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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는 1906년 개교하여 1970년대 후반까지 연세대, 고려대와 함께 세칭 '3대 사학'으로 불렸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시작된 학내분규 및 종단분쟁이 1980년대까지 이어지면서 교세가 다소 위축하였다.[1] 동국대학교는 1970년대 후반까지 3대 사학이었고 1980년대가 들면서 성균관대학교의 법과대학 행정학 경영학 경제학과 무역학과등 문과 계열이 성장하는 시점에 상승하지 못하고 정체에 들어가면서 후기 최고 사학에서 점차 성균관대학교 한양대학교 등에게 경쟁상대가 되거나 밀리기 시작한다.
동국대학교는 개교 이래로 수많은 문인을 배출하며, 한국문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일찍이 신문학의 지평을 연 만해 한용운(제1회 졸업)을 필두로, 근대 한국문학의 선구자 신석정, 서정주, 조지훈, 조연현을 배출하고, 현대 한국 문학의 쌍두인 황석영, 조정래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인들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대의 강력한 문학적 전통은 전신인 명진학교 시절 권상로의 활동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당시 재학생이던 권상로가 일종의 학생 자치기구인 '광학회'를 조직하고, 불교 연구를 아우르는 '국학' 연구에 매진하여 고전연구에 천착한 것이 동대의 문학적 뿌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조직은 학생들의 시가 창작 욕구를 진흥하여 학생문단 전통의 기틀을 다졌다. 이와 동시에 한용운 역시 초기 동국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2] 한용운은 한국에서 신문학의 역사를 연 인물이었다. 그는 1926년에는 '님의 침묵'을 발표하여 국문학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얻었다. 그의 시는 그가 승려였던 만큼, 불교적 휴머니즘과 내밀한 관조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동국문학의 지표가 된다.
동국 문학이 전통적으로 한국문학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야는 시와 평론이었다. 특히 한용운, 신석정, 김달진, 서정주로 이어지는 동국시의 계보는 그대로 한국시의 중추적인 체계를 형성했고, 이태우가 조선일보 신축문예에서 평론 부문으로 당선된 이후 정태용, 조연현에 이르는 동국 평론문학의 계보도 한국 평론 문학의 중심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후 해방공간에서 혜화전문이 동국대학으로 승격하였다.[3] 이에 따라 학부과정에 국문학 전공이 편제되어, 동국문학이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느 전기가 되었다. 국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양주동'을 초대 문학부장에 선임하였고, 동국문학의 전통을 이어가며 서울대, 연희대(지금의 연세대) 등과 학술교류를 진행했다. 또한『동국』, 『동국시집』등 문학을 전문으로 다룬 잡지를 발간하면서 동국문학의 새 시대를 개척해 나갔다.
그러나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학교는 물론 문학부분에서도 커다란 시련을 맞았다. 특히 동국대학 초대학장으로 불교학과 언어학을 강의했던 허윤 교수를 비롯해 시론의 김기림, 언어학의 유웅호 교수 등이 납북됐고, 이념적 갈등을 빚었던 전석담, 백남운, 정지용 교수 등이 월북(혹은 월북 추정)하면서 동대의 문학은 침체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동대의 문학적 전통의 위기이자, 고스란히 '한국 문학' 자체의 위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동국 문학의 위기는 곧 한국 문학의 위기였기 때문이다. 1953년 휴전과 동시에 양주동이 대학원장으로 복귀, 『동국시집』을 복간하면서 위기 타개의 시발점으로 삼았다. 황명, 이창대, 신기선, 이종출, 이상보 등이 다양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이후 수많은 문인들이 속속 주옥같은 문학작품을 발표하면서 동국문학의 전통을 새롭게 복원해 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동국시집』은 한용운, 서정주, 조지훈으로 이어지는 동국시의 전통을 계승한 잡지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기도 했다.
1960년대 들어 동국 문학은 또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4·19 학생운동에 이어 군부독재에 대한 반대시위가 계속되면서 혼란이 가중됐고 급기야 임시휴교 조치 등이 내려지면서 문학 활동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것이다. 더욱이 동국대 국어국문학과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던 양주동이 연희대(지금의 연세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동국 문학의 중심축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에 동대는 동문 출신의 서정주, 장한기, 이병주, 조연현 등을 신임 교수로 채용하고 동문들을 중심으로 ‘양주동 박사 다시 모시기 운동’을 펼쳐 결국 1962년 그가 동국대로 복귀하게 했다. 이처럼 뛰어난 교수진과 확고한 문학 활동의 토대를 구축한 동국대는 한 때 ‘문인 공화국’이라는 별칭이 따를 정도로 한국 문학계를 선도하는 뛰어난 문인들을 배출해 냈다.
