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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 - 10 드디어 부산으로 (최종회)
영화 <국제시장>이 시작되는 흥남부두 철수를 경험한 나의 친구 이인재 군의 자서전이 이제 종착역에 닿습니다. 원래 4회를 예상한 것인데 개 버릇 남 못준다고 10회까지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왔습니다. ‘원주민’들은 ‘장난삼아’ 놀려댄 게 피난민 애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는 것도 이 글을 읽으면서 깨달았습니다. 원활하게 돌아가는 한 차원 높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게 교육의 본질이 아닌가 합니다.
<달리며 돌아보면>의 재판에는 인재가 부산 거제동에 있는 서울 피난민들 애들을 위한 <거제 서울 국민학교>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할 때까지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만 나에게 보내 온 파일에는 거제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타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 학교에서는 부유하고 서울 ‘표준말’을 사용하는 서울 ‘피난민’들로부터 차별을 받는 등 또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우선 여기서 끝맺으려 합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현대사의 새로운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무척 재미나게 읽었는데 글방 식구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인재의 자전기 <달리며 돌아보면> 최종회를 싣습니다. (구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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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재
1952년 여름, 어머니가 생선장수로 나섰다. 이제껏 해온 가마니 짜기와 나무 장사는 겨울에는 좋았으나, 여름에는 수요가 적었기 때문이다. 두 동생이 없어 육아 부담이 줄어든 것도 있지만, 바다가 멀지 않아 아침 일찍 부두에서 생선을 받아 행상을 하는 것이 자본 없이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외할머니, 고모에 이어 이제 어머니마저 생선 장수... 저녁이면 어머니는 팔다 남은 갈치 등을 한두 마리 들어 오셨는데, 고등어, 봉어 등에 맛이 든 입에 남한 고기가 맛은 없었지만 시장을 반찬으로 먹었다. 그러나 (무맛이 맛인) 조기류는 지금도 만나기 싫다.(나도 이 말에 한 표! -구대열)
이어 할아버지께서 국수 짜는 기구를 사 왔다. 큰 솥 위에 긴 나무로 지렛대를 만들고 통기구 안에 배급받은 밀가루를 넣은 다음 식구들이 매달려 지렛대를 누르면 국수가 빠져 나와 솥으로 떨어지고, 그걸 바로 끓여서 국수로 만드는 방식이었다. 쌀로 떡을 만드는 것보다 밥을 지으면 양이 많고, 죽을 만들면 더 양이 많아진다. 밀가루도 떡을 만드는 것보다 국수를 만드는 것이 양이 많아진다. 당시는 모두가 허기진 상태여서, 실질적인 영양이나 칼로리보다 양이 많은 것이 제일 관건이었으므로, 같은 양의 밀가루로 국수를 뽑아 먹는 게 인기였다. 덕분에 우리는 동네 사람들의 국수를 눌러 주고 그 보수로 국수를 받았다.
한여름동안 땀 흘리며 생선 행상을 하던 어머니는, 가을과 더불어 몸이 무거워지면서 몇 달 만에 생선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해 연말 출산을 했다. 딸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동생이 생긴 것이 너무 좋아, 온 마을에 자랑하고, 에스를 불러 뚝방 길에 올라서는 팔방아를 돌리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녔다.
그러나 막상 집안 분위기는 좀 달랐다. 할머니는 아랫목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위해 미역국을 끓였는데, 내굴(연기)날가 봐 조심조심하고, 어머니는 그것이 죄송스러워 하는 모습. 아버지는 육부치(육고기)를 구한답시고 어디론가 나가셨는데, 할아버지의 표정은 별로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유교적인 우리 가정은 며느리가 시집와 아들 셋은 낳아야 식구로 인정을 받는데 (딸은 셈의 대상이 아님), 어머니는 십년이 거의 되어가도 이 집에 기여한 것은 아직 아들 하나뿐이라 고생했다는 위로는커녕 아무 말 없이 계시는 할아버지께 할머니가 물으셨다.
"아바이, 아 이름을 뭐라고 짓겠소 ? "
할아버지는 돌아도 보지 않고 가볍게 대답하셨다.
"부억이라고 하오."
할머니: "무시기라구요 ? "
할아버지: "부억깨(부엌)에서 낳았으니 부억이라 하란 말이지..."
