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 귀순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1969년 7월2일 사형된 고 李穗根(이수근) 씨가 49년 만에 명예를 회복했다. 2018년 10월11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3부(김태업 부장판사)는 李 씨의 재심에서 반공법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다만 제3국으로 가기 위해 대한민국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위조 여권을 만들고, 美貨(미화) 환전 후 취득신고를 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이던 이 씨는 1967년 3월 판문점을 통해 귀순했으나 1969년 1월 위조여권을 이용해 홍콩으로 출국한 뒤 캄보디아로 향하다가 캄보디아 탄손누트 공항에서 李大鎔(이대용) 당시 월남 공사 팀에 의해 체포됐다.
위장 귀순해 북한의 군사적 목적을 위해 기밀을 수집하는 등 간첩 행위를 한 뒤 한국을 탈출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그는 같은 해 5월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씨의 사형은 두 달 뒤인 7월 집행됐다.
사망한 李穗根(이수근)을 대신해 재심을 이끌어온 사람은 이모부인 李穗根과 함께 간첩으로 몰렸던 처조카 裵慶玉(배경옥) 씨다. 李穗根에게 위조여권을 만들어주고 서울에서 홍콩을 거쳐 캄보디아로 들어가는 여정을 동행한 죄로, 그는 이수근과 함께 간첩으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 21년간 복역했다. 1989년 12월22일에 출소한 이후 그는 줄곧 이 사건에 매달렸다.
재판부는 “지난 1969년의 판결은 이수근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위장 귀순한 간첩임을 전제로, 군사기밀 탐지, 국가기밀 탐지 및 수집, 반국가단체 활동, 대한민국 탈출 등의 행위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 및 반공법 위반 혐의를 적용한 것이었으나, 모두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며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에서 “중앙정보부는 영장 없이 피고인을 강제 연행해 불법 구금하고, 고문 구타 등의 가혹행위 등 인권을 유린했다”고 인정했다. 또한 “중앙정보부 및 검찰 측이 제출한 피고인들의 진술서는 모두 이런 고문과 폭행에 의한 허위자백일 개연성이 충분하고, 따라서 증거능력을 상실한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첫 공판이 열리기 전날 대공분실로 끌려가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 말라”는 협박을 받았고, 재판 당일에도 중정 요원들이 법정을 둘러싸 위압적 분위기를 조성한 만큼 당시 법정에서 한 진술도 강요된 것으로 의심할 만하다고 봤다.
또한 재판부는 ▲조잡한 암호문 ▲난수표가 없는 점 ▲이수근의 취득 정보가 의미 있는 국가기밀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 ▲당시 홍콩에 도착해서 충분히 북한 영사관 등으로 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캄보디아로 향한 점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에게 보낸 미안하다는 편지 ▲중정 감찰실의 폭행·폭언·협박을 견디기 어려워했다는 점 ▲이수근 사형집행 후 북한에서 ‘변절자의 말로는 이렇다’는 강연이 열렸다는 점 등을 근거로, 이수근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위장 귀순 간첩이라는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마지막으로 이 사건이 ‘위장 귀순한 간첩으로 조작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위법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의해 간첩이라는 오명을 쓴 체 생명권을 박탈당함으로써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점에 대해 진정으로 피해자와 그 유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고 마무리했다.
1969년 이수근의 사형집행 후 잊혀졌던 이 사건이 처음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은 건, 조갑제 기자가 1989년 월간조선 3월호에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기사를 쓰고부터였다. 이 기사는 이수근을 사이공 공항에서 체포했던 이대용 공사의 증언을 뼈대로 삼아 주로 정보부 간부들을 대상으로 취재한 내용이었다.
21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배경옥 씨가 출소 후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도 조갑제 기자였다. 裵慶玉 씨는 출소 후 이수근과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裵 씨는 출소 이듬해 1990년 3월호 ‘月刊朝鮮’에 ‘나는 간첩이 아니었다’는 수기를 썼다. 편집장이던 조갑제 기자는 1991년 10월호 ‘月刊朝鮮’에 탈북한 前 북한 노동당 간부 金正敏(김정민) 씨의 증언을 담은 기사를 실었다. 金正敏 씨가 증언한 내용의 요지는, “이수근의 가족은 북한에서 숙청되었고, 그가 남한에서 처형된 후 노동당 간부들에게 ‘변절자의 말로는 이렇다’는 제목의 강연이 이뤄졌다”는 것이었다.
裵慶玉 씨는 이수근이 진정으로 귀순하였다는 증거를 얻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국가기록원(당시 정부기록보존소)을 수시로 드나들며 수사기록 열람 및 확보에 주력했고, 청와대·안기부·국민고충처리위원회·검찰 등 민원을 넣을 수 있는 기관엔 모두 민원을 제기했다.
조갑제 기자도 흥미를 버리지 않았다. 1994년에 ‘月刊朝鮮(12월호)’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수근의 탈출을 도왔던 유엔군 정전위 직원 제임스 리 씨는 이수근이 위장귀순하지 않았다는 견해를 밝혔다. 1997년에는 黃長燁(황장엽) 선생과 함께 탈출했던 金德弘(김덕홍) 씨로부터 “나도 북한에서 ‘변절자의 말로는 이렇다’는 강연을 들었다”는 증언도 얻을 수 있었다.
