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81
6월7일[지극히 거록하신 예수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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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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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w-3Actiiv-I
[ACN 한국지부 박기석 사도요한(지부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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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 성심의 뜨거운 사랑은 오늘도 성체성사를 통해 거듭 표현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호세아 예언자의 입을 통해서 당신의 우리를 향한 절절한 사랑, 활활 불타오르는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잘 표현하고 계십니다.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친히 보잘것없는 내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나를 당신 품에 꼭 끌어안고 나와 눈을 마주칩니다.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내 볼에 당신 얼굴을 비비며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십니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나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시며, 뒤뚱뒤뚱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박수를 쳐주십니다.
결국 우리의 주님은 세상 자상한 아버지 같으신 분, 우리를 당신 눈동자보다 더 귀히 여기시는 따뜻한 어머니 같은 분이십니다. 우리 생각만 하면 주님 마음은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배신과 반역의 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옆길로 자꾸 새는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든 되돌이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인내와 용서의 주님이십니다.
요한 복음사가 역시 우리 인간을 향한 정말이지 기가 막힌 사랑, 바보같은 사랑의 마음, 곧 예수님의 마음을 잘 소개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악행과 반역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인류의 구세주로 오신 분을 한갓 인간들이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악행에 그 어떤 보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마음만 한번 바꿔먹으시면, 성 금요일 골고타 언덕의 그 참혹한 현장을 순식간에 뒤집어 놓을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끝까지 침묵하시며 묵묵히 인간의 사악함과 무지막지함을 견뎌내십니다.
십자가에 매단 것도 모자라 인간들은 운명하신 그분의 옆구리에 창을 찔렀습니다. 심장까지 관통한 창으로 인해 그분의 옆구리에서는 피와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돌아가시면서까지 그분께서는 당신께서 흘리신 피와 물을 통해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 제정을 통해 우리를 단 한 번, 혹은 일정 기간만이 아니라 세세대대로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시겠다는 뚜렷한 징표를 하나 남겨주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주님의 애끓는 사랑, 예수 성심의 뜨거운 사랑은 오늘도 성체성사를 통해 거듭 표현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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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jpKpFNBUY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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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 마음의 안식을 얻는가?>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이기도 하고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사제들이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으로 살도록 기도하는 날이고 사제들은 그렇게 결심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어떻게 살지를 결정하는 일은 바로 ‘행복’에 의해서입니다. 누구나 행복한 것을 선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흘리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고통당하러 오셨을까요? 예수님께서 피와 물을 흘리실 때의 기분은 이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은 무언가 이루시려고 그토록 애쓰신 것입니다.
무엇을 이루시려고 하신 것일까요? 당신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신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지 않고서는 양심이 평화를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때부터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셨기에 빚진 존재로서 아버지께 합당한 존재가 되기 위해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은 그냥 눈 한 번 감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러나 누구나 죽음 뒤에 올 심판을 두려워합니다. 양심이 그렇게 만듭니다. 세상에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없는데 우리는 이 지상에서 생명을 받고 수십 년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믿게 만드시기 위해 아드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브라질에서 한 유기견이 쓰레기통을 뒤지다가 아직 탯줄도 잘리지 않은 신생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개는 신생아를 물고 가장 가까운 집으로 달려가 문을 긁으며 짖고 사람을 불러내었습니다. 사람들이 아기를 보고 병원에 데려가자 개는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신생아는 살아났고 몸에는 이빨 자국 하나 없었습니다.
이 개는 왜 아기를 인간에게 돌려주었을까요? 분명 유기견이 되기 전에 사람에게 길러졌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받았기 때문에 양심상 신생아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굶어 죽는 게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양심은 이렇듯 받았으면 주어야 하는 정의 시스템입니다. 받았는데도 주지 못할 때 양심이 만들어내는 불안함은 죽음보다 고통스럽습니다.
인도에서 다쉬라트 만지히는 22년간 혼자 산 하나를 깎아서 길을 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산을 넘어가면 2km밖에 안 되는 거리를 아픈 아내를 데리고 60km나 돌아가야 해서 결국 아내가 병원에서 사망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지히는 이웃 사랑으로 그런 일을 한 게 아닙니다. 아내에 대해 미안함을 없애려고 평생을 그렇게 바친 것입니다. 양심의 평화가 죽음과 같은 고통보다 평화롭습니다.
오늘 예수 성심을 바라보며 고통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성심을 내어주는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의 안식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설암에 걸려 돌아가신 얼굴이 환한 미소를 띤 아르헨티나의 마리아 세실리아 가르멜 수녀님의
환한 미소는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그분은 말을 할 수 없었기에 이렇게 마지막으로 글로 썼습니다.
예수 성심의 고통과 안식에 참여하는 기쁨을 노래한 것입니다.
