입니다.
참 놀랍게도 곤경중에 있던 자를 살린 자는 거룩한 종교인인 사제도 레위인도 아닌 이교인 사마리아 사람이었고 이런 사마리아 사람처럼 곤경중에 있는 이웃이 되어 이웃 사랑의 진수를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진정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 검증되는 법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충격적 사랑을 통해 독자들은 배우라는 것입니다.
삶은 배움의 여정입니다. 수도자는 물론 믿는 이들의 두 필수적 자질은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요 ‘배움에 대한 사랑’이요, 이를 위한 겸손과 근면입니다. 배움에 대한 사랑의 달인(達人)은 호학(好學)의 공자이고 호학은 논어와 공자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무엇보다 배움의 여정중 사랑을 끊임없이 배우고 실천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내 중심의 이기적 물음에서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 이웃 중심에서 물어야 할 것이며, 이웃 중심의 섬김의 삶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섬김의 사랑의 절정의 모범이 바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주님을 섬기듯 이웃을 섬길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웃 중심의 섬김의 삶에 충실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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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7.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웃이 되어주는 사람>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
저기
사람이 있어
애틋이
눈길
건네고
거기
사람이 있어
바지런히
발길
내딛으며
여기
사람이 있어
따뜻이
손길
내밀어
사람에게
사람이
기꺼이
이웃이
되어주니
참으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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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7.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루카 10,30).
예리코는 이 세상의 표상이다
죄를 지은 아담은 낙원, 곧 “천상 예루살렘”(히브 12,22)에서 쫓겨나(창세 3,23 참조) 이곳으로 추락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들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장소가 바뀌어서가 아니라 행실이 바뀌어 그의 본성이 유형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영원한 지복을 누리던 아담이 아니었습니다. 세속의 죄로 돌아서자 그는 강도들 가운데로 떨어졌습니다. 하늘의 명령에서 멀어져 죄에 쉽게 넘어가는 존재가 되지 않았더라면 아담은 강도들 가운데로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강도들이 누구입니까? 가끔 빛의 천사들로 위장하지만(2코린 11,14 참조) 이내 본색이 탄로 나는 밤과 어둠의 천사들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그자들은 먼저 우리가 입은 영적 은총의 옷을 훔쳐 가고 그 뒤로도 계속 우리 몸에 상처를 입힙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을 더럽히지 않고 잘 지킨다면, 강도의 공격에 끄덕없을 것입니다. 아담처럼 먼저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보호의 손길을 잃고, 믿음의 외투를 빼앗기지(창세 3,7 참조)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는 길을 가던 사마리아인이 상처를 싸매 주지 않았더라면 인류 전체가 타락하고 말았을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던 것입니다.
-암브로시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본 설교에서는 둘째 오솔길, 곧 버림과 그대로 둠의 길을 걸어야 할 몇 가지 이유가 간략하게 제시된다. 우리는 버림과 그대로 둠의 길을 걸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실재를 보는 우리의 관점이 종종 만물의 전체성과 거룩함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버림과 그대로 둠의 길을 걸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하느님이 광활한 어둠이자 알 수 없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이 두 여정은 같은 여정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아는 만큼 하느님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속으로 들어가는 만큼 하느님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마주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캄캄한 어둠인 하느님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엑카르트는 우리 모두가 일상적인 하느님 경험에 참여하기를 바라지만,그러한 경험 속에 긴장이 도사리고 있음도 잘 알고 있다. 창조계는 선하다. 창조계는 하느님처럼 선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가 신적인 사랑을 지녔더라면 우리는 하느님과 이제까지 그분이 수행해온 모든 일을 보고 기뻐했을 텐데 피조물은 선하지만, 종종 영혼에게 안식을 주지 못하기도 한다. 왜 피조물은 영혼에게 안식을 주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의 선한 눈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254)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1코린 3,1-11
복음 선포자의 역할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때, 나는 여러분을 영적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젖만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일고 있는데, 여러분을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어떤 이는 “나는 바오로 편이다.” 하고 어떤 이는 “나는 아폴로 편이다.” 하고 있으니, 여러분을 속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로서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은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집을 지을지 저마다 잘 살펴야 합니다.
