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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油採).....양귀비속 배춧과 의 두해살이풀, 평지라고도 하며 키 1m정도, 뿌리에서 나온 잎은
잎자루가 길고 갈라지는 곳도 있으며 윗 부분의 잎은 밑이 귀처럼 처져서 줄기를 감싸며 갈라지지 않는다.
3,4월에 노란색 꽃이 피며 열매는 원기둥 모양이다. 종자로는 양질의 식용유가 채취되므로 유료작물로 중요하다.
또 관상용으로 이용되는 것도 있다. (백과사전에서 발췌)
어느덧 입대 후 2번째의 봄을 맞이했다.
그렇게 국방부(우리는 내무부)시계는 나를 거꾸로 매달아 놔도 잘도 가고있었다.
지난 가을에 우리 관할 지역으로 간첩선이 침투 하려다 실패했고
바로 아래 지역인 고창에서 2명의 무장간첩이 상륙하여 접전을 벌이며
전주까지 올라와 사살되는 바람에 1개 분대의 병력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뒤이어 광주에서 발견된 무장 간첩을 검문하려다 출동한 전투경찰 대원이 순식간에 1개 분대가 몰살을 당했다.
그리고 해병대 관할 지역인 포항 해안으로 상륙한 무장간첩과 접전을 벌이다 해병대 3명이 전사하고 수명이 중상을 당했다.
이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이 몹시 격분하고 자존심이 상해 특별명령이 하달되었다.
전군 특히 해안 경비업무를 맡고있는 병력에 대한 100일 훈련을 실시하여 일당백의 전투력을 끌어올릴 것을 지시하였다.
이 훈련계획은 해안경비를 맡은 우리부대의 체제를 송두리째 뒤 흔들어놨다.
우리 112전투 경찰대는 본부는 변산 해수욕장에서 2km정도 거리의 낮은 산 속에 위치하고
5명의 행정요원, 산 위 OP에는 통신요원 4명, 차량운행(달구지라 부름)요원 7명
그리고 기동타격대인 예비소대 40여명 경찰대장 경감1명 소대장 2명 향도2명으로 구성되었고,
현재 새만금 간척지 사업의 시발점인 변산면 대항리부터 격포까지 변산반도 국립공원을 4개 소대 16개의초소로
1개 분대에 9명으로 1개초소를 운영하며 해안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100일 훈련은 기동타격 대부터 시작해서 훈련을 이수 한 기동타격대가 해안초소 1개 소대를 임무교체하고
해안 1개 소대는 본부에 들어가 훈련을 받았다.
임무교대 시 개인 총기와 개인 완전군장을 제외하고 나머지 일체는 있던 자리에 놔두고 인수인계 되었다.
초소의 장비, 비품 등을 목록을 작성하여 이상유무를 따졌다.
그리고 농담으로 관할지역 동네 아가씨의 목록도 작성해서 인계하라고 하며 키득거렸다.
나는 해안초소에서 노예생활을 하다 풀려난 것이 좋았다.
교육훈련이 고되더라도 밤엔 불침번 혹은 보초(후문 또는 정문)근무 2시간 근무 외엔 밤에 잠을 잘 수 있었고
낮엔 누구나 똑같이 훈련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식사당번, 야간 순찰 및 서치라이트, 야간 경계등으로 보통은 4시간, 비상시는 6시간 알밤을 새는 일과
삽질, 낫질이 서툴러 구박받는 교통 호 작업도 없었다.
빗속을 달리는 10km 구보훈련도 신명나고 흥분되어 옆에서 같이 뛰며 죽을상이 되어있는 고참들에게 표정관리를 하느라 애를 먹었다.
측정 시엔 구보선수로 솜씨를 뽐내기도 하였다.
낮에도 정문과 후문 경비를 위해 보초를 서게 되어있는데 평일에는 고참들이 훈련을 빠질 요량으로 자청하고 나서 기회가 없었으나
휴식이 주어지는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은 주로 신참들이 근무하게 마련이었다.
