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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운하 통과하는 북중미 크루즈 10개국
일시:2019년 1월 27일 일요일~2월 17일 일요일(21박 22일)
탐방국:미국, 멕시코, 과테말라,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파나마, 콜롬비아, 아루바, 쿠라시오, 보네르
2019년 1월 27일 일요일 한국 인천 출발, 미국 LA 도착
* 한국 인천공항 출발
추운 날씨다. 아침기온이 영하 7도다. 인천공항 제2터미널에서 대한항공 KE 071편 14:30분 미국 LA행을 탑승한다. 제2터미널은 오픈한지 얼마되지 않았다. 매우 쾌적하고 좋다. 실내 나무 정원 조경이 아름답다. 두 아들과 문자로 전화로 안부를 전했다. 리무진 버스가 제1터미널을 경유하여 약 10분 정도 소요된다. LA공항까지는 11시간 소요다. 우리 부부 좌석은 46F, 46G로 중앙 통로석이다. 비행기가 정시에 이륙했다. 영화를 2편 '모정'과 '졸업'을 관람했다. '모정'은 홍콩 무대로 미망인과 미국 특파원과의 사랑 이야기다. '졸업'은 21세 청년의 사랑 이야기다. 모두 재미있었다. 기내식이 석식과 조식으로 2회 제공된다. 조용필과 심수봉의 노래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밤을 타고 비행기는 날고, 낭만으로 들뜬 여정 길 잠은 오지 않는다. 조금 휴식하고 조식을 하고 착륙 준비를 했다.
* 미국 LA 공항 도착
오전 8ㅣ 30분 정시에 도착했다. 시차가 -17시간이다. 영상 12도로 공항은 포근하다. 약간 더운 편이다. 공항 입국 수속이 더 까다로워졌다. 지문을 입력한다. 사진도 촬영한다. 일행 부부가 늦게 나와서 한참을 기다렸다. 공항 짐벨트 앞 출구에 'HOLLY WOOD' 글자가 이곳이 미국LA임을 알린다. 가이드를 미팅하고 한인타운으로 이동했다. LA는 100년이 넘은 도시다. 도심 쪽은 많이 노후되었다. 외곽은 늦게 조성해서 덜 낡았다. 야자나무가 많다. 자생이 아니고 인공으로 물을 줘서 기른 것이다. 100년 전 건설할 때 지하수도를 설치했다. 스프링쿨러까지 그 당시에 도입했다. LA는 비가 와서 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에서 눈이 녹아내리는 물 등이 흘러드는 물을 22개 호수에 저장해서 물을 사용한다. LA도로는 교통체증이 심각하다. 2인 이상 카플해야 1차선 진입이 가능하다. 옆자리에 인형을 앉힌 할머니가 20년어치 벌금을 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6개월 이상 된 태아는 산모 혼자 운전해도 2인 탑승으로 간주해서 1차로 진입이 가능하다. 한인타운은 가이드가 20년을 살았는데도 영어를 사용 안해도 살 수 있는 곳이란다. 중화요리 배달까지 한국을 닮은 도시란다. 관공서도 한국어가 통한단다. 그래서 로스엔젤레스는 이민자가 많다. LA에 한국교민이 약 300 명 정도 거주한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LA시가지를 지나 한인타운에 도착했다.
* 미국 LA 한인타운 한식식당 중식
한인타운에 있는 북청순두부 식당에서 중식을 했다. 직원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다. 메뉴는 순두부, 이면수구이, LA갈비, 굴비구이,야채 등 풍성하고 정성 깃든 음식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아주 잘 먹었다.
* 미국 LA 허리우드 극장 앞 스타마크 거리 풍경
전에 LA에 왔을 때 이곳에 와 보았다. 그날의 정경이 그대로 떠오른다. 거리에 새겨진 스타의 마크와 많은 사람들, 그리고 시내투어 빨간버스 등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물결로 낭만 가득한 곳이다. 오늘 다시 여기 서서 나 역시 붉은 낭만에 젖어 흐뭇하다.
* 미국 LA 허리우드 극장 앞 세계배우들 족적
극장 앞에는 세계 여러 나라 배우들의 손바닥 혹은 발바닥 등의 족적이 새겨져 있다. 영화의 산 증인들의 외침이다. 사람들 물결이 그들의 노고에 보답한다. 나 역시 그 중의 한 사람이다.
* 미국 LA 허리우드 극장 앞 한국배우 족적
극장 앞 바닥 가장자리 찾기 쉬운 곳에 한국 배우 이병헌과 안성기의 족적이 새겨져 있다. 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금새 찾았다. 참으로 장하고 반가웠다.
* 미국 LA 허리우드 오스카상 시상 극장
오스카 수상자들에 상을 시상하는 극장 앞 계다네 레드카펫이 깔려 있다. 양쪽 기둥에는 오스카상 수상작과 수상 연도가 적혀 있다. 타이타닉 등 아는 영화 제목들도 보인다.
* 미국 LA 항구로 가는 시가지 풍경
허리우드에서 한참을 달려 크루즈 터미널로 간다. LA 북쪽 시가지 오롯한 산에 HOLLY WOOD 영문 글자가 크게 걸려 있다. LA 타이틀 마크로 부상되는 장면이다. 전에도 보았는데 다시 보니 감명 깊다. LA 도심을 지난 외곽으로 나가자 야자수 나무들이 가득하다. 멀리 설산도 보인다. 저 야자나무들은 자연으로 재생된 나무가 아니고 인공으로 물을 주어서 기르는 나무들이다. 대단한 풍경이다. 빌딩들도 보이고 막히는 도로에 들어섰다. 크루즈 터미널로 가면서 LA의 풍경을 잘 보았다.
* 미국 LA 항구 크루즈배 승선
노르웨이지안 크루즈 배가 벌써 터미널에 정박해 있다. 터미널에서 승선 수속을 밟았다. 우리 부부의 선실은 9528호실이다. 이곳은 LA 산페드로 항구로 매우 크다. 물동량이 엄청 많다. 오후 2시경, 봄가을 정도의 포근한 햇살이 선실을 비춘다. 승선 후 비상훈련을 먼저 받았다. 6,7층 대극장에 모두 모여서 설명을 듣는 것으로 훈련을 마쳤다. 이제 바다 위 파나마 운하 통과와 북중미 크루즈 여정 21박 22일이 시작된다.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다. 시간과 금전, 건강 등 투자한 만큼 그 이상으로 많은 것을 보고 배워 갈 것이다.
* 미국 LA 항구 크루즈배 출항
바비큐 파티로 배의 갑판 12층 수영장 곁에서 식식만찬을 하는데 오후 6시경 크루즈 배가 출항한다. 식사를 빨리 마치고선실 발코니에서 조망하고, 13층 갑판으로 나와서 다시 보았다. 어둠이 깃드는 바다와 뒤로 미끄러져 배를 보내주는 LA 항구와 시가지 야경이 비경이다. 점점 배는 바다로 질주하고 LA 불빛은 바다 위에 수평으로 떠서 작을 고한다. 가슴 벅찬 순간이다. 저녁 공연이 6,7층 대극장에서 오후 8에서 9시까지 있다. 오늘은 첫날로 미국인 1인이 나와서 조크와 노래로 객석을 웃긴다. 말로 웃기며 다 이끌어 간다. 옛날에 보았던 한국의 쟈니윤 쇼와 같다. 유럽 배 크루즈와 미국 배 크루즈의 다른 것 중 하나가 바로 공연이다. 유럽은 웅장하고 무대가 장엄한데 미국은 그렇지 않다. 바다 위 호텔에서 첫밤을 맞으며 설레는 마음으로 휴식했다.
2019년 1월 28일 월요일 전일항해 미국 LA항구에서 멕시코 카보산 루카스 항구로 항해
* 전일항해 크루즈배 노르웨이지안 젬호 NCL 호
피곤해서 8시에 기상했다. 12층 후미의 뷔페식당에 거사 조식을 했다. 멕시코 영토의 망망한 대해다. 점 하나 없다.쾌청하다. 나는 저런 바다가 참 좋다.그래서 크루즈 여행이 좋다. 오전 1시에 6층 카지노 옆 룸에서 우리 일행 모임이 있다. 기항지 관광에 관한 설명이 있다. 인터넷 시간을 방당 250분을 준다. 그 사용법을 배웠다. 자동 로그인으로 아주 쉬게 사용한다. NCL홈에서 Login.com 하면 켜지고, Logout,com 하면 종료된다. 중식 뷔페식사 후 12층 갑판 야외수영장에 가서 온탕에 몸을 담그고 전신 찜질마사지를 했다. 다른 나라 사람들과 함께 탕 안에서 즐거운 시간이다. 대형 미끄럼틀에 올라가서 물을 타고 내려오는 것도 참 좋다. 나는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신나고 즐거운 수영장의 낭만에 젖어 참 행복했다.
21박 22일의 여정을 이끄는 노르웨이지안 NCL GEM 호는 93,530 톤급 배다. 미국식 Free Style 크루즈 배다.
선 사 NCL
선박길이 294 M
총톤수 93,530 톤
선박폭 38 M
데크(층수) 15 층
총탑승객 2,370 명
선박건조 2007년
총승무원 1,070 명
선내병원- 최고의 의료진 24시간 대기 (X-Ray 촬영 설비 구비)
크루즈 배 중에서는 그리 큰 편은 아니다. 그 이유는 파나마 운하 통과에 합당한 크기의 배라서 그렇다. 외형도 아름답고 내부도 아름다운 아주 좋은 배다.
* 전일항해 크루즈배 항로 지도
크루즈 배 선실 티브 모니터에 22번 채널에도 항로 지도가 뜬다. 로스엔젤레스(미국) ⇒ 해상 ⇒ 카보산루카스(멕시코) ⇒ 푸에르토바야르타(멕시코) ⇒ 지와타네호(멕시코) ⇒ 해상
⇒ 푸에르토께찰(과테말라) ⇒ 코린토(니카라과) ⇒
⇒ 푼타레나스(코스타리카) ⇒ 해상 ⇒ 파나마운하(파나마)
⇒ 카르타헤나(콜롬비아) ⇒ 산타마르타(콜롬비아)
⇒ 오랑예스타드(아루바) ⇒ 빌렘스타트(쿠라사오)
⇒ 크랄렌데이크(보네르) ⇒ 해상 3일 ⇒ 뉴욕(미국)으로 항로가 연결되어 있다. 이토록 장엄한 여정을 시작한다 생애의 큰 기쁨이다.
* 전일항해 크루즈배 6층 그랜드 퍼시픽 정찬식당 석식
오늘은 전일항해인데 시간적 여유가 있어 처음으로 청찬석식을 한다. 6층 그랜드 퍼시픽 정찬식당에 오후 6시 30분까지 모였다. 한 테이블에 세 부부씩 6명이 앉았는데 모두 서초구 사람이들이다. 우리도 반포에 아파트가 있으니 기막힌 인연이다. 기념사진을 찍었다. 나는 식사 전에 2018년 12월 20일에 출간된 나의 제3 시집 '헤밍웨이의 그 바다' 시집을 한 가정에 1권씩 선사했다. 사인을 부탁해서 사인도 해주었다. 모두들 매우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나의 출생지가 보령인 것을 보고 보령 천북에서 온 부부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알고보니 친정어머니께서 병환이실 때 친정부모님을 모시고 한 달 정도 머물렀던 요양원을 운영하시는 부부였다.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외 여러 일행과도 서로 인사도 나누며 즐거운 만찬이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대극장에서 뮤지컬 공연을 관람했다. 남자 3명의 가수와 기타, 드럼, 피아노 등의 악기 밴드의 연주와 함께 노래공연으로 참 좋다. 9시에 끝나고 방에 와서 와이파이를 켜고 두 아들에게 카톡방에사진을 보냈다. LA항구 출항과 정찬석식 사진이다. 잠시 후 두 아들에게서 답장이 왔다.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어서 참 좋다. 내일은 멕시코 카보산 루카스 항구에 기항한다.
2019년 1월 29일 화요일 멕시코 카보다 루카스
* 멕시코 카보산 루카스 항구 기항
8시 42분에 눈이 떠졌다. 그 동안 시차관계로 못 잔 잠을 잘 잤다. 멕시코 카보산 루카스 항구에 기항한다. 쾌청한 하늘에 바다가 코발트 빛이다. 바위와 도시와 크루즈 배가 정박한 항구가 비경이다. 카보산루카스 항구는 크루즈 배가 항구에서 떨어진 바다 가운데에 정박하고 소형보트로 이동한다. 카보 산 루카스(Cabo San Lucas)는 스페인어로 성(聖) 루가를 뜻하며, 멕시코의 휴양도시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부호와 할리우드 배우들이 별장을 가지고 있으며 힘들거나 쉬고 싶을 때 찾아오는 유명한 휴양지이다. 카보스라고도 불리운다. 아름다운 항구다.
* 멕시코 카보산 루카스 항구 하선
여기는 바다 가운데 크루즈 배가 정박하고 텐더보트로 우리를 실어 나른다. 10분 정도 소요된다. 항구에 도착하니 요트, 해군 함정 등 큰 배와 작은 배들이 많다. 여기서 멕시코 현지 가이드를 만났다. 기항지 관광으로 토도스 산토스 마을로 간다. 작은 시골 마을이다.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 이동하며 건조한 사막, 하얀 모래만, 야자나무 푸른 바다까지 멕시코 태평양 쪽 풍경을 조망한다. 산토스 토도스는 태평양 쪽에 위치한 작은 오아시스 마을이다. 오래 된 예수회 미션과 팝송 '호텔 캘리포니아'로 유명한 캘리포니아 호텔을 방문한다.
* 멕시코 토도스 산토스 건과일 가게
토도스 산토스 마을은 한적하고 아담한 시골 마을이다. 가이드가 먼저 데리고 간 곳은 건과일 가게다. 멕시코의 이곳 광활한 땅에서 천연유기농으로 농사지어 말린 무공해 과일이라고 소개를 열심히 한다. 건과일 빵도 나누어 준다. 정겨운 시골 가게였다.
* 멕시코 토도스 산토스 박물관
오래전 이 지역의 생활상을 자료와 함께 전시해 놓았다. 생활도구와 역사가 담긴 사진 등이다. 천주교 국가라서 성인이 많다. 다 기록할 수 없어 '모든 성인 다'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곳 지명 '산토스 토도스'란다. 피아노와 춤추는 소녀를 전시한 예술방도 있다. 일반 화가들이 그린 그림도 전시해 놓았다. 인디언 인형과 유럽인 풍자의 인형이 인상적이다. 유럽인들이 겉은 화려하지만 속을 썪었다는 상징이란다. 신대륙 발견으로 원주민들에게는 그렇게 보였다는 전시다.
* 멕시코 토도스 산토스 박물관 민가
박물관 실내에서 나와 야외에 전시한 농가주택도 보았다. 야자나무 지붕이 우리네 초가지붕 격이다. 소마차가 입구에서 반긴다. 식구 수에 따라 방의 실내 공간 크기가 다르다고 두 채의 집을 보여준다. 선인장이 크게 자라서 주택 앞 정원에 오롯하다. 잠시나마 멕시코의 옛 정취에 젖어 잘 배웠다.
* 멕시코 토도스 산토스 시가지
아담하고 예쁜 마을이다. 멕시코 전통의 향수가 그대로 남아있어 좋다. 거리도 깔끔하고, 꽃과 파란 식물들이 싱그럽다. 이곳 지역은 호텔 캘리포니아가 있어서 세계인들이 찾는 도시다. 우리도 그곳 호텔에 갈 것이다.
* 멕시코 토도스 산토스 수도원
천주교가 들어올 때 세운 작은 교회다. 이 마을에는 이런 미션이 많은데 이곳이 대표 미션이다. 안에 들어가서 보았다. 예배드리는 성전이 아늑하다. 과달루페 성당 성모 그림도 벽에 부착되어 있다. 문 앞에는 이 교회에 대한 안내문이 있다. 현지 가이드는 계속 미션이라 부른다. 규모가 작아서 성당으로 부르지 않고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 멕시코 토도스 산토스 캘리포니아 호텔
이 호텔은 토도스 산토스 마을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유명한 호텔이다. 1920년대의 호텔 사진이 있다. 대부분이 그때의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내부의 전시물들도 매우 고풍스럽다. 팝송 'otel California'로 유명해진 호텔이다. 1976년 그래미상 레코드 부분을 차지했던 곡이기도 하다. 이글스 베스트셀러 음반이며, 다섯 번째 음반에 수록된 곡으로 이글스란 밴드의 타이틀 마크 격이다. 건국 200년을 맞이한 미국을 노래했다. 캘리포니아 호텔에 대한 환상과 미국 전체에 대한 퇴폐를 테마로 하고 있다. 아메리칸 드림은 출구 없는 상황이라는 암울함을 가사에 싣고 있다.
사막을 여행하던 사람이 호텔에 것으로 시작되는 노래다. ‘Hotel California’ 노래가 유명해지면서 여러 호텔이 이 노래의 주인공이라고 했다. 지금 내가 와 있는 이곳 멕시코 바하 캘리포니아주의 토도스 산토스Todos Santos 작은 도시의 호텔 캘리포니아에 이글스Eagles 단원인 단 헨리가 이 곳에 머물렀다는 헛소문이 퍼지면서 이 곳을 찾는 이글스 팬들이 많았단다. 하지만 단 헨리는 한 여행잡지 기자에게 편지를 보내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노래 제목인 '호텔 캘리포니아'는 특정한 호텔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로스 앤젤레스의 연예 관계자들의 물질 사치와 쾌락 등 타락문화를 상징한다고 했다. 이런 상징 가사는 노래 속에 삽입되어 있다.
그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그런 소문으로 지금도 이 호텔에 국내와 국외의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우리 일행은 중식을 하기 위해 여기 왔다.
* 멕시코 토도스 산토스 캘리포니아 호텔 중식
호텔의 안 마당 놓인 테이블에서 중식을 했다. 멕시코 전통음식이다. 야채와 고기 등 풍성한 메뉴와 레모네이드 차로 맛잇게 먹었다. 곁에는캘리포니아 호텔 공연장이 있다. 레게, 팝 음악 가수들이 공엲는 곳이다. 저 공연장에서 부르는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를 연상하며 외국인들이 많이 온단다. 이글스 단원인 단 헨리가 이곳 호텔에서 유숙했다는 소문으로 한때는 수많은 세계ㅇㄴ들이 몰려왔는데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단 헨리가 밝히므로 지금은 그리 많이 찾진 않는단다. 외국인들이 여기 오는 이유처럼 우리도 오늘 그런 이유로 여기 와서 잠시 이글스의 팝송에 대하여 배우고 간다.
* 멕시코 토도스 산토스 캘리포니아 호텔에서 본 수도원 외경
중식을 마치고 호텔 주변을 산책했다. 호텔 바로 곁에 아까 탐방했던 수도원이 있다. 그 외경을 잠시 다시 보았다. 아담한 시골 마을의 아담한 교회가 정겹다.
* 멕시코 토도스 산토스 캘리포니아 호텔 주변 풍경
투명하고 맑은 햇살로 하늘과 공기가 참 좋다. 마을도 예쁘고 거리의 식물들이 아름답다. 기념품 상가가 매우 크다. 옆에는 아까 보았던 미션도 있다.이제 크루즈 배가 정박한 항구로 이동한다.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소박한 도시에서 옛 정취로 낭만이 깃든 하루였다.
* 멕시코 장엄한 산맥 풍경
지금 이곳은 멕시코 바하 캘리포니아주의 캘리포니아 반도다. 이 반도는 태평양을 타고 쭉 늘어진 영토다. 중앙에 산맥이 있고 주변은 평원이다. 물이 귀한 곳이다. 산에서 나오는 물을 모아서 물로 사용한다. 한동안 장엄한 시에라 산맥이 이어진다. 들녘에는 선인장이 많다. 다른 식물은 키가 작고 마른 풍경인데 선인장은 우뚝우뚝 높이 솟아 통통하게 잘 자라 솟구쳐 오른다. 선인장의 나라 먹시코라고 외치는 듯하다. 토도스 산토스 마을은 카보산 루카스에서 위로 올라온 지역이다. 지금 다시 카보산 루카스로 가면서 우측으로는 가끔씩 태평양 바다가 보이고, 좌측으로는 내륙이 이어진다. 여행은 명소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나의 여행 철학은 오늘도 적용되어 버스로 이동하며 보는 멕시코의 많은 정보들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 멕시코 카보산 루카스 도심 공원 선인장
멕시코 들녁을 달리며 본 선인장이 도심의 공원에 심겨져 있다. 큰 키로 솟구쳐 오른다. 한국의 정원수 격이다. 우리 나라와 다른 풍경에 신기했다.
* 멕시코 카보산 루카스 항구 텐데보트로 귀환
버스가 카보산 루카스 항구에 내려준다. 여기서 자유롭게 선사에서 제공해주는 텐더보트로 바다 가운데 정박한 크루즈 배에 재승선하면 된다. 그런데 출항시간이 6시라서 5시 30분까지는 텐더보트를 타야 한다. 우리 부부는 5시경 승선했다. 선사카드를 보고 배 직원이 나와서 보트로 안내한다. 보트가 출발하자 항구의 비경이 전개된다. 크고 작은 배들, 긴 해변, 해수욕장 등이 작별을 고하며 배ㅣ에서 고운 명화를 그려낸다. 다른 크루즈 배도 바다 가운데 정박해 있다. 우리의 노르웨이지안 NCL 배가 장엄한 품새로 바다 가운데 떠서 우리를 기다린다. 참 반갑다. 배 가까이 오자 바다에 뜬 바위림이 병풍처럼 늘어서서 비경이다. 오늘 참으로 상쾌한 첫 출발 기항지 관광이었다.
* 멕시코 카보산 루카스 항구 배 재승선
크루즈 배에 재승선하여 선실 발코니에 나가보니 아까 텐더보트로 이동 중에 본 바위림이 보인다. 장관이다.
* 멕시코 카보산 루카스 수영장 다녀온 후 밤바다 조망
배에 와서 먼저 12층 갑판의 야외수영장에 가서 온탕에 몸을 담그고 전신마시지를 했다. 자쿠지 온탕의 물이 보글보글 소용돌이 치며 온몸을 감싸 흔들며 피곤을 풀어준다. 다른 나라 사람들과 함께 ㅇㅆ다. 서로 눈빛으로 정겨운 표정이다. 수영을 마치고 방 9528호실에 오니 출항했다. 오후 6시 출항인데 지금은 7시다. 어둠이 내리는 밤바다가 절경이다. 까만 바다가 큰 눈으로 우리의 거대한 배를 품고 질주한다. 이것이 크루즈 여행의 행복한 여정 중의 하나이다. 뷔페 석식 후에는 9시 타임의 대극장 공연을 관람했다. 남자가 혼자 토크쇼를 한다. 기타 연주와 노래도 하며 진행한다. 언어가 달라 잘 알아듣지 못해도 느낌으로 알아들으며 웃고 흥겨운 시간이었다.
2019년 1월 30일 수요일 멕시코 푸에르토 바야르타
* 멕시코 푸에르토 바야르타 항구 기항
오늘도 배가 바다에 정박한다. 선실 발코니에서 조망한 후 14층 갑판으로 올라가서 조망했다. 날씨가 쾌청하여 청청한 바다와 하늘, 하얀 구름이 명화로 뜬다. 푸에르토 바야르타는 멕시코 중서부의 반데라스만(Bahía de Banderas)에 위치한 유명 해양 관광지이다. 시에라 산맥(Sierras Cuale)과 산 세바스티안, 시에라마드레 산맥 아래쪽의 좁은 해안 평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메카 강을 따라 북쪽까지 펼쳐져 있다. 2010년을 기준으로 250여만 명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많은 거주민들이 시에라 산맥과 평원 사이에 있는 소협곡에 자리하고 있으며, 해안가 평원은 어느 정도 개발이 되어 있다. 할리스코 주에서 5번째로 큰 도시이고, 과달라하라 대도시권에서는 2번째로 큰 인구 밀집지역이다. 도시의 경제활동의 약 50%가 호텔, 레스토랑, 개인노무, 운송과 같은 관광사업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지자체의 경제활동은 여전히 농업과 공업, 상업분야가 주를 이룬다. 이제부터 푸에르토 바야르타를 많이 보고 많이 배울 것이다.
* 멕시코 푸에르토 바야르타 항구 아침의 12층 야외수영장
기항지 관광을 나가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시간이 좀 여유있어서 12층 갑판의 야외수영장을 돌아보았다. 상당히 넓고 쾌적한 야외 공간이다. 이곳 수영장에서 시간날 때마다 휴식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내가 크루즈 배에서 가장 선호하는 곳이다
* 멕시코 푸에르토 바야르타 텐더보트로 항구 이동
크루즈 배에서 텐더보트로 옮겨 타고 항구로 이동한다. 항구의 해변 풍경이 상당히 아름답다. 크루즈 배가 몇 척 더 들어와 있다.
* 멕시코 푸에르토 바야르타 말레꼬 해변
긴 해변이 시원하게 전개된다. 이곳 멕시코 반데라스 베이 해안은 매우 훌륭한 바다를 가지고 있다. 리베이라 나야리트 해변에 55km로 12개의 해변이 있다. 이곳 말레꼬 해변은 그 중 하나다. 1950년대부터 개발되어 해변에는 호텔과 리조트가 많다. 이곳에서 해마다 벌어지는 멕시코 음식축제도 있다. 해변에 동상과 각종 예술작품들이 관광객을 반기고 있다. 마타모로스 등대에 올라가면 붉은 기와지붕의 바야르타 시내가 보인다. 산 언덕 위 ‘그링고 걸치’는 1963년 리차드버튼과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영화인 ‘이구아나의 밤’이란 영화를 통해서 알려진 장소다. 그들이 ‘킴버리의 집’이란 밀회의 장소를 빌리게 되면서부터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장소다. 관광객들의 주목을 끌게되어 많이 찾아온다. 예술의 도시, 유독 예술가가 많은 바야르타는 수많은 예술가가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푸에르토 바야르타는 멕시코 칸쿤이 개발되기 전에는 멕시코 최고의 휴양지로 뽑혔다. 2001년에는 '가장 친근한 도시'로 선정되었고 2010년에는 '퇴직후 지내기 가장 좋은 멕시코 최고의 휴양지'로 뽑혔다. 2012년에는 ‘멕시코에서 가장 로맨틱한 장소’와 ‘멕시코에서 가장 선호하는 해변’으로 선정되고, 2013년에는 ‘컨벤션을 위한 최적의 장소’로, ‘멕시코 Top 10 여행지’로 선정된 곳이다. 사람들은 푸에르토 바야르타의 말레꼬 해안길을 따라 걸으며 쇼핑을 하고, 데킬라를 마시면서 최고의 휴가를 즐긴다. 오늘 우리는 시간이 많지 않아 그런 여유는 즐기지 못해도 곳곳에 놓인 동상을 보고, 우리의 크루즈 배가 떠 있는 바다도 보고, 긴 해변의 예술적인 풍경, 해변도로의 정겨운 풍경 등을 보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해변 풍경을 보며 그 진한 낭만에 젖어 왜 그렇게 아름다운 도시로 선정되었는지 이해 되었다.
* 멕시코 푸에르토 바야르타 시청사
옛것과 현재가 공존하는 예술의 도시 바야르타의 타운은 그리 크지 않다. 말레콘을 중심으로 과달루페성당이 있고 그 주변이 올드타운의 중심이 된다. 말레꼬 해안가를 기준으로 10킬로 해당하는 산책로가 놓여있어 긴 해변을 따라 걷다보니 해변도로 건너 편에 작은 시청사가 있다. 복합상가 같은 느낌의 건물이다. 매우 혼잡한 곳에 있다. 고풍스런 건물 안에서 화장실도 가고 잠시 휴식했다.
* 멕시코 푸에르토 바야르타 과달루페 성당
시청사에서 조금 걸어가니 상당히 높고 거룩한 외형의 과달루페 성당이 보인다. 붉은 색상의 우람한 건축 구조가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른다. 맨 꼭대기에는 왕관 모양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대형 시계가 있다. 현재 시간이 11시 10분으로 잘 보인다. 멕시코시티의 과달루페 성당을 비롯하여 멕시코 곳곳에 과달루페 성당이 많다. 이곳 과달루페성당은 푸에르토 바야르테에서 중심지 역할을 하고 성당 위의 저 맥주 심벌인 왕관을 보기위해 수많은 관광객이 온다. 골목길을 걸어가서 성당으로 가는데 수많은 사람들의 걸음으로 거리가 꽉 찬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겨울장미의 기적을 일으킨 과달루페 성모상이 있다. 날씨가 약간 더운 편이어서 그늘에서 잠시 쉬며 성당을 조망했다.
멕시코 푸에르토 바야르타 도심 시가지 풍경
말레꼬 해변에서부터 성당까지 걸었고, 그리고 걷고 있다. 시가지가 매우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잘 꾸며져 있다. 거리 바닥은 모두 옛 모습 그대로 돌이 박혀 있다. 멕시코 국기가 반기는 골목도 있다. 기념품 상가에 들러 시원한 음료를 마셨다. 데낄라와 레몬 얼음물의 시원한 선물이다.
* 멕시코 푸에르토 바야르타에서 아치다리 갈 때 울창한 숲속도로
버스가 푸에르토 바야르타 도심을 떠나 부자마을을 거쳐 울창한 숲길을 달린다. 선사에서 제공하는 대형버스로 외국인과 동승이다. 그냥 숲이 아니고 나무와 숲이 장엄한 풍경의 해변도로를 달리며 멕시코의 속살을 보여준다. 지금 아치다리를 보러가는 중인데 그 과정에서 멋진 풍경을 본다. 버스 운행 중에 사진 찍을 수가 없어서 아치형 다리에 내려서 도로변에 나와 숲속 길을 사진 찍었다.
* 멕시코 해변 바다 위 아치 바위
한참을 달려간 곳 해변에서 기이한 모양의 바위를 보았다. 자연으로 형성된 아치형 바위다. 아치형 구멍이 뚫려 있는 바위가 큰 바위 섬 앞에 떠 있어 명물이다. 이곳 지역에도 여전히 기념품 상가가 고운 평경으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 푸에르토 바야르타 카페
현지 가이드가 우리를 카페로 데리고 와서 음료와 간단한 먹거리를 제공해준다. 나무가 울창하고 고풍스런 분위기가 더욱 고운 정취를 자아낸다.
* 멕시코 푸에르토 바야르타 시가지
카페에서 나와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데 덩치 큰 나무가 많다. 고운 색 물결의 상가도 많다. 바다와 민물이 만나는 곳에 다리도 있어서 조망하는데 펠리칸 큰 새가 날아와 큰 나무 위에 사뿐히 앉는다. 멋진 이색 풍경이다. 시내를 감싸는 높은 산과 우리를 기다리는 버스와 낭만의 멋진 저녁 풍경이 아름답다.
* 멕시코 푸에르토 바야르타 바다에 정박한 배 보트로 재승선
항구로 와서 텐더보트로 배에 다시 가야 한다. 우리를 실으려고 달려온 텐더보트에 몸을 싣고 석양진 바다를 달려 크루즈 배로 귀환했다. 모두가 꿈 깉은 황홀함이다. 이것이 크루즈 여행의 축복이다. 오늘 하루 참으로 행복한 여정이었다. 방에 와서 바로 수영복을 입고 자쿠지 온탕에 가서 찜질마사지를 했다. 몸의 피곤이 아주 잘 풀린다. 수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환상적이다. 뷔페석식 후 대극장 공연을 관람했다. 재즈 뮤지컬로 남녀 쌍쌍이 나와 노래와 댄스를 멋지세 선사한다. 흑인 남녀도 참 잘 한다. 공연 후에는 모두 기립하여 큰 박수로 보답해 줬다. 방에 10시에 와서 오늘의 여행을 메모하고 두 아들에게 사진과 안부를 전송했다. 그리고 행복한 수면에 들었다.
2019년 1월 31일 목요일 멕시코 만사니요
* 멕시코 만사니요 항구 새벽 달과 별
새벽 5시 20분에 일어나서 발코니에 나가보니 배가 벌써 멕시코 만사니요 항구에 기항했다. 하늘에는 눈썹달과 별 2개가 빛난다. 또한 만사니요 해변 조명과 불빛이 장관이다.
* 멕시코 만사니요 항구 기항
이번에는 항구 가까이에 배가 정박했다. 항구 주변의 바다에 크로 작은 배들이 많다. 아트막한 산언덕을 타고 해변도시가 아름답게 전개된다. 만사니요는 만과 쿠유틀란 석호 사이의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항구도시다. 오늘날 휴양지로 각광받는 곳이다. 콜럼버스 이전 시대에 이 자리에는 찰라와 읍이 있었고 에르난 코르테스의 탐험대는 1533년 캘리포니아 만으로 가기 위한 배들을 이곳에서 만들었다. 도시의 상업, 제조업 활동은 콜리마와 그 이웃 할리스코 주의 농지와 숲, 그리고 근해에서 나는 산물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것들은 만사니요에 집산되어 배에 선적된다. 주요 수출품들로는 코프라, 옥수수, 바나나 등이 있다. 오늘은 주로 버스로 돌아보며 투어를 할 것이다.
* 멕시코 만사니요 항구 기항지 관광 하선
배에서 하선하였다. 우리의 크루즈 큰 배가 장관이다. 아침 햇살이 화사하여 바다가 비경이다. 버스를 타기 위해 바다 위에 놓은 긴 길을 따라서 걸어 나갔다. 주차장에서 버스가 우릴 기다린다.
* 멕시코 만사니요 항구 기항지 관광 버스 승차
가이드를 만나 버스에 승차했다. 우리 일행과 외국인이 함께 탑승한다. 버스 안에서도 우람한 크루즈 배가 보인다. 정겨운 풍경이다.
* 멕시코 만사니요 해변 공원
항구에서 가까이에 있는 만사니요 해변에 도착하여 첫 탐방지로 하차했다. 푸른 나무 등 식물들이 많다. 나무 조경을 잘 조성해서 공원이 매우 아름답다. 우리의 크루즈 배가 더욱 멋진 낭만으로 바다에 떠서 해변을 빛내준다. 멕시코에서 추앙받는 후아레스 대통령 동상도 외객을 반긴다. 만사니요의 영문 알파벳 글자가 만사니요 마크로 세워져 있다. 돛새치 불고기 조각상도 있다. 아침 햇살 조명이 서서히 내려 공원을 밝힌다. 바다에는 우리의 크루즈 배가 우람한 풍채로 떠 있다. 공원 곁에는 만사니요 시가지와 도로가 연결되어 있다. 크게 한 바퀴 돌며 산책했다.
* 멕시코 만사니요 해변 공원 만사니요 마크
바다 바로 곁 해변에 영문인 듯한 MANZANILLO 알파벳이 색색으로 서서 공원을 곱게 조명한다. 항구와 접하여 비경이다.
* 멕시코 만사니요 해변 공원 도새치 물고기 조각상
커다란 물고기 조각상이 서 있다. 푸른 빛으로 예사롭지 않은 외형의 물고기다. 알고보니 돛새치로 이 지역 바다에서 잡히는 물고기였다. 엊그제 산토스 토도스 마을에 다녀오던 날 보트를 타고 크루즈 배로 귀환할 때 저 물고기가 바다 가운데에서 튀어 오르는 것을 보앗다. 배가 하얗고 아주 컸다. 저것은 만사니요의 상징물이다. 돛새치는 전세계의 온대해역에 산다. 주둥이는 길게 뻗은 둥근 창 모양이다. 몸이 가늘고 배지느러미가 길며, 특히 돛 모양의 등지느러미 때문에 유사종인 청새치류와 구별된다. 등은 짙은 청색이고 배는 은빛을 띤 밝은 청색이며 등지느러미에는 반점이 있다. 몸길이가 3.4m나 그 이상, 몸무게가 90㎏ 이상 나가는 것도 있다. 주로 다른 물고기들을 잡아먹는다. 몸은 길고 좌우로 두꺼워 단면은 난형이다. 주둥이는 새의 부리처럼 앞으로 길게 뻗어 있다. 길이가 약 3.3m로 매우 크다. 동해 남부와 제주도, 인도양, 태평양의 온대와 열대 해역에서 산다. 돛새치는 상황에 따라 색이 변하는데, 평소에는 푸른색과 회색을 띈다. 하지만 흥분될 때에는 갈색, 회색, 보라색, 그리고 은색 바탕에 밝은 하늘색 가로띠와 은색 점이 나타난다. 먹이활동 시 에도 체색이 변하는데, 푸른색 바탕에 노란빛이 도는 줄무늬가 나타난다. 돛새치의 체색은 신경계에 의해서 조절되기 때문에 빠른 시간 내에 체색을 바꿀 수 있다. 신기한 물고기 조각상을 보고 잘 배웠다.
* 멕시코 만사니요 해변 공원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 동상
베니토 후아레스 동상이 공원 중앙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며 손을 들어 무언가 말하는 듯한 형상이다. 베니토후아레스는 멕시코에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가 대통령일 때 이곳에 2일간 머물렀다고 하여 이곳 만사니요가 그때 잠시지만 수도였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후아레스는 대통령 재임기간 1864년에서 1867년까지 3년 동안 막시밀리안 황제 치하의 외세 점령에 대항해 싸웠으며, 민주적인 연방공화국을 세우기 위한 입헌개혁을 추진했다. 인디언이었던 부모는 그가 3세 때 죽었다. 12세 때 그동안 키워준 삼촌 곁을 떠나 오악사카 시의 누이에게 갔고 이곳에서 정식으로 교육받기 시작했다. 원래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으나 1829년 오악사카예술과학대학에 들어가 법학과 과학을 공부했다. 1831년 법학 학위를 받았고 시의회에서 첫 공직을 얻었다. 나무랄 데 없이 정직해서 결코 공직을 이용해 자기 개인의 이익을 취하지 않았는데, 이런 그의 절제된 생활방식은 1843년 자신보다 17세나 어린 오악사카 소녀 마르가리타 마사와 결혼한 뒤에도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정치는 곧 그의 평생직업이 되어 그는 주의회와 전국의회 의원이 되었고, 1841년에는 판사가 되었으며 주지사로 재직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무렵 후아레스는 멕시코의 제반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공식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경제를 정상화하는 길은 교회와 토지귀족이 쥐고 있는 숨막히는 독점경제를 자본주의로 대체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1853년 선거에서 보수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자 개혁가들은 절박한 운명에 처해졌다. 후아레스를 포함한 많은 저명한 자유주의자들이 추방되었다. 1855년 자유주의자들이 전국 정부의 통치권을 차지함에 따라 그는 자신의 사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다. 후아레스는 미국을 떠나 멕시코로 돌아와 법무장관이자 공공교육장관으로서 새 정부에 참여했다. 자유주의자들은 후아레스가 지지한 3가지 주요개혁안을 실행했다. 법무장관으로서 그는 성직자 및 군대의 특별재판소를 폐지하는 자신의 이름을 딴 후아레스 법을 제정했다. 그는 사법의 평등이 사회의 평등을 진작하는 데 이바지하리라고 생각했다. 이 개혁은 1857년 2월 자유헌법을 공포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1858년 1월 보수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코몬포르트를 축출했을 때 후아레스는 대통령직을 계승할 합법적 자격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멕시코 시 주변지역을 장악할 군대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동부의 항구도시 베라크루스로 퇴각했다. 베라크루스에서 후아레스는 심각한 어려움에 부딪쳤다. 그는 정부를 구성해야 했고 투쟁, 밀고, 타파 등을 통해 그 정부를 유지해야 했다. 또한 헌법을 실시해야 했고, 군대를 유지하면서 보수주의 세력을 패배시켜야 했다.
성직자들이 합법적인 정부에 대항하는 보수주의자들을 지지했기 때문에 후아레스는 교회의 권력을 제한하는 몇 개의 법률을 제정했다. 그는 실제로 종교의식과 교육에 사용되는 건물을 제외한 모든 교회 재산을 국유화했다. 성직권을 더욱 약화시키기 위해 교회에 소속된 공동묘지를 국유화했으며 출생신고와 결혼을 민간기관에서 하도록 했다. 마침내 후아레스 정부는 교회와 국가를 분리했고, 모든 시민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했다. 후아레스는 1861년 1월 멕시코 시로 돌아와 합법적으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많은 심각한 문제와 반대세력은 여전히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새 의회는 대통령을 불신했으며, 국고는 사실상 비어 있었다. 국고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2년 동안 모든 외채에 대한 지불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자국의 투자금을 보호하기 위해서 영국, 스페인, 프랑스는 이 문제에 개입하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프랑스는 증원군을 보내 멕시코 시를 점령했고정부의 통치권을 장악했다. 다시 멕시코 시를 떠나야 했던 후아레스는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에 있는 시우다드후아레스에서 오랜 퇴각생활을 끝냄으로써 자신의 정부와 함께 살아남았다. 1867년초 계속된 멕시코의 저항, 미국의 압력, 프랑스 내의 비판여론 등으로 나폴레옹은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 직후 멕시코군은 막시밀리안을 붙잡아 처형했다.
후아레스는 멕시코로 돌아온 직후인 1867년 8월 전국선거와 함께 의회가 5개의 헌법 개정안을 받아들일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한다고 공포함으로써 자신의 정치경력에서 가장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여론은 후아레스가 대통령 재선거에 입후보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헌법 개정에는 후아레스에게 공감을 느끼던 사람들을 포함한 많은 멕시코 국민들이 즉각적이고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가 제안한 개정안은 의회가 단독적으로 제정한 개정안을 위헌으로 보았고 행정력을 강화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후아레스는 재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행정부는 개정안에 의해 실시된 이 투표를 집계조차 하지 않음으로써 신임의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병과 개인적인 불행, 1870년 10월 후아레스는 뇌졸증을 앓았고 3개월 뒤에는 아내의 죽음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871년 다시 입후보하기로 결심했다. 격렬한 선거운동으로 다시 대통령에 선출되었지만 많은 멕시코 국민들은 이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그에 대항해 무기를 잡았다. 후아레스는 평화를 회복하려고 노력하면서 여생의 마지막 몇 개월을 보냈으며, 1872년 심장마비로 죽었다.
후아레스의 정치적 부상은 그의 자유주의 사상을 영구적인 현실정치로 변화시키고, 인디언이라는 자신의 배경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극복하기 위한 계속적인 투쟁과정이었다.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멕시코인은 자신들의 인디언 혈통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19세기의 평가는 후아레스의 비범한 능력과 업적을 강조하고 강화시켰다. 그가 시행한 국내의 개혁은 멕시코를 신식민주의의 가장 악명 높은 유물로부터 해방시켰고 프랑스에 대항한 그의 지도력은 후아레스를 멕시코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멕시코의 한 대통령 베니토 후아레스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가 인디언 후손인 것도, 멕시코를 위해 그리 투쟁한 것도 처음 알았다. 이름조차도 생소해었다. 먼 나라에서 세계 역사를 배우고 간다.
* 멕시코 미국 철새 호수
버스를 타고 만사니요의 해안을 따라 이동하며 멕시코에서 가장 큰 카고 항구도 보고, 현지인들의 주거지인 라 푼타 지역도 조망하고 계속 달려간다. 구시가지를 지나 신시가지를 지나 외곽으로 나가 한적한 도로를 달릴 때 숲 사이로 기다란 호수가 보인다. 이곳 호수는 미국에서 철새가 날아와 겨울을 나고 가는 호수다. 추운 미국에서 이곳 따뜻한 멕시코로 와서 추위를 보내고 가는 것이다. 저 호수에는 악어도 산단다. 크고 작은 새들이 있다.