아무도 이미 놓인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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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7.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어렸을 때, 음식을 남기면 안 된다. 는 말을 듣고 자랐기에 먹기 싫어도 먹으려고 했지만, 지금은 먹기 싫은 것은 안 먹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라, 는 부모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이가 좋지 않은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려고 했지만, 지금은 마음 가는 대로 싫으면 싫은 사람과 함께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이런 저에게 예수님의 오늘 복음,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라고 하신 말씀은 참으로 저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불편하게 합니다. 솔직히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 우익단체들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땅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몇몇 친일 추종파들, 특히 주ㅇㅇ과 같은 사람은 정말이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 욕설과 함께 분노가 솟구칩니다. 모든 이를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 고 말씀하시지만 그렇지 못한 저를 향해 예수님은 “모르면 책임이 없지만,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은 사람은 매를 더 많이 맞을 것이다.”(루12,48)하고 말씀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10,25)하고 묻습니다. 그 질문에 예수께서는 직접 대답을 주시지 않고, 그 교사에게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하십니다. 율법 교사는 자신이 배운 바를 바탕으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0, 27)라고 응답함으로써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한 해답으로 제시합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율법 교사의 대답을 옳은 답으로 인정하시고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10, 28)하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 말씀엔 루카의 명확한 편집 의도가 드러납니다. 루카는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사랑의 실천’, 즉 앎을 행동으로 실천해야 함을 거듭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더욱 루카 복음사가는 율법 교사의 입으로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10,29)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함으로써 그 구체적인 참된 사랑의 실천 방법을 예수님께서 가르칠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주시고, 이를 통해서 성경의 가장 의미롭고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율법 교사가 제기한 이웃이 누구인가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이웃이란 통상적인 개념, 곧 서로 가까이 인접하여 사는 집, 이웃에 사는 사람이라는 관점을 뛰어넘은 새로운 관점에서 이웃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즉 ‘누가 나의 이웃인가?’에서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로 발상을 전환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결국 이웃이란 말 그대로 자신을 기준으로나, 타인을 기준으로 했을 때도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 가까운 곳에서 나의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장소적 즉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이웃이지만 이를 넘어서서 지금 여기서라는 구체적으로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이웃이며, 그에 대한 나의 응답이 참된 사랑의 실천이라고 제시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결국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이웃사랑이란, 지금 이곳(=가장 가까운 곳)에서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강도를 만나서 죽게 된 그 사람에게 이웃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은 사제, 레위, 사마리아 사람 셋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제와 레위는 그 사람을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10,31.32)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라는 표현이 제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단지 사제와 레위 두 사람의 방향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내면의 상태와 행동의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어떤 연유에서 그 사제는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런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그의 모습에서 그 사제의 평소 의식과 행동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제는 위급한 사람이 보이기보다는 “누구의 주검이든 그것에 몸이 닿는 이는 이레 동안 부정하다.”(민19,11)라는 율법 규정이 먼저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저처럼 가장 사제 직분에 충실한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참으로 자비하시고 사랑스러운 하느님을 믿고 사는, 하느님의 대리자로서는 적합한 사람은 아닌 듯싶습니다. 레위인은 본디 성전에서 종사하는 사람이며, 육체적인 노동을 하지 않고도 십일조를 받아 걱정 없이 살 수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편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괜스레 복잡한 일에 관여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그 또한 가엾은 마음이야 있었겠지만, 마음보다는 머리가 우선하고 몸이 따르지 않았기에 못 본 척, 길 반대쪽으로 결국 오던 길로 지나가 버림으로써 스스로 초주검을 당한 사람의 이웃 됨을 거부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필요를 외면함으로써 이웃사랑의 실천하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곧 사랑을 완성할 기회를 박차버린 것입니다. 이 비유의 반전은 바로 사제와 레위인과 달리 유대인과 원수지간이었던 사마리아인이 바로 초주검을 당한 그 사람의 이웃이 되었고, 실제로 이웃사랑을 실천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종교, 인종, 이념, 신분, 성의 차이를 뛰어넘어 바로 사마리아인처럼 지금 여기서 자신을 필요한 사람에게 참된 이웃이 되어주고, 그에게 필요한 것을 구체적으로 응답하고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베푼 것을 되받으려 하지 않았으며, 단 한 번의 상처를 치유해 주고 머물며 쉴 곳을 마련하는 것으로 끝낸 것이 아니라 초주검을 당한 사람이 온전히 활동할 수 있을 때까지 돌봄으로 그의 진실한 마음과 행동의 순수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사마리아인과 초주검을 당한 사람의 관계는 바로 예수와 상처받은 모든 인류와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을 흔히 소극적 구원과 적극적 구원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소극적 구원이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물에서 살려 내줌이라면, 적극적 구원이란 물에서 살려낸 그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그에 필요한 은총을 베풀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이 사마리아인의 사랑에는 이런 복합적인 사랑을 잘 드러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인생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역시 그 길에서 강도를 만나 초주검을 당한 사람일 수 있고 또 강도를 만나 초주검을 당한 사람을 만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서건 우리 모두 아는 만큼 실천해야 하고, 실천하는 만큼 아름다운 세상, 사람다운 냄새가 풍기는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하리라 봅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 율법 교사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지금 여기서 나의 이웃은 누구이며, 그 사람을 어떻게 배려하고 동반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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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7.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주어야만 /
박윤식 [big-llight] 241006 19:18 ㅣNo.176587
서구 사회에서는 자신에게 특별한 부담이나 피해가 오지 않는데도, 다른 이의 생명이나 신체에 중대한 위험이 발생하고 있음을 보고도 구조에 나서지 않고 방관하는 경우에 이를 처벌하는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 있단다. 최근 거리에서 폭력을 당하거나 위기에 처한 이를 돌보다가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다는 현실적 이유를 핑계로, 보편적 도덕심을 잃는 위기의 한국 사회를 볼 때에, 나의 ‘이웃에 대한 정의’는 자못 중대하다는 생각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웃은 가까이에 있는 이라는 뜻이다. 이 가까움은 단순한 거리상의 문제를 넘어 혈연, 그리고 친분이 있는 이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이는 예수님 시대에도 지금과 거의 비슷하게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이방인, 사마리아인 등 나와 관계없는 이는 나의 이웃일 수가 없었던 거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러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바꾼 것이다.
