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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하지 못할 난관은 없다
미 워싱턴 주 상원의원 부의장 신호범
- 처지와 환경 노력으로 어려운 처지를 이겨낸 대표적인 사람 신호범
- 4살 때에 부모를 잃고 떠돌이 생활
- 16살 때에 미국에 입양
- 동양인 최초로 미국 워싱턴 주 상원의원 ; 5선으로 상의원부위원장
- 자주 한국을 방문 ; 초ㆍ중ㆍ고ㆍ대학, 병원, 의회, 사화단체 종교단체, 교회, 정부의 초청 등으로
- 1990년대 초반 미국 의회에 나갈 것을 생각했다.
※ 시아틀에는 두 가지 비가 있다. 귀한 손님이 오면 있으라고 이슬비가 내리고, 나쁜 사람이 오면 가라고 가랑비가 온다. 내가 여기 온 것은 오라고 하는지 가라고 하는지 알 것 같다.
1. 고아생활
- 조국을 생각하고 사랑하면 눈물 흘릴 때가 많다. : 고향은 경기도 파주, 1935년에 때어났다. 4살 때 어머니 사망, 아버지 행방불명, 외할머니 댁에서 2년간 눈칫밥을 얻어먹다가 뛰쳐나옴 (한번은 물통에 엿을 담아 아이들에게 주는 아주머니를 보았다. 다른 아이들은 다 주는데, 하도 먹고 싶어서‘나도 좀 주세요.’하니까, 다 떨어졌다고 주지 않는다. 작은 아이의 것을 다 빼앗아 다 먹어치웠다. 꼬마가 우니까 아주머니가 방망이로 내 머리를 때려 머리에 피가 줄줄 흐르도록 맞았다. 이때 외할머니 댁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밤에 금천 역까지 걸어 나왔고, 아침에 통학열차를 타고 무작정 집을 나오게 되었다. 서울이었다. 처음에 어디인지 몰랐으나 나중에야 알았다. 당시 집을 뛰쳐나올 때 언제가, 언젠가, 언젠가 돈을 많이 모으고 모아서 엿장수가 되겠다고 꿈을 꾸었고, 어린아이들을 도와주겠다고 생각했다.
- 서울 역에 내려 보니 갈 데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다. 이때부터 거리의 소년(거지소년)이 되었다, 밤에는 서울 역에서 숨어서 자고, 낮에는 남대문 시장거리에서 거지생활을 하는데, 너무나 배가 고파 쓰레기통을 뒤져 썩은 음식을 먹다가 병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시 쌀밥은 꿈도 못 꾸었고, 잡곡밥, 죽을 얻어먹으면서도 왜, 왜, 왜라는 질문을 많이 했다.
- 7살 때 여름에는 먹을 것이 많았다. 아가시아 꽃, 개구리, 뱀 등 먹을 것이 됨직한 것은 무엇이든지 먹어 치웠다. 겨울철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어려웠다.
- 같은 처지의 친구를 서울 역에서 만났다. 그는 여덟 살로서 재언이었다. 아침에는 헤어져 얻어먹고, 저녁에 만나서 얻어가지고 온 음식을 나눠 먹었다. 잘 때는 껴안고 잤다. 추워 죽을까봐.
- 그 친구는 어느 날 ‘나는 더 못살아 죽을 것 같다.’라고 한다.‘형 죽지 말아 죽으면 안 돼’하고 말리기도 했다. 한 번은 저녁때에 와 보니까 재언이가 보이지 않는다. 2층 변소, 대합실, 사방 여러 곳을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철길에 가보니까 철 길가에 누워있었다. 다리와 팔은 보이지 않는다. 자살을 한 것이다.‘너는 나의 하나 밖에 없는 친구인데 왜죽었어’하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한참 있으니 일본경찰이 와서 들어서 숲에 던져버린다.‘너 죽었지 비겁해 너 두고 봐, 난 절대 죽지 않을 거야’하고 7살의 나는 결심했다.‘난 살아서 네 몫까지 해줄게’하고 결심하고 오늘까지 이른 것이다.
2. 입양
- 6ㆍ25사변 때는 충청도 예산까지 걸어 내려갔다. UN군이 상륙하고 수복되고 걸어서 노량진에서 구걸을 하며 다녔다. 미국 군대에서 얻어먹은 초크릿이 얼마나 맛이 있던지,‘헬로 초크릿, 헬로 캔디, 기부미’하면서 구결하며 손을 내 밀었다.
