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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Grace Changes Everything
은혜의 비밀
척 스미스 목사 지음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라는 간단한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 말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가지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쪽에서
할 일이라고는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보살피심과 따듯한 동정을 신뢰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오는 자유함과 기쁨을 경험하는 것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율법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져보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그들은 의로움의 근거를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이미 하신 일보다는 자기들이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에다가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과 해서는 안될 일들"의 리스트를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말입니다.
저도 그런 유치한 잘못된 의로움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 시절에는 제가
동네에서 가장 믿음이 좋은 아이 중에 하나라고 늘 생각했었습니다. 왜냐하면 해서는 안 될
일들을 안 했기 때문이지요. 담배도 피우지 않았고, 댄스파티도 가지 않았고, 영화도 보러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아주 죄스러운 일들이라고 배웠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런
일들은 하지 않으려고 피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일에 정신이 팔린 믿음이 약한 친구들보다
훨씬 제 자신이 의롭다고 믿었습니다. 주운 담배꽁초를 숨어서 몰래 한 모금씩 빠는 목사님의
아들보다 제가 훨씬 거룩하다고 생각했지요. 저는 모든 아이들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이 그 일을 인정해 주시고 알아주실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런데도 제게는 여전히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극장 구경은 가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백설공주 영화가 보고 싶어 못 견디는 것이었습니다. 그 것 때문에 죄책감에 사로잡혀 지옥을
갈 것만 같아, 주일 저녁마다 회개하면 용서받고 구원을 다시 얻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다음
주에는 절대로 그런 마음 갖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하곤 했지만 그 약속은 월요일
아침까지만 지켜져도 다행이었습니다.
제 자신의 의는 저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있었기 때문에 오래 가지 않아 하나님과 저의
관계는 굉장히 힘들어 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매년 여름이면 우리 교회의 청소년 캠프에 꼭
갔습니다. 마지막 날 밤에는 언제나 큰 장작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아,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드리네” 와 “끝까지 주님 따라 가겠네” 등의 찬송을 불렀지요. 우리가 상당히
감정적으로 고조된 시간이 되면, 종이를 나누어주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서 변화시켜
주시기를 원하는 부분이 있거나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헌신하고 싶은 일들이 있으면 적으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적은 종이를 접어서 솔방울 속에 밀어 넣은 후, 타는 장작불 속으로 던져
넣지요. 내가 던져 넣은 솔방울이 나의 소원과 결단의 글과 함께 활활 타고있는 것을 보면서
두 뺨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겁니다. 그 때 저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제 삶이
불타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내 자신을 온전히 주님을 섬기는 일에 바치게 해달라고 소원하지요.
캠프파이어가 끝나면, 선생님들을 따라, “앞으로 한 학년 동안은 하나님의 은혜로
절대로 극장 구경도 가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도 입에 대지 않으며, 욕이나 상소리를
사용하지 않으며, 댄스파티에도 가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라고 쓰인 카드가 쌓인
테이블로 갑니다. 거기서 결단의 카드에 서명 한 후, 일년 동안 지갑에 넣고 늘 갖고 다니는
것이지요.
저는 결단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는 메마르고 율법적인 관계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계약에 의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보니까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신앙생활에 전혀 기쁨이 없는 것이지요. 저는 약속한 것을 어길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서명하고 날짜를 기록했고, 그리고 그 것을 지갑에 넣고 늘 가지고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제가 서약한 것을 하나님 앞에 꼭 지키기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저의 이러한 결단과 노력에 대해 꼭 보상을 하셔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잘 대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고, 적어도 약속을 지키지 않고 결단한 대로 살지
않는 아이들보다는 저를 더 축복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저보다 훨씬 의롭지 못한 아이가 항아리 속의 젤리빈 숫자를
맞추는 게임에서 일등을 하여 상을 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화가 나서, “하나님,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왜 저를 축복해 주지 않으십니까? 제들보다 제가 상을 탈 권리가
더 있지 않습니까?” 하면서 불평했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약속을 지키느라 죽을 고생을 하며 노력했는데, 하나님은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는 거지요.
저는 정말 힘이 빠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가끔 제 자신에 대해 솔직해질 때가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실제의 저는
제가 생각하는 것같이 의로운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저의 삶의 태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가 많았고, 제게로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극장에 살짝 숨어 들어갔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그 일 후에 저는 6개월 동안이나
하나님께 약속한 결단을 지키지 못한데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하나님이 저를 축복해주셔야 한다는 생각을 포기하게 되지요. 하나님께 구하고
기도할 것이 많았지만, 하나님을 그렇게 배반해놓고 무슨 낯으로 구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행위로 의로움을 얻어보려는 힘겨운 노력은 제가 아리조나 투산에서 목회를
시작할 때도 여전했습니다. 목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목회가 이래서는 안되겠다,
목회가 더 잘 되는 길이 있을텐데 하는 생각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전국을 . 순회하며 부흥회를 여는 부흥사들의 집회에는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사람들이 천막을 꽉 메우고, 많은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병 고침을 받았다고 법석들인 것이 보였습니다.
저는 저의 삶과 목회에서도 그러한 능력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투산의
사막에서 금식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 보기로 했습니다. 물 한 병과 성경과 노트
한 권만 가지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기 위해 혼자 길을 떠났습니다. 저는 하나님에게, 축복해
주실 것과 능력 주실 것과 제 삶에 기름 부어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이렇게 영성훈련을 한
바탕 치르고 나니까 기분도 삼삼해지고 흥분도 되면서 금식기도를 이만큼 했으니 이제
하나님이 틀림없이 우리 교회를 축복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다음 주일 예배에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실지 주일이 기다려졌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저는 금식으로 인해 너무 지치고 쇠약해져서 강단에 겨우 설 수밖에
없었고, 마음이 복잡하고 머리가 뒤숭숭해 조리있는 설교를 도무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졸기 시작했고 저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역사를 기대하고 있는데 코 고는 소리가 합창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낙심이 된 나머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내가 얼마나 열심히 금식하며 기도했는지 보지
못하셨습니까? 우리 교회와 저를 축복해 주셔야지요. 보셨다면 그럴 책임이 있으시잖아요?”
하고 따졌습니다.
그 때는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내가 금식기도를 하면 하나님에게는
축복해야할 의무가 생기게 되고, 금식기도를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하시도록 강요하는
도구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 저는 사람들이 사도행전에서 기록하고 있는 기적과 같은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에 대해 분명히 믿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제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세상에 전도하기 위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우리 서로간의 사랑이며, 이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법을 만들고 규칙을 정하는 것으로는 그런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 서로의 관계에 있어서는 법을 적용할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실하고도 안전하게 확보하는데는 하나님의 사랑밖에는 없습니다. 성경은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 합니다. 사실 예수님도, 무엇이 가장 큰 계명이냐는 질문에,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법이
아니라 사랑만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나 우리들 서로의 관계에 있어서도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율법에 의해 억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는 것보다는, 더 강한
사랑의 줄에 의해서 하나님 앞으로 달려오는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를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아직도 당신이 법과 규칙들에 의해 하나님께 붙어있다면, 머지않아 속박에 허덕이며 제한에
시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사랑의 기쁨으로 맺어진 관계와 법의 강제로
억지로 맺어진 관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외부의 압력으로 인해서 억지로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하신
적이 결코 없습니다. “제기랄, 이렇게 할 일이 쌓였는데 오늘 또 교회를 가야 하나? 그렇다고
안 가면 하나님이 더 이상 나를 사랑하시지 않을 것이고 목사님도 사나운 눈초리로 노려
보실텐데.” 하면서 짜고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도 들으시기에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무거운 짐을 진 것 같은 자세로 괴로움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랑으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에 빠져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지 사랑도 없이 단조로운 하나의 피조물이 아니라 그
이상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와 이런 계약을 맺으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세운 모든 규칙과
조건을 지키라. 그러면 너를 사랑하고 축복하겠다. 그러나 하나라도 어기는 날에는 모든 것이
무효로 되고 너는 나의 왕국 밖으로 쫓겨날 줄로 알아!” 크리스천은 무거운 계약에 의해서
하나님께 붙들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오직 나를 강권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14).
제가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함을 얻을 때까지 하나님은 오랜
세월을 참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저는 수년에 걸쳐서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를 통해서 많은
축복을 받았다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저는 언제나 축복 받기를 갈구하고 있었으므로, 결국
로마서를 깊이 공부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참 말씀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저는 다른 사람들을 사로잡은 그 진리를 발견해보려고 꾹 참고 계속 파
보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제가 이 로마서를 공부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 저와의
관계에 있어서 일대 혁명을 일으키셨습니다. 간단하고도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면서도 그
뜻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말의 의미를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셨는데 그 말이 바로
‘은혜’라는 단어였습니다. 저는 그 때 이후 지금까지 자유롭고 사랑으로 가득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누리게 되었으며, 목회에 있어서도 과거에 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발견한 것은 비록 제가 넘어지고 실패할지라도 저의
잘못이나 실수가 결코 저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과
저와의 관계가 오르락내리락하는 로울러코스터의 관계가 아니라 그의 푸근한 사랑 가운데서
편안하게 달리는 안전한 관계가 된 것이지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로마서 8:31) 라는 심오한
진리를 발견했을 때의 제 기분이 어떠했겠는가 상상해보십시오. 수십 년 동안 저는 하나님이
내 편이 아니라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죽도록 고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금을 그어놓고 가만히 기다리고 계시다가 내가 금 밖으로 발만 내디디면 무서운 불 심판으로
호령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마침내 저는 하나님은 율법주의를
동반하는 두려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그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평안을 제가 누리기만을
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후부터 저는 하나님과 전혀 새로운
차원의 관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율법이 금지하고 있는 사항들은 마치 부모가 어린아이들의 안전과 복지를 위해
내린 안전수칙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함을 깨닫고 나면
더 이상 우리는 율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함을 누리며 살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고 또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해칠 어떠한 일도
우리는 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쁨을 안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장애물도 방해물도 놓이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사실이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더욱 우리의 삶의 최대의
욕망이 되고 더욱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인해 억지로 맺어진 관계는
필요가 없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원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인생의 최대의 기쁨입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경험하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신다는 것,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안전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발견한 것은 저의
영적인 경험 전체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전혀 새로운 근거 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의 선한 행위나 저의 의로움을 근거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사랑을 근거로 세우는 것이지요.
그것이 은혜요, 그것 때문에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이지 은혜야말로
참다운 인생, 풍성한 삶, 모든 것에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게 해줍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눈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조약돌과 같이 보잘것없는 우리의 미약한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거대한 바위와 같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속성에 달린 것이라는 엄청난 진리에
눈을 뜨게될 때, 우리 삶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테크닉칼라의 폭발성을 가지고 우리 앞에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메마르고 황량한 단조로운 삶을 기름지고 싱그러운 푸른 초장의 삶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은혜는 이를 악물고 억지로 하는 봉사를 사랑과 기쁨이 가득한 열심 있는 봉사로
바꾸어 놓습니다. 은혜는 눈물과 자신의 노력이 실패한데 대한 죄책감을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누리는 영원한 스릴과 즐거움으로 바꾸어 줍니다. 은혜는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깊숙한 기쁨을 발견하셨나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미약한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하신 팔이 이루어 놓으신
일에 달린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시겠습니까? 당신이 지금 영적으로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저와 함께 잠시 하나님이 , 우리를 위해 쏟아 부어주신 놀라운 은혜를
생각해보는 자리로 초대합니다.
네, 참으로 그렇습니다. 은혜는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은혜 1
죄 사함 받음!
어느 날 저녁 저는 전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박사가 연설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자신의 자서전 1159쪽에는 자신이 처음으로 저지른
실수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처음이자 마지막 실수였다고 했습니다.
제가 자서전을 쓴다면 저의 첫 실수는 아마 차례가 있는 첫 쪽이 아니면 서문에서 이미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저의 선한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절대로 서지 못합니다. 제가
썩어빠진 부도덕적인 타락한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저의 선한 행위는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받아 주시기에는 근처에도 갈 수 없을 만큼 턱없이 부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용없는 의
의로워지기 위해 가장 많이 행하는 방법은 무엇이 의로운 일이고 무엇이 의롭지 않은
일인지를 구분해서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아무도 자기가 정한 규칙에 따라 살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것을 지키지
못했는지에 대한 핑계만 잔뜩 둘러대게 되는데, 가장 공통적인 핑계는 규칙대로 살지 못한
것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내가 유리컵을 떨어뜨려 깨뜨리면 내가 잘못해서 떨어뜨린 것이 아니라, 그 때 누가 내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시간에 불렀기 때문에 떨어졌다는 거지요. 또 건너편 방에서 너무
떠들면서 시끄럽게 했기 때문에 떨어진 것으로 절대 내 잘못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이라는
겁니다. “봐! 네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렇게 됐잖아! 네 탓이지 내 잘못이 아니란
말이야!” 우리는 아무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는 자기 잘못을 이브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라고 말하면서, “제가
그렇게 된 것은 그녀의 잘못입니다.” 라고 했습니다.(창 3:12). 잠언은,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 오히려 그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잠
30:12).
당신이 스스로 깨끗한 자라고 생각하면서 더러운 것으로부터 씻음 받지 못했다면 의는
물 건너 간 것입니다. 성경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라고 말합니다.(요일
1:8,10). 성경말씀은 우리의 문제를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19,23).
우리가 규칙을 지킴으로 우리 자신의 의를 세우려 노력한다면, 결국은 기울어진 저울로
재게 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언제나 제가 제 자신을 볼 때는 당신을 볼
때보다는 도덕적으로 더 낫게 보게되고, 당신도 역시 당신 자신을 볼 때보다는 저를 볼 때에
도덕적으로 더 못하게 보게될 것입니다. 제가 당신을 보면 온갖 잘못이 다 보이는데, 저
자신을 보면 잘못도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조차도 대단한 잘못이 아닌 것으로 보이지요.
저의 행위로 얻을 수 있는 의는 모두 가짜입니다. 성경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라고 말합니다.(사 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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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우리의 의롭고
선함에 달렸다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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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걸레를 걸치고 돌아다닌다면 참 우스꽝스러운 일 아니겠습니까? 굉장히
신령한 척 겉으로만 번지레한 종교 치레를 하면서, “너희들 보다 내가 더 거룩하다.”는
태도로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말할 때도 가라앉은 음성으로
엄숙하게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거룩하고 의롭게 들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또,
성경에 있는 종교적인 고어체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것이 일상 용어보다 훨씬 의롭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의를 내세우고 드러내려고 걸음도 점잔을 빼면서 걸으며 애써 거룩하게
보이려 하건만, 하나님은 머리를 저으시며, “더러운 걸레.” 하시는 거지요.
하나님과 저와의 관계가 제가 얼마나 선하고 의로운가에 달린 것이라면 저는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절대 이를 수 없지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조심하면서 올바른
생각과 행동으로 하루를 선하게 잘 살았다고 칩시다. 그런 날은 제 자신도 만족하면서 뭐가 된
기분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최선을 다해 잘 한 날에도 하나님은 내려다보시면서, “더러운
걸레.” 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충분하지 못 한 거지요.
율법을 지키려는 것은 저를 정죄에 빠뜨립니다. 왜냐하면, 참된 율법은 마음의 자세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제가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의의 기준으로 열심히 노력하던 옛날에는,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는 어떤 잘못된 일에 대해 분개심을 가지고 정죄하며 그 사람은
미워하면서도, 그들이 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제게도 호기심과 탐욕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 순간 저는 제 자신의 의를 위해 세운 규칙을 어겼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끝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지요.
불행하게도, 이제 겨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했다 싶으면 어떤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관계는 또 허물어져 버리고 또 새로 시작하기를 반복하면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마침내 가지게 되었다고 만족하게 되는 꼭대기까지 선행의 사다리를 계속
기어오르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다리 꼭대기에 이른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얌체 같은 녀석이
하이웨이에서 갑자기 끼어 들면서 새치기를 하면, “야, 임마! 너, 어디서 운전 면허 받은
거야? 그 따위로 밖에 운전 못해?” 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그 동안 쌓은 공은 다 무너져
버리고 선행의 사다리 기어오르기는 바닥에서 새로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기준입니까?
예수님 없이도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몇 가지 중요한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선행으로 어떤 기준에 도달함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
선행의 기준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떤 기준의 선행을 요구하실까 하는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는 기본적으로 온유하고 착하기 때문에 제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서고 싶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준은 우리들의 기준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계산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의 힘으로 천국에 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을 말씀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마 5:48).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온전함에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나 마음먹는 것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원하시는 모든 일을 하나도 어김이 없이 다
지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분명하게 말해서, 스스로의 선한 행위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 앞에 올바르다는
말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로운 행위의 기준을 세우려한다면, 예수님이 세워놓으신 기준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고
말씀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마 3:17).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의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8절과 10절에서 예수님은,
“그가(성령을 말함) 와서 ....., 의에 대하여, .......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 관해 세상에 증거하신 것인데, 마치 “내 아들의
의를 보라. 내가 천국에서 받아줄 의는 이런 의라야 하느니라.” 하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삶이야말로 오직 유일한 의의 기준입니다. 내가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처럼 의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의 구절들은
하나님이 받아주실 유일한 의를 가리키고 있는데, 그 의는 다름 아닌 바로 예수님 자신의
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선한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본 선한 행위와 같은 기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인 것을 잘 압니다. 그런 의는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마 5:2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눅 6:27-30). 그리고 우리에게,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고 명령하셨습니다.(눅 6:35).
어느 누가 그렇게 의로울 수 있겠습니까? 저는 아닙니다. 저는 형편없이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럼, 그 말은, 저 같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버림받아야 한다는
말일까요 제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릴 ? 길은 전혀 없는 것일까요? 공허함과 좌절을 계속
안고서 결코 붙잡을 수 없는 무언가를 잡기 위해 계속 찾아야 한다는 건가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다는 소망이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행위 말고
다른 근거가 꼭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롬 3:20).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기를 원한다면, 우리 자신의 의 말고 어떤 다른 의의
근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를 위해 세우신 법은 너무 엄해서 우리가 지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다른 형태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인데, 그 의는 우리
자신의 행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그런 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은혜’ 라는 것이지요.
은혜는 무엇입니까?
‘은혜’ 라는 단어의 어원은 “아름다움(beauty)”이며, 신약 성경에서 은혜의
의미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God's unmerited favor)”입니다. 은혜는 내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혜는 내가 자격이 없고, 가치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믿음과 신뢰로 은혜를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6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예수를 믿고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을 대신 한 것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거룩한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의 죄가
말끔히 씻어집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거나 어떤 종교행위로 우리 죄를 용서받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로 가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하셨는데(눅22:42), 그 말씀은, “나의 죽음 외에 다른 방법으로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다면, 종교적인 행위로나 어떻게든 자기 자신들의 의를 얻어서 구원을 받을 길이 있다면
나는 십자가를 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참혹한 고통의 길로 가지 않도록 해주세요.”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장사지냈다가 다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의 죽음이 하나님이 당신과 저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예화를 들어서 설명하면 분명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군요. 당신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합시다. 이웃의 재산을 침해한 죄로 기소를 당했습니다. 어느 변호사나 다 알고
있듯이, 당신이 혐의를 벗기 위해서는 두 가지 가능한 길이 있습니다. 이웃의 재산을 침해하지
않은 것을 증명하든지, 아니면 당신이 그 재산에 대해 행사할 충분한 권리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자 그러면, 이 논리를 우리의 영적인 상황에 적용해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한 죄인으로 정죄하고 불의한 자로 기소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이 죄 몫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우리가 그런 일을 할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그런 . 죄를 지을 권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한 일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그렇다면, 죄 사함을 받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법은
어떠한 도움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대답은 아무 도움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고, 재판은
열리자마자 곧 폐정되는데, 우리는 그런 일을 할 권리가 없었는데 그런 일을 했으니까 따라서
우리는 유죄 판결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큰 은행강도
예화를 바꾸어 봅시다. 제가 치밀하게 계획하여 은행을 털었다고 칩시다. 제가 안
했다고 말할 수도 없고, 감시 카메라에 잡혀있어 안 한 것을 증명할 수도 없기 때문에 법이
저를 정죄합니다. 또, 제가 은행을 털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도둑질은 국민의 기본권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법으로는 죄 사함을 받을
길이 없는 것이지요.
재판을 받는 동안, “일생동안 이제 절대로 은행을 털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이제부터 손 씻고 착하고 깨끗한 생활을 하겠습니다. 절대로 남의 물건을 불법으로 취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열심히 사정할지라도, 그것이 제가 이미 저지른 일을 정당화하지는
못합니다. 제가 그 돈으로 착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용서 받아야한다고 말할지 모르지요.
교회에 헌금도 하고 굶주린 가족도 먹이고. 그러나 저의 “의로운” 행위가 저의 죄를
상쇄하거나 면제해 주지는 못합니다.
판사는 제가 훔쳐간 모든 돈을 은행에 갚도록 명령하고, 도로변의 쓰레기를 줍는
환경미화 노역형을 언도하여 복역하게 하고, 저의 남은 평생을 선한 일을 위해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제가 이미 지은 죄를 없이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법이 정한 모든 일들도
저의 전과 기록은 지울 수 없고, 과거의 범죄 기록은 여전히 남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전히
강도를 범한 죄인이며 그 평결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왜 영적인 일에 있어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한 모든 선한 일들을 들어
하나님 앞에서 무죄를 주장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죄에 대하여, 과오에 대하여, 불의에 대하여 뉘우치고 새로운 결심으로
다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개과천선하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이 죄 사함을 받아낼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 노력할지라도
이미 지은 죄를 없앨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선한 행위로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평생을 선하게 살고 한 번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 선한 행위가 한 번의 죄를 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죄 사함의 근거는 그의 독생자 아들의 희생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 우리의
과거와 미래의 모든 죄가 죄 없으신 어린 양,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온전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씌워진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고통 당하시고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고후5:21).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와 자리를 바꾸신 것이지요.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그를 믿고 신뢰하는 간단한 우리의 믿음 때문에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님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에게 씌우셨을 때,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죄 때문에
받아야 할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으셨는데, 성경은 그
벌을 사망이라 합니다.(롬 6:23).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으면, 우리의 지은 모든 죄가 다 용서함 받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요한 일서 1장7절이 말합니다. 이처럼 깨끗케
하심은 율법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로서,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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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천국에 가기 위해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발버둥칠 수도 있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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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는 믿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선한 행위나 노력이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얻게 하지는 못합니다. 바울은 강한 어조로,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라 하였습니다.(롬 4:5). 행위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믿기만 하면
의로움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미 이루어 놓으신 일을
믿는 우리의 믿음 때문에 우리에게 죄 사함을 주십니다.
선택은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당신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 당신 자신의 노력으로 예수님처럼
선해지려고 발버둥칠 수도 있고, 아니면, 예수를 믿는 믿음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권리를 은혜의 선물로 받을 수도 있습니다.
제게는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저의 선한 행위로는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저의 과거의 지은 죄 때문에 정죄된 채 맥없이 서 있을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자비를 떠나서는 결코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된 소식은 하나님께서 받아 주실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절대적으로 거룩하시고 정결하시고 의로우셔서 죄가 함께 하지 못하는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그와 교제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치르신 희생을 우리가 믿기만 하면, 비록 우리는 자격이 없을지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죄 사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복음입니다. 비록 우리가 온전함에서 많이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나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를 맺으면 그 관계는 튼튼한
관계가 됩니다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고 그는 . ,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아버지 앞에
나아갈 수 있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가치를 근거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거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은혜의 복음의 전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그마한 죄 하나라도 전혀 짓지
않은 것처럼 여기십니다. 저는 제 자신을 그렇게 볼 수가 없습니다. 제 자신을 거울에서 보면,
“야, 척! 너는 죄인이야. 너는 너의 식욕도 절제할 줄 모르고, 너는 너무 문제가 많은
사람이야.” 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저를 보시면서, “죄 사함 받았음.”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저를 사랑하시고 저를 있는
모습대로 받아 주시는 거죠. 그의 친아들을 받아주시는 과 똑같이 저를 받아 주십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엡 1:6). 그의 사랑하시는
자는 그리스도를 말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진 것
같이 받아들여졌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은혜의 복음이 제가 들은 소식 중에 가장 복된 소식이 되는 이유입니다. 우리
죄를 위해 죽게 보내신 그의 아들을 우리가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깨끗이 씻어졌고 전혀 죄가 없습니다. 바울이,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라고 말한 것 같이 말입니다.(롬 4:7,8).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 언제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올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시든지 안 들어주시든지, 우리는 우리 아버지의 지혜를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에게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있으며, 그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줄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의
부요하고도 풍성하신 사랑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요!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복음입니다!
은혜 2
문은 절대로 닫히지 않습니다.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기쁘고 놀라운 일인데, 이 죄 사함은 은혜의 복음의
내용의 절반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신 것을 믿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복음의 남어지 절반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여기신다는 내용입니다.
그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 그룹이 자기들
나름대로 의의 기준을 정해놓고 있는데, 그 기준이 그룹마다 제각각 다릅니다.
금목걸이 해도 괜찮은 겁니까?
그렇게 오래 전의 일도 아닙니다만, 단추를 단 옷을 입으면 의롭지 못하다고 가르치는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추대신에 호크를 사용했으며 단추를 옷에 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들은, “단추를 옷에 달다니요? 아이구 망칙해라. 그것이 얼마나
불의한 일인데요!” 요즈음에도 금목걸이나 금으로 된 장식품을 몸에 거는 것은 죄라고
가르치는 그룹이 있어서, 금목걸이를 하면 의롭지 못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류역사를 통해서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다양한 의의 기준을 설정하고, 주의해서 그
기준을 잘 지키면 하나님이 받아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법이나 행위에 의해 의의 기준을 세우려 하면 참으로 큰 문제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세운 기준에조차도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각 제 나름대로의 옳고 그름의 도덕적 기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 자신의 이상형을 가지고 있는데, 외부의 방해만 없다면 자기도 그런 사람일 수
있다고 믿는 이상적인 자화상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그러한 이상적인 자화상을
“수퍼이고(superego)" 혹은 이상적인 자화상이라 부릅니다. 게다가 불행하게도, 아무도
”자기의 실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실제의
모습“은 항상 완벽해야 하는데, 외부의 환경이 자꾸만 나의 이상적인 자화상에서 참된 실제의
모습을 멀어지게 하기 때문에 사실은 자기의 실제의 모습을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이지요.
심리학자들은 수퍼이고와 함께 “이고(ego)”를 말하는데, 이것은 실제의 “나”, 진짜
“당신”을 일컫는 것입니다. 슬픈 것은, 실제의 당신이 결코 당신의 이상형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의 수퍼이고와 이고 사이에 거대한 차이가 있다면, 당신은 심리적으로 부적절한
사람으로 간주 받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 당신 자신이 완벽하지 못한 사람인줄 알고 자기
자신에 대해 그렇게 높은 이상형을 가지고 있지 않아 수퍼이고와 이고 사이에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면 당신은 심리적으로 적절한 사람으로 좋은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지요.
심리학자들은 흔히 자기 환자들에게 그들이 세운 목표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형이라고
말해줌으로서 그들의 수퍼이고의 수준을 낮추려 노력합니다. “아무도 그렇게 완벽한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그렇게 선하지는 않단 말이에요.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극히
정상입니다. 누구나 다 하는 일인 걸요. 당신 혼자 그렇게 높은 수준의 목표를 세우고
완벽하게 살아보겠다고 쩔쩔 맬 필요가 없어요.” 라고 일러줍니다. 이 정신 치료사들은
계속해서 수퍼이고와 이고와의 간격을 줄이기 위해 노력함으로 균형잡힌 적절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치료법을 쓰는 것입니다. 수퍼이고를 끄집어내리는 치료법이지요.
이것은 예수님의 방법과는 대조적입니다. 예수님은 수퍼이고를 낮추시려고 노력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고를 높여주려 하십니다. 실제의 당신을 끌어올리는 것이지요.