율법 교사가 적대시하고 철저히 무시했던 사마리아인에 관한 비유지만, 그가 보여 준 행동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고귀한 사랑의 가치를 담고 있었던 거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논쟁을 시작한다. 이는 대개 가슴이 아닌 머리에서 시작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613개의 율법 조항’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지 등은, 이른바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기지를 발휘하여 쏟는 것들일 게다.
그러나 결국 우리에게 ‘믿는 이’의 자세를 가르쳐 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것이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에게는 사마리아인들은 어쩜 가장 혐오스러운 민족이었다. 그들은 사마리아 함락 뒤 바빌론으로 유배당한 유다인 대신 사마리아로 끌려왔다. 그들은 모세를 예언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의 신전을 지어 그들의 신을 믿었다.
따라서 유다인들의 눈에는 그들은 배교자로 그들을 너무나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사마리아인에게는 처음 보는 유다인이지만 위기에 빠진 이웃이라는 그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내어 준다. 그에게 관심을 보여 주고 시간을 내어 주며, 자상하게 돌본다.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것이, “당신은 ‘누구의 이웃’이 되어 주었나?”로 물어 본다.
사랑에 합리적 이유를 강요하거나 어떤 제한을 거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느님 사랑에 뿌리를 둔 조건 없는 이웃 사랑에서 진가를 발휘하기에. 우리는 얼마나 조건부 사랑에 익숙한 것인지를 되돌아볼 때다. 예수님은 유다의 철전지 원수인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실천을 이웃의 본보기로 비유하였다. 그는 마음과 생각과 목숨을 다하여 초주검으로 버려진 이를 내 몸같이 보살폈다.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이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
이렇게 사랑의 기본은 연민이란다. 그 사람의 아픔과 필요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나.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곧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느끼시는 그 마음이고, 또 우리가 서로에게 가지기를 원하는 마음이기도.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자비를 베푸는 이는 그야말로 행복하다. 그들도 언젠가는 자비를 입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이웃은 과연 누구일까? 정녕 나를 필요로 하는 이에게 이웃이 되어주어야만 할 게다. 따라서 ‘지금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할까?’를 깊이 생각하자. 그래서 내가 필요로 하는 이가 아닌, 진정 ‘나를 필요로 하는 이’를 찾아 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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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7.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복음을 가만히 보면, 율법 교사가 질문하지만 사실 답을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다른 곳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예수님이 아니라 율법 교사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신명기에 있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은 레위기에 있으니 율법 학자가 이 계명들을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하고, 예수님께서 그 계명들을 지키게 하신다고 하여서 그에게 새로운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라고 다시 묻는 것은 그가 어제 우리가 묵상한 것처럼 규정이 없어도, 규정보다 더 나아가는 삶을 사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는 이웃의 범위를 한정하려 합니다. 그는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웃의 범위가 정해지면 그 안에서만 계명을 지키려 하였습니다.
법을 최대한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10,2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가 이웃을 한정하려 할 때, 그는 자기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는 계명을 실천하여 생명을 얻었을까요?
마지막에 그는 강도에게 이웃이 되어 준 이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10,37)이라고 말하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계명들을 진심으로 실천한다면 우리는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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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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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7.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묻는
율법 교사에게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민족 사람들과 이방인을 구분했습니다.
단순하게 다르게 생각한 것을 넘어
이방인들을 죽이는 것은
살인죄에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들은
그들이 생각했던 하느님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를 죽이는 것은
그에게만 피해가 가는 것이 아니라
그와 관계가 있는 하느님에게도
피해가 가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관계가 없는 이방인은 다릅니다.
단지 그에게만 피해가 가지
하느님께는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즉 하느님께 피해가 가느냐 아니냐로
죄가 되느냐 아니냐를 구분했습니다.
이 관점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만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늘의 비유는
그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나의 이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으로 말하자면
모든 사람은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건 아니건
하느님과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았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례도 그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단 하나의 조건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조건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기에
이미 그는 하느님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율법에 따라서도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인의 차이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모든 이를 나의 이웃으로 생각해서
모든 사람의 필요에 즉시 응답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사제와 레위인은
그들만의 이유가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내 이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돌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돕고 싶지만
지금은 할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돕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모두를 내 이웃으로 생각하는 마음만 있다면
언젠가는 우리도 그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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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7.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모님과 예수님을 향한 우리 매일의 사랑 고백, 묵주 기도!
