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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0. 묵상글 (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 과연 누구든지 청하는 대로 받을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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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0.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과연 누구든지 청하는 대로 받을까?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어제에 이어 주님께서는 기도에 관해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즉시 누구든지? 할 것입니다.
정말 누구든지 청하면 주님께서 들어주십니까?
그리고 상당수 분이 나는 아닌 것 같은데 하실 것 같습니다.
저만해도 몇십 년째 제 기도 목록에 올라 있는 분도 있는데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고 그래서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청하면 들어주신다는 말씀은 거짓이고,
그래서 이 말씀의 뜻이 뭔지 잘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첫째 누구의 청이든 들어주신다는 말은 모든 청을 들어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청을 들어주시고 말고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누구의 청이든 들어주시지만
들어주시지 않을 청을 한 사람의 청은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의 청은 들어주시고 어떤 사람의 청은 들어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청이건 누구의 청이든 들어주시지만 아무 청이나 들어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누구나 청하되 들어주실 것을 청해야 하는 것이요
죄인이 청하되 들어주실 것을 청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죄인 또는 악인이 청하겠습니까?
주님께 청한다면 그는 어쩌면 죄인이나 악인이 아닐 것이고,
엄밀한 의미에서 죄인은 주님께 청하지 않기에 죄인일 것입니다.
사실 죄인이나 악인이 청한다면 들어주실 것을 청하겠습니까?
만약 들어주실 것을 청한다면 이미 죄인이나 악인이 아닐 겁니다.
완전범죄가 되게 해달라고 하면 주님께서 그걸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들어주실 청은 뭣이고 안 들어주실 청은 뭣인지 그것이 관건인데
솔직히 그것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완전한 선의에 달렸기에 저도 모릅니다.
다만 사랑과 반대되는 것은 들어주시지 않는 것 분명하고,
악한 청을 들어주시지 않는 것도 분명한데 나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을 더 좋은 때에 주시는 것도 분명한데
그것이 무엇이고 그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모르겠습니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성령을 주실 거라고 맨 마지막에 말씀하셨는데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원하고 청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그러므로 우리는 들어주실 것을 청하고
성령을 청하는 우리가 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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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0.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꿈’이 무엇인지 발표하게 하셨습니다. 다양한 꿈이 나왔는데(당시 한 반에 70명이었습니다.), 한 친구가 말했던 꿈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 친구는 자신있게 ‘교수님’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 친구의 말에 다들 크게 웃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기에 이 친구는 전혀 교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공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고, 수업 시간에도 항상 딴짓만 했습니다. 당연히 늘 반에서 꼴찌는 이 친구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친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교수님이 되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겠지? 오늘부터 열심히 공부하면 분명히 훌륭한 교수님이 될 수 있을 거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친구는 커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 과연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교수님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 친구는 끝까지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무엇이든 다 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목표(꿈)을 향한 과정 안에서 해야 할 일에 충실해야지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꿈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지만, 꿈이 크면 클수록 여기에 들어갈 노력의 크기는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노력 없이 꿈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빵을 꾸어 달라고 간절히 청하는 친구에게 빵을 내어주는 것은 혈연이나 학연, 인맥과 화려한 경력 때문이 아니라, 청하는 사람의 간절함과 진실함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기억하는 유명한 말씀을 하시지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저절로 얻고자 한다면 큰 욕심입니다. 간절함과 진실함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편하고 쉬운 것만을 좇으면서 풍요와 안락을 달라는 것은 더 큰 욕심입니다. 그런 욕심으로는 절대로 우리가 정말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합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고, 또 실제로 그렇게 좋은 것만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지요. 그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바라보기에 주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도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께 간절함과 진실함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분명 가장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휴식 없는 행복을 찾으려는 것은 헛된 일이다(토마스 제퍼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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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0.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빠, 아버지”께 기도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한밤중에 찾아온 벗에 대한 비유’와 ‘세상의 아버지에 대한 비유’를 통해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넉넉히 주시는 분이심을 가르쳐주십니다.
<첫 번째> 비유는 잠을 자던 사람도 벗의 끈질긴 간청에는 마지못해 들어주거늘, 하물며 주무시지도 않으며 오히려 잠든 우리를 깨워 간청하게 하시는 아버지께서야 얼마나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는지를 들려줍니다.
<두 번째> 비유는 세상의 아버지들도 제 자식들에게는 세상의 좋은 것을 주거늘,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야 어련히 하늘의 좋은 것들을 주시지 않겠는지를 들려줍니다. 그러니, 이토록 넉넉히 주시는 아버지께 청하라 하십니다.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10)
여기에서는,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을 통해 하느님을 향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곧 ‘청하라’는 것은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입으로, 곧 말로 간구하는 것이요, 희망을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께 두고 겸손하게 청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먼저 아시고, 우리가 그것을 청하기를 바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기와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청할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진정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청해야 할 것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찾아라.’는 것은 믿음을 아버지께 두고, 믿는 바를 몸으로 수고로움을 바쳐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사실, 아버지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 나서시며, 우리가 찾아 나서기만 하면 “네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사 65,24;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18)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불신과 의혹에 빠져도 결코 우리에게서 믿음을 거두지 않으시고 끝까지 충실하시고 신실하시고 항구하게 우리를 찾으시니, 우리 또한 그렇게 찾아나서야 할 일입니다.
“두드려라”는 것은 사랑의 가슴으로 “두드려라”는 것을 말합니다. 당신께서 사랑으로 마음을 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라고 먼저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희망하는 바를 ‘말’로 청하고, 믿는 바를 ‘행동’으로 찾으며, 사랑하는 바를 ‘마음’으로 두드리며 전인격으로 아버지께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불신과 분리를 조장하는 교활한 뱀이 아니라, 거센 파도에도 상하지 않고 온 몸을 맡기는 ‘믿음의 생선’을 주실 것입니다. 뒤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어 뒤를 경계하게 하는 전갈이 아니라, 병아리를 탄생시킬 앞을 바라보게 하는 ‘희망의 달걀’을 주실 것입니다. 단단하여 도저히 삼킬 수 없는 돌이 아니라, 생명을 살찌울 ‘사랑의 부드러운 빵’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청한 것보다도 “좋은 것”(마태 7,11), 곧 “성령”(루카 11,13)을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 11,9)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이 희망하는 바를 청하게 하시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당신을 몸으로 찾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진리의 문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게 하소서!
우리를 가로막은 장막을 찢으시고, 서로가 열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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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0.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나 원하는 사람이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꿈은 이루어집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4,2-3). 그러므로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믿고, 하느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11,9-10).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신다는 보증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1,6-7). 사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1요한5,14-15). 오늘 복음은 바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시편 66장18절을 보면 “만일 내 마음속에 죄악이 들어있었다면 주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셨으리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 잠언에도 “나는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또, 나를 애써 찾겠지만 만나지 못할 것이다. 주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섬길 줄 모르고 지식을 멀리한 탓이다. 내 충고를 따르지 않고 온갖 훈계를 업신여긴 탓이다”(11,27-30).하였습니다. 완고한 자의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합니다. “귀를 막고 하느님의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마저 역겨워 하리라”(잠언28,9). 그리고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4,3). 더더욱 악행을 저지른 자의 기도는 외면하십니다.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이사1,15-16).