실제의 제가 비록 이상형보다 훨씬 못하다 하더라도 상관없이 저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저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를 완벽한
의로움으로 봐 주시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은혜의 복음의 두 번째 내용입니다. 첫째는, 당신의 모든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인데, 당신이 예수를 믿는 그 믿음 때문에 모든 죄가 씻음 받고 용서함을
받았다는 사실이며, 두 번째는 당신이 예수를 믿는 그 믿음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을 의롭게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건 안 하건 상관없이, 어떤 규칙과 도덕강령을
지키든 안 지키든 상관없이 당신이 예수를 믿는 그 믿음 때문에 당신에게 의로움을 입혀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광스러운 복음이며 복된 소식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시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더 복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문은 열려 있습니다.
어째서 그것이 그렇게 복된 소식입니까? 저는 절대로, “오!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가
겁난다. 내가 거짓말도 했고, 화도 냈고, 속이기도 했는데 어떻게 나아간단 말인가! 내가 일을
그렇게 그르쳐놓고 어떻게 하나님의 도움을 청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의 의가 저의 행위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라면 실제로 사탄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문을 항상 막고 서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언제나 행해야 할만큼 행하지
못하고, 선하게 살아야 하는 줄 아는 만큼 선하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저의 수퍼이고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제가 옳다고 여기는 제 자신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 것이지요. 제가
세운 이상적인 의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탄은 그 실패를 이용해서 제가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너, 하나님 앞에 그렇게 잘못하고도 도움을 청할 권리가 있단
말이야? 너,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인줄 잘 알면서도 그렇게 했잖아? 그러다가 어려움에
처하니까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겠다구? 하나님이 듣기나 하실 줄 알구? 어림없어!”
사탄이 저로 하여금 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만들면, 사탄은 항상 제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문을 막아 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사탄은 절대로 문을 막아서지 못하게 됩니다.
사탄은 지금도 여전히 제게 다가와서 , “야, 척, 너는 형편없는 녀석이야. 사람들 앞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자격이 없어. 그렇게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자격이
없단 말이야. 너는 이것도 잘못하고 저것도 잘못했잖아? 너는 사고뭉치인걸!”
저는 이럴 때면 항상 미소를 짓기 시작합니다. 몇 몇 가지 제가 잘못한 일들을 들고
나와 저를 넘어뜨리려 하지만, 그 외에도 제가 잘못한 것이 많은데도 그것들은 들추어내지를
않았기 때문이지요. 저는 사탄에게, “사탄아, 그런 것 가지고 나를 겁주려고? 그런다고 내가
도망가서 숨을 줄 아니? 네가 한 말 다 맞아. 그래, 내가 잘못한 일이 많지! 그래, 나도 내
약점을 잘 알아! 그러나, 네가 나를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쫓을 수는 없어! 오히려
예수님께로 더욱 가까이 가게 만드는 거야. 왜냐하면 나의 유일한 소망은 예수님의 십자가밖에
없거든!” 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가장 안전한 곳, 저의 모든 소망이 걸린 주님의 십자가로 달려갑니다.
정말이지 저는 제 자신이나 제 자신의 의에 대해서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하신 일과 하나님이 저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제 안에서 일하시는 그 일 안에 큰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이
저를 위해 해주십니다. 제가 나약한 부분에서 하나님은 저를 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저의
나약함을 깨달을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는데, 제가 약해서 자주
넘어지던 부분에서 이제는 강하게 설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강하심이 저의 약함
안에서 온전해 지셨기 때문입니다.(고후 12:9).
분명한 것은 저는 아직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지금의 저는 과거의 저와 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과
같은 불완전한 상태에서도 하나님은 저를 보시면서 의롭고 거룩하다고 여겨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예수님 안에 잡혀있는 것 외에 어느 것에도 붙들려 있기가 싫은 이유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예수님을 떠나서는 우리 자신을 보면 안 됩니다.
의에는 등급이 없다.
우리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에게 입혀주셨다면, 우리의
행위로 그 의를 더 낫게 개선해보겠다고 노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더 낳게 개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게 하신 의로움을 더 의롭게 개선하는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의롭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입혀주신 그 의로움, 그
의로움보다 더한 의로움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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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 의롭고 또 영원히 의로운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우리의 믿음의 결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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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에서는 아무도 자기가 자기 자신을 의롭게 만들었다고 자랑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바울이 .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를 얻기 위해 이런 저런
일들을 행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기회도 없을 테지요. 이들은 단지 하나님을 믿었고 그들의
이 믿음이 그들을 의롭다고 여김을 받게 한 것입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하늘나라에 가서 다른 사람과 선한 행위를 서로 견주어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는 오직 한 분만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곳에 빛나는 별은 오직 하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행한
일들 때문에 번쩍번쩍 빛나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구석에서 어떻게 천국에 왔는지 온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서 있게되는 영적 계급제도와 같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에 대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아무도
그곳에 갈 수가 없었을 것 아닙니까?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갈 6:14). 우리가 얼마나 선한 일을 많이 했든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했든지, 얼마나 많은 교회를 주님을 위해 세웠든지, 우리의 영광은 오직 우리 위해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우리의 의는 우리의 선한 행위나 노력이나 어떤
의식이나 음식에 관한 율법을 지키는 데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는 지금이나 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믿음, 오직 그 믿음의 결과로 얻은 것입니다.
믿음으로 얻은 의는 그리스도에 속한 모든 사람들 간에 차이를 없이해 줍니다. 제가
당신보다 나을게 없고 당신이 저보다 나을게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 때문에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의는 오직 한 가지 의밖에 없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입혀주신 것 그 의입니다.
내가 내 자신의 의로움이나 의로운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서려하거나, 이번 주에 착하게
살고 성경을 많이 일고 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한다면, 나와
하나님과의 그런 관계는 얄팍한 관계가 되고 맙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은 것
같고 어떤 때는 나쁜 것 같고. 왜 그렇습니까? 나의 의를 바탕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없이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실제로 성립될 수 없고 따라서
평안을 누리기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내가 어떻게 느끼느냐 혹은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 혹은 내 자신의 의에 달린 것이라면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달린 것이라면, 축복의 문은
절대로 닫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 거저 주시는 은총에 의해서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결코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거나 축복을 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 삶에 주어지는 축복은 항상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무척 사랑하시기 때문에 저를 축복하시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가장 진실된 찬양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깨닫고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저절로 우러나오는 찬양입니다.
고약한 고집
우리는 우리의 의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일을 하는 것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개념에서
벗어나기가 힘든 것을 봅니다. 우리는 어떤 신자들은 그들이 행한 일들 때문에 다른
신자들보다 더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러한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 만큼 일을 안 하거나 우리가 열심이 있는 만큼
열심이 없을 때, 그 사람을 우리보다 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지요.
행위로 의로움을 얻는다는 이러한 생각을 우리 생각에서 떨쳐버리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개념이 우리 머리에 깊히 박혀있기 때문이며,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이 이것 때문에 죄의식으로 끊임없이 갈등하게 됩니다. 크리스천인 우리들도 우리 자신이
죄의식에 빠질 수 있는 여건을 스스로 만들어 놓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행동의 기준을 세워 놓고
지키기를 원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므로 나는 그의 사랑을 나타내기를
원하는데, 그의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것이지요.
그러나 제 안에 있는 사랑은 얼마나 깨지기 쉬운 보잘것없는 사랑인지요! 제가
하이웨이를 달리고 있을 때 앞의 운전자가 멍청한 짓을 해서 제 목숨을 위태롭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즉시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릅니다. 요란하게 경적을 울리면서
바로 옆까지 다가가 그 못된 녀석에게 제 기분이 어떠했는지를 꼭 보여주고 맙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고약한 짓을 다하고 난 후에야 제 차 번호판에 “갈보리(CALVARY)”라고 쓴 것이
기억나지요. 그 순간 여느 때처럼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이 제 마음에 밀려오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 꼴 참 좋다! 예수님 망신 잘 시키는구나!” 하는 가책이 일어나면서, 제가 얼마나
불의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또 넘어졌고, 또 한번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기분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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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과 행위를 바탕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려하면 언제나 고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평강을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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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저의 행동에 잘못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의로움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행위와 율법이라는 개념을 의로움이라는
생각과 따로 떼어서 생각하는 것이 무척 힘듭니다. 저의 행위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지나, 사실 이 둘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저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의를 하나님께서 제게 입혀주신 것입니다. 만일 “운전하면서 절대로 화내지 말 것”
혹은 “자녀들에게 절대로 신경질 내지 말 것” 등의 규칙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저의 행위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의가 연결되어 있는 셈이
되지요. 그러나 생명을 가져다주는 율법은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버림받게
했고 사망을 불러왔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행위로
얻는 의로움이 아니라 그보다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바로
그 새로운 언약이 은혜의 복음인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
당신은 아주 나쁜 사람이라서 , 화도 잘 내고 쓸모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당신
같은 사람은 절대로 사랑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육체를 따라 살면서
완전히 실패한 자신에 대해 염증을 느끼며 하나님의 심판의 채찍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 때 갑자기 침울한 어두움을 깨고 하나님께서 놀라운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저절로 하나님에 대한 찬송이 터져 나오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진정한
찬양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찬송이 저절로 터져 나오는 것 말입니다.
찬송을 통해서 이렇게 말하게 되지요. “하나님은 내게 참 좋으신 분이라오. 나는 그 사랑을
조금도 받을 자격이 없네.”
저는 하나님과 은혜를 바탕으로 관계를 맺기 때문에 절대로, 절대로 그의 축복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저의 선함과 행위를 바탕으로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기를
기대한다면 번번이 버림받고 말 것입니다.
저는, 제 삶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저의 바깥의 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의 부족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무조건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제 삶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보면 볼수록 저는 전혀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저는
이 진리 때문에 놀라운 평강을 누리게 되었으며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의를 신뢰한다면 우리는 결코 평강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행위를 바탕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려 하는 것은 언제나
고생스럽고 불안하며 걱정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평강을 경험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이 놀라우신 은혜는 우리가 비록 추하고 자격이 없을지라도 하나님 편에서 먼저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삶을 가득히 채우게 되지요. 우리가 비록 완벽함에서 멀고 비록 실패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아무도 우리를 사랑해주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질 때에도(당연하지요. 왜냐하면 우리도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해주십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등이 서로 붙은 쌍둥이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그 쌍둥이는
“은혜와 평강” 이라는 두 단어입니다. 이들은 항상 이 순서로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쌍둥이
중에 형은 은혜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항상 은혜와 평강이라 하지 평강과 은혜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거든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말을 마차 앞에 놓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른
순서는 언제나 은혜와 평강입니다. 왜냐하면, 먼저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때까지는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평강을 알 수 없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의 깨끗하심과 같이
성경은 예수님을 믿으면 의롭게 된다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의미는 우리가
전혀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이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죄를 지었고 의의
표적을 맞추지 못했는데, 어떻게 우리를 전혀 죄를 짓지 않은 의로운 사람으로 봐 주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모습을 그대로 ? 보신다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속성에 따라서
행하셔야 하는데, 어떻게 우리를 완벽한 것처럼 대해 주실 수가 있는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죄 없으신 예수님을 우리를 위하여 죄인으로
만드셨습니다. 성경 말씀은 죄 없으신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담당시키셨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이 문자 그대로, 제 대신 제가 죄인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저를
위하여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영광스러운 은혜의 복음입니다. 우리가 율법으로 얻을 수 있는 어떤 의보다도
훨씬 월등한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섬세하게
율법을 지키려 노력해도 언제나 부족하고 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는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입혀주신 것으로 온전한 의인 것입니다. 아무
것도 더할 필요도 없고 더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절대적으로 온전한 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저는 완벽합니다. 그 말은
제가 완벽한 사람이라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이 완벽하신 분이시고, 저는 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예수님의 의가 저의 의로 넘어 왔다는 뜻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부어주신 은혜를 아는 지식과, 제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사랑의
관계를 생각할 때에 어떻게 하나님께 다 감사하고 찬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은 변하지도 않으며, 제가 우울할 때에도, 잘못했을 때에도, 화가 났을 때에도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꾸준하시고 항상 함께 하시는 사랑의 관계는 언제나 흘러 넘치며, 제가 잘할
때도 사랑해 주시고 잘못할 때도 사랑해 주십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은혜에 의한 복음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인지요!
은혜 3
천국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절대로 구원받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종종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받는 것을
자주 보셨는지요?
갈보리채플에서는, 오랫동안 구원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뜻밖에 복도에서 만나 깜짝
놀라 서로 쳐다보며, “너, 여기 왠 일이야?” 하고 합창을 하는 모습은 그리 보기 힘든 일이
아닙니다. 손에는 각기 성경을 들고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한 채 말입니다. 둘 다, 서로가 예수
믿고 구원받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저는 초대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사울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아마 그들은, “주님, 이 녀석을 처치해 주십시오. 그가 교회를 말살하려 합니다. 중지시켜야
합니다. 주님!” 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심판의 단칼을 내려치시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를 중지시킬 계획을
가지고 계셨지요. 하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를 정지 시키셔서 그의 삶을 180도로
돌려놓았습니다. 사울은 바울로 다시 태어났고, 그는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가장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전혀 예상 밖의 사람들을 붙들어서, 그의 은혜의 전리품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명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삶을 아름답게 변화시키실 수 있는 분으로서, 우리의
가치관을 바꿔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의 은혜가 하실 수
있는 일들을 보여 주시기 위한 본보기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쓸모 없는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은 “특별한” 사람, 강하고 똑똑하고 잘 생긴 사람만 사용하신다고
잘못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은 쓰실 곳이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요!
하나님은 “중요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보통 사람을 쓰시고,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악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6,27).
하나님은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성령의 은사를 부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할 일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주님의
손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며,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4:7에서,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라고 질문한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아무 것도 받지 않은 것처럼 어떻게 목회를 자랑하겠습니까? 말씀을 전하는 것이
제가 잘나고 똑똑해서 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제게 쓸만한 것이 있다면 모두
하나님께로서 온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사람처럼 절대로 자랑하고 뽐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아니며,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 자신의 중요성과 능력을 과대 평가한 나머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자기 자랑과 자만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은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중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여기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려고 선택하셨지만 꼭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쉽게
다른 사람을 사용하실 수 있으니까요.
제게는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제가 잘나서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것은 우리가 잘 났거나 능력이 있거나 가능성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를 택하신 것은 단지 우리를 택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그냥 선택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잘나서” 선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대개 보면 그렇지도 않은
사람들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 택하십니다. 그래서 저를 택하셨고 당신을 택하신
것입니다.
천국가면 깜짝 놀랄 일이 많을 것이라 하는데, 주위를 둘러보면서 제일 먼저 놀랄 일은
절대로 오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와 있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맨 앞 줄 영광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은 누구야?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인데. 몇몇은 갈보리채플에 다니던 사람들이네.” 라고 말하겠지요. 어떤 사람은
“그런데 척 목사님은 어디 계셔?” 하고 묻겠지요. 그러면, 맨 뒤 쪽 조무래기들 틈에 껴서,
“나 여기 있어요! 하나님 은혜 참 감사하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저도 왔어요!” 하고 소리
지르겠지요.
천국에서는 모두 동등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과 얼굴을 대하여 직접 만날 때까지는, 사도 바울은 그의 삶을
대부분 바리새인의 신분으로 살았습니다. 당신도 잘 알겠지만, 바리새인이란 율법을 엄격하게
잘 지키는 율법주의자들로서 예수님을 강하게 반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다 하는 것은 그들의 기도를 통해 잘 알 수 있는데 그 기도 중 몇 개는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아침마다 랍비들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내가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아니하고 종으로 태어나지 아니하고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틀림없이 바울도 이러한 기도를 오랫동안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28을 보면, 바울의 이러한 전통적인 기도의 세 가지 모두가
어떻게 그렇게 바뀔 수 있는지 참 흥미롭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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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는 자녀로
받아 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고귀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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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아주 평등하신 분이십니다. 그의 은혜는 어떤 사람을 어떤 사람보다 더
높이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똑같이
받아주신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똑같이 귀하게 보십니다.
이 복음은 세상 어디든 가는 곳마다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여권을 생각해 보십시오.
뉴기니에 기독교가 들어가기 전에는 여자들은 신을 숭배할 가치가 없는 존재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래서 신을 숭배하는 자리에 가까이만 가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하류
사회제도는 여인들에게 많은 두려움과 수치심을 자아내게 했고 따라서 여인들의 자살율이
극도로 높았습니다. 삶의 희망은 별로 없었고 압박만 심했습니다. 이러한 곳에 복음이
전해졌을 때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보십시오. 갑자기 남자와 여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어떤 부류에 속한 사람과는 상관없이 똑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받은 이방객이나 조금 아시는
정도로 받아주신 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는 자녀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말했습니다.(요 1:12). 이것이 복음의 고귀함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었든지,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게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놀라운 축복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자녀로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라고 한 말이 그 뜻입니다.(갈 3:26).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중요한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그의 은혜의 대상은 강한 자나 잘난 자나
똑똑한 자만이 아닙니다.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을 불러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강한
팔로 끌어안아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의 복음입니다.
은혜로 선택받았습니다.
바울은 그의 생애 전체를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의 결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갈 1:16). 이것이 바로 우리 각자의 삶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하나님이 당신 속에서 하시고 싶은 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통하여 그의 아들을
세상에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사실이지, 하나님은 당신이 잉태된 순간부터 그의 아들을 나타내시는 완벽한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 당신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라고 말한 이유입니다.(갈 1:15).
바울이 주님의 사역을 하기 오래 전에 하나님이 준비시키신 것을 보면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특별한 사람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매우 배타적인 민족인 유대인의 전통에 깊이 젖어있는 이 사람을
깨뜨리셔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과 어울리려 하지 않으며 같이 먹지도 않을뿐더러
그들의 집에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바리새인이 길을 걸어갈 때에는 혹시
옷자락이 바람에 날려 이방인에게 닿을까 걱정스러워 두루마기를 바싹 감아쥐고 걷습니다.
잘못해서 유대인이 아닌 사람에게 옷자락이 닿기라도 하면, 집에 가자마자 목욕을 하고
두루마기도 빨고 그 날은 성전에 가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부정한 자로 여기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필요한 사람은 이방인에게로 가서 그들과
같이 살면서 그들과 같이 되어야 할 사람이어야 했거든요.
이러한 특별한 일을 위해 하나님이 그의 조상들의 전통을 가장 열심히 지키는 유대인을
택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흥미로운지요!
바울은 자기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손이 처음부터 자기 삶 가운데 역사하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헬라 문화가 편만한 당시 세상에서 하나님이 택할 사람은 헬라의 문화와
철학에 능통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또, 그는 로마제국의 모든 영토를 여행하며 온갖 위험을
겪어야 할 사람이기 때문에 로마의 시민권도 있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이 로마의 시민권자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가 어떻게
시민권자로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바울에게는 절대적으로 큰 혜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에서 그를 건져내었고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행 22장과 25장 참조).
바울의 고향인 다소는 헬라 문화가 상당히 강한 지역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헬라
문화와 사상을 보통 이상으로 접할 수가 있어 그 문화와 사상의 중심에서 생활했습니다. 이는
그로 하여금 이방인에게 효과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게 했고, 그는 헬라 사상의 뉘앙스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모든 배경이 그로 하여금 헬라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순수한 골수분자 유대인이 필요하셨습니다. 바울이 12살 때 그의
부모는 당시 가장 유명한 유대인 석학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하도록 예루살렘으로
보냈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히브리 문화와 전통에 흠뻑 젖으며, 탈무드와 히브리 성경을
마스터하게 됩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해 극단적으로 열심을 갖게 되었고, 최선을 다해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같은 시대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가
되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니라.” 라고 했습니다.(빌
3:4).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어부나 세리의 배경을 가진 자들로서 바울처럼 철저하게
율법을 이해하도록 준비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은혜를 나타내시는 그 날이 마침내 이르렀을 때,
사도는 구약의 성경말씀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바로 연관 지어 생각할 수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관점에서 메시야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야말로 은혜의 복음을
전하기에 가장 완벽한 선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 의로워지려고 가장 발버둥 친
사람이라면 바울보다 더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말하던 사람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나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6). 그는 율법으로 의로워지려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 아는 영광스러운 지식에 접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자기에게 입혀진 새로운 의를 기쁨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변한 것이 없습니다.
바울의 스토리는 매우 드라마틱합니다마는, 이러한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그에게나 다른
신약에 나오는 성도들에게만 독특한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마십시오. 예를 들어서 제 삶만
돌아보아도, 하나님께서 제가 할 일을 위해, 저의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저를 구별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뒤돌아보면, 당시에는 특별한 일로 여겨지지 않던 일들이 특별한 일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제 삶 가운데 때때로 일어나면서 목적을 위해 다듬어지며 목표를
결정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됩니다. 당시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전혀 가까이 계신 것을 깨닫지 못했으나, 이 모든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신
것을 지난 일을 뒤돌아보면서 알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를 그냥 내버려두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를 위해 예비하신 일들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해서, 제 삶의
온갖 어려운 상황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을 지금은 보게 됩니다. 아주 중요한 순간에
어려운 결정을 한 것이 하나님에 의해 전적으로 인도된 것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깨닫게 될 때
얼마나 흥분이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끝까지 나를 구하신 주님이 나를 인도하시네” 하고 찬송을 부릅니다. 저는
다 지나고 나서야 하나님의 손길이 처음부터 제 삶에 함께 하신 것을 간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저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초자연적으로 간섭하기도 하셨고,
하나님께서 제게 시키실 특별한 일을 위해 저를 알맞은 사람으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몇 주 전에 저의 사촌이 뇌막염으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누나도 이
몹쓸 병에 걸렸습니다. 하루는 심한 경련을 일으키는데 너무 심해서 우리 가족은 모두 그녀가
죽은 줄 알았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쏜살같이 아이를 안고 아파트를 나가 동네에 있는 교회의
목사님 사택으로 달려가서 카펫 위에 숨이 끊어진 누나의 시체를 눕혀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과 저희 어머니는 누나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눈은 이미
뒤집어졌고, 턱은 뻣뻣해 졌고, 맥박도 희미했습니다.
얼마 후 저의 아버지가 당구장에서 집으로 돌아오셨을 때 간호원이 기다리고 있다가,
“빨리 당신 아내에게 가보세요. 당신의 딸이 죽어가고 있었는데, 아마 지금쯤은 숨이
끊어졌을 것입니다.” 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목사님을 때려눕히고 누나를
병원으로 데려 가려고 사택으로 달려갔습니다. 의사가 필요한 때에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사택에 당도한 아버지는
누나의 상태를 보고 이미 늦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어머니에게, “자, 눈을 이 아이에게서 떼시고 주님께로 돌리십시오. 주님만을
바라보십시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저를 임신하고 있던 어머니는 얼굴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주님, 제 딸을 살려주시면 제 삶을 주님께 바치겠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무슨
일이든지 시키시는 대로 다하겠습니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때 누나가 즉시로 살아나서
울기 시작하며 일어나 앉아 주위를 둘러보며 집에 가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데리고 왔고 완전히 나았습니다.
그 일 몇 주 후에 제가 태어났습니다 . 의사 선생님이 “아들입니다.” 하고 말하자,
저의 아버지는 병원 복도를 돌아다니시며 “할렐루야! 아들입니다!”를 외쳤습니다. 그 때
우리 어머니는, “주님, 감사합니다. 저의 딸을 돌려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전에 제가 주님께
드린 서원을 이 아들을 통해서 갚겠습니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저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 마음속에 심어주셨습니다.
마당에서 그네를 타고 있는 동안도 성경구절을 외우도록 도와주시곤 했습니다. 제가 네 살이
되었을 때는 성경을 가지고 책 읽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발음을 못하는
단어도 스펠은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어머니는 제가 어렸을 때, 모르는 알파벳 글자를
설명하려고 애쓰던 저의 모습을 얘기해 주시면서 웃으셨는데, 제가 “V" 자를 설명할 때는
뒤집어진 텐트, 이런 식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인내와 사랑을 가지고 저를 기르시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일곱 살이 되었을 때는, 성경의 모든 책의 이름들을 말할 수 있고 쓸 수 있게
되었지요. 잠자기 전 침대 머리맡에서 저는 동화를 들어본 적이 없고 성경 이야기만을 듣고
자랐습니다. 골디락과 곰 세 마리 대신에 다윗과 모세의 이야기를 들었지요. 저의 어머니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아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거인도 대적할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제 일생에 있어서 하나님을 모르는 적이 없었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구원 간증 같은 것이 없습니다. 공개적으로 저의 신앙을 고백하고
침례를 받은 적은 있지만,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구별되었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신경외과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필요한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저의 포부를 말씀 드릴 때마다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태어날 때에 제 삶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하신 것을 제게 말씀해 주신 적이 없습니다.
제가 틴에이저 시절에 여름 캠프에서 하나님이 제 삶을 변화시켜 주셨고, 거기서 저는
주님이 온전히 저의 삶의 주인이 되셔서 다스려주시도록 헌신하고 결단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제 마음을 감동하시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육체적인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는데, 육체적인 일을 돕는 것은 일시적이고 영적인 일을 돕는 것은 영원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저를 사람의 영혼을 치료하는 목사로 부르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그녀의 아들이 의사가 되지 않겠다고 하면 굉장히 실망하실 줄 알았고,
저의 삶의 장래에 대해 방향을 바꾼 얘기를 들으면 저의 가족들이 어깨가 축 늘어져서 실쭉한
얼굴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하나님께서 저를 목사로 부르셔서
성경대학에 가기로 하였다고 말씀드렸을 때, 환한 미소로, “잘했다. 아들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시거나 속상해 하시지 않는 것이 참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대학에 입학을 하고 모든 훈련과정을 마치고 케이와 결혼한 후 함께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누나의 갑작스런 죽음에 관한
이야기와, 그 때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저를 통하여 갚기로 하나님께 약속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해주셨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경건한 분 중에
한 분이셨고, 성령이 충만하여 모범적인 신실한 믿음의 삶을 사신 분이셨습니다. 지금, 제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이 저를 위하여 마음에 품고 계시던 사역을 위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저를 구별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삶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당신이 믿음으로 삶의 최종 목적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손안에 맡겨드렸다면 , 당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환경들을
다듬으셔서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만들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아들을 나타내도록
역사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손이 당신 위에 있고, 그 손은 당신이
태어날 때부터 함께 하시는 손입니다.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은혜로 우리 위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라고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갈 1:15). 저는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구원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천국에 갈 자격도 없습니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아랫목에 가야 마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저에게나 우리 모두에게 주신 것은 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위해 은혜로 계획하시고 우리 각자에게 할 일을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을 한 시간만에 다 이루는가
하면, 우리 같은 다른 사람들은 천천히 터벅터벅 전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종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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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통해서 이루실
특별한 일을 가지고 계신데,
우리는 그 일을 위해서
준비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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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한 질문을 기억하십니까?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 4:14). 에스더의 삶을 통한 하나님의 주요한 목적은
며칠만에 다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녀를 일으키셔서 바사 궁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가 되게 하신 후, 그녀의 간청을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구원하시는데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위하여 특별한 일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 모두는 그 일을 위하여
준비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은 우리의 날이 이를 때까지 이 준비를
위해 우리 삶의 대부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게 될 것이고,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우리를 거기에 두시는 이유가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손을 우리의 삶 위에 얹고 계시며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 위에 얹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려운 환난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고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목적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인격과 자질을 우리 안에 만들어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포이에마” 혹은 작품입니다.(엡 2:10). 하나님은 그의 왕국에서 그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을 이룰 수 있도록, 그의 은혜로 우리 각 사람 안에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함정을 조심하십시오.
사탄은 하나님의 손이 우리 위에 있는 줄 잘 알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이용해 용기를 잃게 하려듭니다. 마귀는 종종 우리로 하여금 불합리한 일을 하도록
부추기는데, 하나님이 우리 뒤에 계시니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우리의 능력을
넘어 완벽한 수준에 이르도록 애를 쓰며 온 노력을 경주하게 만들지요.
