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80
6월6일[연중 제9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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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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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TwdsW5SxWPw
[서울대교구 이원빈 예로니모(노원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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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저 감지덕지하며 그분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릴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원리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원리는 바로 사랑의 계명이요 사랑의 법규입니다. 요약하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조화와 균형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 28-31)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진정한 의미의 사랑, 참된 사랑의 모습이 어떤 것일까 생각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 사랑은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사랑, 상호 성장하는 사랑, 통합되고 완성되는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우리를 내신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가장 우선적으로 실천해야 할 사랑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떤 대상에 앞서 하느님께 우선권을 두고, 가장 먼저 그분께 사랑을 드리고 흠숭과 찬미를 드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당신의 모상인 동료 인간에게도 향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하느님 사랑을 기반으로 우리의 사랑은 이웃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 부족해 보이는 동료 인간 안에 하느님께서 굳건히 현존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 그 외에도 하나가 추가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을 향한 사랑과 존중, 배려와 호의적인 시선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느님 사랑, 이웃사랑으로 충만한데, 자신을 향한 사랑은 조금도 없습니다. 자신을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인으로 여깁니다. 아무런 쓸모없는 무가치한 존재로 업신여깁니다. 겸손의 덕과는 거리가 먼 지나친 자기 비하나 자기 학대 역시 금물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배려하거나 존중하지도 않고, 내가 나에게 아주 박한 점수를 매기는데, 이 세상 누가 나를 사랑하고 배려하고 존중하겠습니까? 좋은 점수를 주겠습니까?
비록 우리가 허물 투성이요 큰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께서는 부단히 되풀이 되는 고백성사와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를 당신께서 베푸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럴 자격을 조금도 갖추지 않은 부당한 우리이지만,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주시고, 우리 안에 머무시고, 우리 안에서 호흡하십니다. 우리는 또 다른 살아있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부족한 우리가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께서 건네시는 거룩하고 품위 있는 의복으로 갈아입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그분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은혜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감지덕지하며 그분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릴 뿐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2 티모테오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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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Fs8dBL0wP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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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죽음이 두려운 거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수많은 계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하십니다. 문제는 왜 그들이 사랑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죽음을 전제합니다. 죽기 싫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기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대신 죽겠다고 자청한 막시킬리아노 콜베 신부님이나 아무도 들어가기를 원치 않았던 나환자들이 모여 사는 몰로카이 섬에 스스로 찾아 들어갔던 다미아노 신부님, 아니면 가난한 이들의 인권을 위해 저항하다 미사 때 총 맞아 순교하신 오스카 로메로 주교님 등은 사랑이 곧 목숨을 내어 놓는 것임을 잘 보여줍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잠수함의 어뢰를 당했을 때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4명의 군목(유대교, 가톨릭, 개신교)이 USAT Dorchester에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배가 침몰할 때 군인들이 구명정에 탑승하도록 도왔고, 구명조끼가 떨어지자 각자의 구명조끼를 포기했습니다. 네 명의 군목—조지 L. 폭스, 알렉산더 D. 구드, 클라크 V. 폴링, 존 P. 워싱턴—은 팔짱을 끼고 함께 기도한 후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내려갔습니다.
사랑은 목숨을 내어 놓는 일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희망이 없다면 진정한 사랑이 가능할까요? 위 네 명의 군목은 물론이고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친 모든 이들은 부활의 희망을 품지 않았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거짓입니다. 남편의 더 큰 사랑을 기대하지 않고 자녀에게 다가가는 어머니는 분명 자녀를 자기 만족을 위해 이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원리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하면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생존부터 걱정하면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라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걸까요? 그냥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거부할 뿐입니다. 개신교의 박효진 장로는 교도관을 하면서 ‘서른 명’에 가까운 사형수들이 사형 집행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모습은 극명하게 다르다고 합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은 아무리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하였다가도 목숨 줄 앞에 놓이게 되면 오줌을 지리거나 발버둥을 치기도 합니다. 가리옷 유다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을까요? 죽음이 두려운 이들이 자살합니다. 죽음을 온전히 맞이할 자신이 없어서, 그리고 심판이 두려워 그냥 그렇게 고통 받고 사는 게 싫어서 자살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떤 리서치에 따르면(Pew Research Center) 대부분 사회에서 가족은 삶 의미의 가장 중요한 원천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물질적 복지가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한국은 왜 이렇게 진정한 가치, 곧 진정한 계명을 잊게 된 걸까요? 누구도 자기를 장님으로 만드는 욕망으로 나아가는 이들을 바로잡아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이전의 사두가이들은 지극한 현세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속의 것들을 가치 있는 것으로 추구하며 영원한 것들의 가치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우리가 어떤 믿음으로 이러한 잘못한 시각을 바로잡을 수 있는지 가르쳐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우리의 복음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죽어도 산다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니시면 우리는 이 믿음을 가질 수 없고 그러면 누구도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저것 잴 필요 없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목숨을 바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사람이 죽음에 이르고 이것이 삶의 끝이 아니라고 믿게 될 때는 사람이 180도 바뀐다고 합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은 우리 삶을 완전히 변화 시킵니다. 