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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죽음 개념: 그 죽음(Sterben)은 그 죽음(Ableben)이 아니다!
제가 쓴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 Sterben과 Ableben의 차이 37>에 대해 Martin님이 아래와 같은 반론을 제기하셨습니다.
선생님의 관점은 인간 삶의 '상대적 가변성'만을 중시하신 나머지 그의 절대적 유한성(finitude), 즉 하이데거가 진정으로 강조하고자 한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는 존재자(whose being by its very nature is at issue)"로서 현존재의 의미는 유폐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이데거의 죽음은 단순히 "삶을 이루고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들의 부정"이 아니라 '있을수있음'(Seinkönnen), 즉 현존재의 '존재 자체'가 문제시되는 계기로서 육체적 죽음이라는 사건에 명확히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반론에 대해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이 결코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상적인 애니 인용구"가 아니라 "1·2차 텍스트 근거를" 통해 하나하나 논박하고자 합니다. 제 핵심 주장은 이렇습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Tod)이란 '사망(Sterben)'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사망이란 생물학적 '끝나 버림(Ableben)'과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하이데거는 우리 삶에 아무런 토대나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죽음'이라고 표현할 뿐입니다. 더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현존재의 실존론적 구조에 내재된 '무성(Nichtigkeit)'이 바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입니다.
(1) Sterben과 Ableben의 차이는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에 대한 학술적 해설에서 거의 '교과서적으로' 등장한다.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하이데거 해설서 두 권에서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우선, W. 블라트너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입문』이라는 번역서입니다. 블라트너는 아주 분명한 어조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이 "인간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합니다. (제가 이전 글에서 인용한 『존재와 시간』의 구절을 정확히 언급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Sterben과 Ableben을 구분하죠.
"죽음"이라는 말로 하이데거가 언급하는 것은 인간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현존재가 그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상황이다: "죽음은 현존재가 존재하게 되자마자 떠맡게 되는 존재함의 한 방식이다." (289/245). 존재함의 한 방식인 죽음? 우리는 보통 죽음을 존재하지 않음의 한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죽음은 미래에 떨어져 있는 어떤 사건이 아니다. "사망함(das Sterben)은 사태져-있음(Begebenheit)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이해할 현상이다 …"(284/240) 그렇다면 "더-이상-현존할-수-없음의-가능성"과 "순연한 현존-불가능성"은 삶의 종료에 관계된 것이 아니다. […] 만약 "죽음"이 이러한 실존적 상황에 관계된 것이라면 하이데거는 인간의 삶을 다하는 것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하이데거는 그것을 삶을-다-보냄(demise; das Ableben)이라 부른다. (W. 블라트너,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입문』, 한상연 옮김, 서광사, 2012, 287 인용자 강조)
다음으로, 박찬국 교수님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도 Sterben과 Ableben을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하이데거는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현존재의 죽음을 종명(Ableben)이라고 부른다. 이는 현존재가 실제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존재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태도를 취하며 현존재에게만 특유한 이런 종류의 죽음을 하이데거는 사망(Sterben)이라고 부른다. (박찬국,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그린비, 2014, 330)
이처럼,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을 다루는 학술적 해설들은 Sterben과 Ableben의 차이를 대단히 강조합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것은 생물학적 죽음인 Ableben이 아니라, 현존재에게 고유한 현상인 Sterben이라고 말입니다. 이 점은 하이데거 본인이 이미 『존재와 시간』 제49절 "죽음의 실존론적 분석과 이 현상에 대한 가능한 다른 해석과의 제한구별"에서 지적하고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이데거를 주석적으로 꼼꼼하게 다루고자 하는 그 어떤 해설이라도, Sterben과 Ableben의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솔직히, 저는 박찬국 교수님의 하이데거 해설이 종종 『이반 일리치의 죽음』 같은 문학 작품을 차용하는 과정에서 하이데거의 철학을 너무 통속 심리학적으로 전환시키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하이데거를 설명하려는 박찬국 교수님조차도 Sterben과 Ableben이 구별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매우 강조합니다.)