사탄이 이렇게 우리를 괴롭히고 무거운 짐을 지울 때, 많은 경우 우리는 절망에 빠지게
되고, 용기를 잃고 포기하기를 원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정해주신 것이
아닌 어떤 목표를 이루려하면 우리는 언제나 힘들고 어려울 수밖에 없고, 그 결과는 비극으로
끝나게 되지요.
신체장애자인 한 소년이 우리 교회에 나오고 있었습니다. 매번 예배가 끝날 때마다 이
소년은 제게로 찾아와 대화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말하는데 있어서 무척 장애를 느꼈지만
자기 자신을 표현하려고 애쓰는 그를 볼 때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의
지능에 놀랐습니다. 질문은 항상 좋은 질문이었고 내용이 의미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그는 큰 문제아였습니다. 하루는 교회 앞 복잡한 길에서, 달리는 자동차
앞으로 자신의 몸을 던지려 했습니다. 우리는 그를 교회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와, 같이
기도하고 기관에 넘겼는데, 그의 안전을 위하여 의사의 진찰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병원으로 실려갔고 거기서 진찰을 받은 후 집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는 견딜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목사님, 담배가
끊어지지 않습니다.”하면서 제게 호소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걱정하지 말라면서,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엉터리 크리스천은 아니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 교회에 나왔을
때, 하나님이 자기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고 말하면서, 하나님 앞에 다시 한번 진실한 헌신의
결단을 하였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여전히 불안감에 떨고 있는 듯
하였습니다. 사탄이 그의 육체의 연약함에 관해 정죄하는 것과, 자신의 몸이 장애자인 것에
대한 심한 비관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 얼마 후, 결국 무거운 죄책감과 좌절감은 젊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고 말았습니다.
고층 호텔 발코니에서 뛰어내려 죽음을 택하고 말았는데, 모든 것이, 원수로 하여금 자기의
연약함을 이용해 자신을 좌절시키도록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그 젊은 청년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 주시는 이상의 일은 할 수도 없고, 그 이상의
사람은 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 알았더라면! 우리는 아무도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을 떠나서는 아무 가치에도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속 태울
필요도 없고, 우리 자신을 정죄할 필요도 없고, 우리의 실수와 잘못을 계속 꾸짖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고 인정하고, 겸손하게 “주님, 저의 연약함을 잘
압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제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주님께 드리오니 주님이
맡아 주시기를 원합니다.” 라고 말씀드리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누구든지 환영받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아주 아름다운 곳입니다. 모든 지체가 다 중요하고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모두 입만 있다면 얼마나 쓸모 없고 이상한 몸일까요! 하나님은 저를 지체 중에서
입으로 만들어 주셨지만 몸 전체가 입일 수는 없습니다. 몸의 많은 지체가 입보다도 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각기 다른 환경과 배경을 가지고도
하나가 되어서 함께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그 본래의 기능과 역할을 다하는 것을 볼 때에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당신이 어디로부터 왔든, 지금 어디에 있든, 그리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당신 속에 그의 아들을 나타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삶을 통해, 당신의
행동을 통해, 당신의 자세를 통해, 당신의 응답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밝게 빛나게
하십시오.
전에 우리는 교회에서 이런 찬송을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아름다움이 내 안에서
나타나게 하소서. 주님의 신실하심과 정결하심이 내 안에 있게 하소서. 오! 주님! 당신의
성령으로 나의 성품을 새롭게 하소서. 예수님의 아름다움이 내 안에서 보일 때까지.” 이
찬송은 아름다운 합창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으로
소원하는 일입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라고 다윗이 기도한 것처럼 말입니다.(시편 17:15).
우리 모두는, 잘 났든지 못났든지, 강하든지 약하든지, 똑똑하든지 미련하든지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하나님의 은혜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주의 형상 안에서 깨는 그 영광스러운 날에 다 함께 만족할 것입니다.
그 이상 더 무엇으로 만족하겠습니까?
은혜 4
은혜의 그림
은혜를 추상적으로 설명하기도 힘든 일이지만, 은혜를 어떻게 생긴 것이라고 그림을
그려서 묘사하는 일도 참 힘든 일입니다. “한 장의 그림으로 설명하는 것이 천 마디 말로
하는 것보다 낫다” 는 말에 따라, 그림을 그린다면 은혜는 어떤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요?
전체 성경에서 은혜를 가장 잘 설명한 그림은, 신약성경에서도 여러 군데 인용한
구약의 한 인물인 아브라함의 그림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보편적으로 모든 믿는 사람들의
믿음의 조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는 은혜가 무엇이며 은혜가 무슨 일을 하는가에
대한 정확한 그림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대표적인
사람의 본보기로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는 로마서 4:3에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또 갈라디아서 3:6,7에서도 똑같은 본보기를 사용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
창세기 15장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래는 아기를 가질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자손을 통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전혀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창세기 15:6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해는 거듭 흘러가는데 아기는 태어나지 않자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실 것인지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라는 자기 스스로
해결해보려고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여종인 하갈과 동침하여 아기를 갖도록 권합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기를 자기들의 친자식처럼 키워볼 생각이었습니다.(대리모 출산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현대에 개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흥미로운지요!) 하갈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자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13살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반복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와의 사이에 아기를 주신다는 것을
믿기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에게 생각은 좋으시지만 이스마엘이 이미
있으니 이 이스마엘이나 축복해 주시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사라를 통해서 자식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렇게 믿지 못하던 아브라함을
성경이 “믿는 모든 자의 조상”(롬 4:11)이라 부른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격려가 되는지요!
여호와께서 사라를 통하여 자식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반복하시자,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속으로 웃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서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고 사라가 아기를
낳았을 때, 이름을 이삭이라 지었는데, 그 뜻은 “웃음” 이란 의미입니다.
이삭이 자라면서 모든 관심이 약속의 아들인 이 아이에게 쏠리게 되자, 그의 형
이스마엘이 시기하게 되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 연회를 배설한 자리에서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합니다. 사라가 이스마엘의 짓궂은 태도를 보았을 때, 아브라함에게 그와 그 어머니를
내어쫓으라고 합니다. 그녀는 이스마엘이 그의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깊이 근심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돌봐
줄테니 걱정 말고 사라가 이른 말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라의 말대로
여종과 그녀의 아들을 내보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림을 그려봅시다.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의를 얻는 일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설명을
뒷받침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가리켰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자기의 설명의 요점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비유를 담고있다고 말했습니다. 바울 시대의 랍비들은 전통적으로
모든 성경말씀에 대해 기본적으로 두 가지 해석을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페샷이라고 불렀는데,
본문의 평범하고 분명한 의미를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레메즈로서 각 문장의 숨은
뜻을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랍비들은 거기다가 두 가지 더 해석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데라쉬는 상징적으로만 해석하지 문자적으로는 해석하지 않는 것이며, 쏘드(“비밀”)는
상징적인 의미로 치우친 해석이었습니다. 이러한 복잡한 해석 방법과 학파간에 서로 상충하는
문제점은 성경의 멧세지에 대해 일반 평신도들에게 혼동과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약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저는 성경말씀에 대한 최선의 조명과 해석 방법은 본문의 평범하고 분명한 의미를 그대로
해석하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싶으신 바를 그대로 정확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공상적인 영적 해석을 시도함으로 성경의 정확한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나곤 합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너무 영적인 해석을 시도하다보면,
천진난만한 유아들의 동요인 허버드 노파 “ ”의 가사를 가지고도 굉장한 설교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노파가 그녀의 가련한 강아지에게 먹이를 주려고 찬장에 갔을 때, 빈 그릇
밖에 없었다는 내용으로부터 영적으로 심오한 의미를 찾아내려 시도하는 것이지요. 찬장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한 노파를 삶의 황폐와 좌절과 허무의 늪에 빠진 비참한 인생으로 그리며,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이 바닥나는 그날은 우리에게 얼마나 비극적인 날인가!” 라는 심오한
영적인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이지요.
약간의 상상만 동원하면 조그마한 흙 두덩으로부터 태산과 같은 교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성경 자체가 비유의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면 비유적인
해석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성경말씀은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아브라함의
삶으로부터 믿을만한 비유적인 의미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록된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갈라디아서
4:22-31).
심오한 영적인 의미
바울은 우리에게 이 사건이 단순히 역사적인 면에서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행위로 얻으려는 사람들의 무모함에 대해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하갈과 그의 아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는 사람들의 모형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자 낙심하고 자기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루어보려고 했을 때 비탄과 좌절만 불러왔을 뿐입니다. 이스마엘은 육체의 노력의
소산이므로 인간의 노력으로 축복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모형입니다. 한편으로, 이삭은 약속의
자식이므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얻으려는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던 것처럼 오늘날도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려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조롱합니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의 압박 작전은 두 형제
사이의 갈등에서 미리 예측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가 살던
시대에는 의를 위하여 율법에 집착하는 자는 축출 당해야 했습니다. 주후 70년에 디도 장군이
이끄는 로마의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될 때 이 상징이 이루어졌습니다. 믿는 남녀들을
핍박한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귀양에 보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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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시는 자유함과 약속과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는
모든 사람에게 속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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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의 비극적인 종말을 믿음의 자녀들의 즐거운 장래와 대조합니다.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27절) 라고
했습니다. 신자들이 그 믿음의 결과로 왕국으로 들어올 때에, 그 숫자가 그들의 행위로
하나님께 가려고 노력한 모든 사람들의 숫자보다도 훨씬 많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여기서 비유는 핵심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31절).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상속받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의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게
되리라는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씨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함과 약속과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는 모든 사람에게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끊임없이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찬송가의 가사가 너무 잘 말했습니다. “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 피와 같이 붉은 죄 눈
같이 희겠네.”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설 때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 때문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위대한 능력을 보면서, 우리는 아무도 “내 자신의
신실함과 결단의 노력으로 이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우리는 머리를 숙이고 흘러 넘치는 기쁨을 안고 “예수님, 감사합니다. 주님이 다 하셨어요!
주님이 저를 구원해주실 줄 알았어요. 저의 선한 행위로는 절대로 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주님, 감사합니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중요한 질문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질문은, 언제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선포하신 것입니까? 할례 받은 후였습니까 아니면 할례 받기 전이었습니까? 갈라디아의 거짓
선생들은 “할례 받지 않으면 의로워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의식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에 의롭다고 하신 것은 언제입니까? 할례
의식의 규례를 받기 전인가요 후인가요? 전이었지 후가 아닙니다! 이 의식에 대해 아무 것도
알기 전에 아브라함은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가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은 창세기
15장에 나오는데, 할례의 의식은 두 장이 더 지날 때까지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순간 아브라함은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순간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일이나 할 일을 근거로 의롭다 하신 것이 아니라,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천국의 주인이시고 하나님의 , 아들이시고, 나의 개인적인 구주이시므로
저는 예수님을 신뢰합니다. 제가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은 제게 “의롭다!”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8,29). 당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당신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믿음은 무엇입니까?
가만히 앉아만 있는 크리스천들이 툭툭 털고 일어나서 움직이도록 엉덩이를 차기 위해
쓴 서신에서, 야고보도 믿음의 모형으로 아브라함을 사용한 것은 흥미 있는 일입니다. 그의
특별한 관심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약 2:26).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어떤 일을 행하게 했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인정하셨다고 말합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 2: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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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행함은 우리의 믿음과 일치하여야 합니다.
믿음은 단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행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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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말로 하면, 믿음은 말하는 것 이상이라는 뜻입니다. 참된 믿음에는 합당한 행함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제가 어떤 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저의 행동도 제가 믿는 것과 일치할
것입니다. 제가 어떤 것을 믿는다고 열정적으로 주장할지라도 저의 행동들이 제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저의 믿음은 의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이번 월요일에 어마어마한 증권폭락이 있을 것이고, 화폐는 아무
가치가 없이 휴지조각이 될 것이고, 은행은 다 문을 닫고 현금을 인출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즉시로 은행에 가서 저의 모든 예금을 인출하지 않고
있다면, 제가 믿는다고 말한 사실을 제가 진정으로 믿고 있지는 않은 것이라고 당신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믿음과 일치하여야 하며,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 믿음은
의문을 갖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으로 난 자라야 그의 씨라 칭함을 받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그의 씨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신
약속을 믿었고 (그 때까지 이삭에게는 아직 자식이 없었음.), 또, 이삭을 제물로 바침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칼을 내리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히
참조 아브라함은 11:19 ). 그만큼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얼마나 믿습니까? 수년 전에 추운 겨울 눈보라 속에서 기름이
떨어지자 이웃에게 가서 기름을 좀 꾸려했던 사람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웃과의 사이에는
추위로 꽁꽁 얼어붙은 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한 두께로 얼어붙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얼음 위에 엎드려 기면서, 손을 뻗어 손가락 등으로 두드려보고 얼음의 두께가
안전하면 조금씩 기어가고, 또 두드려보고 안전하면 조금씩 기어나가곤 했습니다. 곧 손가락
등에서는 피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강을 건너 거의 건너편 둑에 다다랐을 때, 뒤에서
우르릉 요란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뒤돌아보니까 한 떼의 말이 우뢰와 같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얼어붙은 강을 단숨에 건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인지 두드려 보고 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조심해서 두드리며 기어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겠다고
약속하신 것 잘 알아요. 그렇지만 주님이 정말 그렇게 해 주실지 걱정스럽네요. 지금 이 돈을
보내야 할 때가 됐는데, 주님이 나를 지켜주실 수 있는지 두드려봐야겠어요. 주님이 약속을 꼭
지켜주시기를 바라고 있어요!”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약속을 꼭 지키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배워서 잘 알고있는 사람들이지요. 한 때는 그들도
얼음을 두드리는 사람들이었겠지요.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결국에는 그들의 믿음이 강하여졌고 믿음대로 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참된 믿음대로 행해야 하며, 우리의 참된 믿음은
우리의 삶에 나타나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그의 행함에 나타났습니다. 거기 그냥 앉아서 하나님과 논쟁하고
있었더라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 이삭을
바칠 수 없습니다.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 주님? 얘는 제 아들입니다. 이 아들을
통해서 천하만민이 복을 받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주님,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만 한 것 가지고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말만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은 행위가 따라야 합니다. 당신이 하는 일에 믿음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바울이
인용했던 구약의 말씀을 똑같이 인용하였습니다. 당신이 어떤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믿음대로 살지 않으면, 그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믿는다고 말하는 그
믿음과 조화되는 행함 속에 스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는데, 그
믿음과 조화되는 그의 행함 속에서 그의 믿음이 스스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한 일 때문에 의로워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믿음 때문에 의로워진
것입니다. 그의 행함은 그의 믿음과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믿음 때문에 그를 의롭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이제 그림이 그려졌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물론, 우리의 행함이 항상 완벽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영적인 전쟁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났지만 여전히 , 이 낡고 부패한 집, 우리 육체 안에 살고 있습니다.
저의 부패한 집은 제게 많은 것을 강하게 요구합니다. 어떤 때는 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으려고 저의 육체와 싸우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어떤 때는 저의 행동과 행함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반대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상황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걸려서 넘어지고
자빠지고 하지만 그 자리에 엎드려 있지는 않습니다. 성령께서 저를 그 자리에 엎드려 있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얼른 저를 일으켜 다시 세워주십니다. 제가 걸려서 넘어지거나 자빠질
때, 하나님이 생명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당신의 자녀에게
걸음마를 가르칠 때, 넘어진다고 해서, “나가! 이 못난 녀석! 그렇게 넘어지는 아이는 내
자식이 아니야! 필요 없어, 당장 나가!” 하고 야단치지 않잖아요? 오히려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며, “괜찮아 괜찮아! 다시 한 번 해보렴. 아빠에게 와! 그래! 그래! 잘하네!”
하겠지요. 몇 번이고 다시 해보라고 격려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와 함께 걸을 수 있게 될 때까지
도와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넘어지고 자빠질 때에 우리를 쫓아내지 않으신다는 것이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넘어졌으니까
이제는 더 이상 내 자식이 아니야!” 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일으켜
세워주시면서, “괜찮아, 다시 한 번 해보렴!” 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난 자는 죄 가운데 살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죄를 지으며 살 수
없단 말이지요. 우리가 만약 그렇다면 말하는대로 믿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행함이 그의 믿음을 따랐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아브라함이 한 번 그의 삶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나서
한번도 믿음이 흔들린 적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뜻은 아닙니다. 성경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위대한 믿음으로 선언한 창세기 15:6의 앞뒤에는 그가 전혀 믿음이 없이
행한 아주 큰 두 가지 사건들을 쎈드위치를 싸듯이 앞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과
20장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안전하게 지켜주시도록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려고 책략을 꾸미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역시
얼음판을 두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일생 내내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때때로
우리 모두처럼 믿음이 전혀 없이 행했지만, 그 안에 주저앉아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성경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믿음으로 살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여긴 것은 그의 행함 때문이 아니며,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순종의 삶과 올바른 삶을
살게 합니다마는, 이러한 올바른 행위와 순종의 삶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의를 얻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믿음으로 우리에게 나누어진 것일 따름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 덕분에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언약의
축복은 제것이기도 합니다.
이 은혜의 복음은 오래 전 아브라함의 삶에서 선포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은혜가
무엇이고 어떤 일을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훌륭한 그림입니다. 루블 박물관이나 프라도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걸려있는 어떤 그림보다도 훨씬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그린 멋진 그림이며, 그
그림이 훌륭한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 “축복 받은 자” 라고 이마에 새겨진 우리가 그 그림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은혜 5
한 번에 한 걸음씩
수년 전, 친한 친구가 식품점들을 돌며 배달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매일 배달을
도는 배달처 한 마켙 주인의 아내를 만나서,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시덕거리던 중 오래지
않아 자주 만나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곧 사랑에 빠지게
되고 관계가 깊어져서 가족들을 떠나 동거에 들어갔습니다. 우리와 아주 친한 친구인 그의
아내가 우리에게 전화를 해서 기도를 부탁한 것이 그 때였습니다.
그 동안 그들이 나가던 교회의 목사님이 그 친구가 동거하는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목사님은 영구차에 실려 가는 그의 관을 환상으로 보았다고 하면서 그 여자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아내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면 억지로 끌어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적인 시도는 오히려 그를 더 화나게 만들었고 이처럼 부도덕한 일에 더욱 마음을 굳히게
만들고 말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내는 저에게 남편을 한번 만나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러기로 하고 친구를 만났는데, 그는 아주 좋지 않은 동네에서 누추한 차고를
개조한 아파트에 살고 있었습니다. 비좁고 너저분한 그의 집을 보았을 때 저는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가 생각하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의 아내와 딸들은 아주 훌륭한
사람들이었고 그의 집은 좋은 동네에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빵 한 조각에 영혼을 팔아먹은
꼴이었습니다. 문을 열어주는 그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는 저를 공손하게
맞이해 들어와 앉으라고 했습니다. 저의 친구가 새로 시작한 생활을 둘러보면서, 오! 하나님!
이 친구는 어떻게 이토록 적은 것을 위해 그토록 많은 것을 포기할 수 있단 말입니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 친구를 사랑했기 때문에 저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가 빠져있는 광경은 그
광경을 보는 저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감정을 억누를 길 없어
창피도 무릅쓰고 막 울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프고 슬퍼서 그의 동거녀가 부엌에서
들어와 앉았을 때에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우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저는 너무
창피해서, “미안하네. 자네하고 말 좀 하고 싶어서 왔는데, 지금은 아무 말도 못 하겠어.”
라고 말하고는 일어나서 나왔는데, 집으로 가면서 제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한 친구의 아내가 남편을 만나 화해가 되도록 잘 설득해달라고 신신당부하면서 보냈는데,
가서 울다가만 왔으니 말입니다.
다음날 아침 저는 전화를 받고 전해주는 소식에 깜짝 놀랐습니다. 제 친구가 제가
방문했던 몇 시간 후 아내와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망가진 관계를 기적적으로 치료하시기 위해 무엇을 사용하셨습니까?
“나는 그대보다 거룩하다.”는 권위적인 자세는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제
속에 겸손과 상한 마음을 주셔서 그 마음이 유쾌한 화해를 이끌어낸 것입니다. 저는 크게
낭패한 줄로 생각했지만, 우리가 성령 안에서 행하기로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지 않았던 깜짝 놀랄 일로 강하게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놀랍게도 매우 실제적인 일입니다. 머리에 거룩한
헤일로우를 두르고 만면에 천사의 미소를 띄고 두둥실 떠다니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인 마음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이 세상일들에 관해 사람들을 대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침투적인 세상문화에 대해 너무 민감하게 대하다보니 친구들과 친척들과
이웃들과 접촉할 능력을 잃기도 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우리를 현실 밖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 살면서 최대의 효과를 누리게 해줍니다.
관계부터 먼저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이것이 얼마나 진리인지요!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이 굉장히 실제적인
일이라고 해서, 행동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마음속에 명심해야 합니다.
관계가 행동보다 항상 앞서야 합니다.
에베소서에서 이 위대한 진리를 볼 수 있는데, 앞의 세 장은 모두 관계에 대해서
말합니다. 4장에 들어가서야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 고 말합니다. 관계가 먼저입니다. 왜냐하면 관계가
그 뒤를 따르는 모든 것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올바른 관계를 먼저 세우지 않고, 행함부터 하려 한다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걸으려면 먼저 균형이 잡혀야 합니다. 이것은 물질계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첫
걸음마를 하기 전에 균형을 잡고 앉는 것부터 배워야합니다. 그 다음에 서는 것을 익혀야
하고, 그 다음에 비틀거리며 몇 발자국 떼다가, 그 모든 과정을 지나고 나서야 걸을 수 있게
되지 않습니까?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앉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기 시작할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을 행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분명한 과정이 여기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균형 잡힌
관계를 가져야 하고, 그 다음에 행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한 때 우리는 모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고,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들을 변화시켜
주셔서 그 결과로 주님과 즐거운 사귐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지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게 해드림으로 주님과의 깊은 사귐을 계속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말하는 대로 행하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졌다고 말하면서 크리스천들이 쓰는 온갖 거룩한 말들과 구호는
다 쓰고 다니면서, 그들의 생활을 보면 전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말하는 대로 행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생활이
부르심을 받은 자답게, 축복을 받은 자답게,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가졌다고 고백하는
자답게 합당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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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은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살 것인가
육체의 소욕을 좇아 살 것인가
결정하여야 하는 전쟁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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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어떻게 이렇게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세상의 풍속과 유혹에 떠내려가지
않고 살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바울은 갈라디아서 5:16에서 해답을 줍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행하라”로 번역된 헬라어는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독특한 성품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독한 구두쇠로 평판이 높으면, 그 사람은 욕심으로
“행하는” 사람이라 일컬어집니다. 또, 어떤 사람은 걱정해주고 도와주는 독특한 성품을
가졌으면, 그 사람은 친절하게 “행하는” 사람으로 일컬어집니다.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뜻은 성령이 우리의 삶을 온전히 다스리시도록 해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성령을 좇아 살 것인가 아니면 육체의 소욕을 좇아 살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느 쪽이 우리를 다스리도록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전쟁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만드실 때 꼭 컴퓨터처럼 만드셨다는 것을 기억하면 도움이
됩니다. 컴퓨터는 그 안에 프로그램 되어있는 것만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날마다 프로그램이 되고 있습니다. 육체로부터 입력이 되면 우리의 삶이 육체를
따른 특성을 갖게 될 것이고, 성령의 일들로 프로그램을 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삶이 성령의
일을 우선적으로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첫 번 째 우선이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면서도 성령충만한 삶을 산다고
뻔뻔스럽게 고백하는 올무에 빠지기가 얼마나 쉬운지요! 정말이지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우리를 지배하려는 힘이 막강한 것이 우리의 삶에서 당면하는 가장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헤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어떻게 자유함을 얻을 수
있을까요?
간단하면서도 의미심장한 해답은 바로 이것입니다. 육체의 소욕과 싸울 것이 아니라,
영의 소욕을 강하게 하라! 어두움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전등을 켜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성에 영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의 양쪽이 다 있음을
먼저 인정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좇아 . 행하기를 원하면 영적인 쪽의 사람을 잘 먹여야
합니다. 우리의 본성 중 육체적인 쪽의 사람을 잘 먹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제 몸을 먹이는 것을 잊어버리면, 먹여야 된다고 알려주는 것을 포착하기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전에 누가 제게 얘기해주기를 사흘을 굶으면 시장기가 사라진다고 말했는데, 저는
정반대였습니다. 금식 삼일이 지나니까 제 마음은 상상할 수 있는 요리 중 가장 맛있는 요리를
꿈꾸기에 바빴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의 몸이 자기의 필요를 돌보라는 것을 강하게 일깨워주는
데에 쓰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몸을 먹이게 되지요. 또, 신체적으로 튼튼히
자라도록 운동도 하고 비타민도 먹고 하지요.
영적으로 강건해지는 데에도 비슷한 양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규칙적으로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합니다.
말씀에 시간을 쓰십시오.
종종 우리의 생활에서, 말씀을 먹는 것이 가장 나중에 하는 일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우리는,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시간을 쓰는 것이 필요하지요. 그러나
지금은 시간이 없는 것 같아요.” 라고 말합니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영적인 금식을 하는
셈이지요. 종종 우리의 영적인 쪽의 사람은 불규칙하게 발작적으로 균형을 잃고 먹게 됩니다.
“성경을 딱 열어 젖혔을 때 어떤 말씀이 눈에 들어오나 보자.” 식으로 성경을 읽다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이고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것을 게을리 하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꾸준한 성경공부를 해나가는 습관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부분은
충실하게 먹이고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일은 소홀히 하게 되고 말지요. 그 결과로 영적인
사람은 쇄약해지고 육체의 사람은 막강해지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이 강건해지기를 원한다면, 영으로 심는 길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육으로
심고도 어떻게든 영적 수확을 거두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성령을 좇아
행하기 위해서는 영을 먹이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중점을 두고, 더욱
더 많은 시간을 말씀에 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욥은, “내가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라고 말했습니다.(욥 23:12).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필수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좇아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취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기도에 큰 비중을 두는 것이 성령을 좇아 사는 삶의 기쁨을 누리는데 있어서 또 하나의
필수적인 일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하는 감격을 누리노라면 영적으로 강건해지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 가운데서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더욱 더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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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우리의 지속적인 동반자로
모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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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깨닫는 것은 더욱 완전하고 높은 세상의 안목을 갖게 해줍니다.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하심을 더욱 더 깨닫는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과
논쟁한 일을 사도행전 17장에서 얘기하면서, “우리가 그(하나님)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라고 선언했습니다.(28절).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우리 삶은 놀랍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잊어버리면 영적 재해를 불러들이게 됩니다. 우리의 의식에서
하나님이 멀어지면 질수록,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먹이고 즐겁게 하는 것들에게 강하게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걸려서 넘어질 때에 외적으로 나타나는 많은 요인으로
우리의 행동을 설명하려 할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의식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의 요령은 단순히,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우리의 지속적인 동반자로 모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지속적으로 의식하면서 성령을 좇아 행하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더 이상 크리스천답게 살라고 잔소리하거나 설교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 판에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생각과 하나님의 사랑을 새기면 우리의 삶은
혁명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괴로움이 기쁨으로
성령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도록 해드리면, 세상에 속한 모든 일을 생각하는
방법까지도 철저히 바뀝니다. 바깥 상황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 있을지라도, 우리의 자세가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어, 과거에는 우리를 괴롭히던 일들 안에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아주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대개가 고생스러운 일은
가급적이면 피해보자는 생각들을 해보지만, 하기 싫은 일이라고 해서 하지 않으면 오히려 더
어려운 상황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쓰레기를 내놓는 일에 질색입니다. 그러나 안 내놓으면 곧 베란다에서부터 냄새가
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내놓게 됩니다. 쓰레기를 내놓기보다는
초코렛칩 아이스크림 한 사발 먹는 것이 훨씬 즐겁지요. 그러나 제 의무를 게을리 하면 곧
쓰레기 썩는 악취가 초코렛칩 맛과 섞여서, 갑자기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 생각도
사라져버리고 마는 겁니다.