저는 신학교 다닐 때 여기저기 몸도 아팠지만, 이 길을 계속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갈등도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업 땡땡이도 많이 치고, 제대로 신학 공부도 하지 못했습니다.
늘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지라, 30년 전부터 반성하는 마음으로 매일 영성 서적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습니다.
좋은 영적 독서 책 한 권을 만나면 마치 횡재한 기분입니다.
탁월한 영성가들의 신앙과 삶, 지혜와 경험이 맞춤형으로 내 손안으로 딱 들어오니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최근에 영적 독서를 하던 중에 묵주 기도와 관련된 풀톤 쉰 대주교님의 말씀을 접하고
정말 가슴이 뛰고 설레었습니다. 이런 말씀입니다.
“때로 우리가 매일 바치는 묵주 기도는 지루한 반복이나 그저 해야 하는 일상의 의무처럼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연인들 사이에서는 수시로 서로 사랑을 확인합니다.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해요 라고 말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아름다운 진리에는 지루한 반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 묵주 기도는 성모님과 예수님을 향한 매일의 사랑 고백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성껏 묵주 기도를 바치면, 그것은 “성모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묵주 기도를 누구보다도 좋아하셨던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묵주 기도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는 단순하고 깊이가 있고, 훌륭한 묵상 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를 바칠 때마다, 제 영혼의 눈앞에는 예수 그리스도 생애의 중요한 사건들이 지나갑니다.
환희, 빛, 고통, 영광의 신비로 구성된 그 신비들은 성모님의 마음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있는
친교를 나눌 수 있게 저를 이끕니다.
찬미의 기도이며 간구의 기도인 묵주 기도가 묵상 기도로 넘어가길 희망합니다.
묵상을 동반하지 않는 묵주 기도는 영혼이 없는 육신과 같습니다.”
보십시오! 묵주 기도는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구원송 등 염경기도의 조합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묵상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는 염경기도와 묵상기도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기가 막힌 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문 매 신비 안에 반드시 ‘무엇무엇을 묵상합시다!’ 라는 문구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묵주 기도는 당연히 묵상 기도입니다.
묵상이나 관상에로 나아가지 못하는 묵주 기도는 영혼이 없는 육체에 불과합니다.
또한 묵상 없이 그저 입으로만 줄줄 바친다면 묵주 기도가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이방인들의 빈말처럼 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묵주 기도를 자주 바치면 좋은 점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정성껏 묵주 기도를 바칠 때, 성모님께서 더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성모님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더 우리 가까이 현존하십니다.
결국 묵주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현존 체험, 성모님 동반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묵주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 성모님께서 언제나 내 인생 여정을 동반하신다.’는 의식을 지니게 되니,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쁘게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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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7.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율법 교사는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25절)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26절) 율법 교사는 계명을 말씀드렸다. 주님께서는 그의 속마음을 아시고 말씀하신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28절)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절). 주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절) 사제도 레위인도 아닌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37절)이 그의 이웃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34절)이라고 한다. 우리를 치유하시는 의사는 필요한 치료제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분의 말씀이 치료제이다. 어떤 말씀은 상처를 싸매고, 어떤 말씀은 기름을 바르고 어떤 말씀은 포도주를 붓는다. 그분은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주고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주고 노새에 태우고 그의 짐을 대신 져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우리에게도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 말씀하신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35절) 이튿날은 바로 강도를 맞은 사람이 구원받은 날로 부활의 날이다. 그리고 두 데나리온은 하느님의 두 계약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상처 입은 값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다. 그 고귀한 피가 우리를 구원하여 죽음의 아픔을 면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강도를 만나 매 맞고 반죽음 상태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도와준 이가 당신이심을 알려주셨다. 우리의 상처를 보살펴 주는 이보다 더 가까운 이는 없다. 그분을 우리 주님으로 사랑하고 우리 이웃으로 사랑하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도 사랑하여야 한다. 하나 된 몸 안에서 다른 어려운 지체들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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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7.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묵주기도 잘 바치는 법: 묵주기도는 어머니께 내미는 어린이의 손
10월은 로사리오 성월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이 기념일이 정해진 이유는 교황 비오 5세와 교회의 묵주기도를 통한 엄청난 하늘의 개입을
온 교회가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결정적 사건은 이렇습니다.
1571년 그리스도교 신성 동맹은 해군력이 훨씬 우월하고 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준비가 되어있는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엄청난 위협에 직면했습니다.
두 세력은 그리스 레판토 바다에서 결정적으로 맞붙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군은 수적으로 열세였고 전투는 패배로 끝날 것이 확실해 보였습니다.
그러면 속수무책으로 모든 유럽이 이슬람화될 위기였습니다.