두려움을 버리고 완전한 희망으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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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원래는 좋은 뜻인데 그 의미가 퇴색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진상(珍賞)입니다. '진상'의 유력한 어원 중 하나는 바로 '왕이나 고위층에게 진귀한 물건이나 지방의 토산품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새 쓰이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진상'의 어원으로 꼽힌 이유는 진상이 가지는 폐단 때문이었습니다. 말로는 윗사람에 대한 존경심과 예우라고 하지만 먹고살기 빠듯한 서민들에게는 귀한 것을 마련하는 일 자체가 고역이었고, 구하기 힘든 것을 요구해 부담이 가중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진상이 지닌 폐단이 부각되면서 '허름하고 나쁜 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도 사용되었고, 현대에 와서 많이 쓰이는 '진상'은 그 부정적 의미를 차용하여 '못생기거나 못나고 꼴불견이라 할 수 있는 행위나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예전에 ‘땅콩회황’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땅콩은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있기에 봉지를 드리고 먹겠다고 하면 접시에 담아 드리는 것이 매뉴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진상 손님이 땅콩을 접시에 담아 주지 않고, 봉지로 주었다고 화를 내면서 비행기를 멈춰 세웠습니다. 그리고 승무원을 내리게 한 후에 비행기를 출발하도록 했습니다. 자신의 권력과 재력을 믿고, 힘이 약한 사람을 괴롭혔던 ‘진상’의 한 예입니다. 이런 진상의 이야기는 곧잘 언론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좋은 뜻인데 그 의미가 퇴색된 단어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리사이’입니다. 바리사이의 원래 의미는 ‘분리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바리사이는 죽은 이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바리사이는 율법과 계명을 충실하게 지켰습니다. 바리사이는 이정표와 같았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따르면 하느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바리사이는 특권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위선과 교만을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진상’ 행위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바리사이들의 하는 말은 지키고 따라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따르지 마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지고가야 할 짐을 남에게 맡겼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도 하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조문을 외우지만, 율법과 계명의 정신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릇의 겉만 닦고 속은 닦지 않는 것처럼, 바리사이는 겉은 화려하게 꾸미지만 속마음은 탐욕과 거짓으로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는 자신들의 얄팍한 지식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시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바쳐야 한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모든 바리사이가 진상은 아니었습니다. 바리사이 중에도 예수님을 스승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무덤에 모셨습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였습니다.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회심한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인으로서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성직자와 수도자가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직자와 수도자로서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진상 신자, 진상 성직자와 수도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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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28-34: 첫째가는 계명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28절)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두 가지 큰 계명을 들어 그것을 하나로 만들어 대답하신다. 먼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라는 유대교 교리의 진수와 신앙의 기초를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라는 말씀을 하시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유일한 증명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실행함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말로서가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겸손하게 섬김으로써 하느님의 위엄을 가장 잘 찬미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가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신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0절) “마음을 다하여”라는 표현은 조그마한 갈라짐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찮은 것에 사랑을 쏟아붓는다면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그 사랑이 그만큼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동정이라는 말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갈림 없는 사랑의 삶이라고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31절) 이웃 사랑은 최고의 덕이며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계명의 근본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이웃을 모른 체하지 않는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말씀하신 바를 기억하여 자비를 보여준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유일한 확증은 바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그들을 끊임없이 돌보는 일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율법 학자는 그 대답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덧붙여 말한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33절)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라고 축복해주셨다. 나는 어떻게 이 계명을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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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을 종합하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안다면, 이 두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인간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거의 본성과도 같아 이겨 낼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이를 사랑할 때도 그 사랑 안에는 언제나 자신을 향하는 사랑이 섞여 있습니다.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그 순간조차도 ‘너’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프랑수아 바리용 신부는 인간의 근원적인 자기애(自己愛)와, 그로 말미암아 순수하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원죄’로 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전부일 수 없게 하는 ‘자신을 향한 사랑’이 바로 원죄입니다.(『흔들리지 않는 신앙』, 47-48면 참조)
자기애를 이겨 내려면 끊임없이 하느님을 중심에 두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하느님과 이웃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거나 배제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중심에 두었을 때 그 누구도 결코 도구화되거나 소외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향하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첫 번째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번째 계명이 자연스럽게 실현됩니다.
