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6일(금)
* 시작 기도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
주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아들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육으로 주님을 알지 않고 영으로 아는 자 곧 나를 위하여 살지 않고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옵소서(5:15).
이렇게 사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임을 믿습니다(5:17).
하오나 육신으로 이 땅에 있는 한 언제나 넘어지고 자빠지는 연약한 질그릇이오니 그런 나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의지하여 살게 하소서.
넘어질지라도 아들을 힘입어 일어나 담대하게 아버지 품으로 나아가는 자 되기를 원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새 날을 주신 주님과 연합하여 동행하는 하루가 되게 하시고 정욕에 이끌려 다니는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마 20:29-34
제목 : 주여(퀴리에), 다윗의 자손이여...
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3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 나의 묵상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맹인을 고쳐주신 사건을 여러 차례 나온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두 명의 맹인을 고쳐주신 사건이 두 차례 나온다.
9:27-31절까지와 오늘 본문인 20:29-34절이 그러하다.
그런데 이들 맹인들은 두 곳 전부 다 예수님을 ‘주여’, ‘다윗의 자손’으로 부른다.
하지만 누가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는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나올 뿐이다.
마태복음에서 두 맹인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마태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기록하였기 때문에 증언을 확증하는 차원에서 두 맹인을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신 19:15)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이를 통하여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더 분명하게 확증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두 맹인이 함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친 것은 메시야 선언을 공적인 증언으로 보여주는 효과가 크다 하겠다.
이뿐 아니라 마태는 종종 두 사람을 등장시킨다.
마 8:28절에서도 가다라 지방의 귀신들린 두 사람이 나온다.
그런데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한 사람만 등장한다.
이처럼 마태는 두 사람을 등장시켜서 유대인들에게 율법에 나오는 증인의 차원으로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오늘 본문 20장에 나오는 두 맹인은 단순히 눈이 먼 사람이 아니라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문은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두 맹인은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 가운데 섞여 있었다.
이들이 아무리 소리를 크게 질러도 무리들의 소리에 묻혀서 예수님께 들릴 리가 만무했다.
하여 이들은 그 소리를 더욱 크게 외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소리에 옆에 있던 무리들(제자들을 포함한 일반 유대인들)은 두 맹인이 내지르는 소리를 꾸짖으면서 제지한 것이다.
이 때 두 맹인은 오히려 소리를 더 크게 하여 이렇게 외쳤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예수님은 바로 이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무리 곧 군중이었다.
이들은 사실 예수님을 몰랐다.
나아가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려 세 번에 걸쳐 십자가와 고난당하심 그리고 죽임당하실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수제자라 하는 베드로는 그 예수님을 향하여 크게 꾸짖기까지 한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이 이 땅에서 로마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면 한 자리씩 차지할 생각에만 빠져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일반 유대인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오늘 본문의 두 맹인은 예수님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 것이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육신의 눈이 먼 두 맹인이 진리를 먼저 본 것이다.
요 9장에도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나온다.
그를 예수님께서 실로암 못에서 고쳐주신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을 뜨게 했다는 이유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걸고넘어진다.
이 일로 바리새인들은 눈을 뜨게 된 맹인이었던 사람을 계속 괴롭힌다.
그 후에 예수님과 눈을 뜬 사람이 다시 만난다.
예수님은 그 맹인 되었던 사람에게 네가 인자를 믿느냐, 하고 물으신다.
이 사람이 대답하기를 “주여, 내가 믿나이다.”
이 때 예수님께서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신다.
나는 심판을 하러 이 세상에 왔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다.”
이 때 예수님과 함께 있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도 맹인인가?”
이 말을 들으신 주님은,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
이를 보면 육신의 맹인이었던 사람은 눈을 떠서 보게 되었다.
하지만 육의 눈으로는 보지만 영적인 눈이 가려진 자들 곧 바리새인들은 영적인 맹인이 되어 여전히 죄 가운데 빠져 사는 자들임을 천명하신 것이다.
이는 오늘 본문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해 주신 것이다.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은 군중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영적으로 눈이 먼 맹인 군중이다.
하지만 단 두 사람 곧 육신의 눈이 먼 사람은 예수님을 큐리오스 곧 주님이라 불렀다.
나아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오신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야라 부른 것이다.
그것이 진짜 눈을 뜬 자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나는 과연 어디에 속하는가?
육신의 눈이 먼 맹인인가, 아니면 육신의 눈은 떴지만 영적으로 전혀 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인가?
나는 이 복음을 알기 전에는 분명 영적 맹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알지 못한 채 성경지식만 달달 외우면서 살던 자였음을 고백한다.
이런 내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
육신의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큐리오스 곧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그것도 다윗의 자손으로 불렀다.
그런데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그 유명한 신앙고백을 할 때 이렇게 말한다.
물론 우리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다.
(마 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여기서 말한 ‘주’는 헬라어 ‘큐리오스’가 아니라 ‘당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이다.
그 이후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 그리고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대들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막아섰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고 일갈하셨다.
그 말씀을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베드로 안에 내가 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좌우에 앉아서 한 자리씩 달라고 했던 야고보와 요한이 바로 나의 모습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진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다름 아니라 자기부인의 열매다.
로마를 무찌르고 왕의 자리에 앉으려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그것이 아니다.
내가 죽는 것 곧 자기부인이다.
그 열매를 맺어야 진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그저 눈에 보이는 숫자의 열매, 돈 액수의 열매, 물질의 풍부함의 열매만을 열매로 보았고 알아왔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복음이 나의 생각을 바꿔줬다.
사람의 일에서 하나님의 일로 말이다.
오늘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동행하기를 소망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에만 빠져 있던 자가 바로 나였습니다.
그 사람의 일에는 음란 정욕 방탕 무법한 우상숭배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이러한 일은 모두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이며 지나간 때로 족하다고 말합니다(벧전 4:3).
이제 이런 일은 지나간 때로 족함을 알아 주의 복음으로 나를 덮어 주옵소서.
나는 주님 안에서 복음을 받고 새 생명을 얻었다고 자부합니다.
그럼에도 내 안에는 내가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의 일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여전히 고통하며 힘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두 맹인이 고백했던 것처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주님께서 성령 안에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와 긍휼이오니 나를 품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