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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 출간된 법정 스님(1932∼2010)의 미공개 강연 모음집 ‘진짜 나를 찾아라’(샘터)가 20여 일 만에 3쇄에 들어갔다. 나오자마자 초판 1쇄 1만5000부가 동이 났고, 추가로 찍은 2쇄 1만 부도 얼마 안 남았기 때문. 김성구 샘터 대표(사진)는 28일 “중장년층을 넘어 법정 스님을 잘 모를 것 같은 30대 젊은층에서도 의외로 인기”라며 이렇게 말했다.
‘진짜 나를 찾아라’는 법정 스님이 1979∼2003년 대학, 절, 성당, 문화강좌 등에서 한 강연 16편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 가신 지 10년이 넘었지만 녹음된 스님의 말을 글로 푼 덕에 읽다 보면 살아있는 스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김 대표는 “스님은 청중이 더 쉽게 이해하도록 종종 한 문장을 반복하시곤 했다. 글로 옮겨야 하기에 그런 부분만 빼면 최대한 육성 그대로를 살리려고 했다”라고 말했다.
법정 스님이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달라”는 유언을 남긴 것은 유명한 이야기. 미공개 강연집을 낸 것이 유언에 반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김 대표는 “당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면 법정 스님이 정말 당신의 어떤 말과 글도 더 이상 세상에 알리지 말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은 아닌 것 같다”라고 말했다.
법정 스님은 생전에 샘터 등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돌아가실 즈음 주변에서 인세 등 돈과 관련해 속된 말로 누가 물려받느냐는 문제로 잡음이 나자 이를 경계하고 사후에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런 유언을 하신 것 같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법정 스님의 꿈은 나눌 줄 알고, 자제할 줄 알고, 서로 손잡을 줄 아는 심성이 회복된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며 “사후에도 그 뜻을 널리 알리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순수 시민단체인 ‘맑고 향기롭게’까지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그 뜻을 펼치기 위해 시민단체까지 만드셨는데, 이런 당신의 말과 글을 알리지 않는 게 진짜 스님의 뜻을 받드는 것이겠느냐는 것이다.
김성구 샘터 대표는 “스님 가신 지 10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그리워하는 분들이 이렇게 많을지 몰랐다”고 말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김 대표는 인세와 관련한 법정 스님과의 일화도 소개했다.
“언젠가부터 매년 2월 말, 3월 초가 되면 왜 인세를 안 보내느냐는 독촉 전화가 왔어요. 스님을 잘 모를 때라 처음에는 ‘생각보다 돈을 좋아하시나?’ 하는 생각도 했지요. 나중에 한 지인이 자기가 아는 대학생이 스님에게 장학금을 받고 있다고 해 비로소 알게 됐어요. 그때가 딱 학비 내야 할 때였거든요. 돌아가신 뒤에 보니 스님에게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전국에서 엄청나게 많더라고요.” 법정 스님은 인세를 독촉하면서도 단 한 번도 이유를 말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김 대표는 책의 한 구절을 가리키며 “스님은 매년 봄 길상사 법회에서 ‘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니 나머지 이야기는 저 찬란하게 피어나는 꽃들에게 들으시라’라는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라고 말했다. 생과 사에 연연하지 않고 그때그때의 자기 생에 최선을 다하는 꽃들처럼 진짜 나의 삶을 찾으라는 뜻이라고 한다. 김 대표는 “법정 스님은 늘 ‘도착지와 시간을 생각하면 가는 길을 즐길 수 없는 것처럼 삶도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살 줄 알아야 한다’라고 하셨다”라며 “책을 통해 사람들이 그리운 스님의 향기와 함께 무엇이 진짜 나를 찾는 것인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불교신문에 스님도 관여했다. 광덕, 월주, 설조, 법정스님이 그들이다. 광덕 스님은 용모가 청초하고, 구질구질한 세속적 욕심이 없어, 내가 중다운 중이로구나 하고 존경했던 분이다. 스님은 그의 사형 성철스님과 함께 범어사 동산스님 제자다. 경전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던지, 내가 신문 社說 받으러 가서 방에서 기다리면, 어려운 한자도 거침없이 쓱쓱 휘갈겨 쓰곤 했다. 참으로 박학강기(博學强記) 하시던 분이다. 동국대 서정주 교수는 원고 받으러 가면, '가만있자 이젠 한자가 가물가물 하네. 김기자가 한문으로 좀 고쳐주소' 했다. 그러나 원고료를 택시비 하라고 기자에게 인심을 쓰는 맛에 자주 원고 청탁했다. 광덕 스님은 종로 3가 대각사에서 1974년 불광회를 창립하고 월간 '불광'이란 잡지를 창간했다. <선관책진>이란 책을 내놓았다. 선관책진(禪關策進)은 명나라 때 항저우의 운서사에 주석하던 운서 주굉 스님이 저술한 선어록이다. 광덕 스님은 1999년 잠실 불광사에서 입적했고, 불광사에 광덕 스님 기념관이 있다.