“난 매우 만족스럽다. 고통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의 역사와 나를 위해 기도하는 많은 이들로 인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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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이고,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사제 성화의 날은 1995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제안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어느덧 30년이 되어갑니다. 교황님의 제안에 따라서 각 지역 교회는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사제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고, 고백성사를 보고, 기도하는 날입니다. 사제 성화의 날은 제게도 의미가 있습니다. 2001년이니까, 23년 전의 기억입니다. 당시 경기서부지역에 있던 저에게 한 가지 제안이 있었습니다. 사제 성화의 날에 체험담을 발표하라는 제안입니다. 처음에는 거절했습니다. 쑥스럽고 그럴 만한 능력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강사료라는 달콤한 유혹이 있었습니다. 저는 '사목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체험담을 준비하였습니다. 먼저 신문에서 읽었던 글을 소개하였습니다. ‘봄누에는 죽기까지 실을 뽑아내고, 초는 재가 되어야만 눈물이 마른다.’라는 글을 소개하였습니다. 사제생활에 최선을 다하자는 의미로 이야기 했습니다. ‘아직 근심이 오지도 않았는데 기쁨이 날아가 버린다.’라는 글을 소개하였습니다. 모든 근심과 걱정은 주님께 의탁하며 지금 순간을 기쁘게 지내자고 이야기 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생긴다.’라는 글을 소개하였습니다.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주님의 사랑을 전하자고 했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지내는 삶에서 ‘사목’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산보는 저의 취미이자 운동입니다. 비가 개인 어느 날, 산보를 가려고 하는데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성당에 왔습니다. 저는 그 아이와 같이 산보를 갔습니다. 우산을 놓고 왔다고 해서 학교에 갔고, 비가 와서 물이 불어난 개천도 갔고, 장날이라 시장에도 갔습니다. 이렇게 산보를 잘 마치고 돌아왔는데 아이가 제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산보’는 어디에 있어요? 산보는 걸으면서 주변을 보는 것인데, 아이는 산보가 어느 특정한 ‘장소’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산보’가자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이와 이야기를 하면서 하느님 앞에 저도 비슷한 질문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자연을 통해서, 예언자를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지 다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제들이 가야할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착한 목자의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다만 저의 마음이 닫혔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사랑을 못 보는 것입니다. 저의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사랑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사목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 때입니다. 아이들이 성당 버스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성당까지 3시간을 넘게 뛰어 왔습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서 뛰어 왔습니다, 미사를 다 마치고 마당에 있는데 아이 둘이 마라톤 선수처럼 성당으로 달려왔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성당 버스를 놓쳐서 뛰어 왔다고 합니다. 여자 아이들은 뛸 수 없어서 집에 있다고 합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점심을 사주고, 제 차로 다시 집까지 갔습니다. 여자 아이들을 데리고 성당으로 왔습니다. 아이들은 2시 군인미사를 보았습니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에 수난 복음을 읽었고, 강론했지만 그리 큰 감동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3시간 넘게 주일 미사를 보겠다고 뛰어온 아이들에 제게 진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아이들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보였습니다. 아이들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던 베로니카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때로 저는 주님 수난의 길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헸던 사람처럼 지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모르다고 했던 베드로 사도처럼 지냈습니다.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넘겼던 유다처럼 지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군중처럼 지냈습니다. 예수님께 위로를 드리는 것도,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도 모두 저의 몫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목은 선택입니다.
사목의 결실도 나누었습니다. 태권도를 통해서 선교했던 이야기, 농산물 직거래를 했던 이야기, 차량봉사단을 운영했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제성화의 날 체험담 발표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또 다른 제안이 있었습니다. 교구 사목국에서 함께 하자는 제안이 있었고, 직접 저를 찾아 왔습니다. 제갈공명도 아닌데 찾아와주니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렇게 저는 교구청에서 3년을 기쁘게 지냈습니다. 주된 업무는 교육담당이었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사목국에서 동료 사제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23년 전 사제 성화의 날에 했던 발표가 지금 내가 있는 자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영원한 사제이신 예수님, 주님을 본받으려는 사제들을 지켜 주시어 어느 누구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소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사제직에 올라 날마다 주님의 몸과 피를 축성하는 사제들을 언제나 깨끗하고 거룩하게 지켜 주소서.” 오늘 하루 ‘사제를 위한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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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다. 예수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부터 시작하여 점자 확산하면서 보편화되었다.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교회의 전례력에 도입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내고 있다. 이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또한 모든 신자가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이기도 하다(매일미사에서).
