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을 베고 바다에 누워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가 문을 연 듯하다. 누가 두 손가락으로 살며시 연 듯한 하늘에는 무지개가 오래 머물렀고, 하얀 포말 부서지는 해안길에는 숲의 내음과 삶의 정취가 걷는 길마다 묻어났다. 대게 말고도 되게 좋았던 영덕!
대소산 망일봉 자락의 지세를 따라 한 행, 한 행 시를 완성하듯 들어선 가옥들은 전통의 아름다움을 애써 갖춤 없이 그 모습 그대로 유려하다. 이런 마을에서 나고 자라 목은 선생은 원나라까지 품격과 유희를 갖춘 문장을 뽐냈을까?
아름다운 마을, 아름다운 문장
괴시리 전통마을은 고려시대 대학자로 이름을 떨친 목은 이색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동해의 3대 평야로 일컬어지는 영해평야가 황금빛으로 물들어 마을 앞을 적시고, 커다란 방형 못에는 연잎이 고개를 떨구고 있다. 까치발을 하면 훤히 들여다보이는 흙담 안에는 주황빛 큰 감이 주렁주렁 한 광주리로 열려 감나무에 내려앉은 까치가 부러울 지경이다. 어쩌면 나만 감나무가 없을까? 생각이 들 만큼 가옥마다 풍성한 가을이 들었다.
원나라의 과거시험에도 합격한 목은 선생은 관료의 길을 걸으며 성리학을 연구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선생은 성균관 대사성으로 수많은 후학을 양성하고 조선 초 성리학의 지평을 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마을 제일 높은 언덕배기에는 선생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다. 고요한 숲속에 사색하러 온 것 같은 마음으로 안으로 들어서면 선생의 화려한 일대기와 고려 말, 조국을 염려하는 신하의 마음이 여러 전시물로 전해진다.
흰 눈이 녹은 골짜기에 험한 구름이 몰려 있구나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어 있는가?
날은 점점 저물어서 어두워지고 있는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고려 말 국운은 쇠하고, 다시 힘을 합할 옛 벗(충신)들은 이제 없으니 당대의 문장가 또한 어디로 가야 할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언제나 역사에서 한 시대의 마지막은 맹렬한 추격자에 의해 허무하게 사라지는 듯하다. 기자는 성큼성큼 다가오는 겨울 기운을 느끼며 마을 골목을 느릿느릿 걸었다. 가을 또한 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갑자기 사라지니 두루 담고, 기억해야 한다. 목은 선생이 한시를 남긴 것처럼.
계절과 풍경을 숨결 하나하나에 새기는 데는 오감을 깨우는 여정이 늘 정답이 된다. 경북 영덕 하면 ‘바다’ ‘대게’를 가장 먼저 떠올리고, 때론 그것이 전부인 줄 알지만 일찍이 이곳을 걸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전통, 역사, 산, 숲, 바다가 어우러진 영덕이 얼마나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지 말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장 걷기 여행코스로 ‘코리아둘레길’이 있다.
약 4500km로 동쪽의 해파랑길, 서쪽의 서해랑길, 남쪽의 남파랑길까지 우리나라 외곽을 하나로 연결한다. 지난 2010년 해파랑길의 시범 구간으로 선정된 ‘영덕 블루로드’(약 64km)는 770km로 이어지는 해파랑길의 모태가 된다. 부산 오륙도에서 강원도 고성에 이르는 50개 코스 중 19~22번이 영덕 블루로드로, 영덕에서는 A~D까지 4개의 테마로 걷기 여행길을 조성해 걷는 맛을 돋운다.
영덕 블루로드, 나의 선택은?
전국을 여행하는 일이 업이다 보니 많은 사람이 기자에게 묻는다. 지금까지 다녀본 곳 중 가장 멋진 곳은 어디였느냐고. 정답이 없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긴 하지만 왜인지 말을 해주는 것이 업 종사자의 임무인 것 같아 늘 추억을 되새기곤 한다. 그런 맥락에서 영덕 블루로드 4개 코스 중 가장 인기 있는 곳을 궁금해할 것 같다. 대답부터 하자면 B코스다. 50개에 달하는 해파랑길에서도 영덕 블루로드는 그 모태가 될 만큼 상징적인 곳이다.