- 하루는 산에 올라가 한없이 울고 있는데, 산 같이 큰 사람이 내 앞을 가로 막으며 손을 내 밀었다. 과자를 주는 줄 아고 손을 내자 번쩍 들어올린다. 옷에는 냄새가 나고 지저분한 상태에서 얼마나 놀랐겠는가? 용산 부대에 가서 처음으로 따뜻한 물로 목욕을 했다. 탱크를 타고 임진강 북쪽 장단까지 갔다. 그때는 얼마나 신이 났던지. 하우스보이가 되어 미군의 구두를 닦아주고, 청소와 빨래를 해주는 생활을 계속했다. 그 때는 어린마음에 행복했다.
- 그러나 먹을 것이 많고 잘 곳도 좋은데 가끔은 더욱 슬펐다.‘미국은 먹을 것도 많고 잘사는데, 왜 우리나라는 이렇게 가난할까? 왜, 왜,’ 하면서 뒷동산에 올라가 울었다. 한참 울고 있는데, 그 커다란 미군이 앞에 떡 버티고 있었다.‘가라’고 소리치자 미군이‘너 왜 우느냐’하고 묻는다. 미군이 안아주면서 하는 말이‘미국에 아이들이 셋 있는데, 네가 우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프구나. 네가 왜 우는지 알려주지 않겠니?’그래서 15살이 되어 만나 양아버지를 약속했다. 16살에 입양 ‘나의 한국족보를 가지고, 한국 성을 가져도 괜찮다고.’한다.‘아버지 그럼 제 이름은 폴 신으로 바꾸겠다.’ 하였다. <폴>은 아버지 성이고 <신>은 한국성이다.
- 16살 때 9월 3일 부산항을 떠날 때, 한국 땅에 침을 뱉었다.‘배고프고 고생만하고 외로웠던 나라, 나는 너를 버리겠다. 다시는 안보겠다.’하면서 떠났다.
- 양부모집은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듯했다.
3. 공 부
‘- 양아버지께서 학교가야지’하면서 학교가기를 권하신다.‘나는 학교 못가요. 나는 한국에서 초등학교도 못나왔어요. 글씨도 전혀 모르고요.’했다. 초등학교에 가려고 학교를 찾아다녔다. 모두 거절한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검정고시>를 준비하기로 했다. 검정고시를 가기위하여 매일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무척 힘들었다. 낮에는 어머니께서 영어를 가르쳐주시고, 밤에는 아버지가 치과의사인관계로 수학과 과학을 가르쳐주셨다. 정말 열심히 했다.‘이것을 통과해야만 대학을 갈 수 있다.’.하루 3시간 이상 자지 않고 공부했다.
- 누가 말한다.‘하나님께 기도하면 도와주신다.’ 이 말을 듣고 밤에 혼자 나가 기도를 드렸다. 밤 1~2시에 밖에 나가 기도를 했다.‘하나님 안녕하세요? 진지잡수셨어요? 건강하시고요? 저도 잘 있어요. 제가 검정고시를 위하여 공부하는데 너무 어려워요. 좀 도와주세요. 나중에 저도 도와 드릴게요.’ 유치원 아이와 같은 수준의 기도였다.
- 용기를 내어 열심히 해서 1년 4개월 만에 초,중,고등학교까지 통과했다. 대학진학과 졸업 후 석사를 했고, 74년도 박사까지 받았다.
4. 우리말 공부
- 지금은 우리말을 아주 능숙하게 한다. 거기에는 계기가 있다. 62년도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까 한국여자와 결혼하고 싶어졌다. 한국에 가려고 하니까 무서워서 못 갔다. 하와이에 사는 김세웅 전도사에게 편지를 했다.‘전도사님 대학을 졸업했는데, 장가들고 싶어요. 갈 테니 여자 소개해주세요’하고 가니까, 누구를 먼저보고 싶으냐고 했다. ‘몇 명 있습니까?’‘ 네 사람이라고 한다. 네 사람 중 처음 본 아가씨가 날씬하고 예뿐 아가씨를 보았다. 그는 하와이 2세였다. 그는 서양 여자 스타일이고, 머리가 비어 있은 듯 어울리지 못했다.