복음: 요한 19,31-37: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초기 교회에서부터 예수성심에 대해 언급되었었는데 이는 하느님이면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이루는 한 구성요소로서였다. 예수성심은 예수의 심장만을 분리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강생의 신비와 수난과 죽음, 성체성사 설정 등을 통하여 보여준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말한다.(참조: 마태 11,29)
특히 교부들은 예수의 성심을 사랑과 은총의 샘으로 생각하여 십자가상에서 군인의 창에 찔리어 예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온 것을(요한 19,34) 천상 보화의 창고에서 무수한 은혜가 쏟아져 나온 것에 비유하였다. 즉 심장에서 흘러내린 물은 영혼을 깨끗이 씻고 초자연적 생명을 부여하는 성세성사를 상징하며, 피는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게 하는 영혼의 양식인 성체성사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마치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예수의 옆구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13세기 이래로 독일의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아 성심 공경이 성하였다. 교황 비오 12세(1939-1958)의 회칙에서 “구세주의 상한 성심에서 구원의 성혈을 나누어주는 교회가 탄생하였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예수성심은 하느님이면서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원의와 인식, 사랑과 정서, 감정의 중추이며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느님 은총의 근원이며 사랑의 표현이다. 동시에 인간 사랑의 응답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원의이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축일이다. 성체와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키도록 한 것은 이 축일이 성체성사와 밀접히 연관되기 때문이다. 13세기 이래로 예수성심의 공경이 성하였지만, 1673년 12월 27일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1647-1690)에게 예수께서 발현하시어 성심공경과 성심축일의 제정을 요청하시게 되어, 성심께 대한 신심이 공적으로 세상에 전파되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에서 돌아가신 후에 그 죽음을 확인하려고 한 군인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것을 전하고 있다. 그 군인의 행위는 죽음을 확인하는 것이었지만, 사도 요한은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장면을 통하여 요한은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과 교회의 탄생을 읽고 있다. 피는 우리를 위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성체성사와 당신의 죽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물은 성령의 상징으로써 세례의 표징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것으로 교회가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담이 잠들었을 때 하느님께서 그 옆구리에서 하와를 창조하셨듯이, 십자가에 잠드신 새로운 아담의 옆구리에서 당신의 신부인 교회가 탄생하였다고 교부들은 말하고 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분의 성심을 위로해 드리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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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교회는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기념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독서와 복음으로 묵상하여 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은 연민으로 가득 찬 사랑의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짓는 이들을 보시며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릅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처음부터 사랑하시고 지금도 사랑하시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알지 못하고 하느님을 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를 분노로 갚지 않으시고 구원으로 갚으십니다. 주님을 거스르는 자들에게 분노로 행하시지 않고, 불쌍하게 바라보시며 끝까지 사랑하시는 마음을 보여 주십니다. 분노를 막아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연민이 거룩함입니다.
오늘 복음은 군사 하나가 예수님의 옆구리(심장)를 찔러 상처를 입히는 장면을 들려줍니다. 이처럼 우리의 죄는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분의 옆구리를 찔러 상처를 입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잘못이 입히는 상처를 침묵으로 받아 내시고, 분노하지 않으시며 원수를 구원으로 갚으십니다. 창에 찔린 상처에서 피(성체성사)와 물(세례성사)이 흘러나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은총이 흘러나왔듯이, 우리 죄에 찔린 성심의 상처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자비와 은총이 흘러나옵니다.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의 배신으로 입으신 상처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시는 마음, 그 고통을 구원으로 되돌려주시는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과 고통을 묵상하고 그 마음을 닮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을 연민의 마음으로 대하고, 악을 선으로 갚아 주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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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만이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므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이 믿도록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하고 말한다."(요한 19,31-37)
1)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은, 죽음을 앞당기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 교회는 그 일을, 아담에게서 하와가 생겨난 것처럼 예수님에게서 교회가 생겨났음을 상징하는 일로 해석합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경우에, ‘피’는 예수님의 희생과 성체성사를 상징하고, ‘물’은 세례성사를 상징합니다.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탈출기 12장 46절, 민수기 9장 12절에 있는, 파스카 희생양의 뼈를 부러뜨리지 말라는 명령을 인용한 것인데, 예수님의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고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일을 예언한 말씀으로 본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라는 말씀은, 즈카르야서 12장 10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죽인 자들은 그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기도 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고,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2) 이상한 일인데, 사랑이 크면 클수록 고통도 커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 때에 겪으신 ‘큰 고통’은,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큰 사랑’을 나타냅니다.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상징이고, 부활로 이어지기 때문에 생명과 구원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인간들이 모두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이고, 아직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이 많다는 것이 ‘예수님의 고통’입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고통도 커지는 것은, 사랑이 완성되지 않았을 때 생기는 일이고, 사랑하는 쪽과 사랑받는 쪽의 일치가 완성되지 않았을 때 생기는 일입니다. 따라서 고통은 사랑의 완성과 일치를 향해서 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따르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인간들 쪽의 사랑과 일치가 아직 부족하고 미완성 상태이기 때문에 겪으신 고통입니다. 물론 항상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충실한 신앙인들, 즉 성인 성녀들은 주님의 ‘큰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통과 슬픔을, 그리고 그 반대쪽에 있는 기쁨을 나타내신 비유가 ‘되찾은 양의 비유’입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 18,12-13)
‘잃은 양’을 애타게 찾는 마음도 ‘예수 성심’이고, 그 양을 찾았을 때 크게 기뻐하는 마음도 ‘예수 성심’입니다.
3) 주님에 대한 사랑이 크면 클수록 신앙인들이 겪는 고통도 커지는데, 그것은 세상의 미움과 박해라는 형태로 다가옵니다. 주님을 덜 사랑하는 사람은 박해도 덜 받을 것이고, 사랑하지 않으면 박해를 안 받을 것입니다. 만일에 박해받는 것이 두려워서, 또는 박해받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신앙을 버린다면,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기를 포기하는 것이고, 주님의 사랑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잘 인내함으로써 완전히 단련되고 정화되어서 마지막 단계까지 가면, 즉 사랑이 완성되고, 주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되는 단계에 도달하면, 고통은 사라지고 ‘영원하고 참된 기쁨’이 찾아올 것입니다.
