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
원죄론에 대한 입장은
자신이 지닌
세계관의 색깔을 결정합니다.
우선
개념 하나를 정리하고 들어가면
목적은
행동이나 계획의 이유이고
목표는
목적이 완료된 구체적 지점입니다.
불교는
뚜렷한 목표를 지니고 있지요.
초기 경전인
니까야Nikaya(BC 30~20),
더 후대의 아함경Agama에 의하면
인간은
탐貪Lobha, 진瞋Dosa,
치痴Moha 3가지 독소에 의해
끊임없는 윤회의 굴레를 쓰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화엄경에선
중생 죄업의 뿌리가 3독에 있기에
지속적 참회를 요구하고
있지요.
이 논리에 의하면
인간은 현실적으로 모두 죄인이며
죄의 해결은
참회를 통해 가능합니다.
이런 인간관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원죄론과
단어만 다르지 동일하지요.
물론
경전의 다른 구절엔
3독에 갇힌 인간의 본래 모습은
그렇지 않은데
출생과 동시에
3독에 자동으로 갇힐 뿐이며
그래서 인간의 현실적 목표는
3독을 벗어나
'깨끗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원죄론을 주장하는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도
처음 인간이 만들어졌을 때는
죄에 물들지 않은
낙원에 있었지요.
기독교도
인간 본래의 모습은
붓다에 준하는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현실적 인간은
두 교단 모두
원죄론을 뒤집어 쓴 오염된
존재이지요.
불교의 다른 체계 속에는
원죄론적 인간관과 다른 견해가
일부 존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류의 불교는
이 원죄론을 옹호하기 위해
초기 붓다의 전승들을 왜곡하여
적용하고 있지요.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사성제인 '고집멸도' 입니다.
이것은
인간 성장 과정을 현실적으로
도식화한 언명이지요.
이 말 자체에
틀림은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여기에서 '고苦' 를
원죄론을 정당화하는데 사용하고
있지요.
더 나아가
'일체개고' 라고 합니다.
인간과 세상의 현실적 속성을
죄인과 고통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붓다의 언명은
최소 400년 이상이 지난 후에
비로소 문자에 담겼지요.
그들 단어 자체는
붓다 자신의 것이었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그 단어가 사용되었을 전후 맥락은
사실
사라졌습니다.
언어의 의미는
독립된 단어 자체보다는
그 맥락에 생명이 있지요.
'일체개고' 는
원죄론의 근거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을 수도
분명 있습니다.
굳이 해석을 하자면
무수한 다른 버전version이
가능하지요.
그러나 불교는
원죄론에 갇혔습니다.
그들은
죄와 고통의 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지요.
탐진치가
불교에선 인간을 옥죄고 있습니다.
이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면
불교는
광명의 교단이 아닌
혐오의 교단으로 전락하지요.
본질이
어둠의 죄로 가득한 존재가
감히
빛을 논함은 어불성설입니다.
한편
탐진치는
인간현상이 벗어날 수 없는 속성이
맞습니다.
탐Lobha의 어근은
'욕구함' 이지요.
모든 생명의 근원적 속성이
욕구입니다.
욕구가 없다면
생명으로 분류되지 않지요.
그러나
이 욕구가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자체가 아닌
'적절성' 곧 '정도'에서 발생합니다.
욕구가 아닌
과욕이 문제인 것이지요.
경전에서 지칭하는 '탐' 은
이 과욕임이 상식입니다.
진瞋Dosa 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한 적이 있는가요?
이것은
감정의 통제를 상실하고
폭력적 성향을 띠는 현상이
아닙니다.
이것이 진Dosa의 정의라면
'군자'를 앞세운
유교적 훈련만으로도
충분히 통제 가능하지요.
화냄,분노,짜증,질투,복수 등
다양한 표현을 가진
진瞋은
'기대치가 있으나,
이것이 충족되지 않아,
그 상황을 수용할 수 없을 때
발생하는
의식의 불협화음' 입니다.
비록 기대치가 충족되지 않았어도
그 상황을 납득하고
수용하면
진瞋으로 발전하지 않지요.
얼굴이 붉어지고
언어가 거칠어지며
폭력적 행위가 있어야만
분노한 것이 아닙니다.
기대치가 어긋난,
현실에서 말로는
혹은 표정에서 조차 드러나지 않는
미세한 불편함이
모두 분노 곧 진Dosa입니다.
기대치는
단순히 개인적 사생활에 국한되지는
않지요.
사회적 가치에 대한 기대치,
도덕적 기대치,
자연법칙에 관한 기대치도
있습니다.
개인적 기대치에만 한정된다면
욕심만 줄이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도 있지요.
그러나
다른 기대치는
보편적 가치와 원칙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이런 공적 기대치를 도외시하고
개인의 심리적 평안만을
쫓는다면
이런 사람은 소시오패스이며,
인간 말종이겠지요.
건전한 분노를 할 줄 모르면
타인의 뒤에 숨어
사회적 열매만 따먹는
암적인 존재입니다.
분노하지 말며
개인의 평안을 찾으라는 일반론을
가르치는
성직자들을 조심해야 하는데
인간에 대한 성찰이 없는
자들이지요.
유명인 중에는
의외로
이런 이들이 많습니다.
의지와 기대치를 지닌 생명체가
분노하지 않는 것은
자기모순이며
현상의 법칙을 위반하는 것이지요.