- 두 번째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는 키도 작고 인물도 변변치 못했지만 그에게 반했다. 우리나라 말을 어떻게 그렇게 잘하는지 한두 번 만나자 돈이 떨어졌다. 세 번째 만난 날 꽃과 선물을 가지고 가서 청혼을 했다. 와이키키해변에서 ‘당신과 같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왔는데 나와 결혼하여 주시겠습니까?’ 그 여자 하는 말 ‘어떻게 우리말을 못하는 사람과 결혼해요’하고 거절을 한다. 얼마나 염치가 없었던지 와이키키해변에서 비행장까지 23km를 뛰어왔다. 너 두고 보라 너에게 원수 갚겠다. 하면서 그러나 그 여자를 찾고 있다. 결혼나이는 지났지만 우리말을 배우도록 용기를 주었기 때문에.
- 67년까지 하와이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쳤는데 대학원에 가기위해 하버드, 스텐포드, 콜로비아 등 몇 군데 원서를 냈다. 나오라는 것이었다. 장학금으로 학비, 생활비 각종 잡비를 대주겠다는 것이다. 본인은 워싱턴 대학을 택했다. 거기에는 한국학이 있었고 그때까지 결혼 거절의 한이 있었다.
- 잊지 못할 서두수 교수님을 만났다.‘우리나라 말을 배워야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말을 배우기 위해 교수님을 찾아갔다. 그 다음날부터 월, 수, 금 3~5시까지 교수님 사무실에서 우리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1년차는 한국문법을 배웠고, 2년차는 옥편과 한문, 3년차는 한국문학을 공부했는데 <춘향전>을 주시면서 영어로 번역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제가 어떻게 번역 합니까’라고 했으나, 하는 수 없이 번역에 몰두했다. 그 결과 말과 글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서박사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자유롭게 말과 글을 쓸 수 있게 될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그 분께서 은퇴하신 뒤 버스사고로 돌아가셨다. 장례식에서 아들딸보다도 더 많이 울었다.‘나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셨고, 말과 글을 가르쳐주고, 조국을 찾게 도와주신 분 그 바람에 30년 동안 교수직을 하게 되었다.
5. 조국을 찾음
-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침을 뱉고 떠난 한국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73년에 한국을 찾았다. 서울 역에 들려서‘제언아 너 지금 어디 있니?’하루 종일 울며 이야기하며‘미국에 가서 박사학위 받아왔다. 네가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으냐?’하면서 독백처럼 하루 종일 이야기 했다. 다음날 부산에 내려왔다. 영도의 바닷가의 물속에 몸을 담그고 큰절을 하면서‘대한민국에 사과드리려 왔습니다. 어린 마음에 무엇도 모르고 침 뱉고 떠났는데 용서하세요.’하면서 깊은 마음으로 사과하고 돌아갔다. 이후 미국 대학에서 학자로서 생활했다.
6. 정치의 시작
- 58년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 미국 군대의 영장을 받게 됨. 텍사스에서 훈련 중 주중에는 부대 내에서 먹고 자고 할 수 있었으나 주말이면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하여 외부에 나가게 된다. 백인군인 4명과 5명이 버스를 타고 갔다. 한 음식점에 들어가는데 백인들은 들어갈 수 있었으나 유색인종인 나만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식당 앞의 문에‘백인만 들어온다.’라고 써 있었다. 백인 군인들이‘넌 미국 군인이 아닌가? 괜찮아 들어가자’ 그러나 들어가는데 덩치 큰 백인이 내 귀를 잡아끌더니 밖으로 내 던진다. 궁둥이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 무척 아팠다. 혼자 부대에 돌아와서 많이도 울었다.‘하나님 저에게 답을 주세요. 저는 가는 데마다 천대를 받아야 합니까? 이게 무엇입니까? 왜, 왜, 왜 이런 세상에 살아야 합니까?’하며 기도를 했다. 섬광처럼 떠오르는 영감이 있었다.‘정치를 하자 언젠가 언젠가 이 좋지 못한 법을 바꾸겠다.’ 결심했다. 독일 가서 2년간 복무하면서도 계속 이런 생각을 했고 상원의원이 되어 법을 바꾸기 까지는 26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 1992년 하원의원으로 출마했다. 미국에서는 정계에 들어가려면 군의원, 시의원, 시의원에 이어 하원위원이 되어야 비로소 상원의원에 출마할 수 있었다. 하원에서는 법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에 상원이 되어야한다.
