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산새 지저귐에 깨어났다. 원래 느긋하게 잠자리를 이어가는 편이 아닌데 6월 3일 아침은 아름다운 산새 소리 때문에 완전 설레고 흥분했다. 아내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테라스를 들락거렸다. 침엽수림에서 번지는 산새 소리는 동이 트자마자 바깥으로 날 불러 냈다.
터미널 주위를 일별한 뒤 전날 개울 건너며 봤던 침봉이 엄청 궁금해졌다. 사소룽고(3181m)의 가장 높은 왼쪽 봉우리가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윗동네로 무작정 올라갔다. 30분쯤 올라 어느집 뒷마당-이라기보다 버려진 밭뙈기가 맞겠다-에 앉아 야생화 사이로 첨봉을 넣어 사진을 찍었다.
아침 돌아와 씻고 호텔 조식을 들었다. 전날 친절히 맞아준 여주인은 보이지 않고 독일어 억양이 무척 강한 남편이 커피나 차를 들겠냐고 정중히 물었다. 여느 호텔 조식과 다를 바 없는데 안주인의 섬세한 취향을 반영해 값비싼 식기에 플레이팅이 꽤나 아름답다. 멀리 만년설 보이는 창가에 앉아 고급스러운 식재료를 쓴 것이 틀림없는 콘티넨탈 조식을 들고 묵직한 맛의 커피를 마시니 날아갈 듯 상쾌해진다.
오전 8시 30분 케이블카가 다닌다고 했는데 이미 8시 전부터 직원들 실어나르느라 분주했다. 20유로씩 주고 첫 편을 타고 올랐는데 한국인 부부 세 쌍이 인사를 건넨다. 우리 부부 보고 굳이 함께 타자고 했는데 불편할 것 같아 사양했다. 몬세우 정상에 오르니 파노라마 절경이 펼쳐진다. 어제는 예고편에 불과했다는 것을 절감했는데 역광인 데다 구름도 짙어 한두 장 찍고 표지판 보고 부부가 합의한 대로 오른쪽 스킬리아르 쪽으로 방향을 잡아 시계 반대방향으로 이 평원을 돌아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사람이 없어 좋았다. 집친구가 몇년 전 가봤다는 콘트린 쪽으로 간다. 아직 야생화는 그리 많지 않았다. 걷기 시작한 지 20분 뒤에야 나이 지긋한 부부들을 만났다. 이카로 산장이란 곳에서 버스가 다닐 정도로 너른 길을 만났다. 사이저 알름이란 곳에서 다시 샛길을 탔다. 남녀의 애틋한 사랑 얘기가 깃든 오롯한 길 ‘한스와 폴라’의 길을 따라 에델바이스가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벤치에 앉아 사소룽고를 조망할 수도 있었다.
스킬리아르 연봉이 훤히 보이는 콤패치란 곳에 이르니 오르티세이 아래동네 카스텔로또에서 올라온 투어 버스에서 쏟아져 나온 관광객들과 조우하는 일이 잦아졌다. 모터사이클과 자전거족들은 말할 것도 없다. 노인네들은 리프트로 파노라마 뷰포인트까지 오르는데 우리야 걷기로 했다. 엄청난 된비알이다. 지그재그로 올랐다. 전기자전거로 부부가 오르는데 강아지가 뒤에 앉아 여주인과의 간격이 벌어지자 왕왕 짖어대 남편이 간격을 조절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물론 70~80대 어르신들도 많이 쉬고 하면서 올라왔다.
파노라마 뷰포인트는 뭔가 열심히 새 건물을 짓고 있어 소음도 장난 아니고 건물 때문에 경관도 해쳐 사스룽고 바로 아래 칩엽수림이 시작되기 전 나오는 산장에서 가쁜 숨을 몰아쉴 겸 굴라시 수프와 야채 수프를 시켜 맥주 한 잔씩 걸쳤다. 서비스로 나오는 빵(집친구는 계산될 수 있다고 먹지 말라고 했는데 난 말을 듣지 않았다)을 수프에 찍어 먹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따듯한 햇살을 받으며 커피까지 시켰다. 웬일인지 계산서가 없어 정확하지 않은데 20유로 안팎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약간 동유럽각이 나오는 시골 처녀가 극진하고도 즐겁게 서빙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빈 자리가 없어 마침 올라온 한국 젊은이 한 쌍에게 물려주고 길을 재촉했다.
이제 침엽수림에 뛰어들었다. 가파른 내리막인데 자전거족들이 편안히 내려가게 준포장을 했다. 자전거들 쌩쌩 달리라고 하고 우리는 풀밭에 앉아 셔터를 미친 듯 눌러댔다. 과연 지난번 알프스 때처럼 길이 어느 순간 흐릿해진다. 8번 길을 따라 테를러란 곳을 향하다 눈 쌓인 곳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눈이 제법 많아 미끄러워 집친구는 다른 길을 찾자고 했으나, 잠시 숨을 고르며 유심히 살피니 분명 길이 드러나 보였다. 그래서 곧바로 길을 찾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울울한 수림을 빠져나오니 살트리아란 마을이다.
여기도 공사판이다. 커다란 견공을 거느린 어르신 부부를 종종 따라 가니 과연 오롯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솔레 손네란 마을까지 한달음에 내달렸다. 이곳에서 몬세우까지 케이블카는 아직 다니지 않았다. 모두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오르막을 걸어오르는데 돈 많은 중국 아가씨들이 소달구지를 끌고 지나간다. 우리는 흥칫뿡, 하면서 숨가쁘게 올라 몬세우 정상에서 와인 한 잔과 맥주 한 잔 시켜놓고 한숨 돌렸다. 아 좋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17km쯤 걸었다.
케이블카로 오르티세이 돌아와 전날 입장마저 실패했던 편의점 당당히 들어가 생수 한 병 사들고 호텔 돌아와 씻고 떡국과 라면을 데워 테라스에서 먹으며 재잘거렸다. 그날 아침의 산새들처럼.
사진설명.
지난 3일 점심을 먹고 다시 길에 나선 우리가 테를라란 곳에 이르러 본 사소룽고.
알페 디시우스 트레킹 지도.
그날 아침 오르티세이 산책 도중 만난 사소룽고의 위용 두 장면
트레킹 출발 지점에서 멀지 않은 콘트린 부근
이카로 호텔 부근 큰길과 만나는 지점에 있는 벤치.
점심을 든 산장 벤치에서 바라본 사소룽고
솔레 손네 부근에서 돌아본 연봉들 왼쪽부터 사소룽고 사소피아토 카티나치오 가운데가 살트리아 마을이다.
솔레 손네와 몬세우 중간 지점에서 돌아본 풍광. 사소룽고 왼편은 그루포 셀라. 사실 두 첨봉 사이로 돌로미티 최고봉 마르몰라다(3343m)가 있는데 이 각도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솔레 손네 부근에서 바라본 풍광. 돌아보니 알페 디시우스 트레킹의 중심에는 늘 사소룽고가 버티고 있었다.
첫댓글 캬! 좋다!
재잘거렸다는 표현, 인상적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