1953년 4월, 나는 2학년이 되었다. 교실은 1학년 때 쓰던 강당 교실에서 본관으로 옮겨 왔는데, 책상, 걸상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본관으로 온데다, 1학년 하급생까지 생기고 보니, 새로 받은 교과서의 "2" 자가 엄청 크게 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담임은 조경철 선생님. 안경 너머로 쏘아보는 눈매가 매서운 원주민 선생님이었다. 이 선생님께 잘못 걸리면 재미없을 것 같았다. 나는 할아버지를 설득하여, 2학년부터는 띄어쓰기를 하도록 승낙 받았다. 의외로 할아버지는 우등상으로 받은 공책을 과목별로 쓰라고도 해주셨다.(1 학년 때는 한 공책에 전 과목을 썼다.) 단 글씨는 작게 쓴다는 다짐을 받고서...
나는 선생님과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지냈다. 아니, 될 수 있는 대로 거리를 두려 하였다. 1학년 때 급장인 김용수가 선생님께 온갖 공을 들이고서 결국 1등을 거머쥐는 것을 본 나는 그럴 형편도 못되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오직 학과시험에서 모든 과목을 늘 100점 받을 뿐이었다. 그러나 당시 학교 교육에서 학과 성적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전시중의 교육은 오직 반공에 초점이 맞춰졌으며, 우리의 하루 학교생활의 시작과 끝은 "반공" 뿐이었다.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우리의 맹세"를 외쳐댔다.
드디어 스탈린이 죽었다. 그리고 휴전이 이루어졌다. 남북통일은 고사하고, 우리들 피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한 채로였다. 어쨋든 휴전 협정은 조인되었고, 무참한 살육은 일단 멈췄다. (인재군의 회한과 분노는 끝없이 이어집니다. 구대열)
만약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한 달 늦게 항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나는 아버지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왜나면 아버지는 1945년 8월 19일부로 일본 군대 입영 명령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어쩌면 사이판이나 괌에서 관광이 아니라, 아버지의 유흔을 찾아 헤맸을지 모른다.)
귀향의 꿈이 무산된 우리는 이제 남한 땅에서 본격적인 삶의 터전을 새로 마련해야 했다. 우리는 부산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아무 연고도 없지만 대도시에 가야 뭔가 지푸라기라도 잡힐 것 아닌가? 그러나 지금 당장은 아니다. 아무 대책 없이 이 많은 식구가 한꺼번에 부산으로 갈수는 없고, 먼저 막내 삼촌과 사촌형 용재를 보내기로 했다. 무작정 출동이지만 그래도 젊은 청년들이니까...
아버지는 마침 유천 저수지 공사장에 막노동할 수 있는 자리가 생겼기 때문에 일단 남았다. 그러다보니 가내 수공업은 끊어졌다. 할아버지는 틈틈이 텃밭의 채소나 과일을 가꾸는 일이 있었으나, 어린 내가 홀로 할 수 있는 일거리는 없었고, 내겐 처음으로 많은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새벽 일찍 출근하신 아버지께 드릴 주먹밥을 싸가지고 멀리 유천까지 가서 전해드리고는 오후 학교 수업 받으러 가고, 긴 여름날 틈틈이 친구들과 산양천에서 멱감는 것이 일과이자 취미가 되었다. 키의 몇 배나 되는 냇물이 처음에는 무서웠으나, 오래지 않아 물고기처럼 헤엄이 늘자, 산양천은 우리들의 둘도 없는 놀이터가 되었다.
우리는 학교 가는 길에, 휴식 시간에 그리고 오는 길에 틈만 나면 산양천에 다이빙하였다. 발가벗고 냇가 풀밭에서 달리기를 하거나 긴 뚝방 위에서 장거리 달리기도 하였다. 나는 단거리는 별 볼일 없었으나 장거리에서는 또래 중에서 일등이었다. 내 어린 시절 중 이때가 제일 신났다고나 할까? 왜냐면, 나중에 부산에 나가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계속 우리 집의 부업(나무젓가락과 성냥 만들기, 토끼와 오리 기르기, 상이군인 식당일 등) 을 돕느라 별로 쉴 틈이 없었는데, 이 때 만은 그런 노동에서 해방되어 실컷 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책 읽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동네 형들의 교과서며 참고서 등 뭐든지 닥치는 대로 빌려 읽었다. 책을 읽으면 글줄이 눈으로 빨려 들어오고, 되풀이 읽다보면 책 페이지가 영화화면처럼 뇌리에 새겨지는 게 매우 재미있었다. 문제는 나의 속독력이 빼어나고 기억력이나 수리력도 뛰어나다보니, 5학년에서 공부 잘하던 홍재형이 할아버지로부터 억울하게 언둥이(바보) 취급을 받는 것이었는데, 그와 관계없이 우리 둘은 매우 사이가 좋았다. (인재의 암기력, 암산력은 우리 고등학교에서도 최고로 꼽혔습니다. 그의 자서전 후반부에 우주, 태양계, 지구, 5대양 6대주, 각 국의 면적, 성천강, 대동강 등 한반도의 강 길이 등이 줄줄이 나오는데 구글에서 찾은 게 아니라 모두 그의 머리에 저장된 것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습니다. 옛날 문리대 앞 다리에 앉아 지나가는 차 번호판이 6789라면 67x89를 쉬지 않고 계산하기도 했지요. 구대열).