훈련이 막바지에 이른 어느 일요일, 정문 보초를 서고 있는데 아가씨 둘이 면회를 신청하였다
간단한 인적사항과 용건을 적어 상황실에 보고하였고 면회당사자가 외출 허락을 받고 정문으로 내려왔다.
나보다 6개월 정도 늦은 본부의 신참이었다.
면회신청자는 신참의 여자 친구들인지라.
신참이 내려오는 동안 간단한 얘기 몇 마디를 나눴고 별다른 관심 없이 그렇게 헤어지게 되었다.
외출하는 신참과 부대를 나서며 한 아가씨가 나에게 인사를 했다.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 담에 편지해도 되죠?”
내가 의아해서 물었다.
“뭘 알아서 하실 건데요?”
“주소는 이미 알고요! 이름은 명찰을 봐서 알았어요.”
나는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맘대로 하세요.”
그리고 까맣게 잊어버렸다.
어느 날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발신지가 낯선 정읍이었고 이름도 기억에 없는 여자의 편지였다.
“김 형숙?” 잘못 전해진 편지인가 싶어 수신자 이름을 확인하였더니 분명히 내 이름이 맞았다.
편지를 개봉하였다.
이 강선 이경 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예전에 부대 정문에서 뵈었던 김 형숙 이라는 아가씨랍니다.
그 날 조카의 남자친구 면회 차 부대에 갔다가 아저씨가 친절히 대해 주셔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아저씨! 저 편지 계속해도 좋지요? 운운
신참에게 그녀의 간단한 신상을 물었더니 자기의 여자 친구의 한 살 위인 이모이며
같은 마을에 살아서 잘 아는 아가씨라고 알려주었다.
마침 친구들의 위문 편지도 뜸해졌고 여자친구들은 항상 옆을 지키지 않으면 관심이 멀어지기 마련이어서
편지도 대여섯번해야 마지못해 겨우 한번 정도 편지해주는 정도로 그야말로 심드렁하게 되었던 처지여서
나는 김 형숙에게 답장을 했다.
그로부터 편지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로 받았다.
주로 자기의 주변에 관한 얘기와 고교를 나와 가사를 도우며 부모님과 농사를 짓는 얘기, 그리고 자기 마을의 계절 풍경과
라디오를 들으며 밭을 매는 얘기, 그야말로 순박한 시골처녀의 정감 넘치는 편지를 꼬박 꼬박 잘도 보내 주었다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신참의 처지와 훈련의 고달픔을 달래며 100일 훈련을 마치고 다시 해안 초소로 배치 받았다.
새로이 배치 받은 초소는 밭 가장자리 언덕의 해안에 위치해 있었다.
겨울이 꼬투리를 남겼는데도 밭에는 푸른 푸성귀가 줄지어 나있고 거름은 인분을 주어선지 똥 냄새가 진동하였다.
나도 이젠 군 생활에 이력이 났고 후임으로 신참을 받아 조금은 여유를 갖게 되었다.
식사 당번은 면했지만 그 동안 갈고 닦은 요리솜씨가 좋아 고참들에게 인기가 있어 후임을 도와 반찬을 만들거나
부식비를 운영하여 채소나 생선, 국거리 고기 등 일주일 식단을 위해 찬거리를 구입 차
다리미질로 줄이 반듯한 군복을 차려입고 일주일에 한 번 부안 읍내를 다녀오는 호사를 누리기도 하였다.
새로 간 초소의 즐거움 하나는 우리 초소 아래 드넓은 갯벌이 펼쳐있고 백합조개 양식장이 있는데
분대장 및 상부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가끔 양동이를 들고 야간 순찰 중 백합을 서리해 오는 것이다.
서리해 온 백합을 하루정도 소금물에 담아 모래를 토하게 한 뒤 물만 붓고 끓인 다음
파와 마늘을 썰어 넣어 간을 맞춰 내놓으면 맛이 좋고 시원하여 숙취 후 엔 기막힌 술국이 되었다.
당시 백합 한 개에 계란 5개와 맞먹는 값인지라 양식장 주인이 야간 경비를 서는 경우도 있었다.
