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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9. 묵상글 (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 하느님 앞에? 사람들 앞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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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9.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느님 앞에? 사람들 앞에?
오늘 갈라티아서는 베드로와 바오로가 복음 선포에 있어서 역할 분담하게 된
과정을 전하면서 그것은 자기들이 역할 분담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위임해 주신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베드로가 할례받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듯이,
나는 할례받지 않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다.”
참으로 아름답고 위대한 모범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초대교회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발전해나갔습니다.
그런데 앞부분에서는 이렇게 아름답고 위대한 모범을 전하면서
뒷부분에서는 그 반대의 모습도 있었음을 바오로는 전합니다.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왔을 때 베드로가 “할례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다.”라고 전합니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봅니다.
하느님 앞에 있음과 사람들 앞에 있음.
하느님 앞에 있을 때는 당당할 수 있었는데
사람들 앞에 있게 되자 눈치 보고 비위 맞추려 하고 심지어 두려워합니다.
당연합니다.
하느님 앞에 있으면 하느님만 보기에 눈치나 비위 맞추기는 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 있으면 사람들 눈치 보지 않을 수 없고 비위 맞추지 않을 수 없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사람 앞에 있으면 첫째 눈치를 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눈치는 있어야지만 눈치를 봐서는 안 됩니다.
눈치가 있다는 것은 너의 필요를 읽는 눈이 내게 있는 것이며
일종의 사랑이랄까 감각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눈치를 본다는 것은 상대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며
결코 사랑이 아니고 오히려 두려움에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눈치 보는 것은 비위 맞추기보다는 소극적인 것입니다.
비위 맞추기는 눈치 보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상대방의 입맛에 맞추는 대응을 하는 것이며
그러다가 아첨도 아부도 아양도 하게 됩니다.
그제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갈라티아 신자들을 나무라며 이렇게 심한 말을 하지요.
하느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오늘 바오로가 비난하는 베드로는 더 초라한 모습을 보입니다.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나타나자 두려워 이방인들과의 만남을 피합니다.
이것은 지난주일 독서의 기도에서 그레고리오 교황의 사목 지침을 떠올립니다.
여기서 교황은 “목자는 침묵을 지킴으로써 분별력 있는 자가 되어야 하고,
말해 줌으로써 유익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지침을 주면서
“목자가 바른말 하기를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자기 침묵으로써 원수에게서
도망치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라고 일갈을 합니다.
그런데 주님 교회의 반석이요 으뜸 사도인 베드로가 우리와 비슷하게,
초라한 모습을 보이며 바오로 사도에게 지적을 따끔하게 받는 겁니다.
주님은 안 보고 풍랑을 보다가 두려움 때문에 물에 빠졌던 사도 베드로가
다시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사람들 앞에 있음으로 두려움에 빠진 겁니다.
베드로 사도도 이러하니 의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더더욱
주님 앞에 있지 않고 사람들 앞에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의식하지 않으면!
정신 차리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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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9.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금으로부터 한 15년 전 일 것입니다. 수학능력 평가를 마친 본당의 고3 수험생들을 데리고 강화도로 1박2일 여행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시험을 보느라 수고한 아이들에게 쉼의 시간을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낮에는 강화도의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저녁에 펜션으로 가서 저녁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아이들이 알아서 할 일을 분담했습니다. 야채 씻고 다듬는 조, 고기 굽는 조, 밥을 하는 조 등으로 나눴습니다. 그런데 밥하는 조가 걱정되었습니다. ‘밥을 해 본 적이 있을까?’라는 걱정입니다. 아이들이 밥 조의 아이들은 못 하는 것이 없다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더군다나 전기밥솥인데 못하겠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고기를 함께 구워 먹다가 ‘뻥’하는 큰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전기밥솥의 뚜껑이 날아갔습니다. 밥을 할 줄 몰랐던 아이들은 사람이 많다고 쌀을 밥솥 맨 위까지 가득 넣은 것입니다. 주방에는 여기저기로 튄 밥알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잘할 것이라고 말한 아이에게 “밥 잘할 거라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합니다.
“저 친구들이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또 잘 놀아요.”
다 잘하는 친구였습니다. 뭐든 다 잘하니까 밥도 잘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경험이 없다면 잘할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너무 바쁘고 할 일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언젠가 시간이 여유로워지면 그때는 신앙생활을 아주 열심히 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가능할까요? 저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진정한 경험 없이 잘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여러 예언자나 율법 교사처럼 예수님에게서 멋진 기도 방법을 배우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특별하고 화려한 기도를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가 지금도 바치고 있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어떤 처지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단순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기도는 특별한 것이 아님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기도란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하지요. 대화를 나누는데, 특별한 장소에서만 할까요? 또 특별한 시간에만 할까요? 바쁘고 여유가 없을 때는 대화하지 않나요?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과 계속적인 만남의 경험이 축적되지 않는다면, 주님과의 좋은 관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명언: 돈이란 써야 돈값을 한다. 쓰지 않는 돈을 모아서 무엇에 쓰려는가(백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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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9.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기도’는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를 “욕망의 해석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의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고민하고 있고,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님의 기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올바르게 바랄 수 있는 것을 모두 청할 뿐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청해야 할 것을 순서대로 청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기도는 청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정서까지도 형성시켜준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욕망을 훈련시켜 하느님의 목적과 조화를 향하도록 변화한다.”
그렇습니다.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보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기도에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그 사람이 담겨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예수님이 담겨 있습니다. 곧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기기를 바라시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문에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셨던 것들이 수정처럼 농축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문은 비록 짧지만,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진정, “이 기도”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준 기도’로서, ‘예수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드리게 됩니다. 그러니 이 기도의 배후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동행’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드님을 통하여, 비로소 ‘아빠, 아버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처럼, 이 기도는 우리에게 ‘아빠, 아버지’를 선사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이 되게 합니다. 곧 성자의 반열에 들게 하고 하느님이 되게 합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 고귀한 기도인지요? 그러니 올바르게 사는 것은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4)
주님!
유혹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게 하소서!
없애려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속에서
잠시도 떨러져 있지 않는 당신의 사랑을 볼 수 있게 하소서!
스스로 구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구원자이신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
그 속에서 제 마음을 드리게 하시고 당신께 속한 자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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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9.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기도를 자주 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기도의 참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알베리오네). 그리고 기도는 “영적 생활의 기초입니다. 기도할 때 그대는 하느님과 통교하게 됩니다. 마치 전등이 발전기와 연결됨으로써 빛을 발하는 것과 같습니다”(구엔 반 투안 주교). 그러므로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호흡을 해야 살듯이 기도해야 신앙의 삶을 지킬 수 있습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의미하고 하느님의 다스림이란 결국 사랑의 삶을 말합니다. 요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까롤로 까레또는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 때 바로 그곳이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또한 우리는 매일 필요한 양식을 청해야 합니다. 양식은 단순히 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양식은 그날에 필요한 양식입니다. 잠언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십시오. 먹고 살 만큼만 주십시오. 배부른 김에 하느님이 다 뭐냐? 하며 배은망덕하지 않게, 너무 가난한 탓에 도둑질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잠언30,8-9). 매일의 양식을 달라고 간절히 ‘날마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육적인 양식뿐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더불어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을 매일 모셔야 합니다. 미사는 다른 여느 기도 중에 가장 중요한 기도이며 영성체를 통해서 가장 완전하게 주님과 하나가 되는 은총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8,13)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실수와 잘못 안에 용서받아야 할 연약함을 지니고 살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유혹은 믿음으로부터 멀어지는 위험을 의미합니다. 그 유혹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셨고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사실 우리의 진보는 유혹을 통해 이뤄지고 유혹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은 기도하게 됩니다.