어느 날 우리는 삼촌과 같이 앞산에 나무하러 갔는데, 도토리나무 사이로 뭔가 붉은 게 보여 가서 보니, 커다란 땅벌떼가 요란스레 집을 짓고 있었다. 우리가 신기하게 보고 있는 사이 형은 무슨 생각인지 큰 흙덩이를 거기에다 던졌다. "부우---응" 소리와 함께 모든 벌이 일시에 날아올랐고, 형이 먼저 도망을 쳤다. 삼촌과 내가 뒤따라 도망을 쳤으나, 걸음이 느린 내가 위기에 처한 순간, 삼촌의 신발이 벗겨지면서 돌아서는 바람에, 수십 마리의 벌이 "벌떼같이" 삼촌을 집중 공격했다. 삼촌은 간신히 일어나 집에까지 돌아오기는 했으나, 사흘간을 고열로 혼수상태를 헤매었다.
그때 삼촌의 신발이 벗겨지지 않고, 내가 벌떼 공격을 받았다면 나는 아마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듯 미운 정 고운 정 다든 형이 드디어 부산으로 먼저 떠나게 되었다. 산 너머 율포에 사시던 큰아버지께서 한발 먼저 부산으로 가시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때는 우리 피난민촌에서도 발 빠른 사람들이 제각기 부산이나 서울 등지로 떠나고 있었는데, 나는 형과 헤어지는 것도 서운하고 또 부산으로 가보고 싶은 욕심에 심히 착잡하였다.
어느덧 1954년. 이제 나이가 두 자리 수가 된 나는 괜히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3월에 2학년을 수료하였는데, 석차는 약 칠십 명 중 15등이었다. 일 년 내내 모든 시험에 100점을 받았는데 왜 꼴찌 우등을 하는 건지... 나는 원주민 담임선생님이 미웠지만, 이번에도 유구무언.
3학년 담임은 이낙예 선생님이었다. 이 분은 나와 먼 친척 되시는 피난민 선생님이셨다. 어느 날 이 분 댁으로 심부름을 갔는데, 마침 선생님은 식사를 하고 계셨다. 작은 밥상에 보잘 것 없는 상차림이었다. 나는 하늘같이 우러르던 선생님이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식사하는 것도 놀라웠거니와, 그 하찮은 메뉴를 보고 무한한 동질감을 느꼈다.
게다가 선생님은 웃으시며 나를 향해, "인재, 밥 먹었냐?" 하시는 게 아닌가? 나는 의례적으로 "예, 먹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지만, 가족 아닌 사람으로부터 받은 그 온기어린 한마디에 너무나 감동하였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도 인정이 있다는 것에 새삼 용기가 솟구쳐 오르는 것이었다.
나는 계속 열심히 놀고 열심히 책 읽고, 그리고는 새벽 잠자리에서 할아버지에게 내가 공부한 것을 자랑하였다.
나 : 아바이(할아버지), 아바이, 있쟎아요. 세계 인구는 22 억인데요. 그중 중국 인구가 4억 7천만이고, 미국은 1억 5천만이래요.
할아버지 : ..............
나 :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는 소련인데요. 우리나라의 백배래요.(정확합니다! 2,200백만 평방 킬로. - 구대열).
할아버지 : ..............
나 : 태평양의 면적은 세계 육지 전체면적보다 크대요.
할아버지 : .................
나 :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 산인데요, 높이는...
할아버지 : 뭐라고, 이놈아!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은 곤륜산이야.
나 : 아바이, 00 책에 그렇게 씌어져 있어요.
할아버지 : 그래도 아니야, 곤륜산이란 말이야, 이놈 !
할아버지의 서당 지식과 나의 신세대 지식 사이에는 커다란 단층이 있었다.
선발대로 부산 나갔던 막내 삼촌이 몇 달 만에 잠시 집에 들렀다. 그새 미군 부대에 취직하여 "슈샤인 보이"로 일한다 하였다. 선물도 없이 빈손으로 왔지만,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얼굴 표정이며 매너가 시골 섬에서 가마니 짜고 나무하던 옛날 보단 많이 세련되어진 모습이었다. 영어로 노래를 부르기에 물어보니 미군들이 이승만대통령을 욕하는 노래라 하였다. 본토에서 본 나라 돌아가는 모습, 친척들의 동향, 부산에서의 생활상을 밤새워 이야기하는데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할아버지랑 나누는 깊은 이야기는 모르겠으나, 부산이라는 대도시의 생활상이 특히나 흥미가 있었다. 거기엔 이층, 삼층이 넘는 큰 "비루딩구"가 즐비하고, 큰 버스며 전차들이 꼬리를 물고 달린다고 했다. 학교도 크고 학생들은 모자 쓰고 교복을 입으며, 책보가 아닌 책가방을 들고 다닌다고 한다. 비가 올 때는 우산 쓰고 장화 신고 다닌다는 둥....
