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5일 전의 부산 노포동 고분군과 양산 중부동 고분군 답사에 이어
인근에 모여 소재하고 있는 양산 신기리 고분군과 북정리 고분군을 답사한다
양산 12번(12-1번) 버스를 타고 북부마을에서 하차하여 들머리가 있는 해강아파트로 간다
오늘 답사코스는 먼저 성황산을 올랐다가 하산하면서 신기리 고분군부터 먼저 들릴 예정이다
11:13 해강아파트 104동 옆에 있는
주차장 옆 데크 계단을 오르면서 산행을 시작한다
이놈의 계절이 철이 없는게 아니라 아예 미쳐버렸다
11월 중순인데도 단풍나무는 언제 물이 들려는지 아직도 시퍼렇다.......
건너편 유탑유블레스 하늘리에아파트 너머 중부동 고분군이 있는 동산(東山)이 보이는데
저놈의 아파트 이름 되게도 길다
하긴, 동기 전일출이 사는 아파트 이름이 19자나 되니 그에 비하면 별것 아니네~
11:39 넓은 공터가 나오면서 정자가 있던 자리에 이르렀는데
정자는 무엇때문인지 다 허물어져 있고, 아까운 현판도 비를 맞는 노천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예전에 58 번개산행 때 이 정자 인근에서 점심을 먹었었는데.....
정자 재건은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현판만은 제대로 보관을 했으면 좋겠다
<참고사진> 2012년 12월 19일 산행 당시의 성황정 모습
여기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먹다가
냄새를 맡고 몰려든 고양이 새끼들한테 적지않은 양의 김밥을 뺐겼던 적이 있었다
허물어진 정자 터에서 내려다 본 공터
성황산 정상 이정표를 따라 직진한다
11:50 북정고분 갈림길을 지나 정상으로 계속 진행한다
성황사(城隍祠)
성황사는 왕건이 고려를 세울 때 적극 도운 양산 호족 김인훈의 사당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직 학계의 고증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94호인 지산리부부상(芝山里夫婦像)을 촬영한 사진을 모시고 있다
지금도 1년에 한 번씩 지역민들이 제향(祭享)을 지낸다고 한다
성황사에서의 길은 두 갈래인데 정상은 바로 뒤에 있는 길로 간다
오른쪽은 나중에 내려오면서 들렀는데 체육시설이 있는 곳으로 연결이 된다
신기리산성 표지석
12:00 성황산(城隍山) 정상
정상목과 삼각점은 예전 그대로인데 뒤의 안내판은 글자가 다 바래어 제대로 읽을 수가 없어졌다
함께 세워져 있는 돌비의 앞면에는 대한민국' 각자(刻字)가
뒷면에는 신기리산성을 알리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참고사진> 2012년 12월 19일 58번개산행 때의 성황산 정상 인증샷
나와 김병환, 송영주다
성황산 정상 조금 뒤에 조금 더 높아 보이는 봉우리가 있어 가 보니
아무런 시그널도 없는 그냥 평범한 봉우리 같지않은 봉우리였다
성황산에서 하산을 하면서 왼쪽 길로 진행을 해서 만나는 체육시설
다시 돌아온 성황사
나무 숲 위로 보이는 양산 오봉산
12:10 북정리 고분군 갈림길로 다시 되돌아 와서 이제 고분 방향으로 하산을 한다
도중에 김밥 한 줄로 점심을 먹고
하산길을 제법 내려가니 저기 나무 사이로 넥센타이어 공장 건물이 보인다
해강아파트 갈림길
12:35 드디어 신기리 고분군 앞에 섰다
사적 제94호 양산 신기리 고분군(粱山 新基里 古墳群)
경상남도 양산시 신기동 산29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앞트기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으로
양산부부총(梁山夫婦塚)이 있는 양산읍 북정리의 남쪽 산기슭 경사면에
크고 작은 고분 50여기가 분포되어 있었고
봉토가 대부분 유실된 것을 2004년부터 양산시에서 고분정비작업을 실시하여
지상에 노출된 중·대형분 7여기는 현재 복원되어 있다
이 고분군은 인접한 양산 북정리 고분군과 같은 지역에 계곡을 사이에 두고 구분되어 있고
양산지역을 통치했던 중간 계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인접한 북정리 고분군의 중형분과 유구나 출토 유물의 특징도 동일하는 등 성격이 거의 유사하여