* 멕시코 해변 호텔
산녘에 하얀 호텔 건물이 즐비하다. 높은 건물이 층층으로 이어진다. 이곳에 얼마나 많은 관광객이 오는지 증명하는 대목이다.
* 멕시코 미라마 해수욕장
여기는 만사니요 항구 주변과는 다르다. 만사니요는 매우 큰 항구라서 상업지역이다. 그리고 멕시코 제1의 항구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6번째 크고, 세계에서는 61번째 큰 항구다. 물동량이 상당히 많다. 그런데 이곳 미라마 해변은 소박한 시민 휴양지다. 해수욕장은 아주 크다. 해변 백사장으로 내려가서 거닐어 보았다. 모래가 검은 빛이 돈다. 한적한 바다의 또다른 낭만이 깃든 풍경이다.
* 멕시코 요트 정박장
미라마 해수욕장에서 버스로 다시 돌아올 때 산길을 돌아 높은 도로에 오니 저 아래 바다에 요트 정박장이 있다. 오붓한 바다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멀리는 마사니요 시가지도 보인다. 산과 바다, 식물, 요트 등이 비경이다.
* 멕시코 해변 리조트 비경
버스가 호텔과 리조트 마을에 들어왔다. 500여개의 관광객을 위한 숙소가 이곳에 모여 있다. 하얀 크로 작은 건물들이 산언덕에 즐비하다. 19층 하얀 호텔이 들어오면서 주변 리조트나 작은 호텔이 다 죽었단다. 그러나 산언덕을 따라 바다를 딛고 일어선 고운 리조트가 비경이다.
* 멕시코 만사니요 버스에서 조망하는 시가지 풍경
버스가 잠시 멈추고 저 아래로 전개되는 만사니요 사기지 풍경을 감상했다. 산 아래 초록 물결 도시다. 건물보다 나무 군락이 더 진하게 보인다. 싱그러운 도시다.
* 멕시코 만사니요 낭만의 해변 카페
바다와 접한 낭만의 카페에서 나는 콜라와 타코를, 남편은 맥주와 타코를 먹으며 휴식했다. 해변 풍경을 조망했다. 멀리 우리를 기다리는 크루즈 배도 있고 파도소리, 백사장 등이 참 멋진 풍경이다. 크루즈 배 곁에서 물쇼를 하는 큰 배도 보인다. 기념품 상가도 있다. 입구로 나오니 커다란 동상이 있다. 도로가 시원하게 이어진다.
* 멕시코 만사니요 해변 카페에 본 바다 비경
햇볕이 내리쪼이는 백사장에 내려가 거닐어도 보았다. 쨍쩅한 멕시코의 하늘과 바다를 마음껏 품어본다. 멕시코의 고운 낭만을 선사받고 이제 항구로 갈 시간이다.
* 멕시코 만사니요 항구에 귀환하며 본 항구 비경
항구로 돌아오면서 해변도로에서 보는 만사니요 바다가 기막힌 비경이다. 코발트빛 바다, 탱탱한 하늘, 쪼개질 것 같은 햇살, 어느 것 하나 소홀한 것 없이 멕시코 만사니요를 빛내고 있다.
* 멕시코 만사니요 항구 크루즈배 재승선
버스에서 외국인과 함께 내려 크루즈 배로 귀환했다. 아침보다 햇살 조명이 찬란하여 웅장한 배와 바다가 장관이다. 오늘은 참 좋은 날씨에 좋은 풍경의 여행을 했다. 맑은 공기와 투명한 하늘이 여기 살고 싶다는 유혹을 한다. 적당히 따뜻한 날씨, 이게 겨울이라는데 1년에 2개월만 이렇게 안 더운 날이라는데, 우리나라로는 초여름 기온이다. 배 직원들이 나와서 물수건과 냉수를 준다. 고맙다. 배로 진입하여 카드 검색을 한 후 짐 검색을 거치고 배 내부로 들어온다. 주류를 외부에서 사 오면 배에 맡겼다가 하선하는 날 준다. 비행기 탑승처럼 철저한 검색이다. 모두 배와 승객의 안전을 위한 것이니 고마운 일이다
* 멕시코 만사니요 크루즈배 선실 발코니에서 본 항구 비경
만사니요 항구는 풍요로운 정경이 외형에서도 나타난다. 상업지역이고 멕시코 제1의 항구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6번째 크고, 세계에서는 61번째 큰 항구다. 물동량이 상당히 많다. 산줄기가 감싸는 오붓한 바다에 수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다. 천혜의 항구 조건을 갖춘 영토다. 내가 선 지점에서 보는 광경이 곧 명화로 뜬다. 잊지 못할 기막힌 정경이다. 먼 훗날 오늘을 그리워하며 생애의 환희로 나는 행복할 것이다.
* 멕시코 만사니요 크루즈배 12층 갑판 수영장
우리 부부의 선실 9528호실에 들어와서 집을 놓고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갔다. 자쿠지 온탕 찜질방에서 전신마사지를 하고 나는 초대형 물미끄럼틀에서 4회 미끄럼을 탔다. 참으로 흥겹고 재미난 시간이다. 외국인들과 함께 호흡하며 우리 부부는 세계 속에 한 구성원으로 흐뭇한 시간을 보냈다. 저녁은 13층 식당에서 정찬석식을 했다. 나는 주로 새우요리, 남편은 송아지요리를 주문하여 나눠 먹었다. 삼풍백화점 붕괴 이야기로 일행들과 와인으로 건배하며 정담을 나누었다. 지난번에 못 준 두 부부에게 내 시집 '헤밍웨이의 그 바다'를 주었다. 매우 고마워 한다. 석식 후 대극장 공연을 관람했다. 약간 늦게 가서 조금 보았는데 노장 음악가 남자가 피아노 연주를 한다. 손이 보이지 않는 연주에 놀라웠다. 공연 후에는 열광적인 박수로 환호했다. 공연 후 밤의 산책을 했다. 피아노, 기타 연주하며 노래 부르는 6층과 7층 카페와 6층 로비도 가 보았다. 12층 수영장에서는 흑인가수 악단의 연주와 노래에 맞춰 부부끼리, 그룹끼리 흥겹게 춤을 춘다. 참으로 정겨운 밤이다. 수천 명이 타는 배는 어느 큰 아파트 한 단지 규모라서 온통 사람들로 밤거리가 번화롭게 붐빈다. 이것이 크루즈 여행의 큰 낭만이다.
2019년 2월 1일 금요일 전일항해 멕시코에서 과테말라로 가는 태평양 바다
* 전일항해 크즈배 선실 발코니에서 본 태평양 일몰
오늘은 전일항해로 각자 자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우리 부부는 오전 11시부터 12시 30분까지 수영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중식으로 인솔자가 방당 2개씩 갖다준 한국의 신라면 컵라면을 먹었다. 남편이 끌혀준 컵라면을 발코니에서 둘이 발코니 비치의자에 마주앉아 먹었다. 나는 한국에서는 라면을 잘 안 먹는데 외국에서 먹는 한국라면이 참 맛있다. 우리나라의 높은 음식문화를 접하는 것 같아 자부심이 느껴진다. 내 조국의 소중한 컵라면으로 다가온다. 집을 떠나야 효자가 되고, 국가를 떠나야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스마트폰 사진을 정리했다. 선별하여 남기고 버리는 작업을 했다. 두 아들과 남동생에게 사진을 올려주고 안부를 보내주었다. 각 방당 25분 준 선내 데이터로 지금까지 60분 정도 사용했다. 이제 190분 남았다. 망망대해를 온종일 질주한다. 새들도 날아다닌다. 힘들면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날아간다. 참 신비로운 광경이다. 점 하나 없는 바다다. 노을이 진다. 일몰이 비경이다. 태평양 바다에 촉촉히 내리는 석양이 매우 고혹의 낭만을 선사한다. 바다에서 맞이하는 일몰은 늘 가슴을 흔드는 일이다.
* 전일항해 크루즈배 6,7층 대극장 공연
오늘은 뷔페석식으로 5시경 가서 빨리 먹고 7시 첫 타임의 공연을 관람하러 갔다. 6,7층 대극장이다. 6층 입구에서 흑인 안내원 남자가 우리 부부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무대를 배경으로 잘 찍었다. 오늘 공연은 남자가수 3명이 노래를 부른다. 밴드와 함께 별이 반짝이는 하늘의 무대조명이 곱다. 1명씩 부르기도, 2명씩 부르기도 한다. 가끔은 조크도 하여 객석을 훈훈하게 웃긴다. 1시간 동안 멋진 공연을 보았다. 공연이 끝나고 방에 오니 침대에 수영장용 수건으로 동물을 만들어 놓았다. 우리 방 룸서비스를 해주는 선원이 만들어준 정성 담긴 선물이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자쿠지 야외수영장 찜질탕에서 전신마사지를 했다. 캄캄한 밤하늘을 보며 크루즈 배 수영장에서 환상의 시간을 엮는 기막힌 순간이다. 이런 날이 언제 또 올까. 기막히게 행복한 순간이다. 저녁을 일찍 먹어 허전하여 뷔페식당에 가서 간단히 과이뤼주로 식사를 했다. 뷔페식당은 9시 30분 정도에 문을 닫는데 그보다 늦게도 음식을 제공해준다. 오늘 역시 많이도 훈훈하게 흔들리는 가슴의 전율이 전신을 타고 흐른다. 이것이 크루즈 여행의 큰 매력 중 하나다.
2019년 2월 2일 토요일 과테말라
* 과테말라 푸에르토께찰 항구 기항
항구가 허름한 인상이다. 유조선이 5척 바다에 떠 있다. 조식 후 13층 갑판에 올라가서 항구를 조망했다.아침 햇살에 12층 수영장도 화사하다. 과테말라는 멕시코 남쪽, 유카탄반도 아랫부분에 위치하며, 면적은 10만 8889㎢, 인구는 약 1,300만명, 수도는 과테말라시(Guatemala City)이다. '과테말라'라는 말의 기원은 원주민에서 나온 것이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혹자는 그 이름이 마야-톨텍어로 '나무의 땅'이라는 뜻으로 생각한다. 다른 의견으로는 나후아틀어로 'Quauhtitlan'인데 이것은 '나무들 사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스페인의 정복 기간 중에서 페드로 데 알바라도를 수행하였던 틀라스칸테칸 군사들이 이 지역에 붙인 이름이었다. 아마도 그들의 말로 'Quiche'로 번역되며, 이것은 '많은 나무'를 뜻 한다. 1821년 과테말라는 벨리즈와 함께 멕시코에 가입된 상태에서 독립을 이루었고 1839년경에 완전 독립을 이루었다. 오늘 과테말라 푸에르토께찰에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스페인 식민지 도시인 안티구와(Antigua)로 간다. 안티구아의 자갈 깔린 거리를 걸으며 다양한 색채의 건물, 성당, 유적을 본다. 1500년대 수도원으로 사용되었던, 현재는 호텔이자 박물관인 아름답고 유서깊은 산토 도밍고 수도원 박물관을 관람하고 수도원 현지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8커피박물관도 간다. 8시간 동안 하루 종일 안티구아의 하일라이트를 둘러 보는 일정으로 설렘과 함께 기대되는 날이다.
* 과테말라 푸에르토께찰 크루즈배 엘리베이터
크루즈 배에서 엘리베이터는 아주 큰 역할을 한다. 타고 오르내리는 일도 하지만 그 안에서 세계인들과 함께 이동하며 교류한다. 서로 눈인사 또는 영어로 인사를 하고, 때로는 서로의 국가를 묻기도 한다. 수없이 식당으로, 수영장으로, 하선 등으로 오르내리던 잊지 못할 엘리베이터다.
* 과테말라 화폐
과테말라 현지 가이드가 버스 안에서 과테말라의 화폐를 보여준다. 모두 돌려보라고 한다. 지폐 3장이다. 참으로 친절하고 자상한 가이드다. 고마웠다. 나의 남편은 금융계 출신이다. 그래서일까. 과테말라 화폐에 집중하여 한동안 보고 있다. 먼 나라이고, 과테말라는 처음이어서 모든 것이 다 신기하다.
* 과테말라 푸에르토께찰 풍경
과테말라 푸에르토께찰 항구에서 안티구아로 가는 길이다. 푸에르토 께찰은 콰테말라의 태퍙양 연안에 있는 주력항구이다. 항구의 한쪽면은 크루즈의 계류장인 동시에 환영 선착장과 기념품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몇몇 크루즈 선사의 파나마운하 여행 프로그램상 경유하는 항구이다. 항구의 다른 쪽은 대규모 컨테이너 물동량을 처리하는 크레인들이 늘어서 있는 부두이다. 푸에르토 께찰항에서 과테말라에 도착하는 수입물량의 대부분이 처리된다. 사탕수수와 커피 등 농산물이 주요 처리상품이다. 과테말라의 수출은 대서양쪽 푸에르토 바라로스항이 주로 이용된다. 사람들의 거주지는 낮은 열대 지역 보다는 높은 중앙 고원지대에 있어 좀 더 온화하다. 한편 항구 왼쪽으로 들어가면 이스타파가 나온다. 이곳 검은 모래사장에는 바다거북이가 알을 부화시키려 올라 온다, 과테말라 대서양쪽 강인 리오둘세에는 민물도 바다도 아닌 식용 거북이가 많이 잡힌다고 한다. 한편 이스타파 바다는 파도가 아주 세서 서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 온다고 한다. 이곳에서 약 2시간 30분 정도 이동을 하면 마야 유적지인 IXIMCHE를 구경할 수 있다. IMXMCHE는 1470~1524년까지 마야의 수도 였다고 한다. 간혹 운이 좋으면 이곳에서 행하는 마야 전통의식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오늘 안티구아로 가서 그곳 도시를 탐방할 것이다. 여인들이 차도곁으로 지나간다. 옛날 한국의 여인처럼 머리에 짐을 이고 가는 여자도 있다. 야자나무와 농토가 멋진 정경이다.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땅도 보인다. 사탕수수의 키가 크고 작은 밭이 곳곳에서 많이 지나간다. 과테말라는 수출 1위 품목이 커피, 2위가 관광, 3위가 사탕수수, 4위가 바나나 등이란다. 멀리 화산도 보인다. 연기가 분출되고 있다. 정지된 화산도 있다. 도로변 야트막한 산정에 독특한 형상의 바위가 보인다.
* 과테말라 푸에르토께찰에서 안티구아로 가며 본 인디언 바위
산정에 있는 바위가 꼭 인디언을 닮은 모양이다. 버스 기사는 잠시 멈추어 내려서 조망하도록 한다. 원주민 인디언이 산 위에 앉아있는 것 같다. 도로변에 하차하여 조망하며 사진을 찍어 담아간다. 버스에 승차하여 떠나갈 때 다시 뒤돌아 보니 인디언 바위의 형상은 지워지고 다른 모양으로 보인다. 그곳 포인트에서만 인디언 바위였다.
* 과테말라 푸에르토께찰에서 안티구아로 가며 본 화산
버스 안에서 가끔씩 보았던 화산이 이곳에서 하차하여 바라보니 더욱 잘 보인다. 아직도 활화산으로 산 꼭대기에서 연기가 창공으로 속구치고 있다. 인디언 바위도, 화사도 모두 과테말라의 기이한 풍경들이다.
* 과테말라 주유소의 경찰
갑자기 화징실이 급한 일행 남자가 있어 버스가 주유소에 정차했는데 뜻밖의 기막힌 모습을 보았다. 경찰이 총을 메고 왔다갔다 하며 주유소를 지키고 있다. 현금이 거래되는 곳이니 아마도 저렇게 경찰이 지켜주는 것 같다. 또한 화장실에 물이 없어서 현지 가이드가 물통을 들고 화장실로 간다. 경찰도, 화장실도 모두 가난한 나라의 애련한 풍경이다.
* 과테말라 평온한 민가
과테말라는 2018년 6월 3일의 큰 화산폭발로 상처를 입은 국가다. 곧 그때 폐허가 된 마을을 지나게 되는데 지금 보이는 민가는 평온하다. 저토록 아름다운 주택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묻혔다니 믿기지 않는다.
* 과테말라 화산폭발로 페허가 된 마을
중미에서 가장 활발한 화산 가운데 하나인 과테말라 푸에고 화산이 폭발하여 완전히 폐허가 된 마을를 보았다. 화산재가 온 마을을 덮었다. 모두 폐허가 된 마을이다. 나무가 타 죽고, 민가도 다 쓰러졌다. 큰 바위덩이와 화산재가 바닥에 가득하다. 이사갈 집이 없어 한 가구가 그대로 마을에 남아 살고 있다. 마당에서 줄어 널어놓은 빨래가 펄럭인다. 오직 저 잡 한 채만 있다. 다 떠났은데 애련한 모습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2018년 6월 3일 오전 8시에 저 푸에고 화산이 폭발할 것이라고, 대피시키라고 과테말라 정부에 연락했는데 말을 듣지 않았다. 오직 여기 잇는 호텔과 미국인 등만 대피하여 떠나고 원주민들은 정부에서 조치를 취하지 않아 수천 명이 죽었다. 부상자도 많았다. 엄청나게 큰 재해였다. 자연 앞에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 깨닫게 해주는 현장이다. 지나면서 참으로 엄숙하고 겸허한 순간들이었다. 굉음과 함께 화산재 구름이 지상 만 미터 상공까지 치솟았다. 수도 과테말라시티에서 44km 거리에 있는 푸에고 화산은 화산재와 용암을 분출했으며, 인근 마을은 검은 화산재와 연기로 뒤덮였다. 용암과 엄청난 화산재를 분출하며 폭발했다. 몰아치는 화산재를 피해 사람들은 혼비백산해 도망치다 파묻히곤 했다. 사방은 온통 뿌연 화산재로 뒤덮였고 폐허로 변한 마을 곳곳에는 희생자들의 시신이 방치돼 있었다.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유명 관광지인 안티과의 거리와 집도 화산재 뒤덮였다. 스페인어로 '불'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푸에고 활화산의 해발 고도는 3천763m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 도시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보호 지역으로 지정된 안티과가 푸에고 화산 근처에 있다. 마치 용광로처럼 화염이 치솟고 시뻘건 용암이 끝도없이 흘러내릴 때 그날은 죽음의 공포가 죽음보다 더 무서웠을 것이다.
과테말라 푸에고 화산, 자세히 말하면 볼칸 데 푸에고, 즉 불의 화산에서 2018년 6월 3일 오전 10시경 1974년 이후 40여 년 만에 푸에고 화산이 가장 강력한 연쇄 폭발을 일으키면서 화산재와 유독가스 등이 인근 마을을 뒤덮었다. 과테말라 서남부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푸에고 화산은 스페인어로 ‘불의 화산’이란 이름답게 미주 대륙에서 가장 활발한 화산 중 하나였으며 화산이 폭발한 건 올해만 두 번째로 전문가들은 이번 폭발이 1974년 이래 가장 큰 규모로 파악하고 있다. 불의 고리(Ring of fire)'라고 불리는 환태평양 화산대에 위치해 있으며 푸에고 화산은 중앙아메리카 화산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여 전문가들도 폭발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중남미 화산활동이 강해지면서 큰 지각변동이 있을 수 있다고 예측하고 있다. 화산 피해로 200개 지역이 거주가 불가능하거나 화산에 취약한 것으로 지정됐다.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화산재가 쏟아지면서, 화산 폭발의 영향권에 놓였다. 그 당시 당국은 인근 지역에 적색경보를 발령했고, 국제공항도 폐쇄했다.
과테말라는 동서가 산맥으로 이루어지면서 국토를 세 개의 지방으로 나눈다. 태평양쪽의 좁은 해안평야와 북부의 넓은 저습지는 덥고 건강상 좋지 않은 지방이다. 산악지대가 많은데, 중앙의 산지나 고원은 상당히 시원하고 쾌적하며, 건기와 우기 중에서 특히 건기에 지내기 좋다. 따라서 인구의 태반이 중앙고지에 집중해 있으며, 수도인 과테말라 시도 해발 약 1,500m의 고지에 있다. 중앙산지는 멕시코에서 계속되는 험준한 습곡 산맥이며, 태평양 연안을 따라 화산이 즐비하다. 화산성 토양은 비옥하므로 이 지역에는 농업이 발달해 있다. 활화산이나 지진의 활동도 격심하다. 약 50년 전의 대지진 때에는 수도가 거의 파괴되었다. 모든 주요 도시는 태평양 연안 지역에 있으며 북쪽의 페텐 지역은 산발적으로 인구가 분포하다. 해발고도에 따라 기후가 다양하며 저지대일수록 습하고 열대 기후에 가깝다. 반대로 높은 지역은 상당히 건조하다.
화산 폭발, 그 무서운 단어를 전달매체에서만 보았지 눈앞에서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활화산의 연기 분출도, 페혜가 된 마을도 모두 지구에 대한 무서운 경고다. 더 이상 저런 불행이 없기를 빌며 지났다.
* 과테말라 화산폭발 마을 곁에서 아직도 화산연기 분출
우뚝 솟은 화산에서 연가가 솟구친다. 많이 분출하다가 또 분출, 계속 반복되는 무서운 광경이다. 반대편에는 정지된 화산도 있다. 버스가 달려갈 때마다 계속 따리오며 보여준다. 하늘 닿을듯 우람한 산이다. 산정이 아득하다. 용암 분출로 산꼭대기에서 산을 타고 내려온 흔적이 있다. 용암이 흘러내린 형상이 그대로 있다. 오늘 기막힌 자연의 무서운 재앙현장을 목격했다. 아직도 저 산속에서는 뜨거운 용암이 출렁거리고 언제 또 폭발하여 분출할 지 모를 일이다.
* 과테말라 화산폭발 다리와 마을 복구
다리도 끊어져서 복구 중이다. 간신히 차량이 다리를 지난다. 곳곳에 포크레인이 작업을 하고 있다. 화산 폭발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는 산 현장이다.
* 과테말라 계속 분출되는 푸에고 활화산 연기
불의 고리 푸에고 활화산은 잊어질만 하면 얼굴을 내밀고 연기를 하늘 높이 허공에 내뿜는 두려운 상황을 자꾸 연출한다. 먼 나라 아시아에서 온 우리들에게 뜨거운 경고인양, 지구의 엄청난 재앙을 보라는양, 그렇게 보여져 서늘하기도 하다. 연기량도 많았다, 적었다를 반복한다. 방향에 따라 연기 형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하늘 높이 치솟는다. 지금도 저 땅 속에는 용암이 끓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용암과 화산 연기가 모두 잠들기를 빌었다.
* 과테말라 공동묘지
안티구아로 가는 중에 공동묘지를 보았다. 도로변에 큰 자락으로 앉아있다. 고운 색상의 작은 집에 심자가가 꽂혀 있다. 죽어서도 아름다운 집에 사는 과테말라 사람들이다.
* 과테말라 농촌 마을 풍경
과테말라의 산녘 농촌 마을 풍경을 본다. 민가가 산언덕에 늘어서 있고 그 주변 산줄기에는 밭을 일군 경작지가 있다. 화산재의 비옥한 거름으로 농사가 잘 된단다. 아낙이 무언가 메고 지나간다. 정겨운 마을 풍경이다.
* 과테말라 음악 박물관
커피 농장과 커피 박물관 탐방을 위해 온 Azotea 문화센터에서 먼저 음악 박물관을 탐방했다. 과테말라 마야인들의 전통악기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인형을 제작하여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도 재현해 놓아 실감난다. 아주 많은 악기들이 과테말라의 음악 문화를 빛내고 있다.
* 과테말라 커피 박물관
과테말라는 커피가 수출 1위 품목이다. 그에 따라 커피 박물관도 잘 꾸며 놓았다. 커피 재배에서부터 생산, 가공과정, 시음현장까지 생생하게 전시했다. 과테말라는 커피가 수출 1위 품목이다. 그에 따라 커피 박물관도 잘 꾸며 놓았다. 커피 재배에서부터 생산, 가공과정, 시음현장까지 생생하게 전시했다. 커피에 대한 사진도 전시하고, 커피 나무도 있고, 커피 생산 기구들도 있어 실감나게 보고 잘 배웠다.
* 과테말라 커피 농장
엄청난 많은 양의 커피를 말리고 있는 커피 농장에 왔다. 가을에 농사진 한국의 벼를 말리는 장면과 흡사하다. 아주 넓고 큰 마당에 가득 널어 놓았다. 남자들 4명이 뒤집어 말리느라 도구를 밀고 다닌다. 인건비도 싸고, 햇볕도 좋아 태양광선으로 자연건조 한다. 과테말라의 커피 생산은 화산재가 큰 역할을 한다. 화산재는 아주 좋은 거름이다. 그래서 들녘에 커피 재배 농장이 많다. 이곳 과테말라 커피는 50%가 햇볕, 50%는 그늘이 있어야 생산이 가능해서 커피 농장 곳곳에 큰 나무를 심어 그늘을 만들어 준다. 9개월에 1회 수확한다. 코스타리카는 햇살만 100% 필요하고, 6개월에 1회 수확한다. 과테말라의 커피는 수출 1위로 1년에 64Kg 자루의 커피 400만 개를 수출하여 약 1조원의 수입을 얻는다. 엄청난 국가재원이다. 과테말라는 소득의 20%는 국가에 세금을 내는 봉급자이고, 20%는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60%는 극빈자다. 그래도 농사를 지어 먹고 살 정도의 백성은 행복한 거란다. 자녀를 시골은 6명, 도시는 4명 정도 낳는다. 시골을 일을 해야해서 많이 낳는다. 의무교육 기간이 6년인데 3년만 다니고 농사일을 한다. 국가 고위층이 인마이포켓 개인착복으로 외국원조를 받아도 시민들에게는 전혀 오지 않는다. 최상위 250세대가 과테말라 돈을 쥐고 움직인다. 전대통령 형제가 국가의 돈을 많이 착복해서 구속 상태다. 쓴 돈을 다 적어 토해내라고 해도 제대로 안 밝혀진단다. 참으로 더티한 나라라고 가이드는 슬픈 현실을 씁씁하게 소개한다. 우리나라와도 수교를 했고, 북한과도 수교를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더 친하다. 우리나라에서 기술 등 원조를 많이 해줘서 그렇다. 커피 농장을 나오면서 기념품 가게에서 커피도 사고 손녀들 작은 가방과 작은 손자의 당나귀 인형을 샀다. 걱정인형도 샀다. 걱정거리가 있을 때 인형에게 말하고 베개 밑에 두고 자면 걱정이 사라진다는 인형이다. 과테말라에서는 인기가 좋은 인형이어서 할머니가 손주들에게 선물한단다. 바쁜 일정으로 서둘러 나와 버스를 탔다.
* 과테말라 안티구아 산토도밍고 시가지 풍경
오늘은 안티구아 시가지를 많이 걷는다. 버스 이동도 많지만 시가지를 많이 걷는다. 바닥이 모두 돌로 박혀 있다. 옛 스페인 등 유럽 지배로 그 잔재 건물들이 많다. 허무러진 상태 그대로 살고 있다. 오토바이가 많다. 고풍스런 분위기로 옛 수도다운 면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현재 과테말라의 수도는 과테말라시티다. 여기는 1500년 된 옛 수도였던 도시로 도시 전체가 도시역사지구로 유네스코 문화재에 등록 되어 있다. 시내버스가 미국 중고 스쿨버스다. 여기서는 버스를 운전사가 어디 간다고 말하면 그때 사람들이 승차한다. 택시도 많고 자가용도 많다. 안티구아는 해발 1500m 고지의 도시라서 안 더웠다. 안티구아의 부활전에는 도시의 골목길에 붉은 융단을 깔고 매우 장엄한 축제를 한다.
과테말라 안티구아는 스페인 식민시절 5개국 멕시코,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의 수도였기 때문에 다른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중미 국가 중 가장 완벽한 스페인어를 구사한다. 여행객과 현지인이 함께 생활하면서 문화와 스페인어를 배우는 시스템도 있다. 식사 시간에도 스페인어 교육을 하며 서로의 문화를 교류한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과테말라의 옛 수도로 아구아화산, 아까떼낭고화산, 푸에고화산으로 둘러싸인 도시이다. 스페인 본토보다 더 웅장하고 아름답게 건설했다는 건축물들이다. 과테말라의 수도 과테말라 시에서 북서쪽으로 25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작은 도시다. 에스파냐 식민지 시대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16세기 중반 에스파냐에 의해 건설되어 200여 년간 과테말라 왕국의 수도로 번영했다. 전성기는 17세기로 인구 7만에 중앙아메리카 예술 학문 중심지였다. 하지만 1773년 두 차례의 대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자 25km km 떨어진 곳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그곳이 바로 현재의 과테말라 시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수도를 ‘옛 과테말라’라는 뜻의 안티과 과테말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간단히 줄여서 안티과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300년 전 식민지 개척시대의 향기가 흐르는 인구 3만 명의 안티과는 쉬엄쉬엄 걸어도 하루가 안 되어 다 볼 수 있는 작은 규모지만 옛 왕국의 수도답게 곳곳에 유적이 있어 볼거리가 많다. 지진으로 무너졌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과거의 건축물 사이를 걷노라면 300년 전 식민지 개척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도시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중앙 아르마스 공원 근처에는 시청사로 쓰이는 과거 총독부 건물, 아직도 복원공사 중인 대성당, 아름다운 분수대, 중미 최초의 대학 산카를로스 대학교, 식민지 예술 박물관, 시의회 건물들이 있다. 가톨릭이 융성했던 곳답게 곳곳에 지진으로 허물어진 성당들의 잔해가 남아 있다.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주택들도 당시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잘 보여준다. 현지인보다 관광객이 더 많이 눈에 띄는 도시이기도 하다. 관광객들이 몰리는 이유는 아름다운 식민지 개척시대 건축물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렴한 가격에 에스파냐어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안티과에는 70여 개나 되는 에스파냐어 어학원이 있다. 때문에 여행자들은 이곳 아카데미에 등록해 에스파냐어를 배운 뒤 본격적인 중남미 여행을 떠난다. 안티과는 여행자들에게 중남미 여행의 전초기지가 되는 셈이다. 커피마니아들에게 안티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곳이다. 화산의 경사면에서 잦은 비를 맞고 태양을 흠뻑 받으며 자란 안티과 커피는 세계적인 명품으로 꼽힌다.
버스가 좁은 골목길을 자로 달린다. 뒤를 보면 자가용들이 줄지어 따라 온다. 그러다가 내려서 또 걸으면 온통 유럽풍 물결의 낡은 건물, 혹은 고운 색상의 건물들이 줄지어 서서 이색적인 풍경을 전시한다. 꽃을 돌출 된 발코니에 기르는 풍습도 유럽 그대로다. 참 예쁘고 꼭 와 봐야할 도시 안티구아다. 먼 나라, 참으로 오기 힘든 나라의 도시에 온 것이 행복하다.
* 과테말라 안티구아 산토도밍고 수도원 아름다운 정원
수도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아름다운 정경이다. 앵무새 2마리와 많은 꽃과 나무의 울창한 식물들이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 현재는 5성급 호텔이다. 크고 하얀 나무가 오랜 역사를 말해 준다. 이곳에서 중식을 했다. 직원들이 뷔페로 맛있게 차려준다. 시원한 음료와 함께 잘 먹었다. 기념품 상인들도 많이 들어와 있다. 큰 손자에게 줄 피리를 샀다. 앵무새 눈을 박아 독특한 모양이다. 넓은 정원을 지나 관람하기 시작했다.
* 과테말라 안티구아 산토도밍고 고풍스런 건물유적
아름답고 유서 깊은 수도원은 정원 곳곳에 고풍스런 건물유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1642년 지어진 건물인데 낡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지진으로 크게 파괴된 흔적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다. 허물지 않고 그대로 보존해 주어 전시한다. 중앙에는 분수도 있어 시원한 정경이다.
* 과테말라 안티구아 산토도밍고 수도원 성당
지금도 예배를 드리는 성당이 있다. 허물어진 채 그대로 지붕만 천막천 양식의 뚜껑을 덮고 의자와 성물이 놓여 있어 거룩한 분위기다.
* 과테말라 안티구아 산토도밍고 수도원 유물 전시관
그 당시의 유물들이 한 곳에 모여 전시되어 있다. 지진으로 많이 피묻힌 것을 꺼내어 복원한 것도 있고 현대풍의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킨 것도 있다.
* 과테말라 안티구아 산토도밍고 수도원 옛날 재현 동상들
수도원 당시의 활동 인물들의 동상으로 세워 재현해 놓았다. 주로 성경 속 인물이다. 날고 허름한 벽면이 그 옛날로 이끌며 15세기의 향수를 머금고 있다.
* 과테말라 안티구아 산토도밍고 수도원 지진 때 묻힌 뼈
과테말라는 지진이 많은 국가다. 그 중에서도 안티구아는 푸에고 화산 등 화산지대와 가까워서 큰 지진이 발생하여 피해를 입은 도시다. 이곳 수도원도 지진으로 피해를 입었는데 그 당시의 아픈 흔적을 전시해 놓았다. 지진 때 묻힌 뼈를 모아놓은 곳도 있고, 한 사람의 뼈를 사람 형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도 있다. 또한 지진 때 흘리던 피를 재현한 남자도 있고, 벽면에 옛 그대로의 지진 때 묻힌 뼈조각을 전시하기도 한다. 시신을 놓고 기도하던 곳도 있다. 참으로 아픈 기억들이 전시된 공간이다.
* 과테말라 안티구아 스페인풍 시가지
스페인 식민지 도시의 안티구아는 자갈 깔린 거리가 명품이다. 다양한 색채로 장식된 건물 파사드, 타일지붕, 성당 등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도시다. 걸어도 걸어도 어느 골목이든 모두 스페인 지배 당시의 유적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 과테말라 안티구아 보석관
잠시 안티구아 도심에서 보석관에 들었다. 직원이 나와서 소개를 한다. 그리고 옆에 있는 보석 전시관에서 살펴보았다. 입구에는 어린 여자아이들이 기념품을 이고, 들고 사라고 떼를 쓴다. 어려운 국가의 한 단면이고, 값비싼 보석관 앞에서의 아이러니컬한 풍경이다.
* 과테말라 안티구아 고풍스런 시가지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도시로 바로크 양식 건축의 야외 박물관이라 불리는 안티구아다. 어쩌면 가난한 국가라서 식민지 잔재의 유물을 파괴하여 버리지 않은 것이 오늘날 관광자원으로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돌이 박힌 거리도 걷기에는 좀 불편사지만 아주 독특한 정경이다. 모두 돌출된 발코니에 꽃을 기르거나 곱게 단장한 것도 유럽풍으로 무척 아름답다. 진동일 참 많이 걸었는도 다시 걷고 싶은 안티구아다. 잊지 못할 정겨운 도시다.
* 과테말라 안티구아 아르마스 광장
안티구아는 좁은 구도로 골목이 많아 버스 진입이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 걸어서 이동한다. 돌바닥 길을 한참을 걸어서 여기 왔다. 아르마스 광장은 페루에서도, 칠레에서도 만났다. 중남미 지역에는 같은 이름의 공원이 이렇게 곳곳에 있다. 광장이라기보다는 아담한 공원 규모다. 나무 그늘과 벤치가 많아 자국의 시민들이 주로 앉아서 쉬고 있다. 공원 중앙에는 우아한 동상조각품이 전시된 분수가 있다. 무리 시원하게 솟구친다. 공원 주변에는 시청사와 성당이 있다. 기념풍 상인들이 다니며 외국 관람객에게 사달라고 권하기도 한다. 나도 전통악기를 3개 샀다. 두 아들네와 우리 부부가 보관할 기념품이다. 과테말라라는 영문 마크가 좋아서 선택하였다. 이제 저물어가는 저녁시간이다.
* 과테말라 안티구아 아르마스 광장 앞 시청
아르마스 광장 앞 도로 건너편에 스페인 지배 당시 총독부 건물로 쓰이던 시청사가 있다. 아치형 문이 줄지어 있어 매우 독특한 구조의 건물이다. 낡고 허름하지만 기둥과 건축양식 등이 매우 고풍스럽다.
* 과테말라 안티구아 아르마스 광장 앞 성당
아르마스 광장 곁에 큰 성당이 있다. 외벽에는 그날을 재현하듯 성인들 조각상이 부착되어 있다. 층층으로 올린 지붕이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운 조형이다.
* 과테말라 안타구아 산타클라라 아치문 거리
안티구아 골목길을 많이 걸었는데 지금 걷은 이 골목길은 좀 독특하다. 중간에 아름다운 아치형 건축물이 세워져 있다. 이것은 안티구아의 상징 건물이다. 거리 곳곳에서 원주민들이 춤과 노래 공연을 한다. 골목 끝에는 자비의 성당이 있다. 부활절에는 이 골목길에 붉은 융단을 다 깔고 축제를 한단다. 그때는 세계인들이 더 많이 찾는단다. 저녁 어스름 그늘이 드리워서 더욱 운치있다. 꽤 길어서 충분히 낭만에 젖는 흐뭇한 시간이었다.
* 과테말라 안타구아 자비의 성당
아치형 건물의 문을 지나자 노란색 고운 건물이 보인다. 이곳이 자비의 성당이다. 정문 앞으로 가니 결혼식하는 신부와 신랑이 있다. 이 자비의 성당은 결혼을 하는 성당이다. 성당 지하에는 무덤과 시신 20구가 있다. 매우 웅장하고 장엄한 성당이다. 주변은 아름다운 공원이다.
* 과테말라 우람한 산과 마을 풍경
이제 안티구아를 떠나 푸에르토께찰 항구로 이동한다. 푸에르토께찰 항구에 정박한 크루즈 배가 6시 출항이어서 4시경 안티구아를 출발했다. 항구로 가면서 본 산과 마을의 풍경이 곱다. 큰 산이 구름을 품고 앉아서 마을을 감싼다.
* 과테말라 광활한 콩 재배 농장
화산 연기가 분출하는 푸에고 활화산 자락 아래 아주 큰 콩 재배지역 농토가 보인다. 비닐을 덮어 놓았다. 콩싹이 나오는 것 같다. 과테말라에서는 콩 재배가 잘 되어서 많이 재배한다. 광범위하게 퍼진 화산재가 농작물에게는 아주 비옥한 영양을 제공한다. 특히 커피 재배에는 아주 좋은 거름이란다. 화산재라도 남아서 유용하게 쓰인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 과테말라 공동묘지 장례식 풍경
거리에서 독특한 장면을 보았다. 장례식 하는 행렬이 운구차와 함께 지나간다. 마침 차량들로 정체되어 볼 수 있었다. 아까 오전에 안티구아로 올 때 지나온 그 공동묘지다. 매우 큰 공동묘지로 진입문도 아득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운구행렬을 따라 간다. 가슴시린 인간의 마지막 순간을 먼 나라에서 소슬하게 보고 있다. 그래도 훈훈한 인심이 마지막 가는 길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 과테말라 화산폭발 마을 복구하는 현장
아까 지나갔던 지진 폐허마을을 또 지나간다. 중장비 차량 몇 대가 들어와 복구 중이다. 보고 또 봐도 슬픈 현장이다.
* 과테말라 푸에르토께찰 항구 크루즈배 재승선
안티구아에서 서둘러 와서 크루즈 배 앞에 왔다. 승무원들이 나와서 물수건을 나누어 준다. 저녁시간으로 진한 그늘이 드리워 출항을 재촉한다. 배는 6시 출항이라서 크루즈 배 안으로 그 시간 안에 승선해야 한다. 짐을 검색하고 배의 진입문을 통과하면 늘 4층이다. 4층에서 엘리베이터로 9층 9528 우리 부부의 선실로 왔다.
* 과테말라 푸에르토께찰 항구 일몰
태평양 바다의 일몰이 비경이다. 선실 발코니에서 한동안 조망했다. 수영장에 가서 피로를 풀고 뷔페석식을 했다. 오늘은 많이 걸어서 여행한 기항지 관광으로 피곤해서 대극장 공연은 가지 않았다. 대신 그 시간에 선실 티브이애서 영화를 보았다. 지진으로 건물이 붕괴하면서 괴물이 출현하는 영화다. 이제 과테말라의 여정이 마무리 되는 시간이다. 많은 것을 보고 배워서 참 보람되고 흐뭇하여 잊지 못한 과테말라다.
2019년 2월 3일 일요일 니카라과
* 니카라과 코린토 항구 입항
크루즈 배가 항구에 입항할 때 발코니에 나가보니 사람들이 모여 악기를 연주하며 요란하다. 아프리카 튀니지 레국라타항에 입할할 때와 동일하게 배를 타고 들어온 외객을 위해 환영식을 하는 것이다. 사람과 기념품 상가도 많이 들어와 있다. 아담한 항구다.
* 니카라과 코린토 항구 기항
크루즈 배가 완전히 기항했다. 하선 준비를 하고 13층 갑판에 나가니 해살이 눈부시다. 멀리 우람한 산이 있고 온통 초록 물결 풍경이다. 항구의 화물 컨테이너들과 함께 고운 정경이다. 니카라과는 중앙아메리카에서는 가장 넓다. 북동쪽은 온두라스, 남쪽은 코스타리카, 동쪽은 대서양 카리브 해에 접하고, 남서쪽은 태평양에 접하고 있다. 스페인이 대서양을 타고 와서 카리브해로 니카라과에 진입했다. 주식으로는 '팥'을 주로 먹는다. 카리브 해에는 콘 제도나 미스키 토 제도가 있다. 내륙에 큰 호수가 있다. 그래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나카라과 운하를 조성하고 있다. 2020년에 완공 예정이다. 운하의 조성 조건을 갖춘 참으로 축복받은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태평양 연안과 2대 호소(湖沼) 사이가 이 나라의 심장부로서 총인구의 약 80% 및 산업도 이 지역에 집중해 있다. 수도 마나과에는 인구 약 100만명 정도가 살며, 이 지역의 마나과 호반에 자리하고 있다. 건계와 우계로 나뉘고 덥기는 하나 양호하다. 태평양쪽 해안을 따라 화산이 분출하 며 토양도 비옥하다.
이곳 코린토 항구는 해상운송의 60%를 처리하는 주력 항구다. 2020년 완공을 목표로 운하를 건설 중인 곳이기도 하다. 마나과 수도에서 111km, 태평양 연안에 위치하고 있다. 인구는 2만 4000명이다. 니카라과의 주요 항구로 커피, 설탕, 피혁을 수출하고 있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수많은 배들과 컨테이너들을 볼 수 있는데, 니카라과의 전체 해상 수송의 약 60%가 이 곳 코린토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곳에서 니카라과 최고의 관광지인 레온에 자동차로 약 1시간 반이면 갈 수가 있다. 오늘 우리 일행도 레온에 간다.
현재 니카라과 운하를 건설 중인 나라다. 파나마 운하의 3배의 길이가 되고 파나마 운하에 이어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제 2의 운하가 된다고 한다. 2020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는 니카라과 운하의 재미있는 점은 중국이 운하 건설과 운영권을 따냄으로서, 파나마 운하를 관여하고 있던 미국 경제에 영향과 견제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남미 최빈국에 속하는 니카라과 정부는 대운하 건설로 경제 부흥을 일으킨 파나마의 선례를 쫒아 빈국에서 탈출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으며, 수 만명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 성장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운하가 건설 된다는 의미 깊은 나라에 온 것이 흐뭇하다.
* 니카라과 코린토 크루즈배 12층 갑판
하선 대기 시간이 좀 여유가 있어서 12층 갑판을 돌아보았다. 이곳은 야외수영장이 거의 차지하고 있다. 주변에는 유럽인들이 썬팅하는 수영장용 벤치도 많고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전신찜질 온탕이 4군데 있고, 대형 수영장 풀이 2곳, 내가 천진한 소녀가 되어 신나게 타는 대형 미끄럼틀이 솟구쳐 올라 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즐겨 찾아와서 낭만의 시간을 태우는 곳이다. 눈이 시리도록 청명한 하늘과 아침 햇살이 비경을 더해준다.