이러한 삶이 결국 자기 자신을 참되게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랑으로 창조되고 사랑으로 충만하여지는 인간은, 순수하고 참된 사랑을 할 때 본모습을 찾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참으로 사랑하고 잘 돌보려면 이기주의적인 자기애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시선을 찾아야 합니다. 자기애를 버리고 하느님을 향할 때,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의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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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랑받고 있음을 먼저 믿어야 하고, 깨달아야 한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2-33)
1)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라는 말씀과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라는 말씀은, “하느님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만일에 하느님이 아닌 것들도 사랑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재물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재물이든지 권력이든지 명예든지,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든지 간에, 하느님이 아닌 것들을 하느님처럼 떠받들거나, 하느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고,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2)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사랑에 대한 정의(定義)로 삼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섬기는 일, 또는 그렇게 섬기고 싶어 하는 마음.”
이 말씀을 간단하게 줄이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일, 또는 그렇게 바치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모범이 되는 사람은 ‘어떤 가난한 과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사실, 우리 주위에도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잘 드러나지 않아서 사람들이 모르는 경우도 있고, 당사자 자신도 그것을 모를 때가 많지만, 어떻든 복음서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는 현실 세계에서 만나기 어려운 굉장히 특이하고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마음먹는 일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는데, 누구든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충분히 실행할 수 있습니다.>
3) “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가?” 요한 사도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까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1요한 4,9-12)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갈망한다는 것을 우리보다 먼저 아시고, 우리가 그것을 청하기도 전에 먼저 그 사랑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즉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전부 다 우리에게(나에게) 주시면서, 우리를(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도 그렇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참 사랑은 참된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쁨을 사랑의 이유로 말씀하십니다.(요한 15,11)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길 때,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기쁨’과 ‘큰 행복을 얻게 됩니다. <누구나 그 체험을 할 수 있고, 또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4)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인데(1요한 4,20), ‘이웃 사랑’의 경우에도, 이웃이 먼저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나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정말로 어렵다.” 라고만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는 그 어려운 일을 이미 나를 위해서, 나에게 실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모를 수도 있고, 알 수도 있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가족도 있고, 멀리 떨어져 있는 ‘모르는 사람’이 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그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닫는 일에서부터 사랑 실천이 시작됩니다. <자기가 사랑받고 있음을 모르거나 부정하면서 마음속에 미움과 원한만 가득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마음에서 사랑을 밀어내는 사람이고, 사랑을 밀어냄으로써 더 깊은 미움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거나, 알고 있기만 하면 됩니다. 어렵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더욱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갓난아기와 그 아기의 부모 사이에 오고가는 사랑을 보면, 그 사랑은 사랑에 관한 어떤 이론 같은 것은 필요가 없는, 이기심이나 자기애 같은 말들을 생각하거나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정말로 사랑 말고는 다른 말이 필요 없는, 아주 생생하게 살아 있는 참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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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수도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왜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가? 그것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가는 계명인가? 도대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즉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요, 숭배하고 우러르는 것이요, 봉사하는 것이다.
첫째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다. 왜 하느님을 찬미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나를 창조하실 때 "우리를 닮은 인간을 만들자"하시고 나를 만드셨다. 그러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나의 존재는 "너는 나의 귀염둥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사랑이다."라고 하실만큼 사랑스런 존재이다.
하느님은 이토록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나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이토록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목숨까지 바치신 하느님을 찬미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도리이다. "숨 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미하라"(시편 150,6)고 노래하였듯이 숨 쉬는 모든 것들이 해야 하는 것은 주님을 찬미하는 것이다.
둘째,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숭배하는 것이다. 우러르는 것이다. 왜 하느님을 숭배하고 우러러야 하는가? 하느님이 하신 일이 놀라워서이다. 그분이 하신 업적이 너무나 놀라워서이다.
"야훼님 기리리라, 이 마음 다하여, 의인들 모임에서 큰 모임에서. 야훼님 하신 일들 하도 크시어, 그 좋아하는 이들 익혀야 하리로다. 두렵고 눈부셔라 당신의 일들, 그 의로우심은 영원하도다."(시편 110,1-3)
"주님을 찬미하라, 그의 성소 안에서 우람한 그의 하늘에서 주님을 찬미하라. 그 하신 일 놀라워라 주님을 찬미하라, 그지없이 크오셔라, 주님을 찬미하라 나팔소리 우렁차게 주님을 찬미하라."(시편 150 1-3) 즉 하느님을 찬미한다는 것은 하느님이 나를 위해 이루워 놓으신 위대하신 업적을 우러르며 경배드리는 것이다.