- 선거지역은 시애틀 북쪽의 28만 명의 작은 도시. 백인이 96% 지역, 혼자만 유색인.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40~50만 달러가 필요한데 단 1,200달러를 가지고 시작,‘다른 사람이 못하는 걸 하자.’나는 꿈이 있었다. 다른 출마자들은 승용차에 선거원들을 데리고 다녔으나, 나는 집집마다 문을 두드렸다.‘안녕하세요. 나는 한국에서 이민 온 폴 신입니다. 이 나라에서 도움을 많이 받아 이렇게 성장했는데 이제 이 나라를 위하여 봉사할 때가 되었습니다.’절을 하면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이런 사람이 이 지역에 처음 출마하게 됐고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유색인종도 처음이었다. 절을 하고 다니자 사람들은‘참으로 겸손하게 보인다. 점잖게 보인다. 찍어주겠다’한다. 어떤 사람은 산 정상에까지 올라와서‘찍어주겠다’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비를 맞고 돌아다니니까 찍어주겠다’하고, 어떤 사람은‘자기 개에게 물렸다고 해서 찍어주겠다고 했다. 미국인들은 개를 아무 많이 키운다. 숫하게 개한데 물렸다. 개에게 많이 물렸지만 개가 베스트 프렌드가 되었다. 표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당선이 되었다.
- 한 번은 어떤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다.‘당신 지금도 많이 걷느냐’‘걷는다’‘지금까지 몇 집을 찾았느냐’‘한 4,000집 찾아 두루 다녔다. 상상도 못하는 숫자이다. 미국인으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숫자이기에 모두 놀라는 것이다. 40대 사람의 사진기자가 와서 같이 걸으며 취재하기 시작했다. 그 사진기자는 2시간도 못 걸어서 포기했는데, 하루에 15시간을 걷는 모습을 보고 놀란다. 이렇게 하여 그 신문기사에 의해서 당선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 토요일 일요일 전 페이지 1/3을 할애하여 지면에 ‘한국에서 이민온자 이 땅에서 은혜 받았다. 이 나라를 위해서 봉사 하겠다 합니다,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면서 다니는데 미국에서는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침 9시에 부인이 열심히 다녀오라고. 하면서 배웅하고 저녁 9~10시면 소금을 가지고 기다린다. 발바닥에 피가 나기 때문에 소독하기 위해서.’ 이 기사덕분에 처음 나간 사람에게, 정치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3선 의원을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결론은 can do!하고 대답한다. 이런 이유로 한국에 가끔 와서 학생과의 대화를 위하여 만났다.
- 2010년 상원의원 5선에 출마하여 당선됐고, 부의장이 되었다. 이것은 기적이다. 결론은‘열심히 하면 된다.’이다. 2010년 민주당이 경제 관계 때문에 약화되었다. 공화당이 압도 적이었는데, 사람마다‘왜 민주당으로 출마했느냐?’이다. 이때까지는 인권법, 이민법, 노인복지법을 지지했기 때문에, 그곳은 76%가 공화당 지지 세력이었다.‘국제협력경제발전위원장’이 되어 한국, 일본, 중국에 돌아다니면서 마이크로소프트 시장을 확보했다. 이곳에서 민주당이 약화되었다고 하지만, 64:36으로 당선되었다. 이는 어디를 가든 신용을 받으면, 겸손하게 봉사하면, 정직하게 살면,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다.
- 한국인 해외 입양아가 17만 명이 있다. 미국에 12만, 유럽이 3만, 호주, 캐나다에 각각 1만 명. 입양아에 대한 문화가 따로 있고 한이 따로 있다. 입양아를 위한 꿈이 있다. 그리고 입양아를 위한 차별철패를 택했다.
- 1963년도 처음 인권법을 주장한 분이 마틴 루터 킹 목사였다. 킹목사가 국회의사당 앞에서‘우리 애들에게 이곳에서 자유를 찾아주겠다.’ 이것이 인권법의 시작이다. 이 덕분에 1965년에 인권법이 통과되었다. 미국에서 흑인들이 자유를 찾게 되었다. 미국인들이 흑인들을 <니그로>라고 불렀고, 이 말은 노예라는 뜻으로 그 후 그 말을 쓰는 사람은 불법이 되었다.