성 레오교황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성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께 면류관이 가까이 있습니다. 죄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은 죄의 용서에로 초대받았습니다. 이방인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당신은 생명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생활을 청산하고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의 탄생에 참여하게 된 자들로서 육신의 행위를 끊어버립시다. 부패한 행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비참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 과거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갈망하는 현재와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미래의 다스림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잊지 않고 자비와 사랑, 섭리의 하느님과 더불어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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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9.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서를 읽지 않았던 분도,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분도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잘 알고 있습니다. 골리앗은 거인이었고, 싸움을 잘했습니다. 다윗은 소년이었고, 내세울 무기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골리앗을 보고 겁에 질렸습니다. 소년 다윗은 돌팔매로 거인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작은 이를 통해서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성서를 읽은 사람도,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다윗과 골리앗의 뒷이야기는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다윗은 8형제의 막내아들이었습니다. 다윗의 형 3명은 블레셋과의 싸움을 위해서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다윗에게 형들에게 줄 음식을 가져가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형들에게 줄 빵과 치즈를 들고 블레셋과 싸우는 현장으로 갔습니다. 만일 다윗이 아버지의 말씀을 듣지 않고, 빵과 치즈를 가져가라는 심부름을 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의 전설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룻의 이야기도 알고 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모시지 않고, 고향으로 갔었다면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정성껏 모셨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룻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가문을 정해 주셨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의 이야기도 알고 있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우연히 길을 가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때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지 않았다면 ‘십자가의 길’ 기도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의 도움으로 예수님께서는 3번 넘어지시면서도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단 한 번 우연히 길을 가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을 기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길가의 돌 하나로도 아브라함에게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하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1982년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당시 신학교에는 서울 대교구, 대전교구, 인천교구, 수원교구, 춘천교구, 원주교구 신학생들이 같이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하다가 신학교에 온 형들도 있었고, 저처럼 고등학교 졸업하고 신학교에 온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신 것처럼 질그릇 같던 우리들을 하느님께서는 사제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대학 졸업하고 직장 생활하다가 신학교에 온 형들은 이제 은퇴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친구들도 이제 5년 정도 후면 은퇴할 시기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저까지도 불러주셔서 사제가 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나의 능력보다 과분한 일이 주어졌다면 하느님의 이끄심을 청하며 겸손하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나의 능력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 주어졌다면 그 또한 감사하면서 기쁘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알려 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입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지 마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아들딸로 살지도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지 마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만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라고 하지 마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만 바라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고 남을, 양식을 쌓아 두려 하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하지 마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지 마라, 죄지을 기회를 애써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도 않으면서.”
오늘 하루 ‘주님의 기도’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그 가르침대로 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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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9.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언제나처럼 오늘도 주님은 홀로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런 주님의 모습을 제자들은 지켜보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제자들이 기도를 배우고 싶어 했을까요? 아닙니다. 처음에는 기도가 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점점 주님의 모습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닮고 싶고,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어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사랑하게 되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신학교에서의 제 모습을 잠시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신학교에서의 생활은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즐거운 생활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가 궁금했던 것이지요. 우리가 매일 하는 기도가 정말 잘 가고 있는 것인지, 영적인 하느님을 어떻게 영적으로 만나야 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보기도 하고, 피정도 하고, 수련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기도에의 갈망을 얻게 되었고, 그 갈망은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가게 했습니다.
기도에 갈망을 느끼십니까?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하기는 하는데 뭐가 잘되고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이 갈망이 하느님께로 가는 첫 번째 발걸음입니다. 갈망이 없다면, 만나고 싶다는 목마름이 없다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하고, 또 그분을 찾으려 애쓰지도 않을 겁니다.
이러한 갈망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얻었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말입니다. 오늘 하루는 주님의 기도로 내 마음을, 생활을 채워보십시오.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또박또박 천천히 내 마음이 다 울리도록 시간이 날 때마다 봉헌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우리의 마음에 들어찰 때 우리의 생각과 생활도 바뀔 것입니다. 그러면 갈망 또한 사라질 것입니다. 늘 기도가 들어차 있고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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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세례
친구 신부님이 사목하고 있는 미국에 머물 때의 일입니다.
어느날 아침, 친구 신부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아침 미사 후 유아세례가 있을 거야! 같이 하자!’라고 말입니다.
미사 후 유아세례를 위해 다시 제대 앞에 섰습니다. 친구 신부님이 주례를 하고 저는 옆에 서서 도왔습니다.
아기는 천사처럼 웃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의 부모는 세례식을 위해 그들이 사는 지역에서 어제 저녁 출발해 방금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이에게 하느님의 자녀라는 은총을 입히기 위해 하룻밤을 꼬박 달려 온 것입니다. 물론 대부와 대모도 함께 그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아기는 하느님 은총 속에 잘 자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부모가 훌륭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위해 하룻밤 길을 달려오는 부모는 흔치 않으니까요.
하느님 나라에 예쁜 아기가 오늘 등록되었음을 저역시 기뻐하며 아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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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9.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기도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뭇 나라 백성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온 세상 사람들아, 주님을 찬미하라.”(시편117,1)
‘주님의 기도’는 기도중의 기도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오늘은 5대 국경일중 하나인 한글날입니다. 한글날은 한민족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중 하나였던 세종대왕이 1446년 훈민정음의 편찬을 널리 선포한 날을 기념하여 한글 및 그 창제 원리의 독창성과 과학성을 널리 알리고 한글 사랑 의식을 높이기 위한 국경일로 올해 588돌이 됩니다.
한글 역시 하느님께서 한민족을 사랑하여 세종대왕을 통해 한민족에게 주신 참 좋은 선물이라 믿습니다. 한글날 노래 가사가 좋고 깊고 아름답고 풍부하여 공부하는 마음으로 3절까지 노래를 들으며 적어 봅니다. 혹시 공휴일인 한글날 오늘 시간되면 들으며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1.“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
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온 겨레
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
이 세상 밝혀주는 해가 돋았네
한글은 우리자랑 문화의 터전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2.“볼수록 아름다운 스물넉자는
그 속에 모든 이치 갖추어 있고
누구나 쉬 배우며 쓰기 편하니
세계의 글자중에 으뜸이도다
한글은 우리자랑 민주의 근본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3.“한 겨레 한맘으로 한데 뭉치어
힘차게 일어나는 건설의 일꾼
바른 길 환한 길로 달려나가자
희망이 앞에 있다 한글나라에
한글은 우리 자랑 생활의 무기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한글날 노래 작사자는 5대 국경일중 유일하게 위당 정인보 선생이 아닌, 우리 말과 우리 글을 지키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인 외솔 최현배 선생입니다. 또 오늘은 우리 수도원의 정 아브라함 수사의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은총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루하루 역시 참 좋은 선물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선물에 대한 당연한 응답은 기도입니다. 무엇보다 참 좋은 선물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아마도 우리 믿는 이들이 가장 많이 바치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일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기도는 원래 우리가 바치는 마태복음의 기도보다 짧지만 핵심은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늘보며 기도하라고 눈들면 어디나 하늘이요 기도하라고 직립인간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바로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모토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생명과 사랑의 소통입니다. 기도는 말씀과 함께 영혼의 호흡呼吸이며 식食이며 약藥입니다. 살기위하여, 영혼이 살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수도자만이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기도로서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마치는 나날이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인간은 인간의 정의입니다. 저는 만세칠창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만세칠창으로 하루를 마칩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수도원 만세”, 만세칠창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기도가 삶의 꼴을 형성합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도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중 하나일 것이며, 주님 앞에 갔을 때 주님은 당신을 닮은 얼굴인지 검사할 것입니다.
