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 원수 2년인 BC 121년은 곽거병에게 있어 한없이 빛나던 시기였다. 이해 봄에 무제는 곽거병을 표기장군(驃騎将軍)에 임명했는데, 초대 표기장군이 바로 곽거병이다. 이때가 표기장군이라는 처음 이름에 나온걸 감안하다쳐도, 이게
대장군 바로 다음 자리 라는걸 생각하면 정말 흠좀무. 이때 곽거병은
21살이었다. 군부에 몸을 담은지도 고작 3년이고 말이다.
더 무서운건 2년뒤에는 아예 대장군과 같은 녹봉이 된다.
그러나 곽거병에 대한 이런 파격적인 대우는, 그 후에 그가 벌이는 막대한 공을 생각하면 오히려 타당할 지경이었다. 표기장군이 되가가 무섭게 농서(陇西)에서 1만여 병력을 이끌고 출정한 곽거병은 오려산(烏戾山)을 넘고 호노하(狐奴河)를 건너며, 엿새동안 다섯부족을 지나며 무려 1천리를 나아가 백병전을 벌이며 이를 모두 격퇴, 흉노의 절란왕과 노호왕을 참수했고 죽이거나 사로잡은 무리가 무려 8천여명이 넘었다. 또한 흉노 휴도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때 쓰던 금인(金人)까지 탈취해왔다.
인상적인 기록으로 이 당시 기록으로 우리 군은 갑옷 하나 잃지 않고라는 식으로 묘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장일 수 있으나, 대체로 흉노 원정에 대한 기록이 우리가 흉노놈 10명을 족쳤다. 그런데 우리 병사 3명이 죽음. 이런식의 연속이라는것을 생각하면 특이하다. 그만큼 완벽한 승리였을 수 있다는 말. 곽거병은 2,000호를 더 받고 3,600호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해 여름, 한무제는 표기장군 곽거병과 합기후(合騎侯) 공손오(公孫敖)를 북지에서 출발시키고, 다른 쪽으로는
장건과
이광을 파견하여 흉노를 공략코자 하였다. 이광은 4천여명, 장건은 1만여명으로 도합 1만 4천의 병력은 흉노 수만대군의 포위를 받았는데, 이광은 홀로 분전해서 4천여명 가운데 2천여명이 전사했지만 버티게 되고 장건이 도착하자 간신히 포위를 풀 수 있었다. 장건은 늦게 도착한 탓에 참형을 받을 처지가 되지만 속죄하는 돈을 내서 서민이 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양상은 북지에서 출발한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곽거병은 이미 흉노 땅 깊숙히 진격을 하였지만 뒤따르던 공손오가 길을 잃어 한참을 지체하게 된다.
연락이 끊겨 언제 도착할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곽거병은 그야말로 과감한 행동을 취하는데, 공손오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서 흉노 땅 한복판으로 진격을 했던 것이다!
곽거병은 거연수(居延水)를 배를 타고 건넌 후, 소월지(小月氏)까지 나아가 기련산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흉노 추도왕과 2500여명을 사로잡았고 3만여 명이 넘는 적들을 참수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흉노의 왕 중 다섯명과, 그 다섯명의 어머니, 선우에 연지, 왕자, 상국에 장군, 당호, 도위 등을 수백여명을 붙잡고 맞붙었던 흉노군의 7할을 분쇄하는 경이적인 전과를 올렸다. 이에 곽거병은 5000호를 더 받게 되었고 8,600호가 되었다. 곽거병을 따라왔던 조파노(趙破奴) 같은 장수들도 짭짤한 보상을 받았다. 반면에 공손오는 참형을 당할뻔한걸 속죄금을 내어 간신히 목숨만을 건지게 된다.
이 전투의 결과는 흉노에게 있어서도 매우 뼈아픈 패배였다. 사기의‘흉노전 색은(索隱)’조에는 ‘서하구사(西河舊事)’란 흉노 민요 한 수가 실려있는데 그 내용 중에는,
기련산 잃으니 육축이 번식할 수 없게 되고(失我祁連山 使我六畜不蕃息) |
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육축(六畜)은 유목기마민족인 흉노인들에게 중요한 여섯 가지 가축, 즉 말·소·양·닭·개·돼지를 말한다. 유목민들에게 이런 동물들, 특히 말을 대규모로 키울 곳을 잃어버렸다는건 정말 어마어마한 타격을 주는 일이었다.
흉노의 선우는 혼야왕이 서쪽에서 계속 한나라의 군대에게 부서지고 있는데, 그 원인이 곽거병 때문이라는것을 알고 매우 화를 내며 혼야왕을 죽이려 했다. 혼야왕은 휴도왕과 논의를 하고, 곽거병을 이길 자신도 없고 선우도 무섭고 하니 차라리 한나라에 투항해버리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한무제는 이 소식을 들었지만, 만약 항복하는척 하면서 공격을 하면 큰 피해가 우려되었기에 이 일을 곽거병에게 맡겼다.
곽거병은 군대를 이끌고 혼야왕의 부대와 대치했는데, 혼야왕의 비장들 중에 항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공격해서 8천여명을 죽이고 수만여명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 공에 한무제는 근심거리가 없어졌다.면서 크게 치하하고 1,700호를 더해주었다.
이 모든 전투가 단 1년만에 벌어진 전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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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 까페에 항우 vs 척준경 비교글이 있는데요.
사례의 파워 뿐만 아니라 사례의 수도 항우가 월등하다더군요.. ㅋㅋ
고려에는 소드마스터 척준경도 있지만 보우마스터 이성계도 있었다능...
이야... 무공이 진짜 ㅎㄷㄷ하네요
ㄷㄷ
기량은 뭐 알렉산더 급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