이때 교황 성 비오 5세는 그리스도교국에 대한 큰 위험을 인식하고 신자들에게 승리를 위해 함께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는 로마의 모든 교회와 수도원에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구체적으로 지시했으며, 자신도 큰 신심으로 묵주기도를 인도했습니다.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신성 동맹은 많은 역사가가 기적적인 해군 승리로 간주하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오스만 군대는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그들의 제국이 유럽으로 확장되는 것은 중단되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교황 비오 5세는 승리를 성모 마리아와 묵주기도의 덕분으로 돌렸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교황님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셨고, 나중에 이 축일을 10월 7일에 묵주기도의 성모 축일로 바꾸었습니다.
전쟁 이후에도 그의 묵주기도 장려는 이 강력한 기도에 대한 신심을 가톨릭 세계 전체에 퍼뜨리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가 제정한 로사리오 성모 축일은 묵주기도가 단순한 개인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개입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바꿀 힘을 지닌 기도라는 생각을 더욱 확고히 해주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자랑 중의 자랑은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 어머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멀게만 느껴질 때 어머니를 통한 힘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처음에 꺼리셨음에도 첫 기적을 행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성모님의 청원 때문이었습니다.
묵주기도는 본래 시편 150편을 하루에 다 낭송하던 수도 전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시편도 내 생각을 끊고 이미 있는 기도문에 정신을 집중하는 행위입니다.
묵주기도가 잘 바쳐지려면 기도하는 중에 나를 믿는 마음을 내려놓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 생각을 끊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행위입니다.
아이들의 가장 강력한 힘은 “엄마!”라고 반복해서 부를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옵니다.
소화 데레사가 꿈을 꾸었는데 자신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하느님이 계시는 곳으로 한 계단도
오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보며 불쌍하고 애절한 눈만 치켜뜨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안타까움에 다른 누구보다 소화 데레사를 들어 가장 높은 곳에 앉히십니다.
묵주기도의 힘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단순하게 반복하는 말속에 나를 파묻으면 주님께서
들어주십니다.
내가 하는 말과 각 신비를 묵상하며 최대한 나의 생각을 내려놓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엄마에게 내미는 아이의 손에 다른 생각이 들어있을 수 없습니다.
생각은 나를 믿는 행위입니다.
공동으로 묵주기도의 힘의 사례에 대해 들은 것은 수없이 많습니다.
미국에서 사목하던 신부님이 자기를 비웃던 마귀 들린 사람을 신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하며 쫓아냈던 일, 그리고 성당 레지오 단원들이 밤새워 기도하여 익사한 청년을 되살린 일 등 너무나 많습니다.
여기에는 성모님께 청할 때 예수님께 청하여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될 수 있다는 믿음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묵주기도는 개인적으로도 큰 능력을 발휘합니다.
르완다 대량 학살의 생존자인 임마꿀레 일리바기자의 책 『로사리오: 내 생명을 구한 기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녀는 당시 숨어있던 91일 동안 묵주기도를 바치며 자신이 체험한 묵주기도의 능력을 크게 네 가지로 말합니다.
1. 하느님의 손에 숨겨져 보호받는다는 믿음:
임마꿀레는 그녀가 숨어 있는 동안 묵주가 그녀의 방패가 되어 외부의 압도적인 두려움과 위험으로부터 그녀에게 깊은 보호감을 제공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밖에서는 폭력이 만연하고 살인범들이 집을 수색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녀는 묵주를 꼭 붙잡고 자신과 벽 너머의 혼돈 사이에 거의 물리적인 장벽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그녀를 둘러싼 공포로부터 그녀를 보호하시고, 겉옷으로 그녀를 덮고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위로의 형태가 아니라, 성벽 밖의 악의 손길을 받지 않고 “하느님의 손에 숨겨졌다.”라는 심오한 느낌이었습니다.
2. 하느님 용서의 능력을 받게 됨: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께서 경험하신 가장 중요하고 신비로운 순간 중 하나는 마음의 심오한 변화였습니다.
은신 초기에 그녀는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살인자들을 포함하여 자신의 동족을 살해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분노와 적개심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묵주기도를 계속 바쳤고, 특히 고통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용서의 은총이 그녀의 영혼에 넘쳐흐르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용서가 그녀와 그녀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깨달았고, 원수들을 위한 예수님의 수난의 고통에 자신도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3. 천사들의 존재를 느낌:
임마꿀레는 숨어있는 동안 천사들이 거의 눈에 띄게 나타났다고 자주 말합니다.
그녀는 묵주기도를 바치는 동안 그 방에 천사들이 있어 그녀와 다른 여성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살인범들이 위험할 정도로 그들을 발견할 뻔했지만, 항상 뭔가가 그들이 화장실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처럼 보였던 여러 사례를 이야기합니다.
그녀는 기도하는 순간 하늘의 존재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개입하고 있다는 깊은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이것을 성모 마리아께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천사들을 보내셨다고 믿으며 끊임없는 묵주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여겼습니다.
4. 혼돈 속에서도 신비로운 평화의 힘을 느낌:
상황의 극도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임마꿀레는 묵주기도가 어떻게 그녀에게 신비로운 것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의 평화에 대한 심오한 감각을 가져다주었는지 설명합니다.