끊임없는 한결같은 사랑의 기도로 주님이신 당신을 닮은 얼굴인지 검사할 것입니다. 정말 사랑을 다해, 마음을 다해, 정성을 다해 기도한다면 화장이나 성형은 필요없을 것입니다. 각자 고유의 내적 아름다움과 향기를 선물하는 기도의 은총이요 몸으로 그대로 표현되는 내적 아름다움과 향기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기도가, 기도의 근본이자 기초가 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루카복음은 기도의 복음이라 할 정도로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많이 나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실 때 어떤 제자의 요청으로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대로 예수님 기도의 노하우로 사람됨의 기본이 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가난하고 겸손하고 단순한 삶의 요약같은 기도로 우리 역시 참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필수적 기도입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닙니다. 기도해야, 주님의 기도를 통해 꼴잡혀져야 정체성 또렷한 참사람의 참나가 되며 이것은 죽을 때까지 평생과정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하느님은 추상적인 분이 아니라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아버지라 부르며 친근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모두를 아버지께 맡겨 버리는 것은 무책임한 일입니다. 우리 역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도록, 아버지의 나라가 오도록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면서 최대한 협조로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한가정, 한식구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확인하는 진리입니다. 아버지 중심의 삶이 형성되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서로는 형제가 됩니다. 혈연보다 때로 깊게 느껴지는 하느님 가족으로서의 인연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 하느님을 중심에 모신 형제자매들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가 이런 진리를 환히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참석한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티토, 그리고 야고보 케파 베드로, 요한 사도는 물론 모든 사도들은 주님 안에서 서로 형제가 되고 아버지의 자녀들이 됨으로 하느님의 한 가정임을 보여주니 그대로 교회의 모습이요 주님의 기도가 실현된 모습입니다. 여기서 베드로와 바오로의 역할 분담이 분명히 확인됩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 하느님은 공동체 일치의 중심이 됩니다. 그러니 일치의 중심이며 삶의 의미이자 방향이요 궁극의 목표인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사랑과 공부가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공부하여 알수록 참나를 알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평생사랑, 평생공부의 대상이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돈맛, 세상맛에 중독되지 않고 참된 영적 삶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맛들이는 평생 기도와 말씀 공부가 필수입니다. 참으로 기도맛, 말씀맛, 하느님 맛이 날로 증대되면서 세상맛을 극복해 무욕의 초연한 자유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기본적 구체적 청원입니다.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하루하루 날마다 일용한 양식을 청하는, 잘못한 모든 이를 용서를 청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청하는 기도입니다. 땅에서의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필수적 청원입니다. 그러나 청원만으로는 무책임하며 부족합니다. 이 또한 우리의 전폭적 협조와 응답이 필수입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잘못한 이들에 대한 용서에, 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진인사대천명’,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모두가 하느님께 최선의 노력으로 응답하고 협조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 은총으로 실현되는 주님의 기도요, 또 이 미사은총이 우리의 이런 실천의 각오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주님 사랑 우리 위에 꿋꿋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셔라.”(시편117,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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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9.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그대에게, 그대 나에게>
나
그대에게
하느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그대
나에게
하느님의 이름을
드러내니
우리에게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납니다
나
그대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심어주고
그대
나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심어주니
우리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뼛속깊이 스밉니다
나
그대에게
하느님의 밥이
되어주고
그대
나에게
하느님의 밥이
되어주니
우리에게
하느님의 밥이
날마다 소복합니다
나
그대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베풀고
그대
나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베푸니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더없이 가득합니다
나
그대에게
하느님이 되어주고
그대
나에게
하느님이 되어주니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늘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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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9.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11,1)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묻다
제 생각에, 예수님의 제자 하나가 기도하는 방법에 자신이 없을 만큼 스스로를 나약한 존재로 느꼈던 것 같습니다. …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배우고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회당에 빠짐없이 출석하며 자란 사람이, 예수님께서 ‘특정한 곳에서’ 기도하시는 것을 뵐 때까지 기도하는 법을 몰랐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 제자는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기도해 왔지만 기도라는 주제에 관해 더 알아야겠다는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어떤 영적 전통들은 창조계의 복들을 송두리째 희생시킨 채 타락만을 강조한다. 창조-중심 신학자인 엑카르트라면 창조계를 거절하지도, 창조계에 죄의 꼬리표를 달지도 않았을 것이다. 타락을 강조하는 신학 위에 세워진 영성은 곧장 고행으로 뛰어들어, 사람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고, 충동과 정서적인 활기를 억누를 것이다. 엑카르트는 그토록 극도로 단순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열정을 억누르거나 통제의 거룩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는 긍정의 길과 부정의 길의 긴장을 살아 낼 줄 알았던 인물이다. 그는 본 설교에서 두 편의 복음서 이야기를 택하여 영적 실천의 의미를 지닌 방법을 도출해 낸다. 첫째 이야기는 긍정의 길을 나타낸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재능을 개발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루카 복음(19,11-27)에 기록되어 있다. 루카 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돈 관리 비유는, C.H. 다드가 지적한 대로, 마태오 복음(25,14-30)에 기록된 달란트 바유와 “시실상 같은 이야기”다. 창조계가 주는 선물을 개발해야 한다는 이야기다.(255)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8절 신학과 대학
스콜라학과 그 대표자들:
초기 스콜라학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는 명민하였으나 균형이 잡히지 않은 베드로 아벨라르도(1079∼1142)였다. 그는 “그렇다와 아니다” 라는 변증법적 • 비판적인 방법으로 모든 깊이에 통달하려 하였다. 여기서 그는 가끔 신앙과 지식의 경계를 없앴고, 그래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아벨라르도의 명제 중 몇 개가 상스 교회회의(1141)에서 단죄되었다.
카말돌리회 수도자요 볼로냐의 학자였던 그라시아노(+1158)는 1140년경에 산재해 있던 교회법규들을 수집하고 구분하려 하였다. 후에 「그라시아노 법령집」으로 불리게 된 그의 <교회법 모순 조령의해유집>은, 1918년까지 표준적인 교회 법률서이던 「교회법전」의 기초가 되었다. 여기에 중세기 동안 여러 개의 법령집이 추가되었다. 즉 그레고리오 9세의 「법령집」(l234), 보니파시오 8세의 「제육서」(l298), 「글레멘스 회헌」의 교령집인 이른바 「부록서」 등이다. 그라시아노는 “교회법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파리의 학자이고 후에 주교가 된 베드로 룸바르두스(+1160)는, 구분되고 총괄한 교의신학 교과서를 저술하였다. 그의 「신학 명제집」은 전 중세기 동안 사용되었다.
