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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회 회원들! 경주, 포항 나들이
숱한 이야깃거리를 남겼던 이수도 여행 이후 오랜만에 바깥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친구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한 친구들이 식당에 따로 모였다. 혼주의 배려로 뷔페에서 식사를 하지 않고 식당에 모인 친구들은 그동안 쌓아 두었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웃음꽃이 피기 시작하였다.
우리 장우회 회원들은 봄나들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회장도 바뀌었으니, 3월에는 창원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여성회원들은 한마디로 거절을 했다. 돈도 있으니, 이수도 여행처럼 1박2일로 여행을 가자고 주장했다. 회원들의 성화에 못 이겨 3월에 여행을 추진하기로 했다.
날짜는 우리가 늘 만나는 날을 중심으로 정하고 여정을 정하는 것은 내 몫이 되었다. 나는 총무로서 귀찮지만 친구들을 위해 여정을 마련하기로 했다. 나 역시 여행을 많이 해 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은 망설여졌다. 여행을 많이 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친구가 흔쾌히 받아들이고 여정을 두 방향으로 짜서 보냈다. 하나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동해안 쪽이고 다른 하나는 전라도 방향이었다.
친구들에게 두 여정을 카톡으로 알렸더니, 한 친구가 전라도 쪽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다른 친구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나는 전라도 쪽으로는 길이 익숙하지 않아 경주 쪽으로 여정을 잡았다. 그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이 렌터카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알아보았더니 한 달 전에 예약을 해야 된다고 한다. 그리고 김해에 있는 전 렌터카 회사에 수소문을 하라고 한다. 나는 이 분야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아들한테 전화를 했다. 아들이 아는 렌터카 회사에 전화를 하니 차를 구할 수 있었다. 숙박을 할 수 있는 모텔은 여정을 짜 준 친구가 알려줘서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여행에 대한 준비를 하고 당일 승차할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었다. 3월 16일 오전 8시 30분 김해를 출발해 창원 정우상가 앞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세 사람이 타야 하는데 두 사람만 나와 있다. 한 사람은 회장인데 자기 집 앞에 나와 있다고 연락이 왔다. 가는 길이지만 조금은 섭섭하였다. 단체생활을 할 때에는 약속된 장소에서 기다려 주는 것이 친구간의 예의이고 일을 추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신경을 덜 쓴다. 운전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약간 부담이 되기도 하였다. 그녀가 기다리는 곳에서 차를 멈추었다. 그의 남편도 나와 있었다. 그의 남편은 내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의 아들이 내 제자이기 때문에……. 그녀의 남편은 우리들의 여행을 축하하는 듯이 찬조금을 주고 갔다. 이것은 생각하지도 않은 기쁨이었다. 물론 그의 아내가 회장이라고 내는 것인지 모르지만, 우리 친구들에게 커다란 기쁨을 준 것만은 사실이다. 그녀를 태우고 마산역 광장으로 갔다. 마산역 광장에서 동행할 친구들을 태우고 운전을 잘하는 친구가 여행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우리는 동경주를 향해 달렸다. 네비를 켜 놓았지만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스마트 폰에 있는 T map를 이용해서 길 안내를 받았다. 길 안내 방송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차 안에서 오랜만에 나들이하는 친구들의 이야기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상적으로 달려야 할 길을 놓치고 잘못 들러 헤매기도 하였다. 울산 시내로 들어가서는 안 될 일을, 들어가서 나오는데 시간을 지체하기도 하였다.