다윗은 "하느님 내 주시여,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 하늘 위 높다랗게 엄위를 떨치셨나이다 원수들 무색케 하시고자, 불신자 복수자들 꺾으시고자 어린이 젖먹이들 그 입에서 마저, 어엿한 찬송을 마련하셨나이다. 우러러 당신 손가락이 만드신 저 하늘하며 굳건히 이룩하신 달과 별들을 보나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와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하느님 내 주시여,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시편 8)라고 찬미하였다.
그러나 정말 하느님의 위대하신 업적은 그리고 놀라우신 일은 나를 구원하시는 일이다. 하느님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다. 그 모든 일은 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나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것, 이것보다 더 놀라우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창조주께서 하찮은 피조물인 나의 구원을 위해 당신 친히 목숨을 바치셨다는 것이야말로 엎드려 경배드리고 우러러 뵈올 일이다.
마리아는 이러한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너무나 잘 알고 감탄하여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니 그분께서 당신 여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라고 찬미의 노래를 불렀다. 하느님의 놀라우신 일을 알게 되면 하느님을 경배드리지 않을 수 없고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요한 4,22-23)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셋째,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봉사한다는 것이다. 봉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봉사하다"라는 말은 비위를 맞힌다는 것이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한다는 것이다. 즉 상대방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종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께 봉사한다는 것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요, 하느님이 하라는 것을 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종으로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
즉 종으로서 주인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주인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봉사는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이 없는 봉사는 섬기는 것이 아니라 노예로서 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종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을 섬기기 위해 오셨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즉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섬겨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은 항상 나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늘 내가 행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나를 행복에로 인도해주신다. 따라서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만 가면 나는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분,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 나보다 더 내가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시는 분,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분, 나보다 더 나를 위해서 희생하시는 분, 그분이 내가 믿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을 섬기지 않고 누구를 섬기겠는가? 그분의 뜻을 따라 가지 않고 누구를 따라 가겠는가? 오로지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니 내가 해야하는 것은 그분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요, 그분의 뜻에 나의 뜻을 맞추는 것이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이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고 누구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인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다.
즉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나면 나에게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결국 산다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즉,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뿐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고 하느님을 사랑하다가 죽는 것, 그것이 인생이요, 행복이다. 그것이 신앙생활이요, 삶의 목적이다.
이렇게 내가 나의 마음과 정신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자연스럽게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웃도 결국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이며 그 이웃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기 때문이다.
내 이웃이 곧 나의 양이 아니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잘 돌보아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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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맹자』에 알묘조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싹을 뽑아 올려, 자라는 것을 돕는다.’라는 뜻인데 이와 관련하여 송나라의 어느 어리석은 농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심은 곡식의 싹이 더디게 자라자 이것이 걱정되어 싹을 잡아당겼습니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서 아들에게 자랑을 합니다. “오늘 내가 큰일을 했지. 싹이 잘 자라도록 도와주었단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이 밭에 나가 보니 뿌리 뽑힌 싹들이 햇볕에 말라 죽어 있었습니다. 나무와 꽃을 하루아침에 다 자라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 농부는 몰랐던 것입니다.
생명이 담겨 있지 않은 공산품이야 정해진 시간 안에 완성품을 만들 수 있지만, 생명이 담겨 있는 것은 작은 데서부터 시작하여 세월과 함께 자라도록 인내해야 하는 것이 이치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생명이기에 누군가를 향한 사랑은 기계로 뚝딱 만들어지는 완제품처럼 금세 완성될 수 없습니다.
배 속의 아이가 자라는 동안 산모가 고통을 겪듯이, 논밭에 뿌린 씨가 자라나 열매를 맺기까지 농부의 수고가 필요하듯이, 하느님을 향한 사랑도, 이웃을 향한 사랑도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인내와 좌절, 땀과 눈물이 녹아 들어간 세월이 반드시 필요한 법입니다.