그러나 신학의 발전이 절대적 최고점에 도달한 것은 13세기의 이른바 “전성기 스콜라학”에 이르러서였다. 서구는 아라비아와 유대인 사상가들을 우회하여 - 동방의 아비첸누스(+1037), 스페인의 아베로에스(+1198), 유대인 마이모니데스(+1204),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22)를 종래보다 더욱 잘 알게 되었다. 세계와 정신문제를 보는 그의 방식이 이교적인 내용에서 정화되고 그리스도교적으로 “세례”되어, 그리스도교의 신앙세계를 신학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본보기로 받이들여졌다. 그의 개념 용어들은 주로 이에 적절한 것으로 생각되었다.(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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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9.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주님, 저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흔히 루카 복음은 기도의 교과서라고도 불립니다. 루카 복음에 드러난 많은 단락에서, 예수님은 밤이 되면 홀로 외딴 곳에서 홀로 늘 아버지께 기도하셨으며, 이를 바탕으로 낮 동안 여러 고을을 다니시며 하느님의 뜻을 말씀으로 행동으로 표현하고 표출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삶의 이중적 운동은 바로 기도와 사랑이었습니다. 기도와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끊임없이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도가 하느님 사랑의 들숨이었다면, 이웃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날숨과 같습니다. 기도와 사랑은 예수님의 존재와 삶 자체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11,1)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눈에 늘 기도하신 스승의 모습에서 그들 또한 기도의 필요성을 느꼈고 또한 예전의 스승이었던 요한에게서 기도의 중요성을 들었기에,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11,1)라고 청합니다. 실제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서 참된 기도를 배울 수 있도록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그 어떤 사람’이 참으로 고맙게 생각됩니다. 그렇게 느끼시지 않나요. 좋은 질문, 필요한 질문을 던진 ‘그 어떤 사람’의 간절한 요구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 아빠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완전하고 올바른 기도를 배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기도하라, 고 말씀하셨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영광과 찬미의 기도를 바치라기보다, 오히려 역경과 시련에 직면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점이 특이합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마태5,44), “그 일(재난)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마르13,18),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루22,40) 그 까닭인즉 그런 때야말로 우리는 자기 자녀들을 악에 희생시키고 싶지 않으신, 하늘에 계신 자비로운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인식해야 하는 순간이기에 그렇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7,7~11) 이는 곧 예수님은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기도하라고 촉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힘만으로는 악의 권세를 극복할 수 없기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결코 아무것도 악한 결과를 낳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에 관해 가르치고자 한 핵심은 바로 우리가 빌 수 있고 또 빌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을 청하는 것이며, 이 영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라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알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른 표현으로 우리가 빌 수 있고 또 빌어야 하는 것은 필경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밖에 다른 기도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기도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유일한 기도이며 최종적인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비록 짧지만, 짧은 만큼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 있기에,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결국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갈망에 대한 응답이며.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입니다.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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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9.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예수님께서 손수 주신 기도 /
박윤식 [big-llight] 241008 21:33 ㅣNo.176638
우루과이의 어느 작은 성당 벽에 이런 기도 글이 적혀 있다. 이를 보면 우리가 얼마나 주님의 기도와는 동떨어진 행동을 하며 사는지를 마음 깊이 깨달을 수가 있을 게다. 그 실제내용이다.
너희는 ‘하늘에 계신’이라고 말하지 마라. <늘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말하지 마라. <늘 혼자만을 생각하면서>
‘아버지’라고 말하지 마라. <한 번도 아들딸로 산 적이 없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말하지 마라. <늘 자기 이름 빛내려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말하지 마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지 마라. <늘 내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말하지 마라. <먹고살 재산을 다 축적해 놓았으면서>
‘저희가 용서 하듯이’ 하고 말하지 마라. <늘 미움과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지 마라. <늘 죄지을 기회를 찾으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지 마라. <악을 보고 아무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응답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친 적도 없으면서>
여기에 쓰인 것 중 이것 하나만은 자신 것이 아니라고, 굳이 항변할 구절이 하나라도 있는지?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주님, 요한이 가르친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걸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 나라가 오게 하소서. 매일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어쩜 이 ‘주님의 기도’만큼 단순하고 위대한 기도는 아마도 없을 게다. 서슬 시퍼런 율법 시대에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은, 그것은 모르긴 몰라도 거의 목숨 내건 행동이었으리라.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란다. 하지만 그분과 대화함을 느끼는 이 과연 몇이나 될지? 자식 놈들은 그냥 ‘엄마, 아빠’를 부른다. 그러면 그들 부모들은 왜 부르는지를 알게다. 몇 마디 하지 않아도 통하게 되어 있다. 애정이 깔려 있기에.
사실 우리는 주님의 기도가 완벽한 기도이면서 동시에 우리 기도의 모범임을 발견한다. 주님의 기도뿐 아니라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드리는 기도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우리가 청하는 것을 감히 받을 거라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하겠다.
오늘을 사는 믿음의 생활을 하는 우리는, 그 어떤 기도보다도 이 주님의 기도를 자주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일용할 양식을 수시로 걱정하고,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로 뚜렷이 느끼지를 못하는 것 같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저 막연한 마음으로만 기도를 하는 탓이 아닌지? 정녕 이 기도에 담긴 참뜻을 깨닫는다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까닭을 당연 이해하리라. 그러기에 기도할 때마다, 이 기도는 오직 주님의 것이란 것을! 주님의 기도, 이 기도는 제자들의 간절한 요청으로 그분께서 손수 가르쳐 준 것임을 단단히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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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9.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제자들이 이미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를 청하였고,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알려 주셨는데, 우리는 지금도 기도하는 법을 묻습니다.
어쩌면 주님의 기도를 아직 다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진심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친밀함이 있어야 하고, 또한 그분을 아버지로 부르는 모든 이를 형제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드러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려면, 먼저 내 안에서부터 그 나라를 가로막는 모든 요소를 없애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보다 내가 바라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은, 때로 우리에게 작은 겟세마니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루카 11,2)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그 나라가 오도록 내가 십자가를 져야 할 때에도 아버지의 나라를 바란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바란다면,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날마다 (“저에게”가 아니라) “저희에게”(11,3) 양식을 주시기를 청한다면 오늘 양식이 없는 이에게 양식을 마련하여 주어야 하고. 우리에게 하루하루의 양식을 주시는 분이 아버지이심을 믿고 내일을 맡겨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 되기를 바란다면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이”(11,4)를 용서하여야 합니다.
우리 형제의 죄는 하느님께만 용서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용서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한다면 자신이 유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싸워야 합니다. 날마다 바치다 보니 쉽게 느껴지는 이 기도는 아직도 배워야 할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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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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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9.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기도의 시작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그 존재를 뜻하기에
아버지의 이름이란
아버지, 즉 하느님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아버지를 거룩히 드러내신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드러낸다는 것은
감추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께서 당신을
일부러 감추신 것은 아니었지만
인간은 하느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인간과 구분되는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계시는 것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인간과 다르기에
인간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은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또한 볼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거룩함의 방식도 이제는
서로 다른, 서로 구분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시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정말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신을 과시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하느님을 거룩하기 드러내시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를 당신께로 이끌어 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우리도 하루에 수 없이 많이 바칩니다.
