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철학박사 강신주
유대인 출신이기도 한 아도르노는 나치가 패망한 뒤에도 계속 ‘아우슈비츠’의 문제를 거듭 숙고했습니다. 끈질긴 성찰 끝에 그는 충격적인 결론에 이릅니다. 아도르노의 결론에 따르면 ‘아우슈비츠’는 광기나 비정상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간이 그렇게도 자랑스럽게 여겼던 ‘이성’ 혹은 ‘합리성’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숙고한 것을 1961년 파리의 콜레주 드 프랑스(Collѐge de France)에서 일련의 강의로 공표합니다. 이때 한 강의는 《부정변증법(Negative Dlalektik)》(1996)이라는 책으로 정리되어 출판되지요. 이제 직접 그의 이야기를 경청해 보도록 하지요.
파악되어야 할 것은 가운데 개념의 동일성 앞에서 물러서는 것, 그것은 개념으로 하여금 사유산물의 공격할 수 없는 완전무결성·완결성·엄밀성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생기지 않도록 하는 과도한 작업을 강요한다. 위대한 철학에는 자기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용인하지 않고 자신 이외의 것을 온갖 이성의 간계를 통해 박해하는 편집광적 열성이 따랐다. 한편 이 박해 앞에서 그 이외의 것은 언제나 더욱더 뒤로 물러선다.
―《부정변증법》
‘개념의 동일성 앞에서 물러서는 것’이란 표현이 조금 난해하지요?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하리수처럼 성전환 수술을 받은 사람은 과연 여자일까요, 아니면 남자일까요? 이렇게 ‘여자’나 ‘남자’라는 개념으로 정리될 수 없는 것, 그래서 우리의 이성을 당혹스럽게 하는 것이 바로 ‘개념의 동일성 앞에서 물러서는 것’입니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문제는 과거 위대한 철학이나 철학자들이 ‘개념의 동일성 앞에서 물러서는 것’을 철저하게 억압하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위대한 철학이 자신의 완전무결함, 완벽함, 엄밀함을 지키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수행한 편집증적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나치가 게르만인의 순수성과 완전무결함을 위해서 집시 혹은 유대인들을 배제하고 아우슈비츠에 감금하려고 했던 이유도 바로 이 점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도르노가 보기에 아우슈비츠에서의 억압은, 기존의 위대한 철학 혹은 철학자들 속에 숨겨져 있던 편집증적 억압과 구조적으로 매우 동일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향의 철학은 모두 폐기되어야 할 나쁜 것일까요? 그렇게 단순하게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철학이란 것은 인간의 철저한 자기반성의 학문이었으니까요. 만약 철학이 전혀 없다면 사실 아우슈비츠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 또한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편집증적 억압에서 벗어난 새로운 철학을 꿈꾸게 됩니다.
역사적 위치에 비추어 보면 헤겔이 전통에 따라 무관심을 표명한 것에, 즉 비개념적인 것, 개별적인 것, 특수한 것에 진정으로 관심을 둔다. 말하자면 플라톤 이래 덧없고 사소한 것이라고 배척당하고 헤겔이 ‘쓸모 없는 실존’이라고 꼬리표를 붙인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철학의 테마는 철학에 의해, 우발적인 것으로서, 무시할 수 있는 양으로 격하된 질들일 것이다. 개념으로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 개념의 추상 메커니즘을 통해 삭제되는 것, 아직 개념의 본보기가 되지 않은 것, 그런 것이 개념에 대해서는 절박한 것이 된다.
―《부정변증법》
지금 아도르노는 앞으로의 철학, 그러니까 미래의 철학이 맡아야 할 임무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앞으로 도래할 철학은 ‘이성’이나 ‘개념’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이나 ‘비개념적인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그가 ‘이성’이나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철학이 이성 혹은 개념에 포착되지 않는 것들을 억압하거나 배제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이 점에서 아도르노는 프랑스의 해체론적 경향을 이미 선취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자크 데리다나 들뢰즈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현대 철학들은 이성이나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된 사유를 철저하게 공격한 것으로 유명하지요. 만약 아도르노가 꿈꾼 철학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철학을 앞으로의 세대가 공유한다면 아우슈비츠 같은 비극은 다시 생기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말할 수 없는 것’, ‘작고 상처받기 쉬운 것’ 등이 배제와 억압이 아니라, 따뜻한 관심과 애정의 대상으로 다루어질 수 있을 테니까 말이지요. <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강신주, 도서출판 동녘, 201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