4) ‘예수 성심의 사랑’에 응답하는 방법은 ‘회개’뿐입니다. 만일에 회개는 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주님께 더 큰 고통과 슬픔을 드리는 일입니다. 루카복음 7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이 말씀에서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씀은, “이 여자는 자신이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면서 크게 감사하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라는 말씀은, “크게 감사하고 있기 때문에 크게 회개하면서 큰 사랑으로 응답한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라는 말씀은, “자신이 적게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게 감사하고 적게 사랑하고 적게 회개한다.”라는 뜻입니다. <감사, 회개, 사랑은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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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전병이 요아킴 신부님]
<성체-사랑의 결정체>
오늘 복음은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심을 밝히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영하는 사람은 당신 안에 머무르게 되고 예수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게 되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살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단순한 영함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먹는다는 것은 결국 살아간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닮아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성체를 영한다는 것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 심지어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 길을 걸으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살겠다는 일종의 다짐이요 결심인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예수님을 영할 때마다 그렇게 매번 새롭게 다짐하고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쌓아가다 보면, 인내심을 가지고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다 보면 내성이 생기고 습관처럼 몸에 배여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들입니다. 자신을 핍박하고 상처 주는 이들을 위해 대신 값을 치르고 목숨을 내어놓는다는 것이 말입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 각자의 노력만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그런 신적 경지의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예 시도조차 버거운 일들이며 설령 시도했다 해도 이내 후회하며 포기하게 만드는 그런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면서 도우심에 힘입어 그렇게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일상이 은총을 통해 그런 사랑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희망하면서 말입니다. 비관하며 염세주의로 일관해서는 어쩌면 한 미나를 땅에 묻어둔 종의 운명(루카 19,20 참조)을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부족하더라도 노력한 만큼 그만큼 더 후하게 쳐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기에 하나씩 인내심과 희망을 가지고 그런 사랑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설령 공과 덕이 부족하다 해도 이런 우리의 부단한 노력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열매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체는 바로 이런 사랑의 결정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인 오늘 전통적으로 많은 본당에서 어린이들의 첫 영성체를 거행하게 됩니다. 첫 영성체하는 어린이들을 축복하며 떨리고 설렜던 우리 각자의 그때 그 모습들을 떠올려봅니다. 예수님을 처음으로 모시던 그 첫 마음으로, 첫영성체 후 드렸던 그 기도를 기억하며 우리의 신앙적 삶을 더욱 충실히 살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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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우리가 미사 안에서 만나게 되는 성체와 성혈의 의미는 하느님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실 때는, 짐승의 피로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것은 옛 계약, 곧 구약입니다. 구약에서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이제 예수님의 탄생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그리고 더는 짐승의 피가 아닌, 예수님의 피로 모든 사람을 위한 새로운 계약을 하느님께서 맺으십니다. 새로운 계약, 곧 신약입니다.
계약이라는 조금은 경직된 형식의 언어가 사용되지만, 이 계약 안에는 사람을 향한, 나를 위한 하느님의 따뜻함이 담겨 있습니다.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의 자기희생과 내어 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은, 하느님과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 주는 큰 신비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이 큰 사랑의 신비를 우리는 비교적 손쉽게(?) 미사 안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자 구약의 긴 역사가 필요하셨습니다. 한두 세대가 아니라 수천 년의 기나긴 시간입니다. 아울러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따뜻함이 필요하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필요하셨습니다.
사람을 위해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헌신하겠다는 예수님의 자기 결심이 필요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시작된 긴 역사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갖 멸시와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철저한 자기희생이 없었다면 결코 가능할 수 없었던 사건입니다.
그 사랑의 절정을 성체와 성혈이 품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을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마주하고 있는지요? 나를 향한 하느님의 따뜻함과 품어 줌의 절정, 그것이 우리가 참례하는 미사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 사랑의 표지가 바로 우리가 미사에 참례하는 것만으로도 만날 수 있는 주님의 보배로운 몸과 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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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송준명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입니다. 이날은 우리 신앙의 기본을 이루는 7성사 중, 가장 으뜸 성사요, 교회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거룩한 미사의 근간을 이루는 성체성사를 되새기는 가장 중요한 축일 중 하나입니다. 이 뜻깊은 날, 우리는 성체성사의 의미를 기억합니다.
성체성사의 의미는 “감사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감사함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과 피를 온전히 우리에게 주시어 태초에 있었던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의 관계가 온전히, 완전히, 영원히 회복됨에 대한 감사함입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가장 감사했던 일과 날들을 기념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온 마음을 다하고 그 마음이 드러나는 행동으로 감사함을 표시합니다. 사실 아무리 진실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그것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모습으로 드러내려 한다 해도 그 안에 진심을 담지 못하면 어색해질 뿐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런데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께 깊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정말, 정말로 성체성사를 세워주신 예수님께 진정 감사하고 계십니까?
미사 5분 전 고해실을 나서 제의방으로 향하면 아직 휑하게 비어 있는 성전 좌석이 눈앞에 들어옵니다. 5분 후 다시 그 자리에 서면 어느 샌가 꽉 차있는 신앙의 신비를 목격합니다. 목소리에 힘을 주어 복음을 읽고 강론을 합니다. 여지없이 4번째 줄 자매님이 3분 후 주보를 펼칩니다. 강론소리가 더 커지는 걸 막기 위해 고개를 숙입니다. 이제 성가책은 필요가 없습니다. 핸드폰만 열면 성가책이 나오니 편리해도 너무 편리합니다. 하지만 카톡도, 메신저도 여지없이 성가책과 함께 등장합니다. 성가도 부르고 문자도 하고 일석이조입니다.