* 니카라과 코린토 크루즈배 12층 도서관
12층 갑판과 그외 선내 탐방으로 12층 도서관에 갔다. 12층 뷔페식당 갈 때 매일 보는 곳이다. 곁에는 게임하는 방도 있다. 대부분 영어로 된 책이어서 우리 한국인이 읽기에는 어렵다. 몇 권 꺼내서 보고 잠시 휴식하고 나왔다.
* 니카라과 코린토 크루즈배 6층 중앙로비
6층에는 중앙 로비가 있다. 계단이 예술적으로 설치되어 있다. 전등 조명도 예술이다. 선내 업를 보는 사무국도 있다. 영화를 상영하는 대형 스크린도 있고, 피아노 연주와 함께 공연을 하기도 하는 공간이다. 사람들이 모여 정담을 나누기도 하는 곳이다.
* 니카라과 코린토 항구 배 6,7층 대극장 하선 대기
하선 대기실은 항상 6,7층 대극장이다. 한국 우리 일행은 모두 7층 좌측 출입문에서 만나 인솔자로부터 버스 승차권 등을 받고 극장 안에서 기다린다. 그러면 승무원이 국가별로 호명하고 그때 질서를 지켜 4층으로 내려가 하선하다. 시간이 나면 7층 극장 옆 발코니에 나가 항구를 조망하기도 한다.
* 니카라과 코린토 항구 하선
하선하니 니카라과 사람들이 악기연주와 노래와 춤으로 요란하다. 환영식을 그들 방식으로 베풀어주는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기념픔 상가가 배의 바로 앞까지 들어와 있다. 버스도 배 앞에 와 있다. 우리 버스는 17번이다. 우리 일행만 타고 간다. 니카라과 남자 가이드 안내로 승차했다. 오늘은 버스를 타고 200년간 니카라과 수도였던 사자의 도시 레온으로 간다. 현재 수도인 마나과 이전 1800년대 수도였다. 중미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도시이고, 수도 마나과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다. 식민지 스타일의 거리, 나무지붕으로 된 단층 건물 등을 둘러보고, 레온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과 대성당을 탐방한다. 낮 기온은 34도 더운 편이다. 그래도 버스 에어컨이 세어서 겉옷은 꼭 준비하고 승차한다.
* 니카라과 코린토 시가지
항구도시 코린토 시가지가 소박하고 아담하다. 사람들 통행도 없어 한적하다. 리어카가 교통수단으로 거리를 다닌다. 코린토 지명은 그리스 고린도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스페인 잔재 그대로 사는 나라다. 부자들은 말을 길러 말을 타기도 한다. 행사 때도 말타기를 한다.
* 니카라과 사탕수수 밭
코린토 사기지를 벗어나서 들녘을 달릴 때 사탕수수 밭이 곳곳에서 많이 보인다. 큰 규모의 가공공장도 있다. 니카라과는 수입원이 사탕수수와 양농업이다. 동물, 말을 길러 팔기도 한다. 푸른 나무가 울창한 들녘이다.
* 니카라과 레온 가는 길에 본 화산
레온으로 가는 길에 화산을 몇 개 보았다. 해발 1700m의 높은 화산도 보았다. 2015년 5월에 2mm의 화산재가 쌓일 정도의 약한 화산 폭발이 가장 최근의 폭발이란다. 아직도 연기가 조금씩 솟구친다. 활화산으로 언제 또 터질지 모르는 일이란다. 작은 도시도 지나간다. 동상이 로터리에 우뚝 서서 길 안내 한다. 무서운 화산을 과테말라에서도 보았는데, 니카라과에서도 또 보니 중미 국가들의 화산으로 인한 고통을 다소나마 알게 되었다.
* 니카라과 휴게소
잠시 휴게소에 들렀다. 시내버스로 보이는 미국의 노란 스쿨버스가 들어와 있다. 이번 중미 여행에서 곳곳의 나라에서 흔히 보는 광경이다. 미국에서 중고 차를 싸게 들여와 중요한 교통 차량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의 설움이지만 어쩌겠는가. 휴게소는 늘 걸름이 없는 그 나라의 풍경을 볼 수 있어서 좋다.
* 니카라과 레온 성당
레온은 200년간 옛 수도였던 도시로 웅장하다. 스페인 북서부 카스티야레온 지방 레온 주의 주도다. 하얀 색 성당 건물이 큰 규모로 높이 솟구쳐 있다. 이곳 성당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18세기의 종교건축물이다. 성당 입구에는 도시의 이름 레온, 사자를 상징하듯 사자상이 세워져 있다. 비둘기도 많고 평화로운 성당이다. 앞에는 큰 중앙공원의 중앙광장과 분수 등이 있어 풍경이 더욱 아름답다.
* 니카라과 레온 성당 앞 사자상
용맹한 사자상이 성당을 지킨다. 레온이라는 도시 이름을 상징하듯 레온 시가지에 진입할 때도 도로변에 사자상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아마도 사자처럼 도시를 지키고 발전 시키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 니카라과 레온 성당 앞 원주민 남자와 유럽 여인상
성당 광장의 시청 건물 앞에 특이한 남녀상이 있다. 여자는 화려한 의상에 키가 크고 남자는 양복 의상에 키가 작다. 그것은 옛날 스페인 지배 당시 유럽 여인과 원주민 남자가 만나 저런 모습으로 살았다는 시대적 상황을 재현해 놓은 것이었다. 참 애련한 광경이다.
* 니카라과 레온 성당 광장 앞 시청
성당 앞 광장은 꽤 크다. 중앙공원으로 시민들의 휴식터이기도 한다. 그 끝에 하얀 색 시청사 건물이 있다. 아담한 2층 건물로 길게 옆으로 늘여 있다.
* 니카라과 레온 성당 앞 옛날 수녀숙소
성당 앞에는 주요 건물들이 모여 있는데 그 중에서도 우람한 옛날 수녀들의 숙소 건물이 있다. 모양도 허름하고 회색의 색상도 퇴색했지만 육중하고 고풍스런 건물이다.
* 니카라과 레온 성당 앞 최초 대학
현지 가이드 남자가 버스에서부터 힘주어 말하던 대학이다. 분홍색 고운 테두리의 건물이 한국의 서울대학교 격의 나카라과 대학이다. 제일 역사가 깊고 이 나라에서 최초로 세워진 대학이다. 가장 훌륭하고 좋은 대학이며 의과 대학이 특히 유명하다. 대학 건물 뒤에는 대학 병원도 크게 세워져 있다.
* 니카라과 레온 성당 전망대
가파른 계단 54개를 걸어 성당 지붕의 전망대에 올라간다. 계단 중간에 잠시 머무는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성당 앞 공원 풍경이 보인다. 전망대에 올라가니 뜻밖으로 넓은 성당 지붕이었다. 이런 전망대는 처음 만난 것이라서 놀라웠다. 성당 돔지붕 3곳을 타고 다니며 화산과 레온 시가지를 조망했다. 자유의 종이 있다. 하얀 돔이 무너질 위험이 있다고 오롯한 돔에는 오르지 말란다. 가장자리의 길을 따라 크게 돌려 조망했다. 붉은 색 지붕 물결이 레온 시가지를 빛낸다. 아까 레온에 오면서 본 고산의 화산이 보인다. 내려올 때쯤 초록색 병원 건물이 보였다. 성당 앞의 최초 대학 의과대와 연결되는 아주 유명한 병원이다. 참으로 신기한 성당 전망대였다.
* 니카라과 레온 성당 전망대에서 본 레온 시가지와 화산
니카라과의 구수도 레온은 메세타센트랄 고원 북서부 지역에 있으며 베르네스가 강과 토리오 강이 합류한다. 레온 시는 고대 로마의 군단인 제7 제미나 군단 주둔지에서 발전했다. 원래는 라틴어로 레지오(legio)였던 것이 잘못 쓰여 오늘날의 이름이 되었다. 6~7세기 고트족이 차지했고, 이후 무어인들이 점령하여 850년까지 지배했다. 10세기에 가르시아 1세가 궁정을 오비에도에서 이곳으로 옮김으로써 아스투리아스와 레온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로 가는 성지순례길에 있기 때문에 중세에 상당한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영향을 끼쳤다. 또 상업중심지로서 많은 수공업 길드가 있었고 정기적으로 열리는 장과 시장들로 유명했다. 도시의 오래된 거리 이름들은 중세도시의 관공서와 건물들을 연상시킨다. 예술적 흥미거리가 풍부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지배 당시 건립된 성당도 많다. 16세기에 침체에 빠진 경제는 19세기에 광산업이 발달한 후에 소생했다. 20세기 중반부터 공업화된 도시로 새롭게 발전하고 있다. 레온 시가지는 화사하다. 오롯한 화산이 도시를 감싸고 있어 소슬하지만 고운 풍경이다. 고층 건물이 없이 붉은 지붕 물결로 도시를 채우고 있어 아름답다.
* 니카라과 레온 성당 내부
레온 성당 내부로 들어가보니 매우 웅장하다. 유럽의 종교 문화가 고스란히 남은 형상이다.
* 니카라과 레온 성당 앞 광장 중앙공원 분수
이곳을 떠나기 전 아쉬음으로 다시 찾은 성당 앞 광장이다. 곳곳을 자세히 둘러보고 아까 와보지 못한 분수에 왔다. 레온 성당 앞 광장 중앙공원에 있는 분수가 참으로 아름답고, 여기서 바라보는 하얀 색 순결한 성당도 참으로 우아하고 곱다. 분수는 둥근 구조인데 사자 4마리 동상이 가장자리에 앉아있고 건축구조물 상단에는 사람동상이 있다. 수많은 비둘기가 날아오르며 평화 가득한 정경이다.
* 니카라과 레온 성당 분수 앞에서 본 성당 전경
중앙공원 분수 앞에서 성당을 바라보니 전경이 잘 보인다. 아까 타고 다니며 시가지를 조망했던 돔지붕 3곳의 전망대도 제대로 보인다. 하얀 색 성당 건물 외벽에는 수많은 비둘기가 점점이 수를 놓고 있다. 폭과 높이 그리고 앉은 자라가도 매우 웅장하고 장엄한 성당아다. 그 옛날 식민지 시대 유럽의 위용을 그대로 드러내는 광경이다.
* 니카라과 레온 혁명기념비
성당 정원 한적한 곳에 혁명 기념비가 있다. 위에는 깃발이 3개 꽂혀 있다. 이곳은 니카라과의 혁명을 위해 애쓴 사람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다
* 니카라과 레온 재래시장
성당에서 바로 곁에 놓인 로얄로드를 따라 걸어서 재래시장에 갔다. 식당, 과자점이 먼저 반긴다. 과자점에서는 나카라과의 사탕수수로 만들었다는 맛있는 땅콩과자를 주어서 잘 먹었다. 조금 더 들어가니 의류와 신발이 있고, 꺾어져 돌아가니 야채와 과일이 무척 많다. 더운 나라라서 여러 가지 과일이 많다. 옷가게, 푸드 코너 등 현지 주민들로 혼잡하다. 풍요로운 니카라과의 농산물을 보니 남의 나라지만 참으로 흐뭇했다.
* 니카라과 화산 조망
레온에서 코린토 항구로 다시 가는 길에 버스 기사가 화산이 잘 보이는 곳에 잠시 세워준다. 오전에 보았던 화산을 다시 조망해 본다. 웅장한 화산인데, 그러나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무서운 화산이다. 중미는 저런 화산들로 두려운 국가들이다. 청명한 하늘과 하얀 구름과 온틍 푸름 가득한 절경의 이 고요한 나라에 화산이라니, 정말 슬픈 광경이다. 제발 저 모습으로 터지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 니카라과 코린토 크루즈배 재승선
코린토에 도착하였다. 아침과는 다르게 햇살이 화창하여서 배 주변이 멋진 풍경이다.지금 오후 2시다. 배는 오후 4시에 출항한다. 발코니에서 바라본 항구가 참으로 곱다. 중식 후 수영장에 가서 피로를 풀었다.
* 니카라과 코린토 출항
오후 4시에 크루즈 배가 출항한다. 바다 가운데작은 섬이 있고, 그 섬에 하얀 등대가 있다. 크루즈 여행에서만 볼 수 있는 기막힌 비경이다.
2019년 2월 4일 월요일 코스타리카
* 코스타리카 푼타레나스 항구 기항
매우 청청한 풍경이다. 13층 갑판에서 조망했다. 하늘과 바다, 식물들이 비경이다. 항구가 매우 크다. 배에서 양쪽으로 넓게 앉은 풍경이 장관이다. 해안선의 길이가 1290㎞이다. 면적은 5만 1100㎢, 인구는 약 475만명, 수도는 산호세(San Jose)이다. 종족은 스페인계 백인 및 메스티죠족이 94 % 이고, 흑인 3%, 인디안 1% 중국인 1% 등이다. 공용어는 스페인어이며, 종교는 가톨릭교 76%, 개신교 16%이다. 산업은 농목축업과 경공업이 주종을 이루고, 교육행정제도와 사회보장제도가 확립되어 있다. 민주주의의 낙원이라고 불릴 만큼 중남미에서 민주주의가 발달되어 있고, 교육수준과 국민소득이 높으 며, 부의 배분이 비교적 평준화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니카라과, 남동쪽으로는 파나마와 국경을 접하며 서쪽으로는 태평양, 동쪽으로는 대서양 카리브해와 접한다. 국가명이 스페인어로 '풍요로운 해안'을 뜻한다.
이곳 항구 도시 푼타레나스 (Puntarenas)는 니코야 만으로 돌출해 에스테로 석호를 둘러싸는 긴 꼬챙이 모양의 땅에 있다. 처음에 브루셀라스로 알려진 이 도시는 식민지시대에 파나마와 남아메리카와의 무역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서쪽과 남서쪽으로 태평양, 동쪽으로 파나마에 접한다. 코스타리카의 7개 주들 가운데 가장 넓다. 주의 대부분이 저지대이지만 남쪽 내륙으로 탈라망카 산맥의 산마루까지 융기하는 지형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서초문협 회원 중에 코스타리카에서 근무하신 분이 있어서 익히 들어온 나라여서 한번 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평소에 했었다. 오늘 여기 온 것이 그 소원이 이루어짐에 참 기쁘다. 코스타리카 기항지 관광은 자연 탐방이다. 주로 코스타리카의 천연 자연의 청정한 풍경을 볼 것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그 분과 이야기 하며 코스타리카에 대하여 더 많이 배울 것이다.
* 코스타리카 푼타레나스 항구 하선
하선이 1시간 지연 되었다. 항구에서 허락이 늦게 떨어져서 그렇단다. 7층 대극장에서 대기하다가 하선한다. 하선하니 대형버스들이 많이 와 있다. 항구의 육지로 나가는 길이 바다 위에 길게 놓여 있다. 버스가 그 길에 쭉 늘어서 있다. 자기가 해당되는 버스를 찾아서 타야 한다. 나는 일행보다 좀 일찍 나왔다. 대극장에 남편과 같이 앉아있다가 승무원이 각 국가별로 나가는 팀을 부를 때, 한국팀을 곧 부를 것이라고 생각하여 먼저 나와서 7층 계단에서 한 동안 기다렸다. 그런데 다른 외국팀이 다 나왔는데도 우리 한국팀은 줄이 끊겼는데도나오지 않아 다른 옆 계단으로 내가 못 본 사이에 내려갔을자도 모를 거라는 생각으로 외국팀의 줄에 섞여 하선에 임하였다. 크루즈 배에서 하선하여 나와보니 우리 일행이 그 어디에도 없다. 이럴 때 대개는 인솔자가 배 앞에서 기다리는데 없다. 이것으로 보아 아직 한국팀이 하선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혹시 버스에 모두 승차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나 혼자 승무원과 현지 가이드들에게 물어 우리 버스를 찾았다. '코리안 그룹 투어'라고 하면 인솔자 '김혜진'을 확인하고 버스를 알려준다. 우리는 라팔마즈 폭포로 가는 11, 12번 버스가 해당지역에 간단다. 현지 가이드 남자가 한국팀은 11번에 승차 하라고 한다. 버스에 승차하여 앉아 있는데 그때서야 우리 일행이 와서 버스 앞을 지나쳐 가려 한다. 나는 여기라고 소리쳐서 인솔자에게 알려줬다. 그떄서야 우리 일행이 버스에 승차했다. 아마도 남편은 7층 대극장에서 4층 하선 장소까지 복도와 계단을 내려오며 내가 없어서 걱정했을 것이다. 나 역시 남편과 이탈하여 미안하기도 하고 걱정했었다. 남편과 다시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웃었다. 남편도 나도 이구동성으로 만일 일행과 분리되어 버스를 못 탔을 때는 다시 크루즈 배에 승선하면 된다고 귀결지었다. 하지만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얘기도 했다. 내가 타야할 버스를 찾는 일은 그리 힘들지 않다. 물론 우리말은 한마디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좀 어렵긴 하다. 그러나 외국에 나와서의 영어는 매우 단순한 단어만 말해도 다 통한다. 이번에 역시 나도 그렇게 하여 버스를 찾은 것이다. 그런데 승무원은 그래도 영어교육을 받아 금방 알아듣는데 현지 가이드는 우리의 영어와 그들의 영아가 약간 다를 경우가 있다. 즉 우리는 미국식 영어이고, 중남미는 유업식 영어라서 그렇다. 지금도 처음에 물어본 어떤 현지 코스타리카 가이드는 엉뚱한 버스 번호를 알려주었다. 항상 크루즈 배가 하선하면 각각 가항지 관광 행선지 별로 버스 앞에 번호가 적혀있다.해당 번호의 버스에 승차하는 것이다. 결국 다시 묻고, 또 묻고 하여 나도 겨우 해당 버스를 찾았다. 이것도 큰 경험이다. 그러나 크루즈 배에서 나오는 길은 딱 하나이고, 하선하면 승무원과 현지 가이드가 나와 있어서 기본 영어 실력으로 물으면 그날 기항지 관광 해당 버스를 알려준다. 이제는 더욱 당당해진 내가 된 것이다. 홀로 하선하고 홀로 버스를 찾아 승차했으니 말이다. 외국 육로여행이던, 크루즈여행이던 크게 두려울 것이 없다. 우리 부부는 그 동안 해외 나들이 50여 회, 세계 100여개국 탐방으로 많은 체험 속에서 많이 배웠고, 많이 체득해 왔다. 길을 잃었을 때, 일행을 놓쳤을 때 등 그 대처법을 많이 배웠다. 버스가 긴 해로를 따라 이동한다. 코스타리카의 긴 해변이 비경이다.
* 코스타리카 푼타레나스 시가지
소박하고 아담한 도시다. 버스가 가는 길목이 도심과는 멀어서 아담한 정경인 것 같다. 허름하지만 매우 깨끗하고 세련된 풍경이다. 우리는 지금 라팔마즈 폭포로 가고 있다.
* 코스타리카 푼타레나스 시가지 공동묘지
공동묘지도 지나간다. 이곳 중미 여행에서도 공동묘지가 유럽과 동일하다. 모두 식민지 잔재인 듯하다. 참으로 고운 풍경이다. 죽어서도 저리 묻히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 코스타리카 푼타레나스 집앞 보트
자가용처럼 집앞 울창한 나무 아래에 보트를 2척이나 매어 놓았다. 자가용 2대가 주차된 정경이다. 항구 도시에서 보는 진풍경이다.
* 코스타리카 휴게소
코스타리카의 자연을 감상하며 달려와 잠시 휴게소에 들었다. 과일을 파는 부부가 있다. 아주 큰 열매들이다. 꽃도 화사하게 피어 아름답다.
* 코스타리카 알라후엘라 도시
지금 지나는 도시는 고도가 매우 높은 지역이다. 그래서 버스 안에서도 서늘한 기온이 감돈다. 산을 하나 넘는 기분이다. 코스타리카의 수도인 산호세 바로 위 도시다. 북쪽 산백과 남쪽 산맥이 만나는 중안고원 지역으로 센트럴 벨리다. 산호세에 코스타리카 인구 30%가 모여 산다. 알라후엘라 이곳까 두 지역에는 60% 인구가 거주한다. 기온이 평균 23~24로 살기 좋아서 그렇다. 또한 수도 산호세와 알라후엘라가 만나는 지역이 지금 지나는 이곳 지역이다. 산호세 공항이 있는데 사실은 알라후엘라에 있다. 한국의 인천에 있는 공항을 외국인들이 서울공항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코스타리카는 친환경적책을 펼치는 국가다. 날씨가 매우 쾌청하고 꺠끗한 자연이다. 중남미에서 1위, 세계에서는 5위로 자연이 깨끗한 나라다. 1502년 콜롬버스가 들어왔다. 1509년에 스페인이 들어왔다. 교육수준이 높다. 소득수준도 높다. 그래서 3D 업종에 종사하지 않으려 한다. 그로인하여 노동인부는 이웃나라 니카라과에서 수입하여 들여온다. 수입원으로 수출품목은 1위 파인애플, 2위 바나나, 3위 멜론, 4위 꽃과 식물, 5위 커피다. 대부분 유럽으로 수출한다. 저 멀리 큰 화산이 있다. 북쪽 산은 화산이 있고, 남쪽 산은 화산이 없다. 남쪽 산은 지각변동으로 생긴 산맥이어서 화산이 없다. 여기는 두 산맥이 만나는 중앙지역이다. 알라후엘라 도시가 매우 깨끗하고 세련된 풍경이다.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곳 없이 잘 정비되어 있고 자동차도 말끔한 정경이 풍요롭다. 탱탱하고 청청한 하늘까지 축복의 땅이다.
* 코스타리카 커피 하우스 농장
버스가 도로에 정차하고 커피 하우스 농장을 탐방했다. 꽃과 커피 나무가 많다. 공기가 상큼하다. 온통 커피 나무 농장으로 푸른 물결이다. 이렇게 좋아서 코스타리카가 자연환경 최고인가 보다. 코스타리카 커피 나무도 그늘이 필요해서 바나 울타리를 해주거나, 큰 나무를 심기도 한다. 한동안 머물며 코스타리카의 청정 공기도 마시고 청청한 낭만에 젖어 보았다.
* 코스타리카 초원의 목장
광활한 산녘 마을에 목장이 있다. 올 때도 여러 곳에서 보았다. 소들이 아마도 점심 먹으러 우리로 이동하는 중인 것 같다. 줄지어 집으로 올라간다. 장관이다. 동물들도 참 행복한 환경에서 산다.
* 코스타리카 라파즈 가든 벌새들
라파즈 폭포 정원에 도착했다. 출입문으로 들어서니 팔에 붉은 띠를 매어준다. 곳곳에 입장할 때 보여주는 것이란다. 라파즈 정원에서 처음 만난 것은 벌새다. 아주 작은 벌새들이 날아다니며 반긴다. 앉아서 먹이를 먹기도 한다. 처음 보는 벌새라서 참 신기했다. 아래로 난 산책길을 따리 걸었다. 오늘 이곳 라피즈 폭포 정언에서는 구름이 낀 풍경에서 열대우림 기후까지 경험하며 약 3Km의 워킹 코스를 따라 산책한다. 벌새 정원, 새장, 나비정원 등에서 다양한 종의 새들과 나비를 보고, 원숭이와 재규어, 퓨마 등 중미 고양이과 동물들도 본다. 그리고 열대의 가연 속에서 중식을 할 것이다. 오후에는 라파즈 폭포를 향하야 숲속을 걸으며 폭포까지 가는 동안 멋진 경치를 본다. 계단이 많아 조심해야 한다. 세계인들과 현지인들과 함께 보람된 하루의 여정이다.
* 코스타리카 라파즈 식물원 바나나 닮은 나무 비경
꼭 바나나 나무 같은데 바나가 아닌 나무가 정원에 줄지어 산책길 주변에 넓은 자락으로 채우고 있다. 꽃도 비슷하고 열매도 비슷하단다. 현지 가이드가 자세히 설명해준다. 신비로운 식물이다. 실제로 바나나 나무도 숲속에 있다. 꽃 피고 열매맺는 모습을 보았다.
* 코스타리카 라파즈 동물원 앵무새
정원 새장이 곳곳에 있다. 부리가 아주 큰 독특한 이 나라에만 있다는 크고 노란 부리의 투칸새도 사람들에게 사진을 찍도록 포즈를 잘 취해준다.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꼬리가 길고 큰 부리를 가진 무지개색 앵무새다. 나뭇가지에 두 마리씩 금슬좋게 앉아서 놀고 있다.
* 코스타리카 라파즈 가든 나비원
처음에 입장할 때는 번데기가 있고 몇 마리 밖에 보이지 않아 그리 큰 규모인 줄 몰랐다. 점점 올가는 칸마다 형형색색의 나비들이 관람객들을 흥분시킨다. 곳곳에 열대과일을 놓아 두어서 그 향기도 나비원 안네 가득하여 향기롭다. 꼭과 나무들이 가득하고 나비가 날며 천국을 재현하다. 아주 크고넓은 나비 정원에서 나비를 따라 다니며 천진하 소녀가 되어 꿈꾸듯 행복했다.
* 코스타리카 라파즈 원숭이 동물원
꼬리 감는 원숭이가 사는 동물원에 왔다. 이곳 동물원과 식물원은 곳곳에 나뉘어져 있다. 식물원을 보고 가다가 동물원을 만나고, 다시 가다가 식물원을 만나고, 동물원을 만나고, 또 새장을 만나곤 하며 반복된다. 그리고 동물이 많지 않다. 한,두 마리가 살며 방문객을 맞는다. 원숭이가 나무 위를 타고 다닌다.
* 코스타리카 라파즈 가든 작은 폭포
중식을 하기 온 정원 속 식당 앞에서 작은 폭포를 만났다. 식물들 사이로 줄지어 내려오는 폭포가 매우 싱그럽다. 비경이다.
* 코스타리카 라팔마즈 가든 작은 폭포 앞 벌새
작은 폭포 앞에는 또 벌새가 있다. 그들의 먹이가 나무 위 새장 위에 있어서 자꾸 날아온다. 하지만 이곳 라파즈 정원은 열린 공간인데 벌새가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않고, 먹이를 놓아 두었다고 해서 날아오는 것도 신비롭다. 관람객을 위해 길들여진 것도 아닐 텐데, 여기 머물며 보여주는 벌새에게 고마웠다. 아주 작아서 잘 살펴보아야 보인다. 책에서만 보았던 벌새를 처음 보며 나는 매우 신기하여 보고, 또 보고 걸음을 걷지 못했다. 남편이 빨리 오라는 부름에서야 걸음을 채촉하여 중식식당으로 갔다.
* 코스타리카 라파즈 가든 중식
식물원과 동물원을 관람한 후 라파즈 정원 안에 있는 식당에서 현지식 뷔페식단으로 중식을 했다. 아주 풍성하고 다양한 메뉴로 외객을 맞이한다. 참 고마웠다. 그릇도 도자기 그릇이고, 유리병에 담아준 천연과일 주스와 유리잔 등이 플라스틱 공해에서 벗어나고, 무겁긴 하지만 매우 정성스러웠다. 이곳 수많은 사람들 모두에게 이렇게 베풀어줄 때 그릇을 관리하기도 참 어려울 텐데, 천연자연정책을 중점적으로 실행하는 나라라는 타이틀에 맞게 그 실천을 여기서도 실행하고 있는 것 같다. 본받아 가야한 대목이다. 가정에서도 이런 실천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고, 귀국하면 나도 우리 집 부억 운행을 저렇게 천연으로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대나무가 있다. 코스타리카 곳곳에서 보아온 대나무다. 그외 열대식물 청청한 낭만 속에서 천연의 맑은 공기와 식물의 향기 섞어 맛있게 잘 먹었다.
* 코스타리카 라파즈 동물원
이곳 동물원에는 사나운 동물이 있다. 재규어가 있다. 누워서 보여준다. 또 곁에 있는 동물원에는 퓨마가 있다. 주변이 온통 푸른 나무들로 둘러싸여서 저들은 갇혔어도 평화롭다.
* 코스타리카 라파즈 식물원 비경
이곳 식물원은 따로이 마련된 공간이 아니라 정원 전체가 식물원이다. 자생하는 듯한 나무와 커다란 열대식물들이 지천으로 놓여 비경이다. 조금은 조성했어도 천연의 숲을 살린 듯하다.
* 코스타리카 라파즈 동물원 개구리
개구리 개구리 정원도 있다. 지나쳐 갈뻔 했는데 현지 가이드가 안내해준다. 개구리를 찾아보니 잎사귀 위에 앉아있다. 한국에서는 수족관 갇힌 유리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곳에서는 제 고향인양 늠름하게 열린 공간에서 열린 나무 잎 앞뒤에 앉아 평화롭다. 색상이 현란한 독개구리도 있다. 나는 저 녀석 고향이 이곳임을 알았다.
* 코스타리카 라팔마즈 가든 옛날 커피열매를 운반하던 마차
한참을 걸어 돌고 돌아온 곳에서 마차를 만났다. 우리에는 소도 2마리가 앉아있다. 저런 소가 마차를 끌었던 것 같다. 커피 열매를 운반하던 마차고 소개한다. 매우 아름답게 장식해 놓았다.
* 코스타리카 라파즈 폭포
라파즈 폭포에 이르기까지는 약 3 Km정도의 도보로 왔다. 긴 길이어도 상큼한 숲길이고 또 걸으면서 식물원과 동물원을 거치면서 관람하며 천천히 걸어서 그리 어렵진 않다. 긴 철계단을 걸어서 내려간 곳에서 폭포를 만났다. 푸른 식물 사이로 세차게 폭포의 물이 흘러내린다. 비경이다. 전망대에서 조망했다. 다시 걸어서 가다가 또 이런 폭포를 만났다. 라파즈 정원에 3개가 있단다. 하나는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2개의 폭포는 매우 웅장하고 물줄기가 세차서 큰 함성으로 산을 울렸다.
* 코스타리카 라파즈 폭포에서 걸어온 숲속
긴 산길을 걸어서 버스 주차장으로 나간다. 버스가 산 높은 곳에 주차하였고 우리는 계속 내려오며 라파즈 정원을 탐방한 관계로 우리는 계속 걸어서 오르락내리락 숲속 산길을 간다. 라파즈 정원에 대한 안내판도 있다. 한참을 걸어온 끝에서 기념품 상가를 만나고, 그곳을 통과하여 내려가니 버스 승차장이 있다. 외국인과 함께 탔던 우리의 대형버스 다른 곳에 있어서 작은 셔틀버스가 실어 나른다하여 기다렸다.
* 코스타리카 라파즈 가든 울창한 대나무와 우산나무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동안 차가 오지 않아 배의 출항시간 때문에 걱정이 되었지만 세계인과 한국인 모두들 처연하게 의자 앉거나, 나처럼 주변 풍경을 감상하고 한다. 대나무와 우산나무가 산능선을 타고 한가득 자리하여 자라고 있다. 우산나무는 꼭 한국의 머위 앞새와 유사하다. 비가 올 때 꺾어서 쓴다하여 우산나무란다. 햇볕과 기온이 좋은 나라에서 마음껏 자란 식물들이다. 저 우산나무와 대나무가 이 나라 곳곳에서 자생하고 볼 때마다 진풍경이다.
* 코스타리카 전원마을 풍경
라파즈 폭포 정원을 떠나 다시 푼타레나스 항구로 간다. 3시간 소요되는 먼 거리다. 4시가 다 되어서 버스가 출발했다. 배가 오후 6시에 출항하는데 늦었다. 저녁빛이 도는 산과 들 마을 풍경이 더욱 비경이다. 지금 지나는 전원마을은 참으로 평화롭다. 시골 도시답지 않게 꺠끗한 것이 독특하고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고운 풍경이다. 놀이시설을 갖춘 집도 있고, 작은 성당도 보이고, 비닐을 친 농장도 보인다. 드넓은 초원의 목장도 스쳐간다. 정녕 코스타리카는 천연자연정잭에 주력하는 나라임을 곳곳에서 알려준다. 모든 자연환경이 청결하고 그렇게 조성하는 수준이 높은 대단한 국가다.
* 코스타리카 수도 산호세 원경
오전에 항구에서 라파즈 정원에 갈 때도 보았던 풍경이다. 알라후엘라 고산 지역을 지날 때 저 아래로 높은 산아래 산호세 수도가 보였었다. 다시 항구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지금도 보인다. 아까는 사진 찍기 어려운 맞은편의 좌석이어서 사진을 못 찍었는데 지금은 반대로 가는 중이라서 사진 찍기 좋은 편에 앉아서 사진을 잘 찍었다. 웅장한 산도 명품이고, 그 장엄한 산이 품고 있는 산호세 시가지도 명품이다. 귀국하면 서초문협 회원, 이곳 코스타리카에서 근무했던 그 분과 저 산호세에 대하여 많은 얘기를 나눌 것이다. 정녕 위치로보나 앉은 품새로 보나 코스타리카 수도 산호세는 원경으로 보아도 그 위풍이 비경이다.
* 코스타리카 푼타레나스 항구 귀환 중에 본 일몰
산으로 넘어가는석양이 산녘에 흐르다가, 사라지다가 다시 차창에 어리곤 한다. 코스타리카의 일몰이 비경이다. 저 앞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눈부신 태양이 장엄하다. 산으로 넘어가는석양이 산녘에 흐르다가, 사라지다가 다시 차창에 어리곤 한다. 코스타리카의 일몰이 비경이다. 저 앞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눈부신 태양이 장엄하다. 부지런히 달리 버스가 오후 6시 30분에 항구에 도착했다. 승무원들이 출항시간이 6시인데 늦은 관계로 분주하다. 서둘러 승선시킨다. 버스에 동석했던 우리 한국팀 일행과 외국인 합하여 50여명이 승선하자마자 곧바로 배가 출항한다. 선실에 가기 전 뷔페식당으로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갔는데 출항 뱃고동이 힘차게 울린다. 석식을 맛잇게 하고 방에 와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12층 야외수영장에서 온탕 전신마시지를 했다. 밤하늘을 보며 중미의 공기를 마신다. 30분 정도 물속에서 피곤을 풀고 선실로 왔다. 두 아들에게 오늘 타방한 라파즈 폭포 정원 사진을 4장 카톡방에 올려주고 안부를 전했다. 한국시간으로는 오늘이 2월 5일 구정이라고 인솔자가 인스턴트 쌀떡국 2그릇을 갖다준다. 물만 부으면 먹는단다. 하국에서부터 챙겨온 정성이 참으로 고마웠다. 내일 먹기로 했다. 두 아들에게 구정 안부도 묻고, 처가에 가서 잘 보내라고, 엄마아빠는 잘 있다고, 내일 떡국을 먹을 거라고 소식을 전했다. 이제 배는 밤바다를 질주하여 파나마 운하로 힘차게 달려간다.
2019년 2월 5일 화요일 전일해상 코스타리카에서 파나마 운하로 가는 중
* 전일항해 코스타리카에서 파나마 운하로 가는 선실 모니터 항로
어젯밤부터 온종일 항해다. 내일 파나마 운하를 통한다. 배는 태평양 바다 위를 계속 질주한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선실 발코니 문이 안 열리는 시간도 있다. 선실 모니터에 파나마 운하로 가는 항로가 뜬다. 파나마 운하에 가까워지고 있다.
* 크루즈배 12층 뷔페식당에서 먹는 한국설날 쌀떡국
뷔페식당에 가서 우리 부부는 어제 인솔자가 갖다준 쌀떡국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김치도 있어서 냄새가 날까싶어 바깥 테이블에서 먹었다. 한국에서 끓여서 먹는 것과는 전혀 다르지만 그래도 설날 기분을 냈다.
* 크루즈배 12층 뷔페식당에서 먹는 한국 쌀떡국 먹은 후 과일만 먹는 후식
떡국을 다 먹고는 뷔페식당 안으로 가서 과일을 맛있게 먹었다. 승무원이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날라다주는 망고주스와 오렌지 주스도 먹었다. 모두에게 감사하며 맛있게 먹었다. 식사 후에는 12층 뷔페에서 배의 뒤쪽으로 가 보았다. 13층 갑판으로도 올라가 보았다.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내려 바다에 은비는 내리듯 부서진다. 배가 지나며 일구는 포말이 진풍경이다. 바람이 심하게 분다. 14층 암벽등반에 가 보려니 심한 바람으로 못 올라가고 그냥 왔다. 오늘 오후는 선실 TV로 기항지 소개, 항구소개 등을시청하며 쉬었다.
* 크루즈배 선실 발코니에서 본 태평양 일몰 비경
석식은 7층 오키즈 가든 식당에서 먹었다. 아시안 메뉴로 해물우동, 볶음국수, 돼지고기쌀국수, 만두 등 풍성한 메뉴로 먹었다. 대구에서 온 부부와 같이 먹었다. 메뉴를 서로 나누어서 잘 먹었다. 그때 창문 밖에는 태평양 석양이 바다로 지고 있었다. 일몰이 비경이다. 바다의 노을 섞어 창가에서 아시안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대극장 공연을 보았다. 맨앞에서 두번 째 열에 앉아서 공연자 14명을 잘 보았다. 미국 유명한 팝가수의 노래를 공연하며 부른다. 춤과 노래의 멋진 향연이었다.
* 태평양 밤바다 파나마 운하 통과 대기 중인 배들의 불빛
대극장 공연을 관람한후 방에 와서는 와이파이를 열어 두 아들에게 카톡으로 사진을 보냈다.매일 나의 스마트폰에서 사진 2장과 이곳 소식, 남편 스마트폰에서 사진 2장과 소식을 전송해준다. 그리고 두 아들과 며느리의 고국 소식을 듣는다. 카톡방에는 한국 설명절 인사가 많이 들어와 있다. 인터넷 250분 중 120분을 소모했다. 130분 남았다. 그래서 사진 보내고 바로 와이파이를 끈다. 두 아들과 교신하는 것 밖에는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다. 밤 10시경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발코니에 나가보니 밤인데 배가 파나마 운하를 향해 간다고 생각했는데 멈춘 것 같다. 캄캄한 바다에는 배들의 불빛이 많이 떠 있다.. 아마도 파나마 운하 통과를 대기하는 것 같다. 태평양 바다에서 대서양 바다로 가려고 바다에서 정박한 배들이 많다. 불을 켜고 떠서 기다린는 풍경이 장관이다. 우리의 크루즈 배는 내일 8시에 파나마 운하로 진입할 것이다. 밤바다의 불빛을 보며 기대에 부풀어 설레는 밤이다.
2019년 2월 6일 수요일 파나마 운하 통과
* 파나마 해협 진입
오전 7시 모닝콜에 기상하여 발코니에 나가보니 배가 파나마 운하로 가까이 왔다. 해협으로 진입한다. 12층 뷔페식당에서 조식을 하며 파나마의 풍경을 조망했다. 배들이 많다. 파나마 시가지의 고층 건물들이 오롯하다. 항구에 떠있는 화물선들도 많다.모두 장관이다.
* 파나마 항구
파나마 항구가 무척 크다.항구 너머로 보이는 파나마 시가지의 고층 건물들과 바다 위에 정박한 화물선 컨테이너 박스 등이 비경을 이룬다. 우리 배는 아직 정박해 있으며 통과 대기 중이다. 파나마는 남아메리카의 북서쪽 끝부분에 연결되는 파나마 지협의 남쪽 끝부분 연장 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수도는 파나마시티이며 긴 S자 모양의 나라이다. 북쪽 카리브 해 쪽으로 1,160km의 해안선이 형성되어 있으며, 동쪽으로 콜롬비아에 접해 있다. 남쪽 태평양 쪽으로 1,690km의 험준한 해안선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코스타리카에 접해 있다. 국토의 대부분이 돌기로 솟아 있어 산과 언덕이 많은 편이다. 북아메 리카에서 뻗어나온 산맥은 아니며 콜롬비아와의 국경에서 안데스산맥과 맞닿는다. 일부 산봉우리는 화산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파나마를 크게 나눌 수 있게 하는 분수계를 코르디예라 데 칼라만카라고 하는데 코스타리카와의 국경에 접하고 있다. 더 동쪽으로 가면 세라니 아 데 타바사라가 있고 인근에 파나마 운하가 있다. 인구는 약 300만명이다. 저 고층 빌딩이 즐비한 도시는 파나마시티인 것 같다.
* 파나마 운하 진입
오늘은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는 일정이다. 우리의 크루즈 배 NCL GEM호는 오전 8시경 태평양 바다에서 진입하여 파나마 운하의 총 3개의 갑문을 통과하여 오후 5시경 대서양 카리브해로 바다로 나간다. 평균기온은 30도로 많이 덥고 습한 편이다. 크루즈 배의 야외 데크에서 조망할 때는 가벼운 복장, 썬크림, 모자 등을 착용해서 일사병을 조심하란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이어주는 전장 64Km의 인공 운하는 연간 15,000척의 배가 이용한다. 운하를 통과하는만 평균 9시간 소요 된다. 우리 승객들은 그 동안 선실 티브이 방송이나, 갑판 등에서 조망한다.
파나마 운하는 태평양 연안의 발보아에서 대서양 연안의 크리스토발까지 전장 64 km다. 카리브해로 흘러드는 차그레스강을 막아 축조한 면적 약 420 km2의 거대한 가툰호 안에 만들어진 34 km의 수로 및 파나마만 쪽의 미라플로레스호 안에 만들어진 1.6 km의 수로와, 이 두 호수 사이에서 지협의 척추 구실을 하는 구릉지를 15 km나 파헤쳐 만든 쿨레브라 수로로 구성되어 있다. 가툰호와 쿨레브라 수로의 수면표고는 25.9 m, 미라플로레스호의 수면표고는 16 m이다. 이 두 호수 사이의 표고차는 물론 호수와 해면의 표고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갑문방식이 이용되고 있다. 파나마만에서 미라플로레스호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2단식 미라플로레스 갑문, 여기에서 쿨레브라 수로로 통하는 입구에는 1단식의 페드로미겔 갑문, 가툰호에서 카리브만으로 나가는 출구에는 3단식 가툰 갑문이 건설되어 있다.
건설 당시 가장 힘든 점은 모기로 인한 말라리아 질병 사망자가 많이 발생한 것이다. 무려 22,000명이 사망했다. 책임자인 레셉스는 막다한 빛을 지고 파산하여 정신병으로 늙으막에 비참하게 죽었다. 운하를 파기 위해 판 구덩이 물에서 모기가 서식한 것이다. 말라리아 전염이 개미가 시키는 줄 알고 침대 아래마다 물을 담아놓아 썪어서 파생된 질병이라니 참으로 안타까운 비극이었다. 나중에는 말라리아 전염이 모기라는 것을 알고 웅덩이마다 석유를 부어서 잡았다. 모기 한 마라를 잡는데 10달러를 쓸거냐고, 투덜대기도 했지만 그 10달러 짜리 모기가 장군님을 물면 어쩌겠냐는 반문으로 불평을 잠재웠단다. 참으로 우여곡절을 많이 겪고 타생된 위대한 파나마 운하다.
파나마 운하는 수에즈 운하와 더불어 대양을 연결하는 인공 수로이다. 미국에서 태평양과 대서양을 관통하는 데 파나마 운하를 이용할 경우 남아메리카를 돌아가는 것보다 운항 거리를 약 1만 5,000㎞가량 줄일 수 있다. 운하를 통과하는 데에는 평균 9시간이 걸리며, 통과 수속에는 약 15~20시간이 소요된다. 파나마 운하의 연간 평균 이용 선박의 수는 15,000척이다. 운하는 1914년 8월 15일에 완성되어 8만 1237톤의 퀸엘리자베스호가 사상 최초로 이 운하를 통과하였다. 이후 85년 동안 미국이 관리해 온 파나마운항권은 1999년 12월 31일을 기해 파나마로 이양되었다.
