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숫자형 포메이션, 브라질의 4-2-4 포메이션과 ‘판타스틱 4’의 첫 등장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매직 마자르’의 돌풍을 예의주시한 것은 아직 뚜렷한 존재감이 없던 브라질 대표팀이었습니다. 지금이야 브라질 대표팀은 우승 후보 0순위로 꼽히지만, 당시엔 강호의 위치에 들지 못했습니다. 물론 약체는 아니었지만, 당시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 비해 두각을 나타내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남미 선수들이 아직 유럽 선수들의 피지컬을 뛰어넘지 못했던 시기기도 하였습니다.
<브라질 축구 발전에 끈 영향을 끼쳤던 이방인 벨라 구트만. 그는 브라질 명문 클럽 상 파울루 감독을 역임하였다. 그 후 포르투갈로 건너가 '검은 표범' 에우제비오와 함께 SL 벤피카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재계약 과정에서 충돌로 벤피카를 떠났고, 이때 '벤피카가 유럽 대회 우승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저주를 하였다. 그 이후 벤피카는 유럽 대회 준우승만 7회하면서, '벨라 구트만의 저주'라고 불리우고 있다.> 포르투갈판 홍진호의 저주?
스위스 월드컵 이후 브라질 지도자들은 헝가리 지도자들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축구 전술을 발전시켰죠. 특히 구스타프 세베스 감독과 지역 방어를 고안했던 벨라 구트만 감독을 상 파울루(Sao Paulo) 감독으로 데려오기도 하였죠. ‘매직 마자르’ 헝가리 대표팀의 장점을 받아들이기 위해서였죠.
지난 1950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 결승전에서 브라질 대표팀은 변형 WM 시스템인 대각선 포메이션을 선보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결승전에서 베로우어 시스템를 도입한 우루과이 대표팀에게 패배하였습니다. 이 충격적인 패배를 계기로 브라질 축구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여담으로 이 당시 브라질 대표팀은 상하의뿐만 아니라 양말까지 흰색으로 입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루과이에게 결승전에서 패한 뒤, 현재의 초록색 선이 들어간 노란색 상의에 파란색 하의로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상당히 거구였지만, 브라질 대표팀을 현재 축구 강국으로 발돋움시킨 비센테 페올라 감독. (오른쪽에서 2번째) 상 파울루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 오직 상 파울루와 브라질 대표팀 감독만 역임했다. 그는 최초의 숫자형 포메이션인 4-2-4 포메이션을 고안했을 뿐만 아니라, 브라질 전통의 ‘판타스틱 4’까지 만들어내었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비센테 페올라 감독이 이끄는 브라질 대표팀은 4-2-4 포메이션을 들고 나타납니다. MM 시스템까지 전술들이 수비수를 2~3명 배치한 것과 다르게 수비수 4명을 배치한 파격적인 전술이었죠. 또한, 이전 포메이션들이 단어나 알파벳으로 표기했던 것과 달리, 최초로 숫자를 통해 포메이션을 표기하였습니다. 그 결과 브라질 대표팀은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우승하였고,지금까지 세계 축구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헝가리에서 온 벨라 구트만 감독과 함께 브라질 명문 클럽 상 파울루(Sao Paulo)를 이끌던, 당시 코치였던 페올라 감독은 MM 시스템에서 발전시켜 수비수를 4명까지 늘리는 걸 고안했죠. WM 시스템이나 MM 시스템은 수비 진형이 5명이었지만, 사실상 고정된 수비수는 풀백 2명과 센터백 1명, 총 3명뿐이었죠. 당시엔 ‘수비는 수비 지역에서 수비수만’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수비에서 어려움이 있었죠. 하프백들이 수비에 가담한다고 하여도 한계가 있었죠.
따라서 수비에 한계가 있다고 느껴, 하프백이었던 벨리니(Bellini)를 적극적으로 센터백 위치까지 가담시키게끔 하였습니다. 이로서 수비수를 4명으로 구성할 수 있었고, 3명을 둘 때보다 수비 안정감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또한, 2명의 센터백이 정착되면서 이때부터 풀백이 완전한 측면 수비수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센터백 2명과 풀백 2명을 두는 현재 축구 전술의 주류 ‘4백 라인’의 시초였습니다.