‘나’의 사랑이 작고 미약하다고 쉽게 좌절하지 맙시다. 부족한 사랑을 일부러 키운다고 무리하여 알묘조장의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맙시다. 그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열매 맺기를 희망하며 세월과 함께 우리의 사랑을 잘 가꾸어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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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12,12,28ㄱㄷ-34)
오늘 복음의 율법 학자는 요즘 사람들이 자주 언급하는 ‘답장너 loaded question'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아는 것처럼 현문현답賢問賢答의 전형적인 실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예전 학창 시절을 떠오르면 부끄러움이 많은 학생이었기에, 선뜻 질문을 던지지 못했습니다. 물론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모르는 것, 혹 불확실한 것을 명백하게 알고 싶은 마음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렇습니다. 좋은 질문은 좋은 대답을 얻게 될 것이고, 이는 곧 어둠에서 빛으로 향하는 인생의 과정입니다. 일찍이 ’테야르 드 샤르댕‘은 생명에게는 어둠 속을 더듬어 가면서 가능한 모든 길을 찾아보려는 방향성이 있으며, 이것이 진화를 부채질한다, 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에서의 어둠은 빛의 부재뿐만 아니라 모름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어둠은 불가에서 이야기하는 무명無明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빛을 찾아 열심히 더듬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모르고 있으며 어디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아무튼 율법 학자는 예수님과 사두가이 사이의 토론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가 열심히 들은 까닭은 바로 그의 내적 호기심의 발로이며, 무려 613개 조항의 계명 가운데 도대체 으뜸가는 계명은 어떤 계명일까, 하고 물어왔기에, 이 토론을 지켜보면서 이분이시라면 나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했나 봅니다. 그래서 그는 주저하지 않고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12,28)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 율법 학자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이 갖고 있던 오래고 묵은 질문이었지만, 아무도 감히 질문하지 못한 것은 저처럼 부끄러움이 많거나, 호기심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이 율법 학자 때문에 우리가 참으로 알고 싶었던 으뜸 계명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질문을 받고서 예수님은 비로소, 구약과 신약을 집약하고 요약해서 단 두 가지로(=사랑의 이중 계명) 총괄합니다. 즉,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12,30.31) 하느님 사랑이 첫째이며 이웃 사랑이 둘째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두 사랑은, 특별히 마태오 25장의 최후 심판에서 잘 드러나듯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발로라고 밝힘에서 그 절정에 이릅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첫째와 둘째 계명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라고 전제하고서 계명을 말씀하셨고, 이 가르침을 듣고 난 다음에 율법 학자 역시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12,32)라는 표현에 주목하고, 이 표현의 의미를 새겨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깨닫지 못하고서는 '뭣이 중헌디, 뭣이 중하냐고!'라는 표현처럼 본말이 전도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순서와 가치 서열을 파악하기 이전에, 그리스도인 존재의 실천 원리로서 계명을 논하기 이전에, 이 계명의 기원과 왜 이 계명을 소중히 여기고 실천해야 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와 기원은 바로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며, 한 분뿐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 모두 다 그분의 자녀이고 형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음과 목숨, 정신과 힘을 다해 이를 깨우쳐 깨달을 때 그분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우리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이론이 아닌 실재이며, 계명이 아닌 존재 이유이고 보람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율법 학자가 이런 대답을 하기 이전부터 그렇게 노력하면서 살아 온 모습을 꿰뚫어 보시고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12, 34) 하고 칭찬과 함께 그런 삶을 충실히 살아가도록 독려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 슬기롭게 대답한 율법 학자처럼 슬기롭게 대답할 뿐만 아니라 실천하면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주님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듣는 삶을 충실히 살아가도록 합시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그 빛으로, 그 진리로 오늘 이끌어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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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분이 갑작스럽게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큰 수술을 마치고 회복 단계에 있는데, 이분의 소식을 들은 몇몇 지인들이 찾아온 것입니다. 반가웠지만 그냥 빨리 집에 가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위로를 해준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지만, 자기를 위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오히려 그들을 응대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문안 오겠다는 분에게 오지 말라면서 나중에 다 낫고 밖에서 보자고 말했습니다. ‘이제 좀 괜찮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찾아주지 않으니 이상하게 외롭고 사람들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더 힘들어졌습니다.
사실 병문안 자체, 즉 사람과의 만남만으로도 어렵고 힘들 때 분명히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만 봐도 우리는 함께 사는 공동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누군가 때문에 죽을 것 같다고도 말하지만, 그 누군가 때문에 살기도 하는 우리입니다. 하지만 점점 이 사회는 외로워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고독사, 즉 주위에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죽는 사람이 한 해에 4만 명 가까이 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고독사 역시 2023년 한 해 동안 3,000명 넘는다고 하더군요. 우리 역시 외로움이 만연한 사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긴 혼밥, 혼술 등의 용어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쓰이고 있지 않습니까?