나는 이삼층에서 살다가 떨어지면 어쩌나 염려되고 차가 많아 길 건너는 게 어렵겠다고 걱정되었으나, 우려보다는 기대가 훨씬 컸다. 아! 모자 쓰고 교복 입고... 우산이라는 건 어찌 쓰고 장화라는 건 또 어찌 신는지 모르나, 여하튼 멋 질 거야... 식사도 하루 세끼 먹을 수 있을테고 .............
아! 부산, 부산, 부산 ..............
나는 교과서마저도 제대로 배달되지 않는 이 섬에서 살다가, 부산으로만 가면 모든 게 금방 좋아질 것 같은 환상에 들떠 있었는데, 실제 할아버지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부산으로 나다니시며, 차근차근 이사 준비를 진척시켰다.
3 학년 1 학기를 마치고 방학이 되었다. 평소 교육에 관심이 없는 것 같은 할아버지는 고맙게도 나의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부산으로 이사를 가기로 결정하였다.
9월 19일.
우리 일곱 식구는 가재도구를 나누어 들고, 장승포를 향해 떠났다. 3년간 애지중지 키우던 진돗개 에스와 갓난 새끼 네 마리는 4,000환에 팔고, 초가집은 살 사람이 없어 친척에게 처분을 부탁한 채...
장목면을 떠나올 때는 주인집 식구가 울어주더니, 동부면을 떠날 때는 에스가 나를 울린다. 떠나는 우릴 보고 상황을 눈치 챈 에스는 한참을 쫓아오다가 새끼가 생각난 듯 돌아가더니 다시 달려오다가 돌아가고 또 미친 듯이 달려오다가 돌아가는데 보다 못한 아버지가 울부짖는 나를 강제로 끌어 당겨 둘을 떼어 놓는다.
피난살이와 이사!
난 곳에서 죽는 식물과 달리, 동물인 인간은 어차피 움직이고 이동하기 마련이지만, 두 동생을 이 섬에 묻고 떠나는 심정이 내 어린 마음에도 착잡하건만, 어른들이야... 어찌 보면 우리 일가의 역사는 피난의 역사인지 모른다. 신라시대에 중국 대륙에서 한반도로 넘어와 전주에 자리 잡은 것도 (전주 이씨) 정복이 아니라 피난이었을 테고, 그로부터 오백년 후 삼척, 덕원을 거쳐 함경도, 강원도 일대를 삼백년간 전전한 것도 탐관오리들의 박해를 피하기 위한 피난 행이었고, 문중에 이성계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와 새 왕조를 세웠으나 핵심 왕족이 아니었으므로 함흥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어 사백년을 산 것이 겨우 면피였는데 그나마 6.25로 깨어지고 4년의 섬 유배생활.
우리에게 6.25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나 역사를 과거로 돌릴 수는 없다. 미완성 교향곡 자체가 작품이듯 이 미완의 비극 자체를 역사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심판은 후세에 맡기고 앞으로 나아가자. Clotho가 우리 앞날에 어떤 사람들을 만나 어떤 삶을 엮어가도록 운명의 틀을 짜놓았는지 모른다.
1954 년 9 월 20 일.
우리 일곱 식구의 운명을 실은 작은 여객선은 부산을 향해 장승포항을 떠난다.
뚜.........뚜............뚜.............(끝)
사진, 거제도를 떠나기 직전의 가족사진. 앞줄의 소녀는 사촌 누나, 어머니가 안고 있는 아이는 여동생 부억(후에 남숙으로 출생 신고)이다.
첫댓글 필자가 왜 소설가가 되지 않았나 궁금증이 인다. 실화임에 틀림이 없지만 소설적인 구성도 눈에 띈다. 감동적인 글이다.
글중 이인재는 문리대 같이 다닌 이인재 동문인가요...어럴 때 사진이지만 이인재 동문을 닮은 것같습니다.
맞소이다.
어린 시절을 기억해 이처럼 정밀하게 썼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소개해 준 구 교수에게 감사. 전쟁통에 어떻게 저런 사진을 찍고 지금까지 60년을 보존했는지 감탄할 뿐이다. 50년 이상된 물건부터 골동품 범주에 든다고 한다. 가보로 잘 보존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