(2) 죽음은 현존재의 전체성에 대한 논의 맥락에서 등장하는 개념이다.
사람들이 Sterben과 Ableben을 혼동하는 이유는, 애초에 '죽음(Tod)'이라는 개념이 『존재와 시간』에서 등장하는 맥락 자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개념은 『존재와 시간』 제1편에서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존재가능'으로 분석된 '염려(Sorge)'를 다시 전체성 속에서 검토하기 위해 제시됩니다. 『존재와 시간』에서 '죽음'만을 따로 떼어낸 채, 마치 이 개념이 생물학적 죽음 앞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 따위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책 전체의 구조에 비추어볼 때 매우 잘못된 해석입니다.
우선, 하이데거는 제1편 말미에서 현존재가 '실존성(Existenzialität)', '현사실성(Faktizität)', '빠져 있음(Verfallen)'이라는 세 가지 구조계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 구조계기들을 총괄하여 '염려'라고 이름 붙입니다. 현존재는 끊임없는 염려의 과정에서 자신이 '되어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나 자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고정된 대상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계속해서 만들어져가는 존재입니다. 하이데거는 이 사실을 제1편 말미에서 자신의 실존론적 분석의 결론으로 제시합니다.
제2편에서는 이렇게 진행된 자신의 분석이 과연 현존재를 정말 '전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지를 다시 질문하면서 '죽음'에 대한 논의를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흔히 '죽음'이란 우리 자신을 완성시키는 사건이라고 일상적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만한 진정한 존재론적 사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석이 제2편 초반부의 주된 내용입니다. 현존재를 '전체'로서 완성시키는 사건을 '죽음'이라고 부르면서, 일상적인 죽음 개념을 지나 존재론적 죽음 개념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것이 제2편 초반부의 내용인 것입니다.
(3) 하이데거는 죽음을 어떻게 해명하는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제가 이전 글에서 인용했던 『존재와 시간』의 구절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다시 인용하겠습니다.
현존재는 그가 존재하고 있는 한 이미 자신의 아직-아님으로 존재하듯이, 그는 또한 언제나 이미 그의 종말로 존재한다. 죽음으로 의미되고 있는 끝남은 현존재의 끝에-와-있음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재라는 이 존재자의 종말을 향한 존재 [종말을 향해 있음Sein zum Ende—인용자 주]인 것이다. 죽음은, 현존재가 존재하자마자, 현존재가 떠맡는 그런 존재함의 한 방식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1998, 329쪽.)
한 마디로, 현존재는 '나 자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어떠한 고정된 대상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존재는 '아직-아님(Noch-nicht)'인 동시에 언제나 이미 '종말(Ende)'입니다. 즉, '나'라고 부를 만한 대상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존재는 '아직-아님'으로 존재합니다. 동시에, '나'라고 부를 만한 대상은 이미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현존재는 '종말'로 존재합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죽음'이 '현존재의 끝에-와-있음(Zu-Ende-sein des Dasein)'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현존재의 삶이 끝나는 지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현존재의 '존재함의 방식(eine Weise zu sein)'이라고 말입니다. '나 자신'을 보증하는 어떠한 고정된 토대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상 매 순간 죽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유한성이 무엇인가?
죽음을 통해 현존재가 유한하게 된다는 것도 다른 의미가 아닙니다. 현존재에게 영원한 본질(essence)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현존재의 유한성입니다. 다른 말로, 현존재의 삶을 정초할 어떠한 토대(foundation)도 없다는 것이 바로 현존재의 유한성입니다. 우리가 매 순간 죽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이루고 있는 모든 조건들은 부정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이 근본적인 사실이 '죽음'이고, 이 근본적인 사실이 우리를 영원한 존재가 아닌 '유한한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드레이퍼스(H. Dreyfus)와 호그런드(Haugeland) 같은 영어권 하이데거 연구자들은 바로 이렇게 '본질' 개념을 비판하면서 우리가 시간적으로 변화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는 점이야 말로 하이데거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공헌이라고 주장합니다. "Husserl and Heidegger: Philosophy's Last Stand", Heidegger and Modern Philosophy: Critical Essays, M. Murray (ed.),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8, pp. 222-238 참고.)
