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구룡폭포 미륵불
중앙일보 [고은의 북한탐험] 1999.01.28. 24.
구룡폭포 '미륵불' 사연
금강산은 법기보살의 연토 (緣土)가 돼 자연스레 화엄사상의 한 본거지가 됐는데 내금강 표훈사도 화엄종 종주 (宗主) 의상 (義湘) 의 수제자 표훈 (表訓) 이 창건한 것이다.
한편으로 신라 미륵상생 (彌勒上生) 의 신앙에 열중하던 화랑들이 금강산에 들어와 미륵의 현신을 도모했다.
그것이 근세로까지 이어진 것은 아니나 신계사 미륵암은 유점사 53불 신앙과 함께 이웃해서 미륵신앙의 중심이 됐다.
임석두 (林石頭.1882~1954) 는 함북명천 태생으로 한학을 익힌 뒤 무관이 돼 나라를 구하겠다는 포부를 품었는데 석왕사에 입산, 금강산 20년의 인연을 보낸다.
은사 백하 (白荷)가 꿈에 용을 본 뒤 들어온 제자여서 이름이 용음보택 (龍吟寶澤) 이었다.
그러다가 마음 짓기를 돌머리에 의탁하라는 선구 (禪句) 를 보고 석두라고 자칭했다.
그가 이효봉 (李曉峰) 의 은사이고 나에게는 할아버지 은사가 된다.
한말 (韓末) 일세를 떨치던 선객인데 가야산의 권세승 이회광 (李晦光) 을 질타한 선기 (禪機) 는 유명하다.
그는 금강산의 대부분을 미륵 3부경을 날마다 암송하는 미륵신앙으로 장차 올 용화세계의 정치적 희망을 뿜어댔다.
바로 그가 구룡폭포 암벽에 새긴 미륵불 세 글자의 주인공이다.
나는 이 사실을 정작 금강산에서 돌아온 뒤 내 사숙 (師叔) 임석정 (林石鼎) 화상으로부터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석두는 서울의 해강 (海崗) 김규진 (金圭鎭)에게 갔다.
청한 글씨는 미륵불 석자와 그의 이름 석자, 그리고 낙관인데 미륵불 석자만의 값이 그 당시에도 3백원이라는 높은 값이었다.
그는 그 돈만 주며 이름과 낙관 값은 내지 않았다.
"미륵불 석자만 사겠소. 그러니 이름 값은 내지 못하겠소. " 해강은 무릎을 치며 "내가 스님한테 넘어갔소. 천하 명산에 이름 석자를 남기는 게 소원인데…" 라고 한숨을 터뜨렸다.
석두는 회명 (悔明) 이라는 동료의 도움을 받아 구룡폭 벼랑에 비계를 설치해 석공으로 하여금 바위를 쪼아갔다.
그런데 그 해 여름 큰 가뭄이 들었다.
그러자 외금강 일대 장전.고성의 사람들이 구룡폭포 바위를 건드려서 비가 오지 않는다고 외쳐대며 암각 회향식 사흘을 앞두고 달려와 그 일을 중지시켰다.
그 때 석두가 나서서 엉겁결에 소리쳐 그 사람들을 겨우 돌아가게 한 것이다.
"내일이면 틀림없이 비가 오시리이다. 그러니 안심하고 돌아가시오. " 다행히 그들이 반신반의로 돌아간 그날 밤 그렇게도 올 생각이 없던 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석두도 자신의 말이 맞아떨어진 것에 놀랐다.
빗물로 구룡폭포 물도 크게 불어났다.
그래서 그곳 공사장의 돌 파편들이 물에 씻겨 떠내려 갔으니 구룡연 일대가 청소되어 공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미륵불 세 대자 (大字) 회향식에 항의하던 사람들이 떡과 국수를 해와서 함께 축하하는 성황을 이루게 됐다.
1919년 여름이었으니 3.1운동 직후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철칼에 쓰러지는 시대였다.