이러한 평상시의 자질구레한 집안 일에도 제게는 선택권이 있습니다. 쓰레기 내놓는
것이 얼마나 싫은지에 대해 투덜거리고만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 일을 하는 시간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간으로 생각하고 일어설 수도 있습니다. 쓰레기통을 들고 나가면서
휘파람으로 감사와 사랑의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제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쓰레기에 대해서는 적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더 많이 생각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음을 성령의 일에 맞추어 놓으면, 가장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도 유쾌한 마음으로 할 수 있고 전혀 괴롭지가 않습니다.
다른 하나의 예로 기다리는 것을 생각해봅시다 . 바빠 죽겠는데, 빨간 신호에 걸려 모든
신호들이 천천히 다 바뀌고 파란 불이 나올 때까지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고 앉아 있는 것보다
괴로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절부절 하는 것보다 저는 차라리 옆 좌석에다 성경을
가지고 다니는 습관을 가졌습니다. 빨간 신호등 앞에서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으면 성경을
펴서 읽습니다. 그 다음에 제가 당하는 일은 뒷 차에서 빵빵거리는 소리지요. 성경말씀을
읽으면 왜 그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요!
하나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배우고 나면, 성령을 좇아
행하는 일이 신나고 즐거운 일이 됩니다. 하나님의 일들에 더욱 더 초점을 맞추게 되고, 우리
속에 늘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의
사역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누가 인도하고 계십니까?
행한다는 것은 움직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걸을 때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입니다. 한 위치에서 출발해서 다른 위치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의 종착점은
우리가 택하는 방향에 달려 있습니다. 이와 흡사하게,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우리를 한
영적인 장소로부터 다른 영적인 장소로 옮겨가게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듣고 가라고
지시하시는 방향으로 행하면, 한 영적인 성숙도의 수준에서 다음 수준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어려움을 만나기도 합니다.
우리 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거나 마음이 생길 때, 이 생각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성경은 하나님이 그의 법을 우리의 마음판에 기록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렘 31:33 ; 고후 3:3 참조). 하나님이 영혼 속에 생각을 심어주시고, 영혼이
그것을 내 마음에 전달해줍니다. 보통 이것을 이상이라, 생각이라 혹은 갑작스런 감동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을 위한 그의 뜻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소원을
주십니다.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오는 소원도 있습니다. 우리 육체도
강렬한 생각과 마음을 우리 속에 불어넣을 수 있다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생각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내 육체로부터 온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 캘리포니아 벤츄라에서 설교하기 위해 운전을 하고 가던 도중, 딜렘머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그날은 화창한 날씨였는데, 지름길을 놔두고 돌아서 경치가 아름다운
퍼시픽 코스트 하이웨이로 가고싶은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파도를 바라보며 시원한 바다
바람을 쏘이면서 가는 것이 왠지 좀 사치스러운 것 같아 이것이 육체로부터 온 생각이 아닌가
걱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한번 즐기기로 마음먹고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전개되면서, 코스트 하이웨이로 가는 것이 저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말리부 근처를 달리고 있을 때, 히치하이커 두 사람이
도로변에서 태워달라고 손을 흔들며 서있었는데, 태워주고 싶은 강렬한 마음이 들어서 차를
세워 태운 후 함께 가게되었습니다. 북쪽으로 계속 여행을 하면서 이 두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된 것입니다.
이들은 벤츄라에 사는 사람들이었는데, 그 다음 날 밤, 제가 설교하는 교회에 참석하여
그 자리에서 예수를 믿는 믿음을 공중 앞에서 고백하고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후
그 교회의 독실한 신도가 되었습니다. 모든 일이 다 벌어진 후에야, 뒤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와 기가 막힌다 하나님이 “ ! ! 나를 인도하셨구나! 코스트 하이웨이로 돌아서
오고싶은 소원이 내 마음에 생긴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었구나!”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말씀하실 때는 분간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는 신비한 방법으로나 극적인 방법으로
하실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는 땅이
진동하고, 불이 번쩍번쩍하며, 머리가 쭈뼛쭈뼛 서게 될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만,
하나님은 제게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영에게 말씀해주시는데,
메시지가 제 마음속에 너무 자연스럽게 전달되기 때문에,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음성인지
즉시로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공식이나 간단한 테스트 방법을 가르쳐드리고 싶지만,
그러한 것이 있다면 저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저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육체의
음성으로부터 성령의 음성을 구별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을 가르쳐드리고 싶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은 저의
능력 밖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혼동의 안개 속에 버려 두신 것은 아닙니다.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어떤 특별한 상황가운데서 우리를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내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이미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언하신 일과 상충되는 길로는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
많은 사람들이 예수는 믿지 않으면서, 성경을 읽으려고 시도하다가 무참히 좌절하고
포기하고 마는 것을 보게됩니다. 그들은 성경말씀이 수십 억의 삶에 미친 지대한 영향력과
서양문화에 끼친 막강한 힘을 보고,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것이지요.
이 사람들은 한결같이 무지의 수렁에 빠져서 짜증만 더하게 되고, 성경의 의미는
이들을 비켜 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말하기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깨닫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다고 말하며 그 이유는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2:14 참조). 다른 한편으로 신령한 자는, 비록 다른 사람들은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성령이 진리를 우리 마음속에 나타내
풀어주시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이렇게 계속되는 성령의 계시의 사역은 아주 생생합니다. 저는 성경 한 장을 다 읽고도
아무 것도 캐내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한 장을 다 읽고 나서, “지금 내가 도대체 뭘
읽은 거야?” 하고 스스로 반문하고 있는 거지요. 저는 이 때 주로 읽기를 중단하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분명히 이 장이 무언가 제게 말씀해 주실 것이 있을 줄 믿습니다. 저의
마음이 열리게 하시고, 주님의 성령이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제게 깨달음을 주세요.” 그러고
나서 그 장을 다시 읽으면, 놀랍게도 말씀 속에서 진리가 터져 나오면서 제 마음속에 깨달음이
오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갈보리채플 코스타메사에서는, 주일 예배 때에 시편 교독을 하는데, 1부
예배 때에 읽으면서 볼 수 없었던 진리들이, 3부 예배 때에 와서는 살아나서 마음에 와 닿는
것들이 있습니다 많은 구절들 중에 한 구절이 . 특별히 강하게 제 마음을 두드리기 시작하는
거지요.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는 이러한 일들이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일들입니다.
좇아가십시오!
우리는 타락한 세상과 마귀 사탄 사이에서 육체로 거하며 영적인 성장에 많은 방해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조언하기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라고 합니다.(빌 3:14 참조).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힘쓰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아고니조마이” 이며, 이 단어에서 영어의 “몹시 고통(번민)하다” 는 뜻의 “agonize" 란
말이 온 것입니다.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령을 좇아 행하기가 그렇게 쉽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노력이 필요하고, 헌신이 필요하며 순간순간 집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 각자가 매일 매일 결정하여야 하는 선택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기로 선택할 때, 그 나타나는 결과는 시원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깊고도 꾸준한 아름다운 교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한 것 같이,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요일 1:7).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특별히 신나는 것은, 하면 할수록 더 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가깝게 동행함으로 얻어지는 평안과 만족을 개인적으로 누리면 누릴수록, 그것
없이는 살 수 없게 되는 거지요. 교제가 끊어진 우리 자신을 발견하면, 우리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공허함이 우리를 기도와 말씀으로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가까운 관계로부터 오는 온갖 혜택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샘솟는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괴로운 일을
만나더라도 휘파람을 불 수 있는데, 그것은 만신창이 속에서도 우리의 기쁨은 주님 안에 있기
때문이지요. 평안이 가득하고, 깊은 이해와 오래 참음과 온유함과 자비함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은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부터 오는 것들입니다. 육체의 끈질긴 욕구에 대처해서 싸울 수
있는 힘과 권세가 주어집니다. 우리는 돌연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되고,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
실질적이고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지혜가 생깁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지혜처럼
말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영광스러운 새 삶을 향해, 온
마음으로 달려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능력이 넘치는 삶, 기쁨과 사랑과 평안이
가득한 삶, 이러한 삶이야말로 우리가 그렇게도 소원하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성령을 좇아 행하기로 선택하여야만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의 마음속에 기도하고 싶은 소원을 주시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싶은 소원을 주시도록, 예수님과 교제하고 싶은 소원을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할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범하기 쉬운 죄를 이기고 크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들어서 여러 가지 일을 위해 크게 쓰실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늘 징징 짜기만 하는 울보들인데도 말입니다.
은혜 6
정원이지 공장이 아닙니다.
“제품”과 “과일”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제품이라 하면, 납품기일 등 여러 가지 사양을 맞추기 위한 압력을 받으면서, 계속적으로
가동해야 하는 공장에서 복잡한 생산과정을 거쳐 출고되는 상품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러나,
“과일”은 평온하고 조용한 정원, 우리가 가서 머물면서 같이 온 사람들과 아름다운 사귐을
나누며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는 그런 곳을 연상케 합니다.
하나님은 상품을 찾으려고 공장으로 오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나무에 열린 과일을 즐기시기 위해 정원으로 오십니다. 은혜의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연기 나고 시끄럽고 복잡한 공장과 같은 행위의 삶을 뒤로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정원에서 보시기를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삶으로 우리를 초청합니다.
관계로부터 저절로 오는 결과
갈라디아서 3:2,3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렇게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바울이 두 가지를 비교하고 있는 것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
* 믿음과 관련되어 있는 성령;
* 육체와 관련되어 있는 행위.
언제든지 우리가 행위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육체로 하는 것이고, 성령의 영역에
들어가면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행위와 육체가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성령과 믿음이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누가 이렇게 얘기할지 모르지요. “목사님, 우리가 주님을 위해 일을 해야지요!”
아닙니다. 우리는 일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육체로 일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반대로, 믿음은 언제나 열매를 만들어냅니다.
만약 당신이 행위로 노력하고 있다면, 당신은 육체를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믿음으로 행하고 있다면 성령이 당신의 삶 가운데서
열매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열매는 열매를 맺어야지 생각하며 애씀으로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는 관계로부터 저절로 오는 자연적인 결과인 것입니다. 복숭아나무에 달린
먹음직스러운 과일을 보십시오. 그 복숭아는 익어야겠다고 매일매일 몸부림치면서 노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거기에 붙어 있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가지에 붙어 있기만 하면
달고 맛있는 과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 붙어
있으면-이것은 믿음의 생활인데- 열매는 관계로부터 저절로 오는 것입니다. 나의 삶에 열매가
없다면, 관계부터 의문을 가지고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 이유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예수님은 양의 가죽을 쓴
이리와 같은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크리스천 같이 보이고, 크리스천 같이 행동하고,
크리스천 같이 말하는데, 아이고머니나,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는 거지요! 양으로서의
모든 모양은 다 갖추었는데, 사실은 이리란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양과 이리를 알아보나요? 예수님은,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마 7:20).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어떠한 열매를 맺고 있는지 우리의 삶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쁜 열매를 맺고 있다면 우리의 관계가 잘못된 것인데, 그것은 우리의 믿음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가진 사람은
쉬지 않고 꾸준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의 큰 실수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보다 우리가 누구냐에 더
관심이 많으신 데에 반해, 우리는 우리가 누구냐보다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더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열매를 찾으시는데, 우리는 제품을 만들어내려고 애쓰는
거지요.
슬프게도, 우리는 오랫동안 이런 말을 들어왔습니다. “당신은 주님을 위해 이런 일을
해야만 해. 또, 당신은 하나님을 위해 저런 일을 해야만 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서 일하도록 채근과 압력을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사님이나 위원회에서 하라고
지시만 내리면 무조건 좇아나가서 ,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호별방문 전도자로 부르시지 않으셨는데, 교회에서 호별방문 전도를
나가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모르는 사람의 집을 방문하라고 하면 몸이
굳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방문하러 찾아간 집의 대문에 서면, “주님, 오늘
이 집에 아무도 없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하게 되지요. 남의 집 방문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어색한 것입니다. 그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고, 육체의 일이기 때문에 곧 원망만 남게
되고 발이 떨어지지 않기 시작하면서 곧 그만 두게 됩니다. 그러면 전도위원회 위원장이
전화를 걸어서, “지난 화요일 호별 방문 전도에 빠지셨더군요. 다음 화요일에는 빠지지 말고
꼭 오셔야 합니다.” 하고 다짐하지요. 그러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은
하지만 어깨가 축 처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실 때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지도 않은
어려운 일을 하도록 강요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성품과 성격에 맞지 않는 그 일을 억지로
강요 당하다보면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도 곧 울화통이 터지고 화가 나는 거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우리가 불평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크리스천의 불평”을 듣기 싫어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입니다. 저도
사람들이 저를 위해 한 일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듣기 싫습니다. 저를 어리석은 바보 멍청이로
만드는 기분이지요. 아니, 누가 자기들보고 하랬나요?
당신이 하기 싫은 일이 있거든 하지 마십시오. 나가서 아량 있는 체하고 일하고 나서는
불평하고 씹고 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안 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 일을 즐겨 할 사람들에게 맡기십시오. 모르는 사람들에게 얘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집에 앉아 있으면 심심해서 못 견디고, 입이 근질근질해서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모르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얘기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성격입니다. 그들에게는 저절로 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열쇄입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바로 열매의 영역이며, 억지로 하는 것이 바로 행위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름 받은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고 준비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일을 맡으면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남들이 다 하는 일을 자기는 못한다고 2등 신자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이렇게 말하는 신자를 만나지요. “할렐루야! 지난주간에 제가 다섯 명을 전도했는데 다섯 명
전부 예수를 영접하였지 뭐예요.” 이 때 전도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이 들으면, “아! 나는
어떡하나? 전도도 못 하고. 나는 아주 형편없는 신자야. 나는 실패자야.”하고 한탄을 하는
겁니다. 길거리에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사영리를 아느냐고 물어보지 않은 데 대한
죄책감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전도를 잘할까요? 그것은 그들에게는 전도가 자연스럽게
저절로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위해 힘 입혀 주시고 준비시켜 주셨기
때문이지요. 몸의 모든 지체가 다 입은 아닙니다. 그러나, 뇌가 그 뒤에서 조종하고, 발이
가야할 곳으로 데리고 가지 않으면 입이 제대로 작동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하는 사역과 똑같은 사역을 똑같이 잘 하지 못한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몸은 하나의 통일체로서 움직이는데 하나님이 우리 각자를 몸의 각 위치에다 배치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나님이 힘 입혀 주셔서 저절로 할 수 있게 하신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크리스천의 삶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님 안에 거할 때에
저절로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 ,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를 위하여 과실을 많이 많이
맺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과실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만이 맺을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믿음 같은 것은 없습니다.
마태복음은,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이 주님을 위해 행한 모든
일들을 말할 것인데, 그 때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주님은 육체의 일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한 번도 인정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에게는 어쨌든 이삭보다 14살이나
많은 다른 아들 이스마엘이 있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 대답은 이스마엘은 육체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약속의 아들이 아니요, 믿음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스마엘은 육체로부터 얻은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육체의 일이기 때문에 인정하시기를 거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성령의 일, 믿음의 아들
이삭만을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의 육체의 일을 인정하시거나 상주시지 않으십니다. 반대로,
성령의 열매가 우리 삶 가운데 많이 나타나기를 그토록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은 신자가 어떻게 과실을 맺는가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중점을 두지 않으시고, 우리가 누구냐에 중점을 두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주님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결과입니다. 우리는 과실을 맺지 않으면서
주님과 참되고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과실이 없다면,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으므로, 우리의 관계를 점검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주제 넘은 과일 검사관들
하나님은 그의 성령으로 당신의 삶에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당신이 죄인이었을
때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이 믿음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왔을 때에,
당신이 저지른 모든 죄악으로부터 의롭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당신의 과거의 모든
죄의 기록을 깨끗케 하셨습니다. 과거의 죄를 너무 철저히 도말하셔서 마치 전혀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의로워 졌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순간 - 일전도 헌금을 하기 전에, 한 가지 일도
하기 전에 - 하나님은 당신에 관한 모든 더러운 기록을 끄집어내 완전히 지워버리셨습니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그 간단한 믿음 때문에 당신의 모든
과거를 의롭게 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의를 당신의 구좌로
넣어주신 것입니다 . 하나님과의 관계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은 가장 기초인데도, 어쩐 일인지 우리는 자꾸 잊어버립니다. 가끔, 다른 신자들을
비판하거나 결점을 들추어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저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큰 일입니다.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이런 일 저런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크리스천의 기준에 맞춰 살고 있지 않아요. 맙소사, 해수욕장까지도 간답니다.
흉칙해요!”
지금 이들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을 재판관으로 스스로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주재 넘은 과일 검사관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종들이 일하는
것을 판단하고 있는 셈이지요. 바울은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롬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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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그를 믿고 신뢰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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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저를 섬기는 종이라면 저는 당신이 하는 일을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지요. “너는 쓸모 없는 종이야. 왜 내가 너를 데리고 있는지 모르겠어.”라고
말입니다. 당신이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할 때는 저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 봐, 나는 네가 접시를 닦는 방법이 싫단 말이야. 물이 묻은 접시를 젖은
채로 찬장 안에 집어넣고 있잖아. 나는 여전히 젖은 채로 있는 접시를 꺼내 쓰기가 싫단
말이야. 그런데서 병균이 번지거든. 그러니까 완전히 말린 다음에 넣도록 해.” 라고요.
반대로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지요. “너는 훌륭한 종이야.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너를
데리고 있는 것이 너무 좋아.” 라고 말입니다. 저는 두 경우 다 당신의 일을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남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실제로는, 제가 당신의 주인이 아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당신에게 어떻게
섬기라고 지시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주인 앞에 서서 한 일에 대해 판단을 받아야지
제가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당신에게, “형편없는 친구구먼.”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당신이 하나님을 위해 한 일에 대해 판단할 권리도 없습니다. 당신이 섬기는 이는
하나님이시므로, 당신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바로 서든지 넘어지든지 할 일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이 하는 일을 가지고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냐고 말하는 것에 대해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하려는 것은 쓸 데
없는 노력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잘 해 나갈지라도 누군가가 흠을 잡고 비난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기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우리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무슨 일을 하여야 할까요 ? 그저 믿고 신뢰하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 가지 일과
열정적인 행동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나의 기쁨입니다!
믿음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믿음은 관계를 만듭니다. 그리고 관계는 과실을 맺게
합니다. 제가 하루종일 가만히 앉아서 순수하고 거룩하고 의롭게 미소지으면서 다정하게
사랑을 베풀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어나서 돌아다니며 행동으로 하는 거지요. 그러나 그
행동들이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참 큰 축복입니다.
“아시지요? 저는 지금 제가 하고 싶은 일 바로 그 일을 하고 있어요. 사실은, 지금 제가
하고있는 이 일은 제가 너무 좋아하는 일이거든요.” 이렇게 하는 것은 일도 아니고 수고도
아니며 그냥 제가 즐기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수십 년 전 제가 교단에 속해 있는 교회를 섬길 때, 총회에 가면 친구들을 만나게
됩니다. 같이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가서는, 제가 읽다가 주님이 제 마음속에 특별한 은혜를
주신 말씀을 나누려고 꺼내면, “어이, 스미스 목사야, 여기까지 와서 성경 얘기냐?
직업병이구먼!” 이라고 막으면서 화제를 바꾸려듭니다. 그러면 저는, “무슨 뜻이야?
직업병이라니? 이것은 내 삶이고 생활이야! 이것 말고는 나는 얘기하고 싶은 것이 없어. 이것
말고 더 신나게 얘기할 게 뭐 있냐 말이야.” 라고 대꾸하지요.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 그것은 일이 아닙니다. 작업장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공장에서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는 일은 관계로부터 오는 열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의 마음속에 가득하면,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은 하나님에 관해
얘기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그의 말씀, 그의 선하심, 그의 사랑.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적을 올리기 위해 억지로 돌아다니는 것과는 다릅니다. 당신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상급을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닙니다.(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의 삶에서
맺히는 열매를 보시고 상급을 주시겠지만). 당신이 원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성품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속에 하고싶은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당신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기분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바울은 말했습니다.(고후 5:14).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라고도 말했습니다.(고전
9:16).
저는 우리 모두가, 이스라엘의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구덩이에 갇혔던
예레미야와 같은 경험을 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는 어두운 구덩이에 앉아서 이렇게
푸념했습니다. “이제 끝났습니다. 저는 안 하겠습니다. 하나님, 여기 제 사직서 있습니다.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라고 하지 마십시오. 이젠 안 합니다. 이젠 더 이상 제
마음속에 말씀하지 마십시오. 주님, 이제 끝났습니다. 저는 사표 냈으니까 더 이상 시키지
마십시오. 아시겠어요? 절대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다시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이 꼴로 만들어 구덩이에 던져 넣게 하시고, 저를 돌봐 주시지도 않고선. 그러나
괜찮아요. 이제 저는 끝났으니까요!”(렘 20:9 참조).
예레미야는 속을 부글부글 끓이면서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9절). 그는
말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의무인 것처럼 억지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은 말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말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왜일까요? 저절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자연적인 열매였던 것이지요.
불평은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장을 운영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원을 가꾸십니다. 당신의 일에 관심이
있으신 게 아니라 당신의 과일을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이 육체를 의지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 의지하도록 당신을 부르셨습니다.
바울이 일깨워준 말씀처럼,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칠 수가 없습니다.(갈 3:3
참조).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우리의 믿음에다 행위를 더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꼭 그렇게 노력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섬기고, 주님과 함께
아름다운 시간을 즐깁니다. 성령의 기쁨이 온통 그들의 것이지요. 그 때에 어떤 형제들이
다가와서 무거운 딴죽을 거는 겁니다. “이봐, 형제들! 너희들이 진짜 크리스천이라면 이런
일을 해야지. 어째서 너희들은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어휴, 그러고도 너희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불러? 허 참! 이런 일도 안 하면서!” 여러 가지 무거운 의무와 준수사항들을
뒤집어씌우기 시작하는 거지요. 그러면 예수 믿는 것이 고역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저절로
되는 자연스러움도 끝나고 기쁨도 사라지고, 하기 싫은 일, 노동, 일이 되고 마는 거지요.
언제나 우리가 이것을 확실히 깨닫게 될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의는 우리가 더
이상 개선 할 수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행위를 기초로 맺어진 관계는, 주님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기쁨을 다 잃어버리는 고역으로 곧 전락하고 맙니다. 갑자기 의무가 되고, 강제가 되고
귀찮은 부담이 되고 말지요. 그러면 머지않아 불평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주님이 주시는 기쁨도 사라지고, 더 이상 자유함도 누릴 수 없고, 속박의 멍에를 메고 하는
노동이 되고 만 것입니다. 아참, 자기 전에 기도하고 자야 할텐데. 안 하면 벌받을 거고. 아!
그런데 너무 피곤하구나. 침대에서 정말 나가기가 싫네. 기도해야 되는데 너무 춥구나! 아!
미치겠다! 이렇게 하는 것 말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야, 닥치고 잠이나 자! 그런 기분 가지고 날 찾지 마라. 그런데,
도데체 누가 너보고 자기 전에 나를 꼭 찾으라고 하든?” 이러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당신은 아마 이 레슨을 꼭 마스터해야 할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목사님들이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러나, 성령의 일을 육체의 일로 해보려는 많은 목사님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사역과 같은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헌신이 따라야
하며, 그들이 행하는 그러한 능력을 받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개인적인 희생이 따라야 하는
지를 장황하게 설명하려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드린 헌신의 결단과 금식과 절제등 온갖
자기들이 행한 거룩한 일들을 나열하고, 이러한 행위들이, 하나님께서 특별한 능력을
부어주셔서 특별한 사역을 맡길 만큼 높은 영적인 수준에 도달하게 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이런 능력을 주시고 이런 사역을 맡기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자기들은 천신만고 끝에 얻었다는 거지요. 흔히들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저는 따로 떨어진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아걸고, ‘하나님, 제게 능력 부어주실 때까지 이 방을 나가지
않겠습니다.’ 하면서 매달렸습니다. 저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그 방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었지요 라고 말합니다 .” . 마치 그들의 의로운 행위가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이 한 것은 행위일 뿐이며, 하나님은
절대로 육체의 행위를 받아주시거나 인정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바울은,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라고 말했습니다.(갈 3:4,5). 진실된 사역자는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예수님은,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6).
우리 모두 초청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우리의 의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인한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말은 즉 우리들 아무나 다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기름부음을 받은 특별한 재목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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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을, 하나님이 오셔서,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맺은 많은 열매들을,
즐기실 수 있는 정원이 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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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약 5:17). 낙심하기도
하고, 속 상해 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혈기를 부리기도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기도하니까 삼 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엘리야는 유별나게 고상하고
거룩한 그런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신비의 비법을 지닌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기분 그대로 가지고, 우리 같이 낙심하기도 하는.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믿음 때문에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당신도 그와 똑같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당신은 성령으로 시작하였으므로 성령으로 계속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시작하였으므로
믿음으로 계속해야 합니다. 행위로 전락함으로, 예수 믿는 크리스천의 삶을 재미없는 것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공장 노동자가 되지 마시고, 당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오셔서, 당신이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맺고 있는 많은 열매들을 즐기실 수 있는 정원이 되게 하십시오.
은혜 7
믿음으로 받는 축복
잘못된 일인데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2천여 년 전에 갈라디아 교회를 실족케 했던 잘못된 일을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된
일인지 그 잘못은 지금도 여전히 막강하게 행해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거기에 대해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성경 교사들이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열심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능력의 충만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인 이런 잘못된 교리를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으니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우리의
삶에 성령이 오시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행동부터 깨끗하게 하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축복을
받기에 합당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에 자그마한 불결한 것이라도 샅샅이 찾아서 모두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상당히 진지한 가르침이긴 하지만 상당히 진지하게 잘못된 교리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의 요점은 우리 스스로의 행위와 노력으로 우리가 먼저 의로워지고 나서야,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신다는 것이지요.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최고의 축복을 여러 해 동안
받지 못하게 한 교리도 바로 이 잘못된 교리입니다.
노력했지만 좌절뿐이었습니다.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서 어린아이로 자라면서, 저는 성령세례라고 하는 것을 받기를
몹시도 사모하였습니다. 많은 “성령쇄신 집회”에도 참석했고, 아버지를 따라 토요일 밤
남전도회 기도회에도 꽤 자주 갔습니다. 갈 때마다 주님 앞에 앉아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의 삶을 채워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주님을 몹시도 사랑했고 그래서 , 제가 받을 수 있는 모든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가로막는 것이 있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저는 저의 숨은 죄가
저를 잡아당기고 있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죄는 제가 상상했던 그런 죄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저의 문제는 정욕도 아니요 욕심도 아니요 낭비벽도 아니었습니다. 저의 문제는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무슨 그렇게 어린아이가 영적인 자부심을 가지겠느냐고 이상하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저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성경말씀을 외웠고 성경의 책들을 암송하고 정확하게
쓰기도 했습니다. 성경 한 장을 모두 암송하기도 했습니다. 영화관에 간 적도 없고, 담배도
피워본 적이 없으며, 댄스 파티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이런 것들이 다
죄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저는 힘을 다해 이런 일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목사님 아들이 담배꽁초를 주워서 피우는 것을 여러 번 보았지만, 저는 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교회의 친구들은 매주 토요일이면 조조할인 영화를 보러갔지만, 저는 간
적이 없습니다. 저는 거룩해지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 친구들이 담배꽁초를 피울 때도
축복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주님! 저 아이들보다 제가 더 의로운 것 아시잖아요. 저는
저런 나쁜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저 애들은 축복해 주시고 저는 안 해 주시는
거예요? 하고 따지면서 괴로워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자기들은 어떻게 성령을 부어주시기를 기다렸는지에 대해 간증하는 것을
듣고 더 괴로웠습니다. 그들이 성령 받기를 간구하며 기다리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
주머니에 들은 담뱃갑을 보여 주시더라는 거지요. 그 순간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강단
위에 올려놓았더니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채워주셨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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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노력은 항상 부족했습니다.