저기 8번째 줄에 앉아 계신 형제님, 봉헌 성가할 때 들어와 다리 꼬고 앉아서 핸드폰하고 계신 분인데 영성체하러 나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어김없이 적중합니다.
영성체 성가는 늘 오르간 독주로 이어지고 아멘 소리는 들리지 않은 지 오래요, 그 아멘을 대체해 버린 목례하는 영성체, 무릎을 구부리는 영성체, 두 발자국 떨어져서 배달하라는 영성체 그리고 묵언수행의 영성체가 일반화된 우리 성당의 모습입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공지사항에 얘기할까 말까 수없이 망설이지만, 이야기하면 꼰대라 말할까봐, 이야기하면 화냈다 얘기할까봐, 이야기하면 잔소리한다 투덜댈까봐 또 여지없이 좋은 게 좋은 거지, 성당 나오는 게 어디야 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사목자로서 하지 말아야 할 불의한 타협을 시도합니다.
진정 신앙인이 성체성사를 대하는 것이 감사함의 의미를 담고 있다면, 그것이 마음을 담은 행동으로 드러나면 좋겠습니다. 지금과는 좀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달라지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바치셨는데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실 안될 거라는 거 알긴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이야기해 봅니다. 조금은 바뀌어보....자....고....좀...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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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19,34)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성심 대축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마음, 곧 성심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거룩하시고, 거룩하신 성심은 사랑입니다. 오늘 감사송을 통해 교회는 성심의 사랑을 본받기 위해 구세주의 성심께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길어 올려야 한다고 고백하며 찬송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한 사랑으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저희를 위하여 몸소 자신을 제물로 바치시고, 심장이 찔리시어 피와 물을 쏟으시니, 거기서 교회의 성사들이 흘러나오고, 모든 이가 구세주의 열린 성심께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길어 올리나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창으로 찔리신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쏟으신 성심, 사랑이신 그분께 달려가 믿음과 사랑으로 바라보고 이 놀랍고 거룩한 사랑의 신비를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에페소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아, 그분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에3, 17~19)라고 권고하고 독려합니다. 그분의 성심께 가까이 나아가 그분의 거룩한 마음, 곧 사랑의 신비를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주님 사랑의 길이와 넓이, 높이와 깊이를 깨닫고 알아보셨기에 십자가를 두고,하느님의 지혜이며 힘이라고 역설적으로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 당대도 현재도 십자가는 무능과 약함이 드러나는 장소이며 표지인데, 가장 ‘하느님답지 않음’이 여실히 표출되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런 사도 바오로의 맥락에서 저희 수도회 창립자이신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십자가에서 하느님 사랑의 신비가 가장 압도적으로 장엄하게 선포되었다고 설교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이런 역설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십자가가 곧 하느님 사랑의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 사랑의 대상 앞에 모든 것은 힘을 잃기 마련입니다. 지식도, 학식도, 지위도 심지어 위신이나 체면까지도. 어떤 면에서 인간이 가장 강할 때도 가장 약할 때도 사랑할 때입니다. 하물며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야 오죽하겠습니까?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셨기에 외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가셨을 때, 당신도 침묵하시면서 아드님과 함께 당신 성심도 어리석게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 오고 있는 “하느님이 사랑에 빠지시면 현명함을 상실하신다.”라는 표현이 결코 말장난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이 인간에 대한 사랑에 빠지셔서 하느님다움을 감추신 채 하느님 사랑의 역설, 곧 지혜이며 힘이 드러난 사랑의 사건입니다. 그런 까닭에 바오로 사도는 세상의 가장 잔인하고 혹독하며 나약함과 비천함의 상징인 십자가로부터 하느님의 하느님다움 곧 사랑의 지혜와 힘을 드러내 보이셨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과거의 모든 시대에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그 신비의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 모든 사람에게 밝혀 주게 하셨습니다.”(에, 3,9)
혹여 여러분도 저처럼 아름다운 글, 감명받은 내용의 글을 보관하나요? 예전「매일미사」에 실렸던 글입니다. 『 ‘시래기죽을 먹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어머니는 식사 시간만 되면 상을 차려놓고 슬그머니 배가 아프다며 나가시고, 우리 여섯 남매는 시래기죽을 서로 차지하려고 얼굴도 들지 않은 채 숟가락을 부산히 움직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늘 배가 아프다며 나가시던 어머니는 애꿎은 아궁이만 휘젓고 계셨던 것입니다. 자식이 굶어도, 병들어도, 월사금을 못 내고 풀이 죽어도 어머니는 모두가 당신이 죄가 많기 때문이라고 하셨지요. 따지고 보면 전쟁 탓이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탓이고, 식구가 너무 많은 탓이고, 피난살이 하던 모든 어머니의 공통된 설움이건만, 유독 어머니는 모든 것이 늘 당신의 죄 탓이라 고 하셨지요. 이제 그때의 어머니의 나이가 된 지금 되돌아보면, 어머니는 사랑이 많으셔서 죄가 많은 분이었습니다. 죄가 없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많으면 죄가 많습니다.』사랑이 많으면 죄가 많은 법이라니, 예전에 이 글을 읽었을 땐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고, 도대체 무슨 말인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이제 조금은 알아듣습니다. 사랑이 많으면 모든 것이 다 자기 탓이라고, 그래서 이 글을 쓰셨던 분의 어머니도 그리고 우리 각자의 어머니들은 참으로 죄가 많았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 또한 모든 것이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셨기에,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창에 찔리시어 어쩔 수 없이 죽어가면서도 당신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피로, 우리를 사랑으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찔린 심장은 단지 예수님의 심장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심장이었고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은 바로 아버지의 거룩한 마음, 곧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성심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난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호세아 예언자는 사랑이 많아 죄가 많은 어머니의 절실한 사랑으로 표현합니다. 