한번은 야간 순찰을 나가는 신참에게 양동이를 주며 백합을 서리해 올 것을 지시했다.
시간이 흐른 뒤 신참은 빈 양동이를 들고 얼이 빠져 돌아왔다.
자초지종을 듣고 우리는 실소했다.
물이 빠져나간 양식장의 가두리 그물 밑에서 백합을 퍼 담으려는데 “누구야!” 하는 소리에 줄행랑을 놨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총을 든 군인이 민간인에게 쫒겨 온 신참을 한심해 하며 혀를 찼다.
변산의 봄은 멀리보이는 섬 '위도'의 노란색과 함께 온다.
이른봄엔 뿌연 해무(海霧)에 싸여 흐릿하여 아스라하던 위도가 화창한 봄날이 계속되면 유채 꽃으로 물든다.
그리고 인분냄새로 뒤범벅이 되었던 우리 초소도 노랑물결과 유채 꽃 향기에 묻히게 된다.
겨울의 거센 파도로 날리는 바닷물 포말에 시달리고 해풍과 폭설을 견딘 유채가 드디어 만개하여 별 천지의 세상이 되지만
낮은 서열의 군바리에겐 도무지 감흥이 없다.
야간의 경계근무와 해안순찰, 식사당번, 물을 지어 나르는 노역에 주위의 꽃 무리를 감상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야간근무가 끝나면 아침을 먹고 오전엔 경계병을 제외한 나머지는 취침을 한다.
야간 근무도 고참은 저녁 이른 시간 또는 새벽에 배정하고 신참들은 주로 한 밤중에 배치되어 고단하기만 하다.
아침식사 후의 취침은 그야말로 꿀맛이다.
깊은 잠에 떨어진 나를 누군가 조용히 흔들었다. 처음엔 꿈속인줄 알았다.
다시금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이 이경! 일어나라”
나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이번에는 확실히 누가 재차 나를 부르며 흔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이경! 누가 널 찾아왔다. 일어나 봐라.”
“예?... 절 찾아 올 사람이 없는데요?”
“ 분명히 너를 찾아왔다. 나가봐라.”
아직도 잠을 깨지 못한 나는 비척거리며 입고 잤던 츄리닝 차림으로 벙커 밖으로 나왔다.
밝은 햇살에 눈이 부셨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노란 유채 꽃 무리 속에 낯모르는 성장한 두 처녀가 생글거리며 서있었다.
“누구....신... 데요?”
“전 데요. 김 형숙....”
“ 아!”
그녀와 조카가 왔다. 한들거리는 노란색의 물결 속에 그녀들이 서있었다.
달덩이 같은 여자들이 화사하게 내 앞에 서있었다.
잠이 확 달아나며 봄볕이 나에게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서둘러 벙커로 돌아와 세수를 하고 면도도 하고 머리를 감고
아껴두었던 A급 군복과 군화를 신고 꼬불쳐 놨던 용돈을 주머니에 챙겼다.
자고있는 분대장을 깨워 간단한 신고를 하고 외출을 허락 받았다.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과자보따리를 근무자에게 전달하고 수선거림에 잠을 깬 고참들의 끈끈한시선을 뒤로하고 초소를 빠져나왔다.
그녀들을 거느리고 유채꽃밭 속을 지나 신작로에 나섰다.
초소에서 되도록 이면 멀리 어딘가에 가야했다.
기껏 생각한곳은 내가 있었던 채석강이었다.
드문드문 오는 버스를 잡아타고 격포 종점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그녀들과 대화를 시작했다.
조카의 남자친구를 보려면 그가 근무하는 본부로 가야할텐데 어찌 된 것이냐 고 물었고
오늘 면회 목적은 순전히 나를 보기 위해 왔노라 는 대답을 들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면회로 당황스럽다 하니까 조카가 우리들이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알고
봄 나들이 겸 이모를 꼬득였다는 것이다.
대화를 하면서 나는 그녀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녀들은 키가 컸으며 특히 김 형숙은 살집도 있어 풍성하기조차 하였다.
