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암은 큰 바위 암벽에 글씨를 새기고, 그 앞에 비석을 세운 후 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면서부터 불리운 이름이다.
바위에는 조선 숙종 10년(1684)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베풀어준 은혜와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부터 당한 굴욕을 잊지 말자는 뜻의 여러 글귀를 가평군수 이제두와 허격, 백해명 등이 새겨 놓았다. 즉,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글씨 ‘사무사(思無邪:생각에 사특함이 없음)’, 조선 선조의 글씨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 再造蕃邦:일만 번 꺾여도 반듯이 동력으로 흐르거니 명나라 군대가 왜적을 물리치고 우리나라를 다시 찾아 주었네)’, 송시열이 쓴 효종의 글귀 ‘일모도원 지통재심(日暮道遠 至痛在心: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먼데 지극한 아픔이 마음속에 있네)’, 낭선군 이우가 쓴 ‘조종암(朝宗巖:임금을 뵈이는 바위)’이란 글귀 등이 적혀 있다.
순조 4년(1804)에는 이러한 유래를 적은 비를 암벽 앞에 세웠는데 , 비문은 조진관이 짓고 김달순이 썼다. 또한 순조 31년(1831)에는 명나라 9의사(병자호란 때 청에 잡혀간 봉림대군과 합심하여 인조 23년 대군이 귀국할 때 우리나라로 망명했던 명나라 사람들)의 후손이 이곳에 와서 지방 유림들과 함께 대통행묘(大統行廟)와 구의행사(九義行祠)를 세워 명나라 태조와 9의사를 위한 제사를 지내었다.
조선시대 당시 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를 배척했던 소위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