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고대사를 찾아서 (1) --- 동이족은 누구인가?
'육룡이 나르샤'를 비롯 한류 콘텐츠로 한국 역사 물이 인기 몰이를 하고 있다. 최근 젊은이들의 '한복' 사랑도 우리 문화에 대한 긍정적이다. 마침 조선일보에서도 한민족 고대사 연재를 시작 했다. 한국피부문화예술원에서도 우리 뿌리에 대한 정체성과 교양을 함양하기 위해 연재를 시도해 본다.
'식민사관'이란 용어를 잘 알고 있을 터이다. 일제 강점기에 불순하게 생성되어 '엽전의식'으로 아직 까지도 뿌리 깊게 배어 있는 그림자다. 이 식민 사관에 결정적인 전환을 이끌어 낸 역사 이론이 '내제적 발전론'이다.
1960~80년대 연세대 사학과 김용섭 교수의 '조선 후기 농업사 연구'에서 그는 조선 후기 사회가 외세의 작용이 없었으면 충분히 스스로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주장을 체계화 한다. 이를 기점으로 한민족 스스로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해 가고 있던 시점에서 외세의 침탈로 자생적 산업혁명을 억압하고 분쇄하는 바향으로 작용하였다는 것과 우리민족은 일찍부터 민주주의 체제를 갈망해 왔으며 이를 실현하고자 하는 역사적 운동을 실현해 오고 있었으나 외세에 의해 억업 당하고 왜곡 되었다는 것이다.
식민사관이 주장했던 것은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으로 한민족은 주체적으로 역사를 이끌 힘을 갖추지 못했고, 따라서 외세의 지배를받을 수밖에 없다는 이론이다.
과거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시대에 따라 민족사관이 발전한다. 현재를 사는 문예원 가족들 또한 이점에 공감할 것이다.
한국고대사학회 이강래 회장은 우리를 일컬었던 '동이'는 동방의 이민족을 낮추어 부르던 호칭이며 우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동이의 유래전 초기에는 서이(西夷), 남이(南夷) 등의 호칭있었고 한나라 이후에 동이, 서융(西戎), 북적(北狄), 남만(南蠻)으로 방위에 따라 구분하게 되었으며 여기서 '이(夷)'는 상나라 갑골문에서부터 '尸'자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尸·夷)의 뜻에 대해선 '죽은 사람' '키 작은 사람' '꿇어앉은 사람' 등 설이 다양하고 이민족을 낮춰보는 중화주의 사조다.
동이란 말은 당초 상(商)나라와 주(周)나라가 그 동방인 중국 산동반도와 강소성 북부에 분포하던 우이(嵎夷), 래이(萊夷), 회이(淮夷) 등의 이민족을 묶어 동이라고 통칭하였던 것이다. 동이를 포용했던 상과 달리, 주는 동이를 대대적으로 공략하였는데, 주가 제(齊)와 노(魯)의 제후를 세운 것도 동이 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런 동이가 제의 영역에 편입된 것은 전국시대말까지 였다.
그러 던 것이 기원전 221년 진(秦)나라 시황제가 제를 정복해 중국이 통일된 후 산동 지역은 동이 지역으로 인식되지 않게 되었다. 산동의 동이는 중국의 민호(民戶)가 되었고, 대신 가장 동쪽의 중국 군현인 요동군 동쪽의 세력이 동이로 새롭게 인식되었다. '삼국지' 동이전에 보이는 부여·고구려·예·옥저·읍루·삼한·왜인 등이 바로 새로운 동이가 된 것이다. 우리 민족이 동이와 관련되어 언급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한민족이 동이로 기록 된 '한서'에는 '동이 예의 군장 남려(東夷濊君南閭)'가 위만조선 우거왕을 배반하고 한의 요동군에 투항했다(기원전 128년)는 기록이 있다. 예는 예맥(濊貊)이라고도 표기되었는데 고조선의 근간이 된 종족이었다. '사기(史記)'에 위만조선을 '예주(濊州)'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고조선의 예맥족은 삼한의 한족(韓族)과 함께 우리 민족의 근간이 다.
출토된 문화재를 기초로 보면 기원전 2000년대 후반 산동반도의 진주문(珍珠門) 문화는 악석(岳石) 문화를 계승한 대표적인 청동기 문화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 요동반도의 청동기문화인 쌍타자(雙駝子) 문화와 비교해 보면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보인다. 산동에서는 민무늬의 다리가 셋 달린 토기가 주종이며, 요동에서는 지(之)자 무늬나 줄무늬가 있는 바닥이 평평한 토기가 주종이다. 산동에서는 지하에 구덩이를 판 움무덤이, 요동에서는 고인돌과 돌널무덤 등 돌무덤이 주로 만들어졌다. 이들 돌무덤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은 중국식 동검과 전혀 다른 형태여서 '요령식 동검'이라고도 불린다. 따라서 두 문화는 동질의 문화가 아닌 다른 문화다.
선진(先秦) 시기의 동이는 산동 지역의 여러 이민족에 대한 통칭이며 특정 종족에 대한 지칭이 아니었다. '삼국지'의 동이는 예맥족뿐 아니라 삼한의 한족, 읍루, 왜인까지 포괄한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부여.고구려·예·옥저가 말이 통한 것과 달리 읍루는 말이 달랐다. 일본도말이 다르다. 동이는 중국 중심의 주관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며 시기에 따라 그 대상이 바뀌었다.반면 충주고구려비에서 고구려는 신라를 '동이'라고 불렀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신라 또한 동이다.
따라서 '동이'는 자국 중심에서 방위적이고 시대적으로 대상이 달랐으므로 '동이'란 단어가 특정 민족을 지칭한다고 할 수 없다. 중국이 역사 서를 근간으로 동이가 자국에 병합 되었으며 고조선과 고구려가 자신의 문화라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 사관이 아니다.
우리가 중국의 역사의 일부라고 인식하고 있는가. 말과 문화가 다르며 의식이 다르다. 한류가 시대를 넘어 새롭게 해석 된다 해도 이것이 중국 문화의 일부가 아니 듯 '동이' 속에 한민족이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외려 현대에 이르러 민족적 숭고함과 민주적 주권을 인식하고 존귀한 존재로 독립성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계층간의 갈등과 국가와 종교간의 갈등에서 벗어나 일류평화와 화합을 통한 세계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림자료 : 조선일보 '고대사의 진실을 찾아서'에서 발취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