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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고립된 죽음'과 슬픔
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한 논문을 찾는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에 관한 "비판적"논의라는 논문을 발견한다. 비판적이라고 하겠기에, 그의 죽음을 하나하나 검토하고 그의 죽음론에 관한 어떤 논리적인 모순이나 불명료한 지점들에 대한 지적들이 있을 것으로 기대 했으나, 아니나 다를까 역시 또 '레비나스'가 등장한다. 나는 레비나스의 주장은 탁월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하이데거에게 일삼는 비판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가령, 레비나스에 대한 논문들을 찾아 읽자면, 다음과 같은 서술들이 등장한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가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존재자를 중립화시키고 말아 타자와의 어떤 관계도 불가 능하게 만들고, 타자를 자기에로 환원"하고 말았기 때문에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타자와의 어떤 평화도 없이 타자를 소유하거나 억압하는ㅡ권력의 철학"이라 규정하면서 나의 지배와 소유의 틀 안으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와의 관계와 그것에 관한 사유를 형이상학이라 하면서 존재론을 극복하고자 한다. "하이데거에게서 존재가 맺는 기본 관계는 타인 또는 타자와의 관계가 아니라 죽음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란 대수롭지 않게 되는데 [그 이유는] 사람은 혼자 죽기 때문이다.>정기철(2007)
레비나스의 주장이 '간접 인용'되어 있기는 하지만, 위의 주장은 논문의 필자의 주장이기 이전에 레비나 의 생각을 그대로 잘 옮겨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저러한 레비나스의 주장에서 드러나는 하이데거의 죽음은, 얼마간 <존재와 시간>을 반영해두고 있기는 하다.
하이데거의 죽음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고립된 죽음이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것은 몰교섭적이기 때문이다. '몰교섭적'이라는 말은 우리의 죽음이 대리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죽음은 언제나 나의 죽음으로서 가장 독자적인 것이며, 그것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다. 누군가 일견 나를 대신해서 '희생'한다 하더라도, 내 죽음의 순간은 유보되었을 뿐, '죽음에 이르는 존재[Sein zum Todel'로서의 현존재 자신은 결코 달리 규정되지 않는다. 내 죽음은 여전히 내 죽음으로서 남아있다. 나는 나의 죽음을 넘어설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의 죽음이라는 것은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면서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사실이 "타인과의 관계란 대수롭지 않게 된다"는 결론으로 이를 수 있는가? 더 나아가, 하이데거가 "존재자를 중립화시키고 말아 타자와의 어떤 관계도 불가능하게 만들고, 타자를 자기에로 환원"시키고 있는가? 나는 이러한 레비나스의 주장에 대해서 하나도 동의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에게 현존재라는 것은 언제나 '세계-내-존 재[In-der-Welt-Sein]'이다. 그러며 그는 동시에 주변의 '공동존재[Mitsein-이웃]'들과 주변의 사물들에 둘러싸여 있기도 하다. 그런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언제나 세상과 주변 사람들, 세속적인 모든 도덕 규준과 삶의 규칙들 안에서 규정되어 있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퇴락[Verfallen]'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성격은 현존재의 근본 성격 중 하나이고, 떼려야 뗄 수 없는 근본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다음처럼 말한다.
<이 존재자의 기초적 존재론적 성격은 실존성, 현사실성 및 퇴락존재이다. 이 세 실존론적 규정은 하나의 복합체의 단편들로서 속해 있으면서 때때로 그중의 하나가 빠질 수도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세 규정 속에는 한 근원적 연관들이 약동하고 있는바, 이 연관이 바로 우리가 탐구하는 구조 전체의 전체성을 형성한다.> [존재와 시간J (1995) p.278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세상과 단절되고 사람과 단절되기는커녕 이미 그 모든 지평을 전제로 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는 우리가 이미 은연중에 알고 있는 기초적인 예절에서부터 통속적인 윤리적 교설들과, 내가 싫어하는 것을 타인에게 행하지 말라는 황금률에 이르기까지, 이미 그것은 우리의 지평 위에 놓여 있다. 그것은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불분명하기에 정초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너무나 자명해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그 안에서 불분명한 것은, 현존재가 늘 그때마다 신경 쓰는 '공동 존재[이웃]'가 아니라, 현존재 자신의 '존재'이다. 즉 하이데거의 존재는 타자를 가리기는커녕, 오히라 타자가 자신의 존재를 가린다. 우 리는 그때마다 은폐되어 있으며, 은폐된 것은 나의 본래적 자기 존재이다.