대량 학살이 밖에서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동안, 화장실 안에서 그녀는 공포를 뛰어넘는
평온함을 경험했습니다.
특별히 환희의 신비를 바치면서 그녀는 그리스도의 강생과 탄생을 연결했으며,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예수님의 세상에 오신 것이 희망을 가져왔다는 것을 스스로 상기했습니다. 이는 그녀를 둘러싼 악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희망과 평화의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이 평화를 묵주기도를 사용하여 그녀에게 은총을 부어주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신비로운 선물로 여겼습니다.
임마꿀레는 묵주기도가 자기 생명을 구했다고 말합니다.
기도를 하기 전에는 그 두려움과 고통에 차리라 발각되어 죽기만을 바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5단짜리 묵주는 그녀가 용서하고, 평화를 찾고, 하느님의 자비를 믿을 수 있게 해주는 심오한 내적 치유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손만 내밀면 잡아주실 어머니가 계심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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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7.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10,30ㄴ-35).”
1)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 라는 계명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은,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한 일입니다.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에게 필요한 일을 해 준 것입니다.
<“사랑이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고 실천하기”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산상설교에 있는 ‘황금률’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은 곧 ‘황금률 실천’입니다.>
2) 이 비유를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ㄷ).”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은, 느닷없이 ‘가장 작은 이’의 위치로 떨어진 사람이고, 그 사람을 도와준 일은 곧 주님을 도와드린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적용하면, 심하게 다쳐서
죽어가는 그 사람이 바로 ‘주님’입니다.
주님을 믿고, 섬기고, 사랑하는 신앙인이, 자기가 사랑하는 주님을 도와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3) 옛날의 성서학자들은,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나’로, 나를 도와주는 착한 사마리아인을 ‘예수님’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 해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도와주시고, 나를 살리시는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내가 어떤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누군가가 와서 나를 도와준다면, 나를 도와주는 그 사람은 나의 수호천사이기도 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요한 1서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1).”
사랑받고 있음을 믿는 사람이 사랑을 실천하는 법입니다.
반대로, “나는 사랑받은 적 없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랑 실천을 할 줄 모르는 차가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벤허’ 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노예 신세가 되어 끌려가다가 사막에서 갈증으로 고통을 겪을 때, 군인들의 위협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한 바가지의 물을 건네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인공 벤허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관객들은 예수님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를 향해서 가실 때, 벤허는 그 죄수가 바로 자기에게 물을 주었던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고, 예수님에게 다가가서 물 한 바가지를 드립니다.
예수님이 벤허를 노예 신세에서 구출해 준 것도 아니고, 벤허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서 구해 드린 것도 아닌데, 예수님과 벤허가 서로 주고받은 한 바가지의 물은 많은 것을 나타내는 ‘심오한 상징’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정말로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 주님께서 말없이 건네주시는 물 한 바가지인지도 모릅니다.>
4)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실화가 아니라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 실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생하게 가르치기 위해서, 사랑 실천을 하는 사람을 의도적으로 사마리아인으로 설정하셨습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적대 관계였고, 서로 상대방을 원수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당시의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꾸짖기 위해서, 그냥 지나가 버린 사람들을 사제와 레위인으로 설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으로도 생각해야 합니다.
“네가 지금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불행한 일을 당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하겠느냐? 그냥 지나가겠느냐?”
<입장을 바꿔서, 내가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해서
큰 고통을(죽을 위험을) 겪고 있을 때, 누구든지 아무나 나를 좀 도와주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을 때, 하필이면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또는 평소에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나를 보고 다가와서 기꺼이 도와준다면?
그러면 한순간에 ‘원수’가 ‘생명의 은인’으로 바뀌게 됩니다.