코스별 매력이 입에 침이 마를 정도이지만, 여정상 4개 코스를 모두 걷는다면 2박 3일은 걸릴 터. 대부분 1~2개 코스를 고르고 그중에서도 풍광이 뛰어나기로 입소문이 자자한 B코스를 선택한 것이다. 여기서 팁! 한 코스를 중심으로 걷기 여행의 맛을 오감으로 느끼되, 영덕 구석구석 자리한 숨은 명소들도 꼭 찾아가보길 바란다. 마치 다른 차원이 펼쳐지는 듯 신비롭고 아스라한 하늘과 바다는 오직 영덕에서만 볼 수 있다. 코스 안팎으로 기대치 못한 극적인 장면도 분명 마주하게 될 것이다.
검은색 먹구름이 금방 비를 몰고 올 것 같은 오전, 노물리 방파제에는 하얀 파도의 기세가 대단하다. 걷기 여행에 나선 이들 눈에 잘 띄라고 길고 긴 나무 덱에는 ‘해파랑길’이라 쓰인 빨간색 리본이 매달려 있다. ‘두루누비’ 앱까지 내려받으면 실시간으로 길 안내 음성을 받을 수 있다. 걷기 여행길에 나섰다면 필수 준비물이기도 하다. 자연을 벗 삼아 걷는 길에 편의점이나 슈퍼를 발견하기 어려우니 생수와 비상식량도 챙기는 것이 유익하다.
촉촉한 비를 머금은 나무는 초록의 생기를 드리우고, 숲길에는 짙은 풀냄새가 가득하다. 오른편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짙푸른 바다. 구름은 바다에 닿을 듯 가깝게 내려앉았다. 넋을 잃고 풍광을 바라보는데 정수리 위에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내려놓는 마음으로 하얀 포말을 터뜨리며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 멀리서 점퍼에 달린 후드를 쓰고 걸음을 재촉하는 행인이 다가온다. 이런 날씨에 B코스에서는 아무도 만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동지를 만난 듯 반갑다. 나와 같은 처지의, 비를 맞고, 대자연 속에 놓인 타인에게 인사를 건넨다. “비 오는데 조심히 여행하세요.” 눈을 마주치고 “네. 고맙습니다.” 화답을 듣는다.
연이어 단체 여행객인 듯한 아주머니 무리도 다가온다. “우리 일행들 봤어요? 여기 절이 어딨어요?” 영덕 블루로드 B코스에 절이 있었나? 안내 지도를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절은 없는데, 아주머니들은 믿는 목적지가 있는 듯 우산을 쓰고 길고 긴 바닷길을 걷는다. 절이든, 교회든, 그 무엇이든 우리는 원하는 것을 찾을 것이다.
설령 6시간을 꽉 채워 완주하지 못했더라도 길을 걷는 행위 자체가 복되다. 정수리에 비도 맞고, 햇볕에 머리도 말리면서 걷는 여유가 토실토실 삶을 살찌운다.
항상 맑을 순 없어. 맑기만 해서는 대지를 적실 수 없으니
내가 어두운 건 필연이야
불안에 영혼이 떨릴 때
가만히 한숨을 뱉고 일어설 준비를 해
북풍의 소란에 구름 붉어지는 오후
나는 바다와 더욱 가까워진단다
짐 내려놓고 누워서 나를 안아보겠니
너를 한도, 끝도 없이 품어줄게
C코스의 목은사색의 길은 그 이름처럼 목은 이색 선생의 발자취를 느끼며, 사색의 정서로 나를 꽉 채우는 시간이 되어준다. 괴시리 전통마을에서 저 멀리 보이는 상대산에 오른 어린 이색은 바다에서 물을 뿜으며 노니는 고래를 보았단다. 고래불해수욕장에 얽힌 이색 선생과의 일화가 동화의 한 장면처럼 따뜻하다. 지금 고래불해수욕장에는 무지개가 떴다. 고려의 옛 신하도 이 무지개를 보았겠지. 하얀 구름 돌돌 말린 하늘, 누가 엄지와 검지로 연 듯한 작은 틈으로 무지개가 피어나고 있다. 8km에 달하는 해수욕장은 완만히 드넓어 하염없이 걷거나 뛰고 싶어진다. 아니, 그냥 누워서 하늘만 봐도 좋겠다. 구름 이불 덮고, 송림이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니 춥지도 않으리.