그리고 그러한 본래적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불안'이며, 불안은 늘 그때마다 '죽음 앞에서의 불안'이다. 그 사실은 하이데거의 죽음 분석에서 두드러지는데, 죽음은 '가장 독자적인' 나의 죽음이기 때문에 나는 내 유한한 존재의 붙들려 있다는 사실, 즉'내던져져 있음[피투성]'을 알려오고, 그러한 죽음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퇴락
[Verfallen]'해 있는 현실을 알려오며 동시에 이로부터 현존재를 단독화한다. 그리고 그 죽음은 그때마다 뛰어넘을 수 없을 가능성'으로서 현존재가 그 '불가능 성의 가능성'이라는 죽음의 사건을 기투[Entwurf]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그 안에서 현존재는 '단독화'된다. 즉 홀로 남게 되는 것이다. 죽음은 오직 나만의 것이며, 타인에게 양도할 수도 없고, 내가 그 가능성을 극복[기각/거절]할 수도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죽음'의 성격이 주변의 공동존재와 자기 자신이 몰입해 있는 피해석적 규준들을 지워버린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두 가지 점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1) 그래서 하이데거의 죽음 분석이 틀렸는가? [실존 론-존재론]
(2) 그래서 하이데거의 죽음 분석이 타자의 죽음에 무감해지도록 이끄는가? [윤리학]
나는 레비나스가 (1) 번에서는 윤리학이 존재론보다 우선한다는 논의를 가지고 우기고 있다고 간주하며. (2) 번에 있어서는 레비나스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하이데거의 주장은 해석학적-존재론적 주장이며 해석 학적 존재론적 주장이 틀렸다고 이야기하려거든 그 해석의 대안을 제시하거나, 그의 존재론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죽음이 대리 불가능하고 그와 관련하여 죽음은 언제나 나 자신의 죽음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도대체 왜 틀렸다는 것인가? 그것을 먼저 밝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레비나스에게는 그러한 것은 대답할 가치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그 이유는 그는 윤리학이 존재론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그가 어떨 게 증명하고 있는지는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설령 윤리학적 주장이 존재론보다 우위에 있다고 한들, 그 사실을 통해서 여전히 존재론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하이데거의 주장이 틀렸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 는 알 수 없다. 존재론적 명제는 참과 거짓의 문제이지 가치판단의 문제는 아니다. 존재론적으로 사실인 것은 그것이 윤리적으로 틀려도 사실이다. 물론 나는 하이데거의 주장이 윤리적으로는 틀렸으면서 존재론 적으로는 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글의 핵심인 (2)에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하이데거는 위에서 말했든 공동존재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가정한 채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타자는 늘 존재하고, 우리는 이미 그들과 어울려 산다. 그것은 레비 나스를 경악에 빠트린 세계 2차대전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적용된다. 독일 국민들이 나치당에 지지를 표하고 세계 2차대전을 벌인 것 역시도 그들이 '공동존재'와 더불어 살면서, 세간에서 나도는 유대인 음모론들에 현혹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안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 개인의 주체성들은 말살된다. 그 때문에 하이데거는 그러한 것들을 제거하고 스스로의 고유한 가능성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철학을 주창한 하이데거 자신이 유대인 혐오 사상과 나치당의 참여하게 된 것은 역설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하이데거조차 퇴락한 인간에 불과했기 때문인 것이지, 그가 그 자신의 철학답게 살았기 때문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하간 그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죽음과 그 죽음 앞에서의 불안을 통해서 늘 전제되는 퇴락해 있음이라는 성격을 벗어내고 자기 자신의 고유한 존재 가능에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음은 그때마다 오로지 나만의 죽음'이라는 사실이 도대체 우리로 하여금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무감하도록 해주는가에 대한 점이다. 나는 그렇게 쉽게 연결하는 것이야말로 게으른 사유의 전형이자,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개인의 사유를 획일화시키는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하이데거는 우선 현존재 일반이 평균적이고 일상적인 상황에서 고인'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버려진] 사망자와는 달리 "유족들"로부터 빼앗겨간 고인"은 장례, 매장, 묘제의 방식으로 "배려"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 까닭은 역시 고인이 그 존재양식상 단지 환경세계적으로만 배려할 수 있는 용재적 도구 '이상"이기 때문이다. 애도와 회상에 잠겨 그의 곁에 머물러 있을 때, 유족들은 경건한 '고려'의 양상에 있어서 그와 함께 있다[Mitsein]. 그러므로 사자에 대한 존재 관계는 용재자 곁에서 배려하는 존재로서 이해 되어서는 안 된다.> [존재와 시간] (1995) p.343