배는 서서히 경찰 보트의 안내를 받으며 운하로 간다. 주변 육지에는 푸른 식물들이 넘실거린다. 거대한 화물선 선박도 통과 대기로 떠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런 파나마 운하 3개의 갑문을 통과하는 장엄한 장관을 조망할 것이다. 매우 엄숙하고 중요한 순간이다. 내 생애 최대의 축복이며 보람과 기쁨이다. 결코 잊지 못할 역사적인 순간이다.
* 파나마 운하 통과 방송 선실 티브이
선실 티브이에서도 파나마 운하 통과 장면을 중계해준다. 나는 일찍 방을 나와서 갑판으로 올라가 조망하는데 남편은 방에서 티브이를 보다가 좀 늦게 갑판으로 나왔다.
* 파나마 운하 제1 갑문 진입
크루즈 배가 첫번째 갑문에 진입한다. 오전 8시 15분이다. 미라플로레스 강에 설치한 미라플로레스갑문이다. 나는 배의 맨꼭대기 갑판 14층 맨 앞쪽에서 유리창 너머로 파나마 운하 갑문 통과하는 장면을 조망한다. 수로와 갑문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태평양에서 대서양으로 나가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나가는 것이다. 큰 배가 우리 배와 반대로 간다. 갑문 양쪽에는 레일이 있고 차가 왕래한다. 갑문 통과시 양쪽에서 차가 우리 배에 줄을 매고 이끌어 도와준다. 제1 갑문은 갑문이 2개다. 그 중에서 지금 첫번째 갑문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거대한 크루즈 배가 운하 수로를 따라 아주 서서히 움직이며 들어간다.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는 배는 최대 사이즈로 지는 배를 '파나맥스'Panamax급 선박이라고 부른다. 통상 폭 32m로 9만톤을 넘으면 안 된다. 그래서 우리의 배도 9만톤급 배다. 장엄한 순간이다.
* 파나마 운하 제1 갑문 첫째문 통과
배의 14층 갑판에는 세계인들이 많이 모여 있다. 유리창 너머로 운하 통과 장면을 조망하고 있다. 운하 곁의 고층 건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건물 난간에 나와서 이 장면을 보고 있다. 물의 높이 조절로 배가 넘어간다. 갑문이 서서히 열리고 배가 제1 갑문의 첫번째 갑문을 다 통과했다. 갑문이 스르르 열릴 때 가슴 벅찬 순간이다. 배가 다음 갑문을 향해 다시 진입한다.
* 파나마 운하 제1 갑문 둘째문 통과
제1 갑문은 수문이 2개다. 그래서 두번째 갑문을 통과하고 있다. 갑문 바로 앞에는 사람이나 차량이 통행하는 다리도 있다. 운하 직원들이나 운하 챠량들이 왕래하는 모습도 보인다. 배가 통과할 때는 그 다리도 깉이 열린다. 이제 배는 미라플로레스 호수의 마라플로레스 제1 갑문 두개를 다 통과했다. 오전 8시 15분에 진입하여 오전 9시 25분에 통과를 완료했다. 1시간 10분 소요되었다. 기막힌 장관이다.
* 파나마 운하 미라플로레스호
제1 갑문을 통과한 배는 미라플로레스 호수를 달린다. 이 호수는 태평양 파나마 만쪽에 인공적으로 건설한 1.6Km의 호수다. 이 호수 끝에서 다시 15Km를 굴착하여 만든 쿨레브라 수로를 따라 가툰호로 간다. 가툰호와 쿨레브라 수로의 수면 표고는 25m로 높은 반면 미라플로레스호의 표고는 16m로 낮아서 갑문 방식으로 활용하여 표고 차를 해결하는 것이다.우리의 크루즈 배는 제1 갑문 2개를 모두 통과하여미라플로레스 호수로 들어온 것이다. 강변에는 푸름 가득한 식물 물결이 장관이다.
* 파나마 운하 제2 갑문 통과
미라플로레스 호수를 지나 이제 제2의 페드로 미구엘 갑문을 통과한다. 오전 9시 55분에 진입하여 10시 45분에 통과한다. 제2 갑문은 하나다. 미라플로레스 호수에서 쿨레브라 인공 수로로 통하는 1단식 페드로 미구엘 갑문이다. 제1 갑문과 동일한 방법으로 서서히 통과한다. 앞에는 갈라진 두 지역을 연결하는 다리 놓여 있다. 모두 진풍경이다.
* 파나마 운하 제2 갑문 통과 완료
제2 갑문을 다 통과하였다. 배는 다리 아래로 미끄러지듯 물 위를 타고 간다. 이제 배는 운하 중에서 가장 좁은 12Km 길이의 쿨레브라 수로를 향해 간다. 이 좁은 수로는 운하 길이 전체의 15 % 정도다. 페드로 미구엘 갑문에서 파나마 지협의 중앙산맥을 가로 지르며 감보아까지 이어진다. 감보아를 통과하는 것은 오전 11시 45분경이다. 그리고 나면 이제 배는 가툰호로 향해 간다. 제2 갑문은 하나라서 이제 다 통과 완료했다. 14층 갑판에서 선실로 내려와 발코니에도 보았다. 배가 가는 물길 폭이 아주 좁다. 물가는 울창한 열대우림이다. 파나마의 자연풍경을 그대로 본다.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며, 파나마 영토를 관통하는 것이다. 참으로 의미있고 뜻깊은 시간이다.
* 파나마 운하 가툰호
배가 가툰호로 진입했다. 매우 큰 호수다. 중식을 마친 후 발코니에서 조망하고 이번에는 배의 8층 맨 앞쪽 갑판으로 가 보았다. 그런데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분다. 대서양 쪽에서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으로 모자를 붙들지 않으면 바다로 날아갈 것 같다. 이곳에서도 승무원들이 나와서 간단한 중식을 하도록 음식을 제공한다. 우리 부부도 햄치즈샌드위치와 수박, 주스로 요기를 했다. 그리고 나서 이따가 뷔페식당에 가서 제대로 중식을 하기로 했다. 파나마 운하의 한 부분이며, 면적은 430㎢이다. 차그레스 강과 그 작은 지류들을 호수의 북쪽 끝인 가툰에서 댐으로 막아 형성되었다. 이 댐(1912 완공)과 방수로는 파나마 운하의 핵심 구조물로서 수위를 해발 24.6m와 26.1m 사이의 1.5m 범위 내에서 조절한다. 주요기능은 산맥의 허리를 뚫어 만든 협곡인 남쪽의 가이야르 인공수로에 운하를 연결하고 건조기에 운하의 갑문들에서 사용하기에 충분한 물을 담아두는 것이다. 호수 한가운데는 야생동물보호구역인 과차 섬이 있다. 가툰호는 긴 인공호수다. 주변 강변은 온통 열대우림 식물들로 푸른 물결이다. 호수 가운데 섬도 있다. 노란 꽃이 큰 나무에 가득 피어 곱다. 화물을 가득 실은 배도 지나간다. 태평양으로 나가는 우리 배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다. 우리의 크루즈 배가 강물을 타고 유유히 흐르며 드넓은 가툰호의 절경을 선사한다.
* 파나마 운하 크루즈배 6층 로비
배의 맨 앞쪽 8층 갑판에서 운하를 통과하는 풍경을 조망하다가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내려왔다. 6층 중앙 로비를 둘러보았다. 배에 대한 모든 업무를 보는 직원들이 이곳 로비에서 근무하고 있다. 정담을 나누는 의자도 있고 매우 아늑한 정경이다.
* 파나마 운하 12층 수영장 기념품 판매
오늘은 파나마 운하 통과 기념으로 12층 수영장 근처에서 기념품을 판매한다. 나는 오전에 몇 가지 샀다. 두 아들과 남편의 파나마 운하 마크가 새겨진 티셔츠, 앵무새 나무 조각품, 배가 운하를 통과하는 조각품을 샀다. 지금은 지나가며 다시 둘러보는 중이다. 흐뭇한 정경이다.
* 파나마 운하 제3 갑문으로 가는 가툰호
우리 부부는 마지막 제3 갑문을 통과하는 것을 보기 위해 14층 갑판으로 올라왔다. 유리벽이 가리긴 하지만 8층보다는 훨씬 좋다. 8층 갑판은 바람도 세차지만 배의 벽이 쳐져있어서 사진 찍기에 불편하다. 그리고 낮아서 운하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듯하다. 수영장 벤치가 유리벽 바로 앞에 있어서 나와 남편은 일정 간격을 두고 앉았다. 곁에는 세계의 외국인들이 앉아있다. 수영복 차림의 거의 알몸으로 썬팅하며 보는 외국 부부도 있다. 크루즈 여행에서는 자유로운,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모두 다 정겹고 흐뭇한 풍경이다. 배는 가툰호를 달려서 갑문을 향해간다.
* 파나마 운하 제3 갑문 진입
운하의 갑문 중에서 가장 웅장한 가툰 갑문에 진입한다. 이곳 제3 갑문은 3개의 수문으로 되어 있다. 즉 갑문을 3개 통과하면 대서양 바다로 나가게 된다. 이곳 14층 갑판은 바람도 약하고 높아서 잘 보여 좋다. 내 자리 곁에는 인솔자가 바닥에 앉아있다. 8층 갑판에 있다가 늦게 올라왔는데 내 덕분에 좋은 위치에서 본다며 매우 고마워 한다. 세계인들과 함께 행봉할 때는 기본예절을 잘 지켜야 한다. 철저하게 개인의 불편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 서양인들이다. 동양인들의 예절을 이탈한 요구나 허락은 여기서는 인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절대로 어느 경우에도 옆의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철저한 규율, 불문율 속에서 지금도 관람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외국인 앉은 벤치 곁 바닥에 앉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오전에는 내가 벤치에 앉지 못하고 서서 보았는데, 그때 외국인 벤치 옆 바닥에 앉고 싶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한국의 여자 인솔자는 내 곁에서 아주 안정된 자세로 잘 조망하고 있으니 내게 고맙다는 것은 사실이다. 배는 점점 갑문에 가까워진다.
* 파나마 운하 제3 갑문 첫째문 통과
제3 갑문은 가툰 갑문으로 수문이 3개다. 그 중에서 첫번째 갑문을 통과한다. 갑문마다 양편 운하의 중앙벽에는 파나마 운하 'PANAMA CANAL'이라는 문구를 외벽에 크게 써 놓은 통제실이 있다. 모든 것을 이곳에서 통제하고 지휘한다. 직원이나 차량이 갑문 바로 앞의 다리를 건너 오가며 양쪽을 살펴보곤 한다. 갑문들은 이중으로 되어 있어 배들이 동시에 서로 반대편으로 통과할 수도 있다. 기다리는 시간을 합쳐 배가 운하를 통과하는 데 약 24~30시간이 소요된다. 원유, 석유제품, 곡물, 석탄, 역청탄이 운하를 통해 운송되는 3대 상품군이다. 작은 선박을 제외하고는 어떤 선박도 자체 동력으로 파나마 운하의 갑문들을 통과할 수 없다. 배들은 3.2km/h의 속도로 갑문 벽 위의 치형(齒形) 궤도에서 운행되는 예인 전동차로 안내된다. 선박 하나를 예인하는 데 전동차 6개가 사용된다. 배가 운하를 통과할 때는 스스로 운항한다. 그러나 갑문을 통과할 때는 양쪽 옆에 설치한 레일에서 전동차가 2대가 이끌어준다. 줄을 배의 양쪽에 매어 서서히 끌고 가며 갑문을 통과시켜 준다. 전동차는 언덕진 레일을 잘도 타고 오르내린다. 양쪽 운하의 물 수위를 조절한 갑문이 아주 서서히 열린다. 육중한 갑문이 열릴 때 가슴벅찬 순간이다. 그 열린 갑문을 배가 미끄러듯이 아주 천천히 들어간다. 이때는 배가 가는 것이 아니라 양쪽에서 전동차가 이끌고 간다. 지금 전동차가 양쪽레일에서 우리 크루즈 배의 안정된 위치를 올바르게 잡아주며 그 좁은 운하 갑문의 수로를 정확히 끌고 가는 정경이 참으로 신기하다. 배의 크기에 따라 전동차의 갯수를 늘린다. 장엄한 갑문 통과다. 내 생애 최고의 기쁨이며 결코 잊지 못할 뜻깊은 순간이다.
* 파나마 운하 제3 갑문 둘째문 통과
이제 제3 갑문의 두번째 갑문을 통과한다. 아까와 동일한 방법으로 통과한다. 가슴 벅찬 진풍경이다.
* 파나마 운하 제3 갑문 셋째문 통과
파나마 운하의 마자막 갑문이다. 거대한 물이 수로 벽에서 뿜어나오며 양쪽 물의 수위를 조절한다. 지금 배가 있는 곳은 가툰호 쪽이고, 가야하는 저 건너편은 대서양 카리브해 쪽이다. 수위가 다 조절 되고 배가 갑문을 통과한다. 이제 정말 마지막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는 절경이다. 두고두고 가슴에 저장되어 이 장엄한 순간이 그리울 때 꺼내 볼 눈부신 광경이다. 내 사랑하는 두 아들아! 세상에는 이런 위대한 마디도 있단다. 우리 나중에 울애기들 크면 함께 크루즈 여행도 하고, 육로여행도 하자. 엄마아빠가 돈을 더 많이 저축하여 너희들 여행비를 많이 지원해 줄게. 우리 손주들 2남 3녀 5명 잘 기르거라. 이제 부모는 늙어가니 자손과 여행 다니는 것이 좋을 듯하다. 기대되는 가족여행이다. 파나마 운하 통과하는 장면을 영상으로 녹화도 했다. 먼 후일에도 오늘을 꺼내보며 행복할 것이다.
* 파나마 운하 통과 대서양쪽 해협
가툰호의 갑문을 나오니 대서양 쪽 해협이 나온다. 이것으로 온종일 우리 배는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여 나온 것이다. 파나마 운하(Canal de Panamá)는 파나마 지협을 횡단하여 태평양과 카리브 해(대서양)를 연결한다. 태평양 연안의 발보아에서부터 카리브 해 연안의 크리스토발(Christóbal)에 이르기까지 총 길이 64㎞로 1914년 8월 15일에 완성되었다. 파나마 운하의 건설은 운하에 대한 미국의 독점적 지배로 인해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최초로 파나마 운하의 굴착을 계획한 사람은 1529년 에스파냐의 국왕 카를로스 5세였지만, 실질적으로 운하 건설이 논의된 것은 1880년대였다. 처음에는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건설한 경험을 바탕으로 빠른 완공을 자신했던 프랑스가 운하 건설을 주도했다. 프랑스의 페르디낭 드 레셉스(Ferdinand de Lesseps)는 1881년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공사에 착수하지만, 지형적 조건과 풍토병의 만연, 자금 부족 등으로 9년 만에 파산하고 만다. 1894년 프랑스에서 다시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지만, 당시 운하 건설에 적극적이었던 미국이 1903년 4000만 달러를 들여 프랑스로부터 운하 굴착권을 사들인다. 그러나 당시 파나마를 통치하던 콜롬비아 정부가 운하 건설을 거부하자 미국은 파나마의 독립을 지원한다. 파나마의 독립 이후 미국은 운하 지역의 치외법권을 획득하고 운하 공사를 시작했다. 총 4만 3,000여 명의 노동력이 투입되어 1914년 마침내 운하가 완성되었다. 이후 미국은 85년 동안 파나마 운하의 운항권을 독점적으로 관리해 왔고, 1999년 12월 31일에 이르러서야 운항권이 파나마로 이양되었다.
파나마 운하는 차그레스 강(Río Chagres)을 막아 만든 34㎞ 가툰 호(Lago Gatún)와 파나마 만 쪽에 인공적으로 건설한 1.6㎞의 미라플로레스 호(Lago Miraflores), 두 호수 사이의 15㎞를 굴착하여 만든 쿨레브라 수로(Corte Culebra, 과거 Gaillard Cut)로 이루어져 있다. 가툰 호와 쿨레브라 수로의 수면 표고는 26m로 높은 반면, 미라플로레스 호의 수면 표고는 16m로 낮아서 갑문(閘門) 방식을 활용하여 표고 차를 해결하였다. 파나마 만에서 미라플로레스 호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2단으로 된 미라플로레스 갑문(Esclusa de Miraflores)이, 쿨레브라 수로로 통하는 입구에는 1단식의 페드로미겔 갑문(Esclusa de Pedro Miguel)이, 가툰 호에서 카리브 만으로 나가는 출구에는 3단식 가툰 갑문(Esclusa de Gatún)이 설치되어 있다. 파나마 운하는 수에즈 운하와 더불어 대양을 연결하는 인공 수로이다. 미국에서 태평양과 대서양을 관통하는 데 파나마 운하를 이용할 경우 남아메리카를 돌아가는 것보다 운항 거리를 약 1만 5,000㎞가량 줄일 수 있다. 운하를 통과하는 데에는 평균 9시간이 걸리며, 통과 수속에는 약 15~20시간이 소요된다. 파나마 운하의 연간 평균 이용 선박의 수는 15,000척이다. 2007년부터 시작된 운하의 확장 공사가 마무리되면 운하의 이용 가능 용량은 2배로 증가할 예정이다. 2016년 통항량 증가로 확장 공사가 완공되었다. 대서양과 태평양 쪽에 각각 3단식 갑문을 새로 건설했다. 종전에 통과할 수 없었던 포스트 파나맥스급 선박도 통항 가능하다. 이런 규모의 배를 뉴 파나맥스라고 칭한다. 확 트인 해협을 질주한다. 항구에는 배들이 많 정박해 있다. 이제 곧 대서양을 만날 것이다.
* 파나마 운하 통과 대서양 카리브해 진입
카툰 갑문을 마지막으로 파나마 운하를 다 통과했다. 이제 경찰 보트의 안내로 대서양으로 진입한다. 갑문 주변에 설치된 아름다운 조형의 다리가 있는데 그 밑을 지나간다. 화물 선적의 선박들이 많은 항구를 지나 점점 넓어지는 바다로 질주한다. 여기는 대서양 카리브해다. 우리 부부는 작년에 카리브해 크루즈 여행을 했던 곳이라서 더욱 정겹다.
* 파나마 운하 통과 대서양 질주
드넓은 대서양 바다를 질주한다. 발코니에서 보니 크루즈 배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빠르게 질주한다. 바다 위에 아직도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려는 화물 선박들이 대기 중으로 떠 있다. 아주 장엄한 파나마 운하 통과 체험을 하고 이제 태평양처럼 대서양 광활한 바다를 보며 콜롬비아로 간다.
* 파나마 운하 12층 뷔페식당 과일과 아이스크림
오늘은 석식은 7층 오키즈가든 식당에서 해물우동, 만두, 오징어튀김, 탕수욕으로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디저트는 뷔페식당에 가서 과일과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었다. 두고두고 그리울 뷔페식당의 풍성한 과일과 아이스크림 등 식단들이다. 방에 와서 양치질을 하고 6,7층 대극장에서 피아니스트의 공연을 보았다. 손이 물결처럼 건반에 흐른다. 50~60대 남자인데 악단과 함께 혼자 1시간을 피아노 연주와 함께 노래로 이끌어 간다. 공연 후 기립 박수로 보답했다. 방에 와서 두 아들에게 사진을 올리고, 오늘 일과를 정리하여 적고 잠을 잤다.
2019년 2월 7일 목요일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항구 진입
아침 7시모닝콜 받고 발코니에 나가니 하얗고 높은 건물들이 즐비하게 다가온다. 청명한 날씨이고 청청한 풍경이다. 안온한 항구의 바다는 거울처럼 하얀 고층 건물들을 비추며 품고 있어 비경이다. 간간이 보트와 배가 왕래하고 참으로 평화로운 정경이다.
*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항구 기항
13층 갑판에 나가보니 항구가 다 보인다. 매우 크고 웅장한 품자락 항구다. 콜롬비아의 국가명은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그의 이름에서 지은 것이다. 그의 이탈리아 본명은 콜롬보(Colombo)이고 이것을 라틴어로 표기한 콜룸부스(Columbus)의 영어식 발음을 따라 한글로 표기한 것이 ‘콜럼버스’이다. 그의 본명을 그대로 따와 국명으로 정한 나라가 바로 콜롬비아(Colombia)이다. 즉 ‘Colombo’에다가 장소를 나타내는 어미 ‘-ia’를 붙인 것이다. 이러한 콜롬비아의 최고 관광도시가 바로 카르타헤나이다. 수도 보고타에서 1천 킬로미터 거리, 비행기 편으로 1시간 반 정도 걸린다. 카르타헤나의 성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지는 색상도 곱고, 옛 스페인 잔재 건물로 가치있는 건축물이 많다. 콜롬비아는 스페인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구시가지에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세워진 아름다운 발코니가 있는 안달루시아풍의 집들과 바로크 시대의 건축물, 또 1811년 콜롬비아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다음에 세워진 공화국 양식의 건축물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오늘 우리는 그 구시가지를 탐방한다. 콜롬비아 출신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바로 이런 환경에서 살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콜롬비아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북서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베네수엘라와 브라질, 남쪽으로는 에콰도르와 페루, 북쪽으로는 카리브해가, 북서쪽 국경으로 파나마와 맞닿아 있다. 서쪽으로는 태평양이 있으며, 자메이카, 아이티, 도미니카 공화국,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해역과 붙어있다. 콜롬비아는 세계에서 26번째로 큰 나라이며, 남아메리카에서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페루, 콜롬비아 순으로 4번째로 크다. 현지 가이드는 콜롬비아라는 이름은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으로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롬버스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지배하던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들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카르타헤나는 16세기에 건설된 항구 요새로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아바나 항구와 푸에르토리코의 산후안 항구와 더불어 서인도제도 중 가장 중요한 항구 중 하나다. 또한 콜롬비아 북부에 있는 볼리바르 주의 주도로, 콜롬비아의 주요 무역항이자 공업 도시이며 관광 거점이다. 카르타헤나의 건축물들은 신세계 아메리카 개척 시대이던 16세기~18세기에 가장 광범위하고 완벽하게 지어진 것이다. 군사 건축문화의 전형이다. 카르타헤나는 1533년 6월 1일 스페인 마드리드 출신자가 건설했다. 식민 시대에 콜롬비아와 페루 일대에서 채굴된 금과 은의 중계항으로서 번성하기 시했다. 19세기 초에는 콜롬비아의 최대 도시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남아메리카 북부 노예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에스파냐가 16세기부터 성벽을 쌓아 요새를 만들었다. 이 요새는 식민 시대 군사 요새의 전형으로 평가받으며 198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카르타헤나 항은 콜롬비아 최대의 컨테이너 항만이며, 바랑카베르메하 정유소에서 나오는 송유관의 종점에 해당해 이를 바탕으로 석유화학 공업 등 중공업도 발달하였다.
참으로 의미있고 뜻깊은 나라의 소중한 도시에 왔음에 흐뭇하다. 이제 곧 하선하여 카르타헤나의 아름다운 모습을 관광한다. 17세기에 스페인 국왕의 지시에 의해 2백년에 걸쳐 만든 10km가 넘는 길이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를 구경하고, 스페인을 조명하듯 그 식민지 잔재 그대로인 콜롬비아의 구시가지를 걸으며 곳곳 명소들도 둘러볼 것이다.
* 크루즈배 NCL호 갑판 14층 암벽등반장
하선 대기 시간에 여유가 있어서 갑판 14층 암벽등반장에 갔다. 지난번에 왔는데 바람이 심하게 불어 접근을 못했다. 아주 오롯하게 높이 솟고쳐 올라 있다. 독특한 형상이다.
*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요새 공원 시인신발 동상
하선하여 카르타헤나 구시가지로 간다. 우리만 타는 버스 1-12번이다. 키가 큰 현지 남자 가이드다. 콜롬비아는 남미에서 4위로 큰 국가라고 소개한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페루, 콜롬비아 순서란다. 수도 보고타는 해발 800m 고지의 도시다. 콜롬비아는 남미에서가장 북쪽 국가이며, 카르타헤나는 그런 콜롬비아의 가장 북쪽 도시다. 콜롬비아라는 지명은 스페인 선원들이 그들의 고향을 따서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스페인에도 카르타헤나가 있단다. 콜롬비아 지명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이 있다는 것도 알게하는 대목이다. 공용어는 스페인어다. 1달러레 3200페소다. 요새로 가는 주에 요새 가기 전 바로 곁에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에 신발 동상이 있다. 이 도시를 많이 사랑한 시인인데 카르타헤나의 대표 시인인 루이스 카를로스 로페스Luis Carlos Lopez의 신발이다. 낡은 신발 만큼 사랑해서 그의 신발 동상을 세워준 것이란다. 나는 한국 시인인데 참 부러운 광경이다. 우리 나라도 저런 문화는 배워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만큼 나도 내 고향 또는 살고 있는 그곳에서 더욱 시인의 사명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한국 경주에서 국제펜세계문인대회를 개최할 때 만났던 콜롬비아의 문인 부부가 있었다. 그때 같은 테이블 옆좌석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며 함께 참여했다. 오늘 그 부부가 생각난다. 우리들은 세계의 문인이어서 언제 어디서 만나도 밥갑다. 그 문인 부부를 만나며 더욱 꼭 와보고 싶은 나라였는데 그 소원이 이루어짐에 참 행복하다. 요새로 가는 동안 공원의 나무 사이로 거룩하게 보이는 신발 동상이다.
*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산펠리페 요새
카르타헤나 항구에서 버스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성벽과 석호를 보았다. 그리고 산펠리페 요새 가까이 왔을 때 거대한 규모로 오롯하게 솟구쳐오른 요새의 풍채가 대단했다. 웅장한 규모다. 장군 동상도 중앙에 있다. 요새 주변에는 많은 차량이 통행하고, 사람들도 많다. 이곳이 얼마나 많은 세계인들의 걸음이 모이는지 증명하는 대목이다. 콜롬비아는 1500년~1800년대 스페인이 지배했다. 카르타헤나에는 스페인들이 남미에서 빼앗은 물자를 유럽으로 실어가던 주요 항구였다. 이곳은 물자가 풍부해서 해적이 많았다. 그래서 요새도시가 되었다. 카르타헤나의 산펠리페 성(Castillo de San Felipe de Barajas)은 17세기 스페인 군대가 약 100년에 걸쳐 쌓아 올린 요새다. 식민시대 군사 요새의 전형적인 건축물로 구시가지와 함께 198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카르타헤나Cartajena는 보고타에서 북쪽으로 약 1천㎞ 떨어진 곳에 콜롬비아 대표 관광도시다. 카리브해에 위치한 카르타헤나는 스페인 정복자에 의해 1533년 발견돼 남아메리카와 유럽을 오가는 중요한 식민지 항구도시로 개발됐다. 콜롬비아와 페루 일대에서 채굴된 금과 은의 중계항으로 번성하기 시작해, 19세기 초에는 콜롬비아 최대 도시가 됐다. 스페인으로 실어 나르는 값진 물건에 눈독 들인 캐리비안 해적들이 기승을 부렸고, 이들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스페인 군대는 1639년부터 약 100년에 걸쳐 성벽을 쌓아 요새를 만들었다. 요새 아래에는 터널이 있어 적의 침략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다. 오늘날 이곳은 관광객이 1순위로 꼽는 관광명소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중남미의 수많은 성 중 가장 크고 견고하다.
요새 바로 곁 도로에서 하차하여 걸어갔다. 웅장한 요새는 수많은 세계인들의 걸음을 맞이하며 옛 풍채와 드높은 위상을 그대로 머금고 있다. 평온한 오늘날에도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한 높은 고지에서 찾아온 이들을 아주 세심한 시선으로 감시하듯 마주하고 있다. 스페인이 카르타헤나를 지배할 때 카리브해를 통하여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열강의 침입이 심했다. 그로인해 스페인은 이곳 진입도시를 지키기 위해 1536년부터 1657년까지 도시를 감싸안은 견고한 성벽을 건설했다. 카르타헤나 성벽은 남미의 스페인 시대에 건축한 요새 중 가장 우람하고 튼튼하다. 요새마다 성인의 이름을 붙인 초소를 설치했다. 여기는 바라하스의 산펠리페 요새(Castillo San Felipe de Barajas)라는 초소로 가장 으뜸이다. 요새 앞 광장 중앙에는 동상이 하나 용감한 자태로 서 있다. 자세히 보면 다리 한쪽이 의족이다. 손도 한쪽이 잘려있다. 눈도 한쪽이 멀었다. 1741년 엄청난 병력의 영국 함대 공격에서 카르타헤나를 성채와 함께 능숙한 지휘력으로 잘 방위하여 영국을 물리친 스페인 사령관 블라스 데 레소의 동상이다. 영국과의 전투에서 눈과 팔과 다리를 한쪽씩 잃으면서도 승리를 거둔 스페인 전쟁 영웅 블라스 데 레소(Blas de Lezo)의 동상이 지금도 살아있듯 용감한 위용으로 꼿꼿하게 서 있다. 정상인 왼손에는 펜싱경기에서 사용하는 것과 유사한 가늘고 뾰족한 무기를 들고 있다. 산펠리페 요새는 구시가지와 석호를 사이에 두고 있다. 시간이 없어 우리는 오르지 못했지만 요새 언덕 정상에 오르면 카르타헤나 시가지와 항구와 바다가 비경이다.
요새 주변에는 차도 많고, 상인도 많다. 원주민 여인들이 노랑, 빨강, 초록 원색의 치마의상을 곱게 차려입고 과일 담은 그릇을 이고 자꾸 접근한다. 알고보니 그 여인들은 수박과 파인애플과 망고 등 콜롬비아 생산의 과일을 큰 그릇에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며 팔기도 하지만 기념으로 사진을 찍어주며 1달러씩 받는 상인이었다. 그외 모자, 옷, 음료 등 파는 상인들로 매우 복잡하다. 조금 불편해도 그것은 이곳의 유명세를 가늠케 하는 지표란 생각을 하니 내가 오늘 여기 선 것에 대하여 흐뭇했다. 서둘러 버스가 있는 도로로 오는데 콜롬비아의 시내투어 버스가 정차되어 있다. 모두 진풍경이다.
* 콜롬비아카르타헤나 라파엘누녜스 대통령 박물관
콜롬비아의 전 대통령 라파엘 누녜스집이자 박물관이다.그는 1880년부터 대통령을 4회 연임했다. 1886년에 헌법을 제정했다. 이 도시에서 집무를 보았다. 카르타헤나가 그의 고향이어서 그랬다. 2층 집으로 아담하다. 정원에는 야자수 큰 나무가 많다. 한켠에는 마차가 놓여 있다. 2층에 올라가니 침대 등 그 당시 생활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입구에 그의 흉상도 있다. 그의 두번째 부인 흉상도 있다. 박물관 건너편에는 동상이 우똑 선 공원이 있다. 존경받는 대통령이 있고, 그의 박물관도 있고, 본받아야할 아름다운 나라다.
*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시가지 성벽
카르타헤나 항구에서 시가지로 나갈 때부터 곳곳에서 성벽이 보이더니, 지나간 곳마다 자주 나타난다. 마차를 타고 줄지어 구시가지 성문으로 들어가는 행렬도 보인다. 성벽은 큰 대로변에 있어서 차량들 질주와 함께 과거와 현대의 공존을 보는 진풍경이 이어진다. 17세기 사이에 스페인 국왕 지시로 10Km가 넘는 저 성벽을 쌓는데 200년 걸렸다. 성벽은 원래 11Km였는데 지금은 7Km만 남았다. 금, 은이 많은 도시라서 도시 방어로 철벽 요새를 지어 잘 방어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도시다. 4㎞ 길이로 둘러싼 성벽 안 구시가지는 16~17세기 식민지 시절의 건축양식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카르타헤나 성벽은 초기 스페인 정착 시대의 중요한 지역을 보호하던, 대규모의 방어 시설이다. 지역 주민들에게는 '라스 무리오스'라 알려진 카르타헤나 성벽은 카르타헤나 구시가지 서인도 제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군사 건축물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역을 둘러싸고 있다. 카르타헤나 항구는 그 부유함과 경제적인 중요성 때문에 종종 해적의 습격을 받았고, 이에 도시를 지키기 위해 성벽을 쌓았다.
카르타헤나는 1533년 스페인 정복자 돈 페드로 데 에레디아에 의해 세워졌으며, 즉각적으로 해적들이 노리는 표적이 되었다. 1551년, 프랑스 해적인 장-프랑수아 드 라 로크 드 뤼베르발은 에레디아에게 도시를 버리고 떠나가도록 강요하고 상당한 양의 금을 쥐어 주었다. 1585년에는 영국의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이 카르타헤나를 덮쳐, 주민들은 근처의 다른 도시로 피신해야만 했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자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도시를 방어할 수 있는 대규모 성채를 건설하라고 명했다. 성벽의 높이가 27m에 달하며, 산 세바스티안 데 파스텔리요와 산 펠리페 데 바라하스를 비롯한 여러 개의 요새로 무장한 이 성채를 완전히 건설하기까지 200년도 넘는 시간과 5천만 페소의 금이 들어갔다. 이 성벽이 가장 가혹한 시험을 겪은 것은 1741년, 카르타헤나 시가 에드워드 버넌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의 공격을 받았을 때였다. 186척의 배와 23,600명의 군사를 갖춘 영국은 고작 여섯 채의 배와 3천 명에 불과한 스페인 측 병력을 수적으로 크게 능가했다. 그러나 성채와, 스페인 사령관인 블라스 데 레소의 능숙한 지휘 덕택에 결국 영국을 물리칠 수 있었다.
카르타헤나라는 지명은스페인의 한 항구에서 따온 이름이다.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유서 깊은 도시 중 하나이며, 이곳의 구시가지는 과거 스페인 식민지 시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카르타헤나의 성벽은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축조된 방어 체계인 동시에, 마을과 카리브 해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할 수 있는 곳이다. 식민지 시대 초기에는 대규모의 요새를 구축하였고, 이 성벽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오늘 기온은 19도에서 26도, 평균 24도로 걸어서 탐방하기 알맞은 기온이다. 그래도 움직이면 좀 더운 편이다. 많은 것을 보고 재워 갈 것이다.
*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구감옥과 창고
예전에 성벽의 감옥이었고, 군대 창고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지금은 기념품 상가가 많이 들어와 있는 Las Bovedas 수공예품 상가 단지다. 상가 건물 앞에는 웅장한 회색 건물도 있다. 차가 많이 들어온다. 상가가 수없이 많은데 그만큼 왕래하는 사람도 많다. 노란색 건물이 형형색색의 고운 상품들과 함께 매우 아름답다.
*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구감옥 해변 요새
상가를 보면서 지나 성벽 위에 올라가 조망했다. 성벽이 해변에 길게 놓여 있다. 곁에는 대서양 바다와 해변도로가 시원하게 전개된다. 바닷가에는 사람들도 많다. 대서양 카리브해를 타고들어오는 바람이 심하게 분다. 서들러 버스에 올라 떠나려는데 상가 곁 정원에 빵나무가 있다. 열매가 빵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런데 열매를 먹는 것이 아니라 줄기를 갈아서 밀가루처럼 먹는단다. 신기한 모양의 열매가 달린 나무다.
*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스페인양식 건물
스페인 식민지 양식의 건축물들이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다. 오래된 건물은 여러 가지 아름다운 색 상으로 치장되어 있어 도시가 화사하다. 집집마다 벽에 돌출되어 달린 고운 조형의 작은 나무 발코니엔 꽃들이 심겨져 있어 도시의 풍경으 더해준다. 현지 가이드는 계속 건물 외벽의 발코니를 가리키며 보란다. 저것이 유럽풍 건축양식이란다. 아직도 스페인 식민 잔재가 남은 것이라고 강조한다. 181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다. 개보수 하지 않고 그대로 사는 이 나라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걸어도, 걸어도 늘 같은 풍경으로 건물들이 이어져 있다. 수백 년이 지났어도 남아서 빛나는 식민 통치의 무서운 위력이다. 저걸 우리가 왜 모를까. 내 조국 아픈 마디가 있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종교 재판소
가톨릭 종교재판소로 가톨릭 신자가 아니면 고문을 받고 사형 당하던 곳이다. 그출입문에서부터 육중한 두려움이 서려 있다. 원주민들을 다스리기 위한 일환으로 아마도 유럽의 대표적 종교인 카톨릭 종교를 내세워 엄하게 심판 명목을 빌어 규율을 잡았던 아닌가싶다. 종교라는 테두리 안에서 모든 것을 강하게 지배하려는 스페인의 책략이 아니었을까. 지배당한 약자의 설움인 것을 어찌 피할 수 있었겠는가. 당시의 단두대가 건물 뒤켠에 전시되어 있다. 사람들은 줄지어 서서 형틀에 올라가 목을 매달던 구멍에 자신의 목을 내밀고 사진을 찍는다. 나도 그랬다. 광며천지에 살지만 잠시나마 죄없이 죽음을 체험해 보는 시간을 가지며 그날의 서럽게 죽어간 사람들의 명복을 빌었다. 고문과 죽임을 당하던 사진 등도 많이 전시되어 있다. 무시무시한 쇠창살도 있다. 감옥으로 재판받던 사람들은 그 창틀에 손과 얼굴을 내미로 살려달라고 아우성 쳤을 것이다. 꽤나 큰 규모의 건물이고 그날을 증언하는 전시물도 많다. 뒤뜰 정원에는 대포도 전시되어 있다. 지금은 참 처연하고 평화 가득한 곳인데 그 옛날 종교재판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을 피바람이 불던 으시시한 곳을 탐방하고 나왔다.
*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볼리바르 공원
종교재판소 바로 앞에 시몬 볼리바르 장군이 공원이 있다. 볼리바르는 콜롬비아의 독립영웅이다. 공원 중앙에는 볼리바르의 기마동상도 있다. 비둘기가 많다. 서둘러 지나가는라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종교재판소와 함께 꼭 보아야할 명소다.
*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카탈리나 성당
구시가지 도로변에 높고 고운 색상의 성당 건물이 솟구쳐 오른다. 매우 크고 웅장한 성전이다. 외형도 웅장하고 내부도 관람했는데 매우 웅장하다. 성당 곁에는 콜롬비아의 독립을 선포했던 건물도 있다.
*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초콜릿 박물관
구시가지 거리를 계속 걸으며 탐방한다. 덥다. 구시가지는 매우 고풍스럽고 발코니가 모두 돌출되어 있다. 목조로 예쁜 구조가에 꽃과 식물을 발코니에 장식하여 도시를 화사하게 한다. 어느 유럽의 우아한 도시에 온 듯하다. 한참을 힘들게 걸어온 골목에서 초콜릿 박물관을 만났다. 입구에 들어서니 먼저 따뜻한 초콜릿 차 한잔씩 나누어준다. 곁에 자동기기가 있어 더 뽑아 먹었다. 더운 날에 많이 걸어 지친 몸을 따끈하 초콜릿 차를 여러 잔 마시며 이열치열로 개운하게 다스렸다. 고마운 일이었다. 콜롬비아는 초콜릿를 많이 생산하는 국가다. 그래서 여러 초콜릿 제품이 많이 전시되어 잇다. 제품을 판매하기도 한다. 둘러보고 나오니 문앞에 과일과 과일주스를 파는 상인이 있다. 구경하는 것도 여정이라 여기며 이 나라의 과일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늘진 건물 벽면 아래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하는 남자가 있다. 콜롬비아에서는 흔히 보는 정경이란다. 꽤 건전해 보이는 사회 문화의 한 단면으로 보였다.
*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에메랄드 박물관
원래 일정이던 금박물관은 공사 중이어서 이곳으로 교체했다.콜롬비아는 금, 은뿐만 아니라 에메랄드도 생산한다. 특히 이곳 카르타헤나 근처에서 많이 생산한다. 그 원석을 생산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가공하는 장면을 여자 직원이 실제 그대로 보여준다. 제작된 보석 물건을 판매도 한다. 꽤 비싼 보석이다. 실내 탐방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건물 발코니가 찬 예쁘다. 돌출된 유럽풍으로 꽃도 장식해 놓아 더욱 아름답다. 곁에는 공원이 있어 시민들이 많다. 거리에는 공연하며 물건을 파는 젊은이도 있다.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기도 한다. 골목길 저 멀리에는 아까 들렀던 성당도 보인다. 날씨는 더운 편이다.
*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산토도밍고 광장
오늘의 마지막 일정으로 온 곳이다. 산토도밍고 광장에는 아주 크고 뚱뚱한 여자 나체 청동상이 누워 있다. 미술작가였던 페르난드 볼테르가 제작한 작품이다. 그의 작픔은 모두 저렇게 통통하게 제작한다. 저 여자의 몸, 특히 가슴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고 한다. 가슴이 맨질맨질하다. 나는 같은 여자로서 차마 가슴을 만지진 못하고 팔과 다리만 만져보았다. 사람들이 많이 만지려 줄을 서 있다. 주변에는 노천카페가 많다. 식당 등 기념품 상가도 있다. 건물 색사이 곱다. 현지 시민들과 외국인이 많이 섞여 있어 이곳의 인기를 가늠케 한다. 주변 풍경이 콜롬비아의 사회문화를 여과 없이 보여주어서 한동안 감상하며 많이 보고 배웠다. 흐뭇한 여정이다. 이것으로 카르타헤나의 탐방을 마치고 항구로 이동했다.