그런 시기에 미륵불의 도래를 절실히 염원하던 선승 석두의 비원 (悲願) 이 있어 구룡폭포와 구룡연은 미래의 나라를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세 글자는 높이 19m, 너비 3.6m로 한반도 암각글씨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더구나 끝 불 (佛) 자의 긴 획 길이는 무려 13m나 되는데 그것은 공교롭게 구룡연의 깊이와 같았다.
글자 새겨진 깊이도 어지간해서 한 사람의 몸이 들어갈 만했다.
당연히 정선의 '구룡폭포' 나 김홍도의 '구룡연도' , 그리고 김하종의 '구룡연도' 에는 이 세 글자 '미륵불' 의 위용은 보이지 않는 맨 벼랑이다.
구룡폭포를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우러러 보았는데 그때 내 수술한 인조 고막에도 불구하고 폭포를 보는 시각보다 땅이 뒤흔들리는 폭포소리의 청각을 더 기운차게 했다.
한 순간 나는 폭포의 포말에 들씌워져 소경이 됐고 오로지 그 폭포소리를 무덤으로 삼고 있었다.
대상과 주체의 일치였던가.
아무튼 구룡연 '미륵불' 세 글자를 새긴 석두는 신계사 건너편 보운암 위쪽 상원암 (上院庵) 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동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세존봉 중턱이었다.
그 상원암의 넓적한 벼랑에 미륵불상을 새겨 넣어 내일의 용화세계를 다시 한번 발원했다.
그래서 구룡연 미륵불 공사와 상원암 미륵불상 공사 뒤에 남은 돈 30원을 전국의 몇 선방에 고루 부쳐주고 나서 빈 손이 되었다.
비로봉에 올라갔다.
'비로봉에서 비로봉 올라/동해에서 동해를 본다/비로와 동해 둘 다 빚은 곳/거기 일만이천봉이라' . 이것이 석두의 비로봉 오도송 (悟道頌) 이었다.
그는 비로봉에서 내려오자 바로 북간도 용정에서 온 처사 김현을 만난다.
금강산 도인 석두라는 이름을 듣고 금강산까지 찾아온 사람이었다.
독립군 전사자 미망인들을 돌보며 그들과 함께 작은 재가 (在家)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데 석두의 설법을 듣고 아예 금강산으로 옮겨오기에 이른다.
그래서 온정리 온정천 다리 건너 숲속에 당시로는 희귀한 2층 양옥 여여원 (如如院) 을 지어 그곳을 수행처로 삼았다.
뒷날 석두가 금강산 인연을 마치고 떠나자 그의 제자 효봉이 보운암. 법기암 토굴시대에 이어 여여원의 선객이 됐다가 설악.오대.두타산을 거쳐 남도의 조계산 송광사의 조실에 이르는 것이다.
1950년대 중반 석두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나는 효봉에게 가서 그의 제자가 된다.
그래서 석두의 제일 (祭日)에만 나는 손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 석두 권속들이 머물던 통영 미륵도 역시 옛 미륵신앙의 터전이어서 그 미륵 인연은 기이한 것이었다.
나는 상원암 암벽의 미륵불상까지 애써 찾아갈 처지가 아니었다.
구룡연을 떠나기 싫지만 차츰 비구름이 채워지고 있었다.
"그만 갑시다" 라는 후천 (後川.유홍준 교수의 호) 의 말이 있고 나서야 나는 제 정신으로 돌아와 한번 더 미륵불 세 글자에 눈을 주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조선 말기에 태어나 65세를 살다간 해강의 예서는 마음을 모아 쓴 것임에 틀림없다.
석두의 청탁이 있은 지 1년이 넘어서야 썼던 것이다.
해강의 금강산 글자는 천선대에도 있고 내금강 만폭동에도 있다.
천하기절법기보살 (天下奇絶法起菩薩) 이 그것이다.
나는 구룡동과 옥류동을 어떻게 올라갔는지 모르고 어떻게 내려왔는지 모른다.
안내원 엄영실양은 "지난번 정주영 회장 일행이 옥류동 입구 옥란관까지 왔다가 비 때문에 돌아갔다" 고 말했다.
글 = 고은 (시인.경기대대학원 교수)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