(5) 하이데거의 무 개념이란 무엇인가?
참고적으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무'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개별화된 존재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현존재 자신에 대한 부단한 단적인 위협을 열린 채 견지할 수 있는 처해 있음은 불안이다. 이 불안 속에서 현존재는 자신의 실존의 가능한 불가능성의 무 앞에 처해 있다. 불안은 그렇게 규정된 존재자의 존재가능 때문에 불안해하며 그래서 극단적인 가능성을 열어밝힌다.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355쪽)
즉, 죽음을 향한 존재는 '무 앞에 처해 있음'이라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여기서 '무(Nicht)'란 (다른 심오한 의미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부정될 가능성입니다. 이 점은 하이데거의 다른 논문인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무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다. 무의 이러한 특성이 결국에는 우리가 무를 만나게 되는 바로 그 유일한 방향을 손가락으로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가 단적으로 부정될 수 있기 위해서, 그래서 이 부정 속에서 비로소 무 자체가 스스로 알려올 수 있기 위해서, 먼저 주어져 있어야만 한다.(마르틴 하이데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이정표』, 제1권, 신상희 옮김, 한길사, 2005, 157쪽 인용자 강조.)
즉, 우리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은 아무런 안전한 토대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부정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무'에 직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바로 우리의 존재 방식 속에 이렇듯 무가 언제나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죽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다른 말로 '무성'이기도 합니다.
현존재는 근거가 되면서 그 자기 자신의 '아님'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무성은 결코 눈앞에 있지 않음이나 존립하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존재의 존재를, 즉 그의 내던져져 있음을 구성하고 있는 어떤 '아님'을 의미하고 있다.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380쪽)
(6) 그래서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이란 결코 생물학적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오면 하나의 정합적이고 엄밀한 해석이 완성됩니다. (a) 하이데거는 죽음이 결코 생물학적 '끝나버림'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b) 오히려 현존재의 '전체성'을 완결짓는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c) 문제는 현존재가 언제나 '아직-아님'인 동시에 '종말'로서 존재하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d) 즉, 현존재는 매 순간 자기 존재의 부정(무)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e)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존재에게는 아무런 본질이나 토대가 없습니다. (f) 이 사실이 현존재를 유한하게 만듭니다. (g) 하이데거는 이렇게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 구조 속에 '무성'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이란 결코 언젠가 미래에 일어날 생물학적 죽음이 아닙니다. 저명한 하이데거 연구자인 토마스 시한(T. Sheehan)은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I actually die, by living mortally now. Translating "vorlaufen" as "running towards [death]" dulls the resonance of "living mortally now" and perpetuates the notion of a "linear" relation to my death. Heidegger’s Sein zum Tode is not about my future death but about my ever-present mortality. (T. Sheehan, Making Sense of Heidegger, London: Rowman & Littlefield International, 2015, p. 167)
마찬가지로, 블라트너도 이렇게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죽음"이라는 말을 어떤 유별난 방식으로 사용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한 첫 번째 철학자인 것은 아니다: 키르케고르 역시 이 말을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한 것이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을 「아메리칸 뷰티」의 레스터 번햄이 "혼수상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꽈 비교할 만한 강력한 은유적 의미로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이 용어를 이러한 은유적 의미로 사용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해 두지 않으면 우리는 그의 존재론적 논의를 "그저 고양하기나" 하는 문학작품으로 평가절하할 위험을 안게 된다. 하이데거는 그가 "죽음"이라는 말을 존재론적 바탕 위에서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려 한다. 죽음은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현존재의 끝을 뜻한다. 삶을-다-보냄이 삶의 끝을 의미하듯이 말이다. "대체 어떤 의미에서 죽음을 현존재가 끝남으로서 파악해야만 하는지의 물음이 더욱 절실해진다."(289/244)(W. 블라트너,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입문』, 259쪽 인용자 강조)
즉, 하이데거는 죽음을 "유별난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떠올리는 (생물학적) 죽음보다 훨씬 근본적인 의미입니다. 그가 염두에 두는 죽음이란 "존재론적" 죽음입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토대나 본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존재하는 매 순간 죽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의 존재 방식이 곧 죽음인 것입니다!