기도 했는데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첫째는 마음 없이 청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청해야 합니다. 또한,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디언들이 가뭄에 기도하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도를 한답니다. 한편 내가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기도는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또 다른 이유는 들어주면 오히려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과일을 까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칼을 달라고 졸라대며 칭얼거린다고 칼을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허락하면 교만해 지고 피해가 간다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청하되 합당한 마음으로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믿음으로 소원을 하느님께 말씀 드리기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그분의 방법으로,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반드시 주신다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좋은 것을 이루어줄 것입니다. 그러니 쉽게 포기하지 말고 그분의 때와 방법으로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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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0.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는 아이에게 젖 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는 아직 말을 못 해서 자신의 의사 표시를 울음으로 합니다. 엄마는 아이의 울음을 듣고 아이가 원하는 걸 해결해 줍니다. 기저귀를 갈아주기도 하고, 젖병을 물려 주기도 하고, 옷을 갈아입혀 주기도 합니다. 이제 나이를 먹어서 학생이 되면 울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걸 말로 합니다. 이제 무조건 울기만 해서는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됩니다. 학생이 되면 이제 엄마와 밀고 당길 줄도 압니다. 설거지를 도와 주기도 하고, 쓰레기를 버리기도 하고, 엄마가 좋아하는 걸 합니다. 엄마가 좋아하는 것이 성당에 열심히 다니는 것이면 성당에 가고, 엄마가 좋아하는 것이 좋은 성적이면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엄마는 자녀가 원하는 걸 기꺼이 들어 주게 됩니다. 이제 학생이 어른이 되면 엄마가 원하는 걸 해 드리려고 합니다. 보일러를 바꿔 드리기도 하고, 해외여행을 보내드리기도 하고, 엄마와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우는 아이에서, 엄마와 밀고 당기기를 하는 학생에서, 엄마가 원하는 걸 해 드리는 어른이 되는 겁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울기만 한다면 엄마의 마음이 아플 겁니다.
주교님은 사제들의 영적인 갈증을 풀어 주려고 합니다. 주교님은 인사이동을 통해서 사제의 능력과 적성에 맞는 임무를 맡겨 주려고 합니다. 주교님은 어떤 사제를 마음에 들어 할까요? 우는 사제가 있습니다. 능력도 안 되는데 본인이 원하는 곳으로 보내 주기를 청합니다. 공동체를 어렵게 하기도 하고, 공동체를 갈라놓기도 하고, 교우들이 떠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꼭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보내 달라고 합니다. 그런 경우 주교님은 무척 난처할 겁니다. 밀고 당기기를 하는 사제가 있습니다. 일본에서 사목하고 싶다고 하면서 미리 일본어 어학 시험에 합격합니다. 주교님은 큰 고민 없이 일본으로 보내 줍니다. 일본 교구에서 원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2년 전에 영주권을 얻었습니다. 주교님께 교포 사목을 청했습니다. 주교님은 큰 고민 없이 저를 교포 사목 사제로 파견하였습니다. 능력과 사목의 역량이 검증된 사제가 있습니다. 신부님이 가는 곳마다 신자가 늘어나고, 공동체가 활기를 되찾고, 적절한 장소를 찾아서 본당을 분가시킵니다. 이런 사제를 ‘해결사’라고도 합니다. 이런 사제가 많으면 주교님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주교님이 원하는 걸 알아서 해 주는 사제가 있습니다. 타 교구에서 공소 사목 사제를 원할 때입니다. 기꺼이 손을 들어 공소 사목을 신청하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인사 적체로 본당 신부의 자리가 부족할 때입니다. 후배 사제를 위해서 기꺼이 특수 사목을 신청하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고속 터미널 성당에도 지원하고, 시장 성당에도 지원합니다. 6년 전입니다. 저는 특수 사목을 5년 했기에 본당 신부로 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교님께 본당 신부로 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잘 결정했다고 하였습니다. 주교님은 저를 미주가톨릭 평화신문 지사장으로 파견하였습니다. 팬데믹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신문을 홍보하고 만드는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이곳 달라스를 마치면 주교님이 원하는 걸 찾아서 하려고 합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도 남의 밑에 있지만 제 부하들에게 명령하면 부하들은 제 말을 듣습니다. 그러니 직접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아픈 부하가 곧 나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우는 아이의 신앙을 넘어서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밀고 당기는 신앙을 넘어서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걸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두드려야 하는 것은, 우리가 청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구하여야 하는 것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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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0.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밤 중에 찾아와 빵 세 개를 꾸어 달라고 합니다. 내일 아침을 위해 오늘 밤, 밥을 해 놓는 것처럼 그들도 아침용 빵을 마련해 놓고 잠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빵을 달라고 합니다. 만약 준다면 아침에 빵을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준다는 것은 자신이 지금 가진 것을 전부 내어준다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처럼 각방을 쓰며 살던 시대가 아닙니다. 방 한 칸에 가족이 누워 잠을 잤습니다. 그러니 뭔가를 찾고 주려면 가족들을 넘어 가야 하는 것이지요. 가족들이 다 깨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못 준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모두 잠들어서 일어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알면서도 졸라댑니다. 그러면 밤새 그 졸라대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 가족이 잠시 깨도, 또 아침을 거르거나 늦게 먹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찾아라, 두드려라. 그러면 주실 것이고, 얻을 것이고, 열릴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빵을 얻으려고 청하는 친구처럼 그렇게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찾고 두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작 한 번의 청함과 두드림 후 대답 없는 하느님께 실망하고 돌아서기까지 합니다.
정말로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위해 식음을 전폐하고 1초도 버리지 않고 매달릴 것입니다. 그렇게 찾으십시오. 세상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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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의 목적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말합니다.
문자가 만들어진 목적은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무엇인가를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농경 사회가 시작되고 계급이 생겼습니다.
그 안에서 시장 경제가 형성되었으며 사고 팔고 빌리는 일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누가 얼마를 빌렸는지 혹은 누가 얼마를 갚아야 하는지를 기억하기 위해 문자는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문자로 우리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전하고 나눕니다.
문자의 목적은 ‘기억’일지 모르지만 지금 우리의 문자는 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전하는 데까지 사용됩니다. 특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에 맞게 태어나고 그 뜻에 맞게 사용됩니다.
