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의에 불타는 남자를 매료시킨
그녀들의 영웅적 무심함과 세속성
“참을 수 없이 가볍고, 심연보다 더 깊은 스파크 소설의 정수”
예측 불가능하고 영리한 베스트셀러 소설
“오래전 1945년, 착한 영국 사람들은 죄다 가난했다.”
자유분방한 유머와 냉정한 통찰로 유명한 영국의 여성 작가 뮤리얼 스파크의 중편소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노벨라이다. 1965년 라디오 연극, 1975년 BBC TV 3부작 미니시리즈, 1995년 힐러리 맨틀의 소설, 1998년 BBC 라디오 연극 시리즈, 2009년 주디스 애덤스의 연극 … 발표한 지 60년이 넘은 소설이지만, 영국 사람들의 《가난한 처녀들》 사랑은 식을 줄 모른다. 공교롭게도, 이 소설 출간 3일 후인 196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가 암살당했다. 이 뉴스는 소설 전반에 깔린 냉정한 죽음, 혹은 그 수용의 정취와 화학작용을 일으켜 단숨에 《가난한 처녀들》의 판매량을 수직 상승시켰다. 《가난한 처녀들》은 출간 몇 주 만에 영미 양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의 기류가 감도는 와중에 ‘5월의 테크 클럽’이라는 여성 전용 하숙집에 찾아든 “키가 큰 무정부주의자 시인 비슷한” 남자와 열한 명의 개성 넘치는 ‘아가씨’들이 벌이는 깃털보다 가볍고 심연보다 더 깊은 사랑과 구원 이야기에 독자들이 그토록 열광한 이유는 무엇일까?
보편적인 가난이라는 존엄한 속성
“니콜라스 패링던 기억해? … 무정부주의자에 시인 비슷하고. 키가 큰 ….”
“설리나랑 자려고 옥상에 올라갔던 남자?”
이 책에서 남자 주인공 니콜라스 패링던이 등장하는 방식이다. 그 남자는 아이티에서 순교한 것으로 나온다. 2006년 뮤리얼 스파크가 세상을 떠나고 그녀의 작업 노트가 일부 공개되며, 스파크의 어떤 소설보다 자전적 요소가 많이 투영된 《가난한 처녀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속출했다. 커피와 나일론 스타킹, 키스와 야외 섹스, 스키아파렐리 드레스 … 주인공들의 행보는 한없이 가볍고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의 소산이지만, 그 행보를 추동한 물적 토대에는 당시의 복잡한 국제관계와 미래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푼 영국인들의 희망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비평가들이 《가난한 처녀들》에 재주목하는 이유도, 전쟁의 폭력성과 애도에 집중하던 당시 영미 문단에서 이 소설은 “독일과 일본의 항복이라는 두 차례의 종전 사이” 짧은 기간과 당시 영국의 분위기 및 생활상을 집중 조명한 몇 안 되는 전후소설이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인들은 구시대의 상징인 처칠을 축출하고, 이른바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민의 삶을 보장한다는 복지국가 이념을 정초하고 전후 유럽과 미국의 사회보장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베버리지 보고서》를 구매하려고 배급품 줄보다 더 긴 줄을 섰다. 이런 재건의 꿈에 부푼 당대의 분위기를 《가난한 처녀들》은 그대로 펼쳐 보인다. 남자 주인공 니콜라스는 폭격으로 폐허가 되고 배급이 줄어 배를 곯는 와중에도 굴하지 않고 공동체 정신을 지켜 나가는 하숙집의 ‘가난한 처녀들’에게서 이상적인 복지사회의 맹아 비슷한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일원인 아름다운 설리나를 마치 “조국을 사랑하듯이” 사랑한다. 그날,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
위대한 마이너 소설인가, 신비한 기술적 걸작인가
“설리나는 … 속눈썹 아래로 상대를 곁눈질하는 방식으로 상황을 통제하는 재주가 있었다.”
첫 출간 당시, 《가난한 처녀들》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양극단으로 갈렸다. 얇은 책 두께와 잔망스러움의 끝을 달리는 5월의 테크 클럽 아가씨들의 말씨와 행동거지 등은 뮤리얼 스파크에게 “위대한 마이너 작가”라는 조롱을 안겼다. 반면에 이 소설의 형이상학적 복잡성에 매료된 비평가들은 모차르트적인 정밀함으로 아름답게 구성된, 초자연적인 악의 힘을 추상적으로 구현한 “기술적 걸작”이란 찬사를 쏟아냈다.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 니콜라스를 매료시키는 무심한 미의 화신 설리나는 스키아파렐리 드레스를 구하려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나중에 평자들에게 엄중한 도덕적 심판을 받는다. 그렇다면 시인 W. H. 오든은 왜 《가난한 처녀들》을 스파크의 소설 중 가장 좋아하는 소설로 꼽고, 미국 소설가 존 업다이크는 스파크를 의도적 명료함과 신비성이 어우러진 카프카에 비견했을까? 니콜라스와 클럽 옥상에서 야외 섹스를 즐긴 설리나는 니콜라스를 개종시킨 ‘악의 화신’일까? 최소한, 스파크가 전후 영국인들이 막연히 꿈꾼 이상적인 미래 사회인 5월의 테크 클럽 아가씨들에게 ‘세속성’과 ‘무심함’이란 두 가지 덕목을 부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설리나는 “완벽한 균형, 몸과 마음의 평정”이라는 ‘품위 유지 문장’을 낭독하고, 클럽의 소란에 참여하지 않는 조안나의 무심함이 영웅적으로 부각된다.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제인이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려고 멈춰 선 채, 머리핀을 입에 물며 말했다. … 그 순간 니콜라스는 … 어둑한 잔디 위에 맨다리로 꿋꿋하게 선 채 머리를 정돈하던 제인의 모습을” 떠올린다.
남자 주인공 니콜라스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무심한 설리나에게 “완벽한 여성”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거듭 강요한다. 그는 가난한 삶의 형태에서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태를 발견한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오래전 1945년, 착한 영국 사람들은 죄다 가난했다.”이고, 이 첫 문단 마지막에 “부자들은 대체로 마음이 가난하다고 믿어지던 시대였다.”고 덧붙인다.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 직후와는 딴판인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형성된 사회적 감수성이었다. 다시는 악이 활개 치지 못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그러나 클럽 아가씨들은 이상사회를 꿈꾸는 무정부주의 예술가의 영적 비전을 끊임없이 농락하고 배반한다. … 니콜라스는 어떻게 죽었을까? 《가난한 처녀들》의 행간에 숨겨진 팽대한 의미의 바다를 감상하려면 인습과 고정관념의 열차에서 뛰어내려 창조적 개입을 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 후반부의 카타르시스에 매몰되지도 말아야 한다. 차라리 관대해지거나 조금 시니컬해지는 편이 낫다. 그래야 깃털처럼 가벼워 보이는 요소요소들이 “머랭 케이크”처럼 깊고 농후한 의미의 겹으로 중층, 과잉결정돼 있음을 목도하고, 그 응축된 풍미를 황홀하게 음미할 수 있다. 소설 뒤에 만만치 않은 분량으로 가미된 옮긴이의 〈작품 해설〉은 이 풍미를 최대치로 끌어올릴 디저트 혹은 ‘디제스티프’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