배고플 때 젓 먹여 주시고, 걸음마를 배우면서 넘어질 때마다 일으켜 세워 주시고, 아플 땐 밤새 곁에 머물면서 아픈 데 손으로 쓸어주고 품어 안아 주셨지만, 우리는 그 모든 사랑을 잊어버리고 알지 못했으며, 품 안에 자식이라더니 배신하였습니다. 하느님 사랑을 잊어버리고 돌아섰습니다. 그럼에도 사랑이 많은 하느님은 그 모든 것이 다 당신 탓이려니 생각하셨기에 분노를 터뜨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렇게 다짐하십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11,9) 당신 스스로 사랑임을 선언하셨던 대로 십자가에서 당신 아드님을 통해 다시 한번 사랑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와서 보라! 열린 심장을 그리고 그 심장에서 흘러내린 물과 피는 단연코 마르지 않고 세상과 사람들을 죄를 씻어내는 생명인 세례성사와 구원하는 사랑의 성체성사로 세상 끝날까지 지속할 것입니다. 거룩한 예수님의 성심을 찬미하면서 성가 「주의 성심 홀로, 성가 204번」을 기도로 바칩니다. 『 허다한 마음 중에서 예수 성심 홀로 우리의 걱정 알고 위로해 주시네.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희생하여 죄에서 구했네. 죄악에 기운 맘에 새빛을 주시어 새로운 삶을 찾아 나가게 하소서. 인자한 주의 팔이 미치는 그곳엔 온갖 세상 풍파도 두려울 것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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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24년 6월 7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예전에 유행했던 영화 대사가 생각납니다.
“나 이대 나온 사람이야.”
자기 자신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책에서 ‘지식인은 많이 배운 사람이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세상을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크게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지식의 축적을 자기 일을 위한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학창 시절에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을 책임지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보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안정적인 미래를 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겨우 안정적인 미래라는 세속적인 이유로 지식을 축적하고 있음이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많이 배운 사람이 오히려 세상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신앙인도 그렇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고 자랑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또 교회 내 직책을 자랑하는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책임질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책임질 수 있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당신을 알리기 위한 것도, 또 안정적인 미래를 위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형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곧바로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자신의 체중으로 횡격막을 압박하여 질식할 때까지 고통과 충격을 느껴야 하는 잔인한 로마 시대의 사형 집행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다음 날이 안식일이었기에 사람들은 안식일 전에 모든 것을 처리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의 다리를 부러뜨리는데, 그렇게 되면 체중을 지탱하던 다리에 더 이상 힘을 주지 못하여 더 빨리 질식하여 죽음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숨을 거두셨기에, 죽음을 확인하려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에 옆구리를 찔렀고 그곳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옵니다.
피와 물이 흘러나왔음은 곧 예수님께서 실제로 돌아가셨음을 보여주는 표지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죽음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봉헌하신 주님의 사랑이 흘러나온 것입니다. 이 주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우리는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요? 세속적인 편안함과 물질적인 풍요만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철저히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책임질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결국 삶이란 여러분이 되고자 했던 완벽한 인격체로 거듭나는 것이다(오프라 윈프리).
- 빠다킹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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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십시오>
오늘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 성심을 특별히 생각하는 날입니다. 또한 ‘사제 성화의 날’로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그 삶을 충직하게 사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우리 각자의 마음으로 간직하고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인간적인 마음이 지배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심지어는 기도 안에서도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니 언제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뀔지 장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싶은 소망은 있지만 그에 따르는 노력과 정성은 여전히 소홀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그 사실을 확인하느라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이것은 목마른 사람에게 흘러넘치도록 주시는 영원한 생명수이며, 흘러나온 피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먹고 마셔야 하는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모두를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의 샘이 되셨습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사실은 이미 예언된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성체성사만큼 잘 말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성체는 사랑의 양식입니다. 우리 삶도 “예수님처럼 쪼개진 빵이 되어 형제애와 연대를 가꾸어”(프란치스코 교황). 다른 사람들의 선물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신의 모두를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것에 앞서 그분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세상의 누구에게 인정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냐가 소중합니다. 우리는 분명“주님 앞에”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로마8,5. 8).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한 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 진실로 주님을 닮고자 원한다면 모든 것의 모범인 거룩하신 그분을 응시하십시오.”