예정 시간보다 늦게 기림사에 도착했다. 경주 시내에 있는 관광지를 선택하지 않고 이곳을 선택한 것은 일반 사람들은 경주 주변 관광지를 잘 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기림사에 들러 절 내부를 구경하고 오늘 일정을 잘 소화할 수 있도록 부처님께 빌었다. 그리고 문무대왕릉으로 바로 갔다. 식당에 예약해 두었던 점심을 먹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원래 정해 놓은 일정을 조정하기로 하였다. 식사를 하고 넓게 펼쳐진 동해바다를 바라보았다. 친구들은 문무대왕릉을 잘 모르고 있었다. 친구들뿐만 아니라 관광하러 온 사람들도 잘 모르고 있었다. 육지에 있는 왕릉처럼 크게 장식돼 있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문무대왕릉은 수중릉으로 문무왕이 통일 후 불안정한 국가의 안위를 위해 죽어서도 국가를 지키겠다는 뜻을 남겼다. 그리하여 그의 시신을 불식(佛式)에 따라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龍)이 되어 국가를 평안하게 지키도록 하겠다는 뜻으로 유골을 바위가 있는 바다에 뿌린 것이다. 사람들은 왕의 유언을 믿어 바위 덩이를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여정을 조정하여 용남면 주상절리로 갔다. 나는 이곳에 도착한 후 깜짝 놀랐다. 내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곳이 아니었다. 처음 와 보는 곳이었다. 바닷물에 잠겨 있는 주상절리는 아름답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도 의문이 생겨 안내원에게 물었다. 이곳은 원래 이렇게 생긴 곳이라고 한다. 아마 다른 지방에서 본 것을 여기로 착각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되물었다. 친구들은 너무 좋은 곳에 왔다고 즐거워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푸른 바다! 아래로 보이는 주상절리는 정말 일품이었다.
이곳에는 주차할 곳이 없었다. 처음 우리가 주차한 곳은 식당이었다. 자기 식당에 식사하지 않으려면 차를 옮겨 달라고 했다. 그래서 다른 곳에 주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차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결국 친구는 찻집이 있는 주차장에 주차하고 왔다.
구경을 마칠 즈음 어떤 친구가 차를 마셨으면 좋겠다고 제의하였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는 차는 우리의 기분을 전환시켜 줄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주차를 해 놓은 찻집으로 갔다. 찻집에는 전망 좋은 자리는 이미 좌석이 다 차 앉을 자리가 없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구석진 곳에 앉아 차를 마시게 되었다. 그래도 여행 온 기분을 낼 수 있었고 즐거운 표정으로 일어섰다.
차를 타고 골굴사로 갔다. 원래 기림사에 들렀다가 나오면서 들러야 할 곳이 이곳이다. 점심 식사 시간이 촉박하여 바로 대왕암으로 갔던 것이다. 이 절에 처음 가는 친구도 더러 있었다. 이곳에서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이 절은 다른 절과 달리 응회암으로 이루어진 곳에 마애여래좌상(보물581호)이 있다. 친구들은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곳에 가 참배를 했다. 필자도 이곳에서 참배를 하고 여행 온 흔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또 이곳은 선무도 수행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공연에 대해 아는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것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곳은 수천 년 전부터 전래된 남근 바위와 여궁의 음양 조화로 득남을 기원하는 민간신앙이 간직된 설화가 유명하다.
이곳의 관광을 마치고 감은사로 갔다. 필자의 경우에는 여러 번 왔다 갔지만, 친구들은 감은사라는 곳이 무엇을 의미하는 절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은혜를 고맙게 여긴다는 뜻으로 지은 절이다. 누가 누구에게 고맙게 여긴 것일까? 신라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의 은혜를 고맙게 여겨서 지은 절이다. 이곳에는 국보 제112호인 삼층석탑 2기가 있다. 이곳을 관람하고 감포읍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이견대가 있는데, 이것은 신문왕이 수시로 와서 대왕암을 망배했던 곳이라고 한다.
이곳을 지나 감포읍에 도착해 우리들의 숙소로 찾아갔다. 숙소에서 그대로 여행 짐을 놓아두고 저녁 식사하러 갔다. 마침 가자미 철이라 가자미회를 먹자고 했다. 모텔에서 안내하는 곳에 가지 않고 다른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여행의 회포를 풀기 위해 소주도 한 잔 했다. 회가 나오기 전에 친구가 종업원에게 종이와 볼펜을 요구했다. 나는 뭣 때문에 그렇게 하는지 몰랐다. 친구가 한참동안 볼펜으로 무엇을 그려놓고 설명을 했다.