사랑은, 그래서 위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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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7.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0,25-37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이는 신앙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기는 하나, 이 안에는 율법교사의 편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해드려야 그 대가로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즉 구원을 본인의 능력과 노력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가치로 보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구원은 자신의 ‘행위’에 달려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임을, 또한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의 여부는 내가 구원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느냐 하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라는 ‘존재’에 달려 있는 일임을 깨달아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 율법교사는 그 부분을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계명’의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는 한편, 자신이 그 계명을 그저 머리로만 아는게 아니라 행동으로까지 옮기는 충실한 사람임을, 다시 말해 자기가 구원받기에 합당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싶어서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갑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그는 자신이 하느님 사랑이라는 계명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또한 누가 자기 ‘이웃’인지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답하시는 ‘이웃’의 범주가 자신이 예상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러면 저는 이미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답할 태세였지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예수님께 그런 질문을 던졌다는 점에서 그가 하느님을 제대로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맙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제 이웃입니까?’라는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나처럼 당신 손으로 직접 창조하신 피조물이자 나의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가 내 이웃인지 구분하는 일 따위는 집어치우고, 나와 함께 살아가는 형제들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면 될 일이지요. 하지만 그러지 않는 건 내 안에 ‘자아’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나’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에, 사람을 대할 때에도 그가 나에게 이익이 될지 아닌지만 따져가며 차별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 속 비유에 등장하는 사제나 레위인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강도를 당해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이익과 손해의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혹시라도 이미 그가 죽은 사람이라면 그를 손으로 만진 자신이 율법적으로 부정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종교인으로써 해야 할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기니, 아예 모르는 척 그냥 지나쳐버리는 길을 택하지요.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이익이 아니라 연민의 마음으로 길거리에 쓰러진 사람을 바라봅니다. 그는 유다인들에게 이방인들과 어울리는 ‘우상숭배자’라고 손가락질 받지만, 어려움에 처한 이를 ‘가엾이 여기는’ 그의 마음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는 타인의 아픔을 자기와 상관없는 ‘남의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길에 쓰러진 사람이 감내하고 있을 고통과 수치를 생각하니 도저히 그를 그냥 두고 지나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여관으로 데리고 가 정성껏 간호해줍니다.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한 일을 한 것인데 그를 두고 떠나면서 여관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 자기가 꼬박 이틀을 일해야 벌 수 있는 꽤 큰 돈을 맡기며 그를 잘 돌보아달라고 부탁하지요. 예수님은 당신께 질문한 율법학자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 이익과 손해를 따지고 적당히 눈치를 보며 대충 하려고 드는 우리에게, 그 사마리아인처럼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랑을 실천하라고, 그래서 어려움에 처한 이에게 참된 이웃이자 형제가 되어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참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며, 그래야만 사랑으로 하느님과 일치되어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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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7.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은지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그들의 근거는 모세의 법에 이혼장을 써주면 아내를 버려도 좋다는 근거를 내세웁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마르 10, 4)라고 설명하시지요.
마음이 완고하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창조 때부터 남녀를 평등하게 만드셨는데도 불구하고 유목사회에서
여자를 마치 재산 중에 하나로 꼽으려는 경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규정을 십계명에서 마지막 부분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탈출 20,17)
그래서 여자의 생명을 가볍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여자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혼장을 써주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부의 결합은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때부터 일심동체(一心同體)로
맺어주신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부부를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부부는 법적으로도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가 아름다운 것은 법보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서로를 아끼고 일치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공유하는 것이 많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언젠가 미얀마에서 일하는 교우가 휴가를 나왔다가 서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교우는 앞으로 부인에게 잘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부인이 무안해 하며
또 그 소리한다고 핀잔을 주는 것입니다.
자기가 미얀마에 있을 때 한 영국인이 있었는데 그는 매일 책일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영국 젠틀맨은 늘 책을 읽는가보다 생각을 했는데 일 년이 지나도 쉬는
시간에 틈틈이 책을 읽는 것을 보고 '너희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책을 읽냐?'라고
질문했더니 뜻밖의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외국 땅에서 자기 오기를 기다리는 부인을 위해서 책을 읽는다는 것입니다.
부인과 제일 기쁜 시간은 함께 식사를 하면 책을 읽은 대목을 설명해 주면 그렇게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부인과 대화하기 위해서 매일 책을 읽는다는 말을 듣고
자기는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기는 부인을 위해서 한 줄의 책이라도 읽었는가?하고 자문해 보았다고 합니다.
책커녕 꽃 한 송이 아니 부인이 그렇게 좋아하는 화분의 꽃 하나 갖다 준 적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부터는 자기는 부인을 위해서 영국사람과 똑 같이는 아니더라도 무엇인가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작은 것이라도 준비한다고 했습니다.
로마에서 학생 시절에 지낼 때 제일보기 좋은 장면을 고르라면 주황색 가로등에
산보하는 노부부라고 하겠습니다.
서로 팔짱을 끼고 무슨 이야기가 많은지 오래도록 도로를 산보하는 모습들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습니다.
부부는 매일 보고 사는데 '저토록 할 이야기가 많을까?'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이에는 말 없는 대화가 더 끊이지 않겠지요.
가끔씩 이곳에서도 산행을 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 부근 시골스런 마을의 식당에 들어
갈 때가 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부부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모습들을 행복이 가까이 있는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창세기의 야훼계 저자는 하느님께서 아담을 깊게 잠이 들게 하시고 그의 옆구리에서
갈빗대 하나를 빼내어 여자를 지으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 2,23)
저자의 재미있는 설명이지만 그 만큼 부부가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부를 하나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육체적인 것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서로 아끼고
배려하는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사랑의 특징 중에 하나가 서로 공감을 갖는 대화라고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부부가 일생 서로 사랑하고 행복한 삶을 꾸려나가야 하겠습니다.
부부가 서로 공감하는 바탕은 여러 방법이라 하겠지만 하나를 꼽으라면 무어니 해도
대화라고 하겠습니다.
