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래향(夜來香)
야래향(夜來香)은 밤에 피는 꽃이다.
밤에만 피기 때문에 향기도 밤에만 내
글자그대로 야래향(夜來香)이다.
우리말로는 달맞이꽃. 아님 월견초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evening primrose 이라한다.
야색(夜色)이 짙어질수록 밤이슬에 꽃잎을
촉촉히 적시며 밤빛을 밝혀내 야래향은
무념이 다가서게 하고 마력의 향기로 사람을
끄러드리는 꽃이다.
중국이 원산지라서 대륙의 풍정에 잠기게
하는 이 꽃은 실상 꽃은 꽃답지가 않다.
그런데 혹(惑)하지 않을 수 없는 그 향기는
호궁(胡弓)의 애련한 엘레지가 들려오는 듯.
환상의 나라로 이끌어 말없이 다가서는
정인(情人)의 기척을 느끼게 한다.
향기로 침실을 꾸렸을 듯한 박색(薄色) 여인의
한(恨) 매친 사연처럼 이 꽃은 땅거미와
더불어 피기 시작하다가 동이 트고 날이 밝기
시작하면 밤내 뿜던 향기를 거두고 꽃을
오므린다.
야래향은 국화가 서리를 오기(傲氣)로 피어내는
향보다 난향(蘭香)처럼 점잖아서 가볍지
않고 백합같이 칙칙하지 않아 천박하지 않다.
야래향(夜來香)은 요염스러워 보이는 꽃과는
다르게 몸 매무새와는 무관한 여인의
모습처럼 어찌 보면 꽃이 아닌 듯 하지만
향기가 대단히 진한 연록색의 꽃이다.
夜來香(야래향) / 鄧麗君(등려군)
yelaixiang 黄清石 词/ 金玉谷 曲/ 金康顯 飜譯
那南風 吹來 淸凉, 那夜鶯 啼聲 凄愴
남풍이 시원하게 불어오고, 저 소쩍새 울음소리 처량하구나
月下的 花兒已入夢, 只有那 夜來香, 吐露着芬芳
달빛 아래 꽃들도 이미 꿈속에 들었는데 야래향만이 꽃향기를 뿜고 있네
我愛這 夜色茫茫, 也愛這 夜鶯歌唱
이 아득한 밤의 세계도 좋아하고, 소쩍새들의 노래소리도 좋아 하지만
更愛那 花一般的夢 擁抱着 夜來香, 吻着 夜來香
저 꽃같은 꿈속에서 야래향을 껴안고 야래향과 입맞추고 있는걸 더 좋아하지
夜來香, 我爲ni歌唱. 夜來香, 我爲ni思量
야래향, 내 널 위해 노래할꺼야, 야래향, 너를 늘 그리워할꺼야
阿阿阿 我爲ni歌唱, 我爲ni思 夜來香, 夜來香, 夜來香
널 위해 노래하고, 너를 늘 그리워할꺼야, 야래향, 야래향, 야래향
那南風 吹來 淸凉, 那夜鶯 啼聲 凄愴
남풍이 시원하게 불어오고, 저 소쩍새 울음소리 처량하구나
月下的 花兒已入夢, 只有那 夜來香, 吐露着芬芳
달빛 아래 꽃들도 이미 꿈속에 들었는데 야래향만이 꽃향기를 뿜고 있네
我愛?夜色茫茫, 也愛這 夜鶯歌唱
이 아득한 밤의 세계도 좋아하고, 소쩍새들의 노래소리도 좋아 하지만
更愛那 花一般的夢 擁抱着 夜來香, 吻着 夜來香
저 꽃같은 꿈속에서 야래향을 껴안고 야래향과 입맞추고 있는걸 더 좋아하지
夜來香, 我爲ni歌唱. 夜來香, 我爲ni思量
야래향, 내 널 위해 노래할꺼야, 야래향, 너를 늘 그리워할꺼야
我爲ni歌唱, 我爲ni思量 夜來香, 夜來香, 夜來香
널 위해 노래하고, 너를 늘 그리워할꺼야, 야래향, 야래향, 야래향
등려군 (鄧麗君)
등려군은 1953년 대만에서 출생하여 16세 때
가수로 데뷔했다.
대만의 인기 드라마 “정정(晶晶)”의 주제곡
아일견니취소(我一見니就笑)를 맑고
고운 목소리로 부르면서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홍콩과 대만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나
드라마의 주제곡을 많이 불러 드라마나
영화가 상영되는 곳에는 등려군의 노래가
항상 불려졌다.
이때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 곡으로
<해구비처(海鷗飛處)>의 주제곡 "해운(海韻)"
"천언만어(千言萬 語)", <채운비(彩雲飛)>의
주제곡 "아전능이개니(我眞能離開니)"
등을 들 수 있다.
1974년에는 일본 음반사와 계약을 맺고 일본
무대에 진출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등려군”
이라는 한자 이름보다는 Teresa Teng 이라는
영문 이름을 주로 사용하였다.
그녀는 정인적관회(情人的關懷)를 일어로
불러 1974년 일본신인가수상을 검어 쥐자
음반이 일본에서만 70만장이 팔려
대만인으로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철저하게 일본어를 익혀 일본가수로 활동한
그녀는 지명도가 더욱 높아져 서양에도
알려지게 되는데 대표곡인 再見我 的愛人
역시 일본에서 불렀던 곡이다.
1979년 일본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그녀는
2월 뜻하지 않은 비자 문제 사건으로 구류를
당하면서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실의에 빠진 그녀는 여기에서 굴하지 않고
새로운 문화를 접하면서 영어를 배우며
다시 활동을 재개하여 2년이라는 공백기간이
있었지만 또 다시 많은 사랑을 받게 된다.
1980년대 까지 계속해서 신곡을 발표하며
미국에서 활동하던 등려군은 1983년
라스베가스에서 처음으로 콘서트를 열었고
1985년에는 대만을 시작으로 데뷔 15주년
기념 동남아 순회공연을 갖기도 했다.
특히 외국 문화가 개방되지 않던 중국에
등려군의 노래가 암암리에 소개되었을
당시에 중국 대륙의 젊은이들은 외국에서
유행하는 유행가를 처 음으로 접하게 되면서
정신적인 자극을 받았다.
현대 중국 에서 록음악이나 발라드 노래를
부르는 젊은이들은 대부분이 등려군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은 과장된 것이 아니다.
1995년 등려군은 구정을 맞아 고향인
대만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남자 친구와
3개월간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중국인들 마음속에 영원한 연인으로
자리하고 있을 것만 같았던
가수 등려군(鄧麗君)이 갑자기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 졌다.
프랑스인 남자친구와 함께 여행을 갔던
태국의 한 호텔에서 사망했다는 그녀는 당시
42세의 나이였고 사인은 호흡 곤란이었다.
1969년에 데뷔해 90년대까지 꾸준히 활동을
해 온 등려군은 왕정문을 비롯해 현재 활동하고
있는 홍콩과 대만, 중국의 많은 가수들에게
대대적으로 음악적인 영향을 주었다.
중국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그녀의
노래가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세상을 떠난 후 수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사랑에는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