“예수님의 성심은 당신의 사랑을 애원하는 사람들에게 청하는 바 무엇이든 틀림없이 채워주십니다”(성 알퐁소). 또한“예수님의 성심을 열심히 공경하고 의탁하는 영혼은 구원의 항구로 안전하게 도착할 것입니다”(성녀 말가리다). 그러므로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안에 모든 바람을 이루시고 구원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오! 저는 그분을 사랑하길 원합니다. 그분이 저를 사랑하고, 더 나아가 제가 그분 마음에 들고 그분의 뜻을 실천할 수 있도록!”(비르지니수녀).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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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마태오 11,25-30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내 멍에를 메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주님을 닮아
주님께서 바라시는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억눌린 벗들이 기댈 수 있는
아버지처럼 든든한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슬퍼하는 벗들이 안길 수 있는
어머니처럼 부드러운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지친 벗들이 쉬어갈 수 있는
그루터기처럼 넉넉한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외로운 벗들이 머물 수 있는
고향집처럼 포근한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살맛 잃은 벗들이 맛들일 수 있는
찰진 밥처럼 맛깔스러운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젖은 벗들이 말릴 수 있는
햇살처럼 따사로운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땀 흘리는 벗들이 식힐 수 있는
바람처럼 살가운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메마른 벗들이 적실 수 있는
개울물처럼 시원한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헤매는 벗들이 찾아갈 수 있는
오솔길처럼 정겨운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갈라진 벗들이 함께할 수 있는
울타리처럼 넉넉한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주님을 닮아
주님께서 바라시는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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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성심의 사랑으로 성화되십시오!">
"성화되십시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축복인사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거룩한 성인이 되라는 인사입니다. 화답송 시편도 우리를 고무합니다.
“보라, 하느님은 나의 구원.
신뢰하기에 나는 두려워하지 않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를 구원해 주셨네.”(이사 12,2)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이자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예수 성심의 사랑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입니다. 이 대축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내는데 바로 두 대축일이 내적으로 깊이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성체성혈의 사랑은 그대로 예수성심의 사랑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마음" 성가 199장을 조용히 불러 봅니다.
"예수 마음 겸손하신 자여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열절케 하사
네 성심과 네 성심과 같게 하소서.
시간되면 예수성심성가들(199-209)을 조용히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예수성심은 한마디로 예수님 사랑의 마음입니다. 보통 예수성심상은 예수님의 심장에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으로 표현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후 창에 찔리셨을 때 피와 물이 흘러 나온 장면은 교회초기부터 중세 신비가들에 이르기까지 열렬한 묵상의 대상이 됐습니다.
예수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온 것을 “천상보화의 창고에서 무수한 은혜가 쏟아져 나온 것”으로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옛 교부들과 신학자들은 심장에서 흘러내린 물이 영혼을 씻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세례성사를 상징한다고 보았으며, 피는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게 하는 영혼의 양식, 성체성사를 상징한다고 봤습니다.
예수성심에 대한 신심은 중세기 이전에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2세기 무렵 성 안셀모, 성 베르나르도, 성 보나벤뚜라가 중심이 되어 예수성심을 공경했고, 13-14세기 신비가들이 예수성심께 대한 신심을 발전시켰습니다. 예수성심을 교회가 공인하고 적극적으로 보급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673년 12월 27일 일어난 예수님 발현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방문회 수녀였던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1647-1690) 성녀에게 예수님이 발현한 것입니다. 1675년까지 2년간 70회나 발현한 예수님은 성녀에게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내 거룩한 마음은 인간 모두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내 성심은 사람들에게 홍수를 퍼부어 성덕과 구원 은총으로 그들을 부유하게 하고 멸망의 구렁에서 건져내려 한다...나는 성체성혈 대축일후 금요일을 내 성심을 공경하는 날로 정하기를 원한다. 그날 영성체하는 영혼들은 내 성심에서 사랑의 은총을 홍수처럼 풍부하게 얻게 될 것이다.”
바로 이에 근거하여 오늘 금요일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며 오늘 이 미사은총이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됩니다. 이후 역대 교황들은 공식 문서를 통해 예수성심신심을 널리 보급할 것을 권장합니다. 클레멘스 13세 교황(1758-1769)은 예수성심신심을 인정하고 교령을 반포합니다. 이어 비오 9세 교황은 1856년 예수성심축일을 전세계교회축일로 확산시켰고, 1899년 레오 13세 교황은 모든 인류를 예수 성심께 봉헌할 것을 선포했고, 비오10세는 해마다 이 봉헌을 갱신토록 합니다.
예수 성심의 교황이라 불리는 비오 12세 교황은 1956년 회칙 <물을 길으리라>를 반포하며 예수성심 공경의 근거를 신학적으로 제시합니다. 교황은 “예수성심신심은 하느님 사랑을 배우는 가장 효험있는 학교로 인류를 구원의 샘으로 초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장 적절한 응답이 된다.”고 강조합니다.
한편 한국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매년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내며 교구마다 전사제들이 모임을 갖고 적절한 행사를 합니다. 이기주의와 무관심, 세속주의가 팽배한 비인간화로 치닫는 작금의 시대에 참으로 예수성심신심이 얼마나 절박한지 깨닫게 됩니다. 비단 사제뿐이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성화(聖化)에로 불리었음을 깨달아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은 그대로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1베드1,15-16)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성화의 여정”에 불림받고 있습니다. “성화되십시오!” 서로 인사를 바치시기 바랍니다. 날로 예수성심의 사랑을 닮아갈 때 거룩한 성인의 삶이요 우리 삶의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수행도 삶의 성화에 집중됨을 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은 이미 호세아서의 하느님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바로 예수성심의 사랑은 이런 하느님의 연민의 사랑, 무한히 인내하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는 우리를 위한 “아버지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은 얼마나 놀랍고 고마운지요! 바로 예수성심의 사랑을 뜻합니다.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에 믿음의 뿌리를 내리라는 것이며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으로 충만한 삶, 바로 하느님이, 예수님이 바라시는 우리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을 대신한 바오로의 기도가 우리를 용기백배, 성화의 여정에 항구할 힘을 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성심의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시고 성화의 여정에 항구할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날마다 기뻐하며 예수성심의 샘에서 물을 긷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이사 1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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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옹졸한 마음을 어떻게 하면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당신은 내 마음 몰라.’라는 말을 우리는 많이 합니다. ‘당신은 모르실 거야. 얼마나 사랑하는지.’라는 유행가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모른다고 솔직히 말했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텐데 안다는 식으로 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당신은 내 맘 몰라라고 말하면 그때 우리는 모르긴 왜 몰라라고 하곤 하지요.