위의 주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존재는 심지어 망자를 대할 때조차도 우리는 그의 시신조차 그저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장례를 치르며 그를 애도하고, 여전히 한 명의 인격체로서 대우한다. 하이데거는 이를 '고려[Fürsorge]'라고 말한다.
이 고려의 방식이라는 것은 인간이 도구와는 달리 공동존재를 대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이렇게 우리가 타자의 죽음에 슬퍼하며, 애도하는 것을 하이데거의 철학 체계 내에서는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전제'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타인의 죽음을 '대리'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며, 타인의 죽음은 오직 그자신의 죽음이며, 나의 죽음은 오직 나만의 죽음이 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나의 주장인데, 타인의 죽음을 대리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죽음에 무관심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을 두드러진 방식으로 슬퍼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죽음을 대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왜 슬퍼하는가? 우리는 그를 대신해서 죽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타인들은 나의 죽음에 왜 슬퍼하는가? 나의 죽음은 나만의 것이 아닐 수도 있는데 말이다.
죽음의 독자성과 몰교섭성,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사실은, 무관심의 씨앗이 아니라 슬픔의 씨앗인 것이다.
사람들은 왜 유서를 쓰고 남은 자들을 걱정하다가 죽는가? 그 이유는 내 죽음이 오로지 나의 것이고 타인 들은 내 죽음에 더는 무엇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 그 때문에 죽기 전에 이러저러한 것들을 남기고 그들을 우려하며 죽어도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의 고립성은 오히려 그 죽음으로부터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 놓지 닫아놓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죽음에 슬퍼하고 유서를 쓰는 현상은,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 쓸 수 있는 현상은, 죽음의 독자적 몰교섭성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서 뒷받침된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주목하지 않고 오로지 언어 그자체에 사로잡혀서 단순무식하게 개념들을 적용하는 것이 게으른 상상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죽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기 때문에 슬플 수도 있는 것이다. 그 현상 자체를 배격한 체, 그저 하이데거의 철학적 용어를 뒤틀기만 해서 그의 철학을 오염된 것으로 만들고 그런 뒤에 처형식을 저지르는 것만큼 오염된 철학도 없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분명히 정치적 과오를 저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상학적 해석학적 방법론으로 <존재와 시간>을 저술했다. 그는 현상을 포착하며 그것을 말로 분절해 해석을 감행한다. 그 눈은 무엇을 보는가? 그 눈은 우리가 죽은 자의 곁에 입회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다. 그 눈물의 이유는 우리가 종종 대신 죽을 수도 없기 때문이며, 그 죽음을 물릴 수도 없기 때문이며, 그 죽음이 오로지 그의 죽음이었다는 사실이 안쓰럽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그 현상을 보고 그 현상을 해석한다. 그런 뒤에 쓰인 하이데거의 해석은 도대체 어떤 점에서 존재론적으로 틀린 것이며, 또 어떤 점에서 윤리적으로 그릇된 것인가? 나는 여기에 대해서 레비나스가 한 온갖 개념적인 장난을 보았을 뿐, 더 적절한 현상학적 해석학적 대안적 설명을 발 견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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