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으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이는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가파르나움, 이 도시들이 꾸짖음을 받은 이유는 알려줍니다. 그것은 티로와 시돈처럼 바알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소돔처럼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은 까닭은 예수님에게서 메시아적인 권능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결코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적 무지로 가려져 있는 어리석음과 굳어져 있는 완고함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특은을 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특별히 기적을 많이 일으켰는데도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까닭입니다. 회개는 베풀어진 사랑을 벗어났음을 깨닫고 그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마치 돌아온 탕자인 작은 아들과는 달리, 특은을 받고도 받은 줄도 모르고 죄지은 줄도 모르기에 돌아오지도 않은 큰 아들과 같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으셨다”(마태 11,20)
오늘, 우리가 함께 계시는 그분을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하는 것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 무지로 가려져 있는 어리석음과 굳어져 있는 완고함이라 할 것입니다. 자꾸자꾸 체험시켜주건만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파라오처럼, 그렇게 우리가 완고하고 변덕스런 까닭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또 우리 공동체로부터 특별한 사랑과 특은을 받았건만, 그 사랑을 알면서도 여전히 변덕스럽고 완고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 이야기”(루카 12,41-48)의 마지막 구절이 마음을 압박해 옵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도시들을 경고하신 것은 그들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한 애타는 사랑의 호소였습니다. 곧 멸망으로 빠져드는 그들에 대한 동정과 애도의 한탄이요 경고였습니다. 마치 뒷날, 죄악의 도성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셨듯이 말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마태 23,37)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의 애타는 호소를 듣습니다. 우리를 회개로 부르시는, 애간장 태우시는 마음을 듣습니다. 죄인의 멸망을 바라지 않으시고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의 이 사랑의 마음에 품고 살아야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저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저희에게 그 사랑을 주신 까닭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저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까닭은 저에게 많은 것을 주신 까닭입니다. 당신의 전부를 주신 까닭입니다. 전부를 건네주신 주님께 저희도 전부를 건네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아멘!
아ㅡ멘! 감사합니다 ~♡
아멘~~!!!
감사합니다.
오늘도 건강하시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