*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항구로 귀환
구시가지를 떠나 신시가지를 약간 거쳐 항구로 간다. 여기서 카르타헤나 항구까지는 10분 정도 걸린다. 긴 도로를 따라 달린다. 아까 보았던 석호도 지나간다. 산펠리페 요새가 연못 곁에 있다. 버스에서 조망했다. 콜롬비아는 한국의 6.25 전쟁 참전국이다.서울과 보고타가 자매결연도 맺었다. 고마운 나라다. 항구에 오니 우리의 배가 거대한 위용으로 바다에 앉아 우리를 기다린다. 배를 재승선하였다. 부페식당에서 중식을 했다. 오후에는 수영장에 가서 남편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깊은 수영장 물속에서 손잡고 뛰며 운동을 하기도 했다. 수영장 물은 온탕보다 좀 차갑고 바닷믈보다는 염도가 낮은 물이다. 그래서 온탕찜질 마사지와 수영을 번갈아 한다. 대형 미끄럼틀에 올라가 미끄럼도 2회 탔다. 높이 올라가야 하는 부담이 있어서 사람들은 잘 타지 않는 기구다. 나는 용감하게 계단을 타고 올라가 물이 흐르는 통속 미끄럼틀을 거쳐 나온다. 매우 신나고 재미있다. 두고두고 잊지 못한 추억이 될 것이다. 그립기도 할 것이다. 이런 낭만은 생각만으로도 행복할 것이다. 선실에 와서 목욕을 했다. 저녁식사는 7층 오키즈 가든 식당에서 인솔자가 사 주었다. 새우, 오징어, 가리비 요리를 먹었다. 쇠고기 안심요리도 먹었다. 매니저가 쇼를 하며 요리해서 나눠준다. 생계란을 빙글빙기르 돌려 큰 칼로 10회 받기도 한다. 모자 위에 넣기도 한다. 코브라 뱀 모양으로 계란말이, 하트모양 볶음밥 등 아주 독특한 식단을 제공해주어 고마웠다. 7층 대극장 공연은 복화술 쇼다. 한 중년 남자가 인형을 가지고 혼자 말을 다 한다. 객석에서 남녀 두 사람들을 무대로 올려 그들은 입만 움직이고 혼자 말을 다 한다. 객석은 웃음바다다. 마지막으로 남자 3, 여자 3, 6명을 무대로 올려 돼지, 고양이, 새, 말, 개, 오리의 입 모양 탈을 달라주고 그들의 대화를 혼자 다 한다. 기막힌 쇼다. 공연이 끝나고 방에 오니 나의 실내화가 없어졌다. 우리방 도우미 남자직원을 불러 물어보니 모른단다. 한참을 방 구석구석 찾는 척 하더니 나의 구두 뒤에 있다고 구두를 빼보란다. 감쪽같이 감춰놓고 그리한 것이다. 우리는 한바탕 신나게 웃었다. 이것도 크루즈 여행에서 재미를 더해주는 대목이다. 멋지고 낭만 가득한 콜롬비아 카르타헤나의 일정이 끝나고 이제 배는 밤바다를 달려 콜롬비아 산마르타로 달려간다
2019년 2월 8일 금요일 콜롬비아 산타마르타
* 콜롬비아 산타마르타 항구 기항
발코니에서 조망하고 하선준비를 하여 크루즈 배의 13층 갑판에 나갔다. 바람이 세차게 많이 분다. 항구에는 많은 화물 선적이 놓여있고 참 아늑하다. 1525년에 안데스 고원에 대한 에스파냐인의 전진기지로 건설된 도시 콜롬비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다. 막달레나 주의 주도인 중심도시 산타마르타는 1525년에 스페인이 건설했다. 하지만 10년 전만 해도 이 역사적인 도시는 마약과 매춘으로 악명 높고, 게릴라 단체가 장악했던 곳이었다. 콜롬비아 정부가 행정력을 되찾은 이후 관광과 경제의 중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남미의 독립 영웅 시몬 볼리바르가 말년을 보낸 이 도시는 이제 콜롬비아 서민들이 해변을 즐기기 위해 찾아오는 카리브 해의 대표적인 항구도시가 되었다. 카르타헤나보다 습도도 낮고, 덜 뜨겁다. 콜롬비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국립공원이라는 타이로나 국립공원이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부근에서 카카오, 사탕수수, 바나나를 재배했다. 특히 유나이티드프루츠사가 바나나를 대규모로 생산하기 시작하자 세계적인 바나나 적출항이 되었다. 산타마르타 2월 기온은 17도~33도, 평균 27도로 여행하기 약간 덥지만 좋다. 오늘은 산마르타 대성당, 금박물관, 볼리바르 박물관 등을 탐방한다. 산마르타는 현재 개발 도상 도시로 소박하고 순수하다. 하선 시간이 좀 여유 있어서 8층 오쉬한즈 식당 경양식 메뉴 치킨, 햄버거 등로 식사하던 곳을 들렀다. 그리고 7층 오키즈 가든 아시안 메뉴로 해물우동, 돼지고기 쌀국수, 오징어튀김, 탕수욕 등을 먹던 곳도 들렀다. 이런 모든 곳은 나중에 큰 추억이 되어 먼 후일 서러운 노년에도 우리의 정원을 화사하게 할 것이다
* 콜롬비아 산타마르타 항구 하선
대극장 7층에 모여서 하선한다. 7층 극장 앞 발코니에 나가서도 항구를 조망했다. 우리 한국팀의 하선을 불러 하선했다. 버스는 14번을 승차했다. 어제에 이어 콜롬비아의 뜻깊은 여정이 시작된다.
* 콜롬비아 산타마르타 대성당
산마르타는 사람 이름이다. 이 성당을 세웠고 산마르타 지명도 그의 이름을 딴 도시 이름이다. 이곳 성당에는 산타마르타 도시를 세운 산타마르타의 유해가 보존되어 있다. 역사적인 명소다. 콜롬비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수세기에 거쳐 지으며 여러 건축 양식이 들어있다. 스페인 식민지 양식의 하얀 성당 건물이 아침 햇살 조명을 받아 매우 화사하고 아름답다. 내가 선 광장에서는 지금 오전 10시 무렵인데 역광이어서 사진이 잘 안 나온다. 바로 앞에는 도로라서 나갈 수 없어 할 수 없이 높은 첨탑의 성당 건물 다 찍지 못하고 잘라서 담아간다. 도시의 중앙 광장에 자리잡고 있으며 주변에는 주요 건물들이 있다. 대성당을 지금 선 광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도로 건너 왼쪽은 정부 건물이다. 맞은 편은 수녀들 숙소다. 그리고 오른편은 2층 주택들이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니 입구에 시몬 볼리바르 장군 동상이 있다. 성전이 매우 웅장하다. 성전 바로 앞에는 볼리바르 무덤이 있다. 동판에 그에 문구가 새겨져 있다. 산타마르타 대성당은 시몬 볼리바르가 사망 후 처음 묻힌 성전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지 가이드는 성전 바로 앞에 있는 그의 무덤 유적을 우리에게 자세히 소개해주고 꼭 보고 가란다. 볼리바르는 콜롬비아뿐만 아니라 남미의 영웅이다. 남미 여러 국가들의 독립을 도와준 군부 사령관이었다. 성당 안에는 그외 여러 기념비가 있다. 이 성당은 1765년에 처음 건축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의 공격을 30년 뒤에 완공 되었다. 수없이 들어와 마을을 침범하고 불지르기를 반복했다. 산타마르타 대성당은 산타마르타의 역사지구에 있다. 우리 크루즈 배가 정박한 항구에서도 가깝다. 시몬 볼리바르 공항에서도 18km 거리로 그리 멀지 않다. 그래서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산타마르타에 오고 이곳 성당은 역사적 가치가 있어 반드시 찾아온다. 이 아침, 콜롬비아에 온 것도, 산타마르타에 온 것도, 이곳 산타마르타 성당에 온 것도 참으로 깊은 가치를 지닌 유적지어서 큰 보람고 기쁨이다.
* 콜롬비아 산타마르타 금 박물관
스페인이 들어왔을 때 현지인들의 금 세공 기술에 감탄하였단다. 건물이 그 당시의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건물 그대로인 것에 큰 의미가 있는 금박물관이다. 2층 건물로 ㅁ자 구조다. 중앙에 ㅁ자로 구멍이 뚫려있다. 그리 화려하진 않다. 사진자료와 금세공품이 약간 전시되어 있다. 이곳 박물관 2층 난간에서 볼리바르 공원과 광장이 보인다. 바로 곁에 있다.
* 콜롬비아 산타마르타 볼리바르 공원
금박물관 바로 앞에 있다. 조금 전 금박물관 2층에 올라갔을 때 이 공원 잘 보여서 조망했다. 광장에 볼리바르의 동상이 서 있다. 볼리바르의 기마상이 울창한 숲 공원 중앙에 있다. 볼리바르가 남미에서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 얼마나 존경받는 사람인지 알게 하는 대목이다.
* 콜롬비아 벽화 마을
산타마르타 구시가지에서 볼리바르 농장으로 읻동 중에 벽화 마을을 지났다. 도로변에 벽화를 많이 그려놓았다. 길게 도로변에 늘어서 있는 벽화가 한동안 보였다. 이곳은 미국, 영국, 스페인 등 유럽인들이 거주했던 마을이다. 아마도 그런 영향으로 아름다운 벽화가 유럽식으로 걸려 있는 것 같다. 조금 더 달려가니 산타마르타와 연결되는 아주 중요한 도로가 나온다.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왕래한다. 외곽인데도 이곳 주변은 꽤 소중한 가치를 지닌 지역이다.
* 콜롬비아 원주민 마을
이번에는 타이로나 원주민들의 거주 도시를 지나간다. 산비탈에 아주 작은 집들을 짓고 산다. 멀리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보인다. 나는 버스의 반대편 좌석에 앉아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올 때는 잘 보였다. 항구에서보 보이던 산맥이다. 매우 높고 웅장하다. 길게 줄기가 이어진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맥이며 가장 해변에 있는 산맥이다. 최고봉이 5775m다. 타이로나 원주민들이 숨어서 집 짓고 살던 곳이다. 지금도 네 그룹으로 나눠서 살고 있다. 원주민들의 집들은 산맥 깊은 곳뿐만 아니라 지금 지나가는 산언덕 곳곳에도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 서러운 삶이지만 평화 가득하다.
* 콜롬비아 산 페드로 알레한드리노 농장 볼리바르가 사망한 집
산타마르타에서 한참을 달려서 이곳 농장에 왔다. 입구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커다란 이구아나였다. 나무에 올라앉아 수많은 사람들이 보아도 가만히 쳐다본다. 신기했다. 농장의 정원은 매우 넓다. 17세기에 지어닌 최대 농장이다. 볼리바르가 결핵에 걸리자 이곳 농장 주인이 모시고 요양시켜 주었다. 그러다가 1830년 12월 17일 볼리바르가 이곳 농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시몬 볼리바르는 1783년 1783년 독립 후 베네수엘라의 수도였던 카라카스에서 2남2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잃고 병약한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서 흑인 노예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랐지만 그게 흑인 노예를 해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흑인 노예 해방 이야기하게 된 건 아이티에서 지원받게 된 다음 이야기다. 정작 그러고도 여전히 pardocracia, 거칠게 번역하면, '깜둥이 정치?'를 두려워 한다. 1792년 어머니마져 병으로 사망하자 누나인 마리아 안토니아와 후아나는 시집을 가고 형인 후안 비센테도 다른 곳에 맡겨지면서 남매들이 뿔뿔히 흩어진다. 부모를 모두 여의고 난 이후 시몬 볼리바르는 처음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내외의 집에서 맡겨졌으나 곧 외삼촌인 카를로스 팔라시오스의 집에서 머물게 된다. 이때 시몬은 스승인 시몬 로드리게스를 만나 계몽사상에 눈을 떠서 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볼리바르의 집안은 상당히 부유한 크리올 집으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베네수엘라의 독립운동가로 남아메리카 6개국 콜롬비아, 파나마,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의 독재자가 된 영웅이다. 시몬 볼리바르는 1799년에서 1802년까지 멕시코와 프랑스 혁명의 열기에 끓어오르던 유럽여행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특히 스페인의 지식인인 후작 우스타리스와 만나면서 풍부한 학식을 갖추었다. 또한 볼리바르는 마드리드에서 외삼촌인 페드로 델 토로의 딸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하여 귀향하는데 아내가 황열병으로 결혼 9개월만에 쓸쓸히 죽는다. 그 후 볼리바르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유럽으로 돌아가 이곳저곳을 떠돌던 시몬 볼리바르는 고국 베네수엘라로 귀향하여 독립운동으로 1811년 베네수엘라 제1공화국을 세웠다. 한때는 왕당파의 카라카스 점령으로 볼리바르는 퀴라소 섬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그 후 콜롬비아 카르타헤나로 옮겼다가 여기서 '카르타헤나 선언' 으로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선언하고 1814년에 카라카스에 재입성하여 '해방자' 라는 칭호를 받는다. 그러나 그의 부대는 경험 부족과 물자 부족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려 연전연패해서 아이티로 망명하기도 했다. 이 난관을 타개하고자 볼리바르는 야노스 군벌인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와 손을 잡고 게릴라전을 벌여 스페인군을 이기고 이어서 1819년 피스바 산을 넘어 콜롬비아로 쳐들어간다. 여기서 볼리바르는 영국의 지원을 받아 '그란 콜롬비아 Grand Colombia 공화국'을 선언한다. 그리하여 남미대륙에서 스페인을 몰아냈다.
볼리바르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과 칠레 초대 대통령 오이긴스의 경우와 유사하다. 다른 점은 조지 워싱턴은 13개 식민지를 독립시켜 거대한 연방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볼리바르가 독립시킨 6개의 식민지는 각각 나위어져 강대국으로 성장하지는 못하고 고만고만한 약소국이 되어버렸다. 후속국이 잘나가지 못해서 어떻게 보면 워싱턴보다 훨씬 고생하고도 덜 알려진 비운의 인물. 물론 후속국들이 잘 못나간 것은 자업자득인 면도 있다. 종신 대통령을 하려다가 결국은 자신이 새로 세운 공화국을 망치기도 했다. 실제로 옆의 사람들이 종신 대통령의 자리를 권했고 딱히 반대할 만한 세력도 여론도 없었던 상황에도 자기 자신이 '나쁜 선례를 남기지 않겠다'며 두번 재임 후 은퇴한 워싱턴과는 비교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오이긴스 또한 칠레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오른 후 독재를 시도하려다가 반대파 세력들의 압력에 승복하고 사퇴하는 결단을 내려 말년의 시몬 볼리바르보다는 비판을 덜 받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볼리바르는 해방된 남미가 다시 유럽의 입김에 좌지우지 되지 않으려면 남미의 여러국가가 모두 힘을 합쳐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과 같은 거대 연방제체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그란 콜롬비아 연방은 각 지역이나 계층, 신분에 따른 이해관계가 대립하면서 제대로 된 통합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특히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사이의 갈등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볼리바르는 자유주의에 영향받기는 했어도 인종주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원주민은 잠재된 '적'으로 여기고 '유색인종'은 멸시했다. 시몬 볼리바르가 원주민 공동체 토지 제도를 공식 폐기하고, 그의 기여로 남미가 독립한 이후 원주민들의 처우가 급격히 나빠졌음을 생각하면 이들에게 시몬 볼리바르는 새로운 식민지 독재자와 다를게 없다.
그러나 시몬 볼리바르가 다른 독재자들과 궤를 달리하고 또 인정받는 점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독재자의 길을 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통 자신의 사리사욕이나 권력에 대한 탐욕 때문에 독재자가 된 다른 이들과 달리, 볼리바르는 이제 갓 독립한 남미가 외부의 영향에 흔들리지 않고 대통합에 이르기 위해서는 소수의 엘리트에 의한 지배가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해 종신 대통령에 취임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자신의 권력으로 부정축재를 벌이거나 반대파를 청소하는 전횡을 휘두르지 않았다.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반란을 일으켰다 항복한 이의 직위를 그대로 유지 시켰으며, 심지어 자신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인물들도 주동자만 국외추방하고 나머지는 석방하는 관대한 처벌을 내리기도 했다. 그란 콜롬비아 연방이 해체되고 대통령직과 후계자지명권을 포함한 모든 정치적 권한을 포기하고 물러날 때, 의회에서 거액의 연금을 평생 지급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그것을 거부했다. 원래 그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독립운동을 하면서 가산은 다 탕진했고, 대통령직에 있으면서도 집은 커녕 모아놓은 재산이 한푼도 없었기에 퇴임 뒤에 후원자가 제공한 농장에서 칩거하며 살았다. 오죽하면 그가 47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을 때, 의사가 그의 낡다 못해 아주 해진 셔츠를 보고 놀랐을 정도로 청빈한 삶을 살았다.
한마디로 숭고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자신의 신념에 매몰되어버린 안타까운 실패자라고 할 수 있다. ㄱ의 어록 중에 '세상에는 가장 멍청한 바보가 셋 있다. 첫째는 예수, 둘째는 돈키호테
, 그리고 나 볼리바르다.', '아메리카 독립을 위해 싸운 우리들은 바다 위에서 쟁기질을 했을 뿐이다.' '나의 죽음이 동맹을 가져올 수만 있다면 평온한 마음으로 임종을 맞이할텐데.' 등이 있다. 북미는 원주민과 백인 혼혈이 적어 원주민과 백인이 분리된 구조가 가능한데, 남미는 혼혈이 많아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다르다. 이런 두 혈통을 이어 받은 혼혈적 정체성은 중남미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점점 걸어서 안으로 들어가니 볼리바르가 사망한 집이 있다. 색상이 노란색으로 아름답다. 그 당시의 건물 그대로다. 시몬 볼리바르가 사망한 이곳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그렇게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농장 안에 그의 족적이 곳곳에 있다. 정원 가운데 그의 동상이 우뚝 서 있고 그 앞에 건물이 있다. 그가 사망한 집이다. 집 안으로 들어서니 입구의 방에 아까 여기 오기 전 들렀던 산타마르타 대성당을 지은 사람의 동상도 벽면에 부착되어 있고, 그의 주치의 사진도 걸려있다. 그의 주치의가 자기도 죽으면 볼리바르와 함께 이 농장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장도 붙여있다. 주치의는 사후에 소원대로 이곳에 묻어주었다. 먼 나라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는다. 볼리바르가 병석에 누워 사망했다는 방에는 고운 색상의 침대와 가구가 있다. 시계도 사망한 그 시각으로 멈춰져 있다. 몇 개의 방이 있는데 그의 시체를 석고상으로 뉘어 놓은 방도 있다. 그가 결혼하는 사진도 있다. 아내가 9개원만에 죽었다. 아내가 재혼하여 잘 살라고 유언했는데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여러 명의 여자는 시귀었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다. 남미의 존경받는 영웅인데 슬하에 자식이 없다니, 참으로 안타까웠다. 시몬 볼리바르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모두 둘러보고 다시 정원으로 나왔다.
* 콜롬비아 산 페드로 알레한드리노 농장 정원
농장 정원은 어느 곳을 보아도 푸른 식물들로 아름답다. 조경도 아주 잘 해놓았다. 정원 중앙에 볼리바르 동상이 큰 형체로 세워져 있다. 큰 나무들이 그의 풍채를 더욱 웅장하게 받쳐주고 있다. 여고생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왔다. 제복차림으로 학교에서 단체로 온 듯하다. 내가 사진 찍는 모습을 보고는 자연스럽게 멈추어서 함께 찍어준다. 고마웠다. 저렇게 그 나라의 사회적 환경, 또는 사람들의 생활상을 담아가는 것도 나에게는 큰 자료이기 떄문이다, 사실은 일부러 그들을 담으려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와 볼리바르 동상과 정원을 담으려 남편이 스마트 폰사진 찍을 준비하고 있는데 어느새 그 학생들이 내 가까이 다가오면서 자연스럽게 멈추어 준 것이다. 나는 먼 후일에도 오늘날의 콜롬비아 여학생들은 저런 교복을 입었음을 알게 되니 정녕 고마운 일이다. 이곳 농장은 지금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매우 넓은 농장이다. 죽어서도 참으로 아름다운 곳에서 영면하는 볼리바르다. 콜롬비아 한 백성의 그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기도 하는 농장이다. 투명한 햇살과 탱탱한 코발트빛 하늘이 푸름 청청한 농장을 더욱 찬란하게 빛내주고 있다.
* 콜롬비아 산 페드로 알레한드리노 농장 기념관
볼리바르가 사망한 집에서 조금 쩔어진 곳에 기념관이 있다. 하얀 건물의 문 위 외벽에 'COLOMBIA AL LIBERTADOR' 라는 문구게 새겨져 있다. 즉 해석하면 '콜롬비아의 해방자'란 뜻이다. 스페인어인 리베르타도레스Libertadores는 남아메리카 독립 전쟁의 영웅들을 가리키는 말로, '해방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리베르타도레스로 꼽히는 인물로 남미에서 칠레, 브라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등 국가에 7명이 있는데 그 중에서 시몬 볼리바르는 콜롬비아, 파나마,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6개국을 해방시킨 해방자로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 계층적으로부르주아이며 크리오요 즉 남미 식민지 태생 유럽계 백인들이었다. 또한 자유주의에 동화된 이들로, 대부분이 유럽 등지에서 전문적 군사 훈련을 받은 이들이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해 남미 축구 연맹CONMEBOL은 남미 각국 프로축구 리그 상위팀이 참가하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대회를 열고 있다.
이곳 산 페드로 알레한드리노 농장은시몬 볼리바르가 최후의 나날을 보낸 저택이다. 아름다운 초기 18세기 저택 산 페드로 알레한드리노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 전에 세워진 도시, 산타 마르타에 있다. 풍요로운 역사를 지닌 곳으로, 시몬 볼리바르와 남아메리카가 낳은 가장 위대한 영웅 중 한 사람인 볼리바르가 사망한 곳으로 특히 잘 알려져 있다. 볼리바르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얻어내기 위해 투쟁한 위대한 장군이었다.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페루, 에콰도르, 파나마, 볼리비아를 스페인 통치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킨 영웅적인 전투로 인해, 그는 '엘 리베르타도르' 즉 '해방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1826년 볼리비아 공화국이 탄생했고, 볼리바르는 한 나라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매우 드문 이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군사 리더십에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그가 해방시킨 국가들이 너무나 광대했으며, 서로 간에 정치적·문화적 유산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그다지 신망을 얻지 못한 행동이었으나, 그는 지역을 통합하기 위하여 자신을 절대 권력자로 선포했다. 널리 퍼지기 시작한 불안은 정점에 올라 마침내 그를 노린 암살 시도가 발생했다. 1830년 그는 권력에서 물러났으며 남아메리카를 떠나 유럽으로 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출발하기 전 결핵이 발병했고, 돈 호아킨 데 미에의 초청을 받아 그의 집인 산 페드로 알레한드리노 저택에서 요양하게 되었다. 볼리바르는 이 평온한 저택에서 말년을 보냈으나 마침내 병마에 굴복하여 1830년 12월 17일 사망했다. 이후 그의 유해는 베네수엘라의 수도인 카르카스로 옮겨져 그곳에 매장되었다.
산 페드로 알레한드리노 농장은 사탕수수, 코코넛, 벌꿀, 다양한 과일 등을 생산하고 증류주가 자랑거리인 부유한 농업 중심지였다. 볼리바르의 사망 이후 이곳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1891년 마그달레나 주에서 이를 사들여 복원했다. 오늘날 이곳은 볼리바르와 연관된 기념품이 가득한 박물관이며, 그가 해방시킨 여섯 나라의 예술과 문화에 헌정된 장소가 되었다.
건물 안에 들어서자 하얀 색상의 동상군이 있다. 중앙에 볼리바르가 우뚝 솟아 있고 그 주변에 콜롬비아의 해방자 볼리바르를 받쳐주는 역사적 전설을 상징하는 동상들이 층층으로 볼리바르를 에워싸고 있다. 특이한 것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 볼리바르가 다르게 보인다는 점이다. 좌측에서 보면 청념년 모습이고, 중앙에서 보면 장년 모습이고, 우측에서 보면 노년 모습이다. 내가 좌, 중앙, 우측에 서서 보니 실제로 그렇게 보였다. 독특한 제작법으로 형성된 동상이다. 기념관 앞에는 세계 각국의 국기들이 게양되어 휘날린다. 야자수와 함께 매우 잘 조성되어 근엄한 풍경이다. 그가 얼마나 남미에서 추앙받는 인물인지 알게하는 대목이다. 먼 나라에 와서 위대한 한 인물 시몬 볼리바르에 대하여 잘 몰랐던 역사적 지식을 배우고 감에 참으로 기쁘고, 뜻깊은 보람된 여정이다.
* 콜롬비아 시에라네바다 산맥
볼리바르 농장에 올 때 보았던 산맥이다.지금 항구로 돌아가며 다시 본다. 멀리 구름 드리운 풍경이 보인다. 산당히 높고 웅장하다. 계속 따라오며 크고 작은 산줄기를 늘인다. 콜롬비아 산타마르타의 시에라네바다는 콜롬비아의 안데스 산맥에서 떨어진 고립된 산맥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맥이다. 그리고 또한 가장 해변에 있는 산맥이다. 시에라네바다 산맥은 해발 5,700m에 달하며 최고봉이 5775m로 매우 높은 산맥이다. 카리브 해안에서 42km 밖에 되지 않는 거리에 있다. 즉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해안 산맥이다. 36개 강의 수원지다. 커피를 재배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생태계의 보고로서 유네스코가 지정한 보전 지역이기도하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저 깊은 시에라네바다 산맥 지역에 1500년 전 고대문명을 이어온 타이로나 원주민이 숨어서 집을 짓고 살았다. 고대 도시 시우다드 페르디다를 깊은 산맥 속에 세우고 400년 동안 은둔하며 살아온 원주민들이다. 지금까지도 저 산맥 속에서 네 그룹으로 나눠서 살고 있다. 그들은 문명으로부터 동떨어져 원시로 살아와서 외부인을 거부한다. 긴 시간 동안 열대림 숲속에 갇혀 있었다. 지금 지나가는 도로변에는 마을도 보이고, 주민들도 보인다. 저 멀리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거룩한 성인처럼 콜롬비아 산타마르타의 모든 것을 감싸는 아름다운 정경이다.
* 콜롬비아 민속공연
항구로 가는 길에 잠시 산타 마르타 리조트에 들러서 해변 공원에서 콜라, 맥주, 물 중 선택한 음료를 마시며 민속공연을 관람했다. 남녀가 쌍을 이뤄 콜롬비아의 전통악기 연주와 함께 민속춤을 춘다. 매우 흥겹고 신나는 빠른 템보의 정열적인 공연이다.
* 콜롬비아 해변 비경
민속 공연장 객석을 지나 뒤로 사니 긴 해안선의 해수욕장과 망망한 바다가 전개된다. 콜롬비아의 웅장한 해변 풍경이 비경이다. 좋은 풍경 속에서 좋은 공연을 감상하고 크루즈 배를 재승선하기 위해 항구로 향했다.
* 콜롬비아 산마을
산에 선인장이 많다. 우리 나라의 소나무처럼 산에 아주 많이 서 있다. 다른 식물들은 말라서 못 자라는데 선인장은 쑥쑥 크게 성장했다. 원주민들이 산언덕에 마을을 이루고 산다. 가난한 모습이다.
* 콜롬비아 산타마르타 노란택시와 오토바이택시
산타마르타 시내에 들어오니 노란 택시와 오토바이가 많다. 오토바이는 택시처럼 다니는 교통수단이다. 노란 택시는 요금이 4달러이고 오토바이는 요금이 1달러다. 오토바이 요금이 싸서 더 인기다. 우리가 탄 버스 주변에도 사람을 태운 오토바이가 많이 몰려온다. 이색 풍경이다.
* 콜롬비아 산타마르타 항구 크루즈배 재승선
크루즈 배에 재승선했다. 주변은 화물을 싣는 거대한 장치들이 분주하다. 우리 크루즈 배 앞에는 화물차가 지나가는 레일도 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바람이 많이 분다. 시내에서도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지금 항구에서도, 배에서도 세차게 분다. 선실에서 시에다네바다 산맥을 조망했다.
* 콜롬비아 산타마르타 12층 크루즈배 뷔페식당 중식
배에 재승선하여 12층 뷔페식당으로 가서 중식을 했다. 식당 곁에 큰 화물선이 있다. 섬과 선인장이 많이 자라는 산이 보인다. 진풍경이다. 창가에서 외국인 노부부와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다. 친절하게도 우리 부부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어둡게 나온다며 이쪽 의자에 앉아서 찍으라고 권하기도 한다. 음식접시를 다시 맞은편으로 옮기고 밝은 조명으로 잘 찍었다.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다. 국가가 달라도 정은 하나로 이어져 훈훈한 정경이었다. 매일 먹던 풍성한 식단을 사진에 담아간다. 두고두고 이번 여행이, 그리고 오늘이 그리우리라. 그때마다 볼 것이다. 이 노부부를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볼 것이다. 후일에도 뜨거운 가슴으로 사진을 보며 노년의 서러운 그늘을 지울 것이다.
* 콜롬비아 산타마르타 항구 풍경
우리 방 앞에는 항구의 여러 가지 장치와 설비들이 놓여 있다. 화물도 가득 쌓아둔 풍경이 보인다. 바다도, 산맥도 함께 우우러져 비경이다. 중식 후 수영복을 입고 수영장에 가서 놀았다. 온탕 마시지, 수영장에 들어가서 물놀이 등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시 선실로 와서는 머리감고 목욕하고 두 아들에게 카톡방에 사진 2장과 안부 글을 보내주었다. 이렇게 매을 교신하며 부모자식 간의 깊은 정을 나눈다. 그리고 부모의 소식, 안전하게 여행 중임을, 건강함 등을 전해주니 두 아들이 매우 흐뭇해 하고 좋아한다. 건강하게 두 분이 여행하시는 모습을 사진으로 보니 무척 기쁘고 좋단다. 이것도 이번 여행을 매우 뜻깊게 하는 것 중의 하나다. 참으로 보람되고 소중한 여정이다.
* 콜롬비아 산타마르타 항구 출항
크루즈 배가 출항한다. 시에라네바다 산맥 등 항구 풍경이 비경이다. 배가 망망대해로 질주한다. 네덜란드 연방에서 독립한 인구 10만 명의 작은 나라 아루바로 달려간다.
2019년 2월 9일 토요일 아루바
* 아루바 오랑예스타드 항구 진입
아루바 오랑예스타드의 일출을 향해 배가 항구로 진입한다. 아루바의 평평한 땅이 배를 허락하여 진입을 이끈다. 배는 점점 해를 향해 달려가고 도시는 배를 끌어 안으며 보듬는다. 원시의 구름은 두둥실 솟구쳐 올라 더욱 장엄한 풍경이다.
* 아루바 오랑예스타드 항구 기항
코발트빛 바다와 붉은 기와지붕 물결의 평평한 도시가 비경이다. 청청한 하늘과 공기가 모든 색상을 투명하게 투시한다. 원시의 빛이다. 경관이 대단한 나라다. 조식 후 13층 갑판에 올라가서 항구를 조망했다. 아루바는 중앙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 북남미에 둘러싸인 카리브해 남부에 위치한 32㎞ 길이의 섬으로 면적은 193km2, 인구는 2014년 기준 11만 명 정도다. 그 중 외국에서 태어난 비율이 34%에 이고, 유럽계 백인과 카리브 아메리카 원주민 간의 혼혈이 전체 주민의 80% 정도를 차지한다. 네덜란드 왕국 내 자치 국가의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수도는 오랑예스타드이다. 한국보다 13시간 늦다. 쿠라사오 섬 서쪽으로 약 80㎞, 베네수엘라 해안 북쪽으로 24㎞ 떨어져 있다. 대체로 평평한 지형으로 자마노타 산이 가장 높으며, 토착민은 아라와크 인디언이었다. 1634년부터 정착한 네덜란드인들이 1816년 소유권을 확보했다. 나폴레옹 전쟁 10년 동안을 제외하고 계속 네덜란드의 통치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54년 네덜란드령 앤틸리스 제도에 속하였지만, 1986년 네덜란드령 앤틸리스에서 분리 탈퇴하여 10년 후 완전 독립했고, 네덜란드 왕국 내의 독립적인 자치 국가가 되었다. 인근의 보네르, 퀴라소와 함께 세 섬의 머리글자를 따서 ABC 제도로 불렸다. 1996년에 완전 독립이 예정돼 있었지만, 1990년대 경제부진 등의 이유로 아루바가 반대하여 무기한 연기된 바 있다. 주민은 절반 이상이 인디언 혈통이며 유럽 정착민의 후손과 그외 이주자들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공용어는 네덜란드어가 6%이나, 실제로는 토착 에스파냐어, 네덜란드어, 영어, 아프리카 방언, 포르투갈어 등의 혼합어인 파피아멘토가 69%로 일상어로 사용된다. 이외에 영어와 에스파냐어도 많이 쓰인다. 네덜란드어와 함께 ABC 제도에서 사용하는 언어인 파피아멘토어는 지난 2003년 네덜란드어에 이어 공용어가 되었다.하지만 의회, 행정부, 사법부 등의 문서에는 네덜란드어만 사용한다. 알로에를 수출하며, 심해 항구와 국제공항의 건설로 관광업이 발달했다. 공식 화폐는 아루바 길더로 단위는 플로린이다. 제1의 산업은 관광업이며, 남부의 신트니콜라스에 베네수엘라에서 생산되는 원유를 정제하기 위한 대규모 정유 시설이 들어서 있다. 하얀 백사장과 뛰어난 절경으로 연간 15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다른 카리브해 섬들과 달리 따뜻하고 건조한 기후이며, 계절에 따른 기온 차이가 거의 없다. 오늘 아루바에서는 카시바리 암반 성상, 네추럴 브리지, 캘리포니아 등대 등을 탐방한다. 아루바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보고 담아갈 것이다.
* 아루바 오랑예스타드 시가지
오늘은 버스를 타고 암반지역과 내추럴 브리지가 있는 지역으로 먼저이동한다. 그리고 네덜란드 양식의 건물들이 있는 아루바의 수도 오랑예스타드Oranjestad 시가지를 지나가며 본다. 그리고 아루바의 자연경관을 감상하고 카시바리 암반 성상, 캘리포니아 등대, 내추럴 브리지 등을 탐방한다. 낮기온은 26도 정도로 여행하기 알맞은 온도다. 현지 운전기사가 가이드도 병행해서 한다. 한국 인솔자 김실장이 곁에서 통역한다. 우리 일행만 승차해서 그렇게 진행도는 것이다. 버스가 참 깨끗하고 좋다. 지그까지 중에서 가장 좋다. 항구 주변이 수심 10Km 정도로 낮다. 산호환초 때문이다. 큰 배는 정박하지 못한다. 아루바 최대 길이가 30Km다. 가로는 15Km다. 그래서 바람이 한쪽으로만 분다. 제주도의 1/10 크기인 나라다. 40분이면 아루바 아래 지역에서 윗쪽 지역까지 모두 드라이브가 가능하다. 섬 35%는 미개발 지역이다. 섬나라로 관광수입이 1위 국가라서 자연 그대로 보존시키려는 정책이다. 그래서 개발을 최소화하고 자연을 보호한다. 현재 인구는 11만 4천 명이다. 항구 주변이 메인 쇼핑거리다. 지금 그 거리를 지나간다. 정부기관 건물도 지난다. 'l 하트마크 ARUBA'라는 문구도 있다. 시계탑도 있는데 그 옛날 당시의 시계 그대로다. 아루바는 네덜란드령 왕국 중 하나다. 자치령 국가다. 대부분이 오랑예스타드에 거주하고 남쪽 지역에 약간 거주한다. 오랑예스타드는 '오렌지시티'라는 뜻이다. 네덜란드 왕이 지은 이름이다. 이곳은 홀스스베이 즉 '말들의 만'이란 뜻이다. 옛날에 수심이 낮아서 배는 바다 가운데 놓고 실어온 말들은 헤엄쳐서 아루바에 들어왔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랑예스타드는 카리브해의 소 앤틸리스제도 남서부의 섬인 아루바의 수도이며, 카리브해의 섬들 가운데 가장 서쪽에 있는 아루바섬에서도 제일 서쪽에 위치해 있는 도시다. 1805년부터 10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네덜란드의 영토로서, 현재까지도 네덜란드령으로 남아 있다. 17세기 말 이래 네덜란드의 식민지로 있었기 때문에 짙은 푸른색 계통의 네덜란드식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토양이 척박해 농업에는 적당하지 않지만, 약간의 농사와 고기잡이도 이루어지고 있다. 넓은 해안을 따라 펼쳐진 부두에서는 갓 잡은 생선과 농산물을 배 위에서 직접 판매하기도 한다. 특히 도시의 중심부인 다운타운 주위에는 쇼핑 시설이 밀집해 있어 아루바섬에서 가장 활력이 넘치는 쇼핑 중심지이다. 주민 대부분은 관광업에 종사하며, 관광수입이 주된 소득원이다. 한편 아루바는 1986년 네덜란드령 앤틸리스 연방에서 탈퇴하여 독립적고 자치적인 네덜란드 왕국의 자치국이 되었다. 1996년 예정되었던 완전 독립은 1990년 경제부진 등의 이유로 아루바 스스로 반대하여 무기한 연기되었다. 현재 네덜란드가 감독하는 방위와 외교 문제 외에 사법, 세입, 통화 등은 아루바 정부가 관장한다. 하얀 백사장과 뛰어난 절경 및 다양한 레저시설로 전세계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연간 150만 관광객이 방문하며 그 중 75%가 미국인이다.
아루바 공항도 지나간다. 아루바 공항은 태양광 14만개로 유지한다. 자연에서 최대한 에너지를 얻는다. 2009년에 최초로 풍력발전기를 설치했다. 이것은 배가 떠나갈 때 산산에 있는 6개를 보았다. 태양광은 주거지에도 설치한다. 에너지의 5%를 얻는다. 처음 들어본 나라 아루바가 참으로 신기하여서 모든 것에 대하여 큰 호기심으로 다가온다. 섬나라인데도 도시가 어느 육지 도시 못지않게 발달된 정경이다.
* 아루바 암반지역 바위 전망대
카시바라 암반 지역에 들어왔다. 큰 바윗덩이들이 곳곳에 많다. 어느 집 바로 앞에도 큰 바위가 놓여 있다. 처치 곤란인 바위다. 가끔 바위가 움직이기도한다. 암반지역 바위 전망대에 도착했다. 아주 큰 바위가 우뚝 솟구쳐 올라 있다. 주변에는 선인장이 쭉쭉 하늘 높이 뻗어오른다.
* 바위 전망대에서 본 아루바
바위 전망대에 올라갔다. 큰 바위에 가파른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바람이 심하게 분다. 여기서 아래를 보면 아루바 섬의 1/2이 보인다. 화산으로 생긴 산도 아루바의 평평한 영토 위에 오롯이 솟아 있다. 아루바 주택들이 아름답게 다 보인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간신히 오르고 내려왔다. 크고 작은 바위 군락이 비경이다. 바위 곁에서 큰 몸집으로 자라는 선인장도 비경이다. 신비롭다. 바위 전망대 앞에는 기념품 가게도 있다. 그 가게 안에서는 와이파이도 무료로 제공 된다. 아루바의 독특한 자연이 빚어놓은 바위 전망대를 보고 다음 탐방지로 떠났다.
* 아루바 들녘 선인장
선인장이 들녘에 솟구쳐 오른다. 몸통도 크고 키도 크다. 다른 식물보다 훨씬 튼튼하고 늠름한 식물이다. 들녘 뿐만 아니라 집의 입구에 정원수처럼 심어 놓았다. 물이 적은 아루바에서 선인장은 기를 펴고 잘 자라고 있다. 아주 신비로운 풍경이다.
* 아루바 마을과 주택의 선인장
들녘 뿐만 아니라 집의 입구에 정원수처럼 심어 놓았다. 도로변에는 가로수 격인 선인장들이 줄을 서 있다. 물이 적은 아루바에서 선인장은 기를 펴고 잘 자라고 있다. 아주 신비로운 풍경이다.
* 아루바 건조한 들녘
버스가 내추럴 브리지로 가는데 온통 먼지 바람이 날린다. 건조한 들녘의 비포장 도로를 달리기 때문이다. 현지 가이드는 이것이 아루바의 전형적인 들녘의 자연풍경이란다. 연평균기온은 27℃이며 소앤틸리스 제도로 불어오는 북동무역풍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위치에 자리잡고 있어 아루바의 기후가 매우 건조하다. 1년에 약 430㎜ 정도 내리는 비는 댐이나 지붕에 있는 웅덩이에 저장되며, 식수는 대부분 바닷물에서 염분을 제거하여 사용한다. 이 섬의 증류 공장은 세계 최대규모로 손꼽힌다. 아루바 섬은 카리브 해에서 발생하는 허리케인의 일반경로에서 벗어나 있다. 아루바는 베네수엘라에서 60Km의 거리에 있다. 높은 건물도 없다. 단층집으로 넓은 땅에 넓은 집을 짓고 산다. 농사는 못 짓는다. 물이 없고 토양이 안 맞아서 그렇다. 모두 수입한다. 집 근처에 망고 등 과수나무를 약간 길러서 농작물과 과일 등을 자급자족 하는 정도다. 산도, 들도 목마른 갈증이 서려 있는 풍경이다.
* 아루바 내추럴 브리지
바다를 따라 달리며 현무암의 검은 돌들이 즐비한 풍경을 보았다. 곧 내추럴 브리지가 나왔다. 자연 다리는 둑의 아랫 부분이 바닷물로 파여 작은 구멍을 내고 형성된 아치형 다리다. 지금도 물이 그 구멍으로 드나든다. 융기로 생긴 자연 다리다. 바람과 지형이 만든 다리다. 2015년에 다리 일부가 무너졌다. 붉은 줄이 쳐져 있는 곳은 가면 안 된다. 다시 붕괴될 수 있어 위험하다. 절대로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 바닷물이 다리 아래로 드나든다. 신기하다. 파도와 물을 조심해야 된다. 다리 위를 거닐어 보았다. 언제 또 무너질 모른다는 불안이 있지만 바다 위에 붕 뜬 자연다리를 밟아 본다는 독특한 체험에 그저 기쁘기만 하다. 바람이 심하게 바다 위를 달려와 몰아친다. 바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데 허락하지 않는다. 산을 오르내리는 관광 자동차들도 보인다. 한동안 머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다와 산, 내추럴 브리지가 이루는 기막힌 명소다.
자연다리에서 나올 때 바닷가를 지나는데 형지 가이드가 아루바의 금에 대하여 말해준다. 1824년에 금을 발견했다 그때 여기저기서 금을 캐러 들어왔다. 그때는 네덜란드 지배시절이어서 네덜란드에서 금 캐는 회사가 들어오면서 금을 보호했다. 일정량을 캐서 정부에 주고 가져 가도록 허락했다. 금이 진흙 사이에 붙어 있어서 채취가 힘들었다. 해안가에 금을 선별하는 공장을 지었다. 금이 박힌 진흙을 깨서 바람에 흙을 날려서 금을 선별했다. 저 멀리 바닷가에 지금도 그 당시에 지었었던 공장의 흔적이 있다고 보란다. 아련하게 보였다. 항구 주변에 공장을 건설하여 금을 이동시켰다. 1916년에 금 채취가 중단 되었다.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어서 그랬다. 1824년부터 1916년까지 총 300만 파운드의 금을 발굴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아루바 섬의 경제는 베네수엘라에서 보내는 석유를 가공하고 저장하는 데 전적으로 의존했다. 그러나 섬 주민의 상당수를 수용하던 일터로서 세계 최대로 손꼽히던 라고 정유공장이 1985년 문을 닫았고, 1980년대말에는 유조선, 선박수리 및 저장시설 등과 같은 서비스 시설들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19세기에 잠깐 동안 금이 채굴되었던 것이다. 재정정책의 일환으로 정부가 적극 지원하고 있는 관광업은 순항정이 정박할 수 있는 심해 항구와 국제 공항의 건설로 발달이 촉진되었다. 길게 펼쳐진 백사장과 깨끗한 물을 갖추고 있어 온천욕·보트를 즐기는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좋다.구와 국제공항의 건설로 관광업이 발달했다. 이 섬의 증류공장은 세계 최대규모로 손꼽힌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아루바에 대하여 맣은 정보를 얻으니 참 좋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아루바에 대하여 맣은 정보를 얻으니 참 좋다.
* 아루바 화폐 그림 동물들
현지 가이드는 아루바 화폐를 가지고 와서 돌려가며 보라고 한다. 앞에서부터 뒤로 돌려 모두가 자세히 살펴 보았다. 화폐에 개구리, 뱀 등의 신비로운 동물들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특히 아루바에서만 사는 뱀은 독뱀으로 독이 있어 물리면 죽는단다. 원래 네덜란드가 6개 섬을 관할하던 그때는 아루바에 중앙정부를 세웠다. 그리고 그 당시에은 네덜란드 화폐를 사용했다. 1986년에 아루바가 독립하면서 지금은 아루바 단독 화폐인 플로린을 사용한다. 1달러는 1.75페소다. 고정환율이다. 이렇게 정성껏 아루바를 알려주는 현지인 남자 기사 분에게 고마웠다.
* 아루바 알로에 농장으로 가며 본 시가지
아루바는 알로에를 많이 재배한다. 지금 알로에 농장으로 탐방 간다. 가면서 아루바의 시가지를 조망한다.깨끗하고 세련된 주택들이 아름답다. 아루바에 최초로 온 사람은 베네수엘라 원주민이었다. 다음은 스페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섬이 매력이 없어서 떠났다. 원주민만 잡아다가 노예로 팔고 스페인 사람들은 떠났다. 그 후 네덜란드인이 들어왔다. 지금은 라틴계인들이 많이 거주한다.
