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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8. 묵상글 (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 열심히 하는 것이 다 잘하는 것은 아니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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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8.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열심히 하는 것이 다 잘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
열심히 하는 것이 다 잘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오늘 제 나눔의 주제입니다.
우리의 칠죄종 가운데 하나가 나태입니다.
나태가 죄의 뿌리가 되는 일곱 가지 중요 죄 가운데 하나라는 말이며
쉬운 말로 하면 게으름이 일곱 가지 중요 죄 중에 하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게으름과 반대라고 할 수 있는 열심임은 덕(德)일 것입니다.
그런데 열심이라는 것이 반드시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잘못 가면 아니 감만 못하고 게으름만도 못합니다.
이것은 남 얘기가 아니고 제가 처절히 성찰한 바입니다.
여러 차례 얘기한 것 같은데 제가 환갑 되던 해가 마침
사제 서품도 삼십 주년이어서 진지하게 살아온 삶을 성찰하게 되었지요.
성찰해보니 저는 60년과 30년을 참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리 잘 산 것은 아니었다는 성찰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열심히 열심히 잘못 산 것이었지요.
오늘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오늘 복음의 마르타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젊었을 때 열심히 교회를 박해하였고,
그리함이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였기에 그리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얼마나 열심히 잘못하고 잘못 사는지!
오늘 복음의 마르타도 열심히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모신 것이 잘못은 아니고,
시중을 열심히 든 것도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열심히 시중든 것이 사랑이 되지 못하고 일이 되었으며,
너무 많은 일로 분주하고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우리가 자주 이런 잘못을 범합니다.
시작은 사랑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느새 일로 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빠지고 일만 남은 것입니다.
주님은 빠지고 객만 남은 것입니다.
열심히 하다가 다 이리된 것입니다.
열심히 달리다가 이렇게 된 겁니다.
우리 인생이 종종 이러하다!
우리 신앙생활도 종종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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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8.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지 심리학자 힐렌 아인혼은 ‘경험의 함정’이라는 책에서 행복을 ‘행복의 사분면’으로 이야기합니다. 우선 행복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실현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불행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과 자기가 원치 않던 것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업이 잘되면 행복하지만, 사업이 잘 안되면 불행합니다. 건강 검진을 해서 너무 건강하다는 결과가 나오면 행복하지만, 암진단을 받으면 불행합니다.
세 개의 단면이 보입니다. 행복은 원하는 것을 갖게 되었을 때, 불행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 때, 원하지 않는 것을 갖게 되었을 때입니다. 행복 하나에 불행이 두 배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빠진 한 면이 있습니다. 바로 원치 않는 것을 갖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픈 가족이 없다거나, 교통사고가 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행복과 불행은 반반입니다. 원하는 것을 갖게 되는 것이 힘들지만, 원하지 않는 것을 갖지 않게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행복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것을 갖지 않게 됨에 “다행이다”라고 말하면서, 행복한 ‘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복의 이유는 갖는 것에만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갖지 못하는 것에도 행복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사건 사고의 주인공이 되지 않는 것만 해도 행복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가십니다.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했지만,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누가 더 행복할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예수님 말씀만 듣고 있는 마리아가 행복할까요? 아니면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수님을 분주하게 시중드는 마르타가 행복할까요? 둘 다 행복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기 행복을 간직하며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반면에 마르타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상태였지만, 그녀는 앞서 말씀드렸던 불행의 측면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즉,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 때’만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가 초대했지만 마리아처럼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생각에 억울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마르타처럼 우리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그래서 행복의 이유보다 불행의 이유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장 좋은 몫인 행복의 이유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 자기에게 다가와도 행복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은 나이만큼 늙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생각만큼 늙는 것이다(조지 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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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8.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 10,39)
지금, 마르타는 예수님의 몸을 섬기고 있다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섬기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르타가 ‘성찬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면, 마리아는 ‘말씀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섬김이 진정한 ‘주님 섬기기’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할까?
그것은 주님을 섬기겠다고 나서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자신을 섬기시도록 승복하는 일입니다. 실상 주님을, 혹은 남을 섬긴다고 하면서, 막상은 자기 자기를 섬길 수가 있습니다. 마치 마르타처럼 말입니다.
사실은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진정으로 주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막상 주님 앞에 앉아서도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말이나 생각을 듣고 있거나 타인의 말을 듣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 그 어떤 섬김보다도 더 큰 섬김이 됩니다. 마치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주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섬기도록 허용해 드리고 있는 셈입니다. 곧 자신을 향한 주님의 섬김을 수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주님 되시게 해드리는 일에 해당합니다. 곧 ‘나는 섬김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신 말씀대로 해드리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과 한 자리에 있게 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그분의 일, 곧 섬기는 일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고 우리를 섬기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나의 종’이 되십니다. ‘종의 모습’으로 오시어 우리를 섬기십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지금 자신보다 더 작아진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 셈입니다. 곧 ‘종’인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당신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허용하는 일’, 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승복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당신을 섬기는 일입니다. 곧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꼭 한 가지, 그것은 자신을 그분께 내어드리고 주님을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일, 주님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수락하는 일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정작, 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無爲而無不爲)의 단계, 곧 ‘무위(無爲)의 도’(道)일 것입니다. 이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사실은 전부를 하는 신령스런 ‘도’(道)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관상하는 일’이 바로 이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섬김은 주님을 주님 되시게 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2)
주님!
이 한 가지로 하여, 가난을 기쁨으로 살겠습니다.
당신께 속한 자만이 진정 가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한가지로 하여, 낮추어 섬기겠습니다.
속한 자만인 진정 낮아질 수 있고,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전부를 하는 이 신령스런 일이
바로 당신의 소유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실상 필요한 한 가지,
주님이신 당신을 주님 되게 하는 일, 바로 그 일만 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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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8.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비교에서 악이 나온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기의 몫을 행하고 또 그 몫에 기쁨과 감사함을 지닙니다. 자기 몫이 무엇인지 알고 확신이 서 있다면 그 몫을 행하는 것에 배 아플 일 없고, 기쁨이 클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몫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어떤 마을에 들렀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그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정작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고,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르타가 마음이 상했는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 데도 보고 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루카10,40).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1-42).