문자도 마찬가지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태어남은 각기 다르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곳에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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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0.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도 주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계속됩니다.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청을 들어주지 않던 친구라도 그가 끈질기게 간청하면 결국 들어준다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결론에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확신이 넘치는 말마디가 꼭 앞에 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이처럼 기도는 염치와 체면불구하고 간절하고 절실해야하며 항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낮은 자세로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기도입니다. 이런 겸손한 기도의 자세는 그대로 믿음의 자세요, 정말 주님을 믿는다면 이처럼 항구하고 끈질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자세가 감동을 줍니다. 제 주변에도 이렇게 믿음으로 절실히 살아가는 이들을 종종 봅니다. 여기 수도자들이 대부분 이렇게 살아갑니다. 이어지는 기도에 관한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더욱 용기백배하게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정말 이렇게 믿어 기도하는 자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기도는 이처럼 좌절함이 없이 끊임없이 한결같이 바쳐야 합니다. 불퇴전의 자세로, 칠전팔기, 백절불굴의 자세로 끊임없이, 한결같이 주님께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이래야 참으로 탄력좋은 기도요 믿음이요 삶입니다. 기도의 탄력, 믿음의 탄력, 삶의 탄력은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봅니다.
제가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한결같이 참 많이 강조해온 것이 ‘주님의 전사’에게 탄력좋은 믿음입니다. 새 용수철처럼 누르면 즉시 튀어나오는 탄력이 영성생활에도 절실함을 강조했습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과 함께 가는 영적탄력의 삶이요, 이래서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우선해야 합니다. 언제든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다시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노력에 항구할 때 영적탄력도 보존됩니다. 영적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영적탄력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늘 푸르른 믿음, 푸르른 희망, 푸르른 사랑의 사람이라면 영원한 청춘입니다.
제가 여기 불암산 기슭 요셉 수도원에 36동안 정주하면서 가장 많이 바라본 것이 늘 거기 그 자리의 하늘과 불암산이며, 간혹 답답하고 암담할 때도 있었지만 결코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은 없었음도 좋은 영적탄력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정주와 믿음의 표상인 산을 흠모하여 쓴 시들이 가장 많습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하늘과 산의 관계는 주님과 나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무려 27년 고백시가 여전히 지금도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더불어 10월 한달 저를 내내 행복하게 하는 “산앞에 서면”이란 시입니다. 늘 고백해도 늘 좋고 새롭습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2024.9.29.>
영적탄력이 손상되어선 안됩니다. 그래서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절망의 자포자기로 일어나 다시 시도하지 않는 것이 대죄라고 단언하곤 합니다. 한번 나태함으로 영적탄력 떨어지면 회복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에게는 한결같은 기도의 훈련은 절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의 훈련, 믿음의 훈련, 삶의 훈련에 결코 지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다 죽어라”, “공부하다 죽어라”, “기도하다 죽어라” 삶의 치열성을 강조한, 영적전투에 최선을 다하는 어느 구도자의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다음 복음 말씀도 단숨에 읽혀집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을 신뢰한다면 결코 끊임없이 한결같이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에, 믿음에, 삶에 지치는 일이, 영적전의를 상실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새삼 청해야 할 최고, 최상의 선물은 성령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은혜 자체가 성령입니다. 정말 한결같이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두드리면 하늘의 아버지는 최상의 선물,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노년의 삶은 말그대로 성령에 따른 자유롭고 초연한 사랑의 행복한 삶일 것입니다. 평생 영적전투에 성령의 도움은 절대적이며, 성령께서는 평생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일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십니다. 사실 이렇게 항구히 청하고 찾고 두드리며 살 수 있음도 순전히 성령의 은총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제1독서 말씀이 정신 번쩍 들게 합니다. 성령의 사람, 복음의 사람,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성령에 따라 복음적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분발케 합니다. 사도의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주신 말씀은 우리에게도 큰 깨우침이 됩니다.
“아, 어리석은 갈라티아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이 헛일이라는 말입니까?”
정말 성령의 도움으로 복음적 삶을, 경청과 겸손, 섬김의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으로 마치지 않도록 더욱 영적 삶에 박차를 가해야 하겠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적탄력 좋은 성령의 사람이 되어 영적승리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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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0.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나를 통하여 몸소>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9)
벗을 위하여
기도드리니
하느님께서
나를 통하여
몸소 이루십니다
보잘것없는 벗을 위하여
기도드리니
하느님께서
내 눈길을 통하여
몸소 보살피십니다
외로운 벗을 위하여
기도드리니
하느님께서
내 발길을 통하여
몸소 찾아가십니다
쓰러진 벗을 위하여
기도드리니
하느님께서
내 손길을 통하여
몸소 일으키십니다
벗을 위하여
기도드리니
하느님께서
나를 통하여
몸소 이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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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0.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기도로 청하고, 올바른 삶으로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라
하늘 나라의 기쁨에 도달하기를 갈망하는 우리에게 구원자 주님께서는 청하라고 가르치시며, 우리가 청하면 그 기쁨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는 온 마음을 기울여 주님의 이 말씀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늘 나라는 게으르고 한눈파는 자들이 아니라 그것을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들에게 주어지고 발견되고 열리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분명하게 증언히십니다. 그 나라의 문은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으로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만 열리는 문입니다.
-존자 베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영적인 능력을 소유한 사람은 경험에 의해 그 능력을 키우는 반면,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더 나쁜 상태로 떨어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 돈 관리 비유가 초기에 활용되었다.
이 비유에서 개인은 통찰력이 없어서 책망을 받는다. 그는 기회주의와 자기 주장과 지나친 조심성으로 인해 책망을 받는다.
엑카르트는 긍정의 길을 나타내는 성서의 비유와 루카 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일부러 대조한다.
많은 군중이 모여들자 예수께서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면서,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제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쩨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제 십자기를 젊어지고 내 뒤를 쫓아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루카 14,25-27).
엑카르트는 이 구절을 곧바로 주석한다. 이 구절은 어떤 사람이 자기를 여의고, 자기를 위하여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는 것을 못한다. 하지만 긍정의 길과 부정의 길 사이에는 여전히 긴장이 도사리고 있다. 엑카르트는 그러한 긴장을 굳이 해소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우리를 꼬드겨 그 긴장을 더 깊이 탐험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이 애타게 그리워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256)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격외 은총
히야친타는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은총을 받았는데 발현 때부터 미래 환시의 특은을 입었다.
어느 날 루치아와 프란치스코가 근처에 있는 숲 속으로 꿀을 찾으러 간 사이에 히야친타는 우물 그늘에 혼자 남아 있었다. 갑자기 그녀는 두 사람이 깜짝 놀랄 지경으로 큰 소리로 외쳤다.
“루치아 언니, 루치아 언니, 교황님 보았어?"
“교황념? 아니, 못 보었어. "
“어쩨서 그럴까? 나는 큰 집 안의 작은 책상 앞에 꿇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고 계시는 교황님을 보았는데... 집 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중 어떤 이는 교황님께 돌을 던지고 어떤 이는 저주하며 아주 나쁜 욕을 하고 있더라. 불쌍한 교황님! "
며철이 흘렀다. 전에 말한 두 분의 사제가 방문하였고 교황 성하를 위해 기도하도록 권한 것은 바로 그 즈음이었다. 히야친타는 두 친구에게 말했다.