그저 믿음으로 구하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을
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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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문제는 강단에 내놓을 담뱃갑이 제 주머니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신에
저는 그 주간에 지은 죄들을 머리에 억지로 생각해 내면서, 자, 주님, 이번 주에 제가 제
동생에게 화를 내었습니다. 주님, 화낸 것 제발 용서해 주세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고서는
성령으로 채워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강사님이 수도 없이, “하나님은 더러운 그릇은 채워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시지요? 하나님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거룩한 그릇이 되어야
채워주십니다.” 라고 설교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최선을 다해서 깨끗한 그릇이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죄는 다 고백했습니다.(어떤 때는 짓지
않은 죄까지도 만들어서 고백도 한 적도 있습니다).
저는 양심을 또 들추어보고 또 들추어보곤 했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 헌신을 다짐하고
다시 재 헌신을 또 다짐하곤 했습니다. 제 생활에 있어서 조그만 것이라도 의심 가는 행동이
있으면 그만 두었고 제가 좋아하는 모든 것도 , 다 희생하였습니다. 제 삶을 하나님이 성령으로
채워주시기에 충분할 만큼 거룩하고 의로워지려고, 모든 쓸데없는 짓은 다 한 셈이지요.
그렇게 하니까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숨막히는 것 같았고 좌절뿐이었습니다.
마침내 저는 간절한 마음으로, “좋습니다. 주님! 중국에 선교사로 가겠습니다. 당신의
성령으로 채워주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채워주지 않으셨습니다. 중국, 아프리카,
남미, 그리고 인도까지도 가겠다고 주님께 약속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채워주지
않으셨습니다.
이 모든 일을 하는 동안, 저는 저의 행위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보려고 총력을 기울인
것입니다. 제 나름대로 세워놓은 기준을 지킴으로 의로워지려했던 것이지요. 저는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충만을 받고 성령의
은사를 받고자하는 열망이 너무 강해서, 제가 아는 모든 수단은 다 동원하여 노력했던
것이지요. 얼마나 많은 밤을 하나님 앞에서 괴로워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왜 저를 축복해
주지 않으시는지 방황하면서 말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축복하시기 전에 우리가 어떤 의로운 경지에 도달하여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경지에 도달하는 순간, 하나님이 성령으로 채워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제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혼동이 일어났습니다. 실컷 제 멋대로
살며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예수를 믿고는, 여전히 술 냄새 담배 냄새를 풍기면서도,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시간에 어떻게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받았거든요.
정말 불공평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줄곧 주님과 함께 늘 동행해 오며 주님을
섬겼는데, 그들은 축복을 받고 저는 못 받은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모순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제가 배운 것과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도저히 조화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고만 있었더라면! 성령의 능력을 받기 위해 그토록 많은
세월들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 텐데!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깨닫기 시작하면서, 바울이
이렇게 질문하는 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 3:2). 갑자기 저는 이 질문이 설명을 위한 수사적인 질문임을 깨달았습니다.
분명한 대답은 그들이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
것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스스로 거룩해지고 의로워지기 위해서 무던히
노력했지만, 성령의 충만을 받을 정도로 충분히 착해질 수는 없었습니다. 그저 믿음으로
구하기만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거지요. 저는 하나님이 저의 도움이 필요한 줄로만
알고 있었거든요.
그날로 저는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모든 노력을 집어치우고, 간단하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지금 주님이 선물로 주시는 성령의 은사를 받겠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받았습니다. 그 동안의 제가 너무 어리석게 여겨졌습니다. 바보같이 멍청하기는!
내가 알기만 했더라면 벌써 몇 해 전에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누가 내게 가르쳐 주기만
했어도!
아! 그 동안 여러 해를 율법과 규례에 복종하는 것만 강조한 가르침 때문에 얼마나
손해를 많이 보았는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신뢰함으로,
성령의 내주하심과 충만하심과 능력 부어주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 어떤 외형적인 규례를
지킴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같이 받을 자격 없는 죄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 사랑, 자비, 선하심을 강조하는 간단하고도 강한 설교를 제가 되풀이하는
이유입니다.
믿음으로 받기만 하면 되는 축복
제가 말씀을 깨닫기 시작하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거룩함의 경지는 저의
의로움이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단순히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하나님이 축복해 주십니다. 저는 살면 살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고 가치도 없다는 것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저를 축복하시는 것은
제가 착하고 거룩하고 정결해서가 아니라, 그의 본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축복하시기를 기뻐하시니까요.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는 단 한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번
주에 아침기도를 꾸준히 하지 않았다고 축복이 막히는 것은 아닙니다. 생활에서 뭘 잘못
했다고 막히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나 다 실수하지요. 당신의 삶에서 오직 한 가지 유일하게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는 일이 있다면,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축복 주실 줄을 단순히 믿고 신뢰하는 누구에게나 주시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의 의로움이나 선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올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삶을 위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선한 일을 가로채려는 어리석은 일이 될 테니까요!
하나님이 받아 주실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자세는, “저는 실패자입니다. 저는 자격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어쨌든 저를 축복해 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부터, 줄곧 그의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많은 축복을 주셔서 저는 너무
많은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그 모든 축복을 다 헤아릴 수가 없고 기억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절대로 닫히지 않는 축복의 문으로 온 것입니다. 제가 제 자신의 의를 가지고 나아올 때는,
대부분의 경우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
나오니까 절대로 문이 닫히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의 사랑은 매일 매일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늘 동일하시고 변하지도 않으시고 다르지도 않습니다. 그의 사랑은
우리가 하기에 딸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으로부터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이 으뜸가는 죄인일 때도
계속해서 사랑하십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에게 반항하고 그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고,
“나는 당신을 미워합니다. 하나님!” 하고 고함을 쳤을 때에도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을 축복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축복들은 우리의 선함이나 의로움이나 신실함에
딸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은 전적으로 우리를 축복하시고 싶은 하나님의 원하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단순히 그의 축복들을 믿고 받기만 하면 됩니다. 바울의 수사적인
질문을 기억하십시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당신이 충분히 의로워졌으므로, 마침내 하나님이, “자, 이제 얘는 충분히 의로우니까 성령
부어 주어도 될 것 같애.” 하고 결정하시게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었던
첫날보다 지금 더 의로워진 것이 없습니다.
당신이 단순히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축복과 능력을
얼마나 부어주시기를 원하시는지 상상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어리석은
갈라디아 교인들과 같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가질 수 있는데, 왜 율법적인
관계로 돌아가려는 어리석은 짓을 하느냐 말입니다. 당신이 받을 자격이 있으니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이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은 사망뿐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지금 당장 우리를 축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삶을 축복하시기 원하시고, 그 축복으로 가는 길은 당신의 믿음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복을?
이 책을 읽는 여러분 중에, 당신이 하나님께 너무 큰 죄를 지었으므로, 혹은 당신이
너무 연약하기 때문에, 혹은 당신이 너무 큰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을 절대로
축복해 주실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당신은 때때로 혈기를 부리는
나쁜 성미를 가졌거나 세상에 한 눈을 파는 문제를 가진 사람인지도 모르지요. 그러면 당신은,
내가 아이들에게 이렇게 고함을 지르고 야단을 치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축복해
주시겠나? 내가 이렇게 썩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축복해 주시겠나? 내가 이렇고 저런
사람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실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요. 당신의
문제는, 당신의 행위의 실적을 근거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런 류의 잘못된 생각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내가 잘하고 이제 완벽하게 되었으니 하나님이
나를 축복해 주실 거야.” 같은 생각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지요!
우리는, “주님, 저는 이 능력을 갖기를 정말 원합니다. 그러니 지금 부어주세요.”라고
우리가 말하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성령으로 채워주신다는 사실을 우리 머리 속에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경고의 말씀을 꼭 드려야겠군요. 바로 이 시점에서 영적인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성령으로 채워달라고 기도할 때,
그 순간 바로 사탄은 당신의 마음속에 온갖 거짓말과 비난을 퍼붓기 시작할 것입니다. 마음을
어지럽게 할 것입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할 것이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
것입니다. “너,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하나님에게 복을 달라고 구하고 있는 거야?“
하면서 조소할 것입니다. ”창피한 줄 알아라. 너는 그럴 자격이 없어! 너 꼴 좀 봐! 네가 한
일은 또 어떻구! 어떻게 하나님이 너 같은 자에게 그의 성령으로 채워주실 수가 있겠니?“
아이러니 하게도, 많은 경우, 사탄은 예수 믿는 크리스천들을 통해 이러한 거짓말을
전달하게 합니다.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함정에 빠진 사람들을 이용해서 당신을 책망해 오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이렇게 떠들어대면서 주눅이 들게 합니다. “다 네 잘못이야. 네 잘못!
네가 믿음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네가 조금만 더 신령했더라면. 네가 조금만 더 나
같았더라면. 이러한 약간의 영적인 공격 앞에, 우리 중 많은 사람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 서버리게 되지요. ”주님, 안 되겠습니다. 그만 둡시다.“ 하고 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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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당신이 그의 사랑과
그의 손길과 그의 능력과 그의 기름 부으심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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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저는 제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가 자격이 있어서 축복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저를 향하신 그의 사랑과 그의 은혜를 근거로 저를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축복의 근거이지, 저의 선함이나 의로움이나 온전함이 근거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것만 머리 속에 집어넣고 있으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으리 만치 많은 축복을 받기
시작할 것입니다.
축복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축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이 할 일이라고는,
당신은 받을 자격이 없는 줄 당신 자신이 너무 잘 알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당신을
축복하시리라는 것을 단순히 믿는 것뿐입니다. 축복은 당신의 행위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믿음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단신이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을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는 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서 큰
문제들을 갖게 되는 바로 그 원인입니다. “하나님이 저 사람은 왜 축복해 주시는지
모르겠어요. 저렇게 담배를 피워대는데!” 라고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아니! 나는 축복을
못 받는데, 저 사람 축복 받는 것 좀 봐!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왜 하나님이 축복하시는지
이해를 못하겠단 말이야.” 그러나, 그것은 물론 하나님의 축복이 흡연 습관에 딸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에 딸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오늘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십니다.(대하 16:9 참조).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그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꼭 이루실 것을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주님, 지금 저를 축복해 주세요.” 라고 말씀드리고 그저 받으십시오.
이러한 거저 굴러 들어오는 은혜가 우리 마음에 썩 납득이 되지 않을 줄 잘 압니다.
제가, “오! 주님! 저에게 참된 축복을 내려주세요. 오늘밤에 놀라운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라고 말하는 순간, 저의 마음은, 지금 뭐라 그랬지? 하나님께 축복해 달라고
했어? 오늘 낮에 그런 더러운 생각을 마음에 품었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에게 너를 축복해
달라고 해?
축복은 자격이 있어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우리 마음속에서 떨쳐버리기가 그렇게도
힘든 것입니다. 우리가 죄 짓고 실수하고 자격이 없을지라도, 오직 믿음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침내 모든 장해를 극복하고, 단지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축복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나아오면,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삶에 퍼부어 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
이러한 축복들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들인가 !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과
똑같은 축복이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 약속된 축복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세기 15:1).
* “내가 너를 심히 번성케 하리라.” (창세기 17:6).
*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세기 17:7).
이 모든 축복과 더 많은 축복이 당신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을
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가 당신에게 힘 입혀진 것입니다. 이것, 오직 이것만이 하나님이
당신을 축복하시는 완전무결한 근거입니다.
은혜의 복음은, 당신은 비록 자격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이 그의 사랑과 그의
손길과 그의 능력과 그의 기름 부으심을 누리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믿음을 주셨습니다. 행사하시고 사용하십시오. 그러면 자랍니다. 단순히
믿으시고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을 축복해 주실 것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의 축복이 우리 삶에 부어지는 것은, 어느 날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에 충분할 만큼 거룩해졌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가 빛을 보고 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지킬 것이라는 것을 단순히 믿었을
때 바로 온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나 의로움이 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이 우리 주 예수님을 믿는
단순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우리 쪽에서
할 일이라고는 단지 그를 믿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이 사실을 가만히 생각해보고 있노라면, 그 사실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은혜 8
시작되는 갈등
얼마 전, 육체의 정욕 때문에 심하게 갈등하고 있다는 한 젊은 이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육체와의 싸움에서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처절한 기록을 자세히
적어보냈는데, 마치 로마서 7:24에 있는 바울의 절규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저는 그가 겪은 일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
가운데서 그와 비슷한 갈등을 겪으면서 괴로워 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면서도, 우리를 시험하는 육체의 힘이 너무 막강하기 때문에 우리는
실패를 거듭하게 됩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사람들은 육체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연구해
왔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육체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들 자신을 수도원의
벽장에 가두는 것뿐이라고 믿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넘어지게 할 가능성이 있는 어떠한
일이나 물건이나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일기장을 대충만 읽어보아도 격리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유명한 신학자인 제롬은 새장보다 약간 큰 방안에서 몇 년을 살았습니다.
바깥 세상과의 유일한 접촉은 조그만 창문을 통해 그의 식사를 받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고 기도만 하기 위해 모든 것으로부터와 모든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폐쇄하였던 것입니다 . 그러나 그의 일지를 보면, 엄격한 생활방식과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두껍게 쌓은 벽도, 물밀 듯 밀려오는 망칙한 생각들과 상상들과
공상들을, 상자 곽 같은 어두운 방에 앉아있는 그의 마음으로부터 막아주지는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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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책은 우리 자신의 힘 훨씬 너머로부터 온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까지 도움은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만이 헤어날 수 있는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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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는 대단히 막강한 적입니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 전반에
걸쳐서 육체와의 전투에 패배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여겨집니다.
왜 그러한 신자들은 도대체 하나님의 승리를 누리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 자신의 힘으로 경건한 삶을 살아보려고 온 노력과 에너지를 쏟아 넣기 때문이지요.
그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문제를 하나님께 드리기보다는, 의로워지게 하는 새로운
테크닉이나 어떤 새로운 방법이나 어떤 새로운 프로그램을 계속 찾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공식을 결사적으로 찾아서,
“이 사망의 몸”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원해보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모두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해결책은 우리 자신의 힘 훨씬 너머로부터 온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까지
도움은 오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연약한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만이 헤어날 수 있는
비결입니다.
하나의 자기 개선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모두에게는 매우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강하고 능력이 있어서 우리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어떤 자기 개선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마음을
정하고 그 프로그램대로 따라하기만 하면, 대여섯 파운드의 체중은 쉽게 줄이고 날씬해질 수
있으며, 나쁜 습관을 버릴 수도 있게 된다고 얼마나 자주 믿었습니까? 그러나 슬픈 사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우리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은,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서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개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공적을 우리 자신에게 돌리려 할 것입니다. “그것 봐, 그 나쁜
습관을 버리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 않았잖아! 나는 내가 해낼 수 있을 줄 알았단 말이야!” 그
시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주인공으로 성공담을 쓰게
되는 거지요.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면 된다고, 내가 터득한 방법을 권하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은 그림에서 점점 사라져만 가는 것입니다. 제가 예언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자신만만할지 몰라도, 비극과 실망의 바람이 한번 불면, 카드를 한 장 한 장 쌓아 지은
집이 카드가 바람에 날리면서 무너지듯 와장창 내려앉는 소리가 우리 귀에 들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칠 때까지 스스로 돕는 프로그램과 스스로 개선하는 프로그램을
따르도록 내버려두실 것입니다 아 안 . “ ! 되겠다. 내 자신의 힘으로는 의로워질 수가 없구나!
오!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는 진실된 고백이 나올 때까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해보도록
내버려두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에 대해 솔직해지기가 우리에게는 참 힘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무능과 실패와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결론에 이르기를 싫어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희망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전적 무능을 인정하는 것만이 오직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가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가지고 올 때에, 우리 자신이 할 수
없던 일을 주님이 맡아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도움과 희망을 찾아 애타게 부르짖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때까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승리를 누리는 것은
시작되지 않습니다.
갈등이 시작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전쟁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있도록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갈등은 없을 것입니다.
내 영혼이 여전히 죄와 허물로 죽어있다면, 악한 욕망 때문에 갈등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곧바로 뛰어 들어가 육체를 따라 살면 그만이지요. 우리가 싸움에 휘말려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강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안에서 잔인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갈라디아서 5:17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베드로도 이 모든 갈등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한 때 억센 어부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모든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할지라도, 자기는 도망가지 않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날이 새기 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결국 옳았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자신이 감당도 못할 일을,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악을 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도다.”(로마서 7:21-23).
우리의 지체 속에서, 주도권 장악을 위한 성령과 육체간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하나님의 승리를 맛볼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을 그리스도께 드렸을 때
성령의 해택을 누리는 것을 맛보기 시작하고, 우리의 육체적인 성품이 비록 우리의 삶의
보좌에서 물러났을지라도 전쟁이 아직 끝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 우리의 삶을
다스리고 지배하기를 즐기던 육체는, 우리의 몸이 완전한 구속을 받을 때까지, 우리를 자기의
권세 아래로 다시 끌어오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욕구가 잘못인가요?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몸의 욕구와 본능 그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치 않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욕구는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것으로서, 생명을
유지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몸의 욕구 중에 가장 강한 욕구는 공기에 대한 욕구입니다. 공기를 마시기 위해
숨쉬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자연적인 기능을 변칙적으로 사용해서 코케인을
흡입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적인 기능을 부자연적인
방법으로 잘못 사용하는 셈이지요. 성경은 이것을 “죄”라 합니다.
공기에 대한 욕구 다음으로 강한 욕구는 수분을 취하려는 욕구입니다. 목마른 것이
전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술집에 앉아서 앞이 똑바로 안 보일 때까지 계속 드링크로
목을 축이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이것 역시 우리의 자연적인 본능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과는 다르게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강한 욕구는 식욕입니다. 먹는 데에 있어서 경건치 못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만, 너무 많이 먹어서 건강에 지장을 가져올 정도라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대식을 함으로 음식에 대한 자연적인 욕구를 남용하는 일을 범하게 되는 거지요.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살을 빼기 위해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는 것도 똑같이 해롭습니다. 모든 음식물에
칼로리를 재고, 땅에 엎드려질 정도로 억지로 운동을 해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 또한
죄입니다.
성욕은 자손 번식을 위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부부간의 상호 애정의
아름다운 표현을 위해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욕구를 쾌락을 위한 장난감으로 전락시켜
더 이상 사랑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하나님께서 주신 귀중한 욕구들을, 이기적인 만족을 위해 변칙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어떻게 성령을 거스려 싸우는 것이 되는지 아시겠습니까? 이러한 모든 몸의
욕구는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그중 어떤 것도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리도록 하실 의도는 전혀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부분들이지만, 그것들이 우리의 삶을 장악하도록 만들어 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뿐이라면, 우리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6:31,32
참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몸의 욕구를 추구하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우리 신자들은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우리의
육체의 욕구는 올바르게 쓰이면 합당하고 정당한 것이지만, 그것들이 우리를 다스리도록
의도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타락한 상태에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몸의 욕구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려고 듭니다. 여기에서 갈등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전투계획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제기되는 질문은, 그렇다면 우리의 육체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육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 방책을 만드셨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르십니다.
육체의 결점을 보충하려 하거나, 영적인 장치로 꾸미려 하거나, 개선하려 하지
마십시오 육체는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 . 육체는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육체에 사로잡힌 옛 성품)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다스리고 싶어하는 우리의 타락한 성품)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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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와 영과의 싸움을 해결하는 성경적인 처방은
교화훈련이나 자기절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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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할 일은 이것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구태여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를 주장하려는 육체의 영역을 대할 때마다, 우리 안에 육체와 성령의
전쟁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우리는 솔직하게 인정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특정한 약한 부분을 십자가로 가지고 와서, 그것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첫 단계일 뿐입니다. 육체와 성령과의 싸움을 해결하는 성경적인
처방은 교화훈련이나 자기절제가 아닙니다. 육체를 이길 수 있는 힘은 성령이 다스리는 삶을
통해서만 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몸 안에 살고 있는 한은, 싸움은 계속되지만 영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삶을 맡으셔서
강하게 역사하시도록 맡겨드리면, 우리는 타락한 우리의 본성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거룩해지려고 시도하는 노력은 육체적인 노력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절박하게 부르짖는 자리까지 오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하면 다음 번에는 더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열심히 하여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를 묻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미 그 길은 갈 때까지
가보았으나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자기 속에는 경건한 삶을 살 능력이 있지 않음을
깨달았고, 누군가 자기를 구출해줄 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부르짖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이 우리의 영을 깨우실 때는, 일련의 새로운 욕구들을 주십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사모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지식과 이해를 원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는 다른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를 원하게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육체를 따라 살기를 원치 않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 결과는 좌절이요 사망임을 이미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죠. 육체를 위해 사는 것은, 우리가 좀더 풍성한 삶을 추구하려는 것과,
우리의 한계를 넘어 좀 능력있는 삶을 살아보려는 것과, 오래 지속되는 궁극적인 만족을
누리려는 것으로부터 언제나 우리를 몰아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약속된 만족과
충만함이 항상 우리를 비켜나가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좇아 살면,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안을 맛보게 되고, 끝없는
갈등과 쓰라린 공허함은 사라져 버리고, 목적과 의미가 분명한 삶을 산다는 훌륭한 기분을
경험하게 되고, 따라서, 한 때 우리를 매혹하던 육체는 더 이상 매력이 되지 못하고,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에서 우리는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이지요.
마음 놀음
우리가 좋아하든지 말든지, 우리가 인정하든지 안 하든지 상관없이, 우리 속에는, 선을
행하려 하기만 하면 항상 악이 함께 하는 짓궂은 법칙이 역사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러한 황당한 싸움이 너무 자주 일어나서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5-17).
성경에서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분명한 계명을 우리가 어떻게 지키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요한복음 13:34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에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우리
형제를 미워하면 우리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요일 4:20). 그는, 우리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의아해
합니다.
우리의 문제점을 한 번 살펴봅시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절대로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우리는 그 문제를 좀 피해보려고, “ 아! 저는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가 하는 그 못된 짓이 미운 것일 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직하다면, 어떤 사람의 행동으로부터 그 사람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저 자신도 그렇게 분명히 구별해서 생각하기가 어려운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악한 사람의 행동을 미워하면서 동시에 그 사람도 미워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에게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예를 들어서 교통사고가 나서
새차가 다 찌그러졌다는 것 같은- 속으로 기뻐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은
그런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음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서 저는
그렇지 못하거든요.
종종 우리는, 하나님에게 순종하기 위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긍하는 마음 놀음을 하는 것으로 끝날 때가 많습니다. 좀 심해지면, 우리가 참으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있다고 스스로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좀 모자란 녀석이 다가와서는, 등을 딱
때리며, 큰 목소리로 온 실내에 다 들리게끔, “어휴! 진동하는 냄새! 이 친구 오늘 아침에
겨드랑이 향수를 바를 시간이 없었군 그래!”라고 소리지를 때, 우리의 속마음의 진정한
상태는 분명해 집니다. 우리의 첫 번째 반응은, “야 이 죽일 놈아! 지금 모든 사람이 나를
쳐다보고 있잖아! 당장 자빠져 죽어 버려라! 이 벌레 같은 놈아!” 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우리는 정말 이런 사람까지도 사랑하기를 원하지만, 육신이 말을 듣지 않는 겁니다.
바울처럼, 우리 안에서도 이상한 법칙이 역사하고 있는 것을 알게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려 할 때마다 악이 함께 하는 것이지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좌절하게 되고, 실패에
염증을 느끼게 되고, 결국은 기운이 빠져서 주저앉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엄청난 영적 패배를
맛보고는, 바울과 함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를 외치게 되는 거죠.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우리 자신을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건져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 능력이 역사하기 시작할 것이고,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속으로부터
시작해서 바깥까지 변화시켜 주실 때에, 우리가 할 일이라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과거에 죄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그것을 싫어하시는 줄을 알고 나서, 나의 모든
의지력과 자숙하는 모든 마음을 총동원해서 그런 일은 이제 더 이상 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의지가 강하고 올바르고 스스로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자랑할만한 여지가 도무지 없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라고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갈 6:14).
실제보다 훨씬 더 신령해 보이는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영적인 갈등에 대해 말하면, 아무 가치도 없는 무성의한 말을 무심코 지껄여댑니다.
누가 육체와의 갈등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말을 하면, 이 “신령하신” 분들은, 바로
얼굴에 스스로 의로운 체하는 표정과, 누구보다 거룩하다는 자만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말
한 마디 하지 않고도, 벌써, 육체와의 문제로 갈등하는 것은 믿는 신자로서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는 표정을 짓는 거지요. “아니, 좀더 열심히 기도했더라면, 좀더 말씀을 열심히
보았더라면, (우리처럼) 좀더 신령한 마음을 가졌더라면, 육체와의 갈등 같은 문제는 있을 수
없을 텐데.” 하는 표정 말입니다.
이러한 초특급 신령 완벽주의자들을 흔히 보게 되는데, 이러한 자세는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과는 맞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이 육체의 몸으로부터
오는 문제를 벗어날 수 있는 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의 오랜 경험을
통해서 볼 때에, 저의 육체는 옛날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의 육체의 문제를 들추어내실 때는 그것을 고쳐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를
들면, 저는 처음에는 항상 최선의 의도로 시작합니다. 제가 지은 죄의 추악함을 보고는,
다시는 같은 죄에 빠지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래서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한 온갖 결심과
문제를 다루기 위한 작전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 때 그 때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대한
온갖 조언들을 찾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그렇게도 철저한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 것을 보면서, 처참한 좌절감 속에,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를 부르짖게 됩니다.
그런데 너무 놀라운 것은, 그 때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그의 성령이 기적적으로
저의 삶을 변화시키기 시작하시는 거지요.
저는, 감사가 넘치면서, 하나님이 변화시키시는 방법은 너무나도 간단하면서도 제
자신의 잘못된 노력보다는 얼마나 훌륭한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저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나는 언제 이 간단한 은혜의 이치를 이해하게 될까?” 라고 스스로 말하지요.
어떻게 제 마음 한 구석에서, 나도 내 힘으로 뭔가 값어치 있는 일을 할 수 있고, 완전히
쓸모 없는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 증명할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하나님은 절대로 육체가 우리를 지배하도록 의도하시지 않으셨으며, 그리고, 승리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것과 능력을 우리에게 공급해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열심히 노력해서 이겨보겠다고 결심하는 한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할지라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경건해지려는 어떠한 시도도 육체의 일이며,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몹시 싫어하시는 우리가 , 하지 말아야 할 일인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오직 바깥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우리가 승리를 거둘 때에, 그 결과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함정
우리가 주님과 가까이 있다고 느낄 때에, 이런 유혹이 생깁니다. “아, 참 좋구나! 나는
이제 다시는 육체를 따라 살지 않을 거야. 멍청한 짓이고 쓸모 없는 짓이거든!”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일이 오면 그 좋은 마음을 다 잊어버리는 겁니다. 길고 지루한 하루를 끝내고
지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침대 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종잡을 수 없이 헤매며, 육체를 따라 우리 마음대로 산 일들이 우리를 짓눌러대면서 잠을
설치게 합니다. 참 놀랍게도, 우리 육체는 다시 우리 삶에서 주도권을 잡았고, 내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일들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가장 큰 실수를 하게되는 것은 바로 이 때입니다. 우리 자신을 원망하며
자책하면서, 다음에는 더 열심히 노력하리라고 맹세하게 되지요. 문제가 뭔지 보이세요?
그러한 약속을 하는 순간, 우리는 육체에 자신감과 기대를 걸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내 자신의
힘으로 영적으로 강건해지리라고 말해놓고는, 곧 육체를 따라 사는 삶으로 물러서고 마는
것이지요. 우리는 베드로처럼 “나는 절대로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같은 싸움을 반복해서 싸우고 있는 우리 자신을 보면서, 우리들 대부분은 극심한
좌절감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예상된 단계를
거쳐나가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먼저, 밧줄의 끝을 붙잡고 있는 듯한 절박한
상황에 이르게 되고, 그 때서야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간절하게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고,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 우리를 건져주시는 일을 하시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정기적인 행사처럼 종종,
그렇게 갈 때까지 가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도 깨달을 수 있는 길이
없을까 생각해보지만 , 불행하게도 아직 그런 길은 발견하지 못 했습니다.
