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포는 경북 봉화의 동북단에 위치한 소읍(小邑)으로,
풍기와는 다소 거리도 있고 교류가 없어서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이름 그대로 석(石)은 그 주위가 온통 석회암 돌산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고,
포(浦)는 그 산을 물굽이가 감싸고 돌고있는 형국이기에 붙혀진 이름이다.
즉 동쪽으로는 태백 검룡소나 황지 연못에서 발원한 낙동강의 시원(始源)이 동점 구문소를 지나 육송정(六松亭)에 이르고, 서쪽 열목어가 사는 대현 백천골에서 발원한 또 한줄기의 물이 육송정으로 흘러드니, 이 두 줄기가 태백산에서 시작되는 낙동강의 최상류에 해당한다.
태백에서 흘러드는 물은 한때 석탄산업이 왕성하던 시절에는 검디 검은 물이 었으나, 탄광이 모두 폐광한 오늘날에는 버들치나 송어가 사는 맑은 물이 되었고, 대현 쪽에서 흘러드는 물은 예나 지금이나 맑디 맑아서 여름철 피라미 낚시도 잘된다. 그러나 그 물이 얼마 흐르지 않아서 석포에 이르게 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석포는 그 전성기가 1970년대였다.
그곳은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아연(亞鉛 Zn)이 생산되던 곳이었다. 아연광은 대현, 석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고,
동남쪽으로는 삼척 풍곡(豊谷) 덕품골(德品谷)까지 있었다.
거기서 아연을 캐서 석포에서 제련(製鍊)을 하였다.
이 제련법은 원석을 잘게 파쇄하여 물로 이린 다음 강력한 화공약품을 사용하여 광석을 녹인 후, 이를 비중(比重)과 산도(酸度)에 따라 이물질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그 후 80년대에 들어서는 단가가 비싸게 먹히고 산재만 발생하는 원석은 채취하지 아니하고 중국으로부터 아연괴(塊)를 사들여와서 그 순도(純度)를 현격하게 향상시켜서 제품화하고 있다.
즉 97~98%의 아연값이 가령 100이라 할 때, 99.9999%의 아연값은 300이 되니, 그렇게 하는 공정을 석포 영풍제련소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사용하는 화공약품은 황산(黃酸)을 제일 많이 쓰고,
그 밖에도 질산, 염산등의 강산(强酸)이 주류을 이루고, 흔히 ‘싸이나’라 부르는 맹독성의 시안화합물(KCN이나 HCN)도 쓰인다.
즉 아연괴를 전기로(電氣爐)에서 녹힌 후 그 용체(鎔體)에 위의 화공약품을 첨가하여 불순물을 가려내는 것이니, 그 불순물이라는 것이 금, 은, 니켈, 구리 등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스겟 소리로 불순물만 팔아도 종업원 월급은 준다 했다.
이렇게 뜨거운 용체에 화공약품을 가하니, 당연이 맹독성의 유증기(留蒸氣)가 피어날 것이요, 또 그것을 중화시키기 위해서는 또 다른 가성소다등 알칼리성 중화제를 첨가하고
그러고도 다량의 물이 필요하니, 아무리 정화에 정화를 거듭해도 석포의 공기나 물은 성할 수가 없다. 산의 나무도 자랄 수가 없다.
그럼 이런 업체를 왜 그냥 두냐고?
우선은 가난한 봉화군 제정의 80%를 이 제련소에서 감당한다. 지금이야 좀 다르겠지만 석포 제련소가 없으면 봉화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또 아연은 국가의 중요한 기간산업이다.
아연이 없으면 철(鐵)이 없다.
즉 자동차용이든 선박용이든 철강판에는 반드시 아연을 입혀야만 녹이 슬지 않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
이러니 아연을 필요로 하는 포철에서도 영풍광업소에 선송금을 하지 않으면 아연을 공급받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현대 자동차나 중공업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99.9999%의 순수 아연을 만드는 기술은 독보적이다. 중국이나 미국도 따라오기 어렵다. 이런 물건을 외국에서 수입해서 쓴다면 우리나라는 철강 식민지가 된다.
또 70년대 개발독재시대에나 가능했지 지금 이런 공해업체를 다시 건설하거나 이주를 환영할 곳은 아무데도 없다는 점이다. 영풍제련소에서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공해를 줄이는데 많은 예산을 투입하고 있지만, 공해를 제로로 만드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나 같은 사람을 초빙하면 컨뎅싱 메소드로 열기를 줄이고 촉매를 이용한 중화요법으로 공해 제로에 도전해보겠지만....
태백에서 동점(銅店)을 거쳐 대현을 지나 넛재에서 현동(縣東), 봉화로 이어지는 길에 석포는 없다.