함께하기 위해서는 나의 불편함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만이 누군가 함께할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완전히 자신을 낮추셨기에 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 누구와도 함께할 수 있을 정도로 낮추셨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높이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배격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높은 자리에 앉으려 했기에 함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위해, 오늘 복음을 통해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율법 학자 한 사람이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 모든 계명의 정신을 요약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는 사람만이 첫째가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이런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를 짓누르고 지배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으로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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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은 능력입니다>
식물인간이 되어 혼수상태로 있던 사람이 열흘 만에, 어떤 사람은 2년 만에, 어떤 사람은 무려 28년 만에 의식을 회복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변을 보면 하나같이 누군가가 지극한 정성으로 그를 돌봤다는 사실입니다. 의식은 없지만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지극한 사랑을 쏟았던 사람들은 결국 그 사랑의 헌신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무한한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31)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외적으로 강제되는 의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하느님을 자발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인간관계의 기반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음과 목숨, 힘을 다한 존재 전체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구체적인 이웃사랑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똑바로 인식하고 바르게 사랑해야 합니다. 나 자신에게 너그럽고 시간을 내고 관심을 쏟으며 변명하고 행복한 생활을 바라는 것같이 이웃에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하는 그런 사랑을 해야 합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많았습니다. 무려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248개 조항은 명령, 365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계명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하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핵심 정신을 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모두를 내어 주셨습니다.
머리로 아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 아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그 앎이 온몸에 배어서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에 온전히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온몸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더 큰 사랑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 자체 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는 오늘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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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나의 사랑>
마르코 12,28ㄱㄷ-34 (가장 큰 계명)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하나의 사랑>
나를 빚으신 분을 사랑하니
나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니
나를 빚으신 분을 사랑하네
너를 보내신 분을 사랑하니
너를 사랑하고
너를 사랑하니
너를 보내신 분을 사랑하네
너와 나 이으시는 분을 사랑하니
너를 나처럼 사랑하고
너를 나처럼 사랑하니
너와 나 이으시는 분을 사랑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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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좋아하는 시 중에,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시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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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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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조용히 읽고 있으면 우리가 흔히 느끼는 외로움과 고독감이 비단 나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듭니다.
실제로 우리는 가족이 있음에도 친구와 이웃이 있음에도 문득문득 인간적인 고독감 혹은 외로움에 잠기곤 합니다. 그런데 이 감정을 이겨내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자기만을 생각하고 타인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행동을 기피하는 사회에서 외로움은 감당하기 힘든 짐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를 보면, 40년 이상 장기 복역을 한 죄수가 가석방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감옥 생활을 하다 세상에 나온 그는 해방감을 느끼기는커녕 교도소 밖의 낯선 환경에, 심한 고독과 소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이 변하고 환경이 변한 것도 당황스러운 일이지만 그에게 가장 큰 충격이었던 것은 자신을 믿고 인정해 주던 동료 죄수들과의 만남이 단절됨으로써, 세상에 홀로 내 버려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숙소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맙니다.
이처럼 고독에 휩싸여 헤어 나오지 못할 때 사람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고독이라는 것이 항상 이렇게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성인들이 고독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고독을 이기지 못했던 죄수와 성인들의 차이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어디서 찾고 있었는가에 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죄수의 행복은 동료들과의 우정이었습니다. 즉 자신을 알고 인정해 주는 이웃 사랑만이 삶의 활력소였던 것입니다.
일생동안 끊임없이 이러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언젠가는 사라질 신기루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계명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답변하십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중 계명이 모두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범을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감정은 십자가 여정을 앞두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는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이제 곧 제자들은 당신을 모른 척 할 것이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상황. 그리고 그 와중에 십자가에 못 박혀 조롱거리가 되어야할 상황에서 예수님은 극심한 고독과 외로움에 피땀까지 흘리며 몸서리치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괴로움이 극복될 수 있는 이유는 오늘 복음의 “사랑의 이중계명” 때문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이를 신뢰하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 당신의 희생이 모든 인류의 구원을 가져오게 되리라는 <이웃에 대한 사랑>.