그 기도를 시작하면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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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9.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복음 선포에 매진했던 바오로 사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바오로 사도의 회개 이후의 삶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요즘 미사 중 봉독되고 있는 갈라티아서는 아주 좋은 참고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갈라티아서를 집필할 당시 갈라티아 지방에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유랑 선교사들이 찾아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새 신자들에게 할례와 율법 준수를 너무 강하게 요청하다 보니,
갈등과 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 선조들에게 상투를 자르라고 윽박지르는 것과 비슷한 경우일 것입니다.
당시 어떤 대쪽같은 양반은 상투를 자르기 전 내 목부터 자르라고 외치기도 했었습니다.
당시 갈라티아 공동체 사람들은 코린토 교회 못지 않았습니다.
세례를 받았지만, 윤리 도덕적 타락, 우상 숭배나 미신 행위 등 과거의 악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강조하며, 복음에 충실할 것을 권고하기 위해
갈라티아서를 집필한 것입니다.
이 서한을 통해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꼐서 자신에게 큰 사명을 하나 주셨는데, 그것은 이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할례 문제로 하도 시끄럽다 보니, 바오로 사도는 이 부분에 대해서 단호하게 선을 긋습니다.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조건 없이 베풀어지며, 유다인이 아닌 이민족 사람들에게는 할례가 의무가 아닙니다.”
갈라티아서를 통해 우리는 초대 이방인들을 위한 최고 목자로서 자리매김하기까지 바오로 사도가 겪었던 숱한 고초와 갈등을 잘 읽을 수 있습니다.
사실 회심 이전 유다 지도층 인사들이 젊고 똑똑한 청년 유다인 바오로에게 걸었던 기대가 상당했습니다.
유다교 미래를 이끌 든든한 인재로 일찌감치 낙점했었겠죠.
그런 바오로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낙마를 하고, 실명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리스도교로 극적인 회개를 하게 되는데, 그로 인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실망감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당사자 바오로는? 특별한 방법으로 주님의 사도가 된 것에 감지덕지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유다인들로부터는 이미 배신자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적극적이고 열렬한 환영을 받았는가?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가장 앞장 서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고 구속시키는데 선수였던 그가 하루 아침에 그리스도교인이 되니, 의아한 시선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혹시 저게 일부러 저러는 것 아닐까?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섬멸하기 위한 이중 작전을 쓰고 있는 것을 아닐까?’
그런 결코 만만치 않은 양측 분위기를 감지한 바오로 사도였기에, 더 백방으로, 더 헌신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민폐를끼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그렇게 십년 이상 이런 저런 박해와 오해 속에 자신이 만나고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던 바오로 사도는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그리스도교 공동체 지도자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간 자신이 해온 일에 대해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교계 지도자들에게 공인을 받습니다.
사정이 좋든 나쁘든, 주변 분위기가 내게 호의적이든 적대적이든 상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온몸으로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복음 선포에 매진했던 바오로 사도의 사목적 열정과 믿음에 큰 감사와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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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9.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2절)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들과 같게 하신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그분께 맞갖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때 우리의 간청을 받아주실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2절), 그분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우리 마음과 뜻 안에서 거룩하게 지켜지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이 기도는 그분의 이름이 영예롭고 거룩한 것임을 알고 고백하는 마음과 믿음이 자신에게 생기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이 기도가 생명의 근원이며 축복의 원천이다. 구원받아 높이 들어 올려지는 데 더 좋은 기도는 없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2절) 아버지의 나라는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마태 25,34)이다. 이것이 우리의 청원이다. 그 나라는 만일 우리가 왼쪽에 서게 되면 우리는 그 나라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나라에서 모든 구원받은 자들에게 돌아갈 몫을 우리도 받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3절) 일용할 양식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빵만이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 또한, 영적인 양식으로 단 하루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하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양식을 청하는 것은 그분 안에 살고 그분과 하나 되기를 청하는 것이다.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4절) 우리는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빌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그들이 어떤 잘못을 했든지 용서해야 한다. 이렇게 용서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는 마지막으로 유혹자에게 끌리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즉 죄만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죄를 피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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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9.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세일즈 하듯 기도하라
한 수도자가 산에 올랐다가 그만 길을 잃었는데, 사람이 살지 않을 듯한 깊은 산중에서 다행히
인가를 찾아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의 주인이 하는 기도를 듣고, 수도승은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졌습니다.
“신이시여, 어제도 저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이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혹시 등이 가렵거나 허리가 아프시진 않은가요.
그럼 제가 등도 긁어드리고 허리도 만져드릴 수 있을 텐데.
혼자 하기는 힘든 일이잖아요.
혹은 발을 씻겨드리면 참 좋을 테고요….”
수도승은 그만 더 참지 못하고 기도를 멈추게 했습니다.
“이봐요, 잠깐. 날 살려준 건 감사하지만, 하느님께서 등이 가렵거나 허리가 아프다고요?
대체 어떻게 그런 무례한 언사를 한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기도서를 주며 기도하는 자세와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이튿날 수도승은 그 집을 떠나왔습니다.
다행히 길을 찾아든 수도승이 산을 거의 내려온 찰나, 그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대는 이제, 내게서 가장 가까운 이마저도 멀어지게 만들었구나!”
기도는 하느님께 무언가 청하고 얻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주님께서 주시려던 은총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기도는 마치 세일즈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넥타이를 사려고 넥타이 판매대로 갔는데 점원이 와서는 “무얼 찾으세요?”라고
물으면 어떨까요? 당연히 넥타이에 관심이 있으니 그리로 오지 않았겠습니까?
벌써 그 사람은 ‘이 가게는 손님에겐 관심이 없구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여러 넥타이를 들었다 놓았는데 파란색 넥타이를 가장 오래 집고 있었다면 뭐라 해야 할까요? “파란색의 다른 상품들을 제가 찾아볼까요?”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노란색 넥타이를 손에 감으며 예쁘죠?”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파란색을 원해요.”라고 할 때 “우리는 그런 재고가 없고, 요즘 누가 파란색 넥타이를 합니까? 그건 유행이 지났어요!”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상품을 사러 온 사람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냥 나가려고 할 때 관심도 없는데
쓸데없이 멜빵을 보여주며 “이건 관심 없으세요?”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그 가게는 절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손님은 가게 점원이 무엇을 원하는지 압니다. 바로 판매로 돈을 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만 주장하면 사려고 하는 사람은 기분이 나쁩니다.
사려는 사람도 무언가 얻는 게 있어야 합니다. 바로 영광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되기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당신이 아버지라 불리고 당신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당신 나라가 임하고 당신 뜻이 이루어지며 당신이 매일 양식을 주시는 분이시고 당신 때문에 이웃을 용서할 수 있으며 당신 때문에 죄를 짓지 않게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얼마 전에는 반려견을 계속 데려오며 병이 낫게 안수해 달라고 청하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안수하고 있는데 개에게 또 안수하려니 좀 그랬습니다. 물론 반려견에 너무 의지하고
있기에 강아지가 나으면 좋은 일이라 몇 번은 해 드렸습니다.