석포는 동점을 지나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도경계를 지나 육송정에서 우로 가면 대현이요, 좌로 가면 석포가 나온다.
즉 석포는 봉화군에서도 따로 떨어져있는 섬과 같은 곳이다. 석포읍내를 벗어나 풍곡쪽으로 가면 야산에 두릅과 산나물이 지천인 곳이 석포다.
이 석포 역앞에는 동해루라는 중국음식점이 있었다.
그야말로 쭝국 화교가 운영하던 곳이었는데, 성은 취(聚)씨였다.
주인장과 아들은 주방에 있고, 마누라는 계산대를 지키고,
길에 떨어지면 쪽박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두 딸이 홀 서빙을 하고, 배달은 일체하지 않으니 돈 한푼이 밖으로 샐 리가 없었다.
행정구역은 경북이로되 상권은 태백이었다.
영풍광업소는 물론이겠지만, 철암 장성 황지등의 광업소의
회식자리는 대부분 그 중국집이었다.
중요한 모임은 항상 사전에 예약을 했는데, 예약을 받으면 주인장은 식재료를 인천 차이나 타운 중화요리 식재료상에 주문을 하고, 그 식재료는 동인천역에서 부쳐져서 기차로 석포에 이르니, 최소한 이틀이 소요되었기에 예약은 필수였다.
물론 우동 짜장둥 일반 음식은 예약이 필요없었지만, 그래도 ‘료리’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을 먹기 위해서는 예약이 필수였다.
나는 이런 중국음식을 먹기 위해서 송탄 미군기지 앞에도 가보고, 이태원 동두천이나 인천 차이나 타운에도 가봤으나 석포의 그 맛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였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군침이 돈다.
가을이 되면 송이를 갖고 그 집에가서 요리를 부탁한다.
중국요리는 불의 예술이다. 유산슬, 깐풍기, 유린기, 오향장육, 란자완스, 자라찜, 샥스핀........뚝닥 뚝닥 칼질에 이어 웍에서 큰 불이 나고 음식이 몇 번 공중잽이로 춤추고 나면 송이향이 그대로 살아있는 유산슬이 나온다.
술은 역시 중국술!!!!!
정신없이 맛에 홀려 배불리 먹고 취하고 마지막에는 꼭 짜장면 반그릇! 그 구수하고 달짝한 맛이란!!!!
이제는 그런 맛집도 없다. 강릉의 맛집도 저번 달에 대만으로 이주했다. 이제 간신히 남은 곳은 동해 북평의 덕취원 정도, 그 집은 오향장육과 중국식 냉면이 먹을 만하다.
짜장면은 그 집맛을 짐작케하는 척도다.
짜장면이 맛있는 집이 정말 맛집이다.
간짜장은 안된다. 그냥 짜장면, 그것도 반그릇!
무술년 예수님 생일날에
豊江
첫댓글 옛날 동부동 순흥통로에 살던 곱슬머리 안효명이란 친구가 영풍광업소에 다녔다. 아마 지금도 거기에 살거다.
경호 형님이 거기서 득병하셨다해서 새삼 석포이야기를 써봤다.
그 일대에는 납석도 많이 산출된다. 납석이 뭔지를 풍기 촌넘들은 잘 모른다. 공예품도 만들고 변기나 세면대 같은걸 만드는 원석이라 하면된다.
알루미늄화합물이다. 별걸 다 아는 풍강
안효명! 기억난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저세상으로 떠났다던데.....(효명이가 살아 있다면 미안하네. 이해 하시게)
진짜 별걸 다아네! 풍기 31번 중국집 짜장면도 억수로 맛 있었는데~~ 풍기에 우리친구 '운수'가 운수사업을 하더라~~택시 운수사업~~
@나만다리/손혁수 효명이 멀쩡함
@SS-Lee 효명이 별명이 '호메이(호미) 고기'(양미리)아니었나?
역시 천하제일 미식가 답네
대진항 가자미 물회는 환상적
이었네 추위에 조심하시고~
가자미 물회에 국수 삶은것 한주먹 오징어 실처럼 썰어넣고
가히 환상적임
내가 할 말은
놀랍다. 이다
뭐든 순복이에게 물어보면 쉽게 풀어서
자세하게 알아 볼 수 있다.이건 모르겠지
한것도 막힘없이 뻥
뚫린다
풍기에 살았고
단양에 살지만 납석은 안다. 석회석,고토 ,석탄
석고,납석,스러지 가
혼합되어 수천도 퀴론을 통과하고 밀을거쳐 밀가루 처럼 된 시멘트를
볼수있다.
납석의 쓰임새는 여러군데 쓰인다.
고로
윗 댓글에 풍기촌놈들이란 글은 빼라 ~
강릉촌놈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