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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대한 소문 (수2:8-14절)
소문이란 어떤 가시적인 형태가 없으면서도 개인이나 국가를 꿈에 부풀게 하고 반대로 두려움에 떨게도 하며 심하면 한 개인과 국가를 멸망하게도 하고 흥왕하게도 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실로 소문의 내용은 그것을 듣는 개인이나 집단에게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대단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악한 소문이 난무하면 사회 전체가 불안해지고 좋은 소문이 만발하면 사회 전체가 긍정적으로 밝아지는 것입니다. 특히 현대 사회에는 가짜 소문이 너무 난발하여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애매하고 모호한 거짓 뉴스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가나안 땅에 퍼진 소문은 이 땅 백성들에게 공의의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께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가나안 백성들에게 어떤 반응이 나타났을까요.
첫째, 그들을 두려움에 휩싸이게 하였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하여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모두 마치고 진격 명령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실상 여리고 성의 정복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들의 사기입니다. 요단강 저편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하늘을 덮고 있는데 반하여 여리고 성의 주민들은 비록 성문은 굳게 닫고 있으나 극한 두려움에 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토록 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유는 오직 단 하나, 그들이 이스라엘과 동행해 오셨던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생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그대로 전했습니다.
*수2:9-10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은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실로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항상 동행해 주셨으며 그들의 구원을 위해 큰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모든 대적을 무찔러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 소문을 접한 여리고 성 주민들은 경악을 금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정녕 악의 세력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의 능력과 그의 공의로우신 심판에 관한 소문으로 두려워합니다. 선지자 요나가 니느웨 성에 가서 하루 동안에 말씀을 선포하면서 니느웨 성이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리라고 할 때에 그 성 모든 사람이 두려워 떨었습니다. 큰 능력으로 죄악을 철저히 다스리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소문은 세상을 떨게 하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악의 세력에 의해 세상이 지배되고 있는 듯하지만 마귀의 권세가 하나님의 권세를 이기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렀을 때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 거하면서 밤낮 소리를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자기 몸을 묶은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리고 있어 아무 사람도 그를 제어하지 못했으나 예수께서 다가가시자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하기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하며 사정을 합니다. 이는 아무리 마귀나 귀신의 권세가 대단하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여리고 성에 들어갔다가 기생 라합을 만나 놀라운 말을 듣고 진으로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참으로 상쾌하고 시원한 보고였습니다. 마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군대들의 개선 행진곡 같습니다. 싸우지도 않고 이미 승리를 확신하는 보고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소문이 전해지니 저들의 간담이 녹았다는 이 사실은 영적 전투에 임해야 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은 온 세계에 이미 예수의 복음이 전파되었고 하나님에 대한 소문은 크게 알려졌지만 한 가지 이상한 일은 이방인들이 이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거나 간담이 녹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힘써 복음을 전하지만 복음의 효력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진정 이방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간담이 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손에 확실하게 붙잡혀야 합니다. 악한 세력의 간담을 녹일 수 있는 첫째 조건은 신자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붙잡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힌 모세는 노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최대의 제국이었던 애굽의 간담을 녹였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하나님께 붙잡혀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비롯하여 당시 유대교에 물들어 있는 수많은 유대인들의 간담을 녹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온전히 붙잡힌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세상의 간담을 녹이기는커녕 너무나 왜소하고 초라하여 오히려 세상의 권세 앞에서 우리의 간담이 녹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부를 쫓아가고 물질문명을 따라가다 보니 세상이 흔드는 대로 흔들리고 세상의 파도에 휩쓸려 정처없이 표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간담을 녹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의의 병기로 무장하는 것뿐입니다. 의의 병기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입혀 주신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가 주 안에서 주의 힘과 능력으로 강건해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엡6:13-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의의 병기로 무장한 신자들은 결코 죄악의 세력에 두려워 떨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악의 세상을 향하여 담대히 그 죄악상을 지적하여 저들의 간담을 녹이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능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성적 판단을 초월하는 능력은 상대방의 위세를 제압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셨을 때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났다.’ 하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는 소문을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게 하였습니다. 여리고 성의 백성들의 간담이 녹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행하신 놀라운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물론 우리들 스스로는 능력자가 될 만한 아무 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능하게 하시고 힘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능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감사했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능력을 소유하기를 기도하고 소망하고 기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능력을 소유하기만 하면 세상은 감히 우리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한 영국인이 자기의 50회 생일을 맞으며 50년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50파운드의 돈을 헌금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방법과 대상을 기도하던 중 조지 뮬러 목사님이 경영하는 새소망 고아원에 이 돈을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생일날에 돈을 보내려 했으나 이상하게도 고아원이 자꾸 생각이 나니까 생일이 되기를 기다릴 수 없어 즉시 그 돈을 송금했습니다. 연말에 고아원의 회계 보고서를 받아 보았는데 놀랍게도 그가 헌금한 날자 앞에 목사님의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오늘은 돈도 떨어지고 먹을 양식도 모두 바닥이 났다. 그렇지만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내 힘으로 고아원을 이끌어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도 나타날 것을 기대한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기도했던 조지 뮬러 목사님에게 하나님은 능력으로 역사해 주셨던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대한 소문은 죄악의 세력을 두렵게 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처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수2: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마음이 녹았다.’라는 말 ‘마사스’는 어떤 공포나 두려움과 관련하여 완전히 절망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정신을 잃었다.’라는 말을 직역하면 ‘영혼이 남아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는 대항하여 싸울 용기를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들은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나서 스스로의 형편을 돌아보고 몸과 마음과 정신이 철저하게 위축되어 버렸습니다. 