- 상원의원에 출마하여 어느 집의 문을 두드렸다. 나이 많은 미국인이 나왔다.‘동양인은 가라’한다. 난 어릴 때부터 깡패와 싸우며 자랐기 때문에 싸움에는 자신이 있었고 잘 싸운다. 그 미국인을 한대 쥐어박으려고 했으나, 참고 말했다. ‘가고 싶어도 갈 데는 여깁니다. 이곳이 우리 집이고 여기 온지가 43년이 되었어요. 미국 군대에 가서 봉사도 했고, 여기 시민으로 봉사하고 있으며, 대학교수도 31년간 했어요. 세금도 40년간 냈으며 저의 집사람은 미국인이고 저희 가족은 모두 미국시민권자입니다. 미국 시민입니다. 여기가 우리 집입니다 어디를 가라합니까?’하며 공손히 말했다. ‘가까이 오라 나와 친구하자’하며 그 미국 노인이 따뜻하게 대한다. 상원의원이 되니까 제일먼저 이 사람이 찾아와 ‘오리엔탈을 싫어하면 법을 바꾸면 되지 않느냐’라고 조언한다. 이것을 법으로 제출하여 바꾸었다(16세기 영국사전을 보면 오리엔탈(oriental)은 런던의 동쪽에 있고 거기에서 사는 사람들로 나타났다. 코가 납작하고, 눈이 생선같이 조그만 하고, 얼굴은 둥그렇고, 까만 머리에 키가 작아 신비스럽고, 이상스럽게 생겨 믿지 못할 사람들로 표현되었다.). 바꾸면 되지 않느냐 하기에 차별법안으로 제출했다. 1년까지 처음에는 바꾸지 못했다.‘오리엔탈은 해가 뜨고 점잖게 표현했는데 왜 나쁘냐는 것이었다.’다음날 16세기 영국 사전을 가지고 갔다. 그곳을 카피하여 상원의원 전부에게 나누어 주었다.‘신 의원 놀랍다’하며 사과하고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으며 미국에서 오리엔탈하면 불법이 되었다. 이금은 <아시안>으로. 보람이 있었다.
- 재미있는 건 동남아시아(인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버마, 라오스 등)의 사람들이 항의한다. 그것이 무엇이기에 바꾸느냐 하기에 그곳을 카피하여 보냈더니 우리들도 바꾸겠다하여 그곳 사람들로부터 100% 호응을 받아 보람으로, 이것이 오리엔탈이 인종차별 법으로 불법이 되었다.
6 아버지를 찾음
그러나 미국인이 되었으나 한이 있었다. 왜, 왜, 왜 우리 아버지가 나를 버렸을까? 대학교수가 되어 자꾸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어디 계실까? 아버지를 찾아야겠다. 파주 군청을 찾아가 소 수문 한끝에 어느 할머니가 아버지는 어디 계시다며 아버지 주소를 가르쳐 주셨다. 영등포에 있는데 주소를 가지고 찾았다. 아버지가 나오시는데 그 옆에는 새어머니와 동생들 5명이 따라 나온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지 선물을 던져버리고 뛰쳐나왔다. 집까지 울면서, 울면서 돌아왔으나 그러나 어떻하랴. 아버지를 찾았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데 집사람이 많이 도와주었다.‘당신 왜 자꾸 우느냐’고 묻는데 나중에 말했다.‘아버지를 찾았는데 가난해서 어렵다 그리고 동생들이 5명이나 있는데 그들이 학교도 못가고 무학자로 있다’했다.‘그 동생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 그 동생들을 데리고 오라’라고 한다.‘대학교수가 무슨 돈이 있느냐?’하니까‘나도 직장을 찾아 도와주겠다.’한다. 그 후 동생을 하나 씩 하나 씩 데리고 와 그들에게 배움을 주었고 대학도 나가고 잘살고 있다
- 이번엔 아버지 차례다 ‘아버지를 어떻게 모시느냐?’생각하면서 아버지를 찾아갔다.‘이제 아버지를 모시려 왔습니다. 그전에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왜 4살 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내가 아버지를 필요로 한데, 아버지는 저를 버리고 어디를 갔습니까? 답을 해주세요.’했다. 눈물이 나와 눈감고 잠시 있다가 눈을 뜨니까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 밤 새 기다렸다. 새벽 5시쯤 되니까 아버지가 나타났다.‘어떻게 자기핏줄을 버릴 수 있겠느냐? 네 어미는 죽고 나는 소작 농민이고 무학자이기 때문에 집이 가난해서 다른 동네 머슴으로 팔려갔다. 거기다 일본에 징병까지 나갔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까 나쁜 놈은 나였다. 그것도 모르고 한평생 아버지를 싫어하고 원망하면서 살았던 죄인이었다. 가난은 죄가 아니기 때문에 아버지 앞에서 한없이 울었다.‘아버지 용서해주세요’하고,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미국으로 모셨다. 나의 집에서 4년 7개월 동안 사시다 가셨다. 안사람이 화장실 문지방만 빼놓고 다해주었다. 음식 같은 것, 김치 담그는 것까지. 63년도 결혼 당시는 국제결혼이 불법이었고 나를 위하여 차별을 많이 당하였으나 끝까지 나를 지켜주었다. 결혼 48년이 되었는데 김치, 깍두기, 된장찌개 어리굴젓까지 만들어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셨다. 가시기전 며느리 손을 잡고‘네가 이렇게 해주니까 고맙다. 네 시동생들까지 오라고해서 키워주고 가르쳐주고 고맙다.’하면서 가셨다. 있던 한을 다 풀었다.