페올라 감독은 4명의 수비수를 두고 지역 방어를 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4명을 일렬로 세워 그라운드를 커버하게 하였습니다. 4명이 그라운드의 너비를 골고루 분담해, 효율적으로 ‘지역’을 맡을 수 있었죠. 따라서 4명을 배치한 것은 효과적인 지역 방어를 펼치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수 균형이 무너지지 않도록 2명의 중앙 미드필더를 공격과 수비 모두 오가게 하였습니다. 벨리니 등 하프백 한 명이 수비에 가담하였으니, 공격수 한 명을 미드필더로 옮기게 한 것이죠. 이들이 현재 수비형 미드필더를 지칭하는 ‘볼란테’(Volante)였습니다. (수비형 미드필더 편에서 다뤘듯이, 당시 볼란테는 현재의 중앙 미드필더에 더 가까웠죠.)
<현재 브라질 명예의 전당에 올라 있으며 50년대 브라질 축구를 이끌었던 야전 사령관 디디. 그를 보조했으며 당시 브라질 축구 선수라면 누구나 동경해 마지않았던 디노 사니. 둘 다 공수를 오가며 공수 균형이 무너지지 않도록 한 투 볼란테를 소화하였다.>
50년대 브라질 축구 영웅이자 야전 사령관 역할을 맡았고, ‘축구공과 대화를 나눈다.’라는 찬사를 받은 디디(Didi)와 브라질 역대 최고의 볼란테였고, 당시 모든 선수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디노 사니(Dino Sani, 또 다른 이름은 지토)가 투 볼란테를 맡았습니다. 디디가 플레이메이킹을 할 때 디노 사니가 보조해주는 식으로 공격과 수비를 모두 수행하였습니다. 또한, 때로 수비수 벨리니를 미드필더 지역까지 진출시켰죠. 이러한 지시는 4명의 수비수를 뒀음에도 공수 균형이 무너지지 않게끔 한 것이죠.
<브라질의 초대 판타스틱 4 중 3명. 마리오 자갈로는 이후 1970년 월드컵 대표팀 감독으로 나서 ‘드림팀’을 이끌고 우승을 달성, 선수와 감독, 기술 고문으로 총 4번의 월드컵 우승을 맛보았다. 그의 기록은 현재 기네스 기록에 등재되어 있다. 바바는 58년, 62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결승전 2연속 득점이란 유일무이한 기록을 보유하였고, 62년 월드컵에선 골든 슈의 주인공이 되었다. 불우한 일생을 보냈던 가린샤는 역대 최고의 드리블러로 꼽히며, 월드컵에서 골 넣고 퇴장당한 선수들을 일컫는 ‘가린샤 클럽’으로도 기억되고 있다.>
여기에 4명의 공격수는 당시 최고의 공격 재능을 보유한 선수들로 구성하였습니다. 이들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브라질 특유의 공격 전술, ‘판타스틱 4’ (Fantastic 4)의 시초가 되었죠. 우월한 체력을 앞세워 미드필더까지 진출하고 공격 시 가공한 돌파를 선보였던 레프트 윙 마리오 자갈로(Mário Zagallo). 탁월한 롱패스까지 갖춘 센터 포워드 바바(Vavá). 소아마비로 오른쪽 다리가 짧았지만, 이를 이용해 신기에 가까운 드리블을 선보였던 역대 최고의 드리블러 ‘작은 새’ 가린샤(Garrincha)가 그들이었습니다.
이들만으로 충분했지만, ‘판타스틱 4’의 방점을 찍은 것은 당시 17살에 불과했던 어린 축구 천재였죠. 그의 차출을 우려한 시각이 많았지만, 페올라 감독은 결국엔 그를 선발하였습니다. 본래 서브로 출전했지만, 8강 웨일즈전 결승골, 준결승 프랑스전 해트트릭으로 본선에서 자신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습니다.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이 17살 선수의 이름은 에드손 아란테스 도 나시멘토(Edison Arantes do Nascimento)였습니다.
이 선수가 바로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축구 황제 ‘펠레’ (Pele)입니다. 어린 펠레는 페올라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여 축구 천재의 진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고, 특히 가린샤와 찰떡궁합을 보여주면서 ‘판타스틱 4’의 완성을 이룹니다.