1942년에 미국이 정유회사를 설립했다. 아루바는 그떄부터 영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우리 현지가이드도 그때 이곳에 온 미국 할아버지의 자손이란다. 외부 이주인들도 아루바인으로 인정해 주었다. 1935년 관광지로 선포 되었다. 그때 도미니카 공화국 사람들을 관광인부로 들여왔다. 아루바는 4가지 언어를 사용한다. 네덜란드어(주로 학교, 공공기관에서),스페인어, 영어, 파피아언어(ABC제도 공용어)다. 파피아는 '토킹talking 즉 말하다'란 뜻이다. 이것은 아프리카 노예들이 만든 언어다. 포르투갈인들이 데리고 온 아프리카인들이다. 아루바에 대하여 참으로 많은 것을 보고 배움에 매우 뜻깊고 보람된 여정이다.
* 아루바 알로에 농장 박물관
알로에 농장에 오니 드넓은 알로에 밭이 시원하게 전개된다. 직원이 나무 그늘에서 알로에에 대한 여러가지 즙 채취 과정 등을 설명해준다. 심은지 9개월마다 액을 채취한단다. 아루바의 수입원 1위는 관광업으로 82%를 차지한다. 60%의 주민들이 관광업에 종사한다. 서비스직 등이다. 월급은 1천 불 정도, 한화로 1백만 원 정도다. 2위는 정유다. 석유가 나는 것이 아니고 베네수엘라에서 석유를 들여와 정유해서 수입을 얻는다. 3위는 알로에다. 예전에는 아루바의 땅 3/4이 알로에로 뒤덮였다. 식용 등으로 사용한다. 대농장 경제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흑인 노예는 유입되지 않았다. 알로에 액 채취 설비와 제품제조 설비 등이 놓인 전시장을 보고 복도를 따라 가니 기념품을 판매하는 상가가 있다. 알로에의 어린 묘목이 벽면에 전시된 정경이 신비로워워 자꾸 바라보았다. 알로에 박물관도 갔다. 2층까지 있다. 제조과정, 제품들을전시했다. 모종들도 있다. 알로에 액을 조려서 말린 까만 덩이도 있다. 그것을 다시 녹여서 사용한단다. 먼 나라에 와서 알로에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알로에 농장을 떠나 나오는데 어느 집 우리에 젖소 2마리가 있다. 아루바에 있는 유일한 소란다. 그래서 저 소 2마리는 절대로 잡아 먹지 않는단다. 이제 등대로 향해 이동한다.
* 아루바 오폐수 저수지
저수지 부자 동네를 지나자 호텔존을 지나자 나무와 숲 사이로 물이 가물가물 보인다. 오폐수를 정화해서 재사용하는 물을 모아둔 저수지다. 물이 있으니 식물도 울창하고 새들도 있다. 예전에는 바닷물 담수를 식수로 사용했다. 지금도 바닷물을 정제해서 식수로 사용한다. 연평균 기온이 28도로 좋은 기후다. 그러나 습도는 54%로 건조한 편이다. 강수량은 40Cm 정도로 부족한 양이다. 그래서 비 올 때 물을 받아서 가두어 두었다가 사용한다. 기후 변화로 저수지가 마르기도 한다. 물에 대한 갈증이 서린 안쓰러운 풍경이다.
* 아루바 호텔 지역
이제 등대로 간다. 도로변에 호텔이 많이 있다. 아루바의 호텔 지역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호텔도 보인다. 그 만큼 아루바에 관광객이 많이 온다는 대목이다. 호텔의 객실만 9천 개다. 금년 2019년 1월부터 호텔을 더 못짓게 한다. 콘도와 리조트도 많다. 콘도나 리조트는 소유주가 사는 게 아니고 렌트 줘서 돈을 번다. 1년에 2개월 정도만 주인이 와서 산다. 현지 가이드 말로는 하루에 1만 6천 명의 관광객이 온단다. 좀 과장이 아닐까 싶은데 가장 많은 날을 말해준 것이 아닌가 싶다. 크루즈 배나 또는 비행기를 타고 온다. 식당에는 400개 이상의 식당이 있다. 아루바는 카리브해 국가들 중에서 물가가 비싸다. 야자수와 함께 호텔 건물들이 멋진 풍경으로 뜬다.
* 아루바 해변 비경
해변도로를 따라 가는데 나무 사이로 보이는 바다가 기막힌 비경이다. 코발트빛 바다와 탱탱한 하늘이 하나로 이어지고, 그 사이 스카이 다이버들이 공중을 날고, 간간이 하얀 모래사장도 보이고 모두 아루바 절경의 자연 풍광이다.
* 아루바 해변 캘리포니아 등대
아루바의 건조한 들녘을 달려서 해변의 등대에 왔다. 저 바다에 1894년 네덜란드 배 캘리포니아호가 침몰했다. 배 이름이 캘리포니아일뿐 미국의 캘리포니아와는 상관이 없다. 그때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빌며 이 등대를 세웠다. 침몰지가 멀리 아직도 그대로 있다. 하얀 등대가 우뚝 솟아 있다. 등대는 상당히 높아서 아득하다. 돈을 지불하고 등대로 올라가서 조망하기도 한다. 어느 곳에서 보든 이곳에서는 사방이 열려있어 아루바를 조망하기에 충분하다.
* 아루바 등대 주변 해변풍경
등대에서 조금 내려오면 아래에는 산호해변이 비경이다. 이곳 아루바의 바다는 산호환초로 육지에서 가까운 바다는 에메랄드 빛이고 조금 먼 바다는 수심이 깊어서 코발트빛 바다다. 해안가를 따라서 백사장이 이어진다. 저 멀리 도시가 보인다. 도마뱀도 나무 숲으로 기어간다. 등대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다. 아루바의 큰 명소라서 그렇다. 옛 식민지 시절의 유적인데 그대로 보존하여서 오늘날 세계인의 걸음을 불러 모은다. 건조한 들녘에는 키 작은 가시나무들이 엉키어 바람 부는대로 비스듬히 누워 자란다. 도시와 만나는 바다가 해안선을 그리며 명화로 뜬다.
* 아루바 해수욕장 비경
등대에서 항구로 귀환하는 중에 잠시 해수욕장에 들렀다. 도로변에서 보던 해변 비경을 눈앞에서 본다. 아루바 해수욕장은 화이트 비치로 유명한 곳이다. 산호환초로 에메랄드빛 바다와 산호부스러기들로 하얀 모래가 만난 해수욕장은 아름다운 절경이다. 청청한 물빛과 바람과 파도와 햇살 등으로 풍만한 바다가 세계인을 보듬고 출렁인다. 화이트 비치로 유명하다는 아루바에 대하여 실감나게 조명해주는 순간이다. 아루바는 관광량보다 관광질 중심의 관광지다. 지금 저 바다와 해변이 증명해주고 있다. 어느 곳에 서서 바라보아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명화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역광으로 사진 찍기에는 약간 불편한데 그것도 아루바의 진한 그리움으로 남을 낭만이다. 나는 이런 바다를 보면 정지된 시간 속에서 소녀가 된다. 세월을 증발시킨 지금 이 순간 마음껏 훨훨 날아 내 안의 기쁜 함성이 포효한다. 두고두고 잊지 않으리라, 오늘의 이 기막힌 비경을. 후일 서러운 노년의 뜨락에 아루바의 이 명화를 걸어 그늘을 지우리라. 이것이 세계여행에서 얻는 최고의 선물이다. 떠나기 아쉬운 해변을 이제 갈 시간이다. 남편은 어서 오라고 부르는데 걸음이 해변을 나서지 않는다. 가자, 가자 달래어 하얀 모래사장을 바람에게 보듬으라 남기고 나왔다.
* 아루바 오랑예스타드 항구주변 상가
아루바의 다운타운은 오랑예스타드 항구 주변이다. 이곳에는 주로 상가들이 많다. 항구에 정박한 크루즈 배의 앞까지도 상가가 들어와 있다. 고운 풍경이다.
* 아루바 오랑예스타드 항구 크루즈배 재승선
항구에는 다른 크루즈 배 3척도 들어와 있다. 노르웨이지안 젬호, 우리의 크루즈 배에 승선하였다. 중식으로 뷔페식당에 가서 아시안 누들 국수를 먹었다. 가끔씩 아시아에서 온 여행객을 위해 이런 식단을 제공한다. 고마웠다. 중식 후 수영장에 가서 남편과 온몸을 담그고 온탕찜질로 마사지를 했다. 피로가 다 풀린다. 깊은 수영장에도 들어가 남편과 손잡고 걸으며, 수영하며 운동했다. 모두 아루바에서의 행복한 일정이다. 아쉽지만 이제 곧 아루바 항구를 출항한다.
* 아루바 오랑예스타드 항구 비경
아루바의 오랑예스타드 항구는 대단히 아름다운 풍경의 항구다. 바다는 산호환초로 에메랄드 띠를 두르며 비경이고, 항구 주변은 크고 작은 배들과 고운 건물들로 비경이고, 낮으막한 영토에는 붉은 지붕의 주택들이 초록 식물 물결 속에서 비경이다. 대서양 카리브해의 작은 나라로 이름도 몰랐었는데 이번 여행으로 아주 아름답고 훌륭한 자연환경을 지닌 나라임을 알았다. 참으로 기쁘고 보람되고 흐뭇한 여정이다.
* 아루바 공항에 오는 비행기
선실 발코니에서 보니 아루바 공항으로 오는 비행기가 많다. 크루즈 배 13층 갑판에 올라가서 잠시 조망했다. 갑판에는 덥고, 심한 바람으로 사람들이 없다. 나도 계속 갑판에 있지 않고 배 안에서 하늘을 보며 비행기가 올 때 나가서 보았다. 저 멀리 비행기가 하늘을 가르고 날아온다. 하나의 비행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조금 후에 또 날아온다. 아루바에 오는 관광객들의 숫자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투명한 하늘을 날아 공항으로 착륙하는 비행기를 눈앞에서 보고 있다. 배에 가려서 완전 착지하는 모습은 안 보이지만 아루바 공항을 향해 바다 위를 저공비행하는 비행기가 낭만을 더해준다.
* 아루바 오랑예스타드 항구 출항
항구가 이토록 아름다운데 남겨두고 떠나가야 할 아쉬운 시간이다. 우리 배 곁에는 다른 크루즈 배가 정박해 있다. 서로 손을 흔들며 이별을 고하고 지나간다. 배에서 보니 아루바가 상당히 크다. 산줄가 이어지고, 화산도 오롯하고, 짐을 싣는 화물선의 항구도 크고, 공항, 정유회사 등 한동안 항구를 조망했다. 오래도록 아루바가 눈앞에 비경을 선사한다. 남쪽에는 정유회사도 보인다. 그리고 시가지도 아련히 보인다. 남쪽에 약간의 아루바 주민들이 모여 산다는 현지 가이드의 말이 실감난다. 화산 하나를 제외하고는 평평한 아루바 영토다. 바다에 고즈넉히 앉은 아루바가 위대한 품자락으로 바다를 품고 있다. 안녕을 슬프게 고하면 다시 만나질까. 아니 웃으며 안녕하면 다시 만나질까. 아주 처연하게 마음을 다스리지만 아루바를 남겨두고 떠나가는 배가 야속하다. 그래, 다음 퀴라소 국가도 아름다우리라. 정녕 가야하는 여정을 어찌하겠는가. 두고두고 오늘을 기억할게. 아루바에게 굳은 약속을 하고 저 멀리 아루바가 사라질 때까지 보는 것으로 아름다운 여정을 마무리했다.
저녁식사는 7층의 오키즈 가든 식당에 가서 해물국수, 오징어 튀김, 만두, 쇠고기 볶음, 과일 샐러드로 주문하여 먹었다. 참으로 맛있는 메뉴다. 저넉공연은 영혼을 부르는 노래다. 남자 가수 혼자 1시간을 공연한다. 악단과 함께 온몸으로 부른다. 지금까지 본 가수 중에서 가장 잘 부른다. 객석에서는 열광적인 박수로 화답한다. 멋진 춤도 춘다. 한국의 김범수 격의 가수다. 혹은 박진역 격이기도 하다. 매혹적인 남자 가수다. 객석에서 간간이 여성들의 열광적인 함성이 극장 공간을 흔든다. 나도 반해버린 남자 가수다. 노래와 무대매너와 인물과 태도, 춤까지 완벽한 저 남자를 어느 누가 좋아하지 않겠는가. 아들 같기도 하고 연인 같기도 한 저 남자를, 저 고운 모습을 가슴에 품고 가리라. 극장 안에서 무대에 오른 공연자를 사진에 담아가지 못함이 못내 아쉽지만 먼 후일까지 저 남자 가수를 기억하리라. 젊음이 그리울 때 저 당당하고 자신감있게 노래와 춤으로 매료시킨 저 남자를 회억하며 행복하리라. 이것 또한 크루 여행만이 주는 지독한 매력이다.
2019년 2월 10일 일요일 퀴라소
* 퀴라소 발렘스타드 항구 기항
퀴라소 발렘스타드 항구에 배가 기항한다. 육지 위에 아주 오롯하게 소구쳐 오른 다리가 보인다. 또한 바다 위에도 길게 다리가 놓여 있다. 배가 바로 뭍과 연결되게 정박하는 것이 아니고 수심 관계로 땅 가까이 오지 않았다. 저 바다 위 다리를 타고 항구로 나가야 한다. 13층 갑판에 올라가서 항구 주변을 살펴보았다. 오른쪽은 망망대해다. 왼쪽 육지쪽으로 전개되는 쿠라시오가 비경이다. 산이 바람결처럼 줄기가 뻗어 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모두 고운 풍경이다. 7층 대극장에서 하선 모임을 갖는다. 시간이 좀 여유 있어서 7층 복도에 나가서 보니 배가 완전히 정박했다. 다른 배도 들어와 있다. 항구 주변 풍경이 비경이다. 한국과 시차는 -13시간이다.
퀴라소는 카리브 해 남부에 위치한 나라로, 공식 명칭은 퀴라소 국가(Land Curaçao)이다. 1634년부터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네덜란드령 앤틸리스에 속하였다가 2010년 네덜란드 왕국 내의 독립적인 자치 국가로 분리되었다. 2010년 네덜란드령 안틸레스가 해체되면서 주민 뜻에 따라 네덜란드 왕국을 구성하는 자치령이 된 것이다. 같은 네덜란드령 앤틸리스에 속했던 인근의 아루바, 보나이러와 함께 세 섬의 머리글자를 따서 ABC 제도로도 불렸다. 유럽계 백인과 아프리카계 흑인의 혼혈이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다양한 민족이 같이 거주하고 있어 복합적인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네덜란드어, 영어와 함께 ABC 제도에서 사용하는 언어인 파피아멘토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다. 베네수엘라에서 북쪽으로 약 60km 떨어진 카리브 해에 있는 네덜란드령에 속한 섬 중의 하나로 소(小)앤틸리스 제도를 이룬다. 퀴라소는 쿠라사오섬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서인도제도 남부의 자치령 중 하나다. 경기도 평택시 정도의 면적이다. 인구는 16만명 정도다. 빌렘스타드(Willemstad, Curacao)는 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환초와 자연지형이 아름다운 곳이다. 환초와 자연 지형으로 보호되는 천연 심해항을 갖추고 있어 17세기부터 중계 무역항 으로 번성하였으며, 특히 노예 무역이 발달하였다. 1920년대에 베네수엘라에서 생산되는 원유를 정제하기 위한 대규모 정유 시설이 들어서면서, 현재는 정유업과 관광업이 주요 산업을 이루고 있다. 수도는 빌렘스타트로, 네덜란드 식민 시대의 건축 물과 도시 구조가 잘 보존되어 있어 1997년 유네스코(UNESCO)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퀴라소는 식민 시대 네덜란드에 서인도 지역에서 가장 훌륭한 천연항이라는 특별한 이점을 제공하였다. 수도인 빌렘스타트가 위치한 신트안나 만에는 산호 군락으로 보호되는 닫힌 형태의 천연 심해항이 있어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의 무역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특히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가장 번성하였던 1660∼1700년까지 퀴라소는 노예 무역의 중심지로서 확고한 지위를 누렸다. 아프리카에서 카리브 해 지역으로 온 노예의 절반은 퀴라소의 노예 시장에서 거래가 되었을 정도였다. 1675년에는 자유무역항이 되면서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에 개방되어 남아프리카 플랜테이션에서 오는 생산물과 식품의 저장고로 기능하면서 경제적인 번영을 이루었다. 1807년부터 1815년까지 영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1816년 네덜란드에 반환된 이후로 계속 네덜란드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19세기에 노예 제도가 폐지되자 노예 무역이 중심을 이루던 퀴라소의 경제는 점차 쇠퇴하였다. 무역항 기능이 약화되면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전환한 알로에와 오렌지 농장만이 유일하게 경제를 지탱하는 힘겨운 시기를 보냈다. 이후 1920년대 들어 네덜란드와 영국의 다국적 기업이 베네수엘라의 유전에서 생산되는 원유를 정제하기 위한 정유 시설과 원유 환적 시설을 건설하면서 경제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경제적인 번영과 네덜란드의 정치적 안정이 더해지면서 퀴라소는 카리브 해 일대의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로 성장하였고, 일자리를 찾아 전 세계의 다양한 민족들이 이주해 오면서 50여 개 이상의 민족이 섞여 있는 인종의 용광로가 되었다. 먼 나라 퀴라소에서 오늘 많은 것을 보고 배울 것이다.
* 퀴라소 발렘스타드 항구 하선
배에서 하선하여 바다 위 다리를 걸어 나갔다. 우리 크루즈 배가 우람하게 앉아 있다. 배가 전체로 다 보인다. 외형이 참으로 아름다운 배다. 우리 부부의 선실은 9528호실이다. 즉 9층 배의 앞쪽에서 28호실을 양편으로 나눈 14번 째 방이 우리 방이다. 9층은 발코니가 좀 어둡게 보이는 맨 아래에서 두번째 단의 창들이 보이는 곳이다. 세어보니 우리 부부의 방이 바로 눈앞에서 보인다. 저 발코니에서 바다를 조망하고 저 안의 방에서 편안한 휴식과 수면을 취하며 행복한 여정을 엮고 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가. 오늘의 이 행복을 소중하게 담아간다. 배가 보이는 곳에 주차장이 있다. 버스가 들어와 있고 우리들의 현지 여자 가이드와 미팅했다. 버스는 외국인과 함께 타는 대형버스다. 버스를 타고 시가지로 향했다.
* 퀴라소 발렘스타드 시가지 풍경
오늘 퀴라소에서는 서쪽 지역을 먼저 탐방한 후 동쪽 푼다 지역을 탐방한다. 하토 동굴로 가는데 발렘스타드 시가지를 거쳐서 간다. 건물 색상이 매우 화사하고 아름답다. 건물들은 처음에는 흰색으로 칠했는데 네덜란드 왕이 머리가 아파서 건물들의 흰색 때문이라고 생각되어 색상을 다시 곱게 칠했단다. 그후 배들이 저 건물을 보고 이곳 퀴라소에 들어온단다. 네달란드 암스텔담의 건물들과 같은 풍의 구조이며 같은 풍의 색상이다. 또한 물가의 길게 늘어선 건물들 풍경이 암스텔담과 똑갇다. 외벽을 반드시 2가지 이상으로 칠한다. 붕 떠서 움직이는 엠마 다리도 지나간다. 나중에 자세히 볼 것이란다. 사무실, 호텔지구를 지난다. 퀴라소는 길이가 61Km다. 베네수엘라에서는 64Km 거리다. 제주도의 1/4 크기다. 인구는 16만 명이다. 100여개 국적지의 사람들이 거주한다. 다민족 국가다. 네덜란드어, 파피아민트어, 영어를 사용한다. 1634년에 네덜란드가 들어와 아루바, 퀴라소, 보네르 이 ABC 세 나라를 통치했다. 퀴라소 사람들은 네덜란드 여권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 1달러는 퀴라소 화폐로 1.75 플로리다. 퀴라소 화폐를 사용한다. 지금까지는 현지화를 사용하는데 며칠 후 US 달러를 사용할지, 현지화를 사용할지 투표할 예정이다. 아루바와 같이 네덜란드 왕국 중 하나다. 자치령으로 다른 섬 1개가 또 있다. 그래서 네덜란드 본토와 이곳 섬들을 합해서 네덜란드가 된다. 물이 전혀 없다. 비도 안 온다. 바닷물을 사용한다. 물정제 기술이 뛰어난다. 생수가 참 좋다. 현지 여자 가이드는 한번사 먹어 보란다. 가장 큰 쇼핑몰도 지나간다. 도시가 상당히 깨끗하고 하고 아름답다.
* 퀴라소 발렘스타드 닭 벽화
도시의 어느 집 벽면 한 면 전체에 큰 닭이 그려져 있다.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다. 그런데 발가벗은 닭이다. 모든 것을 다 빼고 나면 남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뜻으로 그린 그림이다. 깊은 뜻을 시사하는 그림이다.
* 퀴라소 독나무 열매
현지 여자 가이드는 여러 가지 설명 중에서 아주 신기한 이야기를 한다. 다니다가 사과를 닮은 작은 열매가 달린 나무를 보면 절대로 만지지 말란다. 독이 있어서 열매도 만지면 안 된단다. 그럼 그런 나쁜 나무를 왜 베어내지 않고 그냥 두냐고, 우리가 물었더니 이 나무를 없애지 않는 이유는 자연으로 태어난 것이어서 자연보호용으로 그냥 둔단다. 참으로 가슴을 훈훈하게 만드는 답변이었다. 그리고 이 나누는 하토 동굴 화장실 앞에서 보았다. 열매가 바닥에 잔뜩 떨어져 있었다. 나무도 엄청 컸다. 정말 아무도 줍지 않고 흩어진 채로 그냥 있었다. 나무에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이토록 독이 있는 나무까지도 품어주는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퀴라소 정말 오래도록 못 잊을 것 같다. 본받아 배워가야할 대목이다.
지금 하토 동굴을 달려가는 중인데 베네수엘라 원주민 거주지역을 지나간다. 하토 국제공항도 지나간다. 미국, 캐나다 국적기가 들어온다. 네덜란드 암스텔담에서도 자주 운항한다. 들녘을 달려 어느 새 하토 동굴에 도착했다.
* 퀴라소 하토 동굴
하토 동굴 입구에 도착하여 안으로 들어가니 정원에 선인장이 많다. 퀴라소의 선인장은 2종류가 있다. 1개는 식용이고, 1개는 도기 있어서 못 먹는 관상용이다. 평균 기온이 28도다. 8, 9, 10월은 덥다. 47도까지 올라간다. 허리케인이 없다. 가끔 폭우는 온다. 정원을 걸어 들어가니 하토 동굴이 있는 큰 바위산이 있다. 곁에는 거북이 사육장이 있고, 2마리의 큰 거북이가 있다. 하토 동굴은 49개의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야 진입문이 있다. 계단을 올라가니 커다란 선인장이 먼저 반긴다. 저 아래에는 하토 공항 활주로가 시원하게 뻗어 있다. 그 곁에는 푸른 바다가 비경이다. 동굴에 진입하여 안내원이 주의사항을 들었다. 30만년 된 동굴이다. 27년 전 부터 오픈했다. 동굴 안에서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동굴의 천정 구멍이 뚫린 곳에서는 빛이 들어와서 동굴에 피해가 없기 때문에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 동굴의 출구 부분에서도 사진은 가능하다. 지하통로가 라틴 아메리카 대륙으로 연결된 아주 긴 길이의 아름다운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동굴이다. 오늘 우리는 그 중에서 극히 일부인 129m만 다녀온다. 연못이 많다. 3개 보았다. 아름다운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동굴이다. 여러 가지 모양의 암석들이 있다. 남성 성기 모양, 아치 모양 등 을 보았다. 그리고 유명한 마돈나 동상도 보았다. 그런데 마돈나는 성모 형상이었다. 아마도 퀴라소에서는 성모를 마돈나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작은 박쥐들도 보았다. 청정의 바위 구멍에 다닥다닥 붙었는데 아기 박쥐 같은데 다 자란 것이란다. 종류가 작아서 그렇단다. 신기했다. 동굴을 탐방하고 나왔다.
* 퀴라소 하토 공항
하토 동굴에서 나오니 눈앞에 하토 공항의 활주로가 길게 뻗어 있다. 활주로 끝에는 비행기도 한 대가 머물고 있다. 아까 이곳에 올 때도 보았던 공항이다. 반대편 외쪽으로는 아련하게 공항 건물이 있다. 먼 섬나라에서 육지로 이어지는 환희의 정경이다. 하토 동굴에서 시내로 가면서 파피아민트어에 대하여 조금 배웠다. 파피아민트어는 ABC(아루바, 보네르, 퀴라소) 이 세 국가에서만 사용되는 언어다. 영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아프리카어 등을 합해서 탄생된 언어다. 현지 여자아이드가 명 가지 망ㅇㄹ 가르쳐 준다. 굳 애프터눈은 '본따르디', 떙큐는 '당키' 등이다. 이곳 파피아민트어로 '두시'는 자기야 쯤으로 사용하는데 여러 경우에 쓰인다. 퀴라소 발렘스타드 시내 공원에는 두시(DUSH 단어가 세워져 있기도 하단다. 지금 그 시내로 간다.
* 퀴라소 발렘스타드 정유회사
퀴라소는 베네수엘라에서 석유를 들여와 정유해주며 수입원을 주관하는 회사가 있다. 아루바와 동일하다. 지금 그 정유회사를 지나간다. 해변에 아주 큰 자락으로 전개된다. 석유가 생산되는 것이 아니고 정유 기술로 돈을 번다는 대목에서 신기했다. 그러나 그것은 수입에 한계가 있어서 관광업을 발전시키고 있다.
* 쿠라소 발렘스타드 버스로 건너온 퀸 줄리아나 다리
크루즈 배가 퀴라소 발렘스타드 항구에 들어올 때 보았던 다리다. 아주 웅장하고 높이 서 있었다. 지금 그 다리를 건너서 섬의 서쪽인 푼타지역의 발렘스타드 시내로 진입한다. 이 다리는 퀴라소에서 가장 높은 다리다. 시가지 가운데에 금색 돔지붕의 무슬림 교회도 보인다. 곧 저 교회를 탐방할 것이다. 다리가 높아서 여러 가지 풍경을 조망하며 넘어왔다. 다릴 건너자 교육, 상업지역도 지나간다. 원래는 주택지역있던 곳이다. 생소한 국가, 퀴라소인데 많은 것들이 발전된 풍경에 육지와 그리 분리되지 않은 느낌이다. 그 만큼 자국의 발전과 관광객을 위한 시설 등을 잘 발전시켜 놓은 덕분이다.
* 퀴라소 발렘스타드 윌레미나 파크
발렘스타드 시가지에 도착하여 항구 주변에서 버스를 돌려 보내고 걸어서 투어를 시작한다. 이제부터는 계속 걸으며 시내를 탐방하고 각가 항구의 배로 귀환할 것이다. 먼제 온 곳이 이곳 윌레미나 파크다. 이동 중에 버스에서 현지 여자 가이드로부터 배웠던 파피아민트어 두시 DUSH 단어가 공원에 크게 세워져 있다. 자기야, 그래, 사랑해, 너 좋아해, 응 맞아, 등으로 사용되는 단어로 배웠다. 상당방에게 매우 긍정적이고 사랑스런 대화에서 사용되는 아주 애교스런 단어다. 공원의 중앙에는 네덜란드 여왕의 동상이 높게 세워져 있다. 최초로 여성 통치 국가다. 주변에는 노란 건물이 있는데 구종요건물로 현재는 법원건물이다. 역광으로 사진은 잘 나오지 않지만 DUSH와 동상이 공원을 빛내고 있다.
* 퀴라소 발렘스타드 사법부와 경찰 건물
공원 곁에 사법부와 경찰 건물이 나란히 붙어 있다. 한 마당을 공유하며 양 옆으로 이어져 있다.
* 퀴라소 발렘스타드 시가지 CURACO 나라 마크
조금 전에 공원에서도 DUSH 단어가 세워진 것을 보았는데 또 그런 풍경을 만났다. 이 나라 퀴라소의 단어 CURACO를 아주 크게 새겨서 도로변에 세워 놓았다. 퀴라소는 이런 것들이 도시를 구성하는 한 요소로 조성시키는 것 같다. 아름다운 정경이다.
* 퀴라소 발렘스타드 시가지
현지 여자가이드는 시내투어를 마치고 우리들 각자가 항구로 가서 배에 귀환하는 경로를 자꾸 가르쳐 준다. 붕 뜨는 엠마다리 그 다리가 보이면 그 다리를 건너 항구로 갈 수 있단다. 지금은 유대교 성당으로 가며 시가지를 본다. 네덜란드 풍의 아주 아름다운 시가지 골목이다.
* 퀴라소 발렘스타드 유대교 성당
무슬림 교회인 유대교 성당에 왔다. 원래는 천주교 상당이었는데 무슬림에게 넘겨 주었다. 이번 크루즈 여행에서 유럽의 천주교가 전파되던 이야기만 듣고 보다가 퀴라소에서 무슬림 교회를 보니 이색적인 정경이다.
* 퀴라소 발렘스타드 시가지 벽화
시가지 건물의 벽면에 벽화가 곳곳에 있다. 날개 속에서 흑인 어린이가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있다. 무언가 소원을 빌며 희망을 이루는 상징의 날개 같다. 또한 골목에 누구든지 들어만 가면 천사가 되는 천사날개가 그려져 있다. 나도 한번 몸을 부착시켜, 퀴라소의 고운 벽화 속에 나를 담아간다. 이런 벽화들은 유명 화가의 그림들인데 우리 나라도 이렇게 벽화를 그려서 도시를 아름답게 조성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퀴라소 발렘스타드 과일가게
과일가게를 지나간다. 야채도 있다. 진열한 품목들을 보니 우리나라와 유사한 것들도 많다. 그런데 이번 여행의 국가들은 대부분 건조해서 과일이나 채소 재배가 안 된다고 들었는데 퀴라소에서는 풍성한 과일과 채소의 정경이다.
* 퀴라소 발렘스타드 항구주변 풍경
발렘스타드 시가지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컬러플한 색채의 건물들이 가득한 항구 지역이다. 기념품 상가가 즐비하다. 퀸 줄리아나 높은 다리도 곁에서 보인다. 물가에 소중한 역사를 간직한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다. 모두 네덜란드 풍이다. 어느 치과 의사가 어려움 끝에 아내를 위해 지은 파란 담장 집도 있고, 그 곁에는 박물관 건물도 있다. 엠마다리 설계자가 만든 다리 조형의 설치물도 울 위에 서 있다. 움직이면 여자가 춤을 추는 형상이란다. 이런저런 고운 풍경을 많이 보며 휴식하였다.
* 퀴라소 발렘스타드 앵무새 조각상
도심 가운데 한적한 뒷길 옆에 앵무새가 3마리 조각상으로 서 있다. 어느 미술가가 설치한 것이다. 매우 아름답고 생생한 앵무새의 자태다. 현지 여자 가이드는 앵무새 앞에서 퀴라소의 노래를 불러 주었다. 알아 들을 수는 없지만 고맙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 퀴라소 발렘스타드 새 벽화와 시
앵무새 조각상에서 조금 더 걸어가니 이번에는 새 벽화가 있다. 예사롭지 않은 새다. 이 나라의 가장 큰 새 그림이란다. 옆에는 시가 적혀 있다. 역시 퀴라소의 유명한 시인의 시란다. '나는 퀴라소 사람입니다'라는 뜻의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조국 예찬 시란다. 시와 시인을 존중하는 퀴라소의 배려가 훌륭하게 보였다. 나는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그래서 남다른 눈과 가슴으로 훈훈하게 바라보고, 그 정경을 정성껏 담아왔다.
* 퀴라소 발렘스타드 암스텔담풍 건물
네덜란드 암스텔담풍의 건물 세 채가 붙어 있다. 아름다운 색상과 구조가 꼭 닮았다. 네덜란드 지배의 역사를 조명하는 대목인데 남아서 관광객에게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
* 퀴라소 발렘스타드 블루 술 박물관
퀴라소의 블루 술 박물관에 왔다. 입장을 허락해 주어서 고마웠다. 술을 마셔보고, 냄새도 맡아 보며 퀴라소의 술에 대해서 배웠다.
* 퀴라소 발렘스타드 암스텔담풍 물가
건물 항구 주변 엠마 다리 부근에 네덜란드 암스텔담을 연상케 하는 물가의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다. 퀴라소가 네덜란드 자치령이기 때문에 그렇다. 지배 시절 18세기의 남은 잔재들이다. 그리고 아직도 네덜란드의 정치 영향을 많이 받는 관계로 그렇다. 퀴라소 주민들은 지금도 모두 네덜란드 여권을 소지하고 있고, 네덜란의 투표권을 행사하고 있다. 오늘날도 네덜란드는 이 퀴라소 섬을 포함한 이 주변 몇 군데의 부속 섬을 합하여 네덜란드 국가를 구성하고 있다. 나는 예전에 네덜란드 여행에서 암스텔담을 가 보았다. 그의 추억이 떠오르며 그리워지기도 했다. 암스텔담은 운하가 많고 시가지 깊숙히 들어온 물가에 아파트가 있다. 물이 정원이었다. 사람들은 보트를 타고 이동했었다. 기차역도 물 위에 있었다. 지금 눈앞에 색상도, 구조도, 물가 위치도 네덜란드 암스텔담을 전시하는 건물들이 화사하다.
* 퀴라소 발렘스타드 퀸 엠마 브리지 전경
퀴라소 시가지 투어를 마치고 일행들이 헤어져 각자 알맞은 시간에 크루즈 배로 귀환하기로 했다. 현지 여자 가이드는 모든 사항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갔다. 퀸 엠마 다리를 건너면 좌측 가까운 곳에 우리의 크루즈 배를 정박한 항구가 나온단다. 우리 부부는 남아서 엠마 다리 주변 풍경을 더 살펴 보았다. 퀸 엠마 다리는 매우 길다. 아득하여서 전경을 사진에 담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움직이는 다리라서 다리 아래 주변 물 위에도 설치물이 즐비하다. 다리 주변 풍경도 매우 아름다워서 다리와 함께 비경을 이룬다.
* 퀴라소 발렘스타드 움직이는 퀸 엠마 브리지
퀴라소의 도심 동편 푼다 지역에서 서편 오트로반다 지역으로 연결하는 퀸 엠마 브리지다. 쉽게 말하면 크루즈 배가 입항한 곳은 서편의 오트로반다 지역이고,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푼다 지역이다. 먼저 서편의 오트로반다 지역으로 가서 하토 동굴과 하토 공항을 보고 버스로 퀸 줄리아나 브리지를 건너와서 동편의 푼다 지역을 보고, 이제 다시 퀸 엠마 브리지를 건너 배가 정박한 서편의 오트르반다 지역으로 간다. 퀸 엠마 브리지는 1888년에 전설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2006년에 다시 개조하여 오늘의 모습이 탄생된 것이다. 붕 떠서 회전하는 부교다. 구조가 매우 아름답고 길다. 이 다리는 차량 통행은 금지 되어 있는 목조 구조다. 사람들을 통행만을 허락한다. 이 다리는 붕 뜨는 다리로 움직여서 이동한다. 실제로 우리 부부는 그광경을 보았고, 붕 떠서 움직이는 다리 위에서 건너며 퀸 엠마 다리가 움직여 이동하는 현장을 체험했다. 항구로 가려고 다리를 거너려는데 갑자기 다리가 들리더니 스르르 우측 옆으로 움직였다. 다리가 움직이며 땅과 물이 분리되어 금새 타기 어려운 상황으로 변하고 있다. 우리는 얼른 다리 위로 뛰어 올랐다. 그리고 우리 부부를 마지막으로 태우고는 더 이상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이건 엄청난 체험을 한 소중한 순긴이다. 다리가 움직이는데 그 다리 위에서 걷는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었다. 다리가 움직이는 아유는 배가 지나가기 때문이었다. 다리를 옆으로 제키고 그 사이로 배를 보낸다. 배가 다 지나가자 다리가 다시 움직여서 원상으로 돌아온다. 두고두고 잊지 못할 뜻깊은 체험이다.
* 퀴라소 발렘스타드 퀸 줄리아나 브리지
퀴라소 발렘스타드에는 2개의 다리가 있다. 하나는 보행통행 다리인 퀸 엠마 브리지이고, 하나는 차량통행 다리인 퀸 줄리아나 브리지다. 이 다리는 높이가 56m로 매우 높다. 크루즈 배가 퀴라소 발렘스타드 항구에 진입할 때도 웅장하게 보이던 다리다. 도심 이동 중 건너 보기도 하였고, 지금 항구 주변에서 조망도 하고 있다. 카리브해에서도 가장 높은 다리라 하니 외견상 독특한 구조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내재한 그 가치도 상당하다. 퀸 엠마 브리지와 퀸 줄리아나 다리는 일정 거리를 두고 나란히 마주보고 있다. 모두 푼다 지역과 오트로반다 지역을 연결하는 다리인데 그 용도가 서로 다르다. 퀸 줄리아나 브리지는 차량만 통행하고, 퀸 엠마 브리지는 사람만 통행한다. 카리브해 위에서 나는 버스로 퀸 줄리아나 브리지도 건넜고, 지금 퀸 엠마 브리지도 도보로 건넌다. 항구에서 하선하여 먼저 서쪽 오트로반다 지역의 하토 동굴을 탐방했고, 다시 돌아와 버스로 퀸 줄리아나 브리지를 건너 동쪽 푼다 지역의 도심 시가지를 탐방했다. 그리고 지금 푼다 지역에서 다시 크루즈 배가 정박한 오트로반다 지역으로 이동 중이다. 매우 보람되고 뜻깊은 여정이다.
* 쿠라시오 발렘스타드 항구 귀환
퀸 엠마 다리를 건너 항구로 향했다. 항구로 가는 길은 매우 아름답다. 기념품 상가도 많고, 대포 등 설치물도 많다. 그 옛날의 유적인 듯하다.
* 퀴라소 발렘스타드 항구 크루즈배 노르웨이지안 젬호
항구 주변의 고운 풍경을 보며 크루즈 배 곁으로 왔다. 우리의 웅장한 배 노르웨이지안 젬호 전체가 보인다. 장관이다. 바람이 심하게 분다. 또 다른 배도 들어와 있다. 언제나 기항지에서 우리를 기다려 주고 지켜주는 저 크루즈 배가 참으로 고맙다.
* 퀴라소 발렘스타드 크루즈 배 재승선
크루즈 배에 재승선하여 뷔페 중식으로 식사를 먼저 하였다. 그리고 수영장에 가서 피곤한 몸을 온탕에 담가 피로를 풀었다. 영국에서 온 70대 남자와 우리 부부가 한 자쿠지 온탕에서 찜질을 하였다. 그의 부인은 밖의 수영장 비치 의자에서 책을 보고 있단다. 뒤를 돌아보니 온탕 밖 나의 바로 곁에 있다. 우리 부부가 영국 여행을 했던 이야기 등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이었다. 참 찬절하고 심성이고운 남자였다. 그분은 헤어지며 매우 좋은 인연이라고, 좋은 만남이었다고, 매우 기뻤다고, 뜻깊은 인사를 했다. 나 역시 두고두고 잊지 못할 동승 여행객이다. 지난 남미 크루즈에서는 인도 부부와 사귀었다. 그 부부는 우리 부부를 인도에 꼭 오라고 했다. 교수였는데 대화가 잘 통했었다. 그 부인은 나를 꼭 부등켜안으며 인도 자기 집에 꼭 오라고 간곡히 초대했었다. 그분들이 떠오르며 지금도 영국 남자 분과 매우 행복한 교류 시간이다. 크루즈 여행에서 수영장은 언제나 이런 뜻깊은 만남을 허락하여서 매우 유익한 공간이다. 또한 크루즈 여행에서만 체험하는 아주 보람된 여정이다. 다시 선실에 와서는 발코니에서 책을 보았다. 크루즈 여행에 관한 안내 책자와 나의 제2 시집 '헤밍웨이의 그 바다'를 읽었다. 출렁거리는 바다를 보며 책을 보는 이 순간 참으로 행복하다.
* 퀴라소 발렘스타드 항구 출항
오후 5시에 배가 퀴라소를 출항한다. 선실에서 출항 모습을 조망했다. 발렘스타드 시가지와 항구와 바다가 비경이다. 저녁은 오키즈 가든에 가서 먹었다. 나는 야채 해조류 샐러드, 땅콩으로 맵게 볶은 닭고기, 돼지고기 쌀국수, 코코넛 푸짐한 샐러드를 주문하였고, 남편은 점보새우 요리, 돼지고기 쌀국수, 초코렛케익을 주문하여 함께 맛있는 식단을 차리고 나누어 잘 먹었다. 석식 후에는 대극장에 가서 공연을 보았다. 퀴라소, 잊지 못할 멋지고 낭만 가득한 나라다.
2019년 2월 11일 월요일 보네르
* 보네르 크랄렌디크 항구 기항
새벽 6시에 모닝콜을 받고 기상했다. 발코니에 나가보니 긴 해안선을 따라 불빛 조명이 장관이다. 어제처럼 다리에 정박한다. 네덜란드령이라서 암스텔담풍 건물들이 많다. 비경이다. 보네르는 카리브해 남부에 위치하여 1634년부터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되었다. 네덜란드령 앤틸리스에 속하면서 인근의 섬들과 함께 아루바(ARUBA), 보네르(BONAIRE, 퀴라소(CURACAO)의 앞 글자를 따서 ABC 제도라고 불리었다. 보네르에서 가장 중요한 수출제품은 바로 소금이다. 주로 관광업이고 인구는 1만 9천명이다. 아프리카계 흑인이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남아메리카 대륙과 네덜란드 출신도 상당수 있다. 인근 바다 속 화려한 생물로 인하여 스쿠버 다이빙과 윈드서핑으로도 유명한 국가다.
보네르 섬의 최초 주민은 서기 1000년경에 현재 베네수엘라로부터 항해로 왔다. 문화의 발자취는 수많은 고고학 유적에서 발견된다. 바위 그림과 암석조각이며 조각이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공식언어는 영어, 네델린드어다. 네덜란드 왕국 내의 특별자치지역으로 공식 명칭은 ‘보나이러 도서지역’이다. 2010년 네덜란드령 앤틸리스의 해체에 따라 사바, 신트외스타티위스와 함께 네덜란드의 특별 자치지역이 되었다. 이 세 섬은 머리글자를 따서 ‘BES 제도’라고도 불린다. 공용어는 네덜란드 어이지만, 실생활에서는 ABC 제도에서 사용하는 언어인 파피아멘토어가 더 많이 사용된다. 공식 화폐는 2011년부터 미국 달러를 사용하고 있다. 보네르 섬은 스쿠바 다이빙으로 유명하다. 섬에는 해마가 흔한 산호초가 있으며, 홍학 개채들과 원숭이 서식처로 유명하다. 섬의 동쪽 지역 라끄 베이는 윈드서핑의 천국이다.
우리는 오늘 보네르에서는 먼저 섬의 남쪽으로 이동하여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을 방문하고, 예전 노예들이 살던 오두막을 본다. 그리고 북쪽 해안을 드라이브 하며 바다 전경과 촛대 모양의 선인장 가득한 자연풍경을 본다. 고토 호수와 플라멩고 군락지도 방문하다. 링컨 빌리지, 워싱턴 국립공원도 탐방한다. 일년 내내 굉장히 덥고 건조하다. 오늘 낮기온은 26도 정도다. 가벼운 옷으로 입고 하선 준비를 했다.