7. 앞으로 할 일
- 미국에 2가지의 이민자들이 있다. 1세대 이민자들과 2세대 이민자들에게는 차이가 많다. 1세대는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을 떠나 이민 온 자들로서 미국에 살고 있다. 미국에 살고 있고 미국에 살면서도 한국문화를 따르니까 문제가 없었다. 3년 전 불로냐 대학의 총기난사사건으로 미국이 떠들썩했다. 아침에 의사당을 가려고 옷을 입고 있는데 살인자가 한국 학생으로 나온다. 얼마나 놀라고 가슴이 아프던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리고 의사당으로 갔다. 의사당 의장이 어제 살인사건으로 1분 동안 묵념을 하자고 제안한다. 1분 동안 묵념을 하는 게 견딜 수가 없어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2분 동안 묵념이 끝난 뒤 의원들에게‘여러분 미국에 있는 모든 한국인을 대표하여 사과합니다. 첫째, 제가 31년 동안 교수를 했는데 미국에 있는 한국의 교수를 대표해서 사과드립니다. 그러나 그런 학생들의 심리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둘째, 살인자가 한국 사람이랍니다. 저도 한국 사람입니다. 한국 사람들을 대표해서 사과드립니다.’ 미국의 ABC 통신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에게서 편지가 왔다. 특히 1세대 분들의 편지에‘우리민족을 대표해서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마음이 놓입니다. 또 미국인들도 아직도 이민문화에 관심이 없었는데 당신이 울면서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도 몰랐는데 우리함께 더불어 삽시다.’하며 용기를 준다.
- 또 하나 중요한건 1.5~2세대들이다.
이중 문화를 가르쳤기 때문에 문제가 많다. 그러나 희망과 용기를 주기위하여 노력한다. ‘한국 사람으로서 미국에 살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아직까지 미국 전체가 관심이 없었는데 당신이 상원의원으로서 울면서 사과하고 고백할 때 이중문화의 문제점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함께 더불어 삽시다.’ 이런류의 편지가 보내왔다. 그러나 1.5~2세들도 편지를 보내오거나 전화를 했다. ‘당신이 무엇인데 대표해서 사고하느냐 나는 죄인이 아닌데’ 이런 내용이다.
- 2세대들은 ‘우리나라의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하여 배워야한다,’라고 생각하여 모국방문의 기회를 부여하고 주고 있다. 지금까지 동포들이 끝까지 도와주고 사랑해주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고 있다. 모국에 올 때마다 감사하고 용기를 가지고 일하고 있다.
- 하버드 대학교의 죤 페리교수가 ‘19세기는 영국이 세계를 통치했고 20세기에는 미국이 통치했습니다. 21세기는 팝스 아시아입니다. 일본은 해가 지고 있고, 중국은 식생활에 바쁜 나라. 인도는 눈을 뜬 나라, 한국은 제일 작은 나라이지만 뜁니다.’라고 했다. 역시 한국인으로 나는 감사하고 있다.
- 미국에서 1950년 한국전쟁을 영화로 제작하고 있다. <아! 흥남>이라는 영화다. 흥남부두에서 철수할 무렵 피난민들이 92,000명이 흥남부두를 철수하기 위하여 몰려들고 있었다. 미군 함장은 배의 무기를 바다에 버렸다. 무개를 줄이고 대신 난민들을 실었던 것이다. 이 난민들을 거제도에 내려놓았는데 당시 그 함장에게는 5형제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김치 원>< 김치투>…<김치 화이브>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함장이 군법을 위반(무기를 버림)한 죄로 군법에 호부되어 재판을 받아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인간주의라는 것으로 나중에 국회법으로 용서하고 표창.(휴멘이즘으로 표창) 양국 간의 친미, 친한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결과의 영화인데 이 영화의 촬영에 도움을 주고 있다.