CHECK! CHECK!
영덕 블루로드 (남 북)
D코스
쪽빛파도의 길 14.1km 4.5시간
대게누리공원 장사해수욕장 구계항 남호해수욕장 삼사해상산책로 어촌민속전시관 강구터미널
“장사해수욕장 앞바다에는 6·25전쟁 당시 장사상륙작전에 투입한 상륙함(LST) 문산호를 복원한 장사상륙작전전승기념관이 자리합니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풍경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영웅, 학도병들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전시공간을 꼭 들러보세요.”
A코스
빛과 바람의 길 17.5km 6시간
강구터미널 강구항 금진구름다리 고불봉 해맞이캠핑장 신재생에너지전시관 풍력발전단지 해맞이공원
“강구항과 축산항 사이의 해맞이공원은 A코스의 끝이자 B코스의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동해의 비경을 감상할 수 있는 해변공원으로, 거대한 집게다리가 감싸고 있는 창포말등대가 이색적인 곳입니다.”
B코스
푸른대게의 길 15.5km 5시간
해맞이공원 대탄항 석리마을입구 대게원조마을 블루로드 다리 죽도산 축산항 남씨발상지
“푸른 바다 위에 자리한 해안가 마을은 여행객에게 한 장의 엽서 같은 풍경으로 다가옵니다. 죽도산 위의 전망대는 이정표 역할을 하고, 그 아래 블루로드 다리를 중심으로 식당도 밀집해 있습니다.”
C코스
목은사색의 길 17.5km 6시간
남씨발상지 대소산봉수대 목은이색기념관 괴시리 전통마을 대진해수욕장 고래불해수욕장
“영덕을 대표하는 3개 해수욕장 중 고래불·대진 해수욕장이 C코스(서핑 성지, 부흥해수욕장은 D코스)에 자리합니다. 괴시리 전통마을과 5일장이 열리는 영해만세시장이 가까우니 함께 들러보시길 추천합니다.”
AROUND 사계절 어느 때든, 곳곳에 영덕의 맛
보움
영덕 해안가에 잇달아 들어선 대형 카페들. 음료 가격은 풍경 값이 더해져 다소 비싼 편이지만, 저마다의 감성을 자랑하니 감안하고 꼭 한 번 들러볼 만하다. 한 모금 마시고, 풍경 보고 여행이 즐겁다.
경북 영덕군 영덕읍 영덕대게로 928
0507-1333-1016
풍경시골
서정적인 이름을 지닌 로컬 맛집이다. 칼국수는 흔한 음식이 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멸치육수로 맛을 낸 들깨칼국수, 맑은 칼국수 모두 인상적이다. 더욱 쌀쌀해지는 계절, 진하고 구수한 들깨칼국수가 자꾸 생각난다.
경북 영덕군 영덕읍 읍사무소1길 8-11
054-734-5225
순해토박이돌솥밥
‘영덕군 맛집’에 이름을 올린 돌솥밥 전문식당. 까다로운 입 맛도 만족시킬 정갈한 한 상 차림은 딱 봐도 5대 영양소를 두루 맞췄다. 전화로 미리 주문하고 가면 기다리는 시간 없이 바로 지은 돌솥밥을 맛볼 수 있다.
경북 영덕군 영해면 예주시장3길 15 054-734-0014
나비산기사식당
점심시간이 살짝 지난 시간인데도 식당 앞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소문 안 듣고 왔는데 맛집이었군요! 그날그날 해상 날씨 에 따라 오늘의 메뉴가 달라진다. 통통하게 살 오른 물가자미 찌개는 밥 2공기 거뜬한 맛이 일품이다.
경북 영덕군 강구면 강산로 10 054-733-2552
글 정상미 사진 이효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