마르타의 몫도, 마리아의 몫도 다 필요하고 좋은 몫입니다. 활동과 관상은 자기의 취향에 따라 더 크게 비중을 두었다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마르타의 태도, 편견이 잘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를 꾸중하지 않습니다. 또한, 마리아에게도 그녀가 필요한 것을 선택했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마리아가 선택한 것은 좋은 몫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마리아의 몫입니다. 왜냐하면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로마10,17). 말씀을 기초로 삼지 않은 행동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 깨닫게 되면, 하고 싶은 일을 하기보다 해야 할 일을 하게 됩니다. 내 뜻을 앞세우지 않고,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찾게 됩니다. 진정 하느님 앞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마르타는 다소 불평스러운 어조로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는데, 그럴 일이 아닙니다. 자기의 역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지 생색은 왜 냅니까? 왜 동생과 비교합니까? 열심히 일해 놓고 마음에는 화를 잔뜩 담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이 내 몫이었으면 그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스스로 주님을 위해 시중을 들었으면, 그 자체를 기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마르타는 활동적인 여인인 듯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일에만 집착하면, 그 활동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다시 말하면 활동은 기도 안에서, 말씀 안에서 나온 활동이라야 참된 활동이 됩니다. 또한, 기도를 하면 할수록 활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 없는 활동은 무의미합니다. 활동이 없는 기도는 또한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 안에서 좋은 몫을 택할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몫이라도 최선을 다했으면 그 자체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루카12,31).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뒤로 미루고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듣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을 사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친구를 따라 강남을 가지 말고, 자기 몫에 충실해야 합니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남을 따라가다 보면 불평불만이 생기게 되고, 결국, 악에 지고 맙니다. 지금 하는 일이 좋은 몫이라면 마음껏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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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8.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달라스 교구는 3년 동안 교구 시노드를 준비하였습니다. 지난 9월 14일 ‘십자가 현양 축일’에 대의원 회의가 있었고, 저는 부제님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그날 교구장님과 함께하는 미사가 있었고, 그동안의 준비 과정과 결의안에 대한 보고가 있었습니다. 시노드는 ‘건강검진’과 비슷합니다. 건강검진은 여러 분야를 점검합니다. 질문을 통해서 생활 습관을 파악합니다. 운동은 얼마나 하는지, 음주와 흡연은 하는지, 우울증은 없는지, 잠은 충분히 자는지 질문을 통해서 확인합니다. 채혈을 통해서 몸의 영양상태를 살펴봅니다. 소변검사를 통해서 영양분의 순환이 잘 되는지 살펴봅니다. 내시경을 통해서 위와 장의 상태를 살펴봅니다. 혈압을 측정합니다. 고혈압이라면 원인을 찾아봅니다. 시력과 청력을 확인합니다. 보고 듣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건강검진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몸에 이상이 있다면 그것을 조기에 발견하여 치료하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몸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좋은 생활 습관을 지니도록 노력하는 겁니다.
건강검진을 통해서 우리 몸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듯이, 시노드를 통해서 교구의 신앙 상태를 점검하는 겁니다. 시노드는 교구의 건강 상태를 점검합니다. 첫째는 ‘경청’입니다. 교우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제와 수도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듣는 겁니다. 교우들이 영적으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듣는 겁니다. 사제와 수도자들의 고민과 갈망이 무엇인지 듣는 겁니다. 허리가 아픈 사람에게 두통약을 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이야기를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여인의 이야기를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셨습니다. 둘째는 ‘진단’입니다. 교회의 재정은 문제가 없는지 살펴봅니다. 교우들의 신앙생활의 지표인 성사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세례, 견진, 고백, 병자, 성체, 혼인, 신품 성사는 예수님께서 제정하셨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성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교만과 위선이 문제임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 보다는 세상의 것들을 먼저 찾으려는 제자들의 욕망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처방’입니다. 처방에는 고통이 따르고, 인내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교회가 처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60년 전에 있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창문’을 여는 처방을 하였습니다. 사목헌장, 계시헌장, 교회헌장, 전례헌장을 통해서 시대의 징표에 맞도록 교회의 창문을 열었습니다. 달라스 교구도 ‘결의문’을 통해서 교구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서 처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시급한 것이 있고, 어떤 것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필요한 곳에 예산을 책정하고, 집행해야 합니다. 2000년이 지났지만, 예수님의 처방은 여전히 강력한 효과가 있습니다. 교회에 어려움이 있다면 예수님의 처방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썩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헌신과 희생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처방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는 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처방입니다.
12월 4일일 교구 시노드는 폐막한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교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복음의 기쁨이 넘쳐나는 교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걱정하기보다는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교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저와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교구 시노드와 동행하려고 합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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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8.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의 삶을 잘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이고 또 다른 하나는 봉사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모습이었고, 우리가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축은 두 개입니다. 하나는 기도이고, 또 다른 하나는 봉사입니다.
늘 교회가 기도와 봉사를 강조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그 두 축을 우리는 복음에서 만나게 됩니다. 기도하는 마리아와 봉사하는 마르타의 모습 말입니다.
기도와 봉사 모두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면 그 첫 자리는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시간을 통해 우리는 치유를 얻고 기쁨을 얻고 희망을 얻고 고통을 이겨낼 힘을 얻고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습니다. 이것이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기도 없는 봉사,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지 못한 봉사는 힘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잘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이내 지쳐버리고 말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첫 선택이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 한다면,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살고 그분 안에서 힘을 얻고 위안을 얻는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봉사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기쁨을 나누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봉사이고 나눔입니다.
내 힘으로 하는 봉사, 즉 기도 안에서 힘을 얻지 못하는 봉사와 나눔은 언젠가 지치고 맙니다. 그리고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함께하는 봉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치지도, 피곤하지도, 봉사가 끝난 후 교회를 떠나지도 않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모습도, 마르타의 모습도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나중에 해야 하는 것인지는 구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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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댈 곳
당신의 오늘 하루가 힘들진 않았나요.
나의 하루는 그저 그랬어요.
괜찮은 척하기가 혹시 힘들었나요.
난 그저 그냥 버틸만했어요.
솔직히 내 생각보다 세상은 독해요
솔직히 난 생각보다 강하진 못해요.
하지만 힘들다고 어리광 부릴 순 없어요.
버틸 거야 견딜 거야 괜찮을 거야
하지만 버틴다고 계속 버텨지지는 않네요.
그래요. 나 기댈 곳이 필요해요.
그대여 나의 기댈 곳이 돼줘요.
기댈 곳 가사 중 – 싸이-
운전 중 흘러나와 듣게 된 노래입니다.
기댈 곳이 되고 있는 그대에게 선물합니다.
기댈 곳을 찾고 있는 그대에게 선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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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8.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된 영적 삶
“경청, 회개, 환대, 관상”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시편139,24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참된 영적 삶을 살 수 있나?
참으로 믿는 이들, 누구나의 관심사일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답을 줍니다. 참된 영적 삶에 대한 깊은 가르침과 더불어 깨달음을 줍니다. 네가지 측면에서 나눕니다.
첫째, 경청입니다.
우선적인 것이 귀기울여 듣는 경청(傾聽)이요,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敬聽)입니다. 성서의 예언자들은 물론 성 베네딕도 및 모든 영성가들이 우선적으로 꼽는바 경청입니다. 베네딕도 규칙도 맨 처음 “들어라, 아들아!”로 시작되며, 예언자들 역시 무수히 들어라 외칩니다.
대화나 상담의 기본도 경청이요 기도의 기본도 경청입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 역시 경청해주길 바랍니다. 경청을 잘 하기 위한 침묵이요 경청에서 겸손도 순명도 뒤따릅니다. 침묵과 경청에서 참말도, 지혜도 나옵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좋은 삶의 지혜가 됩니다.
“조급하고 허망한 말을 피해야 마음이 고요해진다. 엄정한 말과 평안한 마음이 어우러질 때 덕은 완성된다.”<다산>
“대개 겉과 속을 함께 닦아야 그 덕이 외롭지 않으니, 한쪽으로 치우친 말을 해서는 안된다.”<다산>
이런 말은 깊은 침묵과 경청에서 나옵니다. 바로 경청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이 방문했을 때 마리아는 우선 주님의 발치에 앉아 침묵중에 그분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새삼 침묵과 경청의 훈련을 통한 습관화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너무나 침묵과 경청이 실종된 경박한 세속화된 삶들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회개입니다.
경청과 동시에 일어나는 은총의 회개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자기를 아는 겸손의 지혜가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한두번의 경청이 아니듯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평생 여정의 회개입니다. 인간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회개뿐입니다.