- 상원의원으로 꿈이 있다. 미국에 정치인을 양성하고 싶다.(1987년 미국의 도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캐나다의 브라인드 모이건 수상이 양국 국경에서 악수하면서 아일랜드 민요 <웬 아일라일 수웨일 스마일?>을 불렀다. 19세기까지 아일랜드는 영국의 식민지로서 이 둘은 미국이나 캐나다에 와서 대통령이 되고 수상이 되었다. 버락 오버마 대통령의 선조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왔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미국의 대통령이나 캐나다의 수상이 되어 양국의 국경에서 <아리랑>을 부를 것이다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다보니 자꾸 이런 꿈을 꾼다.)
- 버락 오버마 대통령이 되면서 앞으로 30년 안에 미국에 한국인의 대통령이 나온다. 미국과 한국에서도 나의 뜻에 도와주는 사람이 많다.<한미 장학회>가 있는데 모금해가지고 보내주시면 좋겠다. 현재 시의원이 3명이 있는데 구의원, 군의원, 교육의원을 만드는 목적이 미래를 위한 것이다.‘언젠가, 언젠가 미국에 한국인의 대통령이 나옵니다. 그들과 같이 아리랑을 부릅니다.’
- 사람은 꿈이 있어야 한다. 꿈이 없는 사람은 장래는 없다. 입양아들이 대부분 잘되는데 이 중에도 문제가 되는 애들이 있다.(①‘나는 누굽니까?’ 하는 한 교육과 사랑을 잘 받으면 잘 되어간다. 14년 전 있었던 일로 미국인한테서 전화가 왔다.‘우리 부부를 만나주세요’라는 전화이다. 만났다.‘2년 전 14살 먹은 남자아이들 입양하여 왔는데 우리가 부족한 점 없이 모든 걸 다해주었고 있는데도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이다.‘그 아들이 어디에 있습니까?’‘컬리큐롬 하이스쿨에 나가고 있다’‘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습니까?’‘월, 수, 금요일 1시30분부터 2시 30분까지 농구를 하는데 체육관에 가만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체육관을 찾아갔다. 1시 30분이 되어 이 아이가 공을 튀기면서 나온다. 내가 손을 흔들자 본체만체한다. 수요일 날도 마찬가지, 금요일에 가서 손을 흔들자 눈을 흘긴다. 다음 주 월요일 날 다시가 손을 혼들자 찾아와‘누구에게 손을 흔드냐’라고 한다.‘너한테 했다’‘왜 나한테 하느냐?’고 한다.‘너하고 나하고 비슷하지 않으냐?’했다. 친구가 되었다. 같이 햄버그,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면서 우리 집에도 놀러왔다. 한 번은‘필호야 너는 입양으로 오고, 나도 입양아로 왔는데 입양생활이 어떠냐?’하고 물었다. 필호는 눈물을 피눈물처럼 쏟아낸다. 나는 실수한 것 같아 ‘미안하다. 괜한 질문을 한 것 같다’하고 사과했다.‘괜찮습니다.’‘왜 그렇게 슬프냐?’다시 물었다.‘그 집에 11살과 5살 먹은 친아들이 있는데 그 애들에게는 일을 시키고, 접시도 닦도록 하고, 방도 청소시키고, 정원의 풀도 깎고, 말 안 들면 때리기도 하는데 나한테는 일도 시키지 않고, 무엇이든지 다 해주는데 어떻게 가족으로 느끼겠습니까? 이것이 호텔 손님입니까? 아들입니까? 나도 그들과 같이 일하고 싶습니다.’이해했다.‘그 외에 무엇이 있느냐?’‘그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나도 아들같이 대접을 받고 싶습니다.’한다. 나중에 양부모를 찾아가 그 이야기를 그대로 했다. 양부모는 ‘잘 들었다. 감사합니다.’2주일 후 이 아이가 행복해 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 춤을 추면서 다가온다.‘너 왜 그렇게 행복하냐?’라고 물었다.‘어제 우리 아빠한테 얻어맞아는 데요’이런 사례가 어디를 가든 누구나 격은 일이고 친자식이나 남의 자식이나 사랑을 주면 이렇게 된다. 이 아이는 독일에 있는데 육군 대령으로 군 복무하고 있다. 이아이의 목적은 한국인으로 최초로 스타가 되는 것이다.