“어쩜! 그건 틀림 없이 내가 요전에 본 울고 계셨던 분, 성모 마리아께서 말씀해 주신 비밀 중의 그분이시다, 그렇지? 성모님은 역시 그 두 분의 신부님께도 말씀하셨나 봐! 너희들은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 교황님을 위해 많이많이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
또 어느 날 셋이서 카베소 동굴에서 천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동안 히야친타는 일어서서 루치아를 손짓하며 불렀다.
“저것 봐! 저 많은 통로 큰 길이나 작은 길에 그리고 저 많은 광장에 먹을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서 굶주려 죽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지 않니? 아, 저것...성당 안에서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상 앞에 꿇어 교황님이 열심히 기도하고 계시다! 많은 사람들이 교황님과 함께 기도하고 있다. 안 보이니?....”.
(교회 당국의 명으로 삭제된 부분이 있음)
히야친타가 루치아에게 교황 성하를 본 사정을 사람들에게 말해도 상관없겠는가고 물었을 때 루치아는 그것이 단서가 되어 비밀이 새어 나올까봐 두려우니 조심하는 뜻에서 입 밖에 내지 말 것을 당부했다.(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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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0.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때론 주간 복음을 이해하고 심화하기 위해서 그 주일 복음과 연결해서 바라보고 살아가는 영성적인 습관이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번 주일 복음의 핵심은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아이들을 받아들임, 월요일은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라, 는 말씀에 담긴 사랑으로 살아감, 그리고 화요일엔 우리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주님 앞에 멈춤과 들음, 수요일은 참 기도에 대한 가르침, 오늘 복음에선 기도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결국 사랑의 삶과 기도 생활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 영성 생활의 바탕이며 초석입니다. 기도와 사랑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이며 이는 곧 예수님의 존재였고 삶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을 믿고 따르려는 그리스도인 우리에게 이런 영성의 단련이 필요합니다. 비록 작지만 작지 않은 주님께 대한 믿음에서 사랑의 실행이 나오고 그 모든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의 답이며 열쇠인 주님과 인격적이며 사랑의 관계인 기도가 그 원천이며 바탕이라는 점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기도에 우리를 참여하도록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당신과 함께 아빠 하느님께로 우리를 이끌고,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서 살아가도록 힘을 주시고 그에 필요한 일용할 양식(=영적 양식 포함)을 주시며 아버지의 자녀로서 서로 용서하며 유혹에 빠지지 않고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선, 아버지의 자녀로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아시고 계신 아빠 하느님은 우리의 청함을 즐겨하시고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 까닭은 바로 우리의 청함은 단지 어떤 그 무엇을 청하는 것만이 아닌 바로 아빠 하느님을 아빠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아빠 하느님의 마음을 아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11,9.1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이지 우리의 청함과 찾음과 두드림을 기다리시는 아빠 하느님을 알고 계신 예수님은 “친구의 청을 들어주는 사람의 비유”(11,5~8)를 통해서 간절하게, 끈질기게 귀찮을 정도로 집요하게 기도하는 이에게 아빠 하느님은 참지 못하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는 표현에 이미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아빠 하느님에 대한 확신이며 이런 확신에서 우리가 아빠 하느님께 기도하기를 바라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얼마나 은혜롭고 고마운 말씀입니까?
이렇게 우리가 말(=청함)과 몸(=찾음)과 그리고 가슴(=두드림)으로 아빠 하느님께 간절하게 기도할 때 우리는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고, 이 변화가 우리로 하여금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우리를 대신하여 아빠 하느님께 간구해 주심’을”(로8,27참조)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때 아빠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1,13)하고 예수님께서는 아빠의 참 마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아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세상적인 어떤 그 무엇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 좋은 것”(마태7,11) 곧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실 성령은 바로 예수님의 강생에서 부활의 여정 가운데서 함께 하셨던 영이며, 그 영은 바로 아버지의 영이며, 그 영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 영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의 아빠이시며, 그 영을 통해서 비로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참으로 알게 되어 예수님을 주님이시다, 고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빠 하느님, 저희에게 사라지고 마는 세상적인 어떤 그 무엇보다도 당신께서 주시길 바라시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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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0.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내가 바라는 것보다 내게 필요한 것만을 /
박윤식 [big-llight] 2024-10-09 ㅣNo.176661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나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하느님의 그 모습도 이렇게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아버지가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반드시 주시듯이, 하느님께서는 늘 좋은 것을 찾아 주신다. 그 좋은 것을 얻으려는 게 간절하다면, 그것을 꼭 주시리라. 물론 꾸준히 간청을 하였다하지만,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들도 가끔은 체험할 게다.
설령 우리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여도, 그것은 하느님께서 싫어서가 아닌, 우리를 위해 좀 더 더 좋은 것을 마련하시려고 잠시 유예하시는 것으로 보면 좋으리라. 성숙한 삶을 위해서는 성찰과 반성, 새로운 깨달음이 늘 필요하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무조건적으로 절대자를 향해 의지하는 ‘원초적 복종’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걸 늘 상 잊어서는 안 될게다.
그러나 그 기도 지향이 구원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면, 그 응답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이루어질 수도. 기도는 이렇게 상호간의 대화이니까. 그것은 일방이 아닌 쌍방이 주고받는 수단이기에. 그러니 주고받다 보면 서로 이해되고, 그러면 소통이 꼭 되리라고 이해하리라. 지금 우리 사회는 소통다운 소통이 제대로 잘 안된다나. 그건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수도.
따라서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는 건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거다.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기도하라신다. 그만큼 당신 백성과 항구한 대화를 바라신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당신 마음을 활짝 열고 기다리시는데,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그분의 무한한 은총을 구할 수 있을까? 열리지 않는 문은 없다. 자꾸만 두드리면 문은 반드시 열릴 게고, 또 그 무엇을 주시리라.
사실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면, 결국은 이루어질 게 빤하다. 그렇지만 때로는 우리의 죄의식에서 그 하느님을 감히 볼 수 없을 수도. 그분 앞에서만큼은 감히 뻔뻔스러울 수는 없기에. 하지만 지나친 위축도 결코 바른 자세는 아닐 게다. 매사 줏대도 없이 벌벌 떠는 이를 어디 좋아할 이가? 믿는다는 우리도 죄 지을 수가 있으리라. 하지만 우리는 그분 자녀임을 잊지는 말자. 열릴 듯 닫힌 그 문을 반드시 연다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기도하고 회개하면 열리리라.