오늘 예수님 발치에 앉아 경청하는 마리아는 분명 동시에 내면에서는 회개도 일어났을 것입니다. 반면 일에 몰두하면서 마리아의 모습에 불평하며 도움을 청하는 마르타에 대한 주님의 충언이 마르타는 물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과도한 활동을 절제하고 주님 말씀에 귀기울이는 경청의 관상을 우선하라는 회개의 가르침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오늘 제1독서 갈라티아서는 바오로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경위를 소상히 설명합니다. 진솔하고 겸손한 고백을 통해 사도의 회개의 여정을 듣는 듯 합니다. 예전 바오로가 아니라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의 종으로, 교회의 사람으로 거듭 난 바오로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환대입니다.
손님 환대는 기본적 영성이자 예의입니다.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정주영성과 함께 가는 환대영성입니다. 그래서 수도원을 환대의 집, 수도자는 환대의 사람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환대의 기쁨, 환대의 사랑, 환대의 치유, 환대의 축복입니다. 서비스업의 첫째 요소도 친절한 환대입니다. 환대가 아닌 냉대(冷待)라면 그 상처는 얼마나 크고 오래가겠는지요.
오늘 마리아의 예수님 환대는 옳았습니다. 제 좋을 대로의 환대의 사랑이 아닌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에 따른 마리아의 경청의 사랑, 경청의 환대였습니다. 마르타 역시 제 좋을 대로 정성 가득한 음식준비를 통해 주님께 대한 환대의 사랑을 표현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바, 환대는 아니였습니다.
환대에도 분별의 지혜가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내 중심의 환대가 아닌 주님 중심의, 상대방 중심의 환대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타의 불찰은 주님 환대의 우선 순위를 잊은 것입니다. 미사구조도 이런 주님 환대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말씀전례에 이어 성찬전례로 말씀을 경청하는 환대가 우선합니다.
넷째, 관상입니다.
관상과 활동은 함께갑니다. 우열관계가 아닌 보완관계요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경청의 관상이 우선입니다. 경청의 관상에서 삶의 중심과 질서가 자리잡히고 지혜로운 눈밝은 활동생활이 가능합니다. 경청의 관상없는 활동이라면 무질서하고 방향을 잃을 수 있습니다. 경청의 관상의 부재로 맹목적 눈 먼 활동에 지친 어리석은 영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사랑의 관상, 사랑의 활동입니다. 관상이나 활동의 본질은 사랑이요, 대립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관계로 봐야 합니다.
바로 오늘 마르타의 좋은 취지의 음식 손님 접대의 문제점도 여기 있었던 것입니다. 경청의 환대가, 경청의 관상이 우선임을 잊고 활동에 몰두함은 지혜가 아닙니다. 밖으로는 마르타의 활동이, 안으로는 마리아의 관상이 조화와 균형을 이뤄야, 관상에서 샘솟는 활동이어야 바람직한 영적 삶입니다. 예수님만큼 섬김의 활동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밤마다 관상가가 되어 외딴곳에서 관상의 기도로 아버지와 일치의 충전시간을 가졌습니다. 낮에는 활동가, 밤에는 관상가로 사셨지만 분리된 분이 아니라 통합된 온전한 분이었습니다.
잘 듣기 위해, 잘 분별하기 위해, 잘 기도하기 위해 일단 멈춤의 관상이, 침묵중 경청의 관상이 절대적입니다. 우리 삶에서 최고의 활동 형태가 하느님과 일치의 관상입니다. 참으로 이상적 영적 삶은 예수님처럼 “활동안에서 관상(contemplation in action)”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참된 영적 삶을 위한 네 요소가 경청, 회개, 환대, 관상이요 이 또한 지속적이고 의식적인 영성훈련과 습관화가 절실합니다. 바로 이 넷의 요소를 통합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참 영성가로 살게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여라.”(루카11,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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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8.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좋은 몫>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2)
임을
사랑하는데
좋은 몫
나쁜 몫이
어디 있으랴마는
네 몫에
마음 빼앗기면
내 몫은
같은 몫이라도
나쁜 몫이 될 테고
내 몫에
오롯하다면
내 몫은
같은 몫이라도
좋은 몫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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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8.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39-42)
마르타가 지극히 거룩하신 분과 그분의 성도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다
주님께서는 육신을 지니셨습니다. 황송하게도 우리를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셨고 그래서 황송하게도 굶주리고 목도 마르셨지요. 굶주리고 목마르셨기에, 당신께서 몸소 풍요롭게 해 주신 이들이 만든 음식을 잡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당신께 음식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은혜를 베푸시려고 스스로 낮추시어 손님이 되신 것입니다.
마르타는 굶주리고 목마른 이들에게 먹고 마실 것을 대접하느라 바빴습니다. 갚은 애정으로,지극히 거룩하신 분과 그분의 성도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했습니다. 그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지나가고 마는 일입니다. 먹고 마시는 일이 언제나 계속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가장 순결하고 완전한 선(善)에 몰두할 때, 시중드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내가 오로지 하느님의 선만을 바란다면, 나의 이러한 뜻은 더없이 고귀해질 것이고, 그러면 성령께서 곧바로 흘러 나올 것입니다. 선한 모든 것은 흘러 넘치는 하느님의 선에서 흘러 나옵니다. 하느님의 뜻은 그러한 일치 속에서만 내게 단맛이 납니다. 그러한 일치 속에서 하느님의 평화는 모든 피조물의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 거기에서만 이러한 선과 존재와 생명을 지닌 모든 것이 쉼을 얻습니다. 이때의 쉼은 마치 최종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쉼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피조물과 어떤 관계를 가질 것이냐다. “여러분을 방해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뒤틀린 방식으로 사물과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254)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예수님, 헤로데처럼 당신을 두려워하고 죽이려 하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당신을 흠숭합니다. 마리아님, 아드님을 구하시려고 요셉과 함께 이집트로 피난가신 그 순간을 찬미합니다.
예수님, 그들의 죄와 악의에 찬 말과 행위 그리고 사악한 행동으로 당신을 죽이거나 자신과 주변 사람 안에서 당신이 자라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이의 이름으로 당신을 홈숭하나이다.
예수님, 사람들과 하나 되신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소서. 그들은 다른 이들이 당신의 평화를 발견하도록 도와주면서 평화롭게 살며 두려움에서 해방되리다.
예수님, 그들과 다른 이들, 특히 어린이와 젊은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모든 사람의 이름으로 당신을 홈숭합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가 그들을 보호해 주시는 천상 어머니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이 성탄절에 그들이 보호받으며 안전하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하소서. 오늘 당신이 평화와 기쁨을 주러 오셨다는 것을 느끼게 하소서.(가정불화로 방황하는 이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271)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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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8.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다.”(루카 10,42)
경험적으로 소박하고 단출한 식단이지만 단품 식사가 마음 편합니다. 그래서 많은 반찬으로 가득 찬 뷔페 식사가 부담스럽고 불편합니다. 여러 가지 많은 음식을 먹을 때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난 다음 기분 좋은 포만감보다 불편한 더부룩함으로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을 겁니다. 과한 것보다 약간 모자란 게 낫다는 말도 있듯이 정성이 담긴 작은 음식이 많은 음식보다 더 만족감을 줄 수 있습니다. 영적 만족감도 그러하지 않을까요?