즉 모든 전의를 상실한 채 전쟁을 이미 포기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 관한 소문이 퍼지는 것은 그 어디든지 절대적인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 앞에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고 위축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무척 혼란스럽고 어지럽습니다. 정치인이 나라를 걱정하기보다는 자신의 안위와 권력 유지에 눈이 멀고 자식의 출세를 위해 갖은 모략을 아끼지 않습니다. 이런 사회를 개도해 나가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노력 이전에 먼저 죄악에 대해 단호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해야 합니다.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정확하게 소개할 때 저들은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잘못과 부족함을 깨닫고 깊이 자성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문은 그 소문을 듣는 이로 하여금 구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는 사람은 즉시 회개하며 구원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생 라합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실로 그녀는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자신의 구원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수2:12-13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네게 증표를 내라.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요나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니느웨 백성들은 옷을 찢고 회개했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준엄한 책망을 듣고 다윗은 회개하고 침상이 젖기까지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문은 듣는 이로 하여금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절실한 힘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전했을 때 유대인들이 그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사도들에게 묻기를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그때 베드로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즉시 세례를 받았는데 그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했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기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증거로 믿음이란 믿음을 가지기에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도 믿음이 일어나며 돌 같이 강퍅하고 경직된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감동시키는 것을 우리는 종종 봅니다. 예수님 당시 하인의 중풍병을 고친 로마의 백부장이나 귀신들린 딸을 고친 수로보니게 여인의 경우는 믿음의 특수성을 대변해 줍니다. 본문의 라합 역시 그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본질적으로 믿음을 가지기에 불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같은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라합의 믿음은 장애를 극복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녀는 세상에서 천시하는 기생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직업은 신앙의 측면에서 볼 때 악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하나님 앞에 한없이 절망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합은 자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 하나로 자신을 극복하고 나아가 가족들을 멸망의 구덩이에서 구원을 얻게 했습니다. 라합은 현실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면에 있어서 참으로 현명하고 똑똑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애굽의 노예였던 한 민족이 바로에게서 탈출하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명을 지탱한 것이나, 요단강 동쪽에 거주하는 아모리 족속의 강력한 왕들이 이끄는 군대를 전멸시켰던 일련의 사건들이 이스라엘 백성 그들 자신의 힘만으로 이루어졌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말렉 족속들의 전부가, 에돔 족속들의 전부가, 암몬 족속들의 전부가, 모압 족속들의 전부가, 가나안 족속들의 전부가 그렇게 믿지 않았던 그 현실을 라합은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이 모든 일들이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있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문명이 최고조에 달하고 인간의 지성이나 이성이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고는 하나 일개 기생이 깨달은 이치를 아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인간의 모든 역사와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진정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장님과 귀머거리인 것입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는 당대의 석학이라는 학자가 사공에게 ‘당신은 철학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사공이 모른다고 대답하자 석학은 ‘그럼 당신은 인생의 사분의 일을 잃고 있군요.’라고 했습니다. 조금 지나가다가 석학이 다시 묻습니다. ‘당신은 지리학을 알고 있습니까.’ 사공이 모른다고 대답하자 석학은 ‘그러면 당신은 인생의 반을 잃었군요.’라고 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돌풍이 불면서 배가 뒤집혀 두 사람이 강물에 빠졌습니다. 사공은 석학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헤엄을 칠 줄 압니까.’ 석학이 ‘헤엄을 칠 줄 모른다.’고 하자 사공이 하는 말이 ‘그런 당신은 인생의 전부를 잃었군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석학의 교만함이 자신의 생명을 잃고 말았던 것입니다. 인생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생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물론 철학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고 지리학을 배우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의 복음이 들려올 때에 그 말을 사실대로 들었습니다. 그녀에게는 들을 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정탐꾼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여호와께서 당신들을 위하여 홍해의 물을 갈라놓은 사건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구원의 기쁜 소식이 그녀의 귀에 들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듣지 않고서야 어찌 그녀가 구원에 관한 것을 알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 가운데서 행하신 놀라운 행위를 항상 전파해야 합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기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계속해서 전파해야 합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바다가 육지처럼 마른 땅이 된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대속의 피로 인하여 새로운 존재로 변하고 생명의 길이 열려진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들은 라합은 그 사실을 정탐꾼들에게 믿음으로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다. 그러므로 너희의 하나님은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쁜 소식은 사람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그의 마음이 스스로 통회하고 자복하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성경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이 순진한 고백은 정직한 고백으로서 가나안 백성들의 무력함과 절망에 대한 자책이었을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정당화하여 정당해질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오직 인간에게는 전능자의 강한 팔의 도움만이 필요할 따름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택한 백성을 구원하심을 믿었습니다. 본문 9절에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고 한 것입니다. 여리고 성의 주민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을 선포하고 처들어온 것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이 인류 역사의 주인이시며 주관자되심을 믿었습니다. 주님의 결정은 일점일획도 차질이 없으며 그의 언약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살 길은 오직 여호와의 백성으로 귀화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음도 믿었습니다. 온 세상이 죽음의 공포와 전쟁의 재화로 떨고 있는 마당에 라합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줄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제 라합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힙니다. 12절에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한 것과 같이 너희도 내게 선대한다는 것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한 것입니다. 구원을 향한 그녀의 믿음의 열정은 그녀를 담대하게 했습니다. 이 사실을 두고 히브리서 기자는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였습니다.