인디언들이 가뭄에 기우제 바치면 꼭 비가 온단다. 간절한 마음으로 비올 때까지 바치기 때문이랄까. “누구든지 청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리리라.”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내가 간절히 청한다고만 해서 언제나 그걸 주시는 게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가 필요로 하는 그것보다는, 내게 필요한 것만을 당신 손수 챙겨주시기에. 사실 기도를 드린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하느님께 의존한다는 것이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자녀들을 사랑하시고 보살피신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그분께서 자녀들을 사랑하신다고 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을 우리 원하는 방식대로 요구나 졸라도 안 된다. 우리 기도는 하느님 자녀로 드리는 기도여야 한다. 어떤 부모도 자식이 해 달라고 조른다고 다 해 주지는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언제나 그 기도에 귀 기울이시고 우리가 원하는 것도 아신다. 또 우리가 하느님 자녀에 맞갖은 태도를 지니고 그분 사랑에 의지하면서 기도드릴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 안에서 우리 청을 반드시 들어주실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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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0.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도록 신자들을 호린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그 후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바오로 사도가 편지를 쓸 때 문제가 된 것은, 유다교를 배경으로 하면서 유다인이 아닌 이들에게까지 율법을 따르라고 요구한 이들이었습니다.
본래 유다인이었던 이들과 달리 이교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경우 굳이 할례를 받고 율법 규정들을 따르는 것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말하자면 유다교를 거쳐 그리스도교로 가야 하는 것처럼 생각한 이들 때문에, 바오로 사도는 복음에 대한 믿음이 필요할 뿐이라고 힘껏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염려한 것은 “율법에 따른 행위”(갈라 3,2)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밀어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업적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경쟁자는 나 자신이고, 내가 예수님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서간들의 뒷부분에서 주로 볼 수 있듯이 구원된 이의 삶은 복음을 알지 못하던 때의 삶과 달라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에 뒤따르는 결과이지 구원을 얻는 데 필요한 조건은 아닙니다.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고, 이교인과 똑같이 살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산다면 오히려 그가 정말 복음을 믿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따르는 삶이 구원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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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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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0.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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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0.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결국 성령입니다!
기도! 하면 대체로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청원 기도입니다.
우리 모두 스스로가 모르는 사이에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그리고 습관적으로 ‘기도해주세요.’
그리고 ‘네. 기도해 드릴게요.’ 같은 대화를 자주 나눕니다.
물론 오늘 주님 가르침에 따라, 간절한 원이 하나 있다면, 정말 절박하다면, 마음과 정신, 목숨과 영혼을 다해 아버지께 청할 필요도 있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 9)
사실 내가 건강해야 복음 선포도 자신만만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가 합격해야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몫을 당당히 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평화롭고 가화만사성해야, 그를 바탕으로 이웃 사랑의 실천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기도의 전부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기도는 청하는 것, 훨씬 그 이상의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 현존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려는 노력입니다.
기도는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기쁘고 충만하게 살려고 발버둥치는 일입니다.
기도는 나도 힘들지만, 나보다 더 힘든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는 일입니다.
이런 기도는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결국 성령입니다! 성령의 도움이 중요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굳건히 현존하시며 힘차게 활동하실 때, 성령께서 우리 인생 여정을 항상 인도하실 때,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기적을 기꺼이 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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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0.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9절) 하늘나라는 게으르고 한눈파는 자들이 아니라, 그것을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들에게 주어지고 발견되고 열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나라의 문은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으로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만 열리는 문이다. 기도와 올바른 삶 그리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노력해야 한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12절). 생선은 믿음을 상징한다. 생선은 물세례를 연상할 수 있고 이 세상 파도에 상처를 입지 않는다. 반대로 뱀은 사람을 속여 하느님을 떠나게 한다. 달걀은 희망을 상징한다. 앞으로 병아리가 생겨나듯 곧 눈에 보이리라고 희망하기 때문이다. 전갈은 희망의 반대이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는 전갈을 경계해야 한다.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태 7,9) 빵은 사랑을 상징한다. 음식물 가운데서는 빵이 단연 으뜸이다. 돌은 그 반대이다. 돌처럼 단단히 굳은 마음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당신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 아시는 그분이 우리에게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3절) 우리의 마음이 악에 휩쓸리기 쉽고 만유의 하느님과 달리 선에만 이끌리는 존재가 아니지만, 우리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듯이 그분께서는 성령을 주신다고 하신다. 여기서 성령은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 들어감을 뜻하며 또한 성령의 은사를 가리킨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좋은 것이다. 그것을 얻는 사람은 가장 복되고 칭송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될 것이다. 기도로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느님 안에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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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0.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께서 기도를 빨리 안 들어주시는 이유
오늘 복음도 역시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해 알려주시는 내용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 청할 때 꾸준하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무언가를 청할 때 들어줄 때까지 떼를 쓰기도 합니다.
그러면 엄마는 바로 줍니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것을 빨리 얻어내는 방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밤에 손님을 맞은 친구는 먼저 자는 친구를 깨웁니다.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그러나 계속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다 줍니다.
그 친구는 속으로 ‘이 친구가 이렇게 나를 괴롭히니 들어줘야지.
아니면 또 찾아와서 괴롭힐 거 아니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실 친구는 빵을 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친구의 친밀감을 시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언가 계속 청해도 된다고 믿는 관계는 깊은 관계입니다.
아내만이 남편에게 계속 청할 수 있고 아이만이 엄마에게 계속 청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청하는 것을 최대한 빨리 받을 수 있습니다.
무언가 청을 거부한다는 말은 함께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관계는 내가 청하고 받고 또 상대의 청을 들어주는 것으로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조앤 롤링의 ‘해피 포터’ 시리즈 출판 여정은 인내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녀의 원고는 최종적으로 승인되기 전에 12개의 출판사로부터 거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책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녀를 믿고 그 출판을 맡아준 출판사는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일단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그 사람의 인격을 믿고 함께 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상대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게 점원이라면 가장 두려워할 것이 무엇일까요?
손님이 떠나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느님도 이것을 가장 두려워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지나다가 진열장에 꼭 입고 싶은 옷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비쌀까 봐 문을 열고 머리만 집어넣고 점원에게 묻습니다.
“이 옷 얼마예요?”점원은 “100만 원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때 그 사람이 그 옷을 살 확률이 높을까요? 아마 “당신은 저 옷을 살 돈이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자신이 없죠.
가격만 빨리 알고 그냥 가던 길 가세요!”라고 느낄 것입니다.
“뭐? 나를 무시해?”라며 보란 듯이 옷을 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그 사람에게 옷을 사서 기쁨을 주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말 훌륭한 직원은 어떻게 말할까요?“아, 예! 잠깐 들어와서 앉으세요.
제가 가격을 알아보는 동안 차 한 잔 드시면서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습니다?”
일단 가게에 들어온 사람은 그 친절함에 점점 보답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점원은 눈썰미로 이미 그 사람의 치수를 알아서 맞는 옷을 가져와 입어보라고 합니다.
입어보니 딱 맞습니다.
아마 이 사람은 150만 원이라고 해도 그 옷을 살 것입니다.
존중받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께서 무언가를 청하는 우리에게 가장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청을 들어주면 다시 필요한 게 있을 때까지 오지 않을까 봐 그게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잡아놓고 싶어서 지금 청하는 것을 당장은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에사우로부터 도망쳐서 외삼촌 라반의 동네로 피신하였습니다.
