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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목사가 ‘목회활동비’라는 명목으로 사용한 지출 내역들 가운데 압권은 사모의 골프채 구입과 레슨비, 그리고 '황제 식사'였지만 그것만큼 내 눈에 거슬리는 내역이 있었다. 아마 나 자신과 비교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은데, '양복 수선 추가' 100만원, '맞춤 와이셔츠' 60만원, '안경' 160만원이라는 항목이다.
그 목사가 명품을 즐긴다는 말은 종종 들었지만 아무리 대단한 명품이라 해도 양복 수선비가 100만원이라는 게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세계적인 장인이 일일이 손으로 재단하고, 봉재하고, 바느질까지 손수 매만지는 특수 공정을 거쳐서 1년에 몇 벌밖에 만들지 못하는 수천 만 원짜리 초호화 명품이 아니라면 어떻게 양복 수선비로 100만원이 나올 수 있을까?
설마, 그 목사가 목사의 탈을 쓰고 그런 양복을 구입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맞춤 와이셔츠’가 60만원이라는 것도 나로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요즘은 이름 있는 맞춤 전문점들도 가격이 많이 내려서 와이셔츠 한 벌에 10만원 안팎인데, 60만원이라면 이건 이른바 극소수의 명품 족들만 상대하는 곳일 터다.
어쨌든 이것도 한 벌 가격으로 지불한 것이 아니라 아마 열 벌쯤 되는 가격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목사라는 자가 감히 60만 원짜리 셔츠를 입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득 며칠 전에 쿠팡에서 보았던 셔츠들이 떠오른다. 2-3만 원짜리가 많았는데 나는 9900원짜리 셔츠를 구입했다. 그게 내 수준에 맞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 목사가 지불한 ‘안경 160만원’도 평생 사용할 안경들을 미리 주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를 미쳤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제 나도 노안이라 글을 쓸 때나 읽을 때 돋보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몹시 불편하다. 눈이 흐릿해서 집중이 되지 않기 때문에 글도 제대로 써지지 않으면서 시간만 잡아먹기 일쑤다. 해서, 돋보기를 보러 안경점에 갔더니 5만원이라는데, 가격만 묻고 그냥 돌아 나왔다. 조금 질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오래 전에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2500원 주고 기성품을 샀었기 때문에 갑자기 5만원씩 주고 구입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돋보기는 그렇다 치고, 얼마 전에 안경점에 들러서 제법 비싸다는 다초점 렌즈의 가격을 물어보았었다. 자꾸 시력이 떨어지는데다, 돋보기로 책을 읽다가 앞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려니까 돋보기를 벗거나 돋보기 너머로 눈을 흘기면서 쳐다보는 모양새가 별로 좋지 않아서 다초점 렌즈를 구입할까 생각하고 가격을 물어 보았는데, 가장 저렴한 게 15만원이라고 한다.
가격만 묻고 나중에 오겠다며 등을 돌렸다. 내 주머니에 15만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60만 원짜리 안경을 덥석 살 수 있는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궁상떨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궁상은커녕 가족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의 가난한 삶이 주께서 내게 주신 큰 은혜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부유할 때 나는 가난한 형제들의 뼈저린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는 고사하고, 때로는 성실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들을 비난했고 때로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들을 조롱했는가 하면, 때로는 그들의 죄가 커서 축복을 받지 못한 것이라며 저주까지 마다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죄와 허물 때문에 그들이 가난의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많이 가졌기 때문에 그들이 적게 가질 수밖에 없었고, 내가 쾌락을 좇으며 허랑방탕했기 때문에 그들이 가난의 고통을 겪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와 만물을 지으면서 모든 인간이 넉넉히 쓸 만큼 충분한 자원을 주셨지만 누군가 지나치게 많은 것을 독점하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는 헐벗고 굶주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께서 ‘나누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가난의 고통을 겪으면서 비로소 깨달은 ‘진실’이다.
