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바다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생겼습니다.
아직 만나지 못한…
당신 덕분에 여기서 일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친절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가장 친절합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보고있는 사이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만나면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강재씨…
당신을 사랑해도 되나요?
2001년 봄. 당신의 아내 파이란
'세상은 날 삼류라 하고 이 여자는 날 사랑이라 한다...’
아직은 이른 봄의 속초바다 방파제 어디쯤… 초라한 몰골의 사내가 편지한장을 구겨들고, 이세상이 끝난 사람처럼 꺼이꺼이 운다.
너무 늦어버린 자신의 도착때문에, 아님 막장의 인생을 사는 자신이 앞으로 살아갈 수 있는 단하나의 희망인 사람을 놓쳐버렸기 때문에, 함부로 산 자신의 인생 때문에…
폐부를 찌르는 그의 울음소리는 오랫동안 너무도 귓전에 쟁쟁하여, 이미 환히 불이 밝혀진 극장을 오래도록 나는 떠나지 못하였다.
아마도 나는 엔딩의 10분쯤을 울고 있는 그와 함께 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른 봄은 이미 그 바다 어디쯤에 와 있었건만 울고 있는 그의 인생에 이제 다시는 돌아올 봄이 없음을 알고 있기에….
영화 ‘파이란’
배우 최민식의 우뚝 선 영화가운데 어쩜 가장 관객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내 기억의 파이란은 결코 대단한 흥행작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블록버스터류의 홍보로 뒤덮은 돈냄새만 나는 영화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당대의 스타등용문이기도 했던 연극 에쿠우스의 3대 ‘알런’역으로 데뷔한 이래 그는 혜성처럼 떠오른 TV스타가 되었지만, 그는 스크린에서 더 빛이 났음을 부인할 수가 없겠다.
쉬리에서의 북한특수군 ‘박무영’의 가슴서늘해지는 번득이는 눈빛을 기억하고 있던 나는 최민식에게서 제대로 된 ‘삼류양아치’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었다.
눈에 힘을 쫘악 풀고, 흔히 말하는 모양새 안나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해내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크린 속의 최민식은 곧 ‘강재’였다.
구질구질한 뒷골목의 그것도 날건달중에서도 겨우 10대 아이들 삥이나 뜯고, 불법비디오나 팔고, 넘버3는커녕 넘버10도 못되는 그런 삼류양아치 말이다.
그런 별볼일없는 그의 인생에도 큰도박판 같은 빅딜을 벌이만한 일이 벌어진다.
조직 보스이자 자신의 동기인 큰형님의 살인누명을 쓰는 대신 고깃배를 하나 사서 이제는 피폐한 자신의 인생에서 돌이켜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런 그에게 뜻밖에 날라온 아내의 부고장.
단지, 하루하루를 벌어 먹고 살기위해 후진 빨간 마후라를 감아 두른 삼류깡패의 호적에 겁도 없이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은 주민등록상의 아내.
그녀 이름은 ‘파이란’
하~ 파이란 그녀, 보지도 못한 남편을 사랑해도 되냐니, 얼핏 스치기만 한 남편을 그리워하다니, 돈몇푼에 호적에 올려준 남자를 대책없이 좋아하다니..
사랑이 그렇게도 시작될 수 있음을 나는 믿지 못하겠다.
사랑이랑 자고로 서로 부대끼고, 말싸움도 하고, 밥도 같이 먹고, 미운정 고운정 들기 시작해야 하는 것이 사랑아니겠는가?
증명사진 달랑 한번본 남자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아마도 ‘파이란’ 그녀 인생이 그만큼 외롭고, 기댈곳 없이 막막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겨우 천신만고로 술집에 팔려갈 것만 면해, 궁벽하고 외진 시골에서의 세탁잡부생활이 그녀인들 얼마나 힘에 겨운 생활이었을지..
그곳에서 얼굴도 못본 남편 ‘강재’는 아마도 그녀에게는 애써 만든 희망이요, 그리움이었을게다.
그리 함부로 산 남자가 착하기만 한 여자의 희망이 되다니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약해져버린 건강을 이기지 못하고 떠난 파이란의 편지를 보며 울부짖는 ‘강재’도 또한 그러하지 않겠는가?
다시 살아볼 수 있었는데, 나도 한 여자의 희망이 될 수도 있었는데, 이런 회한 말이다.
희망을 놓치고, 어찌 사람이 살아나갈 수 있겠는가, 삼류양아치에게도 배한척 사서 고향에 돌아가는 꿈이 있고, 불법체류하는 중국처녀 파이란에게도 사랑하고 싶은 남편 ‘강재’가 자신을 만나러 와줄지도 모른다는 꿈이 있지 않았는가.
배우 최민식은 그런 놓쳐버린 희망을, 다시찾을 수 없는 꿈을 내게 툭 던져놓으며, 같이 울고 싶게 만들었다.
어느 해이던가 속초바다 방파제끝, 여름의 추억을 서늘한 가슴에 안고 이듬해 봄바다를 만나러 갔었다.
찬연히 빛나던 여름바다는 사라지고 겨울이 막 가신 바다만 여전히 그곳에 있을 뿐이었다.
그때 한쪽에서 울고있던 ‘강재’를 나는 본 듯도 싶다.
‘해피엔드’에서 아내를 살해한 집에 되돌아와 청소를 끝내고, 볕이 듣는 창가에서 울던 그를, ‘올드보이’에서 숨겨진 기막힌 사실에 유지태의 발을 핥으며 우는 그를 떠올린다.
절망이면 절망인 채로 꾸미지 않고 군더더기 없이 보여줄 수 있는 배우 최민식은 해가 갈수록 멋진 배우로 내게 남을 것 같다.
무섭도록 아득한 겨울이 떠났으니, 이른 봄바다에 나서면 그곳에서 다시 울고 있는 그와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세탁자전거를 몰고 달리는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첫댓글 참 많이 울었던 영화네요...^^
저도 소리없이 많이 눈물이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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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영이 불렀던 [스치듯안녕]이란 ost가 너무 좋았어요.
물고기자리님~ ^^ 오늘은 영화평론가 유지나 교수님의 모습으로 다가오셨군요~ ^^
나른한 오후였는데 가슴 찡~한 느낌으로 손끝이 짜릿짜릿해져서 졸음이 다~ 달아 났어요~ ^^ 고마워요~ *^^*
늘 후한 크레커님^^ 홍성에서 뵈요.
저도 홍성에 가고픈데 아직 일정이 확실하진 않아서요... 가고픈 마음에 일단 입금은 해 놨어요~ ㅋㅋ
저도 이번에 꼬옥 뵐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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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공형진씨도, 장백지도, 최민식씨도 일품이었죠.
저는 갠적으로 잊을수 없는 영화였어요~ 최민식연기는 최고였고 공형진연기도 깜짝놀랄만큼이나 돗보였던..멋진감독이죠~
허진호 감독 영화는 일부러 그래서 다 챙겨봐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