몇 년 동안 원외 거주할 땐, 아무래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혼자 있으면서도 주어진 외부 활동 곧 병원 원목 신부로서의 제 소임에 충실하고, 운동도 열심히 할뿐더러 꾸준히 독서도 하면서 건강한 몸과 건전한 정신을 유지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도 중요하지만 제게 꼭 필요한 영적 운동, 곧 기도 생활을 충실히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갖고자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바쁜 일상에서, 분주한 활동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영혼을 고요하게 유지하느냐가 저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문제입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유지하려면, 활동의 회전 바퀴 중심에 고정된 축이 굳건하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고정된 축이 있다면, 바퀴가 아무리 빨리 돌아도 그 축은 중심을 지킬 수 있습니다. 사실 그 축이 바퀴를 돌려주는 것입니다. 축이 고정되어 있지 않으면 바퀴가 요동치거나 아예 움직이지 않아 모든 일이 뒤 틀려 멈추고 맙니다. 고정된 축에서 안정이 나오는데, 이는 바퀴가 축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의 고요함은 바로 바퀴가 축에 고정됨에서 나옵니다. 우리 시대만이 아니라 성서의 시대에도 이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런 우리네 삶의 문제를 오늘 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를 통해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 집 안에 살아가고 있는 두 자매에게서 드러나고 있는데, 한 사람은 고정된 축이고, 다른 자매는 그 축에 끼여 돌아가는 바퀴와 같습니다. 마리아는 고정된 축이고, 마르타는 돌아가는 바퀴입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한순간이지만, 잠시 고정된 축에서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긴 여정으로 인해 지치시고 피곤하셨기에 편히 쉬고 싶은 마음에서 마르타와 마리아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시장하셨을 겁니다. 오랜만에 자기 집을 방문하신 예수님이 마르타에게는 오직 음식 대접을 필요하는 손님으로만 보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당하신 거부와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겪어야 할 수난은 그분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잠시라도 그 짊을 내려놓고 누군가가 자기 곁에 머물면서 관심과 이해의 시간과 자리가 필요했었나 봅니다. 예수님도 누군가 당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 말해 보았지만, 앞으로 겪을 수난에 대해 예고할 때마다 다들 진저리를 내고 들으려는 마음이 없음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이런 주님에게 마르타는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10,40)라고 마리아에 대한 분노를 예수님께 쏟아 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10,41)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마르타뿐만 아니라 우리 대부분은 해야 하고 해결해야 하는 많은 일들이 있겠지만, 진정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그렇게 많지 않음을 예수님은 에둘러 말씀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마르타에게는 회전하는 활동의 고정축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마음의 고요함을 잃고, 식사 준비가 음식을 먹는 사람보다 중요해질 때, 바퀴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고요함을 되찾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 영원히 가치 있는 한 가지,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단 한 가지 그것은 사람이며, “주님 발아래 앉아 있는 것”(10,39)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눈을 바라보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그것입니다.
그러기에 저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은 중심 단어는 “좋은 몫”(10,42)이란 표현입니다. 여기서 좋은 몫이란 곧 주님과의 교제, 친교입니다. 그러니까 마르타가 준비 중인 음식과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양분과의 대비해서, 식사의 가장 좋은 몫은 부엌에 있지 않고 마리아가 앉은 자리에서 베풀어지고 있는 말씀의 잔치에 무게가 더 쏠리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결국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친교가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수많은 식단을 두루 갖춘 뷔페 식사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뷔페는 먹고 나면 부담스럽고 불편합니다. 예수님은 마르타와 우리 모두에게 삶을 단순화해야 하고, 중요한 한 가지 일에 초점을 모으고 그 일에 열정을 쏟기를 바라십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하고있는 그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섬기고 있는 주님에게서 우리의 시선이나 관심이 분산되어, 다른 일에 정신을 팔려서는 아니 됩니다. 갈라진 마음 없이 주님 곁에 머무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을 갈라지게 하는 삶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어떻게 온전함을 유지하고 생활할 수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씨름해야 하는 물음과도 같습니다. 그 해답은 오늘 복음의 마리아처럼 하면 됩니다. 주님 발아래 앉는 쪽을 선택하면 됩니다. 거기가 바로 우리 모두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는 많은 일이 한 가지 일에 굴복하는 곳이며 자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많은 일을 주님 발아래 내려놓고 그분의 보살피심을 받아들이면서 그분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그때엔 예수님께서 받는 존재가 아니라 베푸시는 존재가 되실 것이며,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마태20,28)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을 온전히 채워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을 보고 느끼면서, 우리가 참석하고 있는 성당에서 우리 모습을 성찰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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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8.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꼭 필요한 묵상으로 충실한 신앙생활을 /
박윤식 [big-llight] 2024-10-07 ㅣNo.176613
어떤 이가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의 얘기를 주워 모아 ‘죽을 때 꼭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라는 것을 다룬 책을 냈다. 그들이 후회한 건 대개 ‘사랑하는 이에게 고맙다고 말할걸.’, ‘좀 더 친절하게 대해 줄걸.’, ‘그때 좀 더 참았을걸.’ 등이었다나. ‘돈을 좀 더 많이 벌걸.’, ‘공부를 열심히 해 학위를 딸걸.’, ‘사업에 더 많은 시간을 쏟을걸.’ 등의 후회 따위들은 거의 없었단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다. 그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녀는 주님의 발치에서 그분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많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동생이 저만 시중들게 두는데 그냥 계십니까? 좀 도우라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와 걱정이구나. 그러나 필요한 건 단 한 가지이다. 그녀는 좋은 걸 선택해, 그걸 빼기지 않을 게다.”’
사실 그 집안에 일에 매달린 마르타가 없었으면 예수님 일행은 진지도 드시지 못하셨을 수도. 이에 예수님은 마르타를 두 번이나 부르셨다. 이를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녀는 음식 준비에 온갖 시중으로 몰두하였기에, 당신 말씀을 들을 겨를이 없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셨을까? 아니면 그녀의 헌신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었기에, 어찌 그 정성 탓할 수 있었으랴!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각자의 삶의 방법이 있음을 분명히 주지시키셨다. 그분의 함축된 뜻은 마르타가 방해받지 않고 여러모로 음식 준비를 잘할 수 있듯이, 마리아도 방해받지 않고 주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보장해 주어야만 한다는 것일 게다. 그래서 지금 너네한테 꼭 ‘필요한 것’은, 너는 음식 준비하는 거고 너 동생 마리아는 내 발치에서 듣는 것이란 것을 구분하셨다.
사실 우리에게는 마르타적인 것과 마리아적인 것, 모두가 필요하리라. 활동과 봉사에 성실하다 보면 묵상과 기도 생활을 소홀히 할 수도 있기에, 두 가지가 중용을 이루어야만 할 게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라면서, 말씀을 듣고 말씀 안에서 당신을 만나, 그 힘으로 사는 게 가장 ‘필요한 한 가지’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두셨다. 아마도 신앙의 말씀을 듣는 믿음의 삶에서 봉사의 출발점이 되지 않는다면, 사랑의 행위는 지속될 수 없으리라.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마리아는 좋은 걸 선택했다. 그리고 그걸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마리아의 일이 빼앗기지 않는다면, 아마도 마르타의 일은 언젠가는 빼앗길 수도. 그렇다면 우리가 우선시 할 일은? 어쩌면 많은 일로 염려로 걱정하는 마르타보다, 예수님 발치서 때로는 말씀 듣는 것을 우선시하는 삶을 누리면 어떨까?
