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인으로 지내던 흥선대원군이 남루한 차림으로 화계사를 찾았다. 세간 눈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화계사는 흥선 대원군 부인 여흥 민씨가 다니던 원찰이었다.
도심에서 화계사까지 십 리. 옷은 땀에 흠뻑 젖었고 목이 무척 말랐던 흥선대원군은 절 마당의 느티나무가 보이자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무 아래에 다다르니 동자승이 시원한 꿀물을 담은 사발을 들고 있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흥선대원군에게 내미는 것이 아닌가. 기이하게 여긴 흥선대원군이 기다린 이유를 묻자 동자승은 말없이 그를 만인(萬印)스님에게 안내했다.
만인스님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야심을 꿰뚫어 보고 질문을 했다. “혹시 마음속에 커다란 웅지(雄志)를 품고 있지 않습니까?” 흥선 대원군은 처음에서 속내를 들어 내지 않았다. 그러나 만인 스님의 도력을 알아채고는 “스님, 지금 나라가 안동 김씨 세도 정치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런 나라를 다시 반듯하게 세우고 싶습니다.” 말했다.
스님은 머뭇거리며 안동김씨 세도정치에서 벗어나 왕권을 되찾을 수 있는 묘책을 가르쳐 주었다. “충청도 덕산의 가야사(伽倻寺) 금탑 자리가 제왕이 나올 자리이니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를 그리로 이장하면 왕손을 얻을 것”이라 일러 주었다. 불가의 가람을 훼손해야만 하는 것이어서 만인스님은 고심했다. 그러나 중죄의 업보를 받더라도 시절인연(時節因緣)을 따르는 것이 도리라 생각했다.
은둔의 야심가 대원군은 훗날 가야사를 불을 내어 절을 불사르고 금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아버지 묘를 썼다. 본래는 경기도 연천에 있었으니 500리 나 떨어진 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장하고 7년이 흐른 1852년에 둘째 아들 재황을 낳았는데 그가 조선의 26대 왕 고종이다 12세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대원군은 어린 고종의 막후에서 오랫동안 섭정했다. 이런 인연으로 대원군은 화계사 중창을 위해 시주했으며 전각 곳곳에 자신의 글씨를 남겼다. 명부전 현판을 대원군이 썼다고 전해진다.
또 흥선 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경복궁 등을 지면서 돈이 부족하자 당백전이란 동전을 만들기 위대 법주사의 금동 대불을 뽑아다 동전을 만들었다. 이 금동 미륵대불은 신라 혜공왕 때 진표율사가 7년 동안 공을 들여 만든 불상이었다. 이 미륵대불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무사한 대불이었다.
흥선 대원군의 이런 악업(惡業)은 아들 고종과 손자인 순종은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의 왕이 되었다. 불교에서는 불법승(佛法僧) 삼보를 훼손하는 자는 반드시 큰 업보를 받게 된다고 하였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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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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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께 잘 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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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잘 보아씁니다. 결국 좋지 못한 시작으로 좋지 않은 결과를 보았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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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 마하살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