배경옥 씨는 2005년 7월13일에 이 사건의 再審(재심)을 법원에 신청했다. 그때만 해도 재심 개시 결정을 얻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재심 신청은 李珍雨(이진우) 변호사(전 국회의원)가 맡아서 했다. 이 변호사는 ‘월간조선’에 실린 배경옥 씨에 대한 기사를 읽고 무료 변론에 나선 것이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출범하자 배경옥 씨는 2005년 12월2일 진실규명 신청을 냈고, 위원회는 이듬해 4월25일 진실규명을 위한 조사개시를 의결했으며, 2006년 12월19일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2007년 2월26일 법원은 裵慶玉, 金世埈 두 사람이 신청한 再審을 하기로 결정했다. 2008년 12월29일 서울고등법원 제6 형사부(재판장 박형남, 판사 박선준 김상규)는 최종 선고에서 “이수근이 위장 귀순한 간첩으로서 反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라는 점과 관련하여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은 증거능력이 없거나 증명력이 없는 것이어서, 위 각 증거들만으로는 이를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 원심판결 중 피고인들에 대한 부분을 파기한다”고 결정하며, 피고인들에 대한 국가보안법위반 혐의 등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裵 씨는 자신에 대한 재심 판결 직후 곧바로 李 씨의 재심도 청구했다. 從犯(종범)이었던 裵 씨에 대한 무죄 판결로 主犯(주범)인 이수근에 대한 재심도 쉽게 진행될 줄 알았으나, 이후 법적 공방으로 10년의 세월이 흘러버렸다.
법원은 2011년 11월 裵 씨에게 재심청구권이 없다는 이유로 재심청구를 기각했다. 형사소송법 제424조 2항에는 사망한 자의 재심은 검사나 배우자, 직계친족, 형제자매만 청구할 수 있도록 돼 있다. 홀로 귀순해 국내에 가족이 없는 李 씨에게는 ‘公益(공익)의 대표자’인 검사만이 유일한 재심 청구권자가 된다.
裵 씨는 이에 2013년 11월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해달라는 진정서를 냈다. 5명 이상의 담당검사가 바뀌었으나 아무런 결론을 내지 않았다. 2015년 12월 배 씨는 대검찰청에 재심청구 지연에 대한 민원을 제기했다. 2016년 2월에야 검찰은 형사소송법 제420조 5항을 근거로, ‘이수근 씨의 죄목을 뒤집을 만한 명백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재심 청구 사유가 불충분하다’는 취지로 재심을 청구할 수 없다고 통보해왔다.
당시 검찰 관계자는 “배 씨의 재심 판결만 가지고 이수근의 재심 사유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며, 고문 등 불법 수사 사실에 대해서도 “(2008년의) 고등법원의 일부 판단이 확정적인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었다.
이런 검찰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2008년 裵慶玉 씨에 대한 재심판결문에는 『이수근이 위장귀순한 간첩으로서 반국가단체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라는 점과 관련하여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은 증거능력이 없거나 증명력이 없는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裵慶玉 씨는 검찰의 회신을 받은 이후, 2016년 5월 담당 검사를 직무유기 혐의로 대검찰청에 고소했다. 재심청구를 상당한 이유 없이 회피하고 있는 데 대한 항의였다. 1인 시위에도 나섰다. “검찰은 사법살인을 당한 이모부 이수근에 대한 재심청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를 회피하고 있습니다. 이에 담당 검사를 검찰에 고소하고, 저는 그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고자 1인 시위에 나섰습니다.” 2016년 6월4일부터 대검찰청 앞을 시작으로 서울 시청 앞, 국회 앞에서 그는 1인 시위를 벌여 나갔다.
2017년 9월29일, 드디어 검찰은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하였다’는 발표를 한다. 대검 관계자는 “그동안은 직권 재심청구를 하지 않아왔지만 지난 8월 문무일 검찰총장이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면서 검찰도 직권 재심청구를 검토하게 됐다”며 “이미 공범들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는데도 유족이 없어 재심 청구를 못한 이수근 씨 등의 경우 형평성 차원에서 검찰이 재심을 청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8년 자신에 대한 재심판결 이후 거의 10년간의 법적 투쟁 끝에 이루어낸 主犯 이수근에 대한 재심 판결은 1년이 지나 2018년 10월11일 결정이 내려졌다.
이수근이 위장 귀순한 간첩이며 북한의 지령을 받고 북한으로 탈출할 계획이었다는 49년 전의 판단은 이날 판결로 모두 부정되었다. 마치 간첩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이수근’이 반세기만에 명예를 회복하는 순간이다.
2008년 자신에 대한 재심 판결 무죄선고 당시 눈물을 흘리며 “기뻐야 하는데 허무하다”라고 했던 裵慶玉 씨는 이날엔 오히려 담담했다. 여기 오기까지의 시간이 고되었을 뿐 ‘무죄’ 판결은 당연하게 예상했다는 반응이다. 배 씨는 “이젠 억울함, 분노 같은 감정도 지나온 것 같습니다. 그저 운명으로 받아들입니다. 제 운명인거죠...”라며 옅은 미소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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