그러나 매일 그러는 건 좀 그래서 이제 마지막이라고 했더니, “개가 나으면 50만 원 드리려고 했는데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개에게 안수하여 돈 버는 사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어떻게 은총을 얻어낼 수 있을까요? 주님의 기도를 의미를 음미하며 정성껏 바치면
우리의 자세가 주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게 되어서 많은 은총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미국 시카코에서 태어난 ‘워너 솔맨’(Warner Sallman: 1892–1968)은 미국이 자랑하는 화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얼굴”이라는 유명한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담긴 그의 그림책은 1940년도에 500만 부 이상이 인쇄되었고,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가 있었는데 1917년 결혼하고 얼마 안 된 젊은 나이에 중병에 걸렸습니다.
의사가 “당신은 임파선 결핵입니다.”라고 진단하고 “당신은 길어야 석 달 살 것입니다.”라고 통지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솔맨의 마음은 절망적으로 되었습니다.
유명한 가수였던 그의 아내는 그때 임신 중이었으므로, 솔맨은 아내에게 더욱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고, 곧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면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괴로웠습니다.
그가 몹시 괴로워하며 매일같이 절망에 빠져 신음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그를 위로하며 말했습니다.
“여보! 3개월밖에 못 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3개월을 허락해 주셨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그리고 아무도 원망하지 맙시다.
3개월이 얼맙니까?
천금 같은 그 기간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 봅시다.
3개월이나 되는 기간을 살게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솔맨은 아내의 말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더 이상 원망과 불평의 말을 하지 않고, 아내의 말대로 남은 3개월 동안 오직 감사하며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아주 작은 일부터 감사를 시작하면서 모든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애에 마지막 작품이라 생각하고, 예수님의 얼굴을 그렸는데 그에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3개월이 지났는데도 몸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이 더 건강해져서 병원에 가서 다시 진단해 보았더니, 임파선 결핵이 깨끗하게 사라진 것입니다.
기도는 무언가를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청하는데 나의 것만을 청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나의 청을 들어주면 그분이 무엇이 좋은 건지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청을 들어주되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청을 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강요하듯 물건을 파는 것에만 집중하지 말고 전문 세일즈맨처럼 그 물건을 사면 손님에게 무엇이 좋은지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장사가 저절로 잘 될 것입니다.
은총도 그렇게 끊임없이 받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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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9.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기도는 ‘말’이 아니라 ‘마음’과 ‘삶’으로 바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1-4)”
1) ‘주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기도’이고, 동시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우리가 실행하겠다고 다짐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주님을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위한 일’은, 사실은 ‘우리를(나를) 위한 일’입니다.
그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나 자신이 구원받으려고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나를 위한 일’인데, 그것은 나를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이기 때문에 ‘주님을 위한 일’이 됩니다.>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라는 말에서 ‘기도하는 것’이라는 말은, ‘기도하는 방법’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기도의 예문’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기도하는 방법에 관한 지침”이기도 하고, “기도문의 모범”이기도 합니다.
2) ‘기도’는 ‘주님의 뜻’을 ‘내 뜻’에 맞추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내 뜻’을 ‘주님의 뜻’에 맞추는 일입니다.
주시지 않을 것을 달라고 떼쓰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뒤의 11절-12절에,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뜻에 따라 풀어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생선을 주려고 하는데 아들이 생선은 싫다고 하면서 뱀을 달라고 하면, 어느 아버지가 마음을 바꿔서 뱀을 주겠느냐?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걀을 주려고 하는데, 아들이 달걀은 싫다고 하면서 전갈을 달라고 하면, 어느 아버지가 마음을 바꿔서 전갈을 주겠느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으로 보여도 실제로는 기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빈말’, 또 ‘생떼’를 부리는 ‘고집’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아버지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또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좋은 것’이 무엇인지, 내가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나에게 좋은 것이고, 선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청하는데, 그것이 정말로 좋은 것이고 선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할 일이 바로 ‘아버지의 뜻’을 묻는 ‘기도’입니다.
무엇을 청해야 할지 모르니까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말장난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3) ‘주님의 기도’에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가
들어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먹고사는 문제’도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가난한 서민들이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힘들어 하고, 고민하는 것을 업신여기거나 ‘폄하’하면 안 됩니다.
아직도 ‘일용할’ 양식 자체가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부귀영화를 청하는 기도가 아니라, ‘오늘’ 생존하기 위한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내일’이라는 시간은 주님의 시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내일의 양식’까지 청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에 입술로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고 기도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세속에서의 출세와 성공을 바라고 있다면, 또 남들보다 더 부유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면, 그것은 ‘거짓 기도’이고, ‘빈말’입니다.
4) ‘용서’의 경우, 너무나도 분하고 억울해서, 용서를 하고 싶어도 용서가 안 되는 경우도 있고, 원인과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사람을 너무 미워해서 그 사람을 용서할 마음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용서를 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경우에, ‘주님의 기도’는 ‘용서할 힘’을 달라고 청하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니까 주님께 도와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용서할 마음이 아예 없는 경우에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은 ‘거짓 기도’를 바치는 것이고, 그런 경우에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수록 죄만 자꾸 늘어나게 됩니다.
5) ‘기도’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반대로 표현하면, 신앙인이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기도를 잘해야 합니다.
말을 잘한다고 기도를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이, 또 오래 바친다고 기도를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양’이 아니라 ‘정성’입니다.
기도는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바치는 것이고,
‘삶’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기도를 정말 잘하는데,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면, 또 ‘삶’이 신앙인답지 않다면, 그것은 다음 경고 말씀에 해당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내 삶이 곧 기도다.” 라고 자기 마음대로 우기면서, 기도를 전혀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경우는 백 퍼센트 위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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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9.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1,1-4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옛 교부들이 하신 말씀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세 가지 요소 각각에서 우리가 집중하며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 방향성을 알려주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가지 요소 중 ‘주님의 기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이 기도를 통해 우리가 당신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어떤 것을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시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주님의 기도에 담겨있는 수많은 신앙의 보물 중 ‘청원’이라는 부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청원, 즉 하느님께 기도 중에 무엇을 청할 것인가는 내가 마음 속에 어떤 욕망을 갖고 있는가에서 비롯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욕망 자체를 가지지 말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무리 채워도 더 갖고 싶게 만들 뿐인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욕망하지 말고, 예수님 당신께서 바라시는 것을 우리도 바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것들을 바라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아들로서 원해야 하는 것을 바라셨습니다. 즉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그리고 당신이 순명과 실천으로 그 과정에 협력하실 수 있기를 바라신 겁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부모는 자녀가 청했으면 하는 것을 그들이 바랄 때, 다시 말해 자기 마음과 자녀 마음이 서로 통했을 때 가장 기뻐하는 법입니다. 그렇게 서로 마음이 통한 것을 알고 나면 자녀가 청하는 다른 것들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먼저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심으로써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온 세상에 드러내기를 청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짐으로써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가,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그분의 다스림이 온전히 실현되기를 바라라고 하시지요. 그것이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이며, 그렇게 그분의 뜻과 나의 뜻이 하나로 일치될 때 나는 자연스레 하느님 뜻에 맞는 것들을 청하게 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뜻을 이루기 위해 청하는 것들을 기쁘게 들어주신다는 겁니다.
