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의 생애와 업적
세종대왕은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에서 4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도’, 자는 ‘원정’이다. 1418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같은 해 8월 10일 조선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세종대왕은 재위 32년 동안 정치·사회·경제 등에서 쌓아올린 눈부신 업적을 바탕으로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중에서도 한글의 창제는 세종대왕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손꼽힌다. 문맹률 1%, 정보통신 시대 최고 글자 한글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 백성이 생업에 종사하며 행복하게 사는 정치를 펴다.
1444년 7월 26일 자에 내린 교지에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하고(國以民爲本)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民以食爲天). 농사는 옷과 먹는 것의 근원으로 정치에서 가장 먼저 힘써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백성을 살리는 천명에 관계되는 까닭에 천하의 지극한 노고(勞苦)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위에 있는 사람이 성심으로 지도하여 거느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백성이 부지런히 힘써서 농사에 종사하여 생생지락(生生之樂)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세종이 바라는 정치는 백성이 생업에 종사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
▶ 힘의 논리가 아닌 지식의 힘으로 국가를 경영했다.
세종은 ‘백성을 위한 정치’라는 큰 틀에서 국가를 경영했다. 이른바 ‘위민주의’ 앞에서 많은 신하들은 제도와 경전으로 세종과 대립했지만 세종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왕과 신하라는 신분의 차이에서 오는 힘의 논리가 아닌 이른바 전문성에서도 세종을 넘어 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글창제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세종은 지배사회가 글을 독점함으로써 피지배계급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려는 국가 경영보다는 쉬운 글을 만들어 모든 백성이 서로 소통하는 것이 더 합리적임을 깨닫고 비밀스럽게 조직을 운용했다.
▶ 인재가 길가에 버려지지 않게 했다.
세종대왕은 「인재가 길가에 버려지는 것은 나라의 수치이다.」라고 말하며 노비든 천민이든 최고의 인재를 발탁하여 각자 지닌 능력을 최고로 발휘하게 했다.
세종대왕의 인사 검증은 바른 인성을 바탕으로 과학적이고 치밀했다. 인사 검증의 핵심은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의 부끄러움을 알고 이것을 각성하고 있는가?」였다. 왜냐하면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만이 본인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극복해서 더 성숙한 인간으로 태어나는 데 학문을 열심히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인간관계가 힘들고 발전이 없다.
▶쉬운 문자 훈민정음으로 백성과 소통하다.
1443년 10월, 세종대왕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을 창제한다. 그리고 농서나 의서 등 실생활에 필요한 책들을 다수 한글 책으로 편찬하였다. 오늘날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우수한 문자이자, 세종대왕의 최고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집현전에는 당시에 간행되었던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등의 서책을 전시하고 있으며, 터치스크린을 통해 책의 내용을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 하늘을 열어 백성에게 전하다.
세종대왕은 과학 기술을 연구하고, 과학 기구를 발명하는 데 있는 힘을 다하였다. 젊은 과학자를 양성하여 혼천의 등 천문 관측기구와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 등을 만들었다.
▶백성과 더불어 우리의 음악을 즐기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세종대왕은 우리만의 음악을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국가 제례에 사용하는 아악을 정리하고, 조선 건국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해 선왕들의 업적을 기리는 정대업, 보태평 등 신악을 작곡하였다. 편경 등 당시에 만들어진 악기를 전시하고 있으며, 종묘제례악에 쓰이는 전통악기들의 특징과 소리를 직접 들어볼 수 있다.
출처 : 세종대왕유적관리소 자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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