라반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레아와 라헬이었습니다.
야곱은 동생 라헬을 더 좋아하였고 라반에게 청하였습니다.
라반은 야곱이 축복의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7년을 일해주면 라헬을 주겠다고 합니다.
야곱이 7년을 일하고 눈을 떠보니 레아가 누워있었습니다.
라반은 라헬과 결혼시켜 주면 금방 자신을 떠날 것을 알고 7년만 더 일하라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야곱은 그래서 7년을 더 일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마음도 라반의 마음과 같으실 것입니다. 무언가를 들어주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떠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평생 죽기까지, 아니 죽은 후에도 청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처럼 이 시대에 그리고 이후에도 이해하기 힘든 구원의 원리를
쉽게 정립하여 놓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별처럼 많아지게 하시겠다고. 그러나 그 약속은 이사악 하나 낳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어서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빌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관계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작은 청은 그냥 들어주십니다.
당신을 떠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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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0.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일은 ‘지금’ 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9-13)”
1)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청하면 주실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주신 것을 청해서 받아라.”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ㄴ).” 라는 산상설교의 말씀입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는 분이고, 그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이 자동적으로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청해서’ 받아야만 ‘나에게’ 옵니다.
만일에 청하지 않는다면, 또는 안 받으려고 하면, 아버지께서 아무리 많은 것을(좋은 것을) 주셔도 받지 못합니다.
내가 안 받아서 못 받는 것입니다.
2)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강도당해서 초주검이 된 그 사람은,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을 것이고, 또 누구든지 아무나 지나가다가 도와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 지나가는 사제, 레위인, 사마리아인에게 제발 좀 도와달라고 요청했을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그를 도와준 것은, 그의 요청에 응답한 일이기도 하고, 또 그의 간절한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신 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살기를 포기하고, 그래서 기도하지도 않고, 사마리아인의 도움도 거절한다면? 그러면 죽는 것입니다.
또 만일에, 자기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이 동족 유대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을 알고서 “나는 사마리아인의 도움은 받지 않겠다.” 라고 도움을 거절하거나,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니 사람이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 라고 하면서 도움을 거절했다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께서 ‘직접’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가 아닙니다.
물론 도움이 하늘에서 직접 내려오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람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어떤 방식으로 누구를 통해서 받든지 간에 내가 받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 기도했던 그것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시기와 방법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십니다.>
3)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라는 말씀도 ‘같은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이미 문을 열어 놓으셨으니, 그 문을 찾아서 들어가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스스로, 능동적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으면,
문이 이미 열려 있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문은 닫혀 있는 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말씀에서, 그리고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을 ‘능동적으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시고, ‘내가’ 그 문을 열어 드려야 하는 상황은 복음 말씀과는 반대의 상황인데, 그래도 어떻든 ‘능동적으로’ 문을 열어야 한다는 점은 같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거나 무시한다면,
그래서 문을 열어 드리지 않는다면,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4) 문을 두드린다는 상황에서 다음 말씀도 연상됩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루카 13,25).”
이 상황은 ‘최후의 심판’이 끝난 뒤의 상황입니다.
안으로 들어갈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이미 들어갔고, 그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밖에’ 남아 있는데, 그것은 사실상 쫓겨난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는 아무리 문을 두드리면서 열어 달라고 애원해도, 닫힌 문이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심판이 끝나면 모든 상황이 끝나고, 주님의 결정은 번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문을 두드리는 일은, 또는 안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일은,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지금’은 주님께서 문을 열어 놓고서 기다리시는 때이고, 문이 닫히는 ‘그날’은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때입니다.
사실 ‘청하고 찾는’ 일도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나는 ‘지금은’ 특별히 청할 일이 없다.” 라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오만함과 자만심을 버리지 않으면, 정말로 간절하게 청해야 할 일이 갑자기 닥쳤을 때,
청하지도 못하고 허둥대기만 할 것입니다.
기도는 평소에 꾸준히 하는 사람이 잘하게 되는 법입니다.
어떤 아쉬운 상황이 되어야만 기도를 하려고 하고 평소에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도의 힘’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의 힘’은 ‘믿음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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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0.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1,5-13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어제 복음에서 ‘주님의 기도’를 통해 기도의 중요한 부분인 ‘청원’에 대해 살펴보았다면, 오늘 복음에서는 ‘두 벗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할 때 지녀야 할 올바른 마음가짐에 대해 살펴봅니다. 예수님은 기도에 임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을 두 벗 사이의 관계에 빗대어 설명하시지요. 인간적인 친분만으로는 선뜻 들어주기 어려운 청원이라도 그것이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한 것이라면,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지속적으로 간절히 청하면 그가 어쩔 수 없이 들어주는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할 때에도 그렇게 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기도의 현실’은 예수님 말씀처럼 녹록치가 않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데도, 하느님께서 내 기도를 이루어주시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땐 그분의 싸늘한 ‘침묵’이 참으로 아프게 다가오지요. 게다가 내가 청하는 것과 정 반대 방향으로 상황이 부정적으로 흘러가는걸 보게 될 땐, 간절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향했던 나의 마음이 그분으로부터 돌아서게 됩니다. 우리가 겪는 기도의 현실이 이렇다보니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예수님 말씀이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리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할 때 첫번째 마음가짐은 그분께 대한 온전한 ‘신뢰’입니다. 나를 지어만드신 창조주로써 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며,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까지 다 아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이 첫째요, 그런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야말로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는 신뢰가 둘째겠지요. 그런 신뢰가 있을 때 개인적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헤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을, 그분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것을 청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바람과 나의 바람이 일치된 상태에서 하느님께 간절히 청하는 기도를 그분이 외면하실 리가 없지요. 하느님은 당신이 주시려는 것을 내 편에서 먼저 바라게 하시고, 가장 좋은 때에 아낌없이 베푸시는 분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할 때 두번째 마음가짐은 주도권을 하느님께 넘겨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삶과 세상을 자기 중심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기에, ‘좋고 나쁨’ 조차 본인 기준으로 판단하려 들 때가 많지요. 문제는 당장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조차 알지 못하는 부족한 우리이기에, 걱정과 두려움 때문에 조바심이 나서 숲이 아닌 나무만 보게 되는 우리이기에, 어떤 것이 정말 나에게 좋은 것인지를 제대로 식별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우리의 부족함을 잘 아시는 하느님이시기에 우리가 청하는 걸 주시지 않고 우리에게 정말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는 성령을 받아들이는 거라고 하십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기에 눈 앞의 작은 이익과 손해에 일희일비 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결과가 좋지 않아도, 삶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도, 결국엔 자신을 가장 좋은 길로 이끌어주실 하느님을 신뢰하기에 그분의 섭리 안에서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들을 선택하게 되지요. 그런 선택들이 쌓여 나의 삶을 최선의 행복으로 이끌어 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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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0.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잘해주시겠느냐?”