속으로부터 바깥으로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 우리가 지속적인 승리를 누리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 이 쪽에는 전쟁이 결코 그치지 않고 여전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매일 매일 결정해야하는 선택이 주어집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성령의 변화의 능력에 우리의 삶을 맡길 것인가 하는 선택입니다.
우리의 모든 힘이 바닥이 나고, 하나님이 그의 은혜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시는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신자로서 우리가 자랑할 것이라고는,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밖에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영원히
버림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 때문에, 과거에
버림받았던 우리들이 구원받고 그리스도에게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시는,
하나님과의 기가 막힌 관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사는 삶은, 우리를 사랑하사
그 자신을 우리를 위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로워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에, 우리의 영적인 쪽의 사람이 살아나게 되면서, 갑자기,
우리의 삶이 육체의 본능에 따라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로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육체가 결코 채워주지 못하던 영혼 속의 굶주림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로부터 만족스럽게 채워지는 것을 알 수 있게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되면 알게
될수록, 그의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되고, 성령 안에서 경험하는 만족의 극치는 육체의 좁은
시야를 훨씬 넘어 무한한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쓸모 없는 우리 자신의 노력을 그만두고, 성령께서 일하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요! 왜냐하면, 그의 승리는 속으로부터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지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승리가 바로 오래
지속되는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은혜 9
진정한 자유
이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만큼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5:1에서 이렇게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자유란 말의 의미는 도덕적인 행위에서 자유로운 상태를 말하며, 삶에 있어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신자들은 진정으로 자유한 반면,
죄인들에게 자유란 말을 쓰는 것은 옳지 못한 표현입니다. 죄인에게는 오직 한 가지 선택,
예수를 믿는 선택밖에는 없습니다. 죄인은 자기 육체에 얽매여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왜 그런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악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는 이 일이 싫다. 정말 하기 싫다. 왜 하는지 모르겠다. 이 일을 하고 있는 내가
정말 싫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것을 하고 있다.” 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어떤 힘에 의해
붙들려 있는 것이며, 그 힘은 사탄의 힘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에게로 오기 전에는, 모두 진노의 자녀이었으며,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는 것들뿐이었습니다.(엡 2:3 참조).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이란, 어느 방법으로 육체의 종이 되느냐 하는 것뿐이었지요. 우리는
도덕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 죄로부터 돌아설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경건치 못한 일로부터 다른 경건치 못한 일로 바꿀 수는 있었지만, 의로운 삶을 살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런 무서운 상황 아래서는 자유란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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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계속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종의 멍에를 메게 하는
어떤 영역에서도 자유를 남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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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자유와는 얼마나 대조적인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자로서, 육체가 우리를 다스리는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육체의 욕심을 따라 종으로 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를 붙들어
매고 있던 어두움의 사슬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것이지요.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율법의 기준에 따라 살아야 하는
의무로부터도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전에 아무 것에서도 맛보지
못하던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자유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에, 바울은, “내게 모든 것이 가하다.(합법적이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0:23). 이
세상의 어떠한 철학도 이보다 넓은 윤리의 범위를 갖고 있지는 못합니다. 사실이지, “내게
모든 것이 가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또한, 우리에게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편리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23절). 비록 우리의 구원을 위태롭게 하지는 않을지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자로서의 삶을 방해하는 자유의 영역을 추구하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한 헌신을 방해하는 그런 자유는 피해야 합니다. 우리가 계속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종의 멍에를 메게 하는 어떤 영역에서도 자유를
남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잘못 사용된 자유
너무 많은 경우, 사람들이 크리스천의 자유를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온갖 죄를 마음대로 지을 수 있는 자유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들은 자유를
육체를 따라 사는 방편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크리스천의 자유을
완전히 잘못 악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는 절대로 마음대로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가
아닙니다. 죄를 지을 수 있는 라이선스가 결코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누리도록 부여받은 영광스러운 자유는, 가장 먼저 우리의
육체로부터와 한 때 우리를 지배하던 육체의 다스림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은 것입니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이 자유는 하나님을 섬기며 경배하는 자유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자유는 우리가 한 때 살았던 그런 종류의 세속적인 죄의 삶을 살 자유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는 굉장한 자유가 , 주어졌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외에는 무슨 나무에서 나는 것이든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금지된 나무의 실과를 먹으므로 죄와 고통을 세상에 불러올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담이 그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억지로 막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이 이 자유를 잘못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오늘날 그 엄청난 재앙의
결과로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자유를 잘못 행사함으로 죄가 온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잘못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영광스러운 자유를 그렇게 잘못 사용함으로, 다시 종의 멍에에 얽매이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아, 나는
크리스천이니까 자유해. 그러므로, 내 육체의 충동을 만족시키며 살 권리가 있지. 내게는
그렇게 할 자유가 있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 자유도 있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육체의 충동을 따라 육체를 만족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자유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서 12:1,2은 우리에게,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섬기는 자유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면, 이제, 진짜 질문은,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의
자유를 하나님을 경외하며 우리의 믿음이 은혜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사용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갈라디아서 5:13에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자유를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데 사용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성경은, 하나님이 겸손한 종의 자세에 높은 가치를 두신 것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여러 번 반복하면서, 성경은,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왕국에서 큰 자가 되기를 원하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위 일컫는 지상명령을
제자들에게 주실 때에 굉장한 말씀을 앞에 주셨습니다. 그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8:18). 그 권세가 얼마나 굉장한 권세인지 상상할 수
있습니까? 온 우주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별들의 광채를 밝히는 권세와
모든 원자들이 서로 붙들고 있게 하는 이러한 권세가 다 예수님께 속한 권세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권세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우주를 흔드셨습니까? 몇 개의 새
은하수를 하늘에 펼치셨나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겉옷을 벗으시고, 종처럼 수건을 두르신 후,
돌아가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더러운 발목과 발톱을 끝까지 다 씻기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에게 본을 보인
것이야.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이었습니다.(요 13:12-14 참조).
당신이 지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내 것.” 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권세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수건을 ?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더러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우주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그 권세로 무엇을 하신 것입니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우리 중에 섬기기를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신, 시키기를 좋아하며 시중
받기를 좋아합니다. “저것 좀 갖다 줘.” “그 연장 좀 집어 줘.” “네가 갔다 와야
되겠다.” 우리는 얼마나 시키기를 좋아합니까! 그리고 시키는 대로 듣지 않으면 얼마나 화를
잘 냅니까! 속 상해서 쀼루퉁해지지요. 우리는 다스리는 쪽에 속하기를 즐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장 크신 축복은 거기서 찾아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돌아가며 왕초 노릇을 할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유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축복은, 물어볼 것도 없이,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셔야만
합니다. 저의 육체는,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생각과는 분명 거리가 멉니다. 조그마한
일을 요청 받았을 때에도, 저의 즉각적인 반응은, 종종, “네가 마시고 싶으면, 네가 떠다
마셔라. 내가 네 종이냐?”입니다. 제 육체는 가만 앉아 대접받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요!
섬김을 받으려고 아우성칩니다. 그러나 저는 육체에 얽매인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고,
따라서 지금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모든 율법이 이 한 구절에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
사랑하는 자유
예수님보다 한 이 백년 전에 부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네게 하기를
원치 않는 일은, 너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아라.” 부정적으로 말한 것을 보십시오. 남이 네
코피를 터뜨리는 것이 싫으면, 너도 남의 코피를 터뜨리지 말아라. 부정적인 금지명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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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률은 단순히 잘못을 피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랑을 베풀 실제적인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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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처의 충고를 황금률로 받아들이는 실수를 범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들이 의로운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아, 나는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았고, 아무도 죽인 적이 없고,
아무나 하고 같이 잠을 자고 다니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은 부정적인 면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 선해진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윤리를 분명한 긍정적인 교훈으로 틀을 짜신 것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예수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6:31). 내가 섬김을 받기를 원하는 그대로 남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 받기를 원하는 그대로 남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선물을 받기를 원하는 그대로
선물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웃을 창조적으로, 적극적으로
즐거움으로 사랑하는데 있어서 주도권을 잡으라는 의미입니다. 황금률은 단순히 잘못을 피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랑을 베풀 실제적인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내가 이웃에게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그들을 대접함으로 율법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내게 대해서 좋은 말을 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들에 대해
좋은 말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실수를 눈감아 주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들에 대해서 같은 자세를 가져야만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잡아먹는 사람들
누가 우리에 관해서 어떤 불쾌한 얘기를 할 때에, 왜 우리는 즉시로 반격의 화살을
날리게 됩니까? 우리를 비판적으로 말하는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같이,
그렇게 거룩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결정적인 말을
이 쪽에서 흘립니다. “아, 저는 진실만을 말하기를 원하는데, 그 사람에 대해서 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그쪽에서 우리말을 들었을 때에, 또다시
공격해 오고, 이러한 물고 뜯는 악의의 싸움은 끝없이 회전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지요.
다른 한편으로, 누가 나를 정말 좋아해서 나에 대해 좋은 얘기를 한 것을 들었을 때,
“네, 그 사람은 정말 훌륭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입니다. 암, 아주 훌륭한 사람이구 말구요.”
라고 말하게 됩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 관해 험담을 하며 물고 뜯을 때에 가끔
혼내준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한 바탕 지저분한 험담을 다 쏟아 놓은 다음에, 저는 이렇게
말하지요. “아, 그래요? 아주 흥미 있는 얘기이군요. 그런데, 아마 당신은 그 분이 저의
삼촌이라는 사실을 모르셨나봐요.” 그러고는 그의 어쩔 줄 몰라하는 반응을 살피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경고하였습니다.(갈 5:15). 만일 우리가 상대방의 말을 자르고, 난폭한 말이나 빈정대는 말로
서로 물고 뜯고 삼키는 일들을 하고 있다면, 사랑과는 정 반대의 일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슬프게도,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서 식인종처럼 서로 잡아먹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파괴적이고 사나운 싸움에 휘말린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질투와 원한이 판을
치게 되면서, 머지 않아 교회는 스스로 자신을 삼켜 버리는 일로 발전하게 되고,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잡아 먹혀 버리고 마는 꼴이 되는 것이지요.
특별히 사나운 싸움닭 종자를 배양해서 분양하는 사업을 성공적으로 하고 있는 한 영국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의 수탉들은 투계장에서 거의 무적의
싸움닭들이었으며, 그는 열심히 노력한 대가로 얻은 그 기록과 명성을 큰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바깥으로 나가서는 자기의 싸움닭들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칭찬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수탉들을 보러나간 그는 소름이 끼치도록 깜짝
놀랐습니다. 닭장이 온통 닭털과 피와 즐비한 닭의 시체들로 어지럽혀져 있었던 것이지요.
그가 그토록 아끼는 씨받이가 드러누운 채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부리나케
고용인을 불러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누가 멍청하게 이 사나운 종자들을 한
닭장에 가두었느냐?”고 벼락같은 호통을 쳤습니다. 그 종이 죽은 듯이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주인님.” “아니, 그런데,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했더란 말이냐?” 주인이
다구쳤습니다 저 그건요 고용인이 . “ , ,” 말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지금쯤이면 모든 닭들이
자기들이 모두 같은 편인 줄을 알 줄로 알았거든요.” 그러나, 정작 닭들은 너무 멍청해서
진짜 적이 누구인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교회 안에서, 아주 무식한 수준에서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진짜 적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립니다. 적은 다른 교파의 교인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짜
적은, 사람들을 속임수와 죄의 노예로 얽어매고 있는 어두움의 권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라이벌 의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왕국의 공통된 선을 위해 다 함께 일하기
시작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우리는 피범벅이 되어 다 망가진 교회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세상은, “봐라! 예수 믿는
사람들 꼴 좀 봐라! 이게 기독교란 거다!”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의 많은 부분이 물고 먹으며 피차 멸망하는 데에 세월을 보낸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우리에게는 절대로 다른 교파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정당하지 못하게
분류하거나 멸시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하나님의 왕국의 발전을 위한
비생산적인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남녀 성도로서, 성령 안에서, 즉 사랑과 용서와 온유의
성령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도록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며,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어디서 이런 힘을 얻을 수
있단 말입니까? 물밀 듯이 밀려오는 파괴적인 생각들을 물리치고, 비록 우리와 뜻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그들 안에서 좋은 점과 칭찬할 만한 점들을 볼 줄 아는 힘 말입니다.
자유에 따르는 책임
자유에는 큰 책임도 따라옵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자유의 대가는 영원한 불침번이라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항상 경계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유란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육체의 만족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잘못 사용하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선택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네,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고 있는 수상한 일 때문에 당신의 영혼을 지옥으로 보내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당신을 주저앉히고 있지나 않는지 스스로 질문해 보십시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닌지요?
제 삶에 있어서 주요한 목표와 소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지고, 그 안에서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4). “이러므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1,2).
저는 저의 믿음을 주저앉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원치 않습니다. 그 어떤 것도 저의
믿음생활을 방해하도록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게, “그러나, 척 목사님, 이런
저런 일은 나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크리스천이 해도 괜찮은 일 아닙니까?” 하고
말합니다. 그럼은요.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그 일이 목표를 향해 달리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 “ ,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고전 6:12). 어떤 일은 합당한
일이면서도, 제게 유익하지 못하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헤치는 일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12절). 계속 자유하기를
원한다면, 그 권세 아래로 나를 끌고 갈 수 있는 어떤 것을 추구하는 데에 자유를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 권세에 한 번 빨려 들어가면, 나는 더 이상 자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어떤 일을 위해 나의 자유를 행사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더 이상 자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유를 어리석게 행사하는 것이며, 내 자신을 다시
종의 멍에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참 감사하지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또
감사한 것은 그 자유를 계속 누릴 수 있는 데 필요한 모든 힘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유하다는 상태의 의미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사랑하고, 자유롭게 섬기고, 자유롭게 서로의 최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주님이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자유 안에서만 맛볼 수 있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 10
제 마음대로 살게 되지 않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죄의 삶을 살도록 만들지 않을까 엉뚱한 큰 걱정들을
합니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행위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심판하신다는 것을 신자들이 깨달으면, 예수만 믿고, 생활은 제 마음대로 사는
방탕한 생활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척 목사님, 그렇다면 말입니다.” 하면서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 하지요. “제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문을 활짝 열어놓는 것
아닙니까? 온갖 나쁜 짓과 악한 일은 다하고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덮어주신다’고 합리화하려 들텐데요.”
이러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방인들 가운데 전한
은혜의 복음은, 당장 유대인들로부터 항의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그러한 자유를
주면 생활이 난폭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잘못 해석될
수도 있다는 위험을 염려해서, 그의 서신에,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본문의 내용과는 다르게 잘못 해석하여,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어왔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방탕한 죄의 삶을 사는 구실로
사용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복음은 절대로 그렇게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은혜로 말미암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매우 강하고
은혜스러운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20절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다음 장의 첫 절에서, “자, 그렇다면, 은혜가 더하도록
나가서 죄를 실컷 짓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것이 얼마나 좋으냐! 더욱 은혜가 흘러
넘치도록 기회를 만들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을 가정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바로,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반박합니다.(롬 6:2 참조). 이 바울의 말은 크리스천의 삶을 사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핵심의 진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은행강도를 하다가 붙잡혔다고 칩시다. 감옥으로 보내지고 재판을 받습니다. 몇
주 후에, 배심원들이 평결을 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유죄하다고 평결합니다.” 그러면,
판사는 선고판결 날짜를 지정하게 되겠지요. 저는, 권총도 사용했고, 천장에다 공포도 쐈고,
은행원도 협박했기 때문에, 한 5년 정도의 감옥형을 받게 되겠지요. 마침내, 선고판결 날짜가
되어서 언도를 받기 위해 저는 판사 앞에 서게 됩니다.
모든 것이 법대로 잘 처리되었습니다. 법을 적용해서 죄를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저는 법정으로 들어서고, 판사는 “피고는 일어나시오.” 라고 말합니다. 제가
일어서면 판사는, “재판부는 피고의 유죄를 선고하며, 주 교도소에서 5년형을 언도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 때, 제가 충격을 받고, 심장마비에 걸려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러면, 법정은 제 시체를 5년 동안 감옥에 가두나요? 아니지요. 나의 죽음이 법의
정죄함으로부터 당장 자유하게 한 것입니다. 제게 내린 언도판결이 더 이상 강제력이
없게되는데, 그것은 제가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 아래 사는 우리들과 같은 사람들에 관해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육체를 따라 살지 않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율법의 요구는 다
이루어졌습니다. 저와 당신의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면, 옛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죄 가운데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바로 그 옛 삶에 대해 죽은 것입니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우리는 더 이상 자기밖에 모르는
옛사람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의 날들은 끝났습니다. 더 이상 육체를 따라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며, 죄성으로부터 자유하며, 무서운
죄의식으로부터도 자유합니다. 우리의 옛사람, 죄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따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죽었으면 죽은 사람처럼 행동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 안에서 저절로
나타나는 믿음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를 허랑 방탕한 삶의 구실로 삼아, 아직도 더럽고
부패한 옛 육체의 삶 가운데 살고 있다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야고보서 2:26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의 생활방식에서 그 사실이 분명히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눅 6:46-49).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도다.” 그리고, 그는 또, 같은 서신에서 두 번이나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못한다는 말을 더합니다.(요일 3:9; 5:18). 하나님의 은혜를 짓밟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신뢰하고, 그 관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사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원하는 것을 하십시오.
이 시점에서, 어떤 사람은, “아니! 우리의 선행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담배를 피워대는 것과, 술 마시고 취하고 떠드는 것과, 누추한 술집에 드나드는 것을 못할
일이 없지 않습니까?” 라고 반문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못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저 하고싶은
마음이 없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강권하는
것이지요. 그분의 사랑의 선하심을 맛보고 나니까, 그분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싫은 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저를 사랑하시므로, 가능한 한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욕되게 하는 어떤 일도 하고 싶지가 않아요.
이상하게도, 저는 율법 아래에서보다 은혜 아래서 훨씬 더 올바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율법적인 관계에서는 언제나 한계만 넘지 않으려고 애쓰게 되며, 제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를 확인하려고 노력하게 되지요. 언제나 빠져나갈 구멍만 찾게 되며, 하는 일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려 하지요. 한계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금만 더 멀리 나가보고
싶은 생각으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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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당신을 율법으로
묶어두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사랑으로 당신을 그 자신에게로
끌어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의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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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그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더 이상 어떤 일이 옳은
일인가 그른 일인가를 따지지 않고, “이 일이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일인가?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기쁘게 해드리기를 원하는데. 하나님이 나를 무척 사랑하시므로 나는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은데. 내가 이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를
묻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어떤 때는, 율법에 저촉되지 않는 일을 하면서도, 지금 제가
마음먹고 있는 일을 행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하게 할지도 모른다고 제 마음이 제게 말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와 갖기를 원하는 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율법으로 묶어두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사랑으로 당신을 그 자신에게로 끌어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율법을 떠나 우리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입니다.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선하게 사는 참된 동기는 사랑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두려움이 크리스천의 삶을 살게 하는 동기가 아닙니다. 벌이 무서워서
선하게 사는 것은 참된 의가 아닙니다. 우리는 속에 있는 온갖 비뚤어지고 잘못된 동기를
바깥의 용의주도한 행동으로 감출 수 있습니다. 단지 결과의 두려움 때문에 우리가 올바른
삶을 산다면, 억지로 금지 당한 악의 한 예에 불과하며, 그것은 참된 선이 아닙니다. 참된
선은 예외 없이 언제나 사랑이 그 동기입니다. 우리의 도덕적인 선택이,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는 어떠한 일로부터 피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우리는 의로움에 대한 참된 동기를 가진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며, 사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선함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인식할 때, 기쁨을 누립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사랑이 가득 찰 때, 평강을 누립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음과 오래 견딤으로 나타납니다. 요점적으로 말해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을 때에는, 율법과 같은 무거운 외부적인 사항들은 사라지고 맙니다. 율법은 사랑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기가 막힌 진리를 발견한 것인데,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가진
우리들이 의롭게 사는 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된다는 사실이지요.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누리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의롭게 되었으며,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쁨과 평강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이 확신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육체가 다스리던 삶은 죽었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다스리는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성품을 가졌는데, 이 성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를 참으로 자유케
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제게는 여전히 문제가 있습니다. 여전히 육체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상태에 있는 한은 육체의 소욕의 , 강력한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제 속에서는
아직도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육체는 총을 들이대고 쏘아대기 시작합니다. 저의
육체, 저의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이 옛사람의 시체를 늘 끌고 다닐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죽은 반토막의 시체를 버릴 수가 없어서 감추고 다닌 쌤 머기처럼
말입니다.
성경이 분명히 구분해서 말한 이 중요한 진리를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영은 구속을
받았으나, 육체는 아직 구속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문제가 큰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지요. 바울은 로마서 8:22,23에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육체의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고 우는지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와보니 그들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시몬아, 네가 자느냐?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옳으신 말씀은 없습니다. 저의 마음은
원이로되 저의 육신이 약합니다. 저는 탄식하고 고통하면서, “오, 하나님! 이 부패한
몸으로부터 저를 건져주시는 날을 앞당겨 주소서!”를 부르짖습니다. 저는 이 낡은 옛사람의
시체로부터 얼른 벗어나는 것이 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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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약해지는 순간에,
성령께서 제게 깨우침과 능력을 주셔서,
제 마음이 다시 주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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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우리는 모두, 우리의 타락한 성품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3-57).
그 때까지도, 불리한 것만은 아닙니다. 제가 약해지는 순간에, 성령께서 제게 깨우침과
능력을 주셔서, 제 마음이 다시 주님께로 향하게 되니까요. 저는 주님의 도움과 힘을 구하면서
승리를 맛보기 시작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힘과
능력을 의지해야만 한다는 것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중간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순조롭게
항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육체가 일어나서 능력과 권세를 강탈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저의 욕구를 다스려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욕구가 저를 다스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라고 했습니다.(고전 9:27).
자! 그러면, 제가 방심하여서, 다시 육체에 제 자신을 내어주었다고 칩시다. 그것은 더
이상 제게 구원이 없다는 뜻인가요 ? 새로 시작해서 다시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저는 여전히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고 있고, 저를
의롭다 일컬음을 받게 한 믿음이 여전히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믿음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 때문에, 저는 육체의 다스림 아래 계속 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덩이에 잠시 빠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거기에 머루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그러한 상태에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적당히 슬슬
넘어가지만, 하나님은, 제가 하고싶은 일이 있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들은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지 못하게 해주시기
때문이지요! 제가 세상을 따라 살면서, “정신없이 살아가는” 군중들 속에 섞여, 그들이 하는
온갖 일들을 하면서 살려고 한다면, 저는 그것에 실패하고 곧 그 일을 증오하게 되거나,
아니면 거기에 사로잡히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적당히 죄를
지으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지요.
기준이 전혀 없습니까?
어떤 사람은 여전히 이해가 잘 안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은혜 아래
있으므로, 하나님이 개인의 행동에 대해 세우신 기준을 무시하고 살아도 된단 말입니까?”
아니지요. 절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오는 큰 힘과 성령의 내주하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하심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기를 소원하는 새로운 성품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더 이상 옳은 일을 하기 위해서 긴장하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요한일서 5:3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말한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옳은 것을 선택하고 악을 멀리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고전문학을 읽어본 사람들은 율리시즈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이 고대의
탐험가는 여행 중에 사이렌 요정에 관한 얘기를 듣게 됩니다. 이 매혹의 요정이 간장을 녹이는
아주 아름다운 노래 소리로 지나가는 선원들을 유혹하면, 누구나 배를 돌려 소리나는 쪽의
섬으로 달려가다가 암초에 부딪히고 만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 노래를 듣고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지요. 이 이야기는 율리시즈와 같이 모험을 좋아하는
대담무쌍한 사나이에게는 구미가 당기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노래 소리를 듣고도
살아남는 첫째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율리시즈는 그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선원들의 귀를 밀초로 막아버리고, 자기를
돛대에 단단히 붙들어 묶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요정의 섬을 지나갈 때에 드디어 선정적인
음악이 시작되었습니다. 율리시즈는 온 힘을 다해 로프를 끊으려고 애쓰며, 그 섬으로 헤엄쳐
가고 싶어서 발버둥 쳤습니다. 그는 선원들에게 뱃머리를 바위를 향해 돌리라고 욕설을
퍼부었으나, 그들의 귀는 밀초로 막혀있어서 고함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율리시즈는
배가 그 지역을 벗어나 안전지대로 들어갈 때까지 묶인 몸을 풀어보려고 온 힘을 다해
사투하기를 계속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율리시즈는 요정의 노래 소리를 듣고도 살아남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후로 줄곧 기억 속에 남아있는 현혹적인 음악 때문에 악몽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희랍의 신화는 이 섬을 지나간 또 하나의 배에 대해서도 말해줍니다. 선원들이, 간장을
녹이는 애끓는 노래 소리에 끌려, 소리나는 쪽으로 가다가 암초에 부딪치려는 재앙을 만나기
직전, 선원 중에 올페우스라는 음악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 수금을 집어들고 타기
시작했습니다. 올페우스의 음악이 그 요정의 음악보다 훨씬 더 훌륭했기 때문에 선원들은
섬으로 가던 배의 방향을 돌려 안전한 곳으로 빠져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절묘한
멜로디에 도취되어서 생명을 구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가 유혹에 직면할 때에, 대부분 우리들은 율리시즈처럼 하든지, 올페우스처럼
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요정의 노래 소리가 거의 물리칠 수
없는 매혹으로 다가옵니다. 그들은 율법으로 그들을 단단히 묶고, 육체의 힘이 발동할 때에 그
율법에 저항하여 발버둥치게됩니다. 그들의 유일한 소망은 오직 그들을 붙들어 매고 있는 율법
안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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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기쁨은
세상이나 육체가 주는 어떠한 기쁨보다도 월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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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새로운 노래를 들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노래는 그들의 마음속에 들리는
하늘의 음악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너무 강하고 완전한 만족을 주기 때문에,
세상이 아무리 매력적일지라도 기꺼이 그것을 뒤로하고, 아름다운 주님이 계신 곳으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묶이거나 붙들어 매일 필요도 없습니다.
로프를 풀려고 발버둥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가지고 동행하는
영광의 기쁨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기쁨은 세상이나 육체가 주는 어떠한 기쁨보다도
월등합니다. 죄의 매력과 유혹이 그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만족을 발견한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필요 없습니다. “자, 이웃 사람의 머리를 후려갈기면 안됩니다!”라고
말하는 법에 노예처럼 끌려가는 게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이웃이 구원받는 것을 보기를 원하는
마음뿐입니다.
바로 며칠 전, 저는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갈보리채플
근처의 복잡한 길을 달리고 있을 때였는데, 한 차가 갑자기 제 앞으로 끼어 드는 통에
급정거를 하느라 브레이크가 터질 뻔 했습니다. 그 차는 자그마한 흰머리의 노파가 운전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저를 보지 못했고, 그녀는 또, 그녀를 거의 받을 뻔한 여러 차들을 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다른 운전자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았더라면, 아주 큰 사고가 날 뻔
했습니다. 그녀가 너무 어처구니없는 운전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저는 저도 모르게, “주님,
저 작은 노파가 집에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를 아는 사람들은, 제가 그런 경우를 당하고도 그러한 태도를 취했다고 하면 기적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우리의
삶에 가져다주는 변화를 경험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변함없는 사랑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진정으로 하나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때는 우리와 가깝고, 또 어떤 때는 멀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실패하기도 하고, 여러 면에서 아직 연약하지만, 우리의 변화무쌍한 태도와 기분전환에 따라
하나님이 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꾸준하고 안전합니다. 왜냐하면,
이 관계는 우리나 우리의 행동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관계는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실현시키시기 위해서 우리 자리에서 우리 대신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가 “착할” 때만 사랑하시고, 악할 때는 물리치신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저는 저의 손녀에게 꽤 자주 전화를 겁니다. 아침에 전화를 걸어서 잘 있느냐고 안부를
묻기를 좋아하지요. 어떤 때는 제가 전화를 걸면, “오늘은 참 기분이 나쁘고 불쾌해요.