하느님께 기도 중에 청할 때 주의해야 할 또 다른 한 가지는 ‘나’라는 개인이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서는 청하고 받는 주체가 다 ‘저희’라는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기도가 하느님과 나 사이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나누는 대화긴하지만, 우리가 바치는 모든 기도는 나의 개인적 이익이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 전체의 선익을 지향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나의 이익만 바라는 기도, 내 가족과 지인들의 안위만을 청하는 기도는 사실 기도라기보다 하느님께 일방적으로 들이미는 ‘청구서’밖에 안될 겁니다. 하느님께 그런 청구서를 들이미는건 기도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그분과 나 사이의 친교와 일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 지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기도 중에 청할 때 주의해야 할 마지막은 기도하기 전에 그분께 청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을 돌아보는 겁니다. 미사 중에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사제의 이런 권고로 시작하지요.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삼가 아뢰오니’라는 말은 ‘조심스런 마음으로’, ‘경건한 몸가짐으로’라는 뜻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바치지 말고, 내가 하느님 앞에서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갖는 의미와 무게를 생각하며 심사숙고해서 기도하라는 의미겠지요. 주님의 기도를 그렇게 바친다면 우리는 그 기도만으로도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자녀’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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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9.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날마다 저희에게 ”
루카와 마태오 복음사가는 ‘주님의 기도’를 전해주고 있는데, 공통적인 것도
있지만 차이점도 있습니다.
마태오는 기도 ‘올바른 자선’(마태 6,1-4)과 ‘올바른 기도’(마태 6,5-8)에 대한
가르침 끝에 ‘주님의 기도’(마태 6,9-13)가 이어집니다.
루카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부탁으로 주님의 기도를 시작하지요.
‘아버지의 뜻’ 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루카복음에서는 ‘오늘’ 일용할 양식 대신 ‘매일’의 양식이라는 말로 대신하고 ‘악’에서
구해 달라는 기도는 생략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주님의 기도를 마치면서 용서에 대해서 다시 강조(6,14-15)하는 데에 비해서
루카는 하느님께 ‘끊임없이 간청’(11,5-8),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11,9-13)는 간정을
당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기도할 때에 우리의 처지에서 하느님께 청하지요.
그러나 먼저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오시고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보통 기도라고 하면 통상 내 편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호소나
청원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언젠가 돌아가신 김 추기경님께서 하신 말씀이 새삼스럽스럽습니다.
추경님께서 한 삶을 뒤돌아보면 자기 자신이 하느님을 향하고 듣기보다는
하느님 앞에서 더 떠든 자기 모습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내 청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삶을 살면서 ‘내 뜻’보다는 ‘주님의 뜻’에 맡기는 자신이 됩니다.
성모님께서 나자렛에서 가브리엘 천사 앞에서 ‘주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셨고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남편의 못된 버르장머리. 며느리의 고집을 주님께서 고쳐주시기를 기도한다면 분명
그는 그것이 이루어지나 마나를 따지고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가 효혐이 있느니
없느니 따질 것입니다.
기도는 ‘이루어지게 하는 기계’가 아닌 이상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호소하고 기도하되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어느 사람이 오랫동안 기도했는데 그 뜻이 드디어 이루어졌다는 말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마찬가지로 석연치 않는 기분이 듭니다.
그것은 자기의 바람이 강하게 바탕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기의 뜻’이 남아 있는 기도보다는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인자하시기 때문에 당신을 원망하는 기도,
기도답지 않은 기도도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꼭 모양을 갖추고 기도의 원칙을 말 할 수는 없습니다.
루카복음사가는 끊임없이 지치지 않고 하느님께 청하라는 것을 보아서도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를 잊지 않고 들어주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하는 기도가 참다운 기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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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9.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거룩함과 다스림이 실현되는 나라
오늘은 ‘주님의 기도’ 가운데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11,2)라는 구절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친밀함과 신뢰와 자애로우심을 불러일으키는 ‘아빠’(Abba)라는 호칭으로 시작합니다(11,1). 이 고백에는 비참한 인간을 자녀로 삼아주신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주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11,2) 하고 기도하라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속적인 것과 구별되는 힘과 신비와 존엄성을 갖추신 거룩하신 분이시며, 몸소 거룩하게 하십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고 인간을 행복으로 이끄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 거룩하게 되도록 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거룩하게 되도록 청하는 것입니다.”(치프리아누스)
아버지의 거룩한 이름은 나와 형제자매들 안에서, 그리고 이 세상과 피조물을 통하여 드러나야겠지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5)고 하시는 주님 말씀 따라 매순간 아버지의 거룩함을 알아차리고 그 안에 머물며,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의 뜻을 실행해야겠습니다. 이것이 개인의 성화, 공동체의 성화, 세상의 성화로 가는 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묵상했듯이 거룩함은 “하느님의 무한하고 영원한 지식이 우리 안에서 밝게 빛나 당신의 은혜가 얼마나 넓고 당신의 약속이 얼마나 길며 위엄은 얼마나 높고 판단은 얼마나 깊은지 깨닫는 것”('주님의 기도' 묵상, 3)을 말합니다. 조건없이 건네고 나누는 사랑과 너그러움, 온화한 미소와 배려, 타자의 아픔과 고통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 차별과 불평등이 없는 상태, 세속적이고 탐욕적인 것과 구별되는 성령의 선물을 지니는 것을 말하지요.
다음으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11,2) 하고 기도하라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공간이 아니라 품위를 갖고 권능을 갖춘 ‘하느님의 다스림’이며, “그곳에는 당신께 대한 또렷한 바라봄이 있고 당신께 대한 완전한 사랑이 있고 당신과의 복된 사귐이 있으며 당신의 영원한 누림이 있습니다.”('주님의 기도' 묵상, 4)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한국사회는 과연 정말 행복하고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선과 자비와 정의는 짓밟히고 국민의 주권을 짓밟는 권력집단에 의한 진실은폐와 언론통제와 조작, 정경유착에 의한 부정부패, 빈부격차의 심화 속에 존엄한 인간이 설 자리는 사라져가는 암울한 현실이라고들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통하여 이미 우리에게 다가온 하느님의 사랑의 다스림, 정의의 다스림이 이 땅에서 실현되길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 친히 하느님의 나라이므로 그분이 오시기를 청합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제외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계속해서 기도와 간청을 바쳐야 합니다.”(치프리아누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 하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나라는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가 되도록 우리 자신부터 회개하고 서로 아끼고 존중하며 연대해야겠습니다.
이 땅에 진정 아버지의 거룩함이 드러나고, 그분의 사랑과 권능이 드러나 인간다운 세상이 되길 갈망하며 온마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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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9.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청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루카 11,2)
먼저 우리는 무엇보다 이 땅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모든 것에 앞서 영광 받으실 아버지의 이름이 이 세상에 거룩히 드러나기를, 그리하여 사랑이신 아버지의 주권이 다스리는 하느님의 나라가 오길 간절히 바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있는 사랑과 정의, 공정과 평화는 참으로 미소합니다. 몹시 불완전하기까지 하지요.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권능과 자비가 주도할 때에야 비로소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결핍과 편중성, 불완전함을 끌어안아 충만하게 하시는 완전함이십니다.