* 보네르 크랄렌디크 항구 하선
보네르 크랄렌디크 항구는 어디서 보아도 비경이다. 고운 아침 햇살과 투명한 파란 하늘, 하얀 구름, 청청한 바다가 그렇다. 바다에 범선이 떠 있고 보트로 이동하여 그 범선을 타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곳 주변을 관광하는 배인 것 같다. 하선하여 여자 가이드를 미팅하고 버스에 승차했다. 오늘은 우리 일행만 탄다.
* 보네르 플라멩고 공항
이제 버스를 타고 보네르 섬의 남쪽으로 간다. 그곳에 가서 염전과 노에들이 거주했던 오두막 집을 볼 것이다. 보네르를 가로 길이가 11Km다. 연중 25~33도의 기온으로 덥고 건조하다. 인구는 19,000명이다. 홍학이 많기로 유명한 나라다. 가는 길에 호텔가도 지난다. 그리고 보네르 플라멩고 공항을 지나간다. 도로변에 공항이 철조망 하나를 경계로 있다. 거북이가 못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도로변 담장 밑에는 시멘트 벽을 설치했다. 보네르는 거북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 보호법이 지정되어 있다. 1961년 그 법이 통과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예사로 보아 넘길 수도 있는 바닥에 접착된 그 시멘트 낮은 벽이 거북이들이 공항 활주로로 못 넘어오게 하는 것이라니 참으로 훈훈한 정경이다. 나는 바닥을 자세히 보아야 겨우 보이는 그 시멘트 낮은 벽의 설치물을 몇 번이나 바라보면서 보네르가 참으로 인간적인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거북이 보호법은 여러 가지 해양보호의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공항 건물이 보네르를 상징 새인 홍학의 분홍색으로 건축되어 있다. 어쩌면 사람보다 홍학이 더 많은 나라라는 소문이 나돌만큼 보네르 상징의 플라멩고다 보니 공항 이름까지도 플라멩고 공항이고 건물 색상도 분홍색으로 고운 정경이다. 아담한 공항 한쪽에는 비행기가 몇 대 머물러 있다. 부자 동네도 지나간다. 별장과 콘도가 많은 지역이다. 1년이나 1개월 단위로 렌트가 가능하다. 방송 안테나도 높이 솟구쳐 있다. 이동 중 보네르의 바다와 자연, 그리고 사회문화 등을 보는 소중한 시간이다.
* 보네르 붉은 빛 자연염전 조망
이곳은 보네르의 자연염전이다. 지금은 그냥 염전을 조망만 하고 지나간다. 잠시 산호해변 바다와 노예들 거주지였던 오두막 헛(HUT)을 보고 다시 되돌아와 염전을 탐방할 것이다. 창가에 스치는 염전이 붉은 빛을 띄는 곳이 있다. 홍학 색깔을 닮은 빛이다. 그것은 태양빛과 바닷물과의 묘한 반사로 그렇단다. 분홍색 염전이 아름다운 풍경이다. 염전으로 들어가는 바닷물길도 도로변에 있다. 수로를 조성해 놓아 바닷물이 흘러 들어간다. 염전 기구도 곳곳에 서 있다. 소금을 산처럼 수북이 쌓아놓은 풍요로운 정경도 있다. 눈처럼 하얀 소금밭이 광활하여 장엄한 비경이다.
* 보네르 노예 오두막집
해변에 버스가 정차하고 우리는 하차했다. 옛날 노예가 거주하던 오두막 집 헛(Hut)이 줄지에 해변에 서 있다. 염전에서 일하던 노예들이 살던 집이다. 한 채에 3명이 거주했다. 아주 작은 집이다. 하얀 벽면에 검은 지붕, 그리고 양쪽에 뚫린 작은 창이 그날의 설움을 말해준다. 아주 멀리서 걸어 와서 하루 종일 일하다 가는 사람들도 있고, 여기서 머물며 일하는 사람도 있었다. 곁에는 산호 해변이 노예들을 달래듯 고운 비경을 선사한다.
* 보네르 산호 해변
이곳 보네르 해변에는 산호가 많다. 해변에 하얀산호 조각들이 널브러져 장관이다. 바닷물과 파도에 제련되어 여러 가지 모양으로 형성된 산호 조각들이 해변을 채운다. 외부로 가져가면 안 된다. 전에 어떤 여행객이 가져가다가 공항에서 걸렸단다. 산호 바다의 물빛도 비경이다. 얕은 곳은 에메랄드빛, 먼 곳은 코발트빛 바다가 산호 조각들과 함께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
* 보네르 자연 염전 탐방
아까 지나가며 조망했던 자연 염전에 다시 왔다. 이번에는 버스에서 내려서 탐방했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 도로변에는 바닷물이 염전으로 유입되는 수로가 있다. 수로변에는 붉은 색 식물이 산다. 그것은 바다 시금치란다. 수롯가에서 조망했다. 수북이 쌓인 하얀 소금이 눈 쌓인 풍경과 같은 산을 이룬다. 이곳 염전은 모두 자연 염전이라니 놀랍다. 54명 근로자가 일한다. 옛날에는 더 많았다. 아프리카 등의 노예들이 일했다. 아득한 염전이 보네르의 풍요를 노래한다.
* 보네르 소금 운반 다리
염전 끝부분에는 소금을 옮기는 다리가 있다. 배로 실어다 주는 다리다. 곳곳에 다리 설치물이 염전에서 바다로 도로를 넘어 길게 늘여져 이어 있다. 세계로 수출하는 소금이다. 이곳 자연염전은 보네르 남부에 있다. 자연염전은 섬의 매우 중요한 산업이고, 또한 세계 소금 전체 생산량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때 홍학 한 마리가 날아간다. 현지 가이드는 저런 일이 거의 없는데 오늘 행운이란다. 플라멩고는 잘 날지 않는다는 것이다. 홍학이 많다는 보네르에서 홍학 닮은 염전도 보고, 그 염전 위를 날아가는 홍학을 보니 참 신기했다. 바닷물에서, 염전에서, 운반 다리까지 완성되어 세계로 나가는 보네르의 소금에 대하여 많이 보고 배운 흐뭇한 여정이다.
* 보네르 해변 주택
도로변에 고운 주택들이 있다. 개인집도 있고 해양스포츠가 발달한 이곳 보네르 해변의 숙소도 있다. 야자나무에 야자열매가 달린 집도 있다. 모두 아름답다.
* 보네르 해양스포츠 바다
보네를 해양 스포츠가 발단된 나라다. 특히 이곳 해변은 해양스포츠 지역이다. 보네르는 다이빙과 스노클링, 윈드서핑 천국으로 알려져 있어, 해양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다. 보네르 해안 곳곳에는 최고의 스노클링 장소가 노란색 돌로 표시되어 있다. 도로변에설치해둔 노란 표식의 돌이 있는 곳에서만 바다 출입이 가능하다. 버스가 지나갈 때 가끔씩 노란 표식의 돌덩이가 보인다. 해변에 붉은 바다 시금치도 자라고, 파란 맹그로브 나무도 자란다. 바닷물을 먹고 자라는 식물이다. 먼 나라에서 바다의 이색 풍경을 본다.
* 보네르 크랄렌디크 중심 시가지
바다를 지나 중심 시가지에 들어왔다. 항구 주변의 크랄렌디크 시가지다. 우리의 크루즈 배도 정박해 있다. 배의 외부에 아름다운 무늬를 그려놓은 우리의 크루즈 배가 거대한 품자락으로 앉아있다. 푸른 색 건물의 우체국도 있다. 이제 항구를 지나 반대편 지역으로 탐방을 간다. 보네르의 중심 시가지를 통과한다. 여기가 다운타운으로 메인 거리다. 매우 아름다운 네덜란드 풍의 건물들이 도로변에 이어져 있어 진풍경이다. 모두 관광객 대상의 상가들이다. 상가도 많고 식당도 120여개 있다. 요트 정박지도 지나간다. 호텔을 짓는 곳도 있다. 지금 지나가는 거리 이름이 리조트 스트리트다. 리조트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 보네르 정수 처리장
도로변에 아주 크고 둥근 탱크 2개가 있다. 바닷물을 정화하는 정수 처리장이다. 저곳에서 정화한 담수를 사용하다. 보네르는 네덜란드 자치구다. 국가가 아니다. 아루바와 퀴라소와는 다르다. 자치 정부가 있다. 2011년부터 US 달러가 공용화폐로 사용된다. 아루바는 몇 개월 후 US 달러에 대한 찬반 투표를 할 예정이다. 보네르에는 지금도 네덜란드인들이 많이 거주한다. 네덜란드 선거권이 있어서 네덜란드 투표를 한다. 신비로운 이야기를 들으며 버스는 계속 달린다.
* 보네르 들녘 가시나무
건조한 들녘에 온통 가시나무가 많다. 가시나무는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래바람을 막아주는 나무다. 현지 여자 가이드가 가시나무를 준비해 와서 보여준다. 친절하고 정성이 담긴 안내와 설명에 고마웠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바람결대로 비스듬히 누워서 자란다.
* 보네르 미국인 마을
미국인이 거주하는 동네를 지나간다. 집 모양이 모두 다르다. 전망이 좋은 비경의 바닷가에 마을을 이루고 산다. 도로변에 끝이 노란 선인장이 우뚝 솟구쳐 자란다. 바다와 푸른 식물 사이에 가끔씩 보이는 집들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매우 큰 낭만을 선사한다. 크두시파두시 선인장인데 술을 담그는 선인장이다. 잎이 넓은 나무도 있는데 그것은 나비가 와서 먹는 나무란다. 버스가 점점 보네르의 해변 짙푸른 자연 속으로 달려간다.
* 보네르 해양국립공원
보네르는 영토 전체가 해양국립공원일 정도로 자영보호가 잘 되어 있다. 보네르 해양국립공원은 1979년에 설립되었다. 지금 본격적으로 해양국립공원에 진입했다. 바다 물빛이 비경이다. 해변에서부터 층층으로 가까운 곳부터 산호빛, 에메랄드빛, 코발트빛, 검은 빛이다. 멀리 진한 물빛은 깊은 곳이다. 오른쪽 산에 있는 암석은 바닷속에 있던 보네르의 흔적이다. 보네르가 원래는 바닷속에 있던 영토였다. 노란머리 파랑새가 나뭇가지에 앉아있다. 그 새를 보라고 잠시 버스가 정차했다. 울창한 나뭇가지에 앉아 있어서 찾기 어려운데 잘 보니 있었다. 오른쪽 육지쪽의 허물어진 건물은 옛날의 세관 건물이다. 옛날엔 이곳에 배가 들어왔다. 바다쪽으로 다이빙 장소가 있다. 사람들이 계단으로 걸어 내려간다. 67개 계단인데 다이빙 장구가 무거워서 몇 천개 계단이라 부른다. 아무 곳으로나 바다에 들어가면 안 된다. 반드시 허락된 노란 마크의 돌이 있는 곳에서만 바다 진입이 가능하다. 브라질 나무라는 이름의 나무도 있다. 붉은 염료를 채취하는 나무다. 지금 가는 해변도로가 좁은데도 2차선 도로란다. 왕복하는 차들이 교행도 가능하단다. 새 지역을 통과한다. 새가 200여종인데 50여종만 이곳에 서식한다. 나머지는 철새다. 오른쪽 산중턱에 보네르 지도를 닮은 아치형 바위가 있다. 저곳에서 결혼하면 잘 산다는 속설이 있엇서 종종 젊은이들이 와서 결혼한단다. 왼쪽에 아까 보았던 노랑머리 새가 둥지를 틀고 사는 선인장이 있다. 선인장 품속에 둥지가 있다.
이곳 해양국립공원 안의 모든 것들은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다. 살아있는 식물, 동물, 바다 생물 등은 물론 죽은 것조차 보호한다. 죽은 나뭇가지 하나 건드리지 않는다. 그로인하여 보네르의 해양 생물들은 다양하고 풍부하다. 어느 해변에는 바다 식물관찰 지정으로 보호되는 구역도 있다. 사람은 그곳에 접근이 불가능하다. 키 작은 바다 식물들이 자작자작 자리고 있다. 수많은 어종과 사람보다 많을지도 모른다는 홍학과 산호가 가득 채운 에메랄드빛 바다 등이 세계인을 불러 들인다. 그런 살아있는 생명의 바다에서 다이빙 등의 해양스포츠를 즐기는 낭만은 바라만 보이도 가슴 설레게 한다. 해안 도로를 달리는 좌우로 전개되는 바다와 천연자연 풍경 또한 해양스포츠 못지 않게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도로변 바닥에 알로에 같은데 100년을 사는 나무로 10년에 1회 꽃 핀다는 식물도 있다. 버스가 가도가도 끝이 없는 해변길, 산길을 달린다. 가끔은 멈추어 관찰하게 하고, 가끔은 지나가며 설명해주고, 가끔은 눈으로 가슴으로 바라보고, 먼 나라에서 기막힌 비경을 본다.
* 보네르 정유 분배소
둥근 통이 해변에 많이 서 있다. 정유된 기름을 분배하는 곳이다. 퀴라소에서 본 것 같은 정유공장은 아니다. 여기는 해양스푸츠 금지구역이다. 식물을 보호하고 식물을 관찰하는 곳이다. 오른쪽의 파란 건물은 에너지 발전소다. 정유 분배소 바로 곁에 고토 호수가 시작된다.
* 보네르 고토 호수 전망대
해양국립공원 해변도로에서 정유분배 둥근 저장고 통이 보이더니, 가까이 와보니 바로 곁에 고토 호수가 곁에 있다. 고토 호수를 따라서 달려간다. 처음에는 그 유명한 고토 호수가 별로 크지 않게 보였는데 가도가도 호수가 끝이 없다. 호숫가 산에 볼링공을 만드는 큰 나무도 있다. 밑에는 작은 선인장이 자란다. 한참을 가니 고토 호수 전망대가 있다. 주창장이 있어 버스에서 하차하였다. 간이 화장실도 있다. 계단을 따라 고토 호수 전망대에 올라가서 호수를 조망했다. 멀리 홍학이 많다. 산구비를 돌며 광활한 고토 호수가 아득하다.
* 보네르 고토 호수
고토 호수 전망대를 지났으니 이제 고토 호수는 끝이겠구나, 했는데 아니었다. 고토 호수는 더욱 넓은 품자락으로 앉아 홍학을 보듬고 있다. 산을 끼고 돌며 한가득 품고 있는 고토 호수의 물은 민물 반, 바닷물 반이다. 고토 호수에는 홍학이 많이 산다. 홍학 보호구역이다. 그래서 버스가 홍학 보호 때문에 정차를 못한다. 도로 바로 곁 호수 곳곳에 홍학이 홀로 또는 무리지어 있다. 홍학은 아기 때 2년 동안은 하얀 색을 띄다가 탄생 2년 후에야 붉은 색을 띈다. 수명은 50년이다. 버스가 지나가는 도로 가까이에 아기 홍학 2마리가 있는데 모두 하얀색이다. 다리 부분부터 붉은 빛이다. 먹이를 잡아 먹고 있다. 멈춰서 조망했다. 먼 곳에는 한 떼의 플라멩고가 물 위에 분홍 꽃다발처럼 떠 있다. 바다와 호수, 땅의 야생보호로 인한 풍요가 보네르의 여정을 참으로 행복하게 한다.
* 보네르 링컨 빌리지
미국인이 거주하는 마을이다. 언덕에 올라가면 본격적인 링컨 빌리지다. 이곳 마을에 오기 전 자연 우물을 보았다. 링컨 마을 사람들이 가서 물을 길어다 먹는 우물이다. 원래는 노예들이 살던 마을이었다. 노예해방의 의미로 링컨 빌리지라 이름 지었다. 이들은 네덜란드 왕의 창고나 염전 등에서 일했다. 여기 오기 전에 보았던 먼 곳의 염전까지 걸어가서 일하고 오곤 했다. 1500년 전에 만든 마을이다. 가장 오래 된 거주지다. 1409년 스페인이 들어왔다. 원주민들은 도미니카 공화국 광산의 인부로 데려갔다. 이들은 이곳에서 약간의 개인 농토를 소유하고 농사를 짓는다. 알로에를 심은 집이 있다. 보네르에서 미국의 역사 한 단면을 배우는 마을이다.
* 보네르 워싱턴 국립공원
보네르의 북쪽 끝 건조한 들녘 가운데 워싱턴 슬레그바이 국립공원의 노란 진입문이 보인다. 그 인간의 설치물이 오히려 낯설도록 현대의 문명으로 다가온다. 지금까지 해양국립공원을 지나오며 자연보호에 대해 배웠다면 이곳 공원에서는 자연도 보지만 해양동식물에 대한 전시물도 본다. 보네르의 자연과 역사를 체험하는 전시관과 야생 공원 등이 있다. 30분 정도 자유시간을 가지고 곳곳을 둘러보았다. 전시관에는 물고기 뼈 등 사진과 설명이 있다. 그리 크진 않아 금방 나왔다. 실제의 고래뼈는 엄청나게 커서 야외 나무 아래에 길게 걸어서 전시해 두었다. 공원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선인장이 도로변에 많다. 건조하여 먼지가 바람에 날린다. 가끔씩 트럭이 진입한다. 이 공원 안에 캠핑장이 있어서다. 그런데 비포장 도로가 거칠어서 바퀴가 튼튼한 트럭만 진입이 가능하다. 자가용은 못 들어간다. 이 공원은 수많은 조류와 파충류 등의 천연보호구역이다. 또한 공원의 가장자리는 바다 거북이들의 산란 장소다. 한참을 걸어가도 끝이 안 보여 도중에 되돌아 나왔다. 이곳 공원 이름이 왜 워싱턴인지는 사연이 있다. 예전에 미국인들이 이곳에 와서 일했는데 그때 어디 가냐고 물으면 '워싱턴에 가서 일 한다'고 대답하면서 이곳을 자연스럽게 워싱턴 국립공원으로 불렀단다. 보네르와 미국 본토가 가까워서일까. 보네르 곳곳에서 미국을 느끼게 하는 마을과 공원이 있다. 우리도 이곳 보네를 탐방을 마치면 미국 본토 뉴욕으로 간다. 서서히 보네르 여정이 마무리 되고 있다. 아쉬운 시간이다.
* 보네르 풍력계
워싱턴 슬레그바이 국립공원에서 항구로 이동하려고 나오니 풍력계 바람개비가 높이 솟구쳐 올라 돌아간다. 보네르는 태양광 풍력계로 에너지 얻는다. 버스가 출발하여 가는 동안 계속 보였다. 점점 풍력계 숫자가 많아진다. 풍요로운 정경이다. 보네르는 월급에서 35%를 세금으로 낸다. 의료보험은 5% 낸다. 네덜란드 정책으로 복지가 잘 되어 있다. 가난한 자는 최소한의 생활비가 지급되어 거지가 없다. 병원이 단 한 곳 밖에 없다. 그러나 24시간 운영하고 700명이 근무한다. 로테이션 근무하기 때문에 직원이 많다. 위험한 병은 콜롬비아로 가서 고친다. 바다 가운데 작은 영토에서도 아주 평화롭게 잘 사는 현실을 들으며, 보며 배운다.
* 보네르 개인 농토
보네르는 농업하기에 부적격한 토양이다. 집 주변에 땅을 일구고 자기네 식구들 먹거리용으로 가지, 호박, 라임, 야자 등을 키우는 정도다. 토양의 질은 나쁘지 않다. 11월부터 우기다. 그러나 우기에도 비가 22인치 정도만 온다. 보네르는 건조한 지역이다. 링컨 빌라지 근처에서 개인 농토를 조금 보았다. 알로에를 신은 농토가 보였다. 선인장으로 울타리를 조성했다. 들녘이 온통 우거진 풀과 나무일뿐 밭이 없는 것도, 그 작은 밭의 울타리가 선인장인 것도 우리 나라와는 너무 달라, 매우 신비로운 풍경이다. 이런 것들이 세계여행에서 보는 지식이고 산체험의 배움이다. 모두 소중하게 담아간다.
* 보네르 들녘 선인장
들녘에 선인장이 많다.군락을 이루며 큰 나무처럼 살고 있다. 들녘을 조금 지나자 장애자 학교를 지나간다. 다시 들녘이 나오고 계단식 바위가 있다. 저 바위에 올라가서 노예들을 감사했단다. 왕의 저장고에서, 염전에서 일을 잘 하는지 감시했다. 링컨 빌리지 노예들이 아까 본 염전까지 엄창나게 먼 거리를 걸러가서 일을 했다. 그리고 다시 링컨 빌리지로 돌아왔다. 야생 당나귀 한 마리가 도로에 지나간다. 키우는 것이 아니다. 신기한 풍경들을 참 많이도 본다.
* 보네르 동쪽 바다
내가 버스에 앉아있는 왼쪽 창문으로 바다가 보인다. 그런데 아까 보았던 바다와는 다르다. 조금 먼 거리인데도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풍경이 사나운 바다로 보인다. 파도가 하얗게 올라와 해변에 솟구쳐 부서진다. 바로 동쪽 바다다. 우리는 처음에 남쪽의 염전을 보았고, 지금은 북쪽의 해양국립공원과 워싱턴 슬레그바이 공원을 보고 항구로 가고 있다. 동쪽 카리브해의 파도가 심히 몰아치고 있는 것이다. 보네르 섬 대부분은 정부에서 관리한다. 개인이 렌트해서 사용 가능하다. 보네를 교육은 만 4세부터 시작해서 3단계로 초,중,고 과정을 공부한다. 네덜란드식 교육체계다. 언어를 4개 사용한다. 영어,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파피아민트어다. 모두 학교에서배운다. 대학은 네덜란드로 가면 학비가 지원 된다. 그러나 미국 등 다른 나라로 가면 지원을 안 해준다. 보네르는 Lowland로 '좋은 땅'이란 뜻이다. 크랄렌디크 해변은 산호군락지다. 우리 크루즈 배가 정박한 바로 그 바다다. 보네르에는 중국식당과 중국인이 있다. 한국인은 없단다. 고등학교를 지나간다. 초등학교에서는 애프터스쿨로 방과 후 학교가 있다. 부모가 직장 다니는 아이들을 돌봐준다. 보네르에 대하여 이런저런 것들을 배우며 참 뜻깊은 시간이다. 나는 귀로 듣고, 메모장에 적고, 눈으로 보고, 가슴에서 느끼고, 두뇌에 저장하고 사진에 담아간다. 먼 후일 우리 부부가 오늘이 그리울 때 꺼내 볼 것이다. 참으로 행복하고 보람된 소중한 여정이다.
* 보네르 크랄렌디크 항구 크루즈 배
보네를 중심 시가지를 지나 항구에 오니 크루즈 배 노르웨이지안 젬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바다 위에 거대한 몸체로 떠 있다. 얼마나 장하고 든든한지 모른다. 다른 배도 한 척 들어와 있다.
* 보네르 크랄렌디크 항구 홍학 조형물
항구의 다리 입구에 커다란 홍학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홍학 색상으로 붉은 색 슬리퍼를 이용한 작품이다. 분홍색깔의 어미와 아직 하얀 색깔의 아기가 마주보고 있다. 어미로부터 먹이를 받아 먹는 정경이다. 아주 잘 만든 작품이다. 우리 부부의 선실인 9528호실에서도 보이던 작품이다. 홍학이 많은 나라임을 알리는 아름다운 전시물이다.
* 보네르 크랄렌디크 항구 배 재승선
아름다운 풍경의 항구를 조망하며 배에 재승선하였다. 먼제 뷔페식당으로 가서 중식을 하였다. 참으로 맛있는 식사다. 풍성하게 차려주는 승무원들에게 늘 고맙다. 과일도, 아이스크림도, 반찬도 언제나 맛있다. 식사 후에는 수영장에 가서 온탕과 수영풀에 번갈아 들어가며 피로를 풀었다. 40분 정도 수영장에서 휴식하고 룸으로 와서 휴식했다.
* 보네르 크랄렌디크 항구 비경
출항 시간이 아직 넉넉하여서 항구 주변을 살펴보았다. 탱탱한 푸른 하늘과 솜털 같은 흰구름이 보네르의 평평하고 너른 품를 더욱 빛내준다. 배 바로 앞에는 사각진 연못에 바닷물이 들어와 해안의 고운 건물들과 함께 비경을 이룬다. 파란색 우체국도 있고, 중심상가도 있고, 홍학 조각품도 있고, 이 고운 풍경을 어찌 두고 갈까. 크루즈 배를 잘 이끌어주고, 잘 보내주는 예인선도 몇 척 있고 어느 것 하나 모자람 없는 보네르가 이별을 앞두고 자꾸 그리운 정경으로 가슴에 맺힌다. 그래, 잊지 않으마. 두고두고 그리운 마음으로 기억할게. 이제 아쉽지만 보내고, 떠나가야할 출항, 서서히 준비를 해야할 시간이다. 중남미에서의 마지막 기항지 관광이 막을 내리고 있다. 이제 미국 뉴욕으로 간다.
* 보네르 크랄렌디크 항구출항
보네르 크랄렌디크 항구를 출항한다. 물결 치며 배가 움직인다. 크루즈 여행에서는 기항지의 입항과 출항시에 보는 경관이 장관이다. 육로여행으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기막힌 광경이 큰 선물로 제공된다. 배의 선실이 높은 층에 있어서 더욱 전경을 잘 볼 수있다. 지금도 눈앞에 보네르의 전경이 명화로 뜬다. 정녕 잊지 못할 환희의 순간이다. 누군가 나에게 아루바가, 퀴라소가, 보네르가 어떤 나라더냐고 묻는다면 나는 큰 소리로 대답할 것이다. 한번 가 보시라고...그것만이 최상의 답이다. 우리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이 작은 중남미의 영토가, 제대로 된 국가도 아닌 섬의 살점이 이토록 아름답고 영롱할 줄 정말 몰랐다. 이 세 나라 모두 동일한 무게로 환상의 여행지였다.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내 생애 동안 다시 올 수 있을까. 기회가 된다해도 다른 세계로 가겠지. 여길 다시 오겠는가. 그래서 더욱 소중하여 가슴에, 두 눈에, 뇌리에 자꾸 담고, 또 담아간다. 이제 3일 동안 전일항해로 미국 뉴욕항으로 질주한다. 배가 빨리 간다. 쏴 쏴 파도가 심히 외쳐댄다. 배에게 힘을 실어주는 듯하다.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고국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2019년 2월 12일 화요일 전일항해 1일차
* 전일항해 1일차 9528호선실 발코니 바다
아침 7시에 기상했다. 배는 계속 달린다. 이젠 기항지 관광이 없이 미국 뉴욕까지 간다. 배에서 오전 9시~12시까지 쇼핑타임이 있다. 7층 오키즈 가든에서 한다. 나도 가서 필요한 기념품을 샀다. 두 아들 며느리에게 ㅈㄹ 가방 종류를 주로 샀다. 실용적으로 사용할 우리 부부의 썬글라스와 모자도 샀다. 손녀들에게 줄 작고 귀여운 멜가방도 세 개 샀다. 낮이라서 배가 그리 빨리 가진 않는다. 뷔페식당에서 중식을 하는데 갈매기가 날고 있다. 작은새도 날아간다. 작은새는 물 속 잠수도 하고 떠 있기도한다. 저 순간 인간보다 위대한 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청청하다. 무원의 바다 대서양을 거침없이 질주한다. 아무 것도 없는 망망대해다. 서서히 전일항해 첫날의 하루가 저물어 간다. 짐 정리로 가방 2개를 대충 싸놓았다. 내일 마지막으로 잘 쌀 것이다. 두 아들에게 카톡으로 교신도 했다. 크루즈 여행의 소중한 남은 하루가 어둠 속으로 잠들고 있다.
2019년 2월 13일 4요일 전일항해 2일차
* 전일항해 2일차 9528호선실 모니터 항로
전일항해 2일차다. 크루즈 배가 뉴욕으로 계속 질주한다. 아침 7시에 일어나 발코니에 나가보니 비가 왔다. 간밤에 태평양 바다에 비가 온것이다. 발코니 바닥에, 유리창에, 난간에 비를 뿌렸다. 조식을 하려고 12층 뷔페식당에 가는데 수영장 바닥에도 비가 내렸다. 물기가 흐른다. 오랫만에 보는 하늘의 비다. 선실 티브이 모니터에는 항로가 뜬다. 크루즈 배가 지금 태평양을 가로질러 미국 뉴욕으로 올라가고 있다. 미국 남무 마이애미 근처를 지나간다. 주변에 막아주는 영토가 없어서 태평양 바람이 세체게 불 때가 있다. 오늘은 스마트폰 사진을 정리했다 그 동안 찍기만 한 갤러리의 사진들을 버릴 것은 삭제시켰다. 전일항해 하는 동안 여유로운 휴식도 보람된 여정이다.
* 전일항해 2일차 9528호선실 발코니 잔잔한바다
오후에 중식 후 발코니에 나가보니 해가 바다를 찬란하게 비춘다. 발코니에도 눈부시게 햇살이 부서진다. 비경이다. 망망한 대해에 또 다른 배도 한 척 떠 있다. 사진을 찍어서 두 아들에게 전송했다.
* 전일항해 2일차 6층 세미나실 영화 '허삼관' 관람
오후 3시부터 6층 세미나실에서 한국영화 '허삼관'을 관람했다. 제목이 생소한데 내용은 상당히 좋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0년대 6.25동란 후의 혼란스런 사회가 배경이다. 허삼관(하정우)이 시장에서 강냉이를 장사를 하는 여인(하지원)을 만나 청혼하여 결혼한다. 그런데 그 여인은 하소영이라는 남자와 결혼하려던 여자였다. 1964년 이 부부에게는 아들이 셋이다. 일남이, 이남이, 삼남이다. 그런데 일남이가 하소영을 닮았다고 소문이 나돈다. 하정우는 일남이를 데리고 혈액형 검사를 했다. 그런데 일남이가 AB형이다. 허사관은 O형, 아내는 A형, 하소영은 B형이다. 일남이가 AB형으로 나왔으니 그의 아버지는 분명 하소영이다. 이 사실을 안 날부터 허삼관은 아내를 괴롭힌다. 아내는 하소영과 단 한 번 잤단다. 강제 강간이다. 일남이도 미워한다. 11년을 먹여 살린 것이 억울하단다. 데릴사위로 살아서 종달새로 산 것도 분한데 남의 새끼를 11년이나 키운 것이 속상해서다. 일남이는 허삼관이 하소영가 너의 아버지라고 말해서 허삼관이 친아버지가 아님을 안다. 그래도 성품이 착한 일남이는 올바르게 성장한다. 하소영이 집에 가서 그를 아버지라 부르니, 하소영은 나는 아들이 없다고, 딸만 두 명이라고 하며 내쫓는다. 그러던 어느날 하소영이 죽게 되었다. 무당은 아들이 와서 영혼을 부르면 살아난다는 것이다. 하소영 부인이 일남이를 대학까지 공부시켜준다고 남편을 살려달란다. 일남이는 무서운 무당 앞에서 죽어가는 하소영을 강압으로 '아버지 가지 마세요'를 연발한다. 그때 창문에 잠시 허삼관이 들여다보는데 일남이가 그의 얼굴을 보았다. 순간 울먹이며 '아버지 가지 마세요'를 소리친다. 그것은 하소영이 아니라 허삼관에게 하는 말이다. 창문 밑에 앉아있던 허삼관이 그 울부짖는 일남이 음성을 듣고 문을 열고 들어와 다 엎어버리고 일남이가 무서워 하지 않느냐며 일남이를 엎고 집으로 달려간다.
나는 그때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허삼관이 간간이 일남이를 미워했지만 '아버지 가지 마세요. 아버지 나를 집으로 데려가 주세요' 그 안타까운 소리에 일남이를 엎고 달리는 모습은 참으로 인간적인 장면이었다. 휴먼 감동이다.
그런데 그만 일남이가 아프다. 뇌염에 걸렸다. 서울 동대문 병원에 입원했는데 치료비가 3만원이다. 허삼관은 자기가 피를 팔아 치료비를 벌려고 피를 팔러 다닌다. 한 번 피를 팔때 3천원을 받는다. 쓰러지면서까지 돈을 마련하여 병원에 갔으나 돈이 모자라 들어가지 못하고 병원 주변에 서성인다. 그떄 일남이가 병환에서 떨치고 일어나 창밖을 보니 아버지 허삼관이 보인다. 병실을 박차고 달려가 거리에서 아버지를 찾는다. 부자가 상봉한다. 알고보니 아내가 장기를 팔아 일남이 병을 고쳐준 것이다. 모두 함께 퇴원하여 집에 와서 다섯 식구가 먹고 싶었던 만두와 붕어찜을 요리해 먹으며 행복하게 끝난다.
허삼관은 참 많은것을 담고 있는 영화다. 잘 먹고, 잘 사는 오늘의 우리가 부끄러운 느낌이다. 전쟁으로 굶주린 선대의 아픈 이야기다. 일터가 없어 피를 팔아야 몫돈을 만지는 현실이 슬펐다. 아내가 혼전 임심한 아들을 받아들이는 허삼관이 대단했다. 가끔씩 아내와 일남이를 구박하면서도 지켜주는 허삼관에게서 가슴 뭉클한 인잔적인 정이 흐른다. 품평회를 열어 토론하고 싶은 영화다. 참으로 오랫만에 명작영화를 보았다. 크루즈 선사측에서 제공한 것이다. 고마웠다. 한국인솔자 김혜진 실장에게도 고마웠다.
* 전일항해 2일차 발코니에서 본 일몰비경
영화를 다 관람한 후 우리 방에 와서 일몰 비경을 보고 태평양 일몰이 비경이다. 점 하나 없는 광활한 바다에 오직 눈부신 태양만이 포효한다. 이제 바다로 넘어가려는 장렬한 몸부림이다. 구름도 장엄한 태양 주변에서 태양빛을 받아주며 함께 뜨거운 포효다. 결코 잊지 못한 눈부심이다. 두 아들에게 카톡으로 소식을 전했다. 모니터 항로 사진과 일몰비경 사진을 보냈다.
* 전일항해 2일차 7층 오키즈가든 아시안메뉴 석식
오후 7시 대극장 공연으로 공을 가지고 하는 코미디 쇼를 관람했다. 그리고 저녁식사는 7층 오키즈 가든에 가서 아시안 메뉴로 했다. 각 대륙별로 메뉴가 나오는 식당이다. 우리 부부는 아시안 메뉴판과 자리를 배정받아 맛있는 식사를 한다. 오늘은 해물우동, 쇠고기볶음밥, 녹차아이스크림, 과일샐러드 등을 주문하여 먹었다. 참 맛있다. 남편은 뷔페식당에서 물을 지극 정성으로 떠 온다. 내일 아침 공복에 먹응ㄹ 물이다. 참 고마운 남편이다.
* 전일항해 3일차 선실 원숭이 수건인형
우리 부부가 석식 후 선실에 오니 수영 타올로 원숭이를 크게 만들어 거울 위에 걸어두었다. 방을 정리해주는 도우미 남자의 정성스런 작품이다. 다른 날에도 여러 가지 동물들, 코끼리, 쥐. 토끼 등을 수선으로 만들에 침대 위에 놓곤 했다. 오늘의 원숭이는 너무 멋있다. 그래서 하선하는 날까지 두고 보기로 했다. 승무원들이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승객을 즐겁고 행복한 크루즈 여행이 되도록 도와주는 모습이 참으로 흐뭇하다.
2019년 2월 14일 목요일 전일항해 3일차
* 전일항해 3일차 선실 발코니에서 본 대서양 바다 비경
오늘이 전일항해 마지막 날이다. 짐을 정리하고 마무리로 짐텍까지 붙여 놓았다. 한국일행은 모두 라임색 텍이다. 인솔자가 주었던 라면을 끓여서, 역시 나누어준 마늘쫑 장아지와 룸에서 점심으로 먹었다. 기가 막히게 맛있는 한국음식이다. 그리고 뷔페식당에 가서 차와 우유를 마셨다. 그 사이 청소를 해달라고 부탁의 뜻으로 현과문 앞에 있는 종이카드를 노란색으로 돌려 놓았다. 날씨가 상당히 쌀쌀해졌다. 지금 16도라는데 내일은 뉴욕 기온이 0도~9도라니 추울 듯하다. 겨울옷을 빼놓았다. 아쉬움으로 발코니에 나가보니 바닷물 색이 코발트 빛으로 비경이다. 배가 빨리 질주하여 하얀 물살이 따라오며 더욱 비경을 선사한다.
* 전일항해 3일차 선실 9528호 복도 정경
곧 미국 뉴욕에 도착하는 날이 다가오는 아쉬운 순간이다. 내일이면 뉴욕항에 하선한다. 복도로 나가서 매일 드나들던 룸 9528호실 문앞에서 그 정경을 사진에 담았다. 긴 복도와 카드키로 따고 드나들던 추억을 저장해간다. 먼 후일 그리운 날에 두고두고 볼 것이다. 저녁식사를 하고 방에 오니 6시 조금 넘은 시간인데 해가 태평양 바다에 빠지고 있다. 두 아들에게도 마지막 편지를 카톡으로 보냈다. 모두가 마지막으로 접히는 아쉽고, 소중한 순간들이다.
* 전일항해 3일차 대극장 마지막 공연
저녁공연도 마지막이다. 웅장한 무대장치로 꾸며 놓고 멋진 공연을 선사한다. 마지막에는 국기를 들고 나와 다 같이 인사를 한다. 정성껏 공연해준 배우와 가수들에게 고마웠다.
* 전일항해 3일차 대극장 선장과 승무원 작별인사
공연 후에는 크루즈 배 노르웨이지안 NCL 젬호의 선장과 승무원들의 인사가 있었다. 각자의 위치에서 승객을 위해 최선을 다한 선장과 모든 승무원들에게 참으로 고마웠다. 선장은 크로아티아 남자인데 아주 잘 생겼다. 고별 인사에 박수를 많이 받았다. 지위를 막론하고 모두 훌륭한 승무원들이다. 저들이 있어 21박 22일간의 파나마 운하 북중미 크루즈 여행이 보람되고 소중하개 막을 내리고 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2019년 2월 15일 금요일 미국 뉴욕 입항, 뉴욕 시티투어
* 크루즈 배 미국 뉴욕항 진입
아침 일찍 발코니에 나가보니 배가 뉴욕항으로 진입하고 있다. 뉴욕의 많은 건물들이 항구 주변에 즐비하다. 자유의 여신상이 지나간다. 크루즈 배의 13층 갑판에 올라가서 조망했다. 뉴욕의 우람한 건물들 사이로 거대한 크루즈 배가 들어간다. 뉴욕항(New York Harbor)은 뉴욕 근처의 허드슨 강 하구 근처에 있는 강과 만을 같이 부르는 지리적인 용어이다. 즉 미국 뉴욕주와 뉴저지주 사이의 광범위한 항만 지대다. 허드슨강과 뉴욕시 주변 강의 강어귀 및 만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으로, 총 면적 3,100km2, 총 해안선 길이 1,600km에 달한다. 전성기에는 맨해튼, 브루클린, 퀸즈, 브롱크스, 스태이튼 아일랜드, 퍼스앰보이, 엘리자베스, 베이온, 뉴어크, 저지시티, 호보컨, 위호켄에 위치한 11개의 항구가 포함되었다. 뉴욕뉴저지항만관리청에서 운영 관리한다. 미국 동부의 관문항으로 1800년대 세계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급성장하였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큰 원유 수입항이자, 두 번째로 큰 컨테이너항이다. 1950년대 이후 여객 서비스는 감소하였으나, 일부 구간에서 크루즈, 통근 페리, 관광 유람선이 운행되고 있다. 오늘 이곳에서 곧 하선하여 뉴욕을 탐방할것이다.
* 크루즈 배 13층 갑판에서 본 뉴욕 풍경
배의 13층 갑판에서 보는 뉴욕 풍경만으로도 황홀한 정경이다. 그 사이로 흐르는 강물도 비경이다. 그리 넓지 않은 폭의 수로를 따라 도심의 건물 틈 사이로 파고드는 크루즈 배도 장관이다. 아주 유유히 배가 뉴욕의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곳이 뉴욕이라고 외치는 듯하다. 왜 뉴욕이 그리 회자 되는지 조금은 알게 하는 진풍경이다.
* 미국 뉴욕항 기항
드디어 배가 뉴욕항에 정박했다. 더욱 비경의 건물 숲이 눈앞에 다가온다. 항구에 성조기도 나부낀다. 출근시간으로 자동차 행렬도 꼬리를 잇는다. 분주함 속에 멋진 낭만이 깃든 뉴욕항이다. 2월기온이 -3~4도로 우리 나라와 비슷하다. 오늘은 그리 추운 날씨는 아니다.
뉴욕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국제적인 지위향상과 더불어 세계경제에 대한 지배적 지위가 한층 강화되었다. 1946년 국제연합 UN본부가 설치된 후에는 국제정치의 각축장이 되었다. 뉴욕주의 남동단, 뉴욕만으로 흘러드는 허드슨강 어귀 일대에 위치한다. 허드슨강, 이스트강, 할렘강, 뉴욕만 및 롱아일랜드 수로 등에 의하여 구획된다. 대도시권으로서의 뉴욕은 시역 밖으로 뻗어, 뉴저지, 코네티컷의 두 주에도 미치고 있다. 뉴욕시는 맨해튼, 브롱크스, 브루클린, 퀸스 및 스태튼섬의 5개구로 이루어져 있다. 맨해튼은 시의 중심부이며, 그 남단에 금융 중심지인 월가가 있다. 월가에서 북동쪽으로 브로드웨이와, 이것과 비스듬히 교차하는 5번가의 두 대로가 시를 종관하고 있다. 브로드웨이의 42번가는 타임스스퀘어로 시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UN 본부는 동쪽 이스트 강가에 있다. 맨해튼섬의 북동부는 흑인 거주지구로 알려진 할렘이다. 여기서부터 할렘강을 사이에 두고 롱아일랜드의 남단에 위치한 브루클린구는 맨해튼섬과는 맨해튼교와 브루클린교로 연결되어 있다. 뉴욕은 롱아일랜드 해협, 대서양, 허드슨 강, 그리고 온갖 유형의 만·해협·개울로 둘러싸여 선적과 휴양에 이용될 수 있는 연안의 길이가 930km나 된다.
뉴욕은 또한 대서양 연안의 주 가운데 하나이다. 북쪽은 온타리오 호와 캐나다의 온타리오, 퀘벡 주, 동쪽은 매사추세츠 주 등과 접하고, 남동쪽 끝은 대서양과 접한다. 남쪽 경계는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주, 서쪽 경계는 펜실베이니아 주, 이리 호, 온타리오 호, 캐나다의 온타리오 주 등이다. 주도는 올버니이다. 뉴욕 주에는 원래 2종류의 주요 인디언 집단들이 살았다. 그들은 프렌치-인디언 전쟁 때 영국인들을 지지했다. 헬리 허드슨이 그의 이름을 딴 허드슨 강을 1609년 탐험한 뒤 네덜란드의 식민지로 처음 개척되었다. 네덜란드인들은 1624년에 지금의 올버니를 건설했고, 1625년에 뉴앰스터댐을 건설했다. 1664년에 영국인들이 뉴앰스터댐을 지배하게 되자 뉴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763년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 프랑스가 영국에 패배하자 뉴잉글랜드 지방 사람들이 뉴욕으로 활발히 이주하기 시작했다. 뉴욕 주는 미합중국 헌법을 승인한 11번째 주였다. 1810년경에 뉴욕은 가장 많은 인구가 사는 주가 되었다. 뉴욕 주는 지형학적으로, 여러 지역으로 구분된다. 허드슨모호크 저지대는 허드슨 강을 따라 북으로 올버니 시까지 뻗고, 거기서 모호크 강을 따라 서쪽으로 펼쳐진다. 식민지시대부터 뉴욕 주의 성장은 주로 이민에 기인한다. 20세기말 현재 뉴욕 주 사람들 8명 가운데 1명이 외국 태생이다. 흑인이 전체 인구의 1/8 이상을 차지하며, 라틴 아메리카계 사람들도 거의 1/10 가량 된다. 뉴욕시티 대도시권에는 3개의 국제공항이 있다. 주 전체에 걸쳐 광대한 도로망을 갖추고 있으며 철도망도 잘 짜여져 있다. 뉴욕시티는 미국 금융의 중심지이고, 전국의 주요 주식거래소인 증권 거래소가 있다. 뉴욕은 미국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한데 패션, 극장, 텔레비전 방송, 음악의 여러 유행들이 이곳에서 생긴다. 또한 뉴욕시티는 오랫동안 뉴스 매체의 세계적인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 뉴욕은 세계인들에게 가 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 나 역시 꼭 와 보고 싶은 곳이었다. 오늘 미국 뉴욕을 자세히 보고 잘 배워갈 것이다.
