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를 품고 꽃으로 피다
꽃이 피었다. 하필이면 가시투성이 몸에서 피었다. 어느 꽃보다 곱고 환하다. 거친 몸피에 촘촘히 박힌 가시들이 꽃을 지키는 호위병처럼 둘러서 있다. 그 곁에는 이미 생을 다한 꽃의 흔적도 남아 있다. 한때는 저들도 눈부신 순간이 있었으리라. 시든 꽃대와 새로 피어나는 꽃이 한 몸에 기대어 있다.
선인장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꽃을 가까이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함부로 손을 뻗을 수 없었다. 꽃잎은 비단처럼 부드러운데 그 아래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버티고 있다. 아름다움에 이르기 위해서는 조심스레 다가가야 하는 꽃이다. 문득 사람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마음에 가시 몇 개쯤 품고 살아간다. 세상에 부딪혀 생긴 상처도 있고, 차마 뽑아내지 못한 아픔도 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도 가슴 깊은 곳에는 오래된 가시 하나가 박혀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러했다. 살아온 날들이 모두 꽃길은 아니었다. 때로는 바람에 휘청거렸고, 누군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믿었던 마음이 돌아설 때는 서운함보다 허망함이 컸다. 그럴 때마다 마음에 가시가 하나씩 돋았다.
한때는 그 가시들이 싫었다. 조금 더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싶었고, 상처받지 않는 마음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알게 되었다. 가시가 반드시 누군가를 찌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선인장의 가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오래된 지혜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잎을 가시로 바꾸고, 몸속에 귀한 물을 간직한다. 그렇게 버티고 또 버티다가 어느 날 뜻밖의 꽃을 피운다. 사람도 견디는 동안 조금씩 달라진다. 젊은 날에는 작은 상처에도 쉽게 울었지만 이제는 아픔을 오래 들여다볼 줄 안다. 누군가의 모난 말 뒤에 숨겨진 사정도 헤아리게 된다. 내게 박힌 가시가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알아보는 눈이 되어 준 셈이다.
선인장의 꽃을 바라보며 웃었다. 어쩌면 저 꽃은 가시를 이겨 낸 것이 아니라 가시와 함께 살아온 세월이 피워 낸 것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아름다움도 그러하리라. 상처 하나 없는 삶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상처를 품고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삶이 아름답다. 바람에 흔들렸어도 다시 일어서고, 눈물을 흘렸어도 끝내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 꽃다운 사람이다. 나는 이제 내 안의 가시를 미워하지 않으려 한다. 그 가시들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무너지지 않고 걸어올 수 있었다. 서툴렀던 사랑도, 오래된 이별도, 이루지 못한 꿈도 모두 나를 키운 시간이었다. 꽃이 지고 난 자리에 다시 꽃망울이 맺힌다. 시든 꽃대는 새 꽃을 시샘하지 않는다. 제 몫의 시간을 다한 채 묵묵히 곁을 지킨다. 지나간 청춘과 오늘의 내가 저렇게 한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곱게 차려입은 옷깃에 바람이 스친다. 선인장 곁에서 오래 머물렀다. 꽃은 아무 말이 없는데 이상하게 위로를 받은 기분이다. 세월이 남긴 흔적을 감추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늦게 피는 꽃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말해 주는 것 같다. 돌아서는 길에 다시 한번 꽃을 바라보았다. 거친 가시 사이로 노을빛을 닮은 꽃잎이 환하게 펼쳐져 있다. 그제야 알겠다. 꽃을 피운 것은 따뜻한 햇살만이 아니었다. 메마른 날들과 견뎌 낸 시간, 수없이 지나간 바람이 함께 꽃을 키웠다.
내 삶에도 아직 피지 않은 꽃망울이 있을 것이다. 더러는 가시에 찔리고 더러는 꽃잎을 떨구겠지만, 그렇다고 꽃피기를 멈출 수는 없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아름답게 보이기보다 내 삶을 아름답게 살아가고 싶다. 상처가 있어도 웃을 수 있고, 세월이 깊어져도 다시 설렐 수 있는 사람으로. 선인장에 핀 꽃 한 송이가 내 마음에 오래 머문다. 가시를 뽑아야만 꽃이 피는 것은 아니었다. 가시를 품은 채로도 꽃은 저토록 환하게 피어난다. 나도 그렇게 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