이후 1980년대 들어 주요한 신춘문예를 통해 신진 문인들을 대거 배출한다. 특히 조종현의 아들 조정래가 태백산맥을 완간하여 주목을 받았다. 동문 황석영은 2000년대 들어 노벨문학상 후보자 명단에 자주 이름을 올리고 있다.
신춘문예는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작가 등용문으로, 소위 '문학고시'로 불린다. 이 중 유력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신춘문예를 '메이저 신춘문예'라고 하는데, 동국대학교는 이 분야에서 압도적인 성취를 거두고 있다. 근래 몇 해 간의 기록만 보더라도, 2009년 주요 일간지 신춘문예(조선·동아·한국·세계·문화일보)에 8명의 당선자를 배출[4]하였고, 2010년에는 3명, 2011년에는 4명의 등단자를 배출하였다.[5] 매년 여러 문학상과 문예지를 통해 등단하는 이도 10여 명이다. 이들 중 대부분은 동국대 문예창작학과 소속이다.
동국대학교는 교육개혁에 따른 학부제를 시행하여 1996년 3월 국어국문학과를 한국어문학부로 승격하였다. 이에 따라 세부 전공이 '한국어문 전공'과 '문예창작 전공'으로 이원화되게 된다. 이듬해인 1997년에 한국어문학부는 또다시 '국어국문학부'로 개칭된다. 2000년부터는 문과대학 내에서 '국어국문학 전공'과 '문예창작 전공'이 별도 체제로 운용되기 시작했다. 2001년 '문예창작 전공'이 문과대학에서 예술대학으로 편입됨에 따라 문예창작 전공은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이하, 문창과)로, 국어국문학전공은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이하, 국문과)으로 이원화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동국대학교가 두 학과를 이원한 까닭은 말 그대로 '교육개혁' 때문이었다. 동대 국어국문학과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학과로 한국문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나, 1960년대 후반 사회적 혼란기부터 동대의 문학적 영향력이 주춤하기 시작하여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조정래만 유일하게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등 문학적 성취가 부족하였다. 이에 따라 '창작 역량'을 강화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이러한 문제의식이 두 학과의 분리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문창과과 국문과로 이원된 이후 학과 커리큘럼 역시 상호 독립적으로 분리 설정되었다. 교육목표를 보면 두 학과의 뚜렷한 지향점을 살펴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동대의 '문창과-국문과 이원화'는 보다 전문화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한 개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문창과는 시, 소설, 희곡 등 실질적 '창작 중심'을 목적으로 전문화되었으며, 국문과는 국문학(한국어) 연구, 문학작품에 대한 비평 등 '연구 중심'을 목적으로 하여 전문화되었다. 이러한 동국대학교의 전략적 이원화는 최근 신춘문예 당선자 수 등을 통해 가시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 현재 동대 문창과와 국문과는 100여 년 문학적 전통의 궤를 같이하면서도 서로 독립된 분야에서 한국문학사에 기여하고 있다.
동국대학교에는 1960년에 처음 연극학과가 설치되었다.
동대 학생들이 항일운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게 된 계기는 바로 만해 한용운에 의해서였다. 평상시에도 독립운동과 항일운동, 불교의 개혁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던 만해는 민중들의 의식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만해는 불교계의 대표로 백용성과 함께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주도하였고, 독립선언서의 불교계 배포를 담당하였다. 1918년부터 동국대의 전신인 중앙학림의 강사로 재직하고 있었던 만해는 1919년 2월 28일에 이종일로부터 10,000매의 독립선언서를 인수받았다. 그날 22시께에 만해는 비밀리에 계동 자택으로 평소 자신을 따르던 중앙학림 학생들을 모이게 하여 3·1 운동을 결의하였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김봉신(金奉信)을 비롯하여 신상완(申尙玩)·백성욱(白性郁)·김상헌(金尙憲)·정병헌(鄭秉憲)·김대용(金大鎔)·오택언(吳澤彦)·김법린(金法麟)·박민오(朴玟悟) 등이었다.