이 두 가지가 충족됨으로써 예수님은 묵묵히 고난의 여정을 걸어가시게 되고 결국 죽음을 쳐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외롭고 고독한 여정에 있을 때, 혹은 그 밖의 힘들고 지치는 길 위에 놓여 있을 때 우리는 반드시 홀로 됨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주변 이웃들을 향한 사랑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 모두가 함께 할 때 우리의 삶은 활력을 되찾게 되고 더욱 아름답게 빛나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게 되며 그것은 곧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만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허울뿐인 사랑 혹은 자신의 필요에 대한 이기적인 사랑에 그칠 뿐입니다. 오늘 미사 중에 다시금 오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하느님과 사랑과 이웃 사랑을 균형 있게 실천해 나갈 것을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우리가 성실히 이행한다면 주님께서는 삶의 끝에서, 오늘 복음의 따뜻하고 인자한 음성을 마침내 들려주실 것입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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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장 큰 계명, 사랑의 이중계명이 답이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시편 25,4)
오늘은 제69회 현충일입니다. 나라 사랑에 몸바친 분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6.25당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몰한 장병과 순국선열 그리고 순직 공무원 등의 넋을 기리고 얼을 위로하기 위해 지정된 대한민국의 기념일이자 법정 공휴일입니다. 오늘 10시 정각에 전국민은 경건한 마음으로 애국선열의 명복을 비는 묵념을 1분 동안 합니다. 또 오늘은 제80주년 노르만디 상륙작전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1944년 6월6일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킴으로 나치 독일에 대한 승리의 전환점이 된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늘 담화를 통해 “결코 다시 전쟁은 아님을”(Never again war!), 또 평화와 기도를 강조하셨습니다.
모든 전쟁은 영적전쟁으로 전환되고 모두가 영적승리의 삶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방법은 단 하나, 주님의 사랑의 전사가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성심성월” 전인류가 사랑을 회복할 절호의 달로 오늘 복음도 반갑게 일치합니다. 사랑은 멀리 밖에서 부터가 아니라 가까이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구체적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반갑게 읽어보는 감동적인 카톡글입니다.
“저희 부부는 신들린 사람처럼 하루하루 기쁘게 생활했습니다. 이제 나이가 60대 후반의 부부가 되어보니 서로 안쓰럽고 눈빛만 봐도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 차리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수도원에 도움이 될까? 어떻게 하면 수사님들께서 좀 더 편리하게 사용하실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집을 짓고 있습니다.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입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집짓는 일을 마치고 사랑의 향기를 남기고 바람처럼 떠난 사랑의 부부입니다. 사랑은 추상적 명사가 아니라 구체적 동사입니다. 사랑은 마음이기보다는 실천입니다. 이 순박한 부부의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어김없이 하느님께 대한 열렬하고도 항구한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사랑하지 않고 사람이 되는 길은 없습니다. 사랑은 사람의 본질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사랑뿐이요, 평생공부도 사랑뿐이요 평생 졸업이 없는 “사랑의 학교”에서 평생학인이 되어 공부해야 하는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사랑”하면 떠오르는 두 편의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랜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1997.3. >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27-26년전 시들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공감하는 사랑의 시입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도 제가 보기엔 이런 분입니다. 율법학자가 다 꽉막힌 사람은 아닙니다. 오늘 어느 진지하고 진실하고 열려있는 구도자 율법학자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도 진지합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 뭐냐는 질문에 하나에 하나를 추가하여 둘을 말하며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 말합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613가지 율법을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요약합니다. 예수님의 창안같지만 이미 신명기(6,4)와 레위기(19,18)의 말씀의 재확인이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권위가 넘치고 한층 중요성을 띕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화답하는 율법학자 역시 참 멋진 훌륭한 제자의 자질을 지닌 분임을 깨닫습니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온마음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과제로 주어진 인생임을 깨닫습니다. 삶은 선물이자 평생과제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났음이 선물이요, 평생과제 사랑의 수행을 통해 주님을 닮아감으로 완성해야할 인생입니다. 과연 사랑의 숙제는 잘되어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삶인지 자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의 미사시간이 참 좋은 사랑의 점검시간이기도 합니다. 슬기롭게 대답하는 내공 깊은 율법학자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이 우리에게도 해당됐으면 좋겠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참으로 멋지게 실천한 분이, 이중사랑의 빛나는 결정체가 바로 예수님이요, 제1독서에서 예수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바오로입니다. 바오로 역시 예수님을 닮아 사랑의 이중계명 실천의 대가이자 달인입니다. 비록 옥중에서 쇠사슬에 매여있지만 자유로운 영혼의 바오로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감옥에 가둘 수 없듯이 예수님과 일치된 자유로운 영혼 역시 감옥에 가둘수는 없습니다. 바오로는 사랑하는 제자 티모테오에 대한 가르침은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기억하시오, 예수그리스도를”(Beloved: Remember Jesus Christ)”에 이어지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문이자 찬가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기원합니다. 영성생활에 예수그리스도를 잊지 않고 끊임없이 기억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일치가 날로 깊어질수록 사랑의 이중계명 실천도 더불어 저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2티모 2,11-13)
예수님과 일치된 이들은 예수님을 닮아 성실한 사람들이요 사랑의 이중계명의 실천이 이를 입증합니다. 중용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성실(誠實)은 하늘의 도이며, 사람의 도입니다.” 하늘은 성실합니다. 자연의 운행은 지치거나 쉼이 없고, 게을러지는 법이 없이 한결같습니다. 수도원 주차장, 때가 되어 활짝핀 금계국꽃들과 마가렛꽃들의 환대가 한결같이 성실합니다. 다음 옛 어른의 말씀도 지칠줄 모르는 한결같은 사랑의 노력을 권합니다.