"일용할 양식, 용서, 유혹에서 지킴"(루카 11,3-4)
이어서 청해야 하는 바는 인간 사이의 관계성에 기반합니다. 하루를 지탱할 양식과 용서, 유혹의 문제는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튀어나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일상의 삶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과 예루살렘 초대교회와의 관계 형성 과정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친교의 표시로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갈라 2,9)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계시 체험 이후 3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케파를 만나 예루살렘에서 보름을 지냈다고 했지요.(갈라 1,18 참조) 그리고 나서 14년 뒤 바르나바, 티토를 대동해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가 핵심 역할을 하는 사도들과 일치의 시간을 가집니다. 교회는 이렇게 긴 시간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고 삶으로 실천한 이들을 통해 보이게, 보이지 않게 형성되어 자라나다가 일치를 이루고, 또 서로를 통해 확장되는 것이지요.
"다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기로 하였고"(갈라 2,10)
예루살렘 교회와 바오로 사도 일행은 서로가 받은 소명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서로를 격려합니다. 그러면서도 유다인 선교사든 이방인 선교사든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보편 소명에 대해서 언급하지요. 바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입니다. 이야말로 그가 어떤 신분이건 어떤 사도직에 임하고 있건 간에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모든 사람의 공동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갈라 2,11)
오늘 독서 대목의 후반부는 전반부의 분위기와 사뭇 다르게 흘러갑니다.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면서도 여전히 율법과 관습의 그늘에서 온전히 자유롭기 어려운 일부 사도들의 위선적 행동에 바오로가 작심하고 직언을 던진 것입니다. 방금 전까지 교회의 일치 현장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냉랭한 분위기에 머쓱해지고 말았네요.
하지만 바오로는 물론 교회도 이러한 공동체 안의 갈등과 분쟁을 감추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불완전한 인간들의 모임이기도 한 교회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니까요. 진리는 초대교회의 형성 과정과 사도의 과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걸 실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전시용 박제품이 아니라 살아계신 그리스도시기에, 이 모두를 포용해 결국은 하늘 나라를 완성하실 수 있으시니 자신 있으신 겁니다.
유다교 제도권 밖에서 고군분투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위험은 널려 있고, 그래서 더 안전에 대한 유혹도 강했을 겁니다. 자칫 유혹에 무너지면 외부로부터의 비난을 감수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용서하기도 어려웠겠지요. 이제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용서의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살다 보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내용 하나 하나가 삶의 구석구석에서 힘을 발휘함을 느낄 겁니다. 이 기도가 우리에게 청하라고 가르치는 바가 얼마나 통합적이면서도 구체적인지요!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은 그 안에 다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러니 우리, 과정을 너무 두려워하지 맙시다. 갈등하고 일그러지고 넘어지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 나라는 자라고 있으니까요. 아버지의 이름과 뜻이 이 땅에 새겨져 사랑과 정의, 자비와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 나라가 되기를, 영육의 양식을 얻고 유혹을 이겨내며 용서에 지치지 않는 하느님 자녀이기를 바라고 또 바라다보면 어느새 이 아름다운 기도의 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은 더욱 정성껏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묵주 기도의 성모님'께 화해와 용서와 일치를 위해 전구해 주시도록 부탁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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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9.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는 삶
<2024.10.9>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20:12~21절)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는 삶❞
❚ 교만한 자는 자신을 내세우나 이것이 패망의 원인임을 깨달아 겸손함으로 믿음을 지켜내야 합니다.
✔ 우리가 끝까지 지켜내야 할 믿음은 무엇입니까?
➲ 끝까지 영적인 겸손함을 지켜내야 합니다(12~15절).
바벨론 왕 브로닥발라단은 히스기야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히스기야에게 보냈습니다(12절). 히스기야는 자신을 문병하기 위해 온 바벨론의 사자들에게 왕궁과 나라의 값진 보물을 남김없이 부여 주었습니다(13절).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에게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왕궁에 무엇을 보았는지 물었습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궁에 있는 것을 그들이 다 보았다고 말했습니다(14~15절). 사자들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건, 국력을 자랑하는 차원에서건 이는 매우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체험하였지만,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히스기야의 이러한 행동은 결국 자신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물질을 의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바벨론과의 동맹을 확고히 함으로써 정치적인 협약을 통해 유다를 보하겠다는 그의 생각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사람들과 구별되는 이유는 외적으로 남들보다 뛰어난 조건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자만심에서 비롯된 큰 잘못을 저지른 히스기야는 후에 유다에 극심한 고통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됩니다. 자칫 우리 자신의 소유나 장점을 자랑스러워 할 때 영적인 눈이 어두워질 수 있음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잘 나서 스스로 높이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높여 주셔야만 합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는 말씀을 늘 마음에 품고 끝까지 영적인 겸손함을 지켜내는 참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끝까지 영적인 민감함을 유지해야 합니다(16~18절).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히스기야에게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사야를 통해 전해진 말씀은 장차 왕궁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바벨론에 빼앗기되 조상들이 이날까지 쌓아 놓은 모든 것을 빼앗겨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가 올 것이라는 말씀이며(17절), 또한 왕의 몸에서 낳은 자녀들이 포로로 끌려가서 바벨론을 섬기는 자들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18절). 히스기야의 어리석은 행동은 교만의 패망의 선봉이며, 교만과 자기 자랑은 곧 큰 위기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는 참 목자 되시는 주님의 음성을 잘 분별하여 하나님께서 걸어가게 하신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히스기야가 실수한 대가는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역대하에서는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못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대하 32:25)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극적으로 병에서 나았다면 새로운 삶을 주심에 감사하며 더욱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을 보였어야 했는데, 히스기야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어려움이 해결되고 기도 응답이 이뤄졌을 때 우리의 삶에 더욱 큰 위기가 올 수도 있음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문제가 해결되면 간절한 기도도 식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려는 마음도 사라지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잘 생각하지 않으면 실수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분별없이 저지르는 실수의 결과는 매우 혹독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끝까지 영적인 민감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항상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끝까지 영적인 신실함을 소유해야 합니다(19~21절).
히스기야는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또 그는 “...만일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19절)라고 고백합니다. 히스기야의 이 발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호한 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범죄를 시인하고 여호와의 징벌 선고를 겸손히 받아 들이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시대에 그러한 징벌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것인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내포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심판의 말씀에 대해 기꺼이 순복하는 태도로 여호와가 행하시는 일은 선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업적과 저수지와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일은 유다 왕들의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20절).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21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은 분명히 드러난 죄에 대해서도 잘못을 인정하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죄를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들은 후에 히스기야는 그 일이 자신의 교만으로 말미암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수치심 때문에 잘못을 감추려 하기 쉽지만, 죄를 뉘우치면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완악함 때문에 더 큰 화를 자초하는 경우가 없는지 말씀을 거울로 삼아 자기 자신을 잘 살펴서 끝까지 영적인 신실함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내 자신을 내세우고 싶은 교만한 마음에 사로잡혀 사리분별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영적 겸손함을 지켜내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끝까지 죄가 없다고 고집하는 미련한 악인이 되지 않도록 마음을 돌이켜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왕하 20:12~21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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