어떤 면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도 늘 마르타처럼 바쁘기만 하다. 그렇지만 때로는 마리아처럼 말씀에도 귀 기울려야 할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우리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 뜻이리라. 어쩌면 우리에게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두 가지 모습을 늘 같이 지니고 산다. 주님 목소리에 온전히 귀 기울이고 그분과 일치하여 살고 싶은 마음과 현실에 충실하고자 하는 욕구가 함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가운데 무엇 하나를 선택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이 둘을 내 삶에서 어떻게 조화시킬까 하는 것일 게다. 그리하여 때로는 믿음 안에서 꼭 필요한 묵상으로 삶을 잘 실천하면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몫을 택한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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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8.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복음을 읽을 때 자신이 마리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마르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지상에 사시는 동안은 당신께 음식을 마련하여 드릴 사람들이 필요하셨습니다. 천국에는 마르타가 할 일이 없으리라고 말하지만, 현세의 삶에는 어제 복음에 나왔던 강도를 만난 사람처럼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들이 언제나 있습니다. 아니, 다른 사람을 돕기 전에 먼저 나의 일상생활을 해결하는 것부터 적지 않은 근심거리입니다.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하였다고 부러워하고만 있을 상황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쩌면 마르타의 일도 좋은 몫입니다. 전에 어떤 곳에서 방 이름을 정하는데 제가 ‘예수님께서 머무셨던 마르타의 집’이라고 이름을 붙였던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을 집에 모실 수 있었던 것은 매우 큰 특전이 아니었을까요?
마르타는 스스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이고는, 이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를 잊은 듯합니다.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을 수 없을 만큼 바쁘다 하여도, 예수님께서 드실 음식을 만드는 것은 그를 예수님과 긴밀히 결합하여 줍니다. 내가 지금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잊지 않는다면, 우리 집을 찾아 주시는 주님을 위하여 애쓰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그 수고는 좋은 몫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수고로 천국에 이르게 될 때, 그때는 세상의 무수한 마르타들도 수고를 멈추고 “빼앗기지 않을”(루카 10,42) 몫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셔 들일 수 있는 사람, 예수님께 음식을 만들어 드릴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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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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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8.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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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8.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신도가 성화(聖化)되는 곳은 바로 이 세상 안입니다!
전형적인 마르타 스타일인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살짝 빈정이 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가 마르타가 아니라 관상(觀想)에 전념하는 마리아의 손을 들어주시는 듯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라이프스타일 때문에 깊이 있는 기도생활이나 영적 생활에 몰입할 수 없는 평신도들께서 약간 속이 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장담컨대 절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돌아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이전, 30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평범한 평신도로서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30년의 세월은 복음사가조차 별로 쓸 말이 없을 정도로 그저 평범한 청년의 삶을 사셨던 나날이었습니다.
때로 어머니를 도와 설거지도 하셨을 것이고 마당도 청소하셨을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 사이에서 희로애락을 나누며 동고동락하셨던 것입니다.
좀 더 나이가 들어가면서 목수였던 양부 요셉의 일을 도와 묵묵히 대패질에 전념하셨을 것입니다.
다 만든 물건을 납품하러 다니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무슨 물건을 이 따위로 물건을 만들었냐’는 주문자의 딱딱거림에 화도 나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30년이란 세월동안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참 인간으로서 지극히 일상적인 삶을 사시면서 우리에게 ‘일상적 삶의 가치’를 직접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평신도들께서 참으로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 가야하는 가를 몸소 삶으로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극히 하찮아 보이는 우리의 이 일상적인 일들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평신도들께서는 매일 마주치게 되는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 살아가야 할 것이며, 또한 이러한 일상의 삶은 결코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세상만사 안에 늘 현존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찾는 노력(Finding God in All Things)을 계속할 때,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기도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관상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평신도 영성과 관련해서 한국 천주교회는 참으로 특별한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 교회사 안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 평신도들의 신앙은 그렇게 적극적이었고 자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토록 능동적이었던 박해시대 평신도들의 역할이 교계제도가 확립되어가면서 점점 수동적으로 변화되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탁월했던 초기교회의 탁월했던 평신도들의 영성이었는데, 성직자들의 역할이 강화되어가면서 즉시 힘을 잃어갔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평신도의 신원에 대한 불투명한 이해와 불충분한 개념정립은 평신도 자신들에게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불이익과 손실을 초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평신도 영성의 쇠락은 교회의 퇴보와 늘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 맡겨진 중요한 과제 하나 가운데 하나가 평신도 영성을 활성화시키는 일입니다.
평신도들 안에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평신도들이 지닌 카리스마와 창의력을 존중하고 교회 쇄신과 발전을 위해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평신도들은 교회 안에서 제2중대가 절대로 아닙니다. 장교인 사제들을 맹목적으로 졸졸 따라다니는 졸병 역시 절대로 아닙니다.
평신도들은 사제들의 수가 부족하고 그들의 업무가 과중하기에 이를 보완해주기 위한 존재도 결코 아닙니다.
평신도들 역시 성직자나 수도자와 마찬가지로 복음적 완덕에로 불림을 받은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단 평신도들께서 세상과 격리된 수도원이나 성전 안에서 살지 않지 않고 ‘세상 안에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평신도들의 성화 여정은 당연히 ‘세상 안에서’ 그리고 ‘세상을 통해’ 전개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수도자가 평신도의 삶을 살길 원치 않으시듯이, 평신도가 수도자나 사제의 영성을 살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각기 소명에 성실하며 각자의 카리스마, 달란트에 따라 복음적 삶을 다양하게 표현하도록 마련하셨기 때문입니다.
평신도는 성직자나 수도자 못지않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독특한 영성을 지닙니다.
평신도 영성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도피하는 삶의 모습이 아니고 오히려 그 구조들 안에서 육화하여 복음화하며 그 안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성화하고 또한 성화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평신도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며 성화되는 곳은 바로 이 세상 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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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8.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마르타와 마리아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마르타는 깊은 애정으로 지극히 거룩하신 분과 그분의 제자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며, 몹시 분주하였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39절) 이것은 무엇을 하였다는 것인가? 주님의 발치에서 시장한 마리아는 바로 이 샘에서 정의의 곳간에서 먹고 마시고 있다. 자기가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그분의 진리를 먹고 있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에서 보듯이 덕은 한 가지의 모습이 아니다. 한쪽에는 분주한 섬김이 있고, 다른 쪽에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이 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분주하게 일하는 것보다 우선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절) 하신다.
시중드는 일로 바빠서 거룩한 말씀에 관한 지식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마르타가 열심히 시중을 들어 책망을 들은 것이 아니다. 다만 더 좋은 몫을 택한 마리아가 인정을 받은 것이다. 복음에서 보면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뜨겁게 사랑했다. 주님께서 도착하시기 전부터 시중들 준비를 했고, 라자로를 살리시려고 주님께서 오셨을 때도 먼저 달려 나가 그분을 맞이하였다. 마르타는 주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위해 시중드는 매우 거룩한 봉사를 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의 영적 가르침에 모든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다고 마르타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비판하지도 않으셨다. 육신을 시중드는 일은 섬김을 받는 사람이 그곳에 있는 동안에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마리아의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하는 모습은 끝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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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8.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묵상기도 잘하는 방법: 마르타는 소리기도, 마리아는 묵상기도
오늘 복음에 마르타와 마리아가 나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어떻게 봉사할까 걱정이 많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서 예수님 말씀만 듣고 있습니다.
이 두 자매의 상태가 바로 걱정을 하는 사람과 생각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가끔 우리는 걱정하면서도 생각한다고 착각합니다.
생각은 내 밖에서 들어오는 좋은 생각을 받아들이는 일이고 걱정은 자아와의 대화입니다. 생각은 곧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일 카네기의 『자기 관리론』에 나오는 사례입니다.
윌리스 캐리어(Carrier)는 미국 유명 에어컨 회사, ‘캐리어’의 설립자입니다.