만해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은 동대 학생들은 인사동에 있던 범어사 포교당으로 자리를 옮겨 긴급회의를 하여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협의하였다. 학생들은 가장 연장자인 신상완을 총참모격으로 추대하였고, 백성욱과 박민오는 참모격으로 중앙에 남아서 연락책을 겸하여 진두지휘를 하게 하였다.
나머지 학생들은 각자 연고가 있는 지역의 사찰로 내려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을 결의하였다. 3·1운동의 전개는 대체로 이들 동국대 학생들의 활동에 의해서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김법린과 김상헌은 동래 범어사를 책임지고, 오택언은 양산 통도사를, 김봉신은 합천 해인사를, 김대용은 대구 동화사를, 정병헌은 화엄사를 중심으로 전라도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서울 시내를 담당한 학생들은 3월 1일 새벽 3시에 각각 회의장을 떠나 시내 포교당과 서울 근교의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으며, 지방을 담당한 학생들은 3월 1일에 있은 서울 시내의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했다. 발기 당일, 당시 중앙학림(동국대의 전신) 학생들은 아픈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나와 이 역사적 사건에 동참하였다. 후에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간직하고 제각기 지방 사찰로 향하여 지역별 만세시위운동을 지도하였다. 이렇게 동국대는 3·1 운동을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강제폐교를 당하게 된다.[6]
오후 1시40분에 시위대와 경찰의 간격이 10여미터 이내로 좁아졌을 때 경찰의 발포로 7~8명이 쓰러졌다고 하고, 이후 경무대를 향한 죽음의 행렬이 오후 5시 경찰이 시내 일원에 걸쳐 소탕전을 개시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그날 경무대 앞 시위와 관련한 희생자는 동국대생 노희두 등 사망 21명, 부상 172명이었다고 하였다.
1960년 4월 19일 오전에 현재의 세종로로 동대생 2,000여 명이 집결,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함께 역할을 나누었다. 동대생이 주축이되어 시위대는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향했고, 그날 낮 12시 20분, 경무대를 목표로 삼은 동국대 시위대가 중앙청 앞의 1차 저지선과 해무청(舊 해양수산부의 전신) 앞의 2차 저지선을 돌파하고 국민대(당시 경북궁 옆에 위치) 앞의 3차 저지선까지 진출하였다. 오후 1시 40분 께 동대 시위대와 경찰 간의 거리가 10여 미터로 좁아지자 경찰이 '발포'를 하였다. 이후 오후 5시까지 경찰의 소탕작전이 진행되었으며 이 와중에 총탄에 맞아 법학과 3학년 노희두를 비롯하여 21명이 사망하였다. 또한 부상자가 172명이었다고 한다. 이중 중상자는 28명이었다. 동국대학교 만해광장에는 노희두 학생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한 '동우탑'이 세워져 있다. 동우탑의 비문은 아래와 같다.
고 노희두형은 4월 19일 의거시에 애국학생운동의 선봉자로서 참가하여 열렬히 투장하다가 경무대 앞에서 총탄에 맞아 청운의 꿈을 못 다이룬 채 22세를 일기로 애석하게 세상을 떠났다. 오늘 우리들은 형을 영원히 추모하기 위하여 정성껏 이 글을 새겨두노라.
동국대학교는 1970년부터 매년 "4·19 혁명 기념 추모식" 및 "동국인 등산대회"를 열어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선열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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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은 천주님 대학으로 아주 점잖은 대학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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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고시 잘 붙는다는 이유로 80년대에 어떤 미친 기자놈이 건국이와 국자로 엮어서 최초로 보도하는 바람에 3대사학 이미지 완전 베린거다
동국대 라는 교명은 국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신라향가를 해독한 양주동 박사님이 지으신 거다, 양주동 박사님이 두가지로 고민하셨는데 동국대로 할 것인가? 아니면 고려대로 할 것인가 고민을 거듭하다가 동국대를 최종 선택 하셨댄다.. 고려대와는 참으로 인연이 깊다는.. 혜화전문과 보성전문 시절부터..
동국대 지금이야 뭐 저평가 받고 있지만 가능성이 큰 대학임에 틀림없지....의치한약과 특성화학과가 골고루 배치해 있고 아웃풋도 쨍쨍하게 나오고 있으니 머지않아 명문사학의 반열에 들어갈 것이라 확신한다. 중동경 시외건에 머무를 대학이 아니란 것은 여러분들이 잘 알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