할아버지!”라고 말할 때가 있지요. 그녀가 그렇게 말할 때에는 제가 그녀를 덜 사랑합니까?
그녀는 자기가 잘못된 것을 알고 있지요. 그러나 그녀에 대한 저의 사랑은 조금도 변화가
없습니다. 그녀가 상냥한 어린 천사처럼 말한다고 해서 더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그녀를 그냥 사랑하는 것입니다. 불쾌하게 대할 때에도 사랑하고, 상냥할 때에도 똑같이
사랑하는 거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기분이 나쁘고 불쾌할 때는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수 없을 거야. 나도 내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걸. 나는 형편없어. 아무도 내 주위에 오는 것이 싫어. 또, 우리가 잘못
실수를 범했을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는 것이 우리의 행동실적에 근거한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결코 우리를 위해 죽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을 의로 여겨주실 때에, 예수님은 우리와 아름답고 확고한 사랑의
관계를 맺어 주십니다. 우리는, “어서 들어와 앉아. 내가 너를 도와 줄께. 내가 너를 강하게
붙들어 줄께.”라고 말씀해주시는 그런 관계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하나님에게 너무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당신을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영원히 그의 것으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무렇게나 제 마음대로 사는 삶을 살게 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것보다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 주님 안에 있는 것이 훨씬 더 무한한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은혜 11
위장폭탄과 지뢰
추수를 하고 난 땅에는, 언제나, 떨어진 이삭을 줍기 위해 달려들어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서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갈보리채플의 주차장에서는 종종, 괴상한 교리를 주장하는 전단을 배포하는 사람들을
붙잡습니다. 어떤 때는 교회 입구에 서서, 들어오는 교인들에게 어떤 교리적인 시비 같은
것으로 치근거리는 사람들도 보게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항상, “왜 꼭 교회에 와서 전단을
뿌립니까?”라고 묻지요. 만일 우리가 특별한 행사를 계획하고 그것을 알리기 위해 전단을
뿌린다면, 우리는 아이들을 바닷가로나 샵핑쎈터로 보내지, 다른 교회로 보내지는 않을텐데
말입니다! 왜 다른 교회로 가서, 이미 그곳에서 잘 믿고 잘 다니고 있는 사람을 끌어오려고
노력하느냐 말입니다.
만일 다른 사람도 깨달아야 하고 믿어야 , 할 중요한 교리가 있다면, 우리를 변화시키려
하는 것보다는, 그 진리가 자기 삶을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켰는지를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 진리가 삶 가운데서 참으로
역사하는 것을 보여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헌신하기로 결단하고 주님과 함께
가까이 동행하는 것을 우리가 보면, 우리가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가진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틀림없이 묻게 될 테니까요.
슬픈 것은, 그런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신앙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찢어도 된다는 소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약 성경이 거짓 선생들과 그들의 간사하고 그럴듯한 수작에
대한 경고와 권면으로 가득한 이유입니다.
구원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이단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통 그들은 행위와
행위에 의한 의로움을 상당히 강조합니다. 이러한 이단에 빠진 사람에게 중생했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경우, “형제여, 죽기 전에 그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으로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지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아니! 죽어서야 알 수 있게
된다면 너무 무서운 일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하신 일을 의지하면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행위에 근거한 것이라면,
구원의 확신은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또, 우리의 구원이 신실하게 교리고백을
하는 데에 근거한다든지, 필요한 모든 행위들을 신실하게 완수하는 데에 근거한 것이라면,
우리가 죽을 때까지는 영원한 종착지를 알 수 없을 것이며, 죽고 나서 알게되면 너무 늦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의 행하신 일에만 근거한
것이라면, 우리는 구원을 확신할 수 있지요.
저는 말입니다. 제 행위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습니다. 제 자신의 의로움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일과 예수님의 의로우심에 대해서는 자신 있습니다.
찬송가 가사에서, “나의 소망은 예수님의 피와 의로우심의 기초 위에 든든히 섰네. 이 세상
어떠한 달콤한 것보다도 온전히 예수님의 이름만 의지하겠네.”라고 노래한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너무나 확신한 나머지,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했습니다.(갈 1:8).
강력한 말입니다! 바울은 ‘아나테마’ 라는 용어를 썼는데, 이 말은, “지옥의 가장 낮은
곳으로 가는 저주”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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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좁은 길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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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에 어떤 천사가 당신을 침실로 찾아왔다고 합시다. 소리가 나는 듯 해서 잠에서
깨어 일어나 보니 척이나 되는 천사가 , 7 광채를 발하면서 침대 끝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
천사가, “두려워 말라! 나는 기쁜 소식을 너에게 전하러 왔노라. 너는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명을 위해 너를 선택하셨단다. 이 일을 맡아 하나님을 위해 이
사명을 완수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구원해 주실 거야.”라고 말합니다. 이 때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천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천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성경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참으로 좁은 길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위의 말씀은, “사람이 자기 마음에 옳은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하면,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진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요즈음 상당히 인기가 있는 모든 종교를 포함하는 범
종교주의에 대해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도,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했습니다.(행
4:11,12).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오! 베드로 양반! 너무 소견이 좁으신
것 아닙니까? 예수님 만이 오직 유일한 길이라구요? 너무 마음이 좁으세요, 베드로 선생님.
저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그래요? 그럼, 할 수 없지요. 이런 사람은 저주를
받아야지요. 그러면, 이 사람들은, “그렇지만, 이 말은 너무 가혹한 말입니다. 너무 좁아요.
예수님도 그것보다는 도량이 넓으신 분이셨잖아요?”라고 대꾸하지요. 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신 분은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또, 이렇게 말씀하신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바울의 말은 언제나 옳았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안타깝게 호소하는 바울의 말이
지금도 귀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보라. 내가 재차 얘기하지만, 나나, 하늘의 천사나, 혹은
그 누구라 할지라도, 네 자신을 의지하라든지, 네 자신의 행위나, 네 자신의 선함이나, 네
자신의 의로움이나, 네가 율법을 잘 지킨 것이나, 네가 할례를 받은 것이나, 어떤 의식을 잘
준수한 것이나, 어떤 단체에 가입한 것이나, 헌금을 많이 한 것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어째서 바울이 이렇게 당당합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만하면, 우리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믿음 때문에,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이 씻기시고, 우리를 받아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요하고 풍성한 그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고, 다만 그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의 복음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선한 행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데 근거가 된다고 가르치는 교리가, 왜 많은
사람들의 삶 가운데 막강한 받침대로 버티고 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실이지, 저는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바울도 의심의 여지없이 궁금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했거든요.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갈 1:6).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떠나, 다른 복음, 그것도 절대로 복된
소식이 아닌 이상한 복음을 좇는 것을 보면 참으로 이상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믿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치 않아요. 믿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에요.”라고 말하면, 조심하십시오! 당신이 말하기를, 저 스스로 의로워야
하고, 저의 거룩함을 하나님 앞에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은 저를
하나님에게로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밀어내는 사람입니다. 저는 의롭지도
않고 거룩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는 말은 복된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복된 소식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오히려, 죽음을 선고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왜,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버리고, 행위나, 할례나, 율법을
지킴으로 관계를 맺어보려고 노력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복된 소식)을 변하려 함이라.”(갈
1:7).
사랑을 무기로 사용합니다.
사람들이 가짜를 좇아가느라 진짜 복음을 떠나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이 그들의 새로운 제자들을 끌어들일 때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바울은 그들의
공통된 술책은 열심히 접근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갈
4:17).
이단에 끌려 들어갔던 사람들이 종종 간증하는 것을 보면, 이단이 그들을 1급 대상자로
찍었을 때는, 말할 수 없는 사랑과 관심을 속속들이 퍼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충성을 맹세하고 나면, 그 열심이 사랑으로부터 교리주입으로 바뀌는 것이지요. 새 입교인은,
더 이상 사랑과 관심으로 감동을 받기보다는, 전투적인 신체단련에 들어가게 되고 결국은
기력이 다하여 지칠 때까지 혹사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감은 다 말살되어
버리고, 영적으로 교활하게 끼어 맞춘 이단 교리를 쉽게 받아들이게 되고 마는 것이지요.
처음에 기다렸다는 듯이 퍼부었던 사랑은, 그 사람을 외부와 단절시켜서 속박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들의 프로그램에 순순히 넘어가지 않으면, 그
사랑은 즉시 끝나고 그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배척 당하는 것을 보게됩니다. 그들의 열심이
실패한 것을 알았을 때는, 그 “사랑”이 즉시로 공공연한 적대감으로 변합니다.
제가 목회 초창기에 투산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였는데, “오직 예수(Jesus Only)"라는
오순절 계통의 그룹과 유쾌하지 못한 일전이 있었습니다. 이 이단은, 성부, 성자, 성령은
예수님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물론,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신 것은 누구에게 한 것이냐, 혹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난
음성은 누구의 음성인지 설명을 잘 못합니다. 마태복음 3:17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신 음성은 교묘한 복화술이라고 설명할 건가요?). 이 교리의
약점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이 주장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막강하게 달려들어 온갖 분란을
일으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두 가정이 이 교리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저를 다음 포섭 후보로 삼아, “열심히 접근”해 왔습니다. 점심에 데리고 나가기도
하고, 저의 목회의 큰 가능성에 대해 추켜세우는 등, 또, 자기들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등등 , 말할 수 없이 많은 사랑과 관심을 베풀었습니다.
한편, 저는, 언제나 사람들과 성경말씀을 가지고 논쟁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주장이 잘못된 주장일지라도, 즉석에서 공박을 주지 않고 자기 주장을 다 널어놓게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하신 말씀을
인용하면, “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그 말씀 하셨지요.”라고 대답합니다. 그 사람들이
이렇게 성경구절을 들고나올 때마다, 저는, “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라고 대답하지,
그들과 논쟁을 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 문제를 분명하게 설명할 많은 성경구절들을 알고 있지만, 저는 이 친구들과
논쟁하고 싶지가 않은 거지요. 예수님이,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마 5:25)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저는 그들이 지적한 성경구절에는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괴상한 해석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성경말씀 그 자체에는 언제나 동의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제가 논쟁을 안 하니까, 그들은 저를 포섭한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하루는, 주일 장년 성경공부에 그들이 자기들의 교리를 내놓았습니다. 교사가 그들의
주장을 진리의 말씀으로 설명하며 옳지 않다고 논박했을 때, 그들은 저를 들먹이며, 저도
자기들의 주장에 동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사는 분쟁을 수습하기 위해서 즉시로 저를
불렀습니다. 제가 성경공부 반 전체에게,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계신 것을 믿는다고 말하자, “오직 예수(Jesus Only)”파는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날 그들은 제게 전화를 걸어서, “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서 좀 봅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날 저녁 저는 그 집을 방문하게 되었고, 그들은, “도대체 진리를 거부하는 그
생각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목사님이 진실로 믿고있는 진리를 어떻게 부인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고 따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저는 진리를 부인하지도
않았고, 제가 믿는 것을 부인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제가 믿는 것을 성경공부 반에서 그대로
얘기했을 뿐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복화술과 같은 허튼 수작을 하신 것이라고 생각지 않으며,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저는, 비록
하나님은 한 분이실 지라도, 성부, 성자, 성령이 삼위의 구별된 인격체로 계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삿대질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저를 협박하면서, “형제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로 말씀해주셨고
환상으로 보여주셨는데, 교회 앞에서 우리가 옳다고 말하지 않으면, 당신은 검은 관에 누워서
영구차를 타고 나갈 걸세!”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쇄도하는 협박의 산사태를 맞으며
어리둥절했던 것은, “내게 그렇게 퍼붓던 이 사람들의 사랑은 다 어디로 갔는고?” 였습니다.
“당신이 번복할 것이지 안 할 것인지 이번 토요일까지 생각해보고 마음을 정하도록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저는, “토요일까지 시간이 필요 없습니다. 지금
말해드릴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니,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해보세요, 형제여. 그리고, 토요일 밤까지
번복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제 절대로 당신의 교회에는 나오지 않을 겁니다.”
우리 교회 주일학교 아이들이 총 53명이었는데, 그 중 11명이나 이 그룹의 지도자가 낳은
아이들이었지요. 주일학교가 성장하기를 바라는 교회로서는 매우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토요일 밤에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자, 형제여, 어떻게 결정했습니까?” “저의
마음을 바꾸거나 생각을 바꾼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좋습니다.
우리가 사전에 충분히 경고했지요 ?” 그렇게 말하고는 전화가 딸가닥 끊기는 소리가
낫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사라졌고, 그의 아이들 11명도 같이 사라졌습니다.
이 사람과 그의 추종자들은 저를 포섭할 가능성이 있는 동안은 사랑과 관심을 보이며
접근하기에 무척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들의 속박이나 교리에 동조하지 않을 것을
알고 난 다음에는, 저와 교회를 둘 다 헌 신짝 버리듯이 차버렸습니다.
그런 것은 진실 된 사랑이 아닙니다. 저를 포섭해서 동조하도록 하기 위한 가식적인
행동에 불과한 것이지요. 한 때 셰익스피어가 말했듯이, “상대방의 상태가 바뀔 때에, 변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넘어갈 조짐이 보이지 않자, 그들의 본심이 표출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거짓 선생들이 자주 쓰는 수법입니다. 그들은 접근해서 포섭하기 위해 사랑과
관심을 쏟는데 총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대상자가 그들의 포섭에 동조하지 않으면, 즉시로
배척해 버립니다.
사람들이 매우 사랑하면서, 매우 친절하고, 매우 따뜻하고, 매우 강렬하게
접근해오지만, 그 목적은 자기들이 믿는 이단종교로 당신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당신이 넘어가지 않을 때는 조심하십시오! 그들은 온갖 상스러운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것이며, 온갖 심판과 정죄로 매도할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의 복음이 아닙니다!
걸려서 넘어지지 마십시오.
거짓을 좇아 진리를 떠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언제나 마음 아픈 일입니다. 당신이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 앞에 닥쳐오고 있는 뻔한 고통으로부터 그들을 구하고 싶지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마음을 알았습니다. 갈라디아서
5:7은,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과 나누었던 관계를 생각케 해주는 씁쓸하고도 달콤한
구절입니다. 그는,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전에는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서로를 그렇게 사랑하면서,
바울이 아주 어려운 형편에 처했을 때, 자신들을 돌보지 않고 파격적으로 바울을 돌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의 눈이라도 뽑아 기꺼이 바울을 위해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잘못에 빠져서,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원수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왜입니까?
바울이 그들에게 진리만을 말해 줄만큼 그들을 사랑한 이유밖에는 없습니다.
바울은, 달리기 선수들의 경기를 묘사하면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처음에 출발은 잘
했지만 달리다가 엉켜서 넘어지는 선수에 비유했습니다.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그는 말합니다.(갈 5:8).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새롭고 더
깊은 진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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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신자는, 어떤 가르침이
옳은 것인지 옳지 않은 것인지
성경말씀을 찾아보아야 할 책임이
각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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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 종류의 거짓 교리에 넘어갔는지요? 심지어는 많은
경우, 예수를 믿는 신실한 신자까지도 부흥사의 교묘한 이야기에 넘어가곤 합니다. 그들이
성경말씀 때문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교리를 펴는 사람의 열심에 영향을 받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건치 못한 교리에 영향을 받은 피해자의 비참한 결과는, 속박에 얽매이고
개인의 인격을 거의 박탈당하는 것으로 끝난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해서, 모든 것이
정상으로 보이는 사람이 이단의 지배 아래 빠져서, 그들의 지도자를 위해 공항에서 꽃이나
땅콩을 팔러 다니는 그러한 처지까지 내려갈 수 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이러한
교리는 절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사실이지, 속박으로 이루어진 조직
안에서는, 사람이 자기들의 주인이 되어 있는 지배 아래서, 종노릇하고 있는 자신을 곧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 가장 좋은 안전장치는,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는 것”입니다.(데전 5:21). 그 사람이 얼마나 높이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든지, 얼마나
훌륭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 것에 상관없이, 복음의 진리 대신에 그 사람의
말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신자는 각자가 성경말씀을 찾아보고 그 말이 옳은지를 판단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조심이나 경계를 하지 않고, 그 사람의 생김새나, 말하는 스타일이나,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무턱대고 그 말하는 것을 다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우리에게 제시된 가르침을 점검해보지 않을 때, 우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닌 교리 앞에 우리 자신을 완전히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바꾸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진리를 개편하지 않으시며, 새로운 계시로
보완하지 않으십니다. 은혜의 복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변한다고 주장하는 설교자를
찾기는 그다지 힘들지 않습니다.
어느 이름으로도 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까지도, 율법주의를 부르짖는 온갖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세례를 받았습니까? 형제여. 누가 세례를 주었습니까? 그들이
당신에게 세례를 줄 때 뭐라고 말하던가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까지도 말합니다.
“당신이 올바른 형식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으면, 그 세례는 참된 세례가 아닙니다. 물로
뿌리는 세례를 받았습니까? 물 속에 잠기는 침례를 받았습니까?”
비극적인 일은, 이러한 가르침들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하신 일로부터 우리를 떼어내는 데 일조를 할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떠한 의식도,
그것이 세례든, 성찬이든 세족이든, 어느 한 가지도 우리를 의롭게 하는 데 사용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완전히 믿음에 의해 우리 것이 되었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입니다. 이 사실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 참된
능력과 평강을 주는 열쇠입니다. 위대한 사도가, “어떻게 너희가 이같이 속히 진리를 떠나
복음도 아닌 다른 복음을 좇아 갈 수 있는지 이상하게 여기노라!”라고 말한 이유를
알겠습니다.
참된 복음은 복된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죄 용서함을 받는 복된 소식입니다 당신과 . 하나님과의 관계는, 당신의 의로움이나, 당신의
행위나, 어떤 율법을 지키는 것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희생을 믿는
것에 근거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이 하신 이 일을 믿기만 하면, 당신은 하나님과 아름답고
끊어지지 않는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질 수 있습니다. 당신의 모든 죄는 씻음을
받을 것이고, 부족하고 실패하고 바르지 못한 자세에 대한 모든 죄책감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것들이 붙어 있을 수가 없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의롭게 되었으니까요.
바울은 행위를 근거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보려는 어리석음에 대해 잘 알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결과를 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그가 시작한 곳이거든요.
“내게 율법에 대해 말하지 마시오.” 바울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율법에 대해서 다
압니다. 율법으로 의로워지는 것에 관해서도 다 압니다. 나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나는 열심
당원이었습니다. 나의 형제들보다도 훨씬 열심 있는 율법주의자였습니다. 내 앞에서 율법 얘기
하지 마십시오. 율법에 관해서는 속속들이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었을 때, 나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건져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가진
우리들은, 어느 누구도,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생각이나 죄책감으로 당신을 괴롭히거나
넘어지게 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아무 가치가 없는 짓이지요. 우리는 아무도 우리 이름에
‘아나테마(지옥의 가장 낮은 곳으로 가는 저주)’와 같은 단어를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은혜 12
전부 지키지 못하면 소용없습니다.
얼마전에 저는, 오레곤에서 목사님들의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행사가 시작되기
전에 한 목사님이 제게 물었습니다. 자동차가 지나가면 손을 들어 태워달라고 얻어 타고는,
같이 가면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말하고는 금방 사라져버리는 이상한 사람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들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그런 얘기를 들은 것은
오래 오래 전 1944년 캘리포니아 버뱅크에 살 때였습니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항상
똑같았습니다. 한 부부가 그 사람을 태우고 주유소에 기름을 넣기 위해 들어가서 사라진
사람에 대해 말하면, 그 주유소 직원 얘기는 오늘만 해도 벌써 아홉 번째 똑같은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지요 그 질문을 . 한 목사님은 웃으면서 제게, “나는 이제야 그 얘기를
들었으니, 오레곤이 얼마나 시골인지를 아시겠지요? 오레곤까지 그 소문이 오는데 50년
이상이 걸렸으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일을 열심히 하고도 모두 허사가 되는 적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의 말씀의 확고한 반석 위에 기초를 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저는
주님으로부터 어떤 초자연적인 특별한 계시를 받는 것보다, 확실히 증거된 성경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제게 말씀해주시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한 천사가 제게 와서 어떤 혁명적인
진리를 전하러 가져왔다고 말할지라도, 저는 그 메시지가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의아해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돌아오면 걱정할 필요가 없고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과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서 오직 하나의 확고한 기초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 위에 기초할 때에, 우리는 최근의 별난 교리나 “새롭게 개선된” 복음에 의해 현혹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 위에 굳건히 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이 길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풍성히 주어진 영광스러운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오직 유일한
길입니다.
어떻게 하면 굳건히 설 수 있습니까?
굳건히 서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간단한 믿음으로부터 떠났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확고하게 서기 위해서는
성경말씀을 굳건히 붙드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를 주신
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엡 4:11,12). 성도가 온전케 되는
표시는, 믿음이 하나같이 확고하여,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며,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엡 4:14). 우리가 말씀에
기초를 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특별히 속임수가 난무하는 요즈음 세상에서 말입니다!
물질 만능주의 기복신앙(“하나님은 그의 모든 자녀들이 벤츠 자동차를 타기를
원하시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토요타 자동차를 타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얼마나 신령하지 못하면 그럴까요?”)으로부터, 또, 특정한 방법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새로운” 계시에 이르기까지, 뒤틀린 괴상망측한 교리가 오늘날 공공연히 판을 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5:1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라고 말한 그의
메시지는, 그가 처음 편지를 썼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이 되는
말입니다. 종종, 교회 자신이 율법적인 의로움의 기준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데 앞장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법과 규칙은 보통 잘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세세히 규정한
법을 잘 지키는 것과 구원을 연관시켜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단들은 엄청나게 많은 개인
행동지침을 내리면서, 구원은 이러한 권위에 절대적으로 무조건 복종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엄격한 절대조직 안에 들어가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자기의 자유를 희생하며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단체가 보장하는 구원만
알았지, 그 법의 기준을 어길 때에 따르는 형벌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
조직에 노예가 되었던 많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들이 그 단체를 떠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믿었다고 말합니다. 단체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거나 다른
수법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에게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교회를
찾으라고 권면해주는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한 교회입니다. 우리 갈보리채플에서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잘 둘러보고 가장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교회를 찾으라고 일러줍니다. 우리 교회에
와 보고는 좀더 감정적이고, 떠들썩한 예배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자기들에게 맞는 교회를 찾아 자유롭게 예배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어는 누구도 우리 교회에
억지로 얽매여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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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리를 마음에 품는 것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우리의 행위를 신뢰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잘라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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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사용한 “종의 멍에”란 말은 아마 시몬 베드로가 첫 번째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이 모인 회의 앞에서 사용한 말을 인용한 것일 겝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베드로는,
이방인을 전도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고넬료의 집의 사건을 설명하면서,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종의 멍에를 씌우지 말자고 건의했습니다.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10절). 바울은 베드로가 사용한 말을 인용하면서, 은혜 안에서의 자유의
메시지는 자기 혼자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이 자유는
교회의 흔들릴 수 없는 굳건한 기초입니다.
의식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거부된 가르침의 핵심은 이방인들도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할례의
의식을 행해야만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사도와 장로들은, 행위는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다는 바울의 교리에 동의하였습니다. 바울은 나중에, 의식을 신뢰하는 것은 복음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라고 말했습니다.(갈 5:2).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행위든지 행위를 신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우리를 잘라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해줍니다. 지금은 구원을 위해서 할례를 받아야한다고
가르치고 다니는 선생들이 많지 않습니다 마는, 그러나, 아주 진지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얼마나 자주 듣고 있습니까?
어떤 이들은 이 주장으로부터 온갖 괴상한 극단 교리들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아야 할뿐만 아니라 “올바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무리들도 있지요. 어떤 무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특정한 자기 교파에서 안수받은 목사에 의해서만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세례 방식에 심취해서 . , 물을 뿌리는 세례냐 물 속에 잠기는 침례냐로
교회가 갈라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물 속에 들어갈 때 앞으로 엎드리느냐 뒤로 눕히느냐로
싸우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든 분열의 뿌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기 위하여 특정한 선한
행위를 잘못 신뢰하고 있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은, 우리가 구원을
위하여 선한 행위를 신뢰한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아무 가치가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양쪽의 경계선 위에 서서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선한 행위를 신뢰하는 일을 다 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근거로 세례를 신뢰한다면, 우리는 행위를 신뢰하는 것이며,
우리를 지탱해 줄 수 없는 모래 위에 영적인 집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한 청년이 제게 와서, 자기는 더 이상 크리스천이 아니고 몰몬교에
가입했노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위해 무엇을 신뢰하느냐고 그에게 묻자,
그는 대답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계속적인 몰몬교의 멤버십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솔직하게 그의 결정은 비극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 외에 무엇이든지 다른 것을 신뢰하는 순간, 그는 너무 멀리 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 외에 또, 할례나, 세례나, 십일조나, 계속적인 교회의 멤버십을
주장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아무 가치가 없어집니다.
전부 지키지 못하면 소용없습니다.
의로움을 위하여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골라서 원하는 것만 지키는 방법을
택할 수 없습니다. 구원을 위하여 선한 행위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든 법
전체에 대하여 빚진 자들이 됩니다. 모든 법을 철저하게 지켜야만 하는 것이지요. 바울이
갈라디아서 3:10에서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 이 진리를
강조했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법을 바라본다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아무 것도 해주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온전함을 위하여 모든 계명들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율법에 근거하든지 은혜에 근거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일격을 가하기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는,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말했습니다.(갈 5:4).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 보다 자기들의 행위가 의롭다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은혜를 거부한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의 선한 행위로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면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기 위해 자기들이
성취한 훌륭한 일들에 대해 듣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었고, 그들의
믿음이 의롭게 여김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서서 아무도 서로의 선행을 비교하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오직 한 분이 하신 일만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인정을 받을 것인데 그 분은 바로 우리 주 ,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예수님 한 분만이
우리의 구원으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그 분이 안 계셨더라면, 우리는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 같이,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했든, 아무리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했든, 아무리 많은 교회를 주님을 위해 세웠든 상관없이, 우리의 모든 영광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로움은, 선한 행위를 했느냐, 혹은
얼마나 노력했느냐, 혹은 어떤 의식이나 식물에 관한 법을 지켰느냐에 달리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의로움은,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영원무궁토록,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간단한
믿음의 결과로 얻어진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진리는,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들간에 모든 차이를 없애줍니다.
저보다 당신이 낫지 않고 제가 당신보다 낫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로 구원받았을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받아주실 의는 오직 한 가지밖에 없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힘입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 크리스천들로서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신 그 자유 안에서 굳건히 서야합니다. 하루에 7시간을 기도하여야만 한다든지,
아침마다 성경을 25장은 읽어야만 한다든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의롭지 못하다는 정죄의
법칙들이 절대로 우리 삶에 들어와서 자리잡지 못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의는 우리가
얼마나 읽느냐, 얼마나 기도하느냐, 얼마나 금식하느냐, 얼마나 헌금을 하느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씻기시고 깨끗케 해 주셔서, 하나님의 눈앞에
정결하게 만들어 주신 것을 신뢰하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의 역사는 다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더 개선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선한 행위는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신 것과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이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좇아 사는 것은
우리를 더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하고 더 만족하게 해줄 뿐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나를 그토록 사랑해주시고, 또 영원히 나를 보살펴주실 것을 약속하신 이에게
나의 삶을 드리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인도하시는
삶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만족스러운 삶이지요.
두 가지 선택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열심히 행위로 노력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에 충분하게 하든지,
아니면,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믿고 신뢰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우리의 삶의 순간 순간마다, 이 길 아니면 저 길로 가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충분한 선한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면, 실패와 좌절뿐일 것입니다.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을 믿으면, 우리의 삶을 즐기면서 평강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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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율법과 규칙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레슨을
끊임없이 배워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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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리 집을 좀더 크리스천의 분위기가 나는 가정으로 만들어보기 위해, 식구가
다같이 노력해서 협조하는 일을 잘못 제안해서, 제 자신이 곤경에 처했던 일을 기억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면서, 형제들 사이에 라이벌 의식이 가장 강해진 때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이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데, “바보”, 혹은 “멍청이”, 혹은 “쪼다”라고 부르면서
마찰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훈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어떤 규칙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자, 이층집에서 가장 하기 싫은 일은 층층대를 진공청소기로 소제하는 것이었는데,
우리 집의 가정 생활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가족간에 서로를 모욕하는 말을 할 때마다 벌점을
기록하기로 해서, 누구든지 가장 많이 어긴 사람이 층층대를 소제하기로 하는 규칙이었습니다.