그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수백만 달러가 드는 일을 수주받게 됩니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이 들어가야 했는데 아직 그 회사는 그 기술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캐리어는 수천만 달러의 손해를 보게
되었고 회사에서도 퇴사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는 몇 날 며칠 엄청나게 걱정합니다.
막연한 걱정이 그를 집어삼켜 잠도 잘 수 없었고
먹고 마실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걱정 끝에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걱정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도대체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게 뭘까?’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분석해 보았습니다.
현실을 분석해 본 것입니다.
종이 위에 이 실패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써보았습니다.
‘그래, 어쩌면 내가 직업을 잃을 수도 있어. 길거리에 나 앉겠지.’
최악의 상황을 쓰다 보니 긍정적인 생각도 올라왔습니다.
‘물론 회사는 2,000만 달러의 손해를 보았지만 좋은 실험을 한 거야.’
‘근데…. 어떻게 하겠어…. 현실을 받아들이자.’
이때 바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걱정이 생각인 줄 알았는데, 걱정은 자신을 사로잡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생각을 하게 되니 구체적인 방안이 떠올랐고 그 결과 2,000만 달러 손해를 단지 2만 달러 손해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걱정의 가장 큰 문제는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좋은 생각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생각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J.K. 롤링은 1990년 맨체스터에서 런던까지 연착된 기차 여행을 하는 동안 해리포터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그녀는 기차를 타는 동안 마법 학교에 다니는 어린 소년의 아이디어가 “완벽히 형성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이혼하고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살길이 막막하였습니다.
그런데 연착된 기차가 무엇입니까? 느리더라도 언젠가는 이 자리를 떠나 다른 곳에 저절로 다다르게 만드는 도구입니다.
기차는 자신의 인생도 그럴 수 있다는 차분한 마음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녀에게 말씀하시는 지혜를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목욕을 하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욕조에 들어가자 물의 수위가 높아지는 것을 알아차렸고, 왕의 왕관이 얼마나 많은 물을 대체했는지 측정함으로써 왕의 왕관이 순금으로 만들어졌는지 판단하는 방법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는 "유레카!"를 외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시라쿠사의 거리를 달렸습니다.
왕의 왕관이 순금인지 아닌지 알아내지 못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때 욕조에 들어가 한가하게 목욕하는 게 정상일까요? 그렇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내 힘으로 하려는 마음을 포기했을 때 마음에 평화가 오고 깨달음이 옵니다.
걱정은 그 생각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담장과 같습니다.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 ‘예스터데이’(Yesterday)의 멜로디가 꿈에서 떠올랐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완벽히 형성된 곡조로 잠에서 깨어났고 처음에는 그것이 너무 완벽해 보였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표절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잠이란 무엇입니까? 세상 걱정을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걱정이 많으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잠을 자고 나면 새로운 영감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좋은 생각은 내 노력에서 오지 않고 외부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제임스 와트는 증기 엔진의 기존 설계에서 얼마나 많은 증기가 낭비되는지 알아차린 후 증기 엔진을 개선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실패에도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공원을 거닐다가 별도의 콘덴서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는데, 이는 증기 기관의 효율을 획기적으로 향상하게 하였고 산업 혁명을 촉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공원을 걸으며 평화를 찾는 것도 얼마나 좋을까요?
뉴턴은 연구할 때가 아닌 사과를 바라볼 때 중력의 법칙을 깨닫게 됩니다.
나에게서 좋은 게 나온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좋은 생각은 내 힘으로 무언가 생각하려 할 때
달아납니다.
그러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듣는 마음을 가집시다.
이것이 마르타로부터 마리아로의 전환이고 기도의 꼭 필요한 유일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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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8.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 말씀을 잘 듣고 실행하는 것이 잘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38-42)”
1)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르타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마르타만 바라보다가, 또는 마르타가 한 일만
바라보다가 예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먹이려고 오신 분, 목자이신 분입니다.
목자가 양들을 먹입니다.
양들이 목자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10).”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ㄴ-38)”
<목자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아먹는 양들이, 즉 ‘말씀’이든지 ‘성체’든지 간에,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아먹는 사람들이 ‘착한 양들’이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고, 주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2) 마르타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이고, 예수님께 드릴 음식을 준비하려고 애쓴 일은 훌륭한 일입니다.
마르타는 순수하게, 아무런 사심 없이, 예수님을 좀 더 잘 섬기려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분명히 그랬는데, 나중에는 ‘일’만 생각하느라고 예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라는 말은,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분주하였다.’ 라는 말은, 마르타의 마음속에 ‘일’만 있고 예수님은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라는 말도, 마음속에 ‘일’만 있고 예수님은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마리아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 말은, 도와주지 않는 동생과 모든 것을 ‘보고만 계시는’ 주님을 함께 비난하는 말입니다.
<마르타는 자기가 모셔 들이고 잘 접대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바로 그 주님을 비난하는 ‘이상한 상황’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3)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라는 말씀에서, ‘많은 일’은 ‘너무 많은 음식’을 뜻할 수도 있고, ‘물질적인 일’이나 ‘다른 사람들의 일’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라는 말씀에서, ‘필요한 것’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가리키고, 이 말은 예수님, 또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뜻합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당신이 주시는 것을 잘 받는 것이 곧 당신을 잘 섬기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라는 말씀은, 마리아는 주님을 잘 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주시는 구원의 은총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것, 영원한 것, 가장 고귀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중단하고 너도 여기 와서 내 말을 들어라.” 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그 일을 하긴 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도 아니고, 먼저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4) 주님께 무엇인가를 잘 바쳐야만 주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임금이 나탄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나는 향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천막에 머무르고 있소.’(2사무 7,2)”
다윗은 성전을 지어서 바치는 것이 하느님을 잘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가 성전을 짓는 것을 막으셨습니다(2사무 7,4-17).
하느님께서 바라신 것은 성전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충실한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은 나중에 솔로몬이 짓게 되는데, 솔로몬은 성전 봉헌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1열왕 8,27)”
하느님을 위해서 성전을 지은 것이 아니라, 인간들을 위해서 지었다는 것이 솔로몬의 기도입니다(1열왕 8,28-30).
주님께 무엇인가를 잘 바치는 것이 주님을 잘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들은 대로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주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1열왕 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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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8.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0,38-42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많은 분들이 오늘 복음을 이해할 때, ‘기도생활’을 대표하는 마리아의 입장을 옹호하는 이와 ‘봉사생활’을 대표하는 마르타를 옹호하는 이로 갈라져 누가 더 교회에 필요하고 유익한 존재인지,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더 어여삐 보시는지를 논쟁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사실 오늘 복음은 마르타와 마리아를 비교해서 누가 더 잘했는지 우위를 정하기 위함도, 둘 중 누구의 입장이 옳은지 그 시비를 가리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주님과 나 사이의 관계에 집중하는게 좋지요. 주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써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 우선적으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 실천해야 하는 겁니다.