(7) 그렇다면 비판을 어떻게 해야 하나?
적어도, Martin님이 제시하신 인용문들은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은 생물학적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라는 저의 주장에 대해 아무런 반박을 제기하지 못합니다. 그 인용문들은 단지 "하이데거는 유한성을 강조한다."라는 주장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Martin님이 저를 비판하시려면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은 생물학적 죽음을 의미한다."라는 논거를 제시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단지 "하이데거는 유한성을 강조한다."라고만 말하는 것은 논점을 일탈하는 것일 뿐입니다.
(8) 그렇다면 무엇을 입증해야 하나?
더 나아가, Martin님의 해석이 정당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셔야 합니다.
(a) Sterben과 Ableben이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설명하셔야 합니다. 이미 지적하였듯이, 이 구분은 거의 '교과서적'입니다.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을 다루려는 어떠한 학술적인 시도도, 이 구분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b) 제가 인용하고 해설한 『존재와 시간』 329쪽을 다른 방식으로 새롭게 해석하셔야 합니다. 이 본문에서 하이데거는 죽음을 '아직-아님'과 '종말' 개념으로 해명하면서, 죽음이 현존재의 삶 끝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현존재의 '존재함의 한 방식'이라고 강조합니다. 과연 이 구절이 '생물학적 죽음'과 어떻게 관련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셔야 합니다.
(c) 『존재와 시간』 제49절 "죽음의 실존론적 분석과 이 현상에 대한 가능한 다른 해석과의 제한구별"에 대한 정합적인 해석을 제시하셔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 하이데거는 Sterben과 Ableben의 차이에 근거하여 자신의 죽음 개념이 일상적인 '생물학적-존재적 탐구'와는 구별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을 '생물학적'으로 해석하시면서도 어떻게 49절에 대한 정합적 해석을 제시하실 수 있을지 저로서는 매우 의문스럽습니다.
(d) 『존재와 시간』 제2편에서 죽음 개념이 왜 등장하는지를 설명하셔야 합니다. 저는 이 설명을 제시하였습니다. '죽음'은 '염려' 개념을 검토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기 때문에, 일상적인 죽음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우리를 완성시키는 사건을 의미한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Martin님은 '생물학적 죽음'의 관점에서 제2편을 정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안적 해석을 저에게 납득시키셔야 합니다.
(e)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이 '생물학적 죽음'과 구별된다고 지적하는 해석자들을 논파하셔야 합니다. 저는 최소한 세 명의 해석자들을 거론하였습니다. 블라트너, 박찬국, 시한 말입니다. 이들 외에도 여러 저명한 해석자들을 거론할 수 있습니다. Martin님은 (저의 해석뿐만 아니라) 이들의 해석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논증하셔야 합니다.
(f) 하이데거는 자신의 철학이 인간학이나 실존철학이 아니라고 강조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만일 그의 죽음 개념이 '생물학적 죽음'이 되어버리고, 그가 말하는 불안 개념이 '생물학적 죽음 앞에서 느끼는 통속 심리학적 감정'이 되어버린다면, 그의 철학이 어떤 의미에서 인간학이나 실존철학과 구별되는지가 문제시될 것입니다. Martin님은 이 점에 대해서도 적절히 해명하셔야 할 것입니다.
(g) 그 이외에도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을 '생물학적으로' 이해하게 되었을 때 발생하는 철학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답하셔야 합니다. 가령, 생물학적 죽음이 인간의 필연적 가능성이 아니라는 사실은 철학적인 문제를 낳습니다. 생물학적 영생은 멀지 않은 미래에 실현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의 철학은 이런 미래에는 어떤 의의를 지닐 수 있습니까?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을 '생물학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이런 철학적 질문에 답하기가 대단히 곤란해질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저는 이 모든 요건들을 만족시키면서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을 '생물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5
생성일
'22 8월
마지막 댓글
'22 8월
2
댓글
sophisten
'22 8월
오랜만에 본격적인(?) 대화의 장이 열린것 같아 보기 좋습니다. 하이데거 전반에 대해 잘 모르는 입장이라 한마디 꺼내지 못하겠지만, 말미의 (f)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어 질문만 좀 해봅니다.