이 규칙은 상당히 합리적인 규칙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마는, 하루는 그만 제가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두 녀석이 장난을 치고 있었는데, 제가 방에 들어섰을 때는 온통 방이 어질러져 있었고
방을 다 망가뜨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것을 목격한 제 입에서 처음 나간 말은, “어느
바보 멍청이 같은 놈이 이렇게 어질러 놨어?”였지요. 누가 층층대 소제를 하게 되었는지는
말 안 해도 아시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것으로부터 한 가지 좋은 것을 배웠습니다. 율법과 규칙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끊임없는 레슨을 또 배운 것입니다. 동기는 좋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가족처럼 의로워지려는 노력으로 발버둥칩니다. 그러나, 언제나 비참한 실패만을
불러올 뿐이지요.
우리가 거룩해지려고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우리의 의는 하나님의 눈에는 더러운
옷같이 여겨진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의롭게 되고
또,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다른 길을 열어주셨는데, 그것은 우리가 선물로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 힘으로는 완벽한 수준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힘 입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앞에
주어진 아주 중요한 선택입니다. 우리는 낡고 때묻고 더러운 옷을 깨끗케 해서 하늘나라에
내놓을 수 있도록 노력할 수도 있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의 두루마기를 입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겪은 진공청소기 사건은, 우리의 오직 유일한 소망은 은혜를 선택하는 것뿐임을
상기시켜줍니다.
항로를 벗어나서 사라졌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서 코스를 벗어나기가 얼마나 쉬운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나 믿음 생활에 있어서 아주 부분적인 분야의 자그마한 흠으로 여겨지는 일들이,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중심을 완전히 벗어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매일 교리적인 순수함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갈수록 더욱더 중요시 되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교회가 대환난에 들어간다고 , 믿고있는 한 친구와 영적인 문제로 토론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로서는 그렇게 중요하게도 생각지 않는 소소한 종말론의 문제를
가지고, 제가 왜 그다지도 강력한 입장을 취하는지를 의아해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교회가 대환난에 들어간다면,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144,000명은
누구인가?” 그는 대답하기를, 그 사람들은 교회의 일부인데, 그 이유는 교회가 영적인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또 묻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든 약속들이 이런 저런 모양으로 교회를 통해 영적으로 다 이루어졌다고 믿느냐고
했습니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래요? 당신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종말론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관한 교리마저도 완전히 영향을 받은 것 알고
있습니까?”라고 말하면서, 바울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 5:9).
다른 예화를 들어봅시다. 비행기로 로스앤젤스에서 하와이까지 여행을 한다고 합시다.
이륙하기 직전에 조종사가 방송을 통해, “승객 여러분, 잠시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항공기의 방향감각장치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걱정 마십시오. 2도 이상은
항로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로스앤젤스를 떠날 때의 2도를 벗어나는
것은 별 것 아닙니다. 그러나 태평양 상공을 3,000마일 정도 날아갔을 때는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겠지요. 빅 아일랜드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약간의 코스 이탈도 피하는 것입니다. 교리의
문제에 있어서는, 성경을 찾아보고 모든 것을 확인하고, 사람들의 열정적인 논쟁에 말려드는
것을 피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렇게 하여야 우리는 은혜 안에 설 수 있습니다.
값비싼 경계.
속지 마십시오. 속지 않기 위한 경계를 위해서는 희생이 따릅니다. 처음부터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반대와 핍박이 따랐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5:11에서,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면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라고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에 바울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은
여러 가지 선행으로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면, 기독교에 대한 반대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항상 거치는 것이 되어왔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뿐임을 말해줍니다. 그리스도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거침이 됩니다. 왜냐하면 너무 협소하고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을 향하여 영생의 소망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선언합니다. 바울이 요점적으로 말한 것은, “내가 자유주의로 흘러,
‘당신이 원하면 할례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했더라면, 아무도 나를 핍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진리를 고수하고자 굳건히 서려했기 때문에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절대로, 말하기를 주저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할례의 문제를 극구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항해서 직격탄을 날리는 바울의 강한 언사를 통해서 우리는 그의 진리를
고수하려는 각오를 볼 수 있습니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라고 그는 갈라디아서 5:12에서 말했습니다. 베어 버리다는 말의 원어의 의미는
“거세하다” 혹은 “삭제하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이 거짓
선생들이 육체를 통한 약간의 여러 가지 일들이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자기들
스스로도 그렇게 끝까지 해보라지 ! 절단 나고 말 테니까!”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당시의
말을 요즈음 말로 바꾸어 본다면, “세례를 통해 의로워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끝까지
세례 주장하다가 물 속에 가라 앉아버리라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은혜의 복음을 왜곡하려는 무리들에 대한 바울의 격한 감정을 표출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사도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을까를 생각해보십시오.
당시 이 교회 안에는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셨고,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거짓 선생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주님 안에서
모두 하나되어 있었고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이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왜곡된 복음을 들고
나오면서부터,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파가 갈리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되면서, 이들이 누리던
그토록 아름다운 사랑과 교제는 오랜 날의 추억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바울의 공격이 단호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감사합니다. 바울 선생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우리들은 바울에게 말할 수
없이 큰 감사의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많은 교회가 유대교의 한
종파에 속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굳건히 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새로운 신자들이 되게 한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핍박을 받아야했고, 비방을 받기도 했고, 대부분의 그의 사역에 사나운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을 마감할 즈음에 다음과 같은 가슴을 찡하게 하는 감동적인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위해 굳건히 설 수 있도록 은혜 주시기를 원하며, 그
진리를 사랑으로 나눌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와
진리를 아는 지식 안에서 굳건히 설 수 있도록 힘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풍성하게 부어주신 축복과 자유가 얼마나 깊고 놀라운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 안에 굳건히 서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
안에서 동행하며, 이러한 축복들을 날마다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은혜 13
왕가의 가족들
어린아이일 적에, 왕가에 아기로 태어나면 어떤 생활을 하게될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틀림없이, 부자로 사는 것은 어떠한 삶일까 하고 많은
시간을 곰곰이 생각하며 꿈꾸어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지는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가진 관계 때문에, 믿음을 통하여 영적인 나라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 갈라디아서 3:29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기원에 대해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의 신분이 더 이상 유럽이나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음을 알게됩니다. 우리의 족보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며,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별한 관계 때문에, 우리는 이제 그 하나님의 왕국의 상속자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상속자란 무엇입니까?
큰 상속을 받은 여섯 일곱 살 된 아이는,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상당히 부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성년의 나이가 차기까지는, 그의 부모가 유언서에 규정한 대로,
그 집안에 고용된 하인보다 실제적으로는 나을 것이 없습니다. 물론 상속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충분히 주어지겠지만, 그의 나이가 차기까지는 그의 상속 재산의 처리에 대해서는 결정할
권한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상속자의 이러한 형편이 바울 이후 지금까지 생각해보면 바뀐 것이 없습니다. 바울은,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라고 말했습니다.(갈 4:1,2).
상속자가 현재는 그 재산을 관리할 모든 책임을 맡은 청지기의 권한 아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후견인이 또한 있어서, 그가 어른으로 자랄 때까지 자라는 과정을
감독하고 옳고 그른 것을 가르치게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로마시대에는 남자아이가 일곱 살이 될 때까지는 유아로 간주되었으며, 이 때부터
17살이 될 때까지는 어린이의 신분을 나타내는 작은 자주 빛 띠를 두루마기에 두르도록
되어있었지요. 17살이 되면, 자주 빛 띠를 두르지 않은 다른 두루마기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성년이 되었다는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25세가 되기까지는 여전히 상거래를 할 수 있는
법적인 권리를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유대인의 문화는 이것보다는 사뭇 간단했습니다. 열 두 살이 되는 남자아이는 성년이
되는 예식을 거행하게 되는데, 이 예식을 통하여 완숙해진 “언약의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아이의 아버지가 일어나서, 더 이상 아들의 행동에 대해 책임이 없음을 감사하는
기도를 올리게 되고, 이어서, 아이는 응답으로 일어나, 성년으로서 앞으로 자기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질 것을 수락하는 기도를 올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잘 알려진 성년이 되는 과정을 하나님의 백성과 율법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 아래 처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약속의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가 율법 아래 있는 동안은 그들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위 “때가 차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날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주심으로 모든 약속을 이루시는 날입니다. 그 때까지는 ,
이스라엘은 율법이 주장하는 권한 아래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것이었지요.
율법의 속박
율법은, 식사법으로부터 상거래와 결혼 관계 등 거의 모든 일상생활에 걸친 문제들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 유아기를 졸업하고 성년기로 들어갈 때까지 모든
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게 율법이 적용되며, 그 때에 가서야 마침내, 그들에게 약속된 상속을
완전히 누릴 수 있게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오실 메시야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새롭고 놀라운
관계를 갖게 될 약속이 주어져 있었는데, 이 약속은 아버지가 정하신 그 때까지는 이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은,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전반에 걸쳐, 질서와 조화를 이루면서 살 수 있도록 기본
골격을 정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의 규제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전부라면,
우리는 율법의 속박 아래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던 것이지요.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갈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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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은 절대로,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는
부요하고 충만하고 자유로운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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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세상 초등 학문”이라고 말한 것은, 우리가 삶의 기본이라고 말하는 것을
뜻한 것입니다. 즉, 모세의 율법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해야할 것과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한 근본적인 사항들에 대해 상당히 효력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첫 번째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 회의에서, 신자들의 생활을
관장하는 복잡한 율법의 규정들에 관한 질문에 대해 강력하게 대처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신자들은 더 이상 바깥 행동을 규정하는 이러한 율법들을 노예처럼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결론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교회들이 여전히 그와 비슷한 통제를
교인들에게 가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저는, 여신도들에게 어떠한 복장을 하여야
하고, 어떠한 헤어스타일은 되고 어떠한 헤어스타일은 안 된다는 것에 대해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강제권을 부여받았다고 믿는 교회에서 자라났습니다.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여자들의 화장법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의견을 계시 받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로서, 언제나, 우리가 무엇은 할 수 있고 무엇은 할 수 없는가에 대한 명령을
끊임없이 받아야 했습니다. 그 교회가 우리를 모세의 율법 아래로 다시 몰아넣었다고 까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마는, 그러나 너무나 많은 죄책감과 속박을 제게 지워주는 통에 무거워
견딜 수 없어 허덕였던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들이 정해준 기준에 따라 살지 못했던 저는
끊임없는 회개 속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율법은, 절대로,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는 부요하고 충만하고 자유로운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지 못합니다. 죄책감과 좌절만 더해줄 뿐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스토리의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때가 이르면
바울의 시대에는 상속을 주관하는 , 법적 절차가 매우 명확했습니다. 아린 아이의
나이가 유언에 명시된 성년의 나이에 이르면, 더 이상 후견인이나 청지기의 감독이 필요 없게
됩니다. “때가 차는 날”이 이르러, 성년의 나이가 되면, 자기에게 약속된 상속을 직접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바울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갈 4:4)이라고 말한 것은, 이 일을 마음에 두고 한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로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충만한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차다”라는 말의 개념은 또 하나의 다른 면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보내시기 전 거의 1400년 동안, 그의 백성들을 율법 아래 살게 하셨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의 시간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고, 그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예수님이 인류를 찾아오신 때가 왜 가장 적절한 때였는가 하는 분명한
이유들을 많이 볼 수 있게됩니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유례없는 평화의 시대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탄생하시기
13년 전부터 시작해서 그가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는, 로마의 야누스 신전으로 가는 문들이
닫혀 있었습니다. 로마가 전쟁을 할 때마다 이 신전은 야누스 신에게 승전을 비는 신도들로 늘
붐비던 곳이지요.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는 로마의 지배에 의한 평화, 팍스로마나가 굳건히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로마는 교통 개발을 위한 거대한 발걸음을 내디디며, 온
제국을 가로지르는 잘 설계된 도로망을 구축하게 되었고, 또한, 명확하고 표현법이 뛰어나고
섬세한 헬라어가 로마 지배하에서 전세계적인 공통어로 사용되게 되는 때였습니다.
이러한 모든 여건들은, 1세기에, 복음이 급속도로 퍼져나가는데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위한 그의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가 이처럼 온 세상을 강타할 수 있는
획기적인 순간이 오기까지 기다려오셨을 것입니다.
또, 바울이,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한 것에 주의하십시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영원 전부터 이미 존재하시던 분이시라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 마음에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오셨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이 세상에 보내진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약속하신 축복을 충만히
받기 위한 새로운 언약을 세우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예수님을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처녀탄생에 관한 말씀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신
말씀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15에서,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을 약속하시면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결별되게 하고 사망에 이르게 한 사탄의
역사를 멸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유대인으로 나셨고, 먼저 유대인의 구원을 위하여 보내지셨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침내 영적인 어른이 되어서 영적 상속의 전체를
온전히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그들의 상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좋으신 아빠인가!
지금은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우리 갈보리채플에 초창기부터 나오시던 아이바
뉴먼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도를 저는 종종 그리워합니다. 이 신령한 여성도는 제가 이
세상에 산 햇수보다 더 많은 세월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저는 그 분의 기도를 참
좋아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빠!”라고 부르시면서 기도를 시작하시는데, 얼마나 아름답게
들리는지요! 그분은 가깝고, 아름답고 아주 친밀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빠”로 관계를 맺고 계셨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당신도 그와 같이 부요하고 가까운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을 알고 계십니까? 이것이 바로 바울이 이렇게 말한 말씀의
요점입니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우리는 이 구절에서, 삼위 하나님 전체가 나타나신 놀라운 그림을 봅니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의 성령을 우리 마음에 보내 주신 것이지요. 이와 유사한 구절을 로마서
8:15,16에서 볼 수 있는데, 이 구절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관계는 오직 온전한 영적인 중생을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6,7).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날 때, 바울이 “아바”라는 호칭을 사용해 묘사한 하나님과의
놀랍게도 가깝고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아바라는 호칭은 “아버지”에 대한 애칭입니다. 아람어인데,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어린아이들이 “아바! 아바!” 부르는 소리를 흔히 듣게 되는데, “아빠! 아빠!” 하고 부르는
것이지요.
예수님도 종종 이 호칭을 사용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의 기도에서 이 호칭을
사용하시는 것을 너무 자주 들었기 때문에 헬라어로 번역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그의 아버지와 누리던 것과 같은 따뜻하고 가까운
관계를 가져보기를 원했기 때문에 아람어의 표현을 그대로 썼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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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을 사랑스러운 아버지로,
아니, 우리 아빠로 알게되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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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은 이와 똑같은 개인적인 사랑의 밀접한
관계를 우리와 갖고 싶어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지요! 우리는 너무 자주
하나님을 위대하시고 높이 계시고, 전능하신 창조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아니, 우리의 사랑스런 아빠로 알아주기를
바라십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친근감을 불경스러운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원의 밀접한 관계로 우리를 부르신 이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제가 이탈리아
신자들과 함께 기도회를 가졌던 일이 생각납니다. 저를 위해서 그들은 영어로 기도했지만,
계속 하나님을 “파파”라고 불렀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이거 너무한 것 아닌가
생각했습니다마는, 잠시 듣고 있는 동안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깊은 사랑과 밀접한 관계를 잘 나타내 주는 표현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부르실 때 두려워하고 , 주눅 들린 노예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매우 사랑스런 자녀로 받아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이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자녀들이 저의 집을 방문하러 올 때에, 차려 자세로 경례를 하며
우렁찬 목소리로 신고하지 않습니다. 온갖 예의와 절차를 갖추면서 다가와서는, “오!
경애하옵는 아버님이시여, 오늘 미천한 소자의 무지한 소청을 들어 주시옵소서.”라고 하지
않지요. 보통 이렇게 하지요. “헤이, 아빠! 5달러만 주세요.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요.
나중에 가르쳐 드릴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 동안에는, 우리 마음이 편안히 쉬면서
위로를 받고 재충전 받기를 원하십니다.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자유롭게 교제하며 마음 문이
활짝 열리는 스스럼없는 관계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는 어차피 다 펼쳐놓은
책과 같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시니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차갑고 서먹서먹하고 거리감이 있는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우리 각자를 향하신 뜨거운 사랑을 우리 마음속 깊이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떠한 호칭이든지 가까운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받아주십니다. “아버지”든, “아빠”든, “파파”든 말입니다.
이상적인 아빠
하나님은 가장 순결하시고, 가장 진실하시고, 가장 거룩하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가장 이상적인 분이시지요. 하나님 앞에 두려운 것은, 우리의 부패한 문화가 많은 아이들의
마음속에 올바른 아버지 상을 파괴하고 말았는데, 이것은 큰 비극입니다. 저는, 항상 저에게
가깝게 또 아름다운 관계로 대해주시는 저의 훌륭하신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자기의 삶에서 경험한 부패한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의 관계로 받아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당신이 어떠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당신과 가장 가깝고 깊은
교제의 관계를 가지기를 원하시며, 사랑이 많으시고 의로우신 아버지,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돌보시는 아버지이심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신 그의 성령이, “아바!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사랑을 부어주시고, 자비와 선하심을 풍성히 베풀어 주셔서,
우리가 그를 더욱더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이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목적이 당신 안에 이루어져서, 하나님과의 그처럼 가깝고 깊은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마음속으로부터 “오! 아빠!” 라고 부를 수 있을 때까지는 당신의
삶은 결코 만족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들에게 물어봅시다. 당신의 아기가 처음으로 “아빠”라고 부르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뚜렷하게 들리지요. 분명하게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저의 딸아이는 참
똑똑하기도 하지요. 처음 입을 뗀 말이 “아빠”였으니까요. 정확하고 분명했습니다. 저는
뒤돌아 서면서, 고함을 질렀습니다. “뭐라고?” 저는 주위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 그렇게
속상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안 믿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시 해보라고 자꾸
시켰지만, 방긋방긋 함박웃음만 웃었지 다시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분명히
들었거든요! 얼마 안 있어, 그녀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불렀고 저는 너무너무 마음이
기뻤습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오 아빠 하고 “ ! !” 불렀을 때, 하나님은 들으시고 너무너무 마음이
기쁘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으로부터, “헤이, 이 분이 우리 아바야. 이 분이 우리
아빠야” 할 때부터, 관계가 시작됩니다. 놀라운 것은,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앞으로
누리게 될 무궁무진한 풍요롭고 아름다운 교제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속자
하나님을 우리의 “아바”로 모시는 관계로 들어가는 것만도 이해할 수 없으리 만치
엄청난 일이지만, 이것이 스토리의 끝이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4:7).
하나님과 양자의 관계를 가지게 되면서,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신 그의 성령이 “오!
아바!”라고 부르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영광스러운 왕국의 상속자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자비로 우리를 그의 상속자로 삼아주셨는데,
이 영적 상속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현재의 삶 가운데 실제로 부어주시는 축복입니다.
어떤 이들은 신자들이 상속을 누리기 위해서는 천국에 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실수를 범하는데, 이보다 더 진리로부터 먼 오해는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은 의와 평강과 성령 안에서의 희락이라고 했습니다.(롬 14:17). 우리는 이
놀라운 축복을 지금 바로 여기서 누릴 수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우리의 영혼이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흘러 넘치고, 영광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을 믿음으로 온전히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에, 죄의식과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상속자로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상속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가장 높은 축복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직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가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라고 이르실 날이 오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마 25:34). 저는 하나님의 상속자;
왕의 양자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아버지가 우주의 왕이시면, 저는 분명히 찰스 황태자인
것이지요!
당신도 왕자요 공주가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나누기를 원하시고, 당신이 누리기를
원하시는 끝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 그 왕국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때에,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완전히 이루어지고, 하나님과의 충만하고, 온전하고, 밀접한 교제가
완전히 회복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우리를 향하신 돌보심을 깨달음으로, 지금 느끼고 있는
푸근함과 안도감을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이 감사함으로 흘러 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지켜주시고 , , 그의 사랑 가운데 품어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보다 더 큰 힘이 되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위하시는 아버지가 계시고,
그 분이 걸음걸음마다 든든히 뒤에서 지켜주시고, 새로운 삶 가운데서 그와 동행할 수 있는
모든 소중한 힘을 공급해주신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담대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아바”는, 능히 우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우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시려고 굳게 결심하셨습니다.(유다서 24).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썩지 않는 상속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번 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그의 부요하신 자비와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해진 것입니다. 우리가 중생할 때에, 독특한
방법으로, 영적으로 부자가 될 수도 있고, 왕가의 가족들이란 말이 함축하고 있는 그 진정한
의미 그대로, 우리가 왕가의 가족이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왕국의 왕자와 공주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 때문에, 우리는 썩지도 아니하고 더러워지지도 아니하고
퇴색하지도 아니 할 기업을 상속받게 될 것이며, 우리가 영원무궁토록 이것을 누릴 수 있도록
지금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은혜 14
오직 한 가지 책임
신약성경의 메시지는 간단하고 직접적이고 오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지, 우리가 이룬 선한 행위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의 오직 한 가지 책임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사랑과 은혜를 믿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분명한 메시지는 우리가 예수도 , 믿고 어떤 규칙도 지키고 어떤 의식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상충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선생들은, 그들의 메시지를 복음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전혀 복된 소식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합당한 일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의로움으로 가는 양대 요건으로 율법과 행위를 은혜와 함께 나란히 내세우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가르침과는 반대로, 신약성경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율법과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믿음의 응답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둘 중 한 쪽을 택해야 하는 형편에 처해있습니다. 의로움이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얻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킴으로 얻는 것인지 둘 중
하나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는 것과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은 서로 상반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 할 때에,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지, 양쪽을 다
만족시키는 중간 입장을 취할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며,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도 그가 누리던 같은 축복과
약속의 상속자입니다. 이러한 특권의 자리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지, 어떤 율법을
지키거나 규칙을 지킴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 대신에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 한다면, 우리는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 법칙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확실히 받아들여진다는 소망의 근거로 율법을 내세우려면, 확신을
갖기 위한 유일한 길은 모든 계명을 하나도 빠짐없이 철저히 지키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이 말씀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는 구원을 받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뜻인데, 그런 불안한 상태에서 누가 살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완벽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해봅시다. 모든 계명을 다 지키고, 한 번도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고 칩시다. 하루는 가도 좋다는 신호등이 들어와서 길을 건너고 있는데, 갑자기
한 운전자가 빨간 불을 무시하고 달려들어 당신을 치어 쓰러뜨렸습니다. 그 차의 트랜스미션이
당신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는 그 미치광이 같은 운전자에 대해
욕설을 퍼부은 것이 이 세상을 떠나기 전의 마지막 말이었다고 칩시다. 그 작은 일 때문에
당신은 표적을 맞추지 못한 것이 되고, 완벽함에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죄를 지은 것이지요.
그리고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계명 중에 아홉 개를 완벽하게 잘 지켰습니다. 그러나, 열 번째 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명중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죄를 지은 것이지요. 나쁜 소식은,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 거기 씌어있는 대로 다 행하지 않으면,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느 법을 어겼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만 지키지 못해도 실격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선한 행위를 근거로 의롭다 여김을 받을 확률은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로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실격 당했고, 이미 표적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갔습니다.
기다리는 것은 율법의 저주밖에는 없습니다. 선한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불완전한 인간의 노력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는 저주로 가는 길일
뿐입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참된 의로움과 축복으로 가는 길은 믿음으로 가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길은 당신의 노력을 . ,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풍성한 은혜를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당신은
표적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갔을지라도, 비록 당신 자신의 노력으로 의로워지는데
실패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아들 안에서 당신을 의롭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 책임을 예수님이 대신 지시고, 당신이 결코 갚을 수 없었던 죄의 빚을
갚기 위해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기만 하면, 그의 완벽한
의를 당신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바로 되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모든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비극적인 실수
교회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비극적인 실수 중에 하나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런 무거운 책망의 설교를 얼마나 자주
들었습니까?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더 많이 헌금해야 합니다! 더 많이 전도해야 합니다!
더 많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위원회에 더 많이 참여해야 합니다!”
등등. 얼마나 자주, 용기를 얻고자 교회에 갔다가, 당신의 실패에 대해서 책망만 받고,
하나님이 당신에게 얼마나 실망하셨는지 아느냐는 말만 듣고 왔습니까?
제가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누가 저의 실패에 대해 책망하고 무겁게 짓누르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부족한 줄을 잘 압니다. 아무도 제게, 기도를 충분히 하지 않는다,
성경을 충분히 읽지 않는다, 헌금을 충분히 하지 않는다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한
메시지에서 제가 얻는 것은 무거운 죄책감뿐입니다. 좌절만 깊어질 뿐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정말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싶고, 기도도 더 하고 싶고, 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싶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한 것을 너무 강조하고 나무라면, 결국은 크리스천에게 패배감을 주고 용기를
잃게 하여, 달리던 경주를 기권하고 떨어져 나가고 말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으로 돌아오면, 얼마나 다른 메시지를 대하게 되는지요!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강조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리 해도 절대로 충분하지 못합니다.
우리 노력으로 의로워지려 하는 것은 우리의 불완전함 때문에 언제나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은 온전하고, 아름답고, 완벽하고, 훌륭한 일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쩌자고 항상 이것을 뒤집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 대신에 우리의 책임을
끊임없이 노래하고 있는지! 이것이 바로, 많은 교회들이 죽어가고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실패에 대해 말해 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궁지에서 헤어날 수 있는
길을 보여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가 필요하지 죄책감이 필요한 것이
아니거든요.
오직 한가지 할 일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에게 오직 한 가지 책임을 주셨는데, 그것은 그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비록 당신이 기도를 충분히 하지 않았을지라도, 비록 헌금을 충분히 하지
않았을지라도, 비록 헌신의 봉사를 충분히 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이미
하신 일을 믿는 당신의 믿음 때문에 당신은 ,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축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당신을 의롭게 만들기 위하여 당신 대신에 예수님을 죄로
삼으셨습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믿고, 그가 당신을 위해 하신 일을 신뢰하기만 하면, 예수님은
그의 의를 당신에게 힘 입혀 주십니다. 그가 하신 일은 모두 은혜뿐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를,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는 인사로
시작해서,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으로
마쳤습니다. 그의 축도는, 본 서신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에 날카로운 초점을 맞춘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부요하고 깊은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것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행하는 것이지, 육체의 헛된 노력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성경은 그 결과를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 갈라디아 교회에서 제기되었던 이 문제는 언제나 제기되는 문제로서, 아직도
문제걸이가 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의를 의지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열어주신 은혜스러운 길을 의지할 것인가? 믿음을 통한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간단한
메시지를 믿고 그 안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가 이미 완성하신 일에다가 우리
자신의 의로운 일의 목록을 보탤 것인가? 육체로 행할 것인가, 아니면, 성령 안에 행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게만 영광을 돌릴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의 인정과 상급을
바라고 자신의 육체에게 영광을 돌릴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모든 세대에 사는 모든 크리스천들이 겪게 되는 갈등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평강과 두려움, 교만과 겸손, 심지어는 영원한 생명과 죽음으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저는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흔들림 없이 굳건히 서기를 기도하며,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기를 기도합니다.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점점
어두워지고 소망이 없는 이 세상에서 생명의 말씀을 굳건히 붙드는 가장 귀한 성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서 하신 일, 오직 그 일로 말미암아,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기를 축원합니다.
첫댓글 어제 천국으로 가신 척 스미스 목사님의 귀한 은혜의 메시지입니다. 몇년 전 이곳에서 올렸는데 다시 가져와 올립니다. 저작권 문제의 소지가 있어 스크랩을 금지합니다. http://cafe.daum.net/waitingforjesus/Cnw2/364
하루하루 살아가는 저에겐 정말 희망의 메시지 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