누구나 신앙생활 하는 목적은 똑같습니다. 죄에서 구원받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각자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탈렌트’가 다르기에, 그 목적지까지 가는 방식도 서로 다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신앙생활 하는 방식을 두고 ‘감놔라 배놔라’ 해서도 안되고, 자신이 신앙생활 하는 방식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착각하여 교만해져서도 안되겠지요. 마르타에게는 마르타의 방식이 있고, 마리아에게는 마리아의 방식이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오직 나만을 위해 준비해주신 특별한 길이 무엇인지 잘 식별하고 받아들여 따르면서 그 안에서 신앙생활의 의미와 보람을 찾으면 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을 하는데에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할지를 스스로 선택했다면 그것 자체에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선택한 소명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데를 기웃거리며 남과 나를 비교하기 시작하면 마음 속에 불평 불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써 자존감이 떨어지고 스스로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여 우울해질 뿐입니다. 또한 신앙생활이 가져오는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주님과의 관계에만, 그분 사랑 안에 머무르는 데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내 의지로 시작하는 것이지만,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이끄시는대로 따라가는 것이기에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 또한 주님의 뜻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 발치에 앉아 그분 말씀을 듣기로 한 마리아의 선택만 좋은 것이고, 주님의 수발을 들기로 한 마르타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라는 것이지요. 그것을 결정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 뿐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 자신이 감정적으로 느끼는 ‘좋고 싫음’과 주님께서 결정하시는 ‘좋고 나쁨’을 헷갈립니다. 주관적으로 ‘싫다’고 여겨지는건 자신에게 ‘나쁜 것’으로 여겨 회피하려 드는 겁니다. 하지만 그러다보면 주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해주신 좋은 것들을 놓치게 되지요. 그러니 내 마음에 드는 것보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것을, 내 육체적인 기호에 맞는 것보다 하느님 뜻에 맞는 영적인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에게 참으로 좋은 몫을 택하여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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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8.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
예수님께서 모처럼 마르타와 마리아가 사는 마을에 들렸다가
그 자매의 집을 방문하십니다.
마르타는 주님식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한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꼼짝하지 않고 그 말씀에 취해 있습니다.
마르타는 솔직하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마르타의 눈으로 보면 당연히 동생 마르타는 야속하기도 하고 밉쌀스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신의 속 마음을 모르시는 듯 한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1-42절)
교회에서 수도자들에게 ‘관상과 활동’은 기본적으로 바탕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관상은 기도도 들어가지만 주님의 복음을 묵상하고 또 복음의 세계를
드나드는 경지까지도 말하는 것입니다.
수도자에게 많이 알려졌지만 일반적으로 봉쇄수도원에서 필수로 듣는 것이 관상이지요.
물론 봉쇄수도원에서는 기도와 관상과 함께 노동의 시간도 있지요.
그런데 노동을 하면서 동시에 관상은 어렵기 때문에 하루 일과 중에 관상의
시간과 노동의 시간을 따로 정해서 일정대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관상과 활동’ 어떻게 보면 서로 상반되는 것 같습니다.
그 관계는 마치 한편에서는 비가 오고 한편에서는 햇볕이 내려 쬐이듯
서로 극과 극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서는 아름다운 무지개가 서지요. 교회에서는 둘 다
소중한 보석으로 여깁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먼저 ‘기도하고 일하라!’라고 가르칩니다. 모든 것은 기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바로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교회는 ‘마리아’와 ‘마르타’가 있습니다.
마르타도 사실은 주님을 위해서 봉사했거든요.
마리아만 있다면 장은 누가보고 식사준비는 누가 하겠어요?
그러나 주님께서 식사대접이나 인간관계보다는 세상 구원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우려야 하겠습니다.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당신의 권한을 주시는 것은 구원의 일에
함께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마르타의 일도 주님을 대접하는 데에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당신의 말씀에 귀기우리는 마리아의 모습이
구원의 모습임을 일러 주시는 것입니다.
다 같이 주님을 위하는 일이지만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뜻을 읽을 수
있어야 하겠지요.
일에 가리어 주님의 뜻을 읽을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일에 주저앉고
주님의 뜻에서 멀러 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 가지 일에 가리어 허덕이는
우리 자신도 주님께서 걱정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도 주시고 당신 부활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천진한 어린 아이가 부모를 바라보며 믿고 따르듯
우리도 주님만 바라보면서 매일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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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8.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이웃사랑에 우선하는 말씀의 경청
현대인들은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의 홍수 속에 살아갑니다. 그래서 일중독, 활동주의 덫에 걸려 쉼 없이 움직입니다. 그러다 일이 없으면 허전해 하고 조급해하며, 하느님 안에서 숨 쉬며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며 산다고 하면서도 때로는 그것은 명목뿐이고 ‘정신없이’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일에 몰두하다 하느님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착한 사마리아인을 이웃사랑의 본보기로 제시한데(10,30-37) 이어 여기서는 마리아를 하느님 사랑의 모범으로 묘사하면서, 주님 앞에서 더 중요하고 ‘필요한 한 가지’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마르타는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하던 음식 준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10,39) 곧 그분의 제자로서 당시 남자들에게만 허용되던 말씀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교 관습과 사회적 차별을 뛰어넘어 여자를 가르치셨습니다.
마르타는 자기 집을 찾으신 예수님을 환대하려고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했습니다(10,40). 그러다보니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하였습니다. 이와는 달리 그 와중에서도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10,39).
예수님께서는 이웃사랑도 중요하지만 하느님 사랑이 그보다 우선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인간적인 모든 일, 심지어 이웃사랑보다 더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필요한 한 가지가 바로 하느님 사랑을 위한 말씀의 경청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권고합니다. “현세의 모든 것들은 기도와 헌신의 정신에 이바지해야 합니다.”(인준받은 수도규칙 5,2) 그렇습니다. 우리의 말과 생각과 행위 그 어떤 것도 하느님과 무관하게 이루어지거나 주님의 영의 이끄심을 따르지 않는다면 모두가 헛되고 헛된 일이 될 것입니다.
모든 일과 활동은 하느님 사랑으로 하느님을 위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무엇보다도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말씀 안에서 주님의 사랑에 젖어들어야 합니다. 심지어 이웃사랑이나 자선행위, 봉사활동이라도 하느님 사랑에 앞설 수는 없습니다. 말씀의 경청을 통한 하느님 사랑이라는 이 우선적이고 근본적인 영성생활의 방향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바쁜 중에도 멈추어 말씀을 듣고 되새기는 습관을 들여야 할 것입니다. 정신없이 활동하여 대단한 성과를 이루고 엄청난 재산을 얻고 명예와 권력을 얻는다 해도 하느님을 잊어버린 채 자기 목숨도 구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자기 욕구 충족에 몰두하거나 여러 신심단체 활동을 하고 수도생활을 하면서도 일의 덫에 걸려 정작 해야 할 하느님과의 만남을 소홀히 하는 것이야말로 스스로에게 '영혼의 암 선고'를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도 필요한 한 가지에 집중하여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의 사람이 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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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8.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개인 소명의 고유성을 이야기하십니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루카 10,39)
이 유명한 복음 내용을 '활동'에 대한 '관상'의 우위성 차원에서만 바라보면 마르타 성녀가 평가절하되어 버리는 당혹스런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당신이 각별히 사랑하는 두 사람을 차별하거나 경쟁 구도로 세우실 분이 아니지요. 누군가를 들어높여 다른 이를 낮추실 리도 없습니다. 이 일화를 통해 들려주고 싶으신 예수님 마음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였다."(루카 10,38)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셔 들인 여인입니다. 베타니아의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세 남매와 예수님 사이의 애틋한 우정이 바로 마르타의 환대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마르타는 적극적이고 부지런하며 헌신적이고 용기 있는 멋진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 10, 39)
손님 대접에 분주한 마르타에 비해 마리아는 고요히 예수님 앞에서 그분을 응시합니다. 말씀하시는 분 앞에서 듣는 것. 이 또한 최대의 접대 행위입니다. 이는 주인이 해야 할 일 중에 하나지요. 객들을 자기들끼리 있게 두고 주인은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는 것만큼 무례한 일도 없으니까요.