“성공이라는 드문 일은 수많은 실패들의 반복으로 이뤄진다.”<다산>
“노끈으로 톱질해도 나무를 자를 수 있고, 작은 물방울이 쌓이면 돌에 구멍을 낸다.”<한서>
사랑의 이중계명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닮아 진실(眞實), 성실(誠實), 절실(切實)의 삼실(三實)의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은 사랑의 이중계명 실천의 사람들로 변모시켜 줍니다.
“주님,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시편25,5ㄱ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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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자기만 없으면>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십니다.”
오늘의 서간은 하느님의 성실하심과 우리의 불성실함을 비교하는데 사실 우리는 불성실합니다.
불성실하지 않다고, 더 나아가서 성실하다고 얘기할 수 있을 만큼 뻔뻔한 사람은 우리 중에 아마 없을 것이고, 그러므로 철면피가 아니라면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의 불성실에 대해서 마땅히 마음이 찔려야 하고, 하느님께 죄송스러운 마음이 커야 할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의 불성실에 대해서 성찰하고 반성할지라도 그 성실함과 불성실함의 과녁이 올발라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성실이나 불성실을 얘기하면 즉시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성실과 불성실을 떠올리고, 일도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자기가 맡은 일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가 티모테오에게 얘기하는 성실함은 하느님께 대한 성실함이기에 결코 일적인 성실함이 아닙니다.
인격적 성실함이고, 사랑의 성실함이며, 그래서 어쩌면 성실함이라기보다는 정결함이라고 함이 좋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하느님께 성실함은 오늘 주님 말씀과 맥을 같이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뿐이시기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다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다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남김없이 다하는 것이고, 일부를 남기지 않는 것이며, 일부를 다른 어디에 남기지 않는 거지요.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는 것은 마음이 나뉘어(분심하여) 마음 일부는 하느님께 두고 다른 일부는 사람에게 두지 않는 것이고, 힘을 다하는 것은 힘이 나뉘어 힘의 일부는 하느님 일에 쏟고 다른 일부는 자기 일에 쏟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웃 사랑도 하라는 주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하느님께 다 쏟으면 이웃에게 갈 사랑은 없는 것 아닙니까? 원래 이웃에게는 남기지 말고 하느님만 사랑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깊이 생각하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같은 것이고,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은 이웃에게가 아니라 자기에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만 없으면 하느님이나 이웃이나 하나이고, 자기만 벗어나면 하느님 사랑이나 이웃 사랑이나 같은 것입니다.
자기가 있을 때 하느님의 사람과 나의 사람이 나뉘고, 자기 안에 갇혀 있을 때 하느님의 일과 나의 일이 나뉘는 거지요.
자기가 없으면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것이고, 그러기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의 것들도 사랑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것은 하느님의 것들을 돌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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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12,31ㄷ)
<가장 큰 계명!>
오늘 복음(마르 12,28ㄱㄷ-34)은 '가장 큰 계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ㄷ)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율법 학자 한 사람이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 하나가 무엇인지를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대답의 의미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이고, '하느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하고, 이웃 사랑의 힘은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나온다.'는 의미로 묵상되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성령의 힘'입니다.
믿는 이들의 모든 신앙 행위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표지입니다. 이 표지들인 미사와 기도와 말씀 안에 머무는 신앙 행위를 할 때, 나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담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졌습니다. 그 사랑의 결정체가 바로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사랑하는 제자 티모테오에게 이 사랑을 기억하라고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2티모 2,8)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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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SKY_0x-FZ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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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 31)
모든 사랑의
기쁨은
하느님 사랑으로
시작됩니다.
사랑의 계명이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진실한 사랑이
만들어가고
지켜내는
세상입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이게합니다.
멈출 수 없는
하느님
사랑의
여정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절정은
이웃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이웃을 살리고
서로를 살리는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하나의 계명이
우리의 온 마음을
비추어 줍니다.
욕심을
이기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뿐입니다.
사람들 안에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아닌
우리자신이
사랑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삶만 있고
사랑이 없다면
이루어낼 수 없는
행복이며
평화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란
하느님 사랑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가장 소중한
삶을 만들어
갑니다.
사람과
사랑은
하나의
이름이며
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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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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