많이 가진 자는 가난한 형제에게 빚진 자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물론 부유하면서도 예수를 잘 믿고, 예수의 계명을 오롯이 따르는 형제들이 있다. 그것은 분명히 주님의 큰 은혜이자 놀라운 사랑이며, 주의 뜻에 합당하게 재물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특별한 은사(은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철저히 무너지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처절한 고통을 겪으면서 비로소 나는 가난한 형제들의 아픔과 슬픔을 온 몸으로 동정(com-passion)할 수 있었다.
만약에 내가 가난한 자의 자리에 있지 않았었다면 아마 나는 지금까지도 주를 찾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까지도 가난한 형제들을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며 함께 아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타락했고, 그렇게 교만했고, 그렇게 위선적인 인간이었다.
그 목사가 사례비로 수억을 받든, 교회 재정을 제멋대로 사용하든, 그의 아내가 골프를 치든 장구를 치든 댄스를 치든 사실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내가 그의 행동을 거세게 비난하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그가 목사이기 때문이며, 목사는 주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는 자여야 되기 때문이다. 주의 계명은 무엇인가?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이며, 가난한 형제를 ‘예수처럼’ 섬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의 계명에 비추건대, 부자 목사는 계명을 어긴 자로서 이미 주의 종일 수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렇게 말하는 내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자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주저 없이 외친다. “목사가 진정 주의 종이라면 목사는 결코 부자일 수 없다”
‘자기 배를 채우기에’ 급급한 자들, 이를테면 ‘돈을 지극히 사랑하는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는 부자 목사들은 주께서 말씀하신 ‘외식하는 자’일 뿐이다. ‘외식하는 자’는 자기 의, 자기 사랑에 사로잡혀 결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며,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한낱 교인의 자격조차 없는 자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억의 사례비는 뒤로 꿍치고 다시 수억의 돈을 빼돌려 헛되이 낭비하는 자가 과연 주의 종으로서 가난한 형제들을 섬길 수 있다고 보는가?
사모에게 골프채나 사주고 프로에게 골프 레슨이나 받으라고 교회 재정을 낭비하는 자가 과연 가난한 형제에게 기꺼이 다가가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온갖 거짓말로 교인들을 무수히 속인 자가 과연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청빈낙도’는 흘러간 옛말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목사들이 가슴에 새겨야 하는, 주님의 준엄한 명령이다. 그 목사를 보면서 예수의 눈물이 떠오른다.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슬피 우시던 예수의 눈물 말이다. 한국 교회, 지금 상태라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무너뜨려져야’ 한다!
“화있을진저, 너희 외식하는 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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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 © 당당뉴스> 강민원 |
첫댓글 그를 비호하거나, 방치하는 무리들이 있기에 가능한 얘기입니다.
그 분들은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보다 인간 목사의 칭찬과 인정이 필요한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목사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분들입니다.
말은 못하고 뒤돌아서서 기도만 한다지요? 기도가 무슨 "수리수리~마~수리" 인가요??
우물가 탕자님의 말씀 일일이 맞는말씀입니다. 한가지 모르시는 부분이있군요.우리한국교회 구조 문제입니다.항존직 자들의 <안수집사. 권사.장로.>공통점. 목사님이 교회를 부흥만 시켜놓은뒤에는 교회는 목사님 뒷바라지를 다 해드리겠습니다.
이구동성으로 말들을 합니다.재정이넉넉하게 돌아가니 목사님 하고싶은거 하세요,목사가쓸수있는항목에다 넉넉히책정해줍니다. 그 책정액에 맞추어 쓰고 적당히 영수증을 첨부하는것입니다.교회 재정을 맡아보면 기막히는 일들이부지기수입니다. 정의에 불타는 마음으로 찾아가서 따지면 재정집사가 목사보다 위에냐며 온갖 불이익을 뒤집어 써야만 했습니다. 교회돈을 낭비하는 목사
도 문제지만 그렇게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당회원들이 문제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ㅎㅎㅎ...따지면 신천지 되지요...^^
기가 막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