어쨌든 즐거웠다. 화창한 봄날에 두 아가씨들을 거닐고 나들이를 나온 것이 가슴이 벅차 오르기까지 하였다.
봄이 시작되는 해변은 소풍을 나온 객지 사람들과 몇몇의 청춘 남녀들의 밀회 장소로서 손색이 없었다.
평소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동굴이며 바위가 켜켜이 쌓인 채석강의 절경으로 이끌어 구경을 시켜주었다.
아가씨들은 즐거워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스스럼도 없어지니 농담에도 곧잘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시간이 흐르는지도 잊어 버렸다.
바람이 서늘해지며 주변에 사람들이 많지 않음을 느끼고는 시간이 많이 흘렀슴을 깨닫고는 서둘러 격포로 되 돌아왔다.
오후 5시가 지나있었다.
버스 정류장이 한산했다. 매표소도 이미 철시한 뒤였다.
점방가게에서 물으니 격포에서의 막차는 벌써 떠났다고 했다. 아찔했다.
나의 귀대는 그렇다 치고 말만한 여자들의 뒤처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마침 점방 가게 할머니에 따르면 면소재지인 산내면에는 7시까지 부안으로 나가는 버스가 있다는 것이었다.
약 6km의 거리였다. 그사이 점방가게 할머니는 김 형숙의 손을 덥석 잡고는
“워매- 시상에나 이렇게 이쁜 아가씨가 어디 있댜-?” 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할머니는 살집 꽤나 있는 아가씨를 보고는 부잣집 맏며느리 감으로 생각함이 틀림없었다.
나는 재빠른 판단을 했다.
그래 걷자! 잘하면 시간 내에 도착할 것이고 만약 늦는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배고픔을 달래줄 삼립빵 몇 개와 사탕, 군것질 몇 가지를 산 뒤
몇 번이고 도톰한 김 형숙의 손을 부여잡는 점방 할머니를 뿌리치고 우리는 길을 나섰다.
해가 지지 않은 하늘에 반달이 떠있었다.
벌써 인적이 뜸한 신작로를 터덜거리며 걸었다.
다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나는 걱정이 태산 같은데 그녀들은 깔깔대고 수다스러웠으며 도대체 걱정이 없었다.
멀리 마을 기슭엔 밥짓는 연기가 낮게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얼마를 그렇게 갔을까 우리 뒤에서 경운기(농촌에서는 ‘딸딸이’ 라 했다) 한 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고 있었다.
촌로에게 어디까지 가는지 묻자 마침 산내면에 간다고 하여 사정을 말하고 허락을 얻어 우리는 비어있는 경운기 짐칸에 올랐다.
정말 다행이었다. 경운기는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멋도 모르고 옆 난간에 걸터앉았으나 그렇게 갈 수 없음을 이내 알았다.
자갈이 깔린 신작로는 경운기를 튀게 했고 엉덩이를 난간에 붙일 수 없게 만들었다.
우리 셋은 서로 서로에게 의지하며 짐 칸 앞에 걸쳐놓은 작대기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유지하며 엉거주춤 애를 쓰고 있었다.
어느정도 익숙해 지자 균형을 잡을 수 있었고 마음도 안정을 찾았다.
경운기가 튀고, 아니 딸딸거리고 있었다.
어두워지는 하늘에 달이 딸딸거리고 있었고 나의 볼이 딸딸거려 간지러웠다.
김 형숙의 커다란 가슴과 엉덩이가 딸딸거리며 출렁거렸고 조카의 긴 머리카락이 딸딸거리며 나풀거렸다.
경운기는 딸딸거리며 뽀얀 먼지를 일으키면서 키가 높은 프라타나스 가로수 사이를 달리고 있었다.
딸^^^ 딸^^^ 딸^^^딸^^^딸
뒤뚱거리며 잘도 가고 있었다.
저 멀리 어둠이 내리는 유채 꽃밭엔 희미한 달빛 아래 노란색 무리가 물결이 되어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