부부는 서로 말로 사랑과 신뢰의 표현을 합니다. 서로 아끼고 서로 존중하는 것이
바탕이라면 말이 서툴고 많지 않더라도 서로 믿고 사랑할 수 있는 열려져 있는
마음이기에 공감할 수 있는 폭이 넓은 것이지요.
사랑은 상대를 기다려주고 들어주는 것이라고 하지요. 대화로서 부부의 사랑이
잘 표현되며 그러한 부부는 행복하고 주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 법 테두리에서가 아니라 부부는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관계에서
일치하며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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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7.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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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7.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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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7.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삶
<2024.10.7>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19:20~37절)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삶❞
❚ 하나님은 위기의 때에 드리는 기도를 들으셔서 구원하시고, 회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 어려움 앞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십니까?
➲ 어려움 앞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 응답해 주십니다(20~28절).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20절). 위기 상황에서 히스기야 왕이 이스라엘의 참된 하나님께 철저히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히스기야가 간구를 들으신 하나님은 이제 산헤립에 대한 자신의뜻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앗수르가 예루살렘 앞에서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1절). 하나님은 앗수르 왕의 교만함에 대하여 책망하십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군사력을 자랑했고,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위상을 높였습니다. 심지어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능멸한 사실에 대하여 질타하셨습니다(22~24절). 산헤립 왕은 자신의 능력을 여호와의 능력과 견줄 만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자신이 마치 신과 같은 존재임을 과시하며 교만해 있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앗수르 왕이 자랑하는 정복 전쟁이 모두 하나님의 계획하에 이루어진 것이며 앗수르는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 또한 지적하고 계십니다(25~26절).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은 앗수르의 교만하고 방자한 행동에 대해 심판을 선언하십니다(27~28절).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부르짖음과 근심을 아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기도에 대하여 외면하지 않고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시급하게 해결되어야 할 어려운 일이 생겼는데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찾아 간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입을 수 없습니다. 혹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히스기야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조롱하고 교만한 앗수르 왕을 닮지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겸손한 자는 구원하시고, 교만하여 대적하는 자는 멸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움 앞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줄 아는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구하며 도우심을 바라며, 작은 신음에도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므로 응답을 경험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어려움 앞에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에게 해결을 주십니다(29~34절).
유다 전역은 전쟁으로 인해 농경지와 나무들이 망가져서 적어도 2년간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산헤립은 유다의 성읍들 가운데 46개를 점령하여 약탈했으며 수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금년에도, 내년에도 저절로 자란 곡식을 먹게 될 것이고, 삼 년째 되는 해에는 정상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것이라는 징조에 대해 말씀하십니다(29절). 예루살렘이 점령되지 않았기에 유다 백성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피신한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살아남아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30절) 것입니다. 이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인데, 바로 ‘여호와의 열심’ 즉,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가 이 일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31절). 다시 말하면 남은 자의 수가 매우 적을지라도 이들이 뿌리를 내리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앗수르가 예루살렘에 이르지도 못하고 오던 길로 돌아가리라 말씀해 주셨습니다(32~33절). 그리고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지켜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까닭은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34절)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앗수르의 왕은 자신의 군사력과 국력을 믿었기에 유다와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껏 조롱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결국 유다는 많은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완전히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장 구원받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는 다 알지 못할 때가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열심히 풍성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론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실 때가 있지만, 간구의 자리에서 우리는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계획과 사랑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인생에 닥친 여러 가지 어려움 앞에서 우리의 선택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렇게 간구할 때 하나님은 해결의 방법을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대상이 아닌 하나님께만 간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어려움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승리를 주십니다(35~37절).
그 날 밤에 여호와의 천사가 앗수르의 진을 나아가서 앗수르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죽였습니다. 교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한 앗수르 왕을 낮추며 이 세상의 참된 주권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앗수르 왕 산헤립은 그 곳을 떠나 니느웨로 돌아가 돌아갔고, 그곳에서 자기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그의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죽이고, 그의 아들 에살핫돈이 앗수르의 왕이 되었습니다.
수십만의 앗수르 군대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오자 하룻밤 사이에 수십만의 앗수르 군사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여호와를 조롱했던 산헤립 왕의 운명도 허무하게 끝이 났습니다. 그가 섬겼던 니스록은 산헤립을 결코 지켜 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히스기야를 지켜 주셨지만, 니스룩은 생명이 없는 우상이었기에 산헤립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세상이 섬기는 온갖 우상들은 얼핏 보기엔 대단해 보이지만, 그것들을 섬기는 사람들을 결코 지켜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들은 결국 그 돈 때문에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권력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들 또한 그 권력 때문에 비참하고 초라한 인생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산성이 되어 주시고, 환난 중에 피할 든든한 바위가 되심을 믿고, 신뢰하므로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삶에 어려움이 닥칠 때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줄 아는 겸손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어려운 난관 앞에서 당황하지 말고, 하나님만이 산성이 되어 주시고, 피할 바위가 되어 주심을 믿고 인내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왕하 19:20~37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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