그렇습니다. 알긴 압니다. 문제는 얼마나 아는가이고, 사실 다 알진 못하잖아요?
그런데 우리 마음의 상처는 이렇게 내 마음을 몰라줄 때 받고, 제 생각에 이 상처가 욕먹을 때 받는 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욕이나 모욕은 인격적 상처이기에 마음의 상처보다 더 크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욕이나 모욕은 내가 잘못하거나 부족해서 받는 것이라면 마음의 상처는 나의 잘못이 없는데도 나의 사랑이 무시당하거나 배신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더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상처를 더 많이 받기 십상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사랑과 하느님 마음은 어떻습니까? 우리처럼 상처받으시는 마음일까요?
주님의 마음은 더 크고 많은 사랑을 하셨기에 더 큰 상처를 받으셨고, 그래서 그런 주님의 마음도 상처받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나 주님의 마음을 성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마음과 하느님 사랑은 얼마나 큽니까? 그 마음과 사랑을 우리가 얼마나 알겠습니까?
마음이 넓다고 할 때 하해(河海), 곧 큰 강과 바다와 같이 넓다고 하는데 주님의 마음은 우리가 최대라고 생각하는 그 하해보다 넓고, 우리의 앎을 늘 뛰어넘기에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하해보다 큰마음이기에 상처받아도 받지 않으십니다. 접시의 물은 작은 돌에도 온통 뒤집히지만 바다의 물은 큰 돌이 떨어져도 한 번 풍덩하고 그만일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도 이것과 같을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을 우리가 너무 몰라주고 무시해도 주님은 그것으로 치명상 입지 않으시고 그래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래서 그런 사랑을 우리는 거룩하다고 합니다.
최후 만찬 복음은 주님 사랑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우리 마음은 작기에 작은 사랑을 조금 하고도 큰 사랑을 많이 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것을 몰라줄 때 상처를 크게 받고 주는 족족 많이 받습니다.
그러니 상처를 준다고 남 탓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옹졸함을 탓해야 하고, 우리 마음의 그릇을 크게 키워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기도하면 될까요?
물론 기도해야 합니다. 몰라줘도 더 사랑하기로 결심하고 노력하면서. 이때 ‘더’는 더 큰 사랑을 더 계속하는 겁니다.
더 큰 사랑 의지와 노력에 주님께서 은총을 주십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기도하듯이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버지께서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우리 마음이 주님 마음과 같게 되기를 바라고 기도할 뿐 아니라 노력하기도 다짐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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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19,34)
<예수 성심!>
오늘 복음(요한19,31-37)은 '군사들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려고 군사 하나(론지노)가 창으로 심장이 있는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릅니다. 그러자 그곳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예수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은 '성체성사와 세례성사'를 상징하며,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聖心)'을 상징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기억하고, 그 마음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인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그리고 사제들이 이런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과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예수 성심!'
예수 성심(聖心)은 가엾은 이들에게로 향해 있는 '연민의 마음'입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향해 흐르듯이, 늘 낮은 곳에 있는 가엾은 이들에게로 향해 있는 '측은지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것을 내어놓으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당신의 전부를 내어놓으신 '사랑의 마음'이며 '겸손의 마음'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다시금 기억하면서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과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합시다! 그리고 이런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닮은 사제들이 이 땅에 많아지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요즘 우리네 세상이 점점 더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으로부터 멀어지고 있고, 그래서 하느님의 피조물들과 공동의 집인 지구가 힘들어 합니다.
그 원인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21세기 가장 큰 병폐로 지적하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런 병폐들을 몰아내고,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채우도록 합시다!
오늘도 '예수 성심'과 함께 화이팅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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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jNTIYV3ofe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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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 34)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을
또 다시
불러봅니다.
예수 성심 안에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 성심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말 없이 우리를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예수 성심이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우리와 함께
기도하십니다.
우리 마음이
기댈 곳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입니다.
당신의 피와 물의
희생으로 우리 죄를
씻으시고 우리 마음을
껴안아주십니다.
어둡고 아픈
마음을 봉헌합니다.
허전하고 외로운
마음을 봉헌합니다.
예수 성심을 통해
사제들과 신자들
모두 건강해지길
기도드립니다.
모든 사제는
예수 성심의 것이며
예수 성심은
사제의 것입니다.
작은 아들처럼
예수 성심께로
돌아갑니다.
예수 성심은
우리 마음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상처받기 쉬운
우리 마음은
예수 성심과
늘 함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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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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