상호 긴밀한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1990년과 2005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부분적으로 발굴 또는 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신기리 고분군 답사를 마치고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북정리 고분군으로 간다
신기리 고분군 아래로 보이는 북정리 고분군
신기리 고분군과 북정리 고분군을 나뉘고 있는 작은 계곡
사적 제93호인 양산 북정리 고분군(梁山 北亭里 古墳群)은
양산시 북정동 697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앞트기식 돌방무덤(橫口式石室) 등이 발굴된 무덤군이다
북정리 고분군은 서쪽으로 길게 뻗은 구릉에 위치하며
대형의 고분들은 정상부에, 소형의 고분들은 사면에 위치한다
이 고분군에는 모두 18기의 고분이 밀집 분포되어 있으며
그 중에는 1920년에 발굴 조사하여 ‘양산 부부총(梁山夫婦塚)’으로 명명된 고분이 제10호분으로 들어 있고
부부총(夫婦塚)
1990년 양산의 도시계획에 저촉되는 고분 50여 기를 동아대학교박물관이 발굴 조사하였는데
이 중 가장 중요한 고분은 부부총(夫婦塚)과 1990년에 조사한 금조총(金鳥塚)이고
금조총은 부부총 왼쪽 아래에 따로 위치해 있다
부부총(夫婦塚)은 1920년 발굴 당시 부부로 추정되는 남.여가 매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부총이라는 명칭이 붙어졌다
무덤 내부의 돌방에는 남자와 여자를 나란히 눕히고
입구 쪽에는 순장자로 추정되는 3구의 시신을 매장하였다
부부총(夫婦塚)
부부총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동관, 조익형관식(鳥翼形冠飾)과 관모(冠帽), 백화수피제관모(白樺樹皮製冠帽), 금제이식,
금제·은제·유리제팔찌와 곡옥, 은제과대, 금동제식리(金銅製飾履) 등 장신구류와
금동제안구, 철제깃대꽂이·등자·운주(雲珠)·재갈 등 마구류 및 다량의 토기류 등이 출토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탓에 일본 동경국립박물관(東京國立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출토 유물의 수준으로 미루어보아 부부총은 신라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당시 양산 지역의 최고 수장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무덤 주변은 아직 겨울이 멀었다
대표적인 봄꽃인 제비꽃이 철 모르게 피어 있고
민들레까지.......
북정리 11호, 12호 고분
금조총(金鳥塚) / 금제 새다리(金製鳥足)가 출토되어 금조총이라 부른다
금조총은 부부총에서 왼쪽 아래에 홀로 떨어져 있는 무덤으로
고분군 중에서 가장 남쪽에 거의 독립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원형봉토분이며
분구(墳丘)는 소형인데다 대부분이 유실되어 보통의 민묘 규모로 남아 있다
1990년 북정리 고분군과 신기리 고분군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발견되었으며
금조총은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금동관을 비롯한 장신구류와 금제조족(金製鳥足)·청동초두 등 금속기류
그리고 다량의 토기류가 출토되어 고분의 규모에 비해 풍부한 유물이 부장되었다
특히 금제 새다리가 출토된 것은 이 금조총이 유일하며
금제굵은고리귀걸이는 경주 보문동에서 출토된 귀걸이와 함께
신라 금속공예의 진수를 보여주는 유물이라 한다
이 금조총에서 발굴된 유적들은 양산시립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저기 아래에 내려다 보이는 기와건물이 일반 가정집은 아닌것 같은데
나중에 내려 가면서 확인을 해 보아야겠다
아직도 발굴조사가 진행중인듯한 신기리 고분 쪽 모습
삼각점 같은 것이 있어 살펴보니 고분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국토지리정보원 국가기본측량 통합기준점이다
조금전 위에서 보았던 규모있는 기와건물은
동래정씨 문중의 종중회관 건물이었다
이제 두 번에 걸쳐 답사를 한
양산 중부동 고분군과 신기리 고분군, 북정리 고분군의 출토 유적을 견학하기 위해
양산시립박물관으로 간다
양산시립박물관은 여기에서 약400m 떨어진 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