② 어려운 점도 있다. 5년 전 여자한테서 전화를 왔다. 21살이다.‘왜 그런지 친부모를 찾고 싶다’‘그러면 네 서류를 보내라’했다. 그 아이는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찾아보니까 그 아이의 어머니는 광주에 살고 있었다. 그 아이에게 전화했다.‘네 엄마가 살아계시다’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가고 싶지만 날자와 장소를 알려주면 비행장에서 만나게 해 주겠다 떠나기 2주일전날 전화가 왔다.‘가고 싶지만 혼자 가는 게 두렵다. 아기 때 입양아가 되어 21년이 지났으니까 20년이 되었다. 같이 갈수 없느냐’ 할 수 없이 바뿐 시간을 나누어 광주에 연락하고 해서 인천공항에 내렸다. 놀란 것은 엄마 옆에 오빠가 2명이 있고 또 언니가 있다. 그것을 보고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어머니가 눈치를 채고‘아가야 네가 태어났을 때 너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우리가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네가 잘되라고 너를 보냈다’하면서 울며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아이는 받아들이지 않았다.‘왜 오빠가 둘이 있고 언니가 있? 쨉?왜 나야?’ 광주에도 가지 않고 호텔에서 묵은 뒤 미국으로 바로 떠나 자살을 해버렸다.‘왜 나를 버렸느냐?’라는 유서를 남기고.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하느냐 우리가 입양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고 환경과 조건에 따라 생긴 것인데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입양아들의 바람은 동정은 안 되고 인정으로 대해야 하는데,‘너도 하나님의 딸이어서 빛난 이가 된다.’사랑과 관심이 중요한 것이다.
-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입양아들에 대하여 손잡아주고 인정과 사랑을 주면 모두 잘 될 것이다. 나라로부터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해주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 품어주지 않으면 상실감이나 허탈감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 지난달 공화당과 민주당이 어렵게 대치하고 있을 때‘나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폭풍 안에서 춤추는 것이 인생입니다.’이 말을 연설함으로서 공화당, 민주당의원이 서로 석여 손을 잡고 잘 끝냈다.
- 상원의원으로 있는 동안 별명이 있다.‘언제나 웃는 학자 정치인’이라는 것이다. 왜 웃는가? 어렸을 때는 매일 울면서 살았는데 양아버지를 통해서 인생관이 바뀌었다.‘슬퍼서 웁니까? 슬퍼지니까 웁니다. 기뻐서 웃습니다. 웃으니까 기뻐집니다. 웃으니까 만사가 좋아집니다.
- 조국에 올 때마다 많이 변합니다.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우리 학생들도 항상 웃으십시다. 항상 우울한 상태에서 있지 말고 웃으면 앞이 잘 보입니다. 부모님들도 많이 웃으세요.
- 7살 때 하나밖에 없는 친구 제언이가 죽었다. 너무 많이 울었다.‘넌 죽었지만 난 절대 죽지 않을 거야 너를 위하서 네 몫까지 해내겠다.’하고 결심했고 ‘박사학위까지 받은 것은 네가 한 것이고 정치인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네가 있었기 때문에 한 것이다.’
- 폴 미이건 양아버지께서 코피를 흘리며 검정교시를 보기위해 쩔쩔매면서 공부하고 있을 때 그 때마다 양아버지께서 오셔서 쓰다듬으며‘내 아들아 나는 너를 믿는다.’라는 미국 분이 용기를 줄 때마다 희망을 가지고 공부했다.
아들이 대학에 다닐 때 2주일에 한번씩 아들을 보려고 찾아왔다. 아이다호에서 학교를 나가는데 아들을 보려고 왔다가 가시는 길에 자동차 사고로 돌아가셨다. 한이 되어서 더욱 매진했다. 양어머니는 당뇨에 고혈압까지 있다. 며느리는 양어머니께 중남미 크루즈 여행을 시켜드렸다. 90살의 양어머니를 하와이 크루즈 영행 중에 나는 한국에 나와 이 강의를 한다. 미국의 개인주의는 발달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한국인보다 노인들과 부모를 더 잘 모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