* 미국 뉴욕 항구 하선
배의 8층 오쉬한즈 가든에서 모여 하선을 대기했다. 배에서 지난 시간들이 모두 다 아쉬움으로 다가오며 더욱 정감이 가는 선내 정경이다. 우리 차례가 되어 서둘러 하선했다. 항구 터미널에서 수속 절차를 밟아 뉴욕항으로 들어가는데 줄이 무척 길다. 오랜 시간이 걸려 입국수속을 마치고 미국 뉴욕에 진입했다.
*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시가지
뉴욕의 번화가 브로드웨이를 지나간다. 뉴욕 중심부 거리다. 바둑판 모양으로 질서정연하게 놓여진 맨해튼 길을 비스듬하게 가로지르는 길이 브로드웨이다. 맨해튼 남쪽 끝에서 북쪽 끝을 잇는 물리적인 길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연극, 뮤지컬계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타임스 스퀘어에 자리한 극장들을 중심으로 지금도 활발하게 영화와 공연이 상연되고 있다. 브로드웨이의 이른바 극장 지구는 웨스트 42번가에서 웨스트 53번가에 걸친 비스듬한 길로, 40여 개의 극장이 자리하고 있다. <빌리 엘리어트>, <위키드>, <라이온 킹>, <오페라의 유령>, <맘마미아> 등 유명 뮤지컬들이 올려지며 하루에 2만 명이 넘는 관객이 모여든다. 공연이 끝나는 22시 반경에는 관람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러시아워를 연상케 하고 레스토랑과 바가 행복한 비명을 지른다. 여러 주요 건물들이 보인다. 뉴욕의 대학은 교정이 없다. 건물 외벽에 학교의 깃발만 걸면 그곳이 대학이란다. 뉴욕에 교정 있는 대학이 단 하나란다. 우리 나라의 대학 교정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방통행로를 따라 버스가 간다. 뉴욕의 동쪽과 서쪽을 가르는 도로다. 워싱턴 광장도 지나간다. 크루즈 배가 북쪽의 허드슨 강을 따라서 들어온 것이다.허드슨은 영국인 이름이다. 우리는 지금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고 있다. 브로드웨이 도심을 계속 지나간다. 모두 상가다. 패션을 창조하는 곳이다.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관광객들이다. 정부 건물이 공원 곁에 있다. 허드슨에 대하여, 영국과 네덜란드 전쟁, 프랑스와 영국 전쟁 등 미국 뉴욕에서 일어난 역사에 대하여 가이드가 설명해 주었다. 간간이 건물 사이로 9.11 테러로 무너졌던 주변의 건물이 보인다. 소슬한 풍경이다. 사람들과 건물들로 매우 복잡하지만 그로 인해 빛나는 거리다.
* 미국 뉴욕 한인타운
중식을 하기 위해 한인타운으로 갔다. 뉴욕의 한인타운은 매우 번창하였다. 으리으리한 건물 소유주가 한인이기도 하고, 한글 상호가 건물 외벽에서 올곧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걸으며 우리 교포의 정을 느끼고, 그들의 피땀으로 일군 소중한 가치를 음미해 보았다.
* 뉴욕 시가지 공원
뉴욕 시가지에서 보기 드문 공원이다. 아주 빡빡한 빌딩 숲만 보다가 작은 규모지만 공원을 보니 여유롭다. 주변엔 고풍스런 건물이 공원을 감싸고 있다. 동상도 있어 숙여해진다. 계절이 한국과 비슷하여 지금은 2월, 아직 겨울로 나무들이 앙상하다.
* 뉴욕 월스트리트 황소 동상
뉴욕 브로드웨이와 만나는 월스트리트 자동차로 분주한 도로변에 청동 황소 동상이 있다. 금방 솟구쳐 튀어오를 듯 아매우 크고 생동감 넘치는 모양새다. 그 작픔 이름도 '돌진하는 황소 동상'다. 총 3,200kg의 동으로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동상의 머리를 만지며 사진을 찍으려 장사진이다. 우리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황소 앞에서 대충 기념사진만 찍었다. 이곳은 증권거래소와 인접한 곳이다. 그래서 월가의 랜드마크 중 하나다. 주식시장에서 황소는 주가의 번창을 뜻하기도 한다. 특히 이 황소의 고환을 만지면 큰 부자가 되는 행운를 얻는다는 속설이 있다. 땅으로 축 늘어진 고환은 사람들이 하도 만져 반질반질하게 빛난다. 우리 부부도 만져 보았다. 황소의 코나 뿔을 만져도 동일한 행운이 찾아온단다. 1987년 미국의 중시 폭락으로 시민들이 절망에 빠지자 이탈리아 출신 조각가 아트로 디메디카는 뉴욕시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 1989년 황소 동상을 제작했다. 원래는 증권거래소 앞에 세웠다. 증권거래소에서 이전해달라는 요청으로 이곳 도로변에 이동시킨 것이다. ‘돌진하는 황소상’ 10m 앞에 ‘겁 없는 소녀상'이 서 있었다. 2017년 3월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세워진 조형물이다. 키 130㎝ 정도인 소녀가 자기 몸의 30배 쯤 되는 황소 앞에서 양팔을 허리춤에 댄 채 서 있는 이 동상은 뉴욕 시민과 관광객들의 인기를 끌었다. 어떤 금융사에서 여성의 날을 맞이한 기념으로 미국의 조각가에게 의뢰해 이 황소 앞에 '겁없는 소녀'라는 동상을 설치했다. 여성의 리더십 증진을 표현하기 위해서라는 의미로 설치했다. 황소상의 제작자는 이 소녀상 설치에 항의했다. 황소상은 힘과 자유를 상징하는데, 이 소녀상 때문에 마치 황소상이 차별과 권력을 상징하는 모습처럼 변질되었다는 항변이다. 결국 1년간의 논쟁 끝에 소녀상은 황소상에서 300m 거리에 있는 뉴욕 증권거래소 앞으로 이동시켰다. 2019년 2월 오늘은 황소 동상만 커다랗게 힘차게 서서 월가를 지키고 있다. 증권가가 황소처럼 우직하게 번창하길 비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 미국의 번영을 기원하는 한 단면이라고 느껴졌다. 어디 미국만일까. 세계의 모든 국가들에게도 적용시켜 다 함께 저 황소와 같은 기백으로 성장하고 번창하길 소망해 본다.
* 뉴욕 증권 거래소 앞 소녀상
조금 전에 보았던 황소 동상 앞에 있었다는 소녀상이 증권 거래서 바로 앞의 거리에 서 있다. 아담한 소녀가 당차게 두 손을 허리에 대고 두 발을 벌리며 고개를 반짝 들ㄹ고 서 있다. 뉴욕 월가의 황소 동상과 소녀상은 원래는 마주 보고 있었다. 2017년 뉴욕 월가에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했다. 키 130cm 크기의 '겁 없는 소녀상'이다.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과 여성차별에 대한 항의를 상징한다. 월가와 대기업에서도 남녀 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소녀상 발 밑에는 '여성 리더쉽의 힘을 깨달아라. 그녀가 바꾼다'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월가에서 작은 체구의 소녀가 황소상 앞에 당당하게 맞선 것을 보며, 남성 힘 앞에 여성의 진출을 항변함에 사회적 논의를 촉발시켰다. 황소상의 조각가는 30년 이상 월가의 자리를 지켰던 예술이 소녀상 때문에 잘못 판단되고 있다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황소상은 원래 낙천적이고 긍정의 힘을 묘사했고, 평화의 힘과 자유, 그리고 사랑을 담은 메시지인데 소녀상으로 인해 오히려 부정과 위협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녀상은 미국 기업 고위층에 여성이 현저히 적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세운 조각이기도 했다. 결국 이 소녀상은 2018년까지 1년 정도 황소상 앞에 있다가 이곳 증권거래소 앞으로 옮겨왔다. 무심코 보면 그냥 지나칠 정도의 소녀상인데 큰 의미가 담긴 소녀상이기에 예사롭지 않게 살펴보았다.
* 뉴욕 증권 거래소
황소 동상에서 소녀 동상으로 오니 바로 앞에 증권 거래소가 있다. 아우 웅장한 건물이다. 큰 성조기가 벽면에 걸려 있다. 세계적인 상업도시로 미국 뉴욕의 경제를 좌우하는 중심가인 월스트리트에 있다. 지하철역도 가까이 있다. 길목이 사방으로 이어지며 고층 건물들이 하늘 닿을 듯 우람하다. 뉴욕 증권 거래소는 9.11 후 테러 철창 보안이다. 바라보는 것도 아득하다. 2004년부터는 내부를 외부에 공개하는 것도 금지다. 증권 거래소 바로 앞에는 조지 대통령 동상이 서 있다. 또한 이곳은 금융 계열 건물이 밀집해 있어 사업 업무 등으로 분주한 거리다. 증궉 거래소 앞은 지금도 매우 복잡한 거리다.
* 뉴욕 조지 워싱턴 동상
증권 거래소와 조지 워싱턴 대통령 동상은 대각의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이곳은 브로드웨이를 지나 들어온 월스트리트가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을 닮은 건물이 동상 뒤에서 웅장하다. 조지 워싱턴은 미국 초대 대통령이다. 1789년 이곳 건물에서 취임선서를 했다. 그 당시에는 뉴욕이 미국 최초의 수도가 되어 이곳에서 선서를 한 것이다. 1775년~1783년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워싱턴은 식민지군 사령관으로 취임해 영국과의 오랜 전쟁에서 갖은 역경을 극복하고 끝내 승리를 거두어 미국의 독립에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1789년 새롭게 제정된 미연방 헌법에 따라 실시된 선거에서 워싱턴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다. 그는 재임 선출되어 1789년~1797년까지 8년 동안 미국을 다스렸다. 그리고 1796년 3선 대통령으로 추대를 받지만 민주주의 전통을 세워야 한다는 이유로 끝내 사양하고 두 번에 걸친 임기를 끝냈다. 그는 사저가 있는 버지니아 주로 돌아갔고, 그로부터 3년 뒤 세상을 떠난다. 그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고 결혼도 부유한 집안의 여자와 했다. 그로인해 큰 재산가였다. 미국의 태동기에 나라가 발전할 수 있도록 굳건한 기반을 만든 그의 공적은 지금까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생전에 미국 건국에 대한 그의 영향이 컸던 만큼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부터 핵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에 이르기까지 그를 기리는 흔적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은 갔어도 동상은 늠름한 자태로 서서 아직도 미국을 지키는 듯하다.
* 뉴욕 이스트강 유람선 선착장
증권 거래소와 조지 워싱턴 동상을 보고 계속 금융가 거리 브로드웨이를 걸어서 유람선 선착장으로 이동 했다. 골목 끝에 시티뱅크가 보인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뉴욕 이스트강이 보이고 유람선이 보인다. 강을 따라 선착장으로 갔다. 벌써 유람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서둘러서 분주한 걸음으로 갔다.
* 뉴욕 이스트강 유람선 승선
뉴욕 이스트강 유람선을 승선했다. 먼저 배의 갑판으로 올라갔다. 갑판에 의자도 놓여 있어 앉기도 하고 일어서서 보기도 했다. 흔들리며 조금 두려웠지만 강 양편으로 전개되는 뉴욕의 비경이 바로 잠재운다. 여기는 뉴욕 동쪽 강이어서 이스트강으로 부른다. 크루즈 배가 진입한 강은 서쪽 강으로 허드슨강이다. 뉴욕은 섬나라다. 해저터널이 62개다. 뉴욕 인구는 3천만 명이다. 유동인구는 8백만 명이다. 미국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다. 맨하탄은 180만 명이 거주한다. 맨하탄 강아지는 200만 마리다. 팔자 좋은 강아지들이라고 하여 웃었다. 유람선은 한국어로도 안내방송을 해준다. 우리 일행의 숫자가 많아서라고 한다. 이런 경우는 아주 보기 드물단다. 우람한 빌딩 숲 뉴욕의 전신을 보여주며 질주한다. 우리는 오는 자유의 여신상을 조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정이다. 섬에 있어서 시간 관계상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자유의 여신상을 이 유람선에서 조망할 것이다. 9.11 테러가 일어났던 부근의 뾰족한 건물도 높게 솟구쳐올라 그날의 아픈 기억을 사르고 있다. 우리가 올라갈 엠파이어 스테이트 전망대 빌딩도 보인다. 유람선에서 보는 뉴욕시티의 풍경은 어느 곳을 보아도 장관이다. 과연 뉴욕은 뉴욕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 뉴욕 이스트강 유람선 자유의 여신상 조망
유람선을 타고 한참을 질주한 곳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만났다. 거대한 청동 동상이다. 자유의 여신상 근처에는 뉴욕에서 가장 긴 다리가 있다. 아침에 크루즈 배로 진입하면서 보았던 풍경이 지금 다시 재현되고 있다. 자유의 여신상의 공식 명칭은 ‘세계를 밝혀주는 자유의 상'이다. 미국 뉴욕항으로 들어오는 허드슨강 입구의 리버티섬에 세워진 조각상이다. 프랑스가 1886년에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선물한 것이다. 횃불을 치켜든 거대한 여신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조각이지만 내부에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건축물의 요소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작가 프레데리크-오귀스트 바르톨디가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조각했다. 내부는 에펠탑의 설계자이기도 한 구스타브 에펠이 철골구조물에 대한 설계를 맡았다. 구스타브 에펠은 미국으로 옮기기 위해 자유의 여신상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역할도 맡았다. 여신상의 받침대는 건축가 리차드 헌트가 디자인한 것이다.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진 리버티 섬 바로 앞에는 미국 이민사를 보여 주는 엘리스 섬이 있다. 자유의 여신상 바로 곁의 엘리스 섬에는 최초 이민국 벽돌색 건물도 있다.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엘리스 섬은 가난을 극복하고 자유를 찾기 위해 신대륙으로 이주해 온 이민자라면 누구나 한 번은 거쳐 갔던 곳이다. 초기에는 영국과 독일, 이탈리아, 에스파냐 같은 유럽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중국과 중동, 아프리카 사람들이 이주해 오자 미국은 이민자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기 위해 엘리스 섬에 이민국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이민에 대한 심사가 매우 까다로워져 가난한 이민자와 많은 유색 인종들이 이곳에 머물다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어머니만 이민이 허락되고 아들은 허락되지 않아 돌아가야 하는 아픔도 서려 있는 건물이다. 이민자에 대한 철저한 심사로 유명했던 엘리스 섬의 출입국 관리소는 현재 이민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박물관 1층에는 당시 이민자들이 가져온 가방과 짐을 넣어 왔던 상자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민에 관련된 수많은 사연이 실린 신문기사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어, 미국 이민사에 관하여 알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박물관 2~3층에는 세계 각국에서 뉴욕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초대형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을 보면 어떤 나라에서 이민자들이 왔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민 박물관 앞 공원에는 이곳을 거쳐 간 이민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후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 유람선에서 바라보는 것으로도 100년 전 자유와 희망을 찾아 기회의 땅 뉴욕으로 들어왔던 이민자들의 애환을 느끼게 한다.
자유의 여신상은 배가 움직이는 각도에 따라,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보인다. 참으로 웅장하고 거룩한 여인의 형상이다. 자유와 희망,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가 미국에 준 우정의 상징이다. 프랑스는 미국의 어머니뻘이다. 여신상이 보는 곳으로 6시간 가면 프랑스다. 미국 최대 도시인 뉴욕 맨해튼 바로 앞에 있는 리버티 섬, 당시 지명 베들레 섬에 세웠다. 그리고 미국 독립 100주년인 1876년 7월 4일에 공개하기로 했다. 동상은 프랑스에서 만들고, 동상을 올려놓을 받침대는 미국에서 만들기로 했다. 나라에서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두 나라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 건설하기로 했다. 하지만 프랑스와 미국의 경제 사정이 나빠지면서 모금액은 아주 적어 추진에 힘들었다. 모금 운동은 1875년에 시작되었지만 성금이 목표한 금액보다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자유의 여신상은 1881년에야 겨우 제작에 들어가게 되었다. 제작자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는 자신의 어머니를 여신상의 모델로 삼고, 얼굴의 형태를 만드는 등 기초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나이 많은 어머니가 오랫동안 같은 포즈를 취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는 어머니를 닮은 젊은 여인을 찾아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한 여인을 찾아냈다. 자유의 여신상의 모델은 프랑스 여성인 셈이다. 흥미롭게도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는 모델이었던 그 여인과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는 실물 크기로 동상을 만들기 전에 4분의 1 크기로 축소된 동상을 만들었다. 여러 번 모형을 제작하여 문제점을 해결한 뒤 본격적으로 동상 제작에 들어갔다. 자유의 여신상은 1884년에 드디어 완성되었다. 여신상은 완성되었지만 곧장 미국으로 보낼 수가 없었다. 미국에서 준비하기로 약속한 받침대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역시 받침대를 국민들의 성금으로 만들기로 했지만 성금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이 과정에서 성금 모금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 유명한 신문 발행인 조지프 퓰리처였다. 미국에서 신문사를 운영하던 퓰리처는 자신이 운영하는 ‘더 월드’라는 신문을 통해 모금에 참여해 줄 것을 시민들에게 부탁하는 칼럼을 썼다. 그 결과 1885년 자유의 여신상을 올려놓을 별 모양의 받침대를 완성할 수 있었다. 자유의 여신상에는 온 인류에게 던지는 상징적인 메시지가 숨어 있다. 자유의 여신상은 전쟁, 독재, 가난을 뒤로하고 꿈과 희망을 가슴에 품고 대서양을 건너온 이민자들을 맞아 주었던 자유의 상징이다. 자유의 여신상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가운데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오른손에는 횃불을, 왼손에는 미국 독립 기념일이 새겨진 책을 들고 있다. 1886년 이후 오늘날까지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우뚝 서서, 기회의 땅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웅장한 모습의 자유의 여신상전체 높이가 93m에 달한다. 받침대만은 47m다. 여신상 높이만은 46m다. 총무게 225t 달하는 거대한 동상은 완성하는 일도 어려웠지만 대서양을 건너 미국까지 운반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대한 동상을 효과적으로 운반하기 위하여 300개가 넘는 조각으로 나누었고, 기차를 이용하여 대서양 연안에 자리한 프랑스의 항구 도시 루앙으로 운반했다. 그리고 루앙에서 현재 자유의 여신상이 서 있는 리버티 섬까지는 프랑스 군함으로 옮겨 왔다. 리버티 섬으로 옮겨 온 자유의 여신상을 원래 상태로 조립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별 모양의 받침대 위에서 나누어 옮겨 온 여신상을 조립했다. 조각 1개가 수백 kg이나 되는 동상을 정확하게 조립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늘날처럼 첨단 건축 기술과 거대한 장비가 있었다면 어려운 작업이 아닐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무척 어렵고 까다로운 공사였다. 드디어 1886년 10월 28일, 성대한 동상 제막식 행사가 거행되었다. 자유의 여신상으로 불리게 된 것은 나중이고 동상의 원래 이름은 ‘세계를 밝히는 자유’였다. 거대한 동상을 본 뉴욕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유의 여신상은 그 이전까지 만들어진 어떤 동상보다 아름답고 웅장했기 때문이다. 독립 선언서를 들고 별 모양의 넓은 기단 위에 세워진 자유의 여신상에는 무척 다양한 의미가 숨어 있다. 우선 오른손에 들고 있는 횃불은 자유의 빛을 상징하고 있다. 왼손에 들고 있는 사각형 책자는 미국 독립 선언서를 상징한 것으로 앞면에 ‘1776년 7월 4일’이라고 새겨져 있다. 왕관에 달린 7개의 가시는 북극해, 남극해, 남대서양, 북대서양, 북태평양, 남태평양, 인도양의 7개의 바다와 전 세계의 대륙을 의미한다. 그리고 몸을 감싸고 있는 긴 옷은 민주주의를 실행했던 로마 공화국을 상징한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여신상은 쇠사슬을 발로 밟고 있다. 여신상이 밟고 있는 이 쇠사슬은 노예 제도 폐지를 의미하고 있다. 자유의 여신상 제작은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가 했지만 조각상을 세우는 데 기여한 사람은 따로 있다. 파리의 상징, 에펠탑을 만든 귀스타브 에펠이다. 그는 얇은 청동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동상 안에 철재 구조물을 설치했다. 훗날 그는 자유의 여신상을 지탱하는 철재 구조물을 만든 것을 응용하여 파리 에펠탑을 만들게 되었다. 자유의 여신상 안에는 지구 상에서 유일하게 동상 안에 각종 자료를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동상이 아니라 받침대 안에 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에는 자유의 여신상을 만드는 과정을 비롯하여 사용한 재료와 모형, 도구 등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또 자유의 여신상 꼭대기인 왕관 부분에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뉴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파리를 흐르는 센 강변에는 뉴욕 리버티 섬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과 비슷하게 생긴 또 하나의 자유의 여신상이 있다. 센 강 그르넬 다리 아래 백조의 섬에 세워진 파리 자유의 여신상은 공교롭게도 뉴욕 쪽을 바라보고 있다. 파리 자유의 여신상이 훨씬 작지만 두 여신상은 전체적인 모양과 분위기가 무척 비슷하다. 물론 뉴욕 자유의 여신상은 넓은 바다와 세계 최고의 마천루로 불리는 맨해튼을 배경으로 서 있고, 파리 자유의 여신상은 나지막한 석조 건축물이 늘어선 곳에 서 있어 전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지만, 두 동상이 비슷하게 생긴 것은 분명하다. 파리 자유의 여신상을 두고는 여러 가지 추측들이 많다. 어떤 학자는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는 미국인들이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맞아 프랑스에 기증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뉴욕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지기 1년 전인 1885년 파리 시에 기증된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파리 자유의 여신상의 받침대를 뺀 높이는 11.5m로 뉴욕 자유의 여신상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가 실제 크기로 제작하기 전에 4분의 1 크기로 축소한 모형을 만들었는데, 파리 자유의 여신상은 바로 본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축소해 만들었던 작품이다. 나는 파리 탐방에서 세느강 유람선을 타고 그 자유의 여신상도 보았다.
‘자유를 바라는 그대여, 가난에 찌들어 지친 이여, 나에게 오라. 고난에 처해 의지할 곳 없는 자들이여, 나에게 오라. 나는 황금의 문가에서 횃불을 들리라.’를 외치고 있는 자유의 여신상이다. 7개 광선은 7대주를 상징한다. 횃불은 누구든 뉴욕으로 들어올 때 환영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자유의 여신상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거대한 모습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의미가 가치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 여신상은 전쟁으로 가족과 형제를 잃은 사람과 가난과 독재 정권에서 고통 받았던 사람, 그리고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무심코 부르던 자유의 여신상이 오늘 미국 뉴욕에 와서 가까이에서 조망하며 새롭게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그토록 힘들게 탄생했고, 그토록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니 다시금 위대한 지구의 유산물로 가슴에 새겨진다. 세계 곳곳 지구인 모두에게 자유와 평화, 희망이 더욱 진하게 전달되길 소망한다. 지금 가장 뉴욕의 남쪽 섬에 와 있다. 여기서 배를 타면 여신상 섬에 간다. 섬에 내리면 탐방하는데 최소 2시간~3시간 소요된다. 그 섬에서 배를 잘못 타면 뉴저지로 가는 배를 타게 되고 엉뚱한 곳으로 갔다가 다시 뉴욕으로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제 유람선은 빠른 흐름으로 달려 선착장으로 간다. 비록 자유의 여신상의 외형만 보고 가지만 참으로 보람되고 흐뭇한 여정이다.
* 뉴욕 이스트강 자유의 여신상에서 돌아오는 유람선
유람선이 매우 빠르게 질주하여 선착장으로 달려간다. 아까 보았던 뉴욕을 다시 한 번 더 또렷하게 보여준다. 웅장한 다리 아래로 들어가며 비경은 절정에 달한다. 곧 선착장에 도착하여 하선하였다.
* 미국뉴욕 9.11테러 폭발 추모공원
아주 큰 비극의 현장에 왔다. 2월 스산한 날씨에 스산한 풍경이 눈앞에 있다. 9월 11일 441m와 445m 두 개의 빌딩이 폭격을 맞아 사라진 것이다. 사망자 3600명, 실종자 몇 천명 그들의 슬픔이 고여 눈물로 흐른다. 그 빌딩이 있었던 곳에 거대한 사각틀을 마련해 좋고 그들의 이름도 난간에 새겨좋고 물이 흘러 지하로 내려간다.하얀 날개의 천사 빌딩도 있다.그 건물은 지하철 역인데 천사가 죽은자들의 영혼을 데리고 지하로 간다는 형상으로 건설된 건물이다. 남쪽 빌딩과 북쪽 빌딩 두 곳에 공원이 있다. 여기서는 웃거나 V자 승리 표시를 하며 사진 찍으면 절대 안 된다. 추모해야 된다. 20분 간격으로 폭격 당했다. 왜 폭격을 못 막았는지 의문이며 아직도 논란 중이란다. 그날 그 빌딩에 근무하는 유대인들은 출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상한 일이란다. 지금은 테러가 나면 뉴저지로 금래 이동하도록 설계 되었단다. 그 당시 주변 건물 등 모두 무너지고 쓰러졌는데 남쪽 건물 곁의 나무 두그루가 죽지 않고 살았단다. 이식 보존해서 지금도 살았단다. 안내도가 북쪽 빌딩 자리 근처에 있다. 지금 보는 것 역시 북쪽 빌딩이 있던 곳이다.
9·11 테러는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과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에 벌어진 항공기 자살 테러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3000명이 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미국이 본토 공격을 당한 것은 역사상 처음이다. 미국 안보 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됐다. '미국의 역사는 9·11 테러 전후로 나뉜다'는 말도 나온다. 2001년 9월 11일 오전 아메리칸 에어라인 11 AA11편과 유나이티드 항공 175 UA175편, 이 두대의 여객기가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충돌했다. 이 두 비행기는 각각 오전 7시 59분과 8시 14분 보스턴을 출발해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는 비행기로, 대륙 횡단에 필요한 연료를 가득 탑재하고 있었다. AA11편은 8시 14분께 5명의 납치범에게 납치당했다. 이들은 손칼로 승무원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저항하던 일부 승무원과 이스라엘 특수부대 소속 남자 승객을 칼로 찌른 뒤 호신용 최루가스를 일등석과 비즈니스석에 뿌려댔다. 이후 조종사를 살해하고 조종석을 장악했다. 8시 42~46분 납치된 UA175편도 비슷한 방식으로 납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보스턴 항로 관제센터는 AA11편이 항로에서 벗어나자 고도를 높이고 항로로 복귀할 것을 지시했으나 응답이 없었다. 그러다 납치범들이 내보낸 "아무도 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면 너희들과 비행기가 위험해질 것이다. 공항으로 돌아가는 중이니 걱정말라"는 기내 방송이 실수로 관제센터로 전해졌고, 관제센터는 8시 37분 북미방공사령부에 피랍사실을 보고했다. 사령부는 전투기 2대를 출격시켜 '중간 차단'을 지시했으나 이미 비행기는 세계무역센터 직전에 있었다. AA11편은 오전 8시 46분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의 93층과 99층 사이에 충돌했다. 승무원과 탑승객 전원, 테러범 제외한 87명이 사망했다. 이어 9시 3분 UA175편이 북쪽 건물의 77층과 85층 사이로 충돌했다. 두번째 충돌 당시 첫번째 사고를 보도하기 위해 방송사 카메라들이 세계무역센터를 촬영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CNN 등 방송 채널을 통해 UA175편의 충격적인 충돌 현장은 전세계에 생생하게 중계됐다. 언론사들은 첫번째 충돌까지만 해도 끔찍한 항공 사고 정도로 보도했으나, 두번째 충돌로 계획적인 테러임이 명확해졌다. 여객기가 건물에 충돌하자 10만 리터 가량의 항공유가 타면서 격렬한 화재가 발생했다. 충돌 지점보다 상층에 있던 사람들은 계단이 붕괴되어 대피로를 찾지 못했고 수많은 이들이 열기와 연기를 못이겨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이러한 상황도 카메라를 통해 생중계됐다. 오전 9시 59분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이 먼저 무너졌다. 이어 10시 28분 북쪽 건물이 완전히 붕괴되고 이 잔해에 맞아 47층 높이인 세계무역센터 부속건물인 제7세계 무역센터 빌딩이 오후 5시 20분 33초경 붕괴됐다. 이외에도 주변의 다른 건물들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 수많은 소방대원과 의료진이 세계무역센터로 모여 수십층을 걸어 올라가 영웅적인 구조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들 중 많은 수가 화재와 소음 등으로 붕괴 전 "건물이 붕괴되니 대피하라"는 무전을 듣지 못했고 343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 국방부 건물인 워싱턴 D.C.의 펜타곤에도 비행기가 충돌했다. 이날 8시 20분 워싱턴에서 출발해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던 아메리칸 에어라인 항공 77편은 8시 54분 항로를 180도 바꾸어 다시 워싱턴으로 향했다. 9시 3분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에 두번째 항공기가 부딪히고, 대규모 테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연방항공당국은 36분이나 AA77편의 항로 이탈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9시 32분에야 항공당국은 펜타곤 주변으로 접근하고 있는 항공기를 발견했고, 비행기는 펜타곤 주위를 맴돌며 고도를 낮추다 9시 37분 46초경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과 충돌했다. 충돌했을 때 비행속도는 시속 850km 이상이었고, 본체가 건물의 기둥을 부수어 대폭발을 일으켰다. 다행히 펜타곤은 낮고 넓은 특유의 구조와 테러에 대비한 구조적 설계 덕분에 비행기에 직접 부딪힌 피격 구간만 붕괴되었을 뿐 옆 구간의 연쇄 붕괴로는 이어지지 않아 피해가 적었다. 충돌로 펜타곤 직원 125명이 숨지고 항공기에 탑승한 64명이 사망했다. 유나이티드 항공 93편도 납치됐다. 이 비행기를 납치한 테러범들은 워싱턴 D.C.의 국회의사당을 목표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승객들은 납치범들 몰래 가족들과의 연락을 시도했고 이 비행기가 자살 테러를 목적으로 납치된 것을 알아차렸다. 결국 승객들이 저항해 조종간을 빼앗으려 하다 10시 3분 11초경 피츠버그 동남쪽에 추락했다. 승객 전원이 사망했고 이들은 추가 피해를 막은 영웅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이 테러로 세계무역센터에서는 2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고 펜타곤에서는 125명이 죽었다. 4대의 항공기에 탑승한 승객 총 256명 전원이 사망했다. 뉴욕 소방관 343명, 뉴욕 경찰 84명, 뉴욕 항만국 직원 23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이것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공격으로 꼽히며, 총 인명 피해 3130명은 진주만 공습의 사망자 2330명보다도 800명이 더 많다. 테러 직후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전체 영공이 봉쇄됐다. 당시 미국 영공을 비행중이던 4200여 대의 모든 비행기를 강제로 착륙시키고 미국을 오가는 모든 국제 항공선도 차단됐다. 바다에서도 뉴욕항이 봉쇄됐고, 여객선과 화물선이 대피한 뒤 항공모항 전단이 입항했다. 전국에 비상휴교령이 내려졌다. FBI는 9.11 테러의 배후에 테러 단체 알 카에다를 지휘하는 오사마 빈 라덴이 있다고 발표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재벌 2세 출신인 빈 라덴은 1979년 알 카에다을 설립하고 1988년 무장조직으로 재정비했다. 그는 계속 미국에 대한 성전을 촉구했고, 알카에다는 1996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트럭 폭탄테러 사건, 1998년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 동시 폭탄테러 사건 등을 일으켰다. 1998년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의 압박에 그의 시민권을 박탈한 이후 탈레반 정부의 보호 아래 아프가니스탄에 은신했다. 오사마 빈 라덴은 거듭 9·11 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주장해왔으나 2004년 10월 알자지라 방송을 통해 인정하고 자신이 직접 19명에게 공중납치를 지시했다고 밝혔다. 그는 1982년 6월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으로 베이루트 고층 빌딩이 붕괴하고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하는 상황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밝혔다. 테러 이후 오바마 빈 라덴은 은신하며 10년 간 미국 FBI, CIA의 추적을 따돌렸다. 빈 라덴은 파키스탄 북서부 아보타바드 내 한 시설물에 은신해 있던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군 특수부대에 의해 사살됐다. 2011년 5월 1일 오바마 대통령은 "미군 공격에 의해 오사마 빈 라덴이 사망했다"라고 공식 발표했다. 이렇게 죽음과 죽음이 이어지는 참혹한 비극의 사건이 막을 내렸지만 어찌 그날을 잊겠는가.
주변에는 높은 빌딩들이 오롯하다. 뉴욕 도심에서, 유람선에서 보았던 우람한 건물들이다. 다시 복구하기도 하고, 다시 건설하기도 하고, 여전히 고층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을 삼킨 건물은 온데간데 없는데 그날처럼 처연하게 자리한 빌딩들이 슬픈 공간을 메우고 있다. 바라보는 이방인의 눈도 서러운데, 그날을 본 이곳 시민들은 얼마나 서러울까. 공원 한쪽에는 눈이 하얗게 쌓여 슬픔을 더해준다. 바람도 볼을 차갑게 스친다. 저 분들만큼 추울까 싶어 모두 잠잠하다. 가족들은 꽃 헌화하기도 하고 숙연한 분위기로 추모 기념공원을 맴돌고 있다. 나 역시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다시는 지구상에서 이런 비극이 없기를 간절히 빌었다.
*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80층 전망대
크루즈 배에서 하선하여 뉴욕 시가지를 돌 때 여러 차례 보았던 건물이다. 유람선에서도 선명하게 보았다. 지금은 그 전망대에 올라가기 위해 건물 앞에 왔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는 뉴욕의 상징건물이다. 뉴욕을 조망하는 대표적인 두 전망대가 있다. 높이 443m, 102층 건물로 1931년 공사를 시작한 이래 2년 만에 지어진 뉴욕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이다. 화강암, 대리석 그리고 스테인레스 자재로 지어졌다. 건축계의 아이콘이자 20세기 공학이 이루어 낸 업적으로 평가 되고 있다. 40년 이상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자리를 지켜 왔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미국의 국보이다. 슈리브, 램 앤드 하먼이라는 건축회사가 설계를 맡았는데, 설계도는 단 2주일이라는 시간 내에 제작되었다. 이 무렵 뉴욕에서는 세계 최고 높이의 건물을 세우려는 경쟁이 치열했으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크라이슬러 빌딩이 이 영예를 차지하고 있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1972년 세계무역센터의 북쪽 탑 건물에 '가장 높은 건물'이라는 왕관을 빼앗기기까지 이 자리를 유지했다. 2001년 9월 11일 이후로 102층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다시 뉴욕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되었으며, 미국 전체에서는 시어스 타워 다음으로 두 번째 높은 건물이 되었다. 건물이 개관한 1931년 5월 1일은 대공황 시기와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건물 내의 사무 공간 대부분은 임대되지 못하고 텅 빈 상태였다. 건물에 '엠프티 스테이트 빌딩'이라는 별명이 붙을 지경이었다. 86층의 전망대는 개관 즉시 사람들을 끌어 처음에는 임대료보다 더욱 많은 수익을 내게 되었지만, 건설에 막대한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손익 분기점을 넘어서기까지 거의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원래의 계획은 시선을 끄는 우아한 아르데코 형식의 첨탑을 비행선 계류탑으로 삼고, 꼭대기 층에 착륙한 승객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86층까지 내려와 체크인하도록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실행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첨탑은 그 대신 뉴욕에 있는 대부분의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국이 사용하는 방송 안테나 구실을 하게 되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여전히 미국에서 가장 독특하고 유명한 건물 중 하나로 남아 있으며, 모더니스트 아르데코 디자인을 보여 주는 최상의 예 중 하나이다. 밤이 되면 색깔 있는 투광 조명이 건물 꼭대기를 환히 밝힌다. 색깔은 계절과 특별한 행사에 따라 다양하게 변한다. 건물이 주는 시각적인 효과는 밤에도 낮과 마찬가지로 휘황찬란하다. 그 유명한 빌딩에 도착하였다. 먼저 2층으로 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80층에서 하차하였다. 전망대가 창문을 사이에 두고 조망하도록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제대로 보기 힘든다. 여기서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86층으로 갔다.
*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86층 전망대
80층 전망대에서 잠시 내려 조망하고 86층 전망대로 올라왔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1931년 지어진 이래 오랫동안 뉴욕의 상징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높이 381m, 102층 철골 구조 건물로 처음 완공됐다. 그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거대한 규모의 마천루로서는 1954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다. 1950년 67.6m의 텔레비전 안테나 기둥이 정상부에 세워져 전체 높이가 448.6m로 높아졌다. 이 건물은 뉴욕 중부 맨해튼 도로변에 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1929년 대공황 때 단시간에 완공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우아한 아르데코풍 건물은 <러브 어페어>,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킹콩> 같은 영화에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는 86층, 102층 두 곳에 전망대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86층 전망대까지만 올라간다. 실외로 나갈 수 있는 86층 전망대와 달리 102층은 유리창으로 막혀 있고, 입장료 외에 추가 요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전망대에 올라가는 사람들로 하루 종일 붐비며 일몰 시간에는 절정을 이룬다. 86층 전망대에 올라오니 난간 위로 뉴욕을 선명하게 조망할 수 있다. 수많은 빌딩들이 숲을 이룬 뉴욕이 전개되며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바다와 항구, 그리고 강도 뉴욕을 타고 흐르며 도심의 고층 빌딩숲과 함께 조화로운 비경을 이룬다. 섬들로 구성된 뉴욕이 드러나며 고운 풍경을 선사한다. 우리를 태우고 왔던 크루즈 배가 다음 행선지로 떠나고 있다. 그 모습도 아련하게 보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난간에 붙어서서 발 디딜 팀이 없다. 바람은 풍성하게 불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것이 뉴욕이라고 전신을 보여주는 정경이 가슴 훈훈하다.
* 뉴욕 타임스퀘어 야경
뉴욕타임지 최초 건물이 있는 광장 야경이다. 1년 365일 잠들지 않는 화려한 불빛 조명이 춤추는 공간이다. 뉴욕타임지 건물은 지금은 오피스텔 건물이다. 높이 솟구치며 그날의 위풍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다. 광고판에 삼성광고가 뜬다. 위에는 중국 광고가 뜬다. 저 위로 가려고 노력 중이란다. 그런데 지금 아래 위치에서만도 하루에 수십억 원의 광고료가 지불된단다. 코카콜라, 현대의 광고도 뜬다. 뉴욕 42번 스트리트와 7번가 그리고 브로드웨이가 만나는 삼각지대를 일컬어 타임스 스퀘어라고 한다. 높은 빌딩과 화려한 네온사인, 그리고 현란한 광고들이 눈부시다. 어느 곳을 배경으로 사진 찍어도 장관이다. 수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지금은 대표적인 관광 명소이지만 타임스 스퀘어는 한때 범죄와 마약 그리고 부도덕함의 중심에 있었다. 타임스퀘어의 상징인 간판들은 낮에도 켜 있다. 태양빛이 강해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타임 스퀘어가 아니고 타임스 스퀘어다. 뉴욕 타임스의 건물이 타임스 스퀘어에 있었는데 건물 이름을 따서 신문사 이름을 타임스로 붙였다. 광장 곁에는 시계가 높이 걸려있다. 제야의 시계다. 그래서 이곳이 타임스퀘어다. 베트맨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기념사진을 찍어주고 돈을 받는 직업적인 사람이다. 뉴욕에서 가장 인기있는 곳으로 아무리 바빠도 타임스퀘어 야경은 보고 가야 한다는 가이드의 안내로 진한 어둠이 드리운 뉴욕 시가지를 걸어 찬란한 야경을 잘 보았다.
* 뉴욕 야경 조망 석식
한인 교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마지막 석식을 했다. 노베드 빌딩 39층 야경 전망이 좋은 식당에서 뉴욕 시가지의 야경을 조망하며 식사를 했다. 쇠고기, 새우, 비빕밥, 아이스크림, 오징어, 오이소박이, 오이피클, 등 풍성한 메뉴다. 창가에드리운 뉴욕 야경 섞어 맛있게 잘 먹었다.
* 미국 뉴욕공항 출발
저녁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뉴욕공항으로 갔다. 밤 12시 50분 대한항공 인천행을 탑승하기 위해 수속을 밟았다. 공항이 약간 덥다. 기다리며 주변을 보기도 하고, 책을 보기도 하고, 휴식하기도 했다. 명성만큼 웅장하고 드넓은 공항이다.
2019년 2월 16일 토요일 대한항공 상공, 기내 영화 관람
* 기내 영화 관람
뉴욕에서 인천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기내 영화를 보았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라는 1995년에 제작한 영화다. 크린트이스트우드가 주인공으로 아주 잘 된 영화다. 기자인 그가 매디슨 카운티 다리를 촬영하어 왔다가 그 마을의 한 여인을 만나 사랑하는 내용이다. 남편이 있는 그녀를 사랑하는 일은 어려웠다. 그래도 서로의 감정을 아주 충실게 잘 표현하여서 동감하며 잘 보았다. 15년 결혼생활한 여인이 남편에 대한 사랑이 식어갈 즈음이어서 둘은 참으로 뜨거운 사랑으로 발전했다. 남편이 집을 비우고 간 사이 1주일 간 이루어진 사랑은 남편이 돌아온 날 서로 헤어졌다. 그후 그녀는 죽으며 아들과 딸에게 화장해서 매디슨 카운티 다리에 뿌려달라고 유언했다. 그것을 지켜주는 자식들이 유골을 다리 위에서 흩뿌리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내가 저런 상황이라면 저렇게 아름다운 사랑을 할까, 고개가 저어진다. 고도의 깊은 사랑은 아무나 이루는 것이 아니리라. 부러우면서도 불가능한 사랑이 간접체험으로나마 행복했다.
2019년 2월 17일 일요일 인천 도착
* 인천공항 도착
대한항공 비행기가 새벽 5시 15분 정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약 14시간 25분 소요된 것이다. 긴 비행시간이 아득하다. 내 조국은 겨울 새벽으로 춥다.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는 중남미 크루즈는 한 달 가까운 21박 22일의 긴 여정이었다.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그 탐방록을 시로 수필로 탐방록으로 써서 발표하고 개인 문단역사로 소장할 것이다.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지금 이 시간 매우 행복하고 흐뭇하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와 새벽 첫 리무진을 타고 귀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