사도 바오로는 구약의 율법을 통한 구원의 길을 떠나 주님께 절대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은총의 구원을 따라 나선 사람입니다.
그는 절대적인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 해서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19-20)
그는 구약에 속한 율법의 그릇된 길을 가는 갈라티아 공동체의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반문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가지만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며,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얻었습니까?”(갈라 3,2)
주님께서 하느님께 끊임없이 기도하며 청하라고 이르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9)
주님께서 이 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제자들에게 친한 친구의 이야기를
비유로 드시며 설명하시지요.
다 잠자는데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곤히 잠자고 있는 한 밤중에 찾아가서
‘벗이 길을 가다가 들렸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빵을 세 개만 꾸어달라.’는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설명으로는 아무리 친해도 한 밤중에 찾아와서 깨우면 귀찮아하는
것이지요.
친구사이의 심리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아무리 친해도 귀찮으면 불평하고
거절당하기 십상이지요. 그래도 주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 가십니다.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7-8절)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멈추지 않으시고 친구 사이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들어
선하시고 좋으신 하느님께서 청을 들어주시는 크신 사랑을 설명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1-13절)
사람들은 세상이 각박하고 어지럽게 흘러간다고들 합니다. 이런 속에서도
부모의 사랑은 한결 같습니다.
부모의 사랑의 특징은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고통과
희생까지도 감수합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부모의 사랑을
설명하시며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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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0.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기도할까 ?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상호의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영성생활에 있어서도 신뢰심을 가지고 하느님께 의탁하며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영적으로 가난한 이의 기본적인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다양한 계기로 부탁이나 요청을 하고 때로는 거절도 하지만 문제는 어떤 마음으로 청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팔레스티나에서는 밤중에 손님이 찾아오더라도 기꺼이 환대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밤중에 벗이 찾아와 대접하려 하는데 여분의 빵조차 없어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문을 닫아걸고 가족들이 잠자리에 든 친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합니다. 청을 거절하던 친구도 졸라대며 사정하면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입니다(11,8).
벗이라면 마땅히 곤경에 처한 벗의 청을 들어주고 심지어 악한 사람이라 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아는데(11,13), 하물며 선하신 하느님께서야 곤경에 처한 우리의 청을 안 들어주실 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관대함은 인간에 비길 수 없이 깊고 넓으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은 그 누구보다 훨씬 고결하시고 너그러우십니다(아우구스티누스). 따라서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입니다.”(11,10) 곧 주님께서는 기도하는 이들의 기도를 언제나 반드시 들어주시며, ‘성령’의 선물마저도 더 잘 주실 것입니다(11,13).
하느님께 어떤 마음으로 청해야 할까요?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는다’(11,10)는 말씀을 무엇이든 청해도 되는 것으로 잘못 알아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은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나 현세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오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시도록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해야 합니다. 이 기본을 망각할 때 우리는 입으로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얼핏 보면 선행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하느님을 도구화하고 소유와 욕망의 노리개로 취급하는 망발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끈질기게 청하면서 모두가 행복하기 위한 정의 실현이나 공동선의 추구,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은 소홀히 하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기도한다면서 자기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간청하고, 죄를 고백하면서 남의 잘못만 들춰내 말하며, 하느님을 만나도록 주어진 시간을 온갖 잡담과 망상과 소음으로 채우고, 봉사한다면서 자기 이미지 관리에 여념이 없는 것. 이런 행동들이 얼마나 위선적이며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 것인지!
주님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십니다.”(마태 6,8) 하지만 하느님의 선 안에서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하여 창조의 영, 생명의 영, 기쁨의 성령을 끈질기게 청해야겠습니다. 주님은 자비하시니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으로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모두가 행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하늘나라가 ‘지금’ ‘여기서’ 실현될 수 있도록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끈기 있게 청하는 ‘거룩한 청원’의 시간이 가져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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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0.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기도의 자세를 일러 주십니다.
"줄곧 졸라 대면"(루카 11,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밤중에 두 벗 사이에 생긴 일을 비유로 드시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일깨워 주십니다. 아무리 벗이어도 모든 요청을 다 수락하지는 않겠지만, "줄곧 졸라 대면" 결국은 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창밖에서 빵을 부탁하는 벗이 꼭 성가시고 귀찮아서 그 청을 들어 주었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가만히 그 입장에 머물러 보면 다른 개연성도 없지 않습니다. 누군가 한 차례 거절된 일에 대해서 계속 간절히 매달린다면, 당장은 인간적으로 성가시고 짜증스러울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저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니까요.
줄곧 졸라 대는 모습은 절박함의 표현입니다. 다른 길이 없으니까요. 차선책도 대안도 부재한 생황에서 기대할 곳은 오직 상대방의 결정 번복뿐입니다. 물러설 수 없는 이는 될 때까지, 들어 허락될 때까지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10)
예수님께서 기도의 원리를 아주 단순하고 명백하게 설명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미 체험으로 알고 계시는 진리입니다.
이 말씀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어쩌면, 아직 기도한 바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때까지 기도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이 말씀은 선택적 가설처럼 들릴 테지요.
반대로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진 체험을 간직한 이들은 그 기도를 들어 주실 때까지 인내와 끈기로 충실히 매달렸던 이들이겠지요. 그들에게 이 말씀은 흔들릴 수 없는 진리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악하고 이기적인 인간도 제 자녀에게는 필요한 좋은 것을 주려 하는데 아버지 하느님은 어떠시겠는가?' 하고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자녀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투영이고 닮음이니 그 원형이신 분이 어떠하실지는 유추가 가능하지요.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미리 우리 마음에 심어 주신 갈망이 제 길을 찾는 여정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이루시려는 것을 우리가 갈망하도록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청한 바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루어 주시리라 믿기에, 이루어 주실 때까지 기도를 포기하지 않으니까요. 거기에 성령까지! 주님은 우리가 바라던 것에 더하여 성령까지 주심으로써 당신의 응답을 완성하십니다.
성령께서는 기도한 이가 체험한 하느님의 응답을 감사하게 하시고 계속 기억하게 해주십니다. 기억은 우리 삶에 주님의 현존을 지속시키는 영적 장치입니다. 그리고 믿음도 더해 주시지요. 성령의 힘으로 이 믿음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릅니다.(로마 8,15 참조)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갈라티아인들에게 반어법적 질문을 연달아 던집니다.
"여러분은 율법에 따르는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갈라 3,2)
갈라티아인들에게서 자신들이 받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어느새 잊어버리고 눈에 쉽게 보이는 율법 준수적 행위로 구원의 보증을 기대하는 퇴행이 보였나 봅니다. 이에 사도가 다급히 그들을 일깨웁니다.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에"(갈라 3,)
주님께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그들 가운데서 기적을 이루신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단순하고 순수한 믿음을 보신 주님께서 기적도 성령도 주신 것이지요. 사도는 지금 그들이 신앙의 출발점을 기억하도록 질문으로 휘몰아치며 그들을 흔들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기도를 통해 받은 것들은 겨자씨 한 알 만큼도 못 되는 보잘것 없고 유약한 믿음을 대견히, 어여삐 보신 주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성령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받은 은총을 우리 영혼에 각인시키시어 기억하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시니, 기도의 응답들은 회상에 머물지 않고 우리 인생 여정에 함께 동행합니다.