인간은
분노할 수 밖에 없고
분노해야만 합니다.
치痴Moha 또한
생명체의 근원적 속성이지요.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는
지속적 성장의 현상입니다.
이 성장엔
완성이 없습니다.
인간현상이
하나의 과정적 현상이라면
그 과정의 어느 지점이든
인간은
'어리석음' 을 벗어날 수 없지요.
하나의 어리석음을 벗어나는 순간
다른 스케일에서
우리는
여전히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붓다조차
그가 실존했던 인간이라면
이 어리석음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이상한 가설을 세워
붓다를
비인간화하였지요.
예수를 부활한 좀비로 만들어
성층권 저 위로 쏘아올린
기독교와 동일합니다.
불교는 붓다에게
절대적 지혜
곧 옴니뽀뗀스omnipotence 를
부여하고 있지요.
기독교에선
하느님과 예수가 이 지위에
올랐습니다.
참고로
영성에서의 안목은
'완결된 지혜' 가 아닌
'성장하는 지혜' 이지요.
아무튼 '어리석음' 은
우리에게
불편함을 줄 지는 모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근본 속성이며 한계입니다.
탐진치를 종합하면
이것들은
인간에게서 해소하거나 제거할
대상이 아닙니다.
이들 요소로 인해
역동적인 인간현상이 비로소
발현하지요.
동양에선
'음양' 이라는 모순되는 듯한 요소의
역동성으로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안목을
오래 전부터
지니고 있습니다.
'더러움'에서 '깨끗함'으로 넘어가는
세계관은
아직 어린 수준이지요.
선인과 악인을 칼처럼 나누던
의식 수준은
이미 퇴색되었습니다.
선과 악은
한 인간현상에 항상 공존하며
상호 작용하여
성숙한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지요.
음양의 구도에선
너무 당연합니다.
그러나
더러움과 깨끗함의 구도에선
이해되기 어렵지요.
성숙한 안목에선
탐진치를
인간 고유의 그리고 버릴 수 없는
속성으로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인간은 수 천년간
'순결' 의 환상에 갇혀 있었지요.
탐진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없으면
불교는
원죄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불교엔
많은 훌륭한 메시지들이 있지요.
그런 메시지와 원죄론은
어딘가 결이 맞지 않습니다.
다른 유수한 교단에도
교조의 맥락에 맞지 않는 견해들의
침투는
비일비재하지요.
기독교의 경우는
더욱 심한 상황입니다.
기독교든 불교든
자신들의 목적과 목표의 괴리를
최소화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종교에 관한 문제라 하더라도
합리성의 기초를 상실하면
미신이지요.
종교의 현묘한 차원은
합리성의 차원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원죄론은
기본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모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단편적으로는
긍정과 부정이 있으며
조금 구체적으로는
'교육의 장' 또는 '게임의 프로그램'일
수도 있으며
잘못에 대한 '처벌의 장'이거나
막연히 방치된 '무관심의 벌판'일
수도 있지요.
어느 것이든
현상에 관한 해석의 모델이고
어느 모델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세상은
그렇게 펼쳐집니다.
하나의 모델이
수 천년 인류를 지배하기도 하지요.
이제 불교로 돌아와
붓다의 세상에 관한 모델은
무엇이었을까를
유추해 봅니다.
이유야 여러 가지이겠지만
불교는 한 때
'염세주의'의 딱지를 달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모든 불교인들이
'아니다' 고 손사래를 치지만
분명 원인 제공은 있었지요.
그들의 생각에
고고한 철학을 전한 붓다를
염세주의자로 인정하면
결이 맞지 않다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보아
분명 결이 맞지 않습니다.
그러면
원죄론은 어떨까요?
저주와 오염의 굴레를 쓰고 태어난
존재는
어떻게든
세탁 과정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그대로 방치하고 싶은 인간은
없을테니까요.
기독교는
하느님의 자비와 예수의 대속代贖
으로
세탁하고
불교는
자신의 피나는 노력으로
각자도생하는 구조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전적인 각자도생은 아니지요.
아무튼 어느 것이든
원죄론은
인간에게 낙인을 찍습니다.
'주홍글씨' 이지요.
나자넷 예수는
원죄론을 설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유대교를 전승하며
기독교에 원죄론과 타력 구원론을
설계했을 뿐이지요.
바울은 근본적으로
종말론자였기에
이들 요소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붓다의 경우도
그의 수준과 철학적 결을 고려하면
원죄론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여겨집니다.
붓다는
논란이 많은 질문엔 침묵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불교의 원죄론적 경향은
후대인들의 견해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종교나 철학적 사조를 접할 때
그들의 세계관이
어떠한가는
굉장히 중요한 측면이지요.
그것이
모든 해석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존재는
근원적으로 오염되었는가?"
이것에 대한 답으로
우리 앞에 펼쳐질 세상은
전혀
달라집니다.
만물 고요히 잠든 어둠에
빛 들여 살며시 깨워보니
한껏 뽐내는 선명한 경계
높고 낮음 어디서 왔을까.
..260807小野
첫댓글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부처란 중생의 마음 안에 있는 부처이니/스스로 근기따라 감당할 뿐 다른 것 아니네/일체 부처의 근원 자리를 알고자 하면/자신의 무명이 본래 부처임을 깨달을 지니(이통현 장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