월주스님은 나에게 고대 옆 개운사 땅 한쪽 허름한 집에 살아보라고 권하신 분이다. 원래 대승불교의 근본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다.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스님은 매스컴에 나오길 좋아한 분이다. 총무원장 시절 사회단체 성명서에 곧잘 이름을 올렸고, 청와대 초청엔 만사 불구하고 참석하신 분이다.
설조스님은 공주사대 영문과 출신으로 미남이고 다정하던 분이다. 신혼 때 우리 부부와 신륵사에 갔을 때, 스님이 남한강 달빛 아래 배를 띄우고 외국곡 '먼 산타루치아'를 부르던 일, 신륵사 주지가 다락에 감추고 있던 곡차를 우리에게 대접하게 한 일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스님은 샌프란시스코 '여래사' 주지를 하다가 돌아와서 불국사 주지를 역임했다. 년 전에 88세의 스님이 41일간 단식을 하여 조계종 총무원장을 사임시킨 적도 있다. 법주사에 계신데, 간혹 서울 오시면 아내와 종로 3가 선학원 근처에서 뵙곤 한다.
법정스님은 많은 책을 낸 유명한 분이다. 그러나 개운찮게 헤어졌다. 내가 불교신문에서 내외경제신문으로 옮길 때다. 송별연 회식에서 스님이 '김 거사! 그동안 불교신문에서 나와 함께 근무하면서의 느낌을 한마디 해보소.' 하고 부탁했다. 아마 고대 출신 젊은이 평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몇 번 사양해도 세 번이나 요청하고, 유찬 거사도 '어디 한 말씀해보시게. 스님이 궁금해하시잖아?' 그랬다. 그래 내가 '굳이 말해보라고 하시니 말씀드리겠습니다'하고 운을 뗀 뒤, '스님은 제가 보기엔 스님이라기보다는 문필가입니다. 아침에 출근하면 함석헌, 천관우 씨들과 전화 통화로 일과를 시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수행하는 사람은 처자식까지도 버리고 목숨을 걸고 구도에 정진하는 것이 본업 아닙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바람에 좌중의 분위기가 싹 변해버렸다. 말이야 옳은 말이지만, 젊은 놈이 너무 우직했다. 스님은 안색이 변했고 곁에 있던 유찬 거사도 '이 사람아! 말을 하라고 해도 그렇지, 그렇게 말하면 쓰나?' 하고 꾸짖었지만, 때는 늦었다. 이렇게 헤어졌고, 그 뒤론 만난 적 없다.
최근에 사람들은 스님이 불일암에서 손수 나무를 얽어 만들어 쓰던 의자까지도 무슨 보물처럼 떠받든다. 요정 대원각을 김영환 마담한테 기증받아 길상사로 만든 걸 찬탄한다. 서점에는 좌판 중앙에 스님 책이 가득하다. 금세기 최고의 고승대덕이라고 요란하다. 사람들은 법정스님 '무소유'란 말 좋아하고, 스님이 낸 책은 모두 베스트셀러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진정한 '무소유'란 무엇인가. 명예나 이름도 소유이다. 무소유가 아니다. 이름을 세간에 대문짝만 하게 내놓고, '나는 무소유를 추구했소'라고 할 수 없다. 스님은 입적할 때 '그동안 풀어놓은 말 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달라'라고 했다. 그걸 보고 사람들은 스님은 자신의 책마저도 애착을 끊었구나 하면서 또 존경한다. 그러나 고승 중 이런 유언 남긴 분 많다. 성철스님도 임종 시에 '한평생 무수한 사람들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 하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이니, 한 덩이 붉은 해 푸른 산에 걸려 있다'라고 하셨다.
어쨌든 스님의 유언에 따라 책을 절판시키자, 어떤 경매에서 출판 당시 1500원 하던 '무소유' 1993년판 중고책이 110만 5천 원에 낙찰되었다. 이런 유명한 스님과 헤어진 것은 아쉽다. 그러나 '어허 내가 김기자에게 그렇게 보였나? 앞으론 주의하겠네!' 굳이 소감을 부탁하셨으니 스님이 이렇게 응수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소설가 최인호 씨는 법정스님이 무소유에 너무 집착했다고 말한 적 있다. 나도 동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