우리는 원래 10명이 가기로 돼 있었다. 한 사람이 갑자기 아파 동참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방을 세 개 준비했다. 방 하나에 세 명씩 자면 원만하게 해결된다. 문제는 여자가 다섯 명이고 남자는 네 명이었다. 여자 두 명이 자는 방에 남자 하나가 같이 자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여자 두 명이 의논해 운전을 많이 한 친구를 자기들 방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선택된 이 친구는 그곳에 자는 것이 부담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친구가 종이 위에 그려놓은 것이 사다리타기였다. 우리는 친구의 요구대로 사다리타기를 했다. 제일 먼저 내가 시작했다. 혹시 내가 당첨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염려가 현실로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은 사다리타기를 해 보지 못한 채 부담스런 상황을 피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는 가자미회를 먹으면서 소주 일 배를 했다. 오랜만의 외출! 부담 없는 초등학교 동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여행하면서 겪었던 피로를 풀었다. 넓은 바다는 어둠에 싸였고 상가에는 불빛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설레는 마음을 다잡을 수 없어 이리저리 걷기도 하였다. 결국 우리는 설레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노래방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한 시간 가량 흥겹게 놀고 숙소로 돌아왔다.
당첨된 내가 여성 두 명이 자는 방에 합숙하게 되었다. 침대 위에는 나 혼자 자고 바닥에는 두 여인이 잠을 청하게 되었다. 나도 운전을 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잠자리를 빨리 청해야 했다. 욕실에 가서 양치와 세면, 그리고 발을 씻고 들어와 옷을 입은 채로 누워 잤다. 여친 둘은 옷을 입은 채 잔다고 나무랐다. 나는 밤에 일어나 소변보러 갈 적에 옷을 갈아입고 가는 것이 번거로워서 그대로 잠을 청했다.
두 여성은 소녀시절부터 한 동네에서 자랐다. 이로 인해 어릴 적부터 있었던 일들을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있었다. 운전하는 친구를 배려한다고 침대에 자도록 해 놓고 둘이서 속삭이니 무슨 잠이 깊게 들겠어.
삶은 즐거운 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가운데 혼자 사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아팠다. 순간 스치는 말 가운데 “남의 살을 대 본 적이 오래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너 재혼해야 되겠다.”고 응답한다.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을 말해 준다. 나이 들면 고독을 초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부부가 오래도록 동행한다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튿날 우리는 다음 여행지로 갈 채비를 하고 식사하러 갔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하기에 적당한 음식점을 찾아 다녔다. 내가 선택해 놓은 식당은 친구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노점에서 채소를 파는 아줌마한테 물으니, 맛집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친구들과 아침 식사를 하고 다음 여행지인 구룡포로 갔다. 이곳에는 대게 축제를 하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친구는 이곳이 처음이다. 마침 운전하는 친구가 며칠 전 예술인들의 연수로 이곳을 들렀다고 하면서 안내를 잘 해 주었다.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에 갔다. 이 거리를 거닐다가 친구의 안내로 하시모토 가옥으로 갔다. 그곳에서 해설사를 초대해 구룡포가 생기게 된 유래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가옥 내부를 둘러보면서 자세한 설명을 듣게 되었다. 가옥구조에 대한 이야기는 기억할 수 없지만, 나의 눈길을 끈 것이 있었다. 그녀의 딸이 연주한 일본 악기이었다. 나는 이 악기를 보면서 80년대 예비군 교육에 참여해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당시 들은 이야기는 어떤 선생님이 거제도의 한 가정에 가정방문을 갔었는데, 재를 모아놓은 헛간에 일부가 탄 가야금이 있었다고 한다. 그 주인은 이것을 보고 뭇사람들이 팔라고 해도 팔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님이 가져가시려면 드리겠다고 해서 그 선생님이 적당한 금액을 주고 사왔다고 한다. 그것을 마산에 있는 악기점에 가져갔더니, 고가로 매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팔지 않고 소장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나라 전통 악기인 가야금은 12줄인데 이 악기는 13줄로 된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최초의 가야금은 13줄로 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가치가 있는 것이라 고가로 매입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현재 내가 파악하고 있는 것은 13줄의 가야금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 오늘 처음 본 고토(일본현악기)가 13줄로 돼 있다. 혹시 이 고토가 그 당시 헛간에 있었던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을 관람하고 공원으로 올라갔다. 공원에는 구룡포를 상징하는 용의 조형물이 있었다.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도가와 야스브로 송덕비가 있었다. 이 비는 일제 강점기에 구룡포 방파제 축조와 도로개설 등에 관여한 도가와 야스브로를 일본인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일본에서 규화목을 가져와 해방 전인 1944년경에 송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패전 후 일본인들이 돌아간 후 구룡포 주민들이 시멘트로 덧칠하여 현재 비문의 내용을 알 수 없다고 적혀 있다. 또 ‘구 충혼탑 기단, 신사터 초석 및 쵸우즈야’라고 새겨 놓은 것을 보았다. 이 구조물은 ‘제국재향군인회’라는 명문을 지우고 ‘대한군인유족회’라고 다시 새겨 구 충혼탑으로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신사를 참배하기 전 손을 씻는 쵸우즈야(석재 수반)가 발견되었다고 적어 놓았다. 마지막으로 과메기 문화관에 들러 과메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우리의 식단에 오르는지를 살펴보았다.