진정 기도하는 이는 청하는 바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자신 안의 갈망이 곧 이루어 주시려는 주님의 의지임을 직관으로, 체험으로, 관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바는 그저 지치지 않고 주님께 그분의 의지를 일깨워 드리는 것뿐입니다. 진정 기도하는 이에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 퇴로는 이미 끊어버렸으니,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오롯이 집중하고 전념하는 열렬한 사랑만이 오직 남은 외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영혼이 간절히 원하는 바를 깊이 바라보고, 이 마음을 주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오늘 되시길 바랍니다. 믿음을 주신 주님께서 성령과 함께 기도의 열매 또한 맺어주실 것입니다. 단, 그 "때"와 그 "방식"은 주님의 재량이고 몫이니 거기까지 넘보지 않도록 겸손히 삼가면서, 청하고 찾고 두드리며 열렬히 그분 창문 아래 머무릅시다. 벗님이 간절히, 절박히 청하는 바가 꼭 이루어지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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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0.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악의 고리를 끊어내는 삶
<2024.10.10>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21:1~26절)
❝악의 고리를 끊어내는 삶❞
❚ 죄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하고, 재앙을 부르는 악한 행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 악의 고리를 끊어내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 죄악에 물들지 않도록 깨어 있는 삶이어야 합니다(1~9절).
므낫세가 왕이 되었을 때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습니다. 그는 가장 오랜 통치 기간인 오십오 년 동안 예루살렘을 다스렸습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와 달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할 일을 저질렀습니다. 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더러운 짓들을 그대로 행했습니다(1~2절). 그는 아버지 히스기야가 없앤 신당들을 다시 짓고, 이스라엘 왕 아합을 본받아 온갖 가증한 우상 숭배 행위를 유다에서 다시 행했습니다.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일월성신을 섬겼습니다(3~5절). 나아가 그는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인신 제사의 악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6절). 또한 여호와의 성전에서 온갖 우상을 섬기는 가증한 일을 행했습니다(7절). 므낫세의 모든 죄사함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장소를 더럽혔습니다. 이는 결국 자신의 멸망뿐만 아니라 다른 이에게까지 여호와의 죄사함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것을 막는 악한 행위인 것입니다. 또한 모세에게 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써 유다도 곧 약속의 땅에서 쫓겨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8~9절).
아무리 작은 잘못이나 죄 그 자체를 깨달았다면 얼른 돌이켜야 합니다. 거짓이 더 큰 거짓을 불러오듯, 모든 죄는 그 하나로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왕이 우상 숭배에 앞장서는데 백성이 거룩하게 살아가기는 힘든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 한 사람의 바른 신앙을 갖는 것은 그가 속한 공동체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은 더욱 깨어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통한 경계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세상의 화려함으로 돌리면 점점 악에 가까운 삶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매 순간 말씀을 따라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비춰 보고 죄악을 경계하고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 일어나기 전에 말씀의 경고를 받아 죄악에 물들지 않도록 깨어 있는 삶을 통해 모든 악의 고리를 끊어내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는 삶이어야 합니다(10~18절).
계속해서 므낫세 왕에 대한 평가와 심판에 관한 예언이 이어집니다. 그는 그전의 아모리 사람들보다 더 악한 일을 저질러서 유다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죄를 짓도록 만들었습니다(10~11절). 아모리 사람은 이스라엘이 멸망시켜야 할 가나안 족속 대신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때까지 지속되었으나 그들의 왕 시혼이 패한 후에 그들의 왕조는 사라졌습니다. 이들은 가증스런 행위 때문에 가나안 땅에서 쫓겨났는데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 왕은 이보다 더욱 악한 행동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므낫세의 죄악은 결코 혼자만의 죄악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과 유다에 큰 재앙을 내리시겠다 말씀하십니다.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는 임박한 재앙의 소식으로 인해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남유다 백성들이 귀가 울릴 정도로 심각한 심판의 메시지를 듣게 된 것은 그들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순종하지 않은 결과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릇을 씻어 엎음같이 예루살렘을 씻어 버릴...’(13절)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 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저질러 온 죄악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유다마저 원수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도적질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14~15절). 므낫세는 또한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여 예루살렘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피로 가득 채우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16절). 결국 므낫세는 다른 왕들과는 달리 다윗의 성에 있는 왕의 묘지에 묻히지 못하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17~18절). 이는 그가 살아 생전에 우상을 섬기고 유다 민족을 범죄로 인도한 하나님의 심판이란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경고를 잘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는 지켜 주시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거절하는 자는 원수의 손에 넘겨 버리십니다. 모든 것에는 전조증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큰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많은 위험의 징후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모든 경고의 메시지를 깨닫지 못하거나 외면하다가 끔찍한 참사를 겪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결국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여 죄를 저지르면서도 당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므낫세 시대의 모습이요, 현대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죄가 극에 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의와 죄는 감춰지지 않고 드러나며, 잊혀지지 않고 기억된다는 사실을 깨달아 말씀을 통해 날마다 우리 자신을 돌아봄으로 모든 악의 고리를 끊어내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영적인 변화를 위하여 사모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9~26절).
므낫세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 아몬이 왕위를 계승받습니다. 그런데 2년 만에 신복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아몬 왕에 관한 기사는 그의 모친에 대한 소개와 ‘그의 아버지 므낫세의 행함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우상을 섬겨 그것들에게 경배하고...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그 길로 행하지 아니하더니...’(19~22절)라고만 소개되고 있습니다. 결국 그의 신복들이 반역하여 아몬을 죽이고, 그러자 유다 백성은 아몬 왕을 반역하였던 사람들을 다 죽이고 그의 아들 요시야를 왕으로 세웠습니다(23~24절). 아몬 역시 그의 아버지를 따라 ‘웃사의 정원’(쉬운성경)에 묻힙니다.
우리가 볼 때에 악에 대한 심판이 늘 즉각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을 영원히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어쩌면 악을 행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은 더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때는 급작스럽게 그리고 예기치 않을 때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 순간 죄악의 길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구와 무엇을 섬기고 경배하는지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가 복이 될 수도 있고, 저주가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의 영적인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영적으로 변화된 삶을 위해 우리 인생의 모든 판단의 척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삼고, 그분의 절대 기준인 말씀을 사모하므로 모든 악의 고리를 끊어내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주님을 멀리하면 은혜도 멀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늘 말씀의 경계를 받아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지 않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악을 심판하고 정의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더딘 듯해도 신속히 이뤄짐을 믿음으로 늘 깨어 있어 악을 끊어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왕하 21:1~26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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