*히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의 메시야 계보에는 세 사람의 이방 여인이 등장합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과 기생 라합과 모압 여인 룻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계보에는 유일하게 기생 라합만 등장합니다. 이것은 라합의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믿음인가를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정탐꾼들은 라합의 간청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우리의 목숨이 당신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이곳을 무사히 탈출해 나간다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할 것이요 우리가 이 땅을 차지할 때에는 너희를 인자하고 진실하게 대우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라합은 그들의 맹세를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즉 정탐꾼들의 약속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믿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의 간청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만약에 모세와 선지자들이 행한 사역을 믿지 않는다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도 믿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진정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말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의 말을 믿고 그들을 밧줄에 달아 창문으로 탈출시켰습니다. 이 사실을 두고 야고보 사도는 라합은 행위로 인하여 의로움을 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약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라합의 행함은 그녀를 의롭다함을 받게 하였고 이 행위는 그녀가 표현한 가장 고귀한 신앙의 행위가 되었습니다. 이 행위는 그녀를 안전하게 하였으며 최선을 다한 신앙의 투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기자는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써 의를 얻고 행함으로 의를 완성시켜 나가야 합니다. 신앙은 사랑과 자비, 인내를 가지고 사람들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이 창문에 붉은 줄을 매라. 가족들을 다 집에 모으고 출입을 하지 말라. 이 일을 절대로 누설하지 말라.’고 하는 정탐꾼들의 말을 라합은 그대로 순종합니다. 그래서 정탐꾼들이 떠나자 마자 라합은 붉은 줄을 창문에 매었습니다. 불어오는 순풍이 자기 배를 가게 한다고 믿는 항해사는 바람에 자신의 항로를 전적으로 맡깁니다. 라합은 자신과 가족들의 생명 보존을 전적으로 정탐꾼들에게 맡겼습니다. 라합의 창문에 매단 붉은 줄은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예표합니다. 마치 출애굽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을 잡아 그 피를 집의 문과 문설주에 바른 것과 같은 것입니다. 유월절 날 밤에 죽음의 사자가 애굽을 심판했을 때에 문에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을 지나간 것처럼 여리고 성이 심판을 받을 때에 라합의 집은 이 붉은 줄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호수아는 라합의 집을 구원해 주었으며 그녀가 소유한 모든 것을 그대로 가지게 했습니다.
*수6:25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요구했던 것 이상의 것을 축복으로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이스라엘 왕족을 낳았다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녀의 혈통을 통하여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라합은 유대 지파의 직계 혈통인 보아스의 어머니가 되었고 보아스는 자비롭고 현명한 여인 룻을 아내로 삼아 오벳을 낳았으며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습니다. 라합은 그녀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며 승리의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은 부자도 아니요 권력도 아니요 명예도 아니고 오직 수많은 죄악, 영원한 사망 가운데서 구원을 받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소멸되거나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보화를 다 주고 산다고 해도 결코 아깝지 않으며 세상에서의 삶 전부를 다 바쳐도 좋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입니다. 여리고 성 안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의 불신앙의 죄 때문에 모두 멸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생 라합을 구원하신 것은 결코 그녀의 도덕성이 뛰어나거나 지식이 높거나 훌륭한 인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그녀의 구원은 그녀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녀는 ᅟᅵᆮ었고 다른 사람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구원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은 멸망을 받았습니다. 믿음에는 보상이 따릅니다. 닥쳐오는 심판을 면할 뿐만 아니라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보상이 우리들의 것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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