세상 모든 좋은 일이 다 그렇듯이, 마르타의 입장이나 마리아의 입장이나 함정은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 마르타가 삐끗한 지점에 머무릅니다. 사실 손님을 접대하다보면 좀 더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커집니다. 손님에 대한 최대의 존경과 예의를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좋은 지향이 내면의 건강하지 못한 욕구, 이를테면 사랑받고 인정받으려는 욕구와 엉켜버리면 적정선을 넘기기 쉽습니다. 만족을 모르게 되어 버리지요. 그러면 시간이 더 필요하고 일손이 더 필요하며 물질도 더 필요합니다. 내 안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더, 더 원하게 됩니다. 더 잘 하려고 그러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저 깊은 곳에서 더 사랑받고 더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활활 불타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과도하고 방만한 열정에는 얼마간 자신의 책임이 따릅니다.
마르타는 "당연히" 마리아의 노동력을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접대를 위해서는 마리아의 손이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그건 마르타의 만족을 위한 것이지 예수님의 바람은 아니었지요.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2)
예수님의 이 말씀에 마르타가 서운해졌을 수는 있지만, 예수님의 의도는 그렇지 않으셨을 겁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 마리아의 경청을 콕 짚어서 하시는 말씀이라기보다, 누구나 자기의 고유한 소명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한 가지씩 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그러니 마르타도 본인에게 필요한 것 한 가지에 본인이 몰두하면 되는 것이지요.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는 말씀 역시, "너도 그렇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예수님께는 마리아의 소명이 귀한 것처럼 마르타의 소명도 귀합니다. 훗날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기적으로 예수님을 증거한 라자로의 소명 또한 귀하고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마리아가 자기 소명을 빼앗기지 않는 것처럼, 마르타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각자에게 가장 잘 맞는 모습으로 창조된 만큼, 우리는 자기 존재의 본질, 정수를 빼앗길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마르타가 자기 자신의 욕구에 집중하기보다 예수님께 필요한 것을 바라본다면 과도한 열기가 제 온도를 찾아 마르타 다움이 질서를 잡게 될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소명에 대해 솔직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사도는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던 자신이, 본래 창조 때부터 "새로운 길"이 이방인에게 전파되도록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소명이 제 궤도를 찾기까지 그는 사도들을 찾아가거나 해서 성급히 인정받으려 하지 않고, 여러 해 동안 침묵과 고독 중에 숙고와 성찰의 시간을 보냅니다. 바오로에게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했을 뿐, 당장 제자단에 합류하여 제도권의 확인을 받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그들은 나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갈라 1,24)
바오로의 과거를 아는 이들이 바오로의 회심 소문을 듣고 그를 조롱하거나 소외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섭리를 미리 준비하신 하느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사도로써 이만한 열매가 또 있을까 싶도록 보람찬 결실이지요.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난 체험 이후, 이해할 수 없이 펼쳐지는 길 위에 자신을 온전히 내던졌습니다. 인간적인 계획이나 수를 내려놓고, 인내하며 머물렀지요. 그리고 주님께서 자신의 소명에 빛과 색과 온도를 입혀 쓰실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만의 고유한 소명이 이렇게 완성되어 가게 되지요.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교회의 보편 소명을 받아 살아갑니다. 거기에 더하여 우리 각자에게 주님께서 창조 때부터 심어 주신 고유한 개인 소명을 꽃피우고 완성해가는 중입니다. 마르타에게는 마르타만의 아름다움이, 마리아에게는 마리아만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벗님 여러분 각자에게도 마찬가지지요.
사랑하는 벗님! 각자 주님께서 주신 고유한 소명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주시고, 우리가 선택한 좋은 몫을 주님께 올라가는 동앗줄이라 여기면, 단단히 부여잡고 절대 빼앗기지 않겠지요. 우리 모두는 주님과 하나 되는 데 "필요한 한 가지"를 저마다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좋은 몫을 택하셨으니, 벗님은 참으로 복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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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8.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하나님이 귀 기울이시는 기도의 삶
<2024.10.8>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20:1~11절)
❝하나님이 귀 기울이시는 기도의 삶❞
❚ 불가능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간절하고, 진실한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 우리의 기도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 눈물의 기도는 응답을 바라는 길입니다(1~3절).
앗수르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유다는 안전해졌는데, 히스기야는 죽을병에 걸려 또 다른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사야가 그에게 찾아와 ‘이제 죽을 것이다. 그러니 네 집안 일을 정리하여라. 너는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1절,쉬운성경)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히스기야는 낯을 벽으로 향하고 심히 통곡하며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3절).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볍게 보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 51:17)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을병에 걸린 채,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 히스기야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생에서 고난을 만나게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때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믿음과 기도라는 것입니다. 일이 잘되어 갈 때에는 그로 인해 하나님의 복을 받은 듯이 느끼며 하나님을 위해 충성합니다. 그런데 어려움을 만날 때,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위기를 겪게 되면 하나님께 버림받은 느낌으로 절망에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하나님을 가까이하거나 멀리한다면 이는 참된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슬픔과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 상한 심령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눈물의 기도는 그러므로 응답으로 나아가는 열린 문이 되는 것입니다.
➲ 진실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4~7절).
하나님은 눈물로 기도하는 히스기야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병을 치유해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말씀 하시면서 “...너를 낫게...”하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에 올가겠고...’라는 표현은 병에서 완쾌되어 제사를 드릴 수 있을 정도로 정결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4~5절).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병을 치유해 주시고 그의 수명을 15년간 연장해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아가 예루살렘을 앗수르 왕에게서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도 주십니다(6절). 이사야는 히스기야가 낫게 되리라는 예언의 말씀을 전한 뒤에 무화과 반죽을 히스기야의 상처에 놓으니 병에서 낫게 되었습니다(7절). ‘다윗’(5,6절)이라는 이름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해 주시는 이유를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라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볼 때, 하나님은 다윗에게 하신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구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또 마음을 쏟아 놓을 줄 아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들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가장 절망적이고, 힘든 상황에서도 우리가 기도를 놓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세월이 지나도 약속을 잊지 않으시는 신실하시기 때문이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가 자신의 행한 일을 붙들고 기도했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면 우리 인생에 절대적인 절망의 순간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회복시키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 누구에게도 말 못할 고민이 있다면,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진실한 기도는 그러므로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 간절한 기도는 기적을 일으켜 주십니다(8~11절).
히스기야는 이사야에게 병이 나아 삼 일 만에 성전에 올라갈 수 있다는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이는 이사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믿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반적인 자연 법칙을 거슬러 해 그림자가 십도 물러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이사야 선지자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 왕이 만들어 놓은 해시계의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사실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절망 중에 기도한 자의 간구를 하나님이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환난 날에 드리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이 다가올 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가장 기도가 필요한 순간에 당면한 환경에 절망하여 기도의 능력과 기도의 줄을 놓쳐 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특별히 어려움 중에 드리는 통곡의 기도를 가볍이 여기지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높은 장애물을 만났다면, 우리의 간구를 귀 기울여 들으시는 하나님께 간절함을 가지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간절함 그리고 우리의 눈물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놀라운 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에 갑작스레 위기가 닥칠 때 당황해 하지 말고,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 앞으로 겸손히 나아가 기도할 뿐 아니라 상한 마음으로 간구하는 우리의 기도를 소중히 여겨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심정을 쏟아 놓는 기도의 삶이 될 수 있기를(왕하 20:1~11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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