<판타스틱 4의 방점을 찍었던 펠레. 17살이란 어린 나이, 마음가짐이 부족하다는 우려에도 페올라 감독은 결국 그를 월드컵 본선에 데려갔다. 본선 초반엔 교체 자원이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그의 화려한 개인기와 테크닉, 날카로운 슈팅은 시간을 거듭하며 무르익었다.그리고 토너먼트마다 결정적인 득점을 넣어주면서 마침내 영웅으로 등극하였다. 프랑스 역대 최고의 공격수 쥐스트 퐁텐느도 펠레의 플레이를 보고 ‘축구화를 벗어야할 기분을 주었다’라고 평가하였다. 요즘은 ‘펠레의 저주’로 우스갯소리의 소재가 되고 있으나, 역대 최고의 브라질 선수로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다.>
<최초의 숫자형 포메이션인 4-2-4 포메이션. 4백 라인의 도입과 투 볼란테의 탄생, 그리고 브라질 대표팀의 상징과도 같은 ‘판타스틱4’의 시초 등 많은 의의를 가진 포메이션이다. 자갈로, 벨리니의 움직임에 따라 3-3-4, 4-3-3 포메이션으로도 보지만 4-2-4 포메이션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브라질의 4-2-4 포메이션이었습니다. 공격의 핵심인 넷은 서로의 재능을 발휘하되, 호흡을 맞추며 상대 수비를 파괴해버렸죠. 플레이메이커 디노 사니에게 공을 이어받으면, 유럽 선수들이 가지지 못한 유연한 개인기로 수비진을 농락하였죠. 여기에 ‘매직 마자르’가 만들어낸 포지션 체인지를 겸비하였습니다. 이 4명이 만들어내는 파괴력은 푸스카스가 이끈 ‘매직 마자르’를 뛰어넘었고, 세계 축구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특히 남미 선수들이 가지지 못했던 힘과 신체 조건을 내세우던 유럽 축구계의 충격은 클 수 밖에 없었죠.
더불어 투 볼란데와 4백 라인을 갖춘 브라질 대표팀은 안정적인 수비 또한 할 수 있었죠. 특히 4명의 수비수들이 선보이는 지역 방어와 투 볼란테의 적극적인 수비 가담은 공격 활로를 모조리 막아버렸습니다.
이렇게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우승을 한 브라질 대표팀은 세계 축구의 중심으로 도약하고, ‘개인기의 남미’와 ‘피지컬의 유럽’의 구도가 형성되게 됩니다. 다만 이 구도는 현재 유럽 선수들의 기술 발전으로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당시 미드필더 진영에 가담했던 벨리니와 자갈로로 인해 3-3-4, 4-3-3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만, 4-2-4 포메이션은 축구계 판도에 다시 큰 변화를 가져왔죠. 최초의 4백 라인의 도입과 지역 방어의 만남, 유연한 선수 위치 운영, 현대 미드필더에 가까운 투 볼란테의 탄생, 남미 특유의 개인기를 살린 공격 전술 등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죠. 그 뒤 1962년 월드컵 우승까지 거머쥐며 브라질 대표팀은 세계 축구 최강의 팀으로 완전히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4-2-4 포메이션은 이후 브라질 특유의 4-2-2-2 포메이션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다음 대회였던 1962년 월드컵에서도 브라질 대표팀은 4-2-4 포메이션을 다시 들고 나왔고, 대회 중간 펠레의 부상이란 악재 속에서도 가린샤의 가공할 활약으로 다시 우승컵을 들게 됩니다. 1958년 월드컵 결승전에서도 득점했던 바바는 이때도 득점을 기록, 결승전 2연속 득점이란 자신만의 기록을 보유하게 됩니다.
비록 1966년 월드컵에서는 1라운드 탈락을 맛보았지만,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다시 펠레를 앞세워 전대 미문의 전승 우승을 달성, 우승컵인 줄리메 컵을 영구 보관하는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이후 브라질 대표팀은 1994년 미국 월드컵, 2002년 한일 월드컵까지 차지하며 오랫동안 세계 축구 정상에 군림하였습니다. 그 영광 속에선 이때 유래한 ‘판타스틱 4’, ‘황금의 4중주’가 늘 함께 하였죠.
여하튼 브라질의 4-2-4 포메이션을 바탕에 둔 공격 축구가 세계를 휩쓸지만, 여전히 축구 전술 발전의 중심이었던 유럽엔 머나먼 이야기였죠. 브라질 선수들만큼 화려한 개인기를 가지지 못한 유럽 선수들이었기에 4-2-4 포메이션을 그대로 쓸 수가 없었죠. 그래서 유럽 축구는 이후 여러 전술들이 등장하며, 새로운 축구 전술의 판도를 짜게 됩니다. 그 중 가장 오래 되었고 현대 축구에도 영향을 끼친‘카테나치오’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