하이데거를 잘 모르기도 하고, 원전을 읽어보지 않은 입장에서 제가 접한 하이데거는 실존주의적 면모가 대다수인데, 그가 “ 하이데거는 자신의 철학이 인간학이나 실존철학이 아니라고 강조”했다는 것이 대단히 낯설게 느껴집니다. 혹시 어떤 맥락에서 스스로의 철학을 실존주의와 구분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어지는 질문인데요. Youn님은 생물학적 의미로 죽음 개념을 이해할 경우 “그의 철학이 어떤 의미에서 인간학이나 실존철학과 구별되는지가 문제시될 것입니다”라며, 죽음 개념을 생물학적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그의 철학을 실존철학과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위험이 있다고 말씀하시는듯 합니다. 제 기존 이해도 그렇고, youn님의 글에서도 그렇고 그의 죽음개념이 생물학적 물음보다는 존재론과 관련된 것이라 보여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 참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렇기에 하이데거 철학이 생물학에 관한 철학이 아니라 실존철학으로 읽힐 수 있는 것 아닌가요?
3
YOUN
'22 8월
(1) 이와 관련해서 가장 유명한 글은 하이데거가 사르트르에 반대하여 쓴 공개 서한인 「휴머니즘 서간」입니다. 우리말로도 번역되어서 『이정표』 제2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사르트르 때문에 하이데거 본인이 자꾸 '실존주의자'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소개되자, 하이데거가 자신과 사르트르 사이의 차이에 대해 쓴 글입니다. 여러 내용이 들어 있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고 선언하는 사르트르와는 달리, 자신은 '인간'이나 '휴머니즘'이라는 개념에 대해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인간'이나 '휴머니즘' 같은 개념들은, '교양'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가 라틴어 '후마니타스(humanitas)'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적어도, 하이데거 자신이 보기에는) 의미가 왜곡되어 발생한 개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외에도, 하이데거가 소유한 『존재와 시간』 제15판 여백에는 다음의 구절
이러한 존재론적인 구조에 대한 물음은 실존을 구성하고 있는 그것을 풀어헤쳐 보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구조의 연관을 우리는 실존성이라고 이름한다. 실존성의 분석학은 실존적 이해의 성격을 띠고 있지 않고 실존론적 이해의 성격을 띠고 있다.”(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1998, 29)
에서 제가 별표로 표시한 부분에 하이데거의 자필로
따라서 실존철학이 아니다.(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29)
라는 메모가 쓰여 있기도 합니다. (이 메모는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에 별도의 각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2) 사실 하이데거의 존재론과 '실존주의' 혹은 '실존철학'이라고 불리는 입장 사이의 관계는 다소 논쟁적입니다. 하이데거 본인은 「휴머니즘 서간」에서 자신이 실존주의자가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지만, 애초에 하이데거가 사르트르를 독해한 방식에 다소 문제가 있다는 비판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르트르가 하이데거를 오해한 것처럼, 하이데거도 사르트르를 오해하였고, 사실 제3자의 관점에서 비교해 보면 둘 사이에는 (강조점에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분명히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는 사유들이 있다는 해석도 제기되는 것입니다. 다만, '실존주의'나 '실존철학'을 (통속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보편적 삶의 경험에 대해 묘사하는 철학으로 생각할 경우, 이런 철학은 분명히 하이데거가 거부하고자 한 종류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기 하이데거는 (칸트의 비판철학이 인간의 '초월론적 조건'을 탐구한 것처럼) 현존재의 '실존론적 구조'를 현상학적으로 기술하려 한 것이지, 태어남, 고통, 슬픔, 외로움, 불안, 죽음 같은 인간 삶의 '실존적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 것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혹자들은 하이데거의 전기 존재론이 '초월론적 주관성'의 철학이라고도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