“포항, 그리고 구룡포
연오랑 세오녀의 일월 정신이
살아 숨쉬는 빛의 도시
동해안의 수려한 자연환경이
펼쳐지는 해양레저 도시
포항
걷다 보면 바람이 되고
보다 보면 파도가 넘실거리는
찬란한 항구
구룡포”
라는 글을 촬영한 후 친구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내려갔다. 친구들과 차를 타고 호미곶으로 갔다. 이곳에 도착하니 TV에서만 보던 손 모양을 만든 조형물이 보였다. 그리고 연오랑 세오녀상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이곳이 연오랑 세오녀의 설화가 있는 곳인 줄 모르고 학생들에게 그 내용만 강의했던 것이었다. 또 「한민족 해맞이 축전」 행사에 참여한 관광객들이 새해 아침에 직접 떡국을 끓여 먹는 체험행사용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솥이 있었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여행에 지친 몸을 말끔히 씻고 즐거운 마음으로 단체 사진을 찍었다. 모두들 표정이 맑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는 포항 죽도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죽도시장 근처에 있는 주차장에 주차를 해 놓고 시장에 들렀다. 동해 쪽에서는 가장 큰 시장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여행하기 전에 이곳의 특산물을 조사했다. 고래고기와 개복치가 눈에 들어온다. 이 기회에 고래고기도 먹어 보고 개복치 맛을 보고 싶었다. 친구들의 생각은 달랐다. 구룡포에서부터 대게를 먹자고 졸라대는 친구들의 성화로 대게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 경험이 부족한 우리는 대게의 무게로 흥정한 것이 아니고 크기를 기준으로 대게를 샀다. 대게를 사면 쪄 주는 데가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한참 동안 지키고 섰었다.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분들은 그것으로 생업을 이어가는데 대게의 마릿수를 속일 리가 없다. 주인은 기분이 좀 상한 모양이다. 뒷말투를 보아서 그렇게 느끼게 됐다. 2층에 올라가니 대게를 먹을 수 있도록 마련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분들은 그분들대로 초장과 게장비빔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렇게 마련된 대게는 우리의 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친구들은 옆에 쳐다보지도 않고 게살을 먹는데 열중이었다. 오랜만에 먹는 대게라 속살을 빼 내어 먹는 방법을 몰라 당황하는 친구도 있었다. 여행의 하이라이트인지도 모르겠다. 점심시간도 늦었기 때문에 주린 배를 채우느라고 정신없이 먹는 모습은 우리들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여행의 기쁨을 마무리하고 우리가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 어떤 친구는 더 있다가 집에 가자고 해 여행의 즐거움을 더 느끼고 싶었던 모양이다. 다음을 기약하면서 우리는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갔다. 이번 여행은 관광버스로 가는 것보다 더 알차고 재미가 솔솔 넘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 여행을 기획한 나도 친구들이 그렇게 말해 준 데 대해 보람을 느꼈다.
2019년 3월 16~17일 여